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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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張闓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경서(敬緒). 서주 팽성국(彭城國) 출신. 동오의 보오장군 장소의 증손자. 본적은 서주지만 고향은 단양군(丹陽)이다.
2. 생애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요절했음에도 지조가 있어, 그 모습을 태상 설겸이 높이 평가하여 당시 건업을 진수하던 낭야왕 사마예에게 장개를 천거했다. 이에 낭야왕 사마예가 장개를 직접 만나 언변에 재능이 있고 우직함과 좋은 기량 갖춘 것을 확인한 뒤, 그를 자신의 참군으로 삼고 후히 예우해주었다. 이후 사마예가 좌승상에 임명되자 장개는 종사중랑으로 승진했으나, 오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하여 사직하고 상을 치렀다. 모친상이 끝나자마자 사마예는 그에게 돌아오라 강력히 권고했지만 장개는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들은 왕돈이 칼 들고 협박하니, 어쩔 수 없이 왕돈의 휘하로 들어가 업무를 보았다.건무 원년(317년) 3월,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오르고, 장개를 불러 급사황문시랑, 단양군대중정으로 삼았다. 이후 조정에서 사마예를 보좌한 공이 있다 하여, 단양현후(丹陽縣侯)에 봉해지고 시중으로 승진했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장안의 민황제 사마업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달받은 진왕 사마예가 드디어 진(晉)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장개는 진릉내사로 부임해 위엄과 은혜로 지역을 다스리니, 원제 사마예가 조서를 내려 치수에 신경쓰라 명령했다. 당시 진릉군 내 4개의 현이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장개는 곡아현(曲阿)의 신풍(新豐)에 제방을 쌓고 800여 경의 관개해, 매해 풍년이 이르게 했다. 하지만 신풍에 제방을 쌓으면서 독단적으로 211,420여 개의 사업을 남발한 죄로 탄핵 받아 면직되었다. 이후 조정에서 공경들이 모여 이 일을 의논할 때, 신하들이 장개를 위해 변호를 해주었고, 원제 또한 깨달은 바가 있어 장개의 면직 처분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장개를 대사농으로 삼으니, 장개는 처음에 사양했으나 조정에서 그의 사양을 불허하는 바람에 결국 대사농 직책을 맡았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원제가 승하하자 장개는 대장경(大匠卿)에 임명되어 건평릉(建平陵) 건축 업무를 맡았고, 완공된 후에는 상서로 승진했다.
함화 2년(327년) 2월,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 건강(建康)을 함락하고 황궁을 크게 약탈했다. 장개는 사도 왕도, 시중 저삽, 좌광록대부 육엽과 함께 어린 성황제 사마연의 주변을 호위하며 황제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확보했다. 어느정도 사태가 진정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소준은 장개를 지절로 삼아 건강성 동쪽의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소준을 따를 뜻이 없었던 장개는 왕도와 의군을 일으킬 방법을 모색하고, 3오(三吳) 지역에 의군을 일으키기 위해 유 태후의 밀서를 들고 동쪽으로 떠났다.
도간이 형주에서 의군을 일으키면서 장개를 가절,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에 임명해, 진위장군 도회와 단양 의군을 거느리게 했다. 장개는 부임지인 진릉(晉陵)으로 돌아가, 내사 유탐(劉耽)에게 1부의 곡식을 내놓으라 명하고, 오군(吳郡)으로 탁지를 보내 4부의 식량을 거두어 거기장군 치감에게 보급했다. 이후 오국내사 채모(蔡謨), 오흥내사 우담, 회계내사 왕서의 의군과 합류해 소준 토벌에 참전하였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반란이 모두 평정되고, 다시 상서로 돌아왔으며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 공을 인정받아 의양백(宜陽伯)으로 진봉되었다. 얼마 뒤에 정위로 옮겨졌지만, 병에 걸려 해직되고 금자광록대부에 임명받았다. 장개는 4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 장혼(張混)이 그의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