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6-03 19:18:02

일본도(검)

파일:noshuB21084517.jpg
사진은 노슈이아이도(濃州堂)사 진검 제품.
1. 개요2. 역사3. 역사상의 평가
3.1. 중국의 왜도3.2. 조선의 왜도3.3. 관련 기록과 평가
4. 전통적 제작 방식
4.1. 칼날의 제작과정4.2. 칼집, 손잡이 제작 과정4.3. 조립과 의장 그리고 수집
5. 생김새6. 착용법7. 작명8. 강도
8.1. 전통 일본도의 내구도
8.1.1. 과대평가의 원인8.1.2. 오해와 진실8.1.3. 결론
8.2. 현대식 일본도의 강도
9. 모조 일본도10. 창작물에서11. 일본도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12. 일본도의 종류
12.1. 형태 및 길이에 따른 구분12.2. 시대별 구분12.3. 작풍별 구분12.4. 와자모노
13. 유명한 일본도
13.1. 나무위키에 등록된 일본도 목록13.2. 가공의 일본도
14. 참고자료/외부 링크

1. 개요

(にっぽんとう)

타치(太刀)나 우치가타나(打刀) 등을 포함하는 일본의 전통 도검이다. 참고로 츠루기(剣)는 양날검을 특별히 일컫는 호칭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도(倭刀), 왜검(倭劍)으로 부르기도 했다.

일본도 장인을 토코(刀工, 도공)라고 하며, 카누치(鍛人), 카나치(鍛師), 카타나카지(刀鍛冶), 토쇼(刀匠), 카타나시(刀師) 등으로도 부른다.

당연하지만 일본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정 길이가 넘는 도검은 허가증이 있어야 소지할 수 있다.

2. 역사

파일:478px-Samurai_with_sword.jpg

일본도를 휘두르는 사무라이의 모습

파일:Nakayama_Hakudo.jpg

일본도를 들고 있는 모습[1]

최초의 일본도는 장교용, 병사용 가릴 것 없이 모두 한 손으로 사용하는 직도였으며, 날 길이도 70cm가 채 못 되었다. 쇼토쿠 태자의 칠성검이나 일반 병사용으로 사용된 흑작대도(黑作大刀) 등이 이 시대의 군용 도검이다.

일본도의 유래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수-당 시기에 들어온 원두대도-방두대도 혹은 당태도(唐太刀)-당대도(唐大刀)가 시초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이후 변화된 형태 중에는 게누키가타타치(毛拔形太刀)라는 것이 있는데, 휘어진 칼날과 둥근 칼코등이[2] 등 현재의 일본도와 유사하나, 장식은 기존 당대도(唐大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게누키(털뽑기)라는 이름은 이 손잡이 중앙에 파여진 구멍이 당시의 털뽑는 기구와 비슷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런 타치(大刀)의 발전 과정 중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여겨져, 이를 와라비테타치와 연관지으려는 시각도 있으나, 이미 더 이전 대도 단계부터 손잡이가 조금씩 뒤로 꺾인 것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환경에 맞게 서서히 형태가 변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해체되며 병역도 지방 관아의 자제로 구성한 건아(健兒)제도로 바뀌는 등 군사제도가 소수정예로 바뀌자, 도검 역시 말탄 무사들이 사용하기 좋은 휘어진 모습으로 정착하였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길이가 18-23 cm인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칼날이 80 cm 이상으로 긴 마상용 도검이 주를 이뤘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가 되면 산과 들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지물을 이용하는 습격과 매복이 잦아졌기 때문에 기존의 기마궁시 전법은 입지가 줄어든다. 몽골과의 전쟁이나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부 수립에 관여한 악당(惡黨)의 전법 등 과거에 비해 도보 지상전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 고다이고 신정부가 붕괴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여 남북조 시대에 60여 년간 내전을 벌이는 동안, 도보전이 확대되고 갑옷도 도보전에 알맞게 도오마루(胴丸), 하라마키(腹卷)로 대세가 변하였다. 또 팔이나 다리 부분을 더욱 철저히 방어하였기 때문에 실전용 타치는 자루에 끈을 감아 쥐기 좋고 땀을 흘려도 흡수되어 미끄럽지 않도록 하였다. 우리가 아는 일본도의 모습은 거의 이때 정립된다. 또 갑옷이 중장화하자 금쇄봉 같은 타격무기가 활용도가 늘어났고 나가마키, 노다치와 같은 커다란 도검들도 많이 쓰이는 등, 이 시기에는 일본도가 전체적으로 크고 무거워졌다.

견해에 따라서는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도를 이후의 전국시대보다 더 우월하게 보고, 일본도의 절정기를 무로마치 시대로 보기도 한다.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조총 등의 등장으로 일본도의 전술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질적으로도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무로마치 말기에 들어 오닌의 난과 같은 내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기마무사 소모는 많아지는데 비해 기존의 기마무사의 공급은 점차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말없이 걸어다니는 하급무사, 뒤이어 아시가루들이 전쟁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이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카타나라는 일본도로써 주요 특징은 타치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의 도검으로써 패용 장치가 없이 허리춤에 끼우고 다녔고 칼날도 2척 1촌(63 cm) 정도로 짧으며 한 손으로 쓰기 적당한 칼이었다. 정확한 것은 우치가타나 문서 참조. 이러한 카타나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건설하여 천하인임을 표명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보전이 일반화된 전쟁 환경을 감안하여 기존의 타치를 대체하여 사용되게 되고 전체적인 스펙도 타치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이 즈음에는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장식을 통일해서 한 세트로 차고 다니는 것도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다이쇼 코시라에, 또는 니혼자시로 부른다. 또 기존의 타치를 패용 장치를 제거하고 카타나의 쿠리카타를 붙여서 허리에 끼워서 차고 다니는 한다치(半太刀) 양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식성에서 워낙 우월했기 때문에 카타나라도 한다치의 양식을 모방해서 만들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지나치게 긴 칼을 금지하고 날 길이의 기준을 정했다. 일단 하바키를 제외한 날 길이 기준으로 1척(30.3 cm) 이하는 단도, 1척 이상~2척 미만은 와키자시, 2척 이상은 카타나로 규정했다. 또 카타나의 날 길이는 2척 3촌(약 69cm)를 넘기지 않도록 규정했다.[3] 그래서 기존의 타치를 갈아내서 날 길이를 맞춰 패용하고 다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신분의 상징으로 무사가 항시 패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실전이 없어지고 일본도에 대한 관념이 의식화되고 장식적인 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일본도의 여러 부품에 화려한 투각이나 문양이 새겨지거나 다양한 디자인들이 선보이게 된다. 현대 일본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카타나에 실전용 외장과 보관용 시라사야를 따로 만든다거나 정비할 때 도침(칼베개)를 이용해서 뉘어놓는 등의 문화가 죄다 이 에도시대에 정립된 것이다. 물론 히고나 사츠마 코시라에처럼 실전적이고 투박한 것도 있었지만 대세는 보다 가볍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었다.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러 쿠로후네 사건과 같은 서양 세력의 침공과 교전이 자주 벌어지면서 막부측은 강무소(講武所) 등을 세워 신식 전술을 교육시키는데 서양인들이 총기에 의지하여 백병전에 무지할 거라 생각하고는 창술이나 검술을 정립해서 가르쳤다. 또 이때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서 당시 횡행하던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하던 이른바 유신지사들이 테러나 암살을 반복했으므로 이에 대항한 신센구미와 같은 조직들이 창설, 일본도로 시가지에서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이때에는 서양도검과 서양전술의 영향을 받아 그에 걸맞게 개량된 돗페이(突兵)코시라에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유럽식의 행어 패용 방식을 따라 서양식으로 패용하기도 했다. 칼자루가 뒤로 가게 하거나 등에 지고 다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무진전쟁 때에는 주로 총포를 이용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간혹 도검을 이용해 돌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검 사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4~5 kg에 달하는 당시의 소총으로 총검술을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상당한 부담을 느껴서라고 한다. 서남전쟁에서는 화력이 딸리고 총탄이 부족한 사츠마 군대의 무사들이 일본도를 이용해 발도 돌격을 수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평민 장정으로 구성된 당시 일본 정부군이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결국 정부군 측에서도 무사들로 구성된 경찰 발도대를 투입해 칼에는 칼로 맞서게 되었다. 서남전쟁은 구시대의 산물로 무시된 일본도가 다시 실전력을 증명한 전쟁으로써 이후 일본은 검도를 제정하고 실전군도를 제정하는 등 백병전을 다시 고려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에는 16식 해군장교도, 19식 육군장교도(둘 다 세이버)의 양식을 유지한 채로 일본도 칼날을 끼우고 양손으로 쥐는 손잡이를 장착한 양손세이버가 실전군도로써 사용되었다. 1934년에는 초국가주의 열풍으로 일본도 타치 양식을 갖춘 신군도가 등장한다. 1945년 종전 이후 일본도들은 죄다 회수되어 폐기될 위기에 처했으나 전통 공예품이란 측면을 강조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일본은 날 길이가 15 cm 이상인 날붙이를 무기로 규정하고 소지를 금하지만, 일본도는 전통공예품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소지와 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해방전은 물론 해방 후에도 상당히 자주 사용한 듯하다. 참조 해방후 테러, 강도질은 물론 국군이나 빨치산까지 폭넓게 사용하였다.

3. 역사상의 평가

일본도에 대한 평가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1세기의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물물교환을 통해 도검을 수입한 기록이 발견된다. 이후 중국 해안지역에의 연이은 왜구 약탈이나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난전에서 일본도의 유용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징비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서도 일본도의 유용함을 논하는 대목은 빠지지 않는다.

무기가 결국 사용자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약 백여 년 간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인들이 비교적 평화로웠던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단병접전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한들 당대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주요한 인물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도를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였음은 사실이다.[4][5]

일본도가 제대로 무장을 갖춘 병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 갑주 전투에 특화된 폴암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기가 갑옷을 상대로 별 효용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6] 일본도만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3.1. 중국의 왜도

곤이(昆夷)로 가는 길은 멀어서 다시는 통할 수 없으니,
옥도 절단한다는 그 칼을 누가 찾을 수 있으리?
근래에 보검이 일본국에서 나와,
월(越) 상인이 창해 동쪽에서 그것을 얻었다.
물고기 껍질을 장식해 붙인 향나무 칼집,
노란빛과 흰빛이 섞인 놋쇠와 구리.
백금에 호사가의 손으로 넘어오니
허리에 차면 요괴를 물리칠 수 있단다.
듣기에 그 나라는 큰 섬에 있고,
토양이 비옥하고 풍속이 좋다고 한다.
그 선조인 서복이 진나라 백성을 속여,
약을 캐러 갔다가 동남동녀 그 곳에서 늙어갔다.
온갖 장인과 오곡을 그들에게 주어 살게 하니,
지금에 이르도록 공예품 모두 정교하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일본도가(日本刀歌)

송나라 시절에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타치(太刀)가 수입되긴 했지만 이때는 실전(군사용) 무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외국 칼, 수집품 취급을 받았다. 일본도가 실전 무기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왜구가 준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명나라는 이른바 해금정책으로 대외무역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이에 저항하여 용병을 고용하고 밀무역을 하면서 사실상의 해적 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많은 중국인, 일본인 용병들이 한 몫을 잡기 위해 뛰어들면서 명나라 해안에 대한 노략질이 심해졌다. 특히 저장 성 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때 절강성에 부임한 군사령관 척계광은 낭선, 등패를 비롯한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왜구의 주특기인 일본도 검술과 돌격을 저지하는 원앙진을 고안하고 기동력 있는 경량 화포(호준포 등)을 채용하고 화승총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도의 절삭력, 긴 길이에서 나오는 사거리를 보고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쌍수도라는, 화승총병이 백병전시 사용할 무기를 만들었다. 또 일본 검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투항 왜구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시에 1561년에는 일본에서 카게류(陰流) 검술[7]도 수입하여 기술 목록[8]까지 입수했는데, 신유년에 입수했다 하여 신유도법(辛西刀法)이라고도 부른다. 이후로 명나라에서도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 연구가 이루어져서 왜도로 창을 이기는 방법을 담은 정종유(程宗猷)의 단도법선(單刀法選)이 출판되었으며 1621년 모원외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2천여 종의 병법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병법서 《무비지》에도 '일본음류도법' 과 '왜구도법' 이 기록되었다.

처음에는 일본도 양식을 그대로 베껴서 생산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명 황제가 하사한 명조팔사품 중에 대도의 쓰바(鍔)는 일본의 기쿠 양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 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 식으로, 중국 양식의 물건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일본도들을 중국에서는 '왜도(倭刀)’[9]라고 불렀으며 청나라 말엽까지 제식병기로도 사용되었다. 화북에서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도검이라는 의미로 쌍수대(雙手帶)[10]라고도 불렀는데 박도(朴刀)와 같이 다른 양식의 양손도검도 똑같이 쌍수대라 칭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승리한 후금은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명나라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조선인 포로 수천 명을 해방하는 조건으로 왜도 500자루를 요구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중원에 입성한 이후에도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에 특별히 일본도를 구해다 바치라 명령한 일이 있었고 조공 물품 중 환도를 일본도로 바꾸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 ##

민국 시대에 들어서면 묘도(苗刀)[11]라 불리는 양손으로 잡는 장도(長刀)가 나타나는데 이전의 왜도 양식과는 대동소이하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왜'라는 명칭이 꺼려지게 되자 칼날이 풀의 새싹처럼 가늘고 예리하다는 뜻으로 묘도라 불리게 된 듯 하다. 중국 무술 중에 묘도를 사용하는 무술도 있긴 한데 묘도조차 현대 우슈에서 사용하는 무기들처럼 지나치게 경량화 시켜 잘 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묘도가 최소 130cm가 넘어가는 장도이기에 본래의 방식으로 만들 경우 2kg이 넘어가 우슈 검술처럼 막 휘두르지 못해 구사 가능한 동작이 제한되기에 이런식의 경량화를 시키는 것인데 당연히 다른 우슈 무기술과 마찬가지로 실전성은 무척 떨어진 체조 동작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무게를 제대로 만든 묘도를 사용할 경우에는 상당히 위력적인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중국 배경인 무협소설에서도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중국 배경의 무협물에서는 는 두껍고 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검처럼 가느다란 도로 찌르기에도 큰 문제가 없어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가진 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3.2. 조선의 왜도

조선에서는 왜검(倭劍)이나 왜도(倭刀)라고 불렀다. [12]

일본도에 대한 평가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1세기의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물물교환을 통해 도검을 수입한 기록이 발견된다. 다만 고려~여말선초 당시 기록에는 왜구들은 창과 칼을 이용한 단병접전에 능하다는 기록을 제외하고는 딱히 칼의 성능에 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당시까지만 해도 칼밥 먹고 사는 왜구들이 백병전을 잘한다는 인식은 있었지만[13] 딱히 칼의 성능이 차이가 있었다는 기록도 그리고 고려가 백병전을 못했다는 기록도 없다.[14]

세종대까지만 해도 일본도는 단지 이국의 특이한 수입품 정도의 위치였으나[15] 조선 중기로 들어서면서 점점 인식이 바뀌게 된다. 오랜 기간 소규모 여진족, 왜구와의 전투 정도를 제외하고 전투를 겪지 않던 조선군은 여진족을 상대하기 좋고 편하다며 칼의 평균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병사들이 창검술 익히기를 소홀히 하게 됐으며 군기시의 병기 관리 역시 소홀해지기 시작했고 일본도의 평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16]

그러다 왜란을 통해 오랜 태평으로 이한 군기 문란과 더해 창검술을 거의 익히지 않았던 것과 평시 병기 관리가 소홀했다는 점, 환도의 길이가 소형화 됬다는 점, 그리고 전국 시대로 역량과 사기가 상당한 수준에 있는 일본 병사들, 대형화된 일본도의 차이로 인해 백병전에서 크게 밀리게 됬고 백병전에서 주로 쓰이는 칼, 정확히는 일본도와 그 검술의 평가가 크게 올랐다.

예를 들어 문종 1년 실록[17]을 보면 마병이 쓰는 환도를 길이를 1척 6촌, 보병이 쓰는 환도는 1척 7촌 3푼의 길이로 한다고 정하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라면 세종 12년 개정된 영조척(1척 = 31.220cm)을 사용할테니 이로 환산해 볼 경우 기병용의 환도의 날 길이는 약 50cm, 보병용은 54cm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조척은 건물 등에 통용된 척도로 일반적인 길이를 재던 것은 영조척보다 더 작은 주척으로 세종 26년에 개정된 주척(20.795cm)를 사용했다.해당 주척으로 환산하게 되면 기병용 환도는 33cm, 보병용 환도는 36cm이다. 실제로 동래성 출토 유물을 보면 분명히 군사들이 쓰는 환도임에도 전투에 적합한 길이부터 겨우 식칼 정도의 길이까지 다양한 길이가 출토됐고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병사들의 칼이 대체로 짧았다고 한다. 이 시기(서기 1451년)은 일본의 경우 무로마치 시대 전기에 해당하며 이 당시는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내전이 극에 달했던 직후였던 만큼 일본도 역시 흔히 현대인이 알고 있는 날 길이 70cm 남짓의 우치가타나가 아니라 3척(90cm) 이상의 장검인 노다치, 또는 80cm 이상의 타치와 같은 형식의 도검이 사용되었기에 그 차이는 더더욱 컸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도의 고평가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다만 조선 후기의 무예도보통지에는 일본, 중국 검술과 함게 조선 검술인 본국검, 예도 등을 실었는데 여기에 뛰어난 칼춤[18] 실력으로 백제 왕을 암살했다는 황창랑의 일화를 언급하며 신라 검술이 가까운 일본 검술에게 반드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하기도 했다. 이는 비슷한 무기를 쓰는 특성상 당연히 있을 기술적 유사성 때문도 있겠지만 직접 비교해본 한국 검술과 일본 검술이 큰 차이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19] 사실 이것이 객관적으로는 당연한 평가인데 현대 검술 연구가들은 일본의 검술 "문화"가 무척 발전했다고는 해도 일본 검술이 타 검술보다 기술적으로 더 우월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검술, 특히 양손 검술은 각 검술의 스타일 차이는 있어도 기본적인 기술 자체는 다들 비슷하기 때문이며 이는 기록되어 있는 조선 검술인 본국검, 예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윗 문단에서 설명한 당시 조선군의 참담한 백병전 능력과 대비된 일본도와 검술의 고평가가 그대로 사회적 상식 같은 것이 되어 그 명성이 후대로도 이어졌던 것이다. 일본도의 성능 역시 기본적으로 환도보다 높게 평가받지만 조선 청도 지역 대장장이들은 일본에서도 신검이라고 부를 정도의 명검을 만든다는 등 상당히 언벨러스한 평가가 양립한다. 제법 상 큰 차이가 없는 일본도를 뛰어넘는 신검 운운을 봤을때 왜란 이후 기본적으로 일본도가 고평가되는 조선에서도 대장장이 따라서 일본도 이상의 환도를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것이 반영된 전설 기록 정도로 생각된다.[20]

어쨌듯든 이렇게 일본도와 검술은 조선 후기에 고평가 되었고 군기시에서도 종종 수입하기도 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도 조선, 중국 검술과 함게 일본 검술이 실려있다. 왜검에 대한 관심은 중국 역시 마찬가지여서 사신들에게 진상품으로 노획한 왜검을 끼워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사신들도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인조 27년에는 청 조정에서 왜검을 구입해 보내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왜인의 병기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보내지 못했다는 기사가 있다.

요약하면 여말선초까지는 기본적으로 칼밥 먹고 사는 왜구들이 단병에 능하다고는 해도 고려군 역시 필요하면 평범하게 칼 들고 백병전을 하는 등 양국 검의 성능과 검술 사이에 특별한 차이는 없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면서 오랜 태평으로 인한 군기 문란, 검의 소형화 등으로 전국 시대 일본에게 백병전에서 크게 밀리며 일본도와 검술이 고평가됬고 이 평가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하단에 나올 실록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일본도에 대한 고평가는 조선 중기 이후로만 국한된것이 아니었다. 당장 일본의 왜검 제법을 배워온 공인에게 상을 내리자는 기사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국방력이 강했던 세종 시대의 기사로 등장하며, 이후 성종때도 여러차례 등장한다.

3.3. 관련 기록과 평가

  • 왜검에 대한 기록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1430년 6월 1일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성종실록』 1482년 9월 24일 왜인 두로가문(豆老可文)에게 관직을 주고 기술을 전습받자는내용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21]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성종실록』 1487년 5월 15일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 1596년(병신)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분실)
난중일기 1596년 1월
왜경(倭京)에 머물렀다. 군기(軍器)로 소용되는 장검(長劍) 1백 자루를 샀다.
일본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병기(兵器)를 몰래 파는 것에 대한 금령이 있었다.
평조신(平調信)이 생시에 가강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조총과 환도(環刀) 등의 물품을 사고자 하니, 허락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 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 하겠는가?”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사는 병기는 조금도 금지함이 없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매매하였던 것이다.
『해사록』 1607년 6월 6일- 8일
상이 김상헌에게 이르기를, "호사(胡使)가 요구한 왜도(倭刀)는 두 자루를 주었을 뿐인데, 부족한 감이 없지 않은가?" 하니,
김상헌이 회계하기를, "별단(別單)으로 준 것은 비록 두 자루뿐이지만 무역한 수량은 거의 200자루에 이르니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부사가 이르기를, "어제 말씀드렸던 국왕께서 보배로 여기시는 왜도를 얻고 싶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 6월 12일
오랑캐는 호송관(護送官) 이홍망(李弘望)과 함께 상의하고 사로잡혀간 남녀 1만 2천여 명을 돌려보냈는데, 김진(金榗)ㆍ박유달(朴惟達) 등의 부부도 아울러 이 속에 끼어 있었다. 오랑캐 차사가 압송해 와서 왜도(倭刀) 5백 자루를 요구했다.
『속잡록』 1627년 3월 10일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연려실기술』 29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 섭정왕이 구하는 특별히 만들어야 할 장검을 일본에서 만들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지금 후한 값으로써 왜관에 머무르고 있는 왜인 장사꾼에게 몰래 도모한다면 이익을 탐하는 무리인 만큼 설혹 받아 가지고 가시 청국에서 보낸 견본처럼 똑같이 만들 것이나 정교하게 만들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
『비변사등록』 인조 25년(1647) 10월 9일
호조가 아뢰기를, "향장검(鄕長劍) 16병(柄)과 향단검(鄕短劍) 8병은 정축년(1637)의 예(例)대로 모두 왜도(倭刀)로 바꾸어 지급해 달라고 하기에 여러 칙사의 차비 당상 역관들로 하여금 거듭 설명하게 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칙이 곧바로 응판색리(應辦色吏)를 불러 말을 전하기를, ‘앞으로 예단의 환도는 모두 왜도를 쓰는 것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고 영원히 등록(謄錄)으로 남기십시오.’라고 하면서 몹시 급히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세로 볼 때 거절하기 어려울 듯하니, 왜도 가운데 보통의 품질로 가려서 바꾸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25년(1647) 10월 16일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청사(청나라사신)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검(倭劍)을 사서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소방(小邦)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왜인이 병기(兵器) 무역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 10년이 되도록 아직 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 말씀대로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인조실록』 1649년 1월 20일
"신들이 인사하고 나온 뒤에 정사(鄭使)가 이형장을 시켜 신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예전에 보낸 환도(環刀)의 견양은 일본에서 제조하기를 도모할 수 없다면 도로 사행 편에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에 사은하는 사행을 다시 보내되 그 견양대로 귀국에서 두 자루를 정밀하게 만들고 말을 잘 만들어 보내기를, 「그 견양을 지금까지 머물러 두었던 것은 반드시 어떻게든 왜국에 시도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어 부득이 본국에서 만들어 보냅니다. 하지만 품제(品制)가 좋지 못하여 매우 황공합니다.」라고 하십시오.’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일기』 인조 27년(1649) 1월 23일
倭國刀,背闊不及二分許,架於手指之上不復欹倒. 不知用何錘法,中國未得其傳.
왜국의 칼은 칼등 폭이 2푼(6mm)에 못 미치나, (칼등으로 세워서) 손가락 위에 올려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두드려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중국에는 그 방법이 전해지지 않는다.
『천공개물』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1년(1725) 9월 24일 전 만호 이태배의 상소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 읽는 자는 공허한 것만 따르고 명물(名物)에는 소략하며, 기계를 만드는 자는 견문(見聞)에만 빠지고 도수(度數)에는 어두워서 백예(百藝)가 폐이(廢弛)되어도 옛것을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비록 충지(忠智)하고 강력한 신하가 있을지라도 빈손을 들고 준마를 달려가본들 무슨 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
백공(百工)의 일은 대저 다 성인의 지혜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기계를 보면 옛것일수록 더욱 교묘합니다. 그리고 옛날의 명장(名將)들은 다 교묘한 생각이 있었으므로 사기(史記)에 일컫기를 ‘제갈양(諸葛亮)의 통수개(筩袖鎧)는 오석뢰(五石弩)로 쏘아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고, 도목(都穆)이 한(漢) 나라 창(槍)의 정교함을 평하여 ‘예나 이제나 한 가지 기계를 만들어도 일찍이 구차한 것이 없다.’고 감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방(地方)이 수천 리에 산과 바다의 이로움을 의지했으니 땅이 부족하지도 않으며, 왜인(倭人)들이 진주(晉州)의 철(鐵)을 사다가 달구어 보도(寶刀)를 만들고 가서(哥舒)의 2년생 나무를 북사(北使)가 얻으매 보배로 삼으니, 병기의 재료도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낙상지(駱尙志)가 말하기를, “한 사람으로 열 사람을 가르치며 열 사람으로 백 사람을 가르치면 수년 안에 정병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다.” 하였으니, 백성이 옛날의 백성과 다르지 않은데 진실로 백공(百工)을 감독하여 그 병기를 만들고, 좋은 스승을 모집하여 그 기예를 익히게 하고, 무릇 장수(將帥)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무기를 가진 무리들이 다 도(圖)를 보고 보(譜)를 참고하여 그 방술을 통하고 그 용법을 찾을 수 있게 되면, 전승(全勝)을 싸우기 전에 책정하고 큰 공을 무궁한 데에 드리울 수 있으며, 나라에는 정간(楨幹)의 인재가 풍부할 것이며 가정에는 간성(干城)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저 사자가 공(毬)을 희롱할 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온종일 쉬지 않습니다. 그 사자가 코끼리를 치고 토끼를 잡을 때에 미쳐 전력(專力)을 쓸 수 있는 것은 공놀이에서 얻어진 기술이며, 왜인(倭人)들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앞에다 짚베개(藁枕)를 만들어 놓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칼(木刀)을 쥐고 한만(閒漫)히 그 짚베개를 치면서 그 자세를 연습하는데 그들의 기예가 어찌 신묘하지 않겠습니까?
『청장관전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부진설(附進說)
일본 사람은 칼을 만드는데 칼날은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그 끝은 뾰족하게 하였다. 칼날이 무디면 다만 그 비스듬한 한쪽만 갈아도 칼날이 날카로워지는 까닭에 갈기가 쉽고 오래 쓸 수 있다.
그들은 칼을 제조할 때 강한 쇠와 유연한 쇠를 각각 붙여서 만들기 때문에 늘 날카롭고 잘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칼이란 칼날이 너무 얇으면 쉽게 닳고, 등이 너무 두꺼우면 무겁기만 하고 또 쇠만 많이 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칼은 그 두꺼움과 얇음을 꼭 알맞게 하고 또 칼날도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하였으니, 연구해 만든 것이 아주 묘하게 되었다.
『성호사설』 6권. 만물문(萬物門)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22]
『무예도보통지』 왜검
단도(单刀)란 왜노들이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그 용법은 좌우로 도약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의도를 숨기니 인력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장병기가 항상 짧은 칼에 패배하였다.
『단도법선』 단도설(单刀说)
쓸쓸한 등잔불에 굴원의 시를 외다가 / 寒燈誦咽靈均賦
크나큰 숫돌에 일본 칼을 갈아본다 / 大石磨翻日本刀
이 천지에 어찌 밭갈이나 낚시질하다 늙어버리랴 / 天地寧爲耕釣叟
영웅은 본래 개나 닭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오 / 英雄不願狗鷄曺
『청장관전서』 추야잡감(秋夜雜感)
구름을 찌르는 보검 기운 아스라이 보였는데 / 遙瞻寶氣上干雲
미장(尾張 오와리)에 이르니 듣던 바와 틀림없네 / 行到尾張愜素聞
일본의 예리한 검이 모두 여기서 나니 / 日本利兵皆出此
곤오검 만드는 신묘한 기술 월등히 빼어나네 / 昆吾妙技逈超群
『용주유고』 길전(吉田)
백 번 담금질은 천하일에게 맡겨 하고 / 付與百鍊天下一
비파의 나라에서 대상인(大商人)이 전해 오니 / 大賈傳自琵琶國
상아 끊고 무소뿔 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 斷象剸犀不足論
용광(龍光)이 하늘 찌르는 절벽을 깨고 나왔도다 / 龍光劈出磨天壁
『성호전집』 일본도가(日本刀歌)
  • 왜검술과 검을 이용한 전술에 대한 기록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칼을 가진 자는 천백이고 총을 가진 자는 수십 명이니, 이는 그들의 전술이 근전(近戰)에는 빠르고 원전(遠戰)에는 느립니다. 이런 까닭으로 육전(陸戰)은 좋아하나 수전(水戰)을 싫어합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오랑캐의 근성은 언행이 경박하고 거칠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해 있으므로,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제 생각에,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데, 우리 군사는 아직 정예롭게 훈련되어 있지 않은 무리이므로 일시에 놀라 무너져 그 능력으로 죽음을 무릅쓰며 항전할 수 있겠습니까?
난중일기 1593년 9월
"사고수계(沙古愁戒)·간내비운소(幹乃飛雲所)·간로수계(幹老愁戒)·조음묘우(照音妙牛)는 칼을 잘 써서 우리 나라 살수를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하였고, 고사로문(古沙老文)은 칼과 총을 주조하는 법을 안다 하는데 이들 왜인을 어찌하여 머물러 두고 전에 내린 전교에 의하여 배우고 익히게 하지 않는가?"
『선조실록』 1594년 8월 2일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지금 이판(吏判)이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아동을 뽑아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게 할 것을 전일에 전교했었다. 경상 감사가 있는 곳에 왜장(倭將)이라고 칭하는 투항 왜인이 있는데, 그 왜인의 능숙한 검술 솜씨는 졸왜(卒倭)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그 왜인을 속히 상경시켜서 직책을 부여하고 후하게 대우하여 그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선조실록』 1595년 1월 24일
왜노(倭奴)들은 전투시에 멀리 있으면 총을 쏘아 잘 맞히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뽑아 돌진하니 이 때문에 천하에 그 칼끝을 당할 자가 없었다. (중략) 그래서 척 장군이 왜를 방어함에 있어 총으로 총을 대적하고 검으로 검을 대적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우리의 검이 왜적의 장기(長技)를 대적하기에는 부족함을 걱정하여 반드시 낭선(筅)과 창(槍)으로 방패(牌)와 칼(刀)을 옹호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척 장군의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인 것이다. 그러나 왜검도 검이고 우리 검도 검이다.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검법의 묘를 다할 수 있게 한다면 번거롭게 낭선과 창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의 검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무예제보번역속집 발문
왜적은 실로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포저집』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과연 그럴까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속잡록』
병조가 아뢰기를,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사자(射者)·창자(槍者)·총자(銃者)·기자(騎者)가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浙江兵), 왜병 그리고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진(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조(宣祖)께서는 그런 점을 아셨기 때문에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 및 선전관들 모두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고 그 성적을 고과하여 상과 벌을 내렸으므로 그 당시의 연소한 무인들은 모두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군(諸軍)이 검법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칼을 차고 다니는 자도 적고, 각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월과(月課) 할 때에도 조총만 비치해 놓았을 뿐 창이나 칼은 폐지하고 만들지 않으니, 지극히 애석한 일입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병조가 진법과 군졸의 기예에 대해 아뢰다
박정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용검(用劍: 쌍수도)은 짧은 병기를 쓸 때에 요긴하게 쓰이는데, 근일에 내삼청(內三廳)의 금군과 제색군(諸色軍) 및 각 아문의 군관, 어영군에 대해 거듭 명하여 권면하니, 몇 달 내에 입격(入格)한 자가 자못 많았습니다. 도하(都下)가 이와 같으니 지방에서 틀림없이 풍문을 듣고 전하여 배우는 것이 저절로 나라의 습속이 될 것이니, 이보다 중요한 강병(强兵)의 방책은 없을 것입니다. ... 전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관하(管下)의 군관(軍官) 수백 명에게 용검을 훈련하고 교습하기를 먼저 청하였고, 북병사(北兵使), 공청 수사(公淸水使), 전라 감사, 경상 감사, 안동(安東), 수원(水原), 광주(廣州)가 모두 훈련하기를 자청하여 지금 교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승정원 일기』 인조 7년(1629) 3월 14일 용검 입격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하는 뜻으로 목필을 제급하겠다는 병조의 계
홍명구가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검술(劍術)은 -원문 빠짐- □술(□術)이 전투에 유리하기 때문에 척 장군(戚將軍)이 오히려 한 방면을 지속적으로 교화하는 방법으로 -원문 빠짐- 습속을 이루었는데 능히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겁 많은 자를 용감하게 변화시켜 마침내 천하의 정병(精兵)이 되어 왜구(倭寇)를 막았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길이가 짧은 병기로 접전(接戰)을 벌이는 기술을 익히지 못하여 그저 적이 보이면 달아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으니,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은 병사(兵事)에 자못 관심을 두어 증손전수도십칠책(增損戰守圖十七策)을 지어 올렸습니다. 유성룡은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오랫동안 절병(浙兵)의 진중(陣中)에 있으면서 박격전을 벌일 때 검술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검술을 긴요하게 사용하는 계책을 선조(宣祖)께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조께서 매우 옳게 여기시고 금위(禁衛)하는 장사(將士)들에게 모두 검술을 익히게 하고 자주 금중(禁中)에서 친림(親臨)하여 검술을 시험하고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여 혹은 작질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말〔馬〕을 사급하기도 함으로써 일세(一世)를 고무시켜 국속(國俗)을 절강(浙江)처럼 만들어 복수할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성룡이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게 배척을 당하여 그가 시행한 검술까지 모두 폐기되었으니, 여기에서도 세도(世道)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승정원 일기』 인조 7년(1629) 4월 14일 젊은 무사에게 귀천을 막론하고 검술을 익히게 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浙江)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당상들도 숙달시켰는데, 이는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병조가 군관들이 칼을 잘 쓰도록 과정을 정해 시험보는 방안을 세울 것을 아뢰다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수만 명이 되니, 모든 군사들이 보고는 겁을 냈으나, 이미 칼을 빼들고 접전해 와서 갑자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이 인솔하던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마병으로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보병들은 모두 3, 4척이나 되는 긴 칼을 가졌는데 날카롭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들과 충돌하여 싸울 적에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 그들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서애집』 벽제관 전투
중군(中軍)에서 백고초기(白高招旗)를 세우면 각 도수(刀手)는 모여서 대기하는데, 모두 갑옷을 입는다. 북 소리가 들리면 몸을 날려 왜도(倭刀)의 용법대로 머리를 낮추어 말의 다리를 베고, 몸을 일으켜 말의 머리를 베는 두 가지 도법(刀法) 뿐이다.
『무비지』 比長刀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
『효종실록』 1655년 6월 17일
“신이 경기 지역의 병력을 처음 정비할 때에 선봉(先鋒)을 만들 목적으로 고을마다 2백 근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뽑아 아병(牙兵)[23]이라고 부르면서 항상 보살펴 주었고, 또 지갑(紙甲)과 대검(大劍)을 만들어 돌격할 때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명을 받고 전장에 나가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1백여 명을 뽑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인조실록』 1630년 4월 26일 총융사 이서가 전쟁터에 나아가매 아병(牙兵) 중 1백여 명을 뽑아 데리고 갈 것을 아뢰다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을 제일로 친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차서 긴 것은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은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해유록』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재조번방지』
왜이(倭夷)는 보통 호접진(蝴蝶陣)을 치는데, 전투시에는 부채를 휘두르는 것으로 호령을 삼는다. 한 사람이 부채를 휘두르면 무리들 모두가 칼을 춤추며 일어나 공중으로 칼날을 번뜩이며 재빨리 휘두른다. 우리 병사들이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는 한 칼에 베여 버린다. ...
쌍도(雙刀)는 위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아래를 공격하기 때문에 막기가 어렵다.
표창과 단도는 자루를 드러내지 않고 갑작스럽게 던지는 까닭에 예측할 수 없다.
『주해도편』 왜국사략(倭国事略)
赫然曰, 劍術, 天下皆有之, 日本爲最, 我國獨無傳習之人, 心常慨然也。臣欲送一人於東萊, 使之傳習, 府使李瑞雨處, 以劍術可學與否, 觀勢相通之意, 言送矣, 今見其所答, 則以爲似有可傳之路云。臣管下, 有一可學之人, 下送此人, 學劍, 何如? 上曰, 送之, 好矣。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나라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중략) 신의 아랫사람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칼을 쓰는 묘리는 왜인들이 최고이다. 그러므로 일향수(日向守) 애주이향(愛洲移香)은 "꿈에 신(神)이 원숭이 모양으로 나타나 칼쓰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름을 음류(陰流)라고 한다." 하였다. 우리나라 군교(軍校)인 김체건이 일찍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 방법을 배워 와서 지금까지 유전하니, 이른바 왜도(倭刀)라는 검술이다.
『병학지남연의』
단도(单刀)란 왜노들이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그 용법은 좌우로 도약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의도를 숨기니 인력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장병기가 항상 짧은 칼에 패배하였다.
『단도법선』 단도설(单刀说)
이 열여덟가지 자세[24]를 꾸준히 익힌다면 비록 진짜 왜법과 겨루지는 못하더라도 중국의 검술은 모두 90리(三舍)는 물러날 것이다.
『수비록』 단도수법설
游山東韓晶宇中丞聘之教子與浙人劉雲峰同學倭刀,盡其技。故公言步戰惟長刀最勝, 當馬斃步鬥時,公仰天嘆曰:「使吾得長刀一,賊不足盡耳。」卒以器械不利,以身與敵,悲夫。
공이 산동에서 노닐 때 중승 한정우가 부른 무술사범에게서 절강인 유운봉과 더불어서 왜도倭刀를 배워 그 기예를 다하였다. 그래서 공은 보전步戰에서는 장도가 최고로 좋다고 말하며, 말이 죽고, 걸어서 싸우게 되자, 공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나에게 장도 한 자루를 달라!, 도적놈들은 별거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끝내 무기가 이롭지 못해서 맨몸으로 적과 다투었으니 슬프도다, 장부여.
『육부정 문집』 석경암전 원문
  • 근대 서양인들의 기록
무거운 승마 채찍으로 적을 후려치려는 내 시도는 갑작스럽게 저지되었고, 겨냥한 방향에서 이상할 정도로 빗나가는[25] 반격이 계속 이어졌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갑자기 실감이 나면서, 리볼버를 가지고 다니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서 머리를 보호했지만 곧 힘이 빠져 아래로 늘어뜨렸고, 그때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리슨이 총을 쏴서 내 목숨을 구했다. (중략)
왼팔의 상처는 뼈까지 깊게 베였고, 힘줄이 잘려서 나는 지금도 왼손가락 중 세 개는 움직이지 못한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도 심각한 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중략) 일본인으로 변장한 맥도날드가 피를 뒤집어쓴 일본 병사들과 함께 나타나서 우리를 구출했을 때는 너무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습격자들 중 몇 명은 제압당했고, 경비병들이 근처에 남은 잔당들을 수색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중략) 이 사건이 시작됐을 때 나는 잠옷차림에 맨발로 방을 뛰쳐나왔고, 이제는 도살이 일어난 장소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식탁 아래에는 잘린 머리가 굴러다녔고, 머리를 잃은 몸통이 다른 곳에 늘어져 있었다. 발바닥에 굴처럼 물렁한 것이 밟혔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람의 눈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신 중 하나는 끔찍하게도 이마 쪽부터 자귀로 깎은 나무처럼 한 움큼 잘려나가서 그 안의 뇌가 들여다보였다. (중략)
나는 지난밤 습격자를 처음 마주쳤던 좁은 통로를 관찰했다. 그리고 7피트 정도 높이에 가로로 걸쳐져 있는 작은 나무기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손질된 청어처럼 깊은 칼자국이 가득했다. 그것 중 하나라도 제대로 맞았으면 내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기에 충분했겠지만, 그때 내가 당한 검격들은 칼끝이 기둥에 걸쳐서 약해진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 이 나무기둥 아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습격자들은 희생자를 찾아 어둠 속에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고, 침실의 매트리스에는 일일이 칼로 찔러 확인한 흔적이 있었다. 침대 다리 하나는 깔끔하게 잘려나갔고, 탁자 위에 놓인 성경은 4분의 3쯤 잘려져 있었다.
Laurence Oliphant, "The Attack on the British Legation in Japan in 1861"
그들은 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시에 위력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리에서 칼을 맞게 된다.
J. G. wood, 『The Natural History of Man』, 1868
Captain Applin, late commanding H.M.S. Legation Guard, Japan, and late Military Train:
"7년 전쯤, 일본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반드시 권총을 소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권총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칼을 든 일본인에게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중략)
내 생각에 우리 검의 가장 큰 결점은 그걸로 벨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검을 얼마나 많이 휘두르건, 직전에 공들여서 칼날을 갈아놓지 않았으면 절대 벨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전에서 검으로 베려고 온갖 방식으로 칼을 들어올리다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크림 전쟁(1853-1856)의 사례에서 알려진 것처럼, 열 번 중 아홉 번은 베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우리 기병대의 검술 훈련에 대해서 늘 하는 말은 베기는 갖다 버리고 찌르기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의 군사작전에 참전해본, 충분히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찌르기가 베기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양손검을 사용하는데, 만약 우리 육군에서 그걸 쓴다면 저는 반대로 찌르기는 버리고 무조건 베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건 칼을 두 번이나 휘두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콜트 리볼버의 작은 탄환과 지나친 관통력에 관련해서, 한 일본인이 콜트 리볼버로 가슴에 총알 두 방을 맞은채 반격해서 두 사람을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희생자 중 한 명은 열여섯 곳에 상처를 입었는데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건 내가 직접 본 것입니다."
On Military Equipment,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1878
숙련된 일본 검사는 칼을 뽑는 순간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다. 공격자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방어할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된다. 내가 들은바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난도질당한 어떤 해병은 한번 베일 때마다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갔다고 한다.
Alexander Michie, 『The Englishman in China』, 1900
올리펀트는 양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은 염증으로 잔뜩 부어 있었다. 그는 해군 수병의 도움을 받아서 내게 "손질된 청어처럼 깊은 칼집이 난" 나무 서까래를 보여줬다. 일본인 칼잡이는 적으로 만나기에는 너무 끔찍한 상대다.
William Blakeney, 『On the coasts of Cathay and Cipango forty years ago』, 1902
연병장과 연무장에서 오랫동안 검술을 연습한 기병 장교로서, 나는 일본의 검술 교습 방식이 영국 육군의 방식보다 훨씬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말에서 내린 상태의 실제 전투에 대해서는 일본의 양손검술이 유럽의 모든 검술보다 뛰어나다. 울퉁불퉁한 땅, 언덕 사면, 그밖의 장애물이 많은 지형, 또는 뒤섞여 싸우는 난전에서 일본 검술은 많은 이점을 가진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원하는 방식으로 적을 빨리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카타나의 검신은 길이가 26인치 전후로 상당히 짧은 편인데, 이는 사용자에게 뛰어난 기동성(freedom of movement)을 가져다준다. 보병전에서 세이버 같은 긴 칼과 칼집을 다루기가 끔찍하게 성가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라면 특히 더하다.
카타나의 검신은 세이버보다 짧지만 칼자루는 더 길다. 이 검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공격거리가 짧다는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긴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내리치는 강한 타격(crushing blow)이 가능하다. 그리고 일본식 검술 훈련은 양손을 모두 단련시키는데[26], 검술을 배운 사람이라면 양손잡이를 상대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 것이다. 여기에 서양식 군도보다 근접전에 특화된 카타나의 특성이 더해지기 때문에 카타나야말로 목숨을 건 실전에서 최고의 칼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F. J. Norman, 『The Fighting Man of Japan』, 1905
노먼 씨와 미야케 씨가 일본의 양손검술, 켄짓수를 시연했고 관중들은 큰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치 일본 검객은 공격할 때 개처럼 짖고 맞으면 수탉처럼 울어야 한다고 예법으로 정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먼 씨는 또한 싱글스틱을 든 베츠 중사와 한번 승부를 겨뤘다. 그 결과, 비유적으로 말해서 중사는 한 두 번 정도 몸이 반토막났고, 노먼 씨는 몇 번의 재빠른 타격(some shrewd blows)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의 시연은 켄짓수가 주짓수만큼 중요한 운동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27]
The Times, October 19, 1905
일본의 검술도장에서는 찌르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가르치는 번개같은 속도의 크게 휩쓰는 베기(long sweeping cut)만큼 끔찍한 검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Joseph H. Longford, 『Japan of the Japanese』, 1912

4. 전통적 제작 방식


도검 제작 전체적인 과정



제26대 후지와라 카네후사(26代目藤原兼房)[28]의 도검 제작 과정을 담은 한국 다큐멘터리 방송. 카네후사 파는 과거에 도쿠가와 가문에 많은 도검을 납품한 것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도파이다. 작풍으로는 미노덴에 속한다.

4.1. 칼날의 제작과정

  1. 도검을 제작하기 전에 화로에 있던 불씨로 초를 밝힌 뒤 도검 제작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른다.
  2. 사철을 제련하여 덩어리 형태[29]로 만든다(현재는 작가에 따라 직접 만들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에서 공급받는다).
  3. 만들어진 철 덩어리를 넓게 펴서 조각[30]을 낸다.
  4. 쇠의 성질에 따라 연한 쇠와 강한 쇠로 나눈다.[31]
  5. 쇠를 모아 맞춘 다음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전통 종이(和紙)[32]에 싸서 진흙물을 묻힌 뒤 와라바이[33]를 뿌린 다음 870℃ 온도의 가마에 집어넣는다.[34] 경우에 따라서 1200~1300 °C로 열을 먹여 열을 전달한다.
  6. 쇠를 접어가면서 불순물을 제거한다.[35] 접을 때마다 짚과 재를 이용하여 철 내부의 탄소량을 조절한다.
  7. 강한 쇠를 u자 형태로 만들고 그 사이에 연한 쇠를 집어넣는다.[36]
  8. 망치로 두들겨가면서 칼의 형태로 모양을 잡는다.
  9. 야키바츠치(焼刃土)[37]라는 2가지의 특수한 진흙을 바른다. 우선 히키츠치라는 흙을 바르고, 오키츠치를 발라 모양새를 낸다. 칼등 부분은 비교적 느리게 냉각되도록, 칼날 부분은 빠르게 냉각되도록 형태를 잡아 바른다. 부위 별로 다른 진흙을 사용하는 것과 진흙을 바르는 모양에 따라서 일본도의 무늬인 하몬의 형태가 달라진다.[38] 이를 츠치오키라 부른다
  10. 다시 가마에 넣고 충분한 온도[철과]가 될 때까지 두었다가[40] 물에 넣어 담금질한다. 이때 날 부분은 급격하게 냉각되어서 마르텐사이트라는 견고한 조직이, 다른 부분은 느리게 냉각되어 연한 조직(펄라이트)이 생성된다. 마르텐사이트가 생성될 때 부피가 4.4% 정도 증가하기 때문에 일본도가 뒤로 휘어지게 된다. 급격한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하몬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무늬다.
  11. 적절한 온도에서 뜨임을 해주어 인성을 좋게 한다[41]. 이때 경화된 조직이 연화되어 담금질로 생긴 하몬이 사라지지 않게 주의한다.
  12. 간단하게 초벌연마를 한다. 칼의 배 부분에 조각을 하고 히(혈조)를 새기기도 한다.
  13. 손잡이 안에 들어가는 부분(슴베)의 연마를 하고 작가의 이름, 사는 곳 등을 새긴다. 이 부분은 작가에 따른 특징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없다.
  14. 전문 연마사에게 넘긴다. 연마사는 여러 숫돌과 연마재를 사용하여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를 잘 나타나게 한다.

4.2. 칼집, 손잡이 제작 과정

칼집의 경우는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1. 나무를 고르고[42] 나무를 칼집 모양으로 자른다.
  2. 반으로 가른다. 그 다음 속을 칼과 끌등을 이용해 파낸 뒤에 찹쌀을 이용하여 접착한다.
  3. 칼집을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입구 부분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소 뿔을 덧대어준다.
  4. 옻칠을 칠해 마무리한다. 장식성을 더하기 위해 금속 장식을 덧붙이거나 가오리 가죽 등을 위에 덧붙이기도 한다.

손잡이의 경우 깎아내는 과정까지는 칼집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 뒤에 손잡이에 우둘투둘한 상어 가죽이나 가오리 가죽을 덧붙여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다.

장식 부품의 제작 과정은 전문적인 금속 공예 분야이기 때문에 간단히 다루기는 어려우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3. 조립과 의장 그리고 수집

일본도의 장점 중 하나라면 비교적 간단하게 분해, 조립이 가능하여 관리 수리가 용이한 점이다.

파일:attachment/일본도/e0006881_4771f5ce3e46c.jpg
  1. 어피[43]를 감은 손잡이를 칼몸의 슴베에 끼워서 메쿠기를 박을 구멍을 뚫는다.
  2. 다시 칼몸을 손잡이에서 빼고 손잡이에 가죽끈이나 면끈 등을 감아준다.[44] 이 과정에서 손잡이의 적당한 위치에 메누키를 얹고 그 위로 손잡이끈을 감아 고정시킨다.
  3. 하바키[45]를 칼몸에 끼운 뒤에 그림과 같이 셋파와 코등이(츠바;tsuba)를 끼운다.
  4. 후찌를 손잡이에 끼우고 손잡이에 칼몸을 끼워넣는다.
  5. 대나무나 뿔 재질의 못(메쿠기)을 박아 칼몸과 손잡이를 고정시킨다.

따라서 일본도에 있어서 도 그 자체인 것은 칼몸이며, 다른 부분은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도검을 많이 쓰지 않는 한국과 중국에서 내구성을 위해 각 부품들을 금속재질의 못 등으로 견고하게 고정시켜 일체화한 점과는 다른 점이다.

이는 취향에 따라 부품을 바꾸어 검을 치장하는 덕질을 가능하게 했으며, 정교하며 다양한 조각이 이루어진 코등이(츠바;tsuba)를 필두로 일본도의 의장을 강화시켰고, 일본도가 미술품 취급을 받으며 수집되는데 일조하였다. 현대에도 이와 같은 부품들을 모으고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는 부분은 코등이로, 이만 다루는 전문적인 서적이나 전시 컬렉션이 있을 정도.

5. 생김새

일본도의 외관은 미술품으로서의 일본도 감상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이다. 일본도/생김새 문서 참고.

6. 착용법

일본도에는 흔히 알려진 타치 우치가타나의 착용법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존재한다.
  • 타치의 패용법
  • 의식(儀式)용 매기 - 관청의 의식에서 패용하는 의장용의 시키다치(式太刀) 등을 패용할 때 쓰는 방법. 관복의 허리띠인 관대(官帶)에 패용 끈을 끼워서 패용한다.
  • 허리에 둘러매기 - 타치의 가장 기본적인 패용법. 타치의 칼집에는 패용을 위한 가죽이 연결되는 아시(足)라는 패용 부품이 2개 붙어있다. 여기에 붙은 가죽에 2~3m 정도의 끈인 타치오가 연결되어 이것을 풀어서 길게 늘인 다음 와키자시에 걸고 X자로 매듭을 지은 다음 허리에 두세 바퀴 감아서 단단히 묶는다. 단순히 허리에 두르기보다는 단도나 와키자시에 함께 걸리는 방식이다.
  • 타치다이(太刀帶)에 끼우기 - 전국시대 후반이 되면 점차 패용장치(아시足)을 사용하여 타치오로 허리에 둘러 고정하는 방식은 잘 사용되지 않게 된다. 그대신 간편한 타치다이가 등장하는데 허리에 두르는 끈과 타치를 고정하는 끈이 따로 있어 허리에 타치다이를 두른 다음 타치를 끼우는 끈 매듭에 끼워주기만 하면 간편하게 고정되는 장점이 있었다.
  • 끈 매듭으로 고정하기 - 2~3m의 끈을 준비하고 반으로 접어 칼집에 X자로 묶어 허리에 둘러서 남은 부분을 배꼽 부근에서 매듭을 지어 벨트처럼 착용한다. 칼집이 단단하게 고정되는 효과가 있다. 반면 칼집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 반대로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타치 뿐만 아니라 카타나까지 이 방식으로 패용할 수 있으며 달리 패용 장치가 없는 한다치(半太刀)나 우치가타나(打刀)를 갑옷 위에 패용할 때에는 이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 카타나의 패용법
  • 허리띠에 끼우기 -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방법. 허리띠에 끼우면 칼집 옆에 튀어나온 쿠리카타(栗形)에 걸려 밑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 평복 뿐만 아니라 갑옷 착용시에도 가능했는데 갑옷 착용시에는 갑옷 위가 아니라 안의 평복 허리띠에 끼웠다. 그래서 갑옷을 착용하고 카타나를 허리띠에 끼우면 칼집 일부 쿠사즈리(草接)에 가려져 있고 자루는 쿠사즈리 사이에서 튀어나와 있는 식. 갑옷 위에 패용할 때에는 끈 매듭으로 고정하기로 고정하였다.
  • 등에 둘러메기 - 닌자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흔히 알려진 닌자도라는 것 자체가 할리우드의 창작물이나 다름없어 근거가 없다. 일단 닌자도는 80년대의 가짜 닌자의 대표격인 아시다 킴이라는 미국인이 자신의 책에서 등장시킨 것을 시초로 본다. 역사적으로는 노다치를 등에 둘러메어 운반하는데 쓴 사례가 있고 평범한 카타나를 등에 둘러메고 다닌 것은 메이지 유신 당시의 무진전쟁 때의 사무라이들. 무진전쟁에서는 칼이 아니라 총과 대포가 전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칼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발도의 불리함 대신 총기 취급의 용이함을 택해서 이런 방식으로 많이들 차고 다녔다. 별다른 장치나 방식이 있는 건 아니며 넓은 천을 이용해 묶어서 대충 둘러메는 방식. 관동군 항목에서 사진을 볼수있다.
  • 허리 옆에 세워서 패용하기 - 마찬가지로 메이지 유신의 무진전쟁에서 사용되던 방식. 넓은 천을 이용해 묶고 핸드백처럼 어깨에 걸어서 메고 다녔는데 이럴 경우 보통 왼쪽 허리에서 수직으로 섰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총기 사용에 편하다는 점 때문. 보통 무사들은 천을 이용해서 패용했지만 높은 직급의 간부들은 유럽에서 수입한 가죽제 Frog를 사용하기도 했다. 행군하거나 총격전을 벌일 때에는 칼자루를 뒤로 가게 했다고 한다.

7. 작명

일본도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보통 다음과 같은 정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 제작지: 비젠 국에서 제작한 경우 '비젠노쿠니'가 앞에 붙는 등. 웬만하면 생략된다.
  • 칼의 별칭: 특수한 일화가 얽힌 일본도의 경우 그 일화와 관련된 이름이 붙는다.
  • 제작 형식: 흑칠태도, 케누키카타타치 등.
  • 도공명 또는 도파명: 보통 제일 뒤에 붙인다. 그 검을 제작한 도공의 이름이나 도파의 이름. 메이(銘)와 일치하는 경우도, 다른 경우도 있다(도공에 따라 새기는 메이의 형식이 다르기 때문).

흔한 조합은 다음과 같다.

8. 강도

8.1. 전통 일본도의 내구도

일본도는 양손으로 사용하는데다 날이 곡률을 가진 만도이기에 베는 성능이 뛰어난 검은 맞으며 실제로 앞서 문단의 기록에서 본 것 처럼 전투에서 높은 살상효과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60cm가 넘는 도신에 1kg 남짓의 중량을 가지다보니 도신의 폭이 좁으며 근대 이전 기술로는 재료의 균일성을 유지하거나 고른 열처리를 하기도 힘들었기에 날을 잘못 부딫히거나 할 경우 도신이 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당장 현대의 고성능 강재를 통열처리해서 만드는 일본도의 경우도 숙련되지 않은 사용자가 다다미 베기등을 할 때 도신이 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46] 일본도를 만들 때 쓰는 재료는 수백 년 전에 쓰이던 질 낮은 철이고, 그걸 다듬는 데 쓰는 기술 역시 수백 년 전에 개발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도의 특징으로 꼽히는 신가네를 하가네로 감싸는 형태의 구조는 중국의 전국 시대부터 명나라 시대까지 일상적으로 활용된 것이고, 철을 여러 번 두들겨 펴서 접고 또다시 두들겨 펴서 접는 접쇠 공정 역시 일본만의 비법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예전에 썼던 기술이었다.

일본의 전통 제철 방식인 타타라 제철 방식은 전형적인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앞서 서술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환원된 철괴를 제련하는 방식을 사용하기에 10kg의 광석을 타타라로 제련할 경우, 1kg의 강괴 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생산 효율이 나빴다.[47]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으니 기본적으로 재료의 인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이조차도 접쇠 공정을 통해 계속 불순물을 제거하고 강재의 순수성을 높여야만 했는데 이렇게 엄마손파이 마냥 미세한 층을 만드는 방식은 내구성이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는 공정이며 잘해봐야 평균 수준이다.[48]

또한 접쇠 공정을 거치고 난 강재도 강도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드럽고 유연성이 높은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心鉄, 心鐵)'[49]를 유연성은 낮지만 딱딱하고 단단하며 강도가 높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刃鉄, 刃鐵, 刃金)'[50]로 감싸는 꼼수로 최대한의 내구성을 확보한 것이 일본도이다. 하나 이러한 복잡한 제법은 현대 금속공학을 동원해서, 기계로 꼼꼼하게 수행해야 품질이 보장되는데[51], 일본도는 그냥 장인의 감으로 이런 제법을 무리하게 구현하려다 보니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로 덮이지 않고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어 칼날 전체의 성능과 내구성을 저하시키는 등 여러모로 칼날의 품질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망치로 깨 봐서 뭉그러지는 것은 '신가네(心鐵)'로 분류하고 깨지는 것은 '하가네(刃鐵)'로 분류하는 식일 수밖에 없으니 이쯤 되면 내구성이 잘 나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지경이다. 일부 장인들이 자신의 최대 명검이라 하며 내놓는 물건들은 정말 운 좋게도 적절한 배율로 구성된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수십 년 만에 한 번씩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본이 서양과 교류하면서 얻은 남만철(서양 용광로식 제련법으로 제련되어 만들어진 유럽제 철강)은 전국시대 말부터 도검을 비롯한 일본의 철제 무기와 갑주 제작에 적극적으로 사용되었고, 남만철 무역 역시 꾸준히 지속되었다. 즉 이 시기까지 일본 내의 재료와 기술로는 남만 철과 같은 고탄성강을 제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해소된다.

전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내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칼날을 필요 이상으로 두껍게 만들 수밖에 없으니, 휘두르기 좋게 가볍고 무게 중심이 알맞게 만들기도 힘들다. 일본도는 날 끝으로 가면서 날의 두께가 그리 줄어들지 않는 데다, 중국이나 서양의 검 손잡이 끝부분에 있는 폼멜처럼 자루 쪽에 무게를 실어주는 부분도 없다. 이렇게 무게 중심이 날 쪽으로 쏠리면 휘두를 때 날 끝에 무게가 실려 길이와 무게에 비해 강한 살상력을 얻을 수 있으나, 무게 중심이 칼자루에 가깝고 양 손의 간격을 짧게 쥐는 다른 문화권의 검들보다 운용이 불편하다. 또한 습기가 많은 일본 기후 특성상 손잡이를 쉽게 분해할 수 있는 대신 칼날과 손잡이의 고정을 대나무 못으로 하기 때문에 전투 중 충격이 누적되면 대나무 못이 부러지며 칼날이 손잡이에서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다.

날의 성능에만 집중하여 기타 도장구에 대한 평가는 잘 이뤄지지 않는데, 우치가타나 양식이 성립된 이후의 일본도는 그 칼자루의 그립감이 가히 예술로, 특유의 천 끈과 매듭법으로 인해 맨손에 착 감겨들고, 무엇을 베었을 때 손에 가해지는 충격도 나무나 가죽만으로 마감한 도검들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목재에 가죽을 감은 것은 그나마 낫지만, 그도 없이 나무 조각을 나사로 붙여놓은 수준의 물건들은 장갑이 없으면 오래 다루기 힘들 정도로 손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다. 그 반대급부로 오염되기 쉽고 내구도가 떨어지는 문제는 있어서, 아예 마음대로 교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하지만...


흔히 돌아다니는 속설처럼 뭐만 하면 휘고 부러지는 그런 무기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철의 질과 가공법을 떠나서 당시 타국과 비교해서 그 정도로 질이 떨어지는 무기면 실전용으로 못 쓸 수준이고, 타국의 평가조차 아무리 잘 쳐줘도 장식용 수준을 못 벗어났을 것 이다. 이는 과하게 깎아내리려는 속설이며, 타국의 도검류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휘고 부러진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칼날은 소모품이다! 타국 도검은 커녕 현재 기술과 철로 만들어진 도검도 마찬가지. 무슨 판타지에 나오는 아이템이 아닌 이상 철이 마찰에 의해 부러지거나 상하는 건 그냥 당연한 거다.).
8.1.1. 과대평가의 원인
일본도에 대한 환상은 일본도 자체가 단일 무구로는 도검 시장에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히트 상품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가십거리에 혈안이 된 매스미디어들은 그 환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하면 '베는 것' 에 한정해서 모든 냉병기 중 가장 고성능을 발휘하는 무기로 묘사되며 사람과 같은 밀도를 가진 젤라틴을 베는 실험에서 오직 일본도만이 일도양단에 성공했다고 나왔으나 사실 이건 일본도 외의 타 문화의 검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도로 총알을 가르는 시험도 원래 서부시대부터 총을 쏘아 풍선 두 개를 터트리던 식의 유희, 즉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권총탄은 납을 구리 외피로 감싼 것이며 열처리된 강철보다 훨씬 무르기 때문에 한국 환도는 물론 심지어 내구도가 한참 떨어지는 저가의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든 버터용 나이프로도 자르는 게 가능하다.( #) 굳이 일본도 뿐이 아니라 쇠를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하다. 워터젯 커터 실험도 비슷한 트릭.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은 단면적이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좁으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고압 수분이 2갈래로 갈라져 빠져나간 것이다. 게다가 실험에 쓰인 일본도가 진짜 일본도인지도 확실치 않다. 100% 전통 강재로만 제조하면 시참을 할 때 하도 휘므로 수련을 위해 만든 칼은 현대 강재를 쓰는데, 이렇게 만든 칼은 눈으로 봐서는 전통 방식으로 만든 칼과 절대 구별할 수 없다.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고 박혔다든지, 사람과 갑옷까지 절단한다든지 하는 헛소문들도 이런 환상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 허나 여러 중세시대 매니아들의 실험 결과 칼로 숭숭 잘 베일 것만 같던 가죽 갑옷조차도 베기에는 굉장한 내성을 지닌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하물며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쉽게 베지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는 것 또한 철 갑옷을 절단하는 것 이상의 헛소리. 애초에 총신은 장약이 폭발하며 일으키는 팽창방향의 변형과 탄두가 총강 내에서 나아가며 일으키는 마찰을 자체 내구성으로 씹어내면서 끝까지 본모양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총기부품 중에서도 가장 공들여서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8.1.2. 오해와 진실
  • 대나무를 베다가 부러지거나 휘어지는 약한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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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은 기본적으로 중량 1~2kg에 두께 3~6mm 전후인 얇은 철판이다. 정도 이상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당연히 부러지거나 휘어지며, 제작자나 사용자의 '실수'가 있다면 더 작은 충격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비단 일본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도들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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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중기병들의 갑주전투에서 사용되던 대갑주 롱소드 에스터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칼날을 붙잡히면 휘어져서 못쓰게 될 위험이 있었고, 기병들은 전투 도중 검이 망가질 때를 대비해야 했다.

    일본도가 실전이나 베기 시험 도중 쉽게 망가졌다는 증언의 출처는 대부분 중일전쟁 시기 일본육군 군도수리반의 기술자였던 나루세 칸지의 <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와 <실전도론:実戦刀譚>이다. 하지만 나루세 칸지의 저서에서는 같은 전통 일본도라도 고도(古刀)와 신도(新刀), 신신도(新々刀)에 대한 평가가 다르며, '에도시대 망나니의 시참용 검'과 '군진에 필요한 탄력있고 강한 검'을 구분하고 있다. 에도 이후부터 내려진 전쟁금지령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신도(新刀) 중에도 한 번의 전투에서 휘어져 못쓰게 된 검, 날이 깨졌지만 계속 사용할 수는 있었던 검, 전투에 적합한 일부 좋은 검 등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약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단단하고, 무르더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을 비롯한 근대 전쟁사에 등장한 일본 군도 역시 휘어지고 부러지는 등 성능 자체는 좋지 못했으나 철강 기술의 개편으로 제값을 한 경우가 많다.
  • 정으로 쪼아서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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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강도보다는 경도의 문제로, 무게, 가공 등을 고려한 전투용 도검의 이상적인 경도는 HRc50[52] 전후다. 잘 만든 칼이라도 단단한 못으로 긁고 쪼면 파인다. 다만 세밀한 조각이 가능하다는 것과 못이나 정으로 찍어 파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물론, 근대 이전의 도검은 거의 대부분 해당사항이 있다. 당장 현대 기술로 제작된 도검만 봐도 스테인리스 재질의 군용 나이프가 HRC 60 정도이다.
  • 강도가 떨어져서 일본검술에는 검을 부딪히는 기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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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무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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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토리신토류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

    '일본도는 약하다. → 약하기 때문에 칼을 부딪히는 검술이 없을 것이다. → 칼을 부딪히는 검술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나 일본도는 약하다.' 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에 불과하며, 실제 칼을 부딪히는 검술이 존재한다. 애초에 맞대지 않으면 시현류를 비롯한 고류 검술과 현대 검도가 성립하지 않는다. 검도에서 강조하는 받아넘기기와 흘리기 기술들도 마찬가지.
8.1.3. 결론
일부 매체나 일본의 자국 찬양 매체에서 비치는 모습처럼 만능의 검인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뭐만 하면 휘고 부러지는 엿가락같은 검인 것도 아닌 그냥 충분히 튼튼하고 날카로운 쓸만한 검이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일본만의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 만큼 일본도의 제작에 쓰이는 철을 뽑는 과정은 대부분 에도 이후 조선에서 대형 가마 기술과 제련법을 수입한 것이다. 즉, 현대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지는 제련법은 조선에서도 통용되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조선의 검이 저질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니[53] 전통 방식으로 제작하는 고도의 경우는 확실이 당시의 전장 환경에서 보여주는 내구도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고온 제련법을 수입한 직후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장인의 기술보다는 효율적인 대량생산을 추구하면서 이전보다 보급을 높였지만 오랜 시간을 들려서 생산하는 것 보다는 성능은 떨어지게 되었고, 에도막부에 접어들면서 카타나가 무사계급의 과시나 패션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위 글도 어폐가 있는데 조선에서 전래된 화 로덕분에 온도가 올라갔지만 이 화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원래 타타라제철에서 하듯이 숯을 넣어서 오래 제련해서 철을 만들었는데 그러다보니 쇠 안에 탄소가 많이 들어가게되어 취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일본 대장장이들은 이런 철을 좋은 철로 여겨서 계속 생산하고 이런 철로 인해 검이 잘 부러지게 된 것이 품질저하의 요인이지 딱히 조선의 검과는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8.2. 현대식 일본도의 강도


콜드스틸의 일본도 내구성 테스트. 약간 잔인할 수 있으니 주의.


내구성이 좋은 알루미늄 바디로 구성된 아이패드 에어 2도 베인다. 다만 알루미늄의 강도는 도검에 쓰일 정도로 튼튼하게 열처리된 과는 비교도 불가능하다. 뭣보다 일본도 사이즈의 무게와 두께인 날붙이가 아이패드의 알루미늄도 못 벤다면 도검 자격은 실격이라 봐도 된다.

일본 방송에서는 일본도의 구조를 아예 소재까지 현대식으로 바꿔서 더욱 업그레이드한 경우도 있는데, 날 부분을 강철이 아니라 초경합금으로 교체해본 사례가 있다.[54] 칼몸은 마사무네. 후지오카 히로시가 시참한 결과 자동차 철판을 9cm나 베어냈다고.(일반 일본도는 몇 cm 정도) 이 방송에서는 참철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초경합금은 인성이 매우 낮고 경도만 높기에 철판을 벤다면 바로 이가 나가버릴 것이다. 실제로 인성이 낮고 경도만 높은 강재들은 나무만 몇 번 깎아도 이빨이 전부 나가버린다. 본 방송이 과연 초경합금만 사용하여 제작한 건지 또한 철판이 열처리가 되어있긴 한 건지, 철판을 베는 것도 똑같은 힘으로 했는지도 모르고 베기 비교도 제대로 된 실험인지 미지수에 방송의 연출과 과장이 있을 테니 본 내용을 너무 맹신하지는 말자.

디스커버리 채널의 실험으로 현대식 일본도도 별로라는 인식이 있다. 당시 실험에선 현대 공업기술로 만든 일본도와 박도, 유엽도로 충돌 실험을 한 결과 일본도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박도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박도란 크고 두꺼운 중국식 외날 도로, 그 질량은 도끼와 맞먹는다. 현실의 장검은 만화와 달리 금속을 두부 썰듯 베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급의 금속, 제련 방법으로 만들었을 때 도끼급의 질량을 가진 박도와 일반 검의 질량을 가진 일본도가 부딪히면 일본도가 부서지는 게 당연하다. 유엽도의 경우에는 1kg 내외의 한 손 도검이나 무게중심이 칼날의 끝 부분에 몰려있고 칼날 폭도 두껍기에, 칼날 간의 충돌시험에서 일본도가 부러질 수 있다.

이러한 실험에 앞서서, 실전용 일본도는 1.5~2kg 내외의 무게[55]를 갖고 있으며, 날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날도 많이 갈아놓지 않는 걸 염두해둬야 한다. 즉, 안전을 위해 고류 유파에서도 가끔씩 사용하는 실전용 일본도의 사양을 알리가 만무한 영상 제작자들이 이러한 조건을 맞춰서 실험 할리가 없기에 일본도의 구조적 내구성 평가는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 유튜브에 나오는 일본도들은 거의 전부 일본도 비슷하게 만든 곡도에 불과한 셈이다.

9. 모조 일본도

일본도는 코냑처럼 전통방식으로 일본 내에서 장인이 제조한 것만을 일본도로 인정하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현대 강재, 현대 공법으로 만든 것 혹은 일본의 전통 방식을 모방해서 만드는 모든 일본도형 도검들은 모조 일본도 혹은 모조 도로 분류한다. 진검, 가검 가리지 않는다. 물론 모조 일본도라고 검술에서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일본도가 질적 한계와 더불어 관리하기 더욱 까다롭다는 단점[56]이 있어서 검술 수련에는 모조 일본도가 월등히 낫다. 그럼에도 전통 일본도가 생산되고 사용하는 이유는 일본의 도검법과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검술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고류 유파들의 풍조 때문이다.

일본도에 대한 수요는 세계적으로 막대하지만 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일본도의 생산량은 너무 적고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57] 그래서 많은 메이커들이 모조 일본도 생산에 뛰어들었다.

모조 일본도 생산의 최대 거점은 중국이다. 1045탄소강을 이용하고 아연합금 도장 구를 탑재한 일본도 모양의 저질 칼이나 가검류, 1060이나 1095탄소강을 사용하여 상당한 내구성과 절삭력을 갖춘 물건은 물론 일본의 타마하가네를 사용하여 전통 일본도의 하몬까지 자유자재로 재현하는 것까지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며 폴첸, 다이너스티 포지, 콜드 스틸, 친니즈 커틀러리 등 이쪽에서 제법 알려진 메이커들의 제품은 물론 이베이에서 장사하는 수많은 중국 군소 유통업체들까지 다 중국에서 만들어 온다. 그중에서도 도검으로 유명한 중국 용천시가 지상 최대의 모조 일본도 생산 거점. 용천시의 물건들은 미국은 물론 일본에도 가검으로 들어가고 있고 한국에도 생각보다 많이 풀렸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일본도형 도검도 물론 모조 일본도에 속한다. 국내 칼의 특징은 베기장에서 주로 사용하고 전통 있는 일본의 도검 문화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주로 베기를 위해 칼날이 넓고 국적불명의 도장구를 탑재한 것들이 많이 팔린다. 그 대신 내구성은 평균적으로 매우 뛰어난 수준. 중국제 모조 일본도들은 일본도의 양식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재현했기 때문에 국산 칼보다는 훨씬 원래 일본도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조 일본도의 내구성도 천차만별이라 1045탄소강이나 타마하가네를 사용한 물건들은 내구성이 전통 일본도와 다를 바 없거나 더 약하기도 하다. 강재를 속이는 경우도 일부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1060이나 1095 탄소강을 사용하고 통 열처리를 한 성능 위주의 제품들은 무시무시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절삭력도 상당히 좋은 편으로 미국 등지에서 소비되는 모조 일본도들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분 열처리를 하는 제품들의 경우 아무래도 통 열처리 제품보다는 내구성이 떨어진다.

인도 등지에서 수상쩍은 다마스쿠스 칼날 일본도를 판매하고 있으나 장식용 이상의 성능을 기대하기 어려운 물건들이다.

10. 창작물에서

우리나라의 환두대도나 환도 등 한반도의 전통적인 검과 비교하면 일단 나라 이름+도라는 쉬운 명칭이기 때문인지 국내에서도 양판소나 라이트노벨 등에서 현대인 천재론 도검제일주의에 의거하여 이고깽 주인공들이 철과 망치 등 기본적인 대장 장비 가지고 뚝딱거리면 만들어지는 주제에 사기템스러운 성능을 자랑하며, 주인공이 직접 안 만들고 드워프 같은 대장장이 종족들에게 의뢰하는 경우엔 "쇠를 접어서 두들기고 이러이러하면 만들어지는 거니까 만들어줘"라고 하면 드워프도 그걸 어떻게 이해한 건지 일본도를 만들어준다(...). 작가가 관련 상식이 있다면은 드워프들이 일본도나 그 제작과정을 듣고 무지하게 구시렁대지만, 일반적인 양산형 라노벨 작가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접쇠 가공 항목이나, 후술 할 드리프터즈에도 나오지만 “이런 건 질 낮은 철로 어떻게든 무기를 만들어보겠다고 무식하게 두들겨댄 거지!”라고 경악하는 게 정상 반응이다.

물론 그런 순도 낮은 철을 어떻게든 가공해서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어 내는 장인 정신에 대해선 같은 대장장이로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지만, 흔히 창작물 전반에 깔린 '일본도야말로 최강의 무구'라는 환상과 달리 당시 일본의 지리적 상황에 있어 어쩔 수 없이 택해야만 했던 고육지책에 가깝다. 때문에 광산에서 고순도 철광석을 덩어리째 뽑아내고, 개체 하나하나가 현실 대장장이 명인과 맞먹는 드워프들이 일본도를 보거나, 제작과정을 듣고 "이게 그 일본도..."라며 감탄하거나 자극을 받아 똑같이 무식하게 애꿎은 철만 혹사시킨다면 그거야말로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 [58] 물론 외형이 아름다운 도검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양덕들이 환장하고 매체에도 필수요소로 등장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괴악한 환상을 덕지덕지 붙여 놓으면 알고 보는 사람은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위키에 1분만 검색해도 나오는데도 모르는 걸 보면 라노벨 작가들이 얼마나 사전 조사를 안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주인공이 한국인인데도 멀쩡한 환도 내버려두고 일본도를 들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뭐, 한국인이라고 일본도 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역시 어색하다. 단 진실도 왜곡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국내에서 일본도의 평가가 많이 까이고 나서부턴 적어도 국내 작품에서 등장은 적은 편이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 한정이고 일본 쪽에선 사용자인 사무라이 이상으로 거의 안 끼는 데가 없는 소재. 총을 무기로 쓰는 세계관이든 로봇을 무기로 쓰는 세계관이든 서양 중세풍 판타지든 그냥 이세계물이든 간에 주인공이 일본인이면 어떻게든 나타나는 수준. 특히 일본 게임의 경우 자국 게임인 만큼 최강 장비나 전설의 무기급으로 대우해준다. 워낙 흔해빠진 클리셰다 보니 이젠 국내에선 일본도가 나왔다 하면 갓본도라고 풍자하곤 한다.


문제는 강도와 예리함이 비정상적인데 나무, 강철, 검보다 무거운 갑옷이나 그 밖의 단단한 물건을 자르면서도 어지간해선 날이 상한다는 묘사가 없는 경우도 많다. 판타지에서는 철이 아닌 미스릴, 아다만티움, 히히이로카네, 오리하르콘 같은 어떻게 가공해도 사기적인 성능을 보여주는 전설급 재료를 사용해서[59] 만드므로 일본도 날이 안 상하거나 이것저것 다 자르는 게 당연하다. 바람의 검심에서 철제 가스관을 식재료 손질하듯이 썰어버리는 것이 그 예.걔네는 맨손으로도 철 자를 수 있는 놈들이잖아 라이트노벨에서 주인공이나 히로인들이 갑옷이랍시고 투구는커녕 여기저기 빈틈 투성이인 철 쪼가리나 원피스를 걸치고 다니는 이유가 일본도 때문에 방어 자체가 의미 없어서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다. 묘하게 설득력 있다.

덕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답게 서양에서도 와패니즈든 단순한 팬덤이든 일본 팬덤이 많은 만큼 서양의 매체에서 일본 관련이 나오는 경우 서양 영화 주제에 꿋꿋이 일본어를 쓰는 야쿠자와 함께 그들의 단골 무기로 나오기도 한다. 다만 명백히 양손검이었던 일본도를 한손검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잦은 편이다.

와패니즈 성향이 강한 사이버펑크 장르에서는 분명히 총이 주력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나 유력한 주변 인물의 무장 중 하나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미래의 신소재로 다시 만들고 사용자는 근력 강화를 받는다는 설정이 붙어서 인간의 신체보다 튼튼한 개조된 의체도 썰어버리는 위력적인 무장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서 사이버펑크 2077에서는 다수의 고성능 유니크 일본도가 등장하고, 섀도우런에서는 노다치 같은 규격외의 칼을 제외하면 검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다.

블리치의 사신들의 무기인 참백도는 각성하기전의 일반적인 모양이나 그 외 일본풍 캐릭터(쿠치키 뱌쿠야, 쿠치키 루키아, 쿠로사키 이치고등)은 각성시의 모양도 일본도에 가깝다.[60]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서 주로 취급은 제각각이지만 일단은 강한 무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는 잡이나 캐릭터 중에 사무라이가 있을 경우 그 전용 무장이 되며 파이널 판타지 7의 최종보스 세피로스의 주무기가 일본도타입의 마사무네다. 일반적인 일본도와는 달리 검신이 매우 긴 독특한 모습이다.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에서 버질 염마도라는 카타나를 애용한다.

대체적으로 중세풍인 엘더스크롤 시리즈에서도 아카비르 지방의 대표적인 무기라 하며 역시 강력한 편에 속한다. 모로윈드까지는 탄토(단검), 카타나(한손검), 다이-카타나(양손검) 등 여러 종류가 나오고 철, 강철, 데이드릭 등 다양한 재질로 나오지만 오블리비언에서는 블레이드의 대표 무장이라는 설정이 붙어서 흔히 볼 수 없고 카타나와 다이-카타나로만 나온다. 스카이림에서는 더욱 희귀해져서 에보니 블레이드만 다이-카타나로 나오고 나머지는 다 한손 카타나로 나온다. 강력한 검 중에서 유독 카타나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골드 브란드 에보니 블레이드가 있다. 이 둘은 데이드릭 아티팩트로 게임 상에서 준수한 성능을 자랑한다. 그 외에 하콘의 검이나 드래곤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드래곤베인도 카타나다.

갑옷 및 무기 고증이 비교적 꽤 높은 편이며 중세 분위기를 상당히 잘 재현한 소울 시리즈에서도 매번 등장하며 주로 기량 특화 캐릭터들이 선호하는 무구중 하나로 가끔 가다보면 서양 중세풍 세계에 기사갑옷을 입고 무기는 얄팍한 카타나 하나 들고 거대한 괴수들을 상대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제작사 측이 고증을 무시하는 쪽은 아니기 때문에 일본도 특유의 낮은 내구도와 갑옷 상대로 효과가 떨어지는 성능, 그리고 발도술도 구현해 놓았다. 같은 개발사 제작의 블러드본에도 등장. 그야 개발사가 일본 회사니까... 이후 출시한 세키로에서는 주인공의 주무장으로 나오는데, 갑옷 입은 적은 물론, 나무 재질의 방패도 제대로 베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경갑이나 천옷, 맨살은 잘만 벤다.

서양 판타지에서 일본도가 등장하는 게임의 원조는 위저드리가 가장 많이 꼽히며 위저드리의 영향으로 많은 서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RPG게임은 물론이요 RPG게임이 아니여도 작품이 판타지풍에서도 일본도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원조 위저드리 시리즈 제작자 중 한 명인 앤드류 그린버그(Andrew C. Greenberg)에 의하면 원래 위저드리 시리즈에 왜색적인 요소를 넣을 계획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또 다른 제작자인 로버트 우드헤드(Robert Woodhead)가 당시 워낙 사무라이, 닌자물에 열광하고 쟈포네스크 기질이 심한 편이여서 작중 사무라이, 닌자 클래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 두 직업이 상당히 강력하며 무라마사가 끝내주게 강한 아이템이 되었다는 비화가 있다.[61]

현대에 와선 특유의 간지와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동양 판타지의 마스코트 격이 되었으며 아예 일본도는 사무라이, 닌자물에서만 등장하는 무기가 아닌 서양 판타지의 무구에서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동양과는 단 1g의 연관성도 없는 현대 서양 뱀파이어들이 일본도를 제식무기처럼 쓰는 경우도 있으며 미국에서 만들어진 메리 수 테스트를 보면 캐릭터가 메리 수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기준 중에 (일본인이 아니면서) 일본도를 사용하는지의 여부가 있다(...). 여러모로 와패니즈의 득을 단단히 본 칼이다.

특유의 날렵한 형상이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 온갖 화려한 장식을 붙이기 좋아하는 창작물에서도 일본도 계열 무기는 다른 창작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장식이라고 해봐야 화려한 건 칼집이나 손잡이 끝의 술, 코등이의 모양 정도로나 붙고 칼날에는 거의 붙지 않는다.[62]

바스타드 소드와 비슷하게 기본적으로 양손으로 잡지만 한손으로도 쓸 수 있는 길이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매체, 특히 게임의 경우 작품에 따라 양손 무기냐 한손 무기냐가 다르게 묘사된다. 대표적으로 리니지에서는 한손 무기로 나오지만 라그나로크 온라인에서는 양손 무기로 나온다.

엘리시움(영화)에서는 악당 크루거가 일본도를 사용한다.

좀비 아포칼립스에서는 좀비를 써는데 상위권 근접무기들과 어깨들을 나란히 할 만한 냉병기 취급받는 경우도 많다. 그도 그럴 법한게 엥간한 좀비는 방검복은 개뿔, 다 떨어진 천옷이나 반쯤 썩은 살점이 전부이기 때문에, 뼈와 살점만 잘 베어내면 그만인 일본도가 좋을 수 밖에. 세다가 상술했듯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일본도는 일종의 예술품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서양의 도검제한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고증에 맞추러면 그만큼 내구도도 나가리이기 때문에 나중가면 칼날을 새걸로 갈거나 처음부터 비슷한 모양의 가검이라는 설정을 넣기도 한다.

섀도우런은 칼을 쓴다는 캐릭터가 카타나 대신 서양검을 쓰면 오히러 별종 취급받는다.

가면라이더 제로원에서는 호로비가 일본도를 들고다닌다.

오버워치에서는 겐지가 튕겨내기(E) 스킬을 사용할 때 일본도의 일종인 와키자시 하나로 온갖 총알과 투사체들을 튕겨낸다.(...) 심지어는 음파 불덩이, 에너지 구슬도 튕겨낸다. 궁극기 사용 시에는 개조형 카타나로 보이는 용검을 뽑아서 그걸로 막는다.[63]

바키 시리즈에서 최근 새로운 보스 역할로 활약 중인 미야모토 무사시(바키 시리즈)는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도들을 "단련이 덜 된 철로 만든 판떼기" 취급하고 휘두르는 것만으로 부숴버리더니 중국의 병장기들은 그 사용 용도를 자기 힘으로 부숴서 그 파편을 던져 공격한다는 둥 개드립을 늘어놓더니 자기 시대 때 만들어진 일본도 정도는 가져와야 휘두르는 힘을 견딘다고 나온다. 이거 뭔가 입장이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64]

드리프터즈에선 주인공이 칼 수리를 드워프들에게 맡기자 드워프들이 부러진 단면을 들여다보면서 "'"철을 대체 몇 번 접어 만든 거냐? 이딴 건 변태들이나 만드는 거지.'''"라면서 깠다. 전작인 헬싱에서도 주 무기가 비상식적으로 개조된 총이나 트럼프 카드(...)나 기이하게 꺾인 단검 등 기괴한 병기들을 보면 작가가 여러모로 평범한 무기 자체에 대한 애착은 없는 듯.

Block Strike에서 공격범위가 가장 넓은 근접무기이다.

BLOOD-C에서는 주인공 키사라기 사야는 고신토라는 이름의 일본도로 옛것들을 마구 썰어대며 공격한다.

슈퍼 단간론파 2 뉴 단간론파 V3 -모두의 살인 신학기-에서는 학급재판 중 반론 쇼다운/반론 쇼다운 진타라는 이벤트가 등장하는데, 상대방의 발언을 반박하는 것을 칼로 상대방의 말을 썰어버리는 것으로 묘사했다.

카타나가타리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1700년대이니만큼 카타나가 잔뜩 등장하는데 칼의 범주를 벗어난 카타나가 잔뜩 나온다(...) 게다가 '일본도=예리함'이라는 환상을 차용한 카타나, 일본도가 잘 부러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아예 다수를 제작해 칼을 소모품 격으로 사용하는 카타나,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카타나도 나온다.물론 부러졌다

데드풀이 쌍권총과 함께 즐겨 사용하는 무기가 일본도 이도류이다. 이제는 흑역사화된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는 이도류로 날아오는 총알을 싹 다 베어버리거나 튕겨내는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데드풀 2에서도 이 장면을 오마주한 장면이 나왔는데, 베기는 개뿔, 튕기지도 못하고 다 맞았다(...). 늙어서 힘들다는 드립은 덤.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에 등장하는 후미노 사유키의 취미가 바로 일본도 수집이다. 무기로 사용하는 마법소녀는 토키와 나나카가 있다.

일본에서 서비스하는 게임 중에는 일본도에 모에선을 맞힌 게임도 여럿 있다. 예를 들어 정도.

해황기의 주인공, 판 감마 비젠의 주무기가 일본도이다. 설정상 일본도는 멸망한 문명의 무기이며, 등장하는 날붙이 무기 중에서는 최강이다. 작중 활약을 보면 실제 일본도라 보기는 무리가 있으며, 반쯤은 판타지 무기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백련의 패왕과 성약의 발키리에서는 주인공이 대장장이 아들이고 약 고대 시대에 소환되어 대장간을 만들고 철을 생산하여 일본도를 제작 일본도가 철을 베어버리는 묘사로 비판받았다.

카타나 제로에서는 제로와 드래곤이 일본도를 사용한다.

11. 일본도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

현대의 군충장 연구를 참고하면 전국시대의 전투에서 무기에 의한 부상률은 각각 활, 조총, 창, 투석, 일본도 순이다. 어딜 가나 활과 투석병기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 용감하게 일본도를 뽑아들고 돌격하는 일은 적어도 전국시대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일본도는 다른 무기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본래 도검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위의 연구 결과를 보고 무작정 일본도를 까는 사람도 적지 않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인터넷에서 일본도에 대해 엇나간 환상을 가진 사람이 꽤나 많아 충돌을 빚은 반면 군충장 연구 결과가 인터넷상에도 퍼지기 시작한 근래(2010년도 내외)에 이르러서는[65] 반일감정으로 일본도를 심하게 비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 모두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검이 다른 무기의 보조 무기로서 활약한 것은 동시대 유럽도 마찬가지고 단순히 주무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일본도를 폄하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국시대 이후로 눈을 돌려보면 난전에서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고전하였다는 기록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조총 다음으로 두려운 무기는 '일본도' 였으며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일본도를 바치고 귀화하는 왜인들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척계광의 기효신서나 박제가의 무예도보통지 등에도 일본도를 막을 수 있는 쌍수도에 관한 내용이나 아예 왜검이라 하여 일본도 기법을 실어놓기도 하였다. 일본도에 큰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나 일본도가 역사적으로도 위력적인 활약을 펼쳤던 도검 중 하나였음이 사실이다. 물론 현대의 실험들로 병기 자체의 우수성이 철저하게 비판받기는 했지만, 일본도가 정말로 못 써먹을 무기라면 일본도에 썰려나간 사람들이 애초부터 별로 없었을 것이다. 즉 한계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환경에 따라 충분히 살상력을 발휘한 무기.[66]

유럽의 롱소드가 갑옷의 발달에 맞춰 그 형상이 적극적으로 변화한 것과 달리 일본도는 용도와 형태가 조금은 바뀌었어도 부드러운 것을 가르는 데에 특화된 디자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현대 사극 등에서는 병사(아시가루)들도 삿갓(진가사)에 흉갑과 팔보호대를 걸치고 나름대로 중무장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일본의 모노가타리 에마키(두루마리 그림)의 삽화들을 보면 갑옷을 입었는데 7부바지에 쓰레빠를 끌고 싸우거나 훈도시만 차고 갑옷을 입고 평상복에 조총과 카타나만 차고 참전한 병사들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측 기록화인 동래부사순절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체제가 갖추어지고 상당히 후기인 오사카 전투나 시마바라의 난을 그린 삽화에서는 사극에서 묘사되는 중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그려져 있으나 긴 시대 동안 일본의 전쟁에서 갑주를 철저하게 갖춘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또 아시가루들에게 대여되는 갑옷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유물도 꽤 남아있다.[67] 특히 일본은 날씨가 덥고 습하기까지 해서... 어쨌거나 나름대로 잘 무장하였다 해도 갑주의 유형이 통짜 쇠로 만든 플레이트 아머가 아닌 쇠와 가죽을 혼용한 러멜러 아머에 가까운 만큼 휘어져있는 도검이 더 효과를 발휘하며(나기나타의 하반신 베기가 치명타인 점도 같은 맥락) 감싸주지 못하는 부분도 꽤 많이 드러나 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일본도는 베기에 특화된 디자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양권이 전반적으로 그러하지만 그 중 특히 일본이 도(刀)가 발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유럽에서도 크릭메서, 스위스 세이버처럼 일본도와 흡사한 양손 사용의 휘어진 외날 도는 존재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것은 전장 환경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플레이트 아머까지 갈 것도 없이, 무려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쓰인 사슬 갑옷도 곡도로 관통하는 건 효율성이 떨어진다. 곧게 뻗은 검에 비해 한 점에 압력이 잘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양날검이 갑옷으로 빈틈없이 중무장한 상대에게 적합한 스타일이라면, 일본도(를 포함한 외날도)는 경장갑 보병(혹은 빈틈이 있는 중장갑 보병)을 상대로 적합한 스타일. 때문에 양날도와 외날도의 실용성을 비교하는건 의미가 없다.

일본도는 얼른 보면 다 같아 보이지만 전술의 변화에 따라 디자인의 개선도 많이 있었다. 처음 등장한 시점에서의 타치는 순수한 기병도로써 길고 많이 휜 칼날, 18~21cm 정도로 짧은 손잡이를 가져 한손 사용에 적합했다. 가마쿠라 시대에서는 손잡이가 24cm 정도로 길어져 양손 사용도 감안한 스타일이 되었다가 중갑옷이 유행한 남북조 시대에는 타격력을 중시하여 전체적으로 도검이 거대화되고 노다치(野太刀)라는 장르까지 출현한다. 이후에는 다시 평범한 사이즈로 돌아간다. 카타나는 원래 무로마치 후기에 아시가루 보병집단들이 편하게 쓰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철저한 보조무기였으므로 2척(60.6cm) 정도의 짧은 칼날에 한 손으로 쓰는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국 시대의 전쟁 속에서 기마무사가 급감하고 보병 전술이 확립되자 점차 주력 도검이 되어 칼날과 자루가 길어지더니 기존의 주력 도검인 타치를 대체하게 된다.

다른 문화권의 도검들이 손잡이를 비롯한 부품까지 완전하게 조립된 것을 완전한 도검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일본도는 칼날만을 완전체로 보고 손잡이나 기타 부품, 즉 도장구(刀裝具)는 하나의 옷처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의 도검, 일본도의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환도조차 손잡이를 분리할 수 없도록 슴베를 길게 빼서 망치질을 하여 리벳처럼 뭉개고 자루 옆에도 금속 파이프(유소)를 끼워 튼튼하고 분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면 일본도는 대나무 못(메쿠기)을 끼워 고정하기 때문에 필요시 쉽게 빼서 분리할 수 있게 만든다.

도장구를 옷 개념으로 보므로 칼 한 자루라도 여러 개의 도장구가 현존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약간의 가공만으로 자유롭게 도장구 부품을 교체할 수 있으므로 쯔바, 후치, 카시라, 츠카이토, 메누키 등의 다양한 부품을 각양각색으로 만들어 따로 판매하는 시장도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으며, 주인이 한 가지 칼로 다양한 스타일로 개조하여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날만이 아니라 도장구도 골동품으로써 많은 수가 보존되어 있으며 일본 내외에서도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일본도가 세계적으로 인기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러한 자유로운 커스텀 문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시대극에서 볼 수 있는 무사들이 일본도를 두 자루 차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니혼자시(二本差し)라고 부른다. 보통 사용하는 일본도를 혼자시라고 부르고 보조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일본도를 와키자시라고 부른다. 여기서 혼은 本을 뜻하고 와키는 옆구리이다. 즉 이름부터 보조적인 무장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는 셈. 혹은 다이쇼(大小)라고도 칭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것을 보다 공고히 하여서 무사는 두 자루의 일본도를 차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무사이면서도 실전에 나갈 염려가 없는 은거자나 관직이 없는 로닌 등은 한 자루만을 찼다. 이렇게 도검 패용이 문화로 완전히 자리잡은 까닭에 메이지 유신 이후 내려진 폐도령은 상당한 사회적인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칼을 차는 것은 무사계급의 특권이나 무사계급이 아닌 경우에도 와키자시의 휴대는 허락되었기 때문에 호신이나 싸움을 목적으로 농민이나 박도 등이 와키자시를 휴대하였다가 무사계급과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극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후에는 아무래도 길이가 긴 칼이 싸움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퍼져 길이가 와키자시로써 규정된 최대 길이인 2척에 육박하는 소위 오오와키자시라는 물건이 등장하였으며 불량배나 박도가 와키자시를 휴대하는 풍습은 후세까지 이어져서 야쿠자가 휴대하는 도스 등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AVGN은 이걸로 닌자 거북이 3 비디오 테이프를 두 동강 내었다

12. 일본도의 종류

12.1. 형태 및 길이에 따른 구분


길이별로 나열하면
노다치(칼날 길이 90cm 이상(3척)급)
타치, 카타나(60cm(2척)~90cm급)
와키자시, 코다치(30cm(1척)~60cm급)
탄토(30cm 이하급)이 된다.

넓은 의미의 일본도는 다음을 포함한다.

12.2. 시대별 구분

  • 상고도(上古刀): 고도(古刀) 이전의 일본 도검들. 대부분 직도(直刀)이며, 보통은 일본도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 고도(古刀): 헤이안 시대 중기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신도(新刀): 케이쵸 원년(1596) ~ 안에이 말년(1781)
  • 신신도(新々刀): 텐메이 원년(1782) 이후
  • 현대도(現代刀): 메이지 유신(1867) 이후
    • 일본군도: 메이지 유신 이후 제작하여 일본군이 사용한 도검.
      • 구군도: 메이지 유신 때부터 쇼와 9년(1934). 일본도가 아닌 서양식 세이버 도검의 양식이다.
      • 신군도: 쇼와 9년 이후. 일본제국 국수주의가 강해지면서 일본도의 형태로 돌아온 군용 도검.
      • 쇼와도(昭和刀): 보통 군용 도검을 가리키며, 전통미술품으로서의 일본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공안위원회의 소지 허가를 받아야 소지할 수 있다. 다만 근현대 제작된 모든 도검들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2.3. 작풍별 구분

일본도는 그 특징과 작풍에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고카덴(五箇伝)이라고 한다. 고카덴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작풍은 와키모노(脇物)라고 부른다.

12.4. 와자모노

날이 잘 드는 일본도를 와자모노(業物)라고 부른다. 1797년 출간된 야마다 아사에몬(山田浅右衛門)의 저서 〈회보검척〉(懐宝剣尺)은 228명의 도공들이 만든 검들을 평가하여 사이죠오오와자모노(最上大業物), 오오와자모노(大業物), 요키와자모노(良業物), 와자모노(業物), 오오와자모노·요키와자모노·와자모노 혼합의 다섯 종류로 단계를 나누었다. 이후 1830년 간행된 〈고금단야비고〉(古今鍛冶備考)에서 내용을 추가하여 도공 246명을 평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와자모노 참고.

13. 유명한 일본도

일본어 위키백과

13.1. 나무위키에 등록된 일본도 목록

자세한 것은 일본도/목록 문서 참고.

13.2. 가공의 일본도

가공의 도검 문서의 일본도 목록 문서 참고.

14. 참고자료/외부 링크

  • 참고서적
    • The Craft of the Japanese Sword
    • Japanese Sword polishing

파일:attachment/일본도/e0006881_4771e7a754e29.jpg
  • 조합방법에 따른 일본도의 단면도


[1] 사진 속의 인물은 나카야마 하쿠도. 몽상신전류의 창시자이다. [2] 쓰바, 정확히는 아오이가타. [3]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고 다닐 수 있는 검의 크기에 대한 제한이였고, 공연용 소품이나 신사에 봉납되는 용도 등으로 이후로도 저 규정보다 큰 칼이 제작된 사례가 있다. [4] 게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전 경험 부족은 대규모 전쟁의 부재라는 의미에서 논의되는 것이지, 북방의 여진족과 대치하면서 이방인의 칼질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도에 대한 조선인들의 깊은 인상을 단순히 실전 경험 부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5] 물론 무기 성능 및 사용 방법 등의 발달은 아무래도 소규모 전쟁보다는 대규모 전쟁 경험이 있어야 그에 대한 필요와 뒤따른 집중적 자본, 노력 투자 등이 더 많아져 생기기에 실전 경험 부족 요소를 완전히 간과하기는 어렵다. 또 북방의 상황과 남방 일본인들과의 전투 상황은 일치하지 않는데, 일본인들과 가장 많이 싸운 것은 한중일 중 아무래도 일본인 자신들(전국시대라서 그렇다. 조선과 명이 일본도를 전투무기로서 받아들인 시기는 밑의 서술을 참고하면 조선은 전국시대 직후인 임란, 명은 전국시대 도중인 16세기 중반.)이니 일본인들과의 전투에서는 일본도 및 일본도를 다루는 기술이 당연히 더 좋을 수밖에 없다. 무기와 그 사용법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인들과의 제대로 된 싸움(조선은 임란, 명은 북로'남왜') 속에서 일본도가 좋은 효과를 발휘하자 '전투무기'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6] 송나라-명나라 기록에 화살과 창으로는 여진 철기병의 갑옷을 뚫지 못하니 얼굴을 찌르거나 투구를 벗기고 머리를 찍어서 죽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조선에서도 당갑(唐甲)을 입은 여진인에게는 화살이 통하지 않으니 총통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7] 일본 고류검술 3대 원류(나머지는 넨류, 신토류) 중 하나. [8] 모쿠로쿠(目錄). 면허개전자에게 내리는 기술의 비전을 설명한 두루마리. 다만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 건 아니고 주로 검술을 끝까지 배운 사람이 까먹는 것을 방지하도록 기술명과 간단한 묘사를 첨부한 것들이다. 사실 이 시절 무술교육은 문외불출과 구전이 기본이었다. [9] 중국어 발음은 wōdāo(워다오). [10] 중국어 발음은 shuāngshǒudài(솽서우다이). [11] 중국어 발음은 miáodāo(먀오다오). [12] 본격적으로 왜도라 부르는 것은 조선왕조 초중기 이후이며 초기의 실록 기사를 보면 일본에서 가져온 검 역시 환도(環刀)라고 부르는 내용이 곳곳에 있다. 애초에 환도라는 말 자체가 Curved Blade(굽은 칼)로 직역된다. [13] 실제로 일본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스승이자 카게류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이스 히사타다가 왜구 출신이었으며 중국은 왜구를 통해서 검술서를 입수하기도 했다. [14] 실제로 왜구와의 전투에서 고려군이 단병접전을 통해 박살냈다는 기록도 흔히 찾을 수 있는데 최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15] 실제로 세종 실록에 일본에서 일본도 제작법을 배워온 사람이 있었는데 진퉁 일본도와 다름이 없다며 포상을 내리긴 했지만 이 기술을 보급하거나 군사에 활용하진 않았다. [16] 실제로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조선 건국 초까지는 병사들에게 궁술과 함께 창검술도 강조했지만 이후 활만을 익히며 창검술을 소홀히 한다는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7]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2025_002 [18] 여담인데 과거에는 검술을 칼춤이라고도 많이 표현했으며 무관들이 행사 등지에서 칼춤을 선보였다는 기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 이는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조선검술과 일본검술의 유사성에 대한 논증이 필요해 보인다. 기술적인 부분을 예로들며 검법의 유사성을 드러낸 대목이 있거나 그에 대한 논증이 있다면 합당한 추정이겠지만 단순히 '백제왕을 뛰어난 검술로 암살했던게 우리 역사에 있으니 일본 검술도 그 영향을 받았을게 분명하다' 하는 것으로는 유사성에 대한 추론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인의 검술을 전습하는데 있어서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배우지만 옛날엔 더 뛰어났다, 왜인들에게 전수한건 우리일것이다'하는 위안적인 서술일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20]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재료와 장인이 있다면 환도나 일본도나 큰 차이는 없으며 그것이 상식이다. 특히 기껏해야 전장 90cm~`100cm 정도로 크기가 제한되 환도와 비슷한 길이가 된 우치가타나의 경우 말할 것도 없고 근대 이전 철강 제련엔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했지만 현대와 같이 안정된 품질을 얻어내는것이 어려웠다. [21] 칼이 날카롭다는 당연한 소리가 아니라, 무기가 정(精)하거나 예(銳)하다는건 그냥 강하고 좋은 무기라는 뜻의 관용표현이다. [22] 파일:wad3211.jpg [23] 대장기를 호위하는 친위부대, 또는 그 정도로 우수한 정예병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표현 [24] 왜검을 모방한 단도법 [25] 칼끝이 서까래에 걸쳤기 때문 [26] 근대 세이버 검술처럼 몸을 한쪽으로 튼 반신세와 직선적인 스텝 위주가 아닌, 상대적으로 스텐스 변경이 자유롭고 자연체에 가까운 움직임 [27] 셜록 홈즈 소설에 홈즈가 주짓수(정확히는 바리츠)를 배웠다는 언급이 나오듯, 당시 영국에서 일본 유술은 호신술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28] 아버지인 제25대 후지와라 카네후사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전통 예술에서는 동일한 이름을 가문 대대로 물려 쓰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 앞에 몇 대째인지 숫자를 붙여 구분한다. [29] 일본어로 타마하가네, 즉 옥강(玉鋼). 일본의 전통 제철 방식인 타타라 제철법에서는 현재의 고로 제철방식과 달리 철광석을 완전히 녹일 만한 온도를 얻을 수 없기에 높은 온도로 가열된 광석 표면에서 연료로 넣은 숯에서 발생한 일산화탄소가 철의 산소를 떼어 환원시키는 방식의 제철 방식을 사용했으며, 이 방식의 특성상 티타늄, 규소산화물이나 바나듐과 같은 불순물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채 환원된 철과 불순물이 덩어리져 섞인 철괴 상태의 결과물이 얻어졌다.때문에 이대로는 검을 그대로 만들 수 없었고 철의 탄소 농도를 어느 정도 골고루 맞추며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인 접쇠 가공이 발달하게 된다. [30] 앞서 언급한 것 처럼 환원된 철괴가 균일한 탄소함유량을 가지지 않았기에 조각을 낸 후 도공이 이를 분류하는 과정을 거친다 [31] 이 과정에서 전문화된 기기가 없이 장인의 감에 의존해 철의 강도를 분류하는지라 완성된 개개의 도검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게 된다. [32] 일본산 종이인 화지. 일본은 화(和)를 중시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이 '화' 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일식이라는 표현도 일본에서는 화식이라 표현한다. [33] 직역하면 잿가루. [34] 종이로 감싼 뒤, 진흙물을 묻히는 이유는 가마에 들어가면 진흙물이 굳어 외부의 산소와 차단되어 내부가 밀폐되기 때문이다. 산소는 철을 산화시키는 것은 물론 포함된 탄소 역시 산화시키는 만큼 접쇠 과정 중 손실을 막기 위해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또한 뿌린 지푸라기 조각들이 타면서 탄소를 금속에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지푸라기나 잿가루를 많이 뿌리는게 아니라 적정량 뿌리는 편이다. [35] 접쇠. 영어로는 패턴-웰딩. 참조. 쇠를 두드리면 불순물이 빠져나온다. 다만 두드린다고 탄소량이 조절되는 것이 아님에 주의. [36] 이는 코부세(甲伏)라고 하여 강한 쇠와 연한 쇠를 조합시키는 방식이다. 강한 쇠와 연한 쇠를 조합시키는 방법은 맨 아래의 그림과 같이 다양하다. [37] 목탄을 섞은 흙이다. [38] 대개 가공자의 시그니처 하몬 문양으로 진흙을 바르곤 한다. [철과] 탄소(Fe-Fe3C)의 상태평형도를 보면 일반적인 철강의 탄소함유량인 0.3~2wt% 범위내에서 재료의 상이 모두 오스테나이트로 변태할 때의 온도는 최소 738 ℃이며 모든 범위내의 재료가 모두 변태되려면 최소 900℃ 이상의 온도가 필요하다 [40] 칼날은 800 ℃, 측면은 750~760 ℃, 칼등은 720~700 ℃ 정도라고 한다. [41] 이 과정이 생략될 경우 지나치게 경도가 높아 칼이 쉽게 부러지게 된다 [42] 후박나무(일본목련), (호노키)를 많이 사용한다. [43] 가오리 가죽이 대표적이다. [44] 면끈은 에 젖어서 미끄러질 위험이 있고, 가죽끈은 비싸다. [45] 동호인(銅護刃)이라고도 부르는 칼날 뿌리 부분의 황동제 부품. 칼집에 넣을 때 칼집 입구와 꽉 맞물려 칼이 안 빠지게 하며, 이때 칼날은 하바키 덕택에 칼집 중간에서 붕 뜨므로 칼집 어디와도 닿지 않는 최적의 수납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46] 일본에서는 일본도를 전통문화유산으로 보며 무기 금지법에 의해 현대 강재를 이용한 생산은 용납하지 않는다. 미군정 GHQ는 전쟁 중 일본군에 학을 뗀 나머지 무도를 전면 금지하고 일본도를 모조리 압수하여 폐기 처분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측이 일본도는 전통 예술품임을 강조하며 세세한 구분과 감상 포인트 등 예술품으로써의 특징을 보여주어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이때 이후로 일본도와 화승총, , 나기나타 등은 전통 예술품으로 분류되어 자유롭게 유통과 구입이 가능하지만 같은 도검이라도 현대 강재로 만들어진 총검이나 무라타도, 서양 도검 등은 무기로 분류되어 소지가 까다롭다. [47] 이 역시 원료의 문제가 아니라 타타라 제철 방식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용융을 통해 불순물을 슬래그 형태로 제거할 수 있는 고로 제철 방식에 비해 타타라와 같은 환원방식의 경우 고상의 불순물이 철과 섞여 있기 때문에 불순물 제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48] 비숙련자가 하면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부에 하기레라고 하는 공간이 생기며 이는 일본도에서는 하품 취급도 못 받게 되는 결함 요소이다. 당연히 내부에 공간이 있는 만큼 내구성도 나쁘다. [49] 덧붙여 이 '신가네'라는 말은 연철 소재의 심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성 소재를 뜻하기도 한다. [50] 덧붙여 이 '하가네'라는 말은 고탄소강 소재의 피철(皮鉄, 皮鐵)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성 소재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 말은 일본어 강철을 의미하는 단어들 중 하나인 ' 하가네(鋼)'와는 동음이의어이다. [51] 실제로 일본군도 중 철공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만든 만철도는 뛰어난 성능으로 일본 육군 내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52] 로크웰 경도. 0.5% 탄소강은 HRc 45 정도, 0.7% 탄소강은 HRc 55 정도 된다. [53] 당장 환도의 제작에도 사철에서 추출한 철광석이 쓰였으며 환도 생산지로 전라좌수영이 유명한 이유로 바로 옆에 사철 광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54] 앞에서도 말해듯이 현대적 강재를 이용한 일본도의 제작은 금지되어 있으나, 검증용으로 특별히 허가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55] 3kg이 넘어가는 검은 대게 빠르게 휘두르기 힘들어 무기로서의 운용성이 크게 떨어진다. [56] 전통 일본도는 마감의 한계가 있어 시참을 하면 할수록 빛이 바래지고 녹까지 쓴다. 칼날에 이라도 빠지면 수리하기가 난감하다. [57] 전통방식으로 제조된 일본도는 도신에 이름을 세기지 않은 무메이(무명)가 기본이 2~300만 원 정도이며 전통 있는 유명 유파의 계승자가 직제조한 제품은 검 하나에 수천만 원 대에 육박한다. [58] 일본도의 현실적인 부분을 제대로 반영해서 묘사한다면, 일단 제련 과정에 대해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저질 철로 어떻게든 무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발악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는 것이 맞으며, 이를 듣고 무슨 전설의 칼을 만드는 제조법이라도 알아낸 양 경악과 감탄을 내뱉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일본도 자체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 역시 부적절. 다만, 그런 걸 어디에 쓸 거냐며 마냥 비판만 하기보다는, 대장장이 드워프가 주인공의 의뢰를 받고 현실보다 더 뛰어난 강재와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일본도를 만들어준 다음 이게 그 일본도라는 칼이라는 거지? 제법 쓸만한 물건이구먼. 잘 쓰라고 형씨. 정도로 약간의 호평을 덧붙여 주는 정도면 적당할 것이다. [59] 다 섞어서 만들거나 엄청나게 압축시켜 만들거나 용린분이라던가 하는 다른 사기템을 넣기도 한다. [60] 정확히는 이치고의 시해는 일본도보다는 그냥 전반적으로 확대된 식칼 모양. [61] 다만 당시 무라마사 무라사마라고 표기한 오류가 있었다. 이를 패러디한 것이 메탈기어 라이징 리벤전스의 등장인물 사무엘 호드리게스의 무기 무라사마 블레이드. [62] 바람의 검심으로 유명한 와츠키 노부히로는 무장연금에서 일본도 형상의 무장을 구상할 때 장식을 달려고 했으나 주변의 반대로 결국엔 손잡이 끝에 술을 붙이는 것으로 간략화 시켰다고 한다. [63] 한조의 언급이나 시마다 일족의 용의 힘을 보면 어디까지나 검은 매개체일 뿐 진짜 힘은 녹색의 용쪽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평범한 라이터에 특수한 힘을 주입해서 화염방사기급 화력을 가지게 하는 것. [64] 그나마 납득가게 한다면 전통 방식을 지켜가며 만들었다고 해도 실전에 쓰일 일은 없는거나 다름없는 현대판과는 달리, 진짜 사람 써는데 쓰인 당시에 더 공들여가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거기에 추억보정과 어떤 무기로든 어느정도 실력은 내는 무사시 본인이 있는 만큼... [65] 인식 변화의 시작은 특정 블로거가 센고쿠를 인용한 것이 시초에 가깝다. 이게 다시 출처 불분명한 지식으로 인터넷에 퍼져나가기 시작. [66] 일본도는 위에서도 설명되는 것처럼 경장갑 보병을 대상으로 힐 때, 막대한 살상력을 가지는 병장기이다. 당시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국가들 대부분의 군제 및 병과는 경장갑 보병 위주였기 때문에 일본도에 의한 사상자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으며 당시 일본 병졸들이 사용한 검법은 팔/다리와 허벅지 등의 관절과 안쪽 부위 등 갑주가 방어해주기 힘든 사각지대를 일격에 베어내 상대를 전투불능 또는 과다출혈을 일으키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협적이었다. 오늘날의 영화에서처럼 칼과 칼이 맞부딛치고 갑주를 관통하는 장면에 익숙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면 강도가 약한 일본도가 뭐가 위협적이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전투에서는 칼 들고 달려와 허벅지의 경동맥, 팔목을 칼질 몇번으로 빠르게 썰어내고 가는 것이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이것이 엄청난 공포로 느껴졌을 것이다. [67] 이런 일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상기한 바와 같이 사철을 사용하여 제련하면 칼 한 자루 만드는 데에도 결과물의 10배 이상의 사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만큼의 숯도 필요해서 일본의 옛 묘사를 보면 창칼을 만드느라 숲이 사라진다고 할 정도. 이런 상황에서 갑주까지 쇠로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 환경적으로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시가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부대의 편제 장비 등을 사무라이의 녹봉에서 구입하였으므로 개인이 남겨먹기 위해서 아시가루들의 무장이 빈약할 여지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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