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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李永勳|Lee Young-H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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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0년 3월 6일 |
서울특별시 | |
사망 | 2008년 2월 14일 (향년 47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작곡가, 작사가 |
수상 |
제2회
골든디스크대상 작곡가상 (1987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명예의 전당[1] (2020년) |
학력 | 서라벌고등학교 (졸업) |
가족 |
배우자 김은옥 아들 이정환 |
종교 | 개신교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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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영훈 선생이 그렇다고
발라드를 발명한 건 아니다. 그는 없는 것을 창안해낸 게 아니라 있어온 것을, 있어야 할 것을 비로소 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
난 아직 모르잖아요', '
사랑이 지나가면', '
그女의 웃음소리뿐', '
광화문 연가',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과 같은 낯선 패턴의 선율이 어찌 그토록 통렬한 전파대첩을 일궈냈겠는가. 당시 한 여기자는 말했다. '바라던 노래가 이제 비로소 나온 것'이라고...(중략)...1980년대 말에 와서는 급기야 가요와 팝의 위대한 역전이 이뤄졌다. 이영훈 선생의 업적 중의 업적은 서러움과 멸시의 굴레에서 허덕이던 가요가 당당하게 대중음악의 주체로 상승하게 된 밑거름을 제공했다는데 있다. 만약 새로운 패턴의
발라드 곡 쓰기가 그의 개인적 성공이라면 팝과 가요의 우선 순위 바꿈은 그가 쾌척해낸 사회적 성공일 것이다.
―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 작곡가 이영훈 1주기〉
―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 작곡가 이영훈 1주기〉
이영훈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하여 통속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는 말로 격하되지 않을 '격이 있는 사랑노래'를 썼다. 과장과 위악과 오만 없이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풍성한 선율과 혼잣말과 같은 가사에 저며 냈다. 그러면서도 자기연민과 감정과잉 속에 허우적대지 않는 담담함이 잃지 않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살다보면 다른 가능성이 두려워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그리고선 '그래 차라리 잘됐어'라고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베어져 저만치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 대중음악 평론가 나도원,〈 故 이영훈을 말하다〉
― 대중음악 평론가 나도원,〈 故 이영훈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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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발라드의 원형을 만든 故 이영훈 작곡가 STORY[2] | 작곡가 이영훈- 지식채널e # |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작곡가, 작사가다.
유재하와 함께 '한국형 팝 발라드의 개척자'라고 평가받으며, 전성기 시절인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당시 국내 발라드계에서 한 획을 그은 작사가, 작곡가[3]로 이름을 떨쳤다. #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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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구 정동의
정동제일교회 건너편에 위치한 이영훈 노래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훈씨! 이제!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영훈씨의 음악들과 영훈씨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당신의 노래비를 세웁니다. 영훈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2009. 2. 14." |
이영훈은 1960년 3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굉장히 엄숙하고 엄중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편을 잡은 교사였고, 형은 의사였다고 한다. 조용하고 공부만 했던 집안으로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건 상상할 수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영훈이 음악을 너무 하고 싶어 해서 그의 어머니가 70만원 되는 월급으로 58만 원짜리 피아노를 사줬다고 한다. 그는 그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했다. 무엇이든지, 어떤 음악이든지 그 피아노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고 했다. 중학교 때 이 피아노로 그의 히트곡 ‘ 소녀’, ‘ 사랑이 지나가면’을 작곡했다고 한다. 이영훈은 정규음악 수업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독특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바이엘, 체르니를 혼자서 독학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음악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 쪽 공부를 하기를 원했기에 집에 기타 소리가 나거나 하면 무척 화를 내기도 했으며, 기타를 부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영훈은 밖으로 많이 맴돌았다고 하며 집안에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아니고 '공부하라, 공부하라' 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그를 지원해줬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피아노도 사줬고, 형이랑 누나가 공부하다가 조금 쉬고 있을 때 유일하게 이영훈이 피아노를 조금이나마 연주하게끔 가족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
이처럼 그는 자신을 음악가로 만들어 준 사람이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유난히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앞날을 위해 늘 골방기도를 했고, 가족 모두 반대했던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음악을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결사반대했던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과 달리 남몰래 늘 격려했다. "영훈아, 나는 네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네가 선택한 만큼 네가 책임져야 해. 그래도 엄마는 네가 착해서 참 이뻐."라며, 어머니는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하는 아들의 부탁으로 70여만 원 되는 월급에서 서슴없이 58만 원 하는 피아노를 사 주었다. 그래서 믿어준 어머니에게 자신의 성공을 보여 드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영훈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꼬박 3년을 투병하였다. 그가 처음 발표한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10주 동안 각종 가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었다. 그는 잠깐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를 붙잡고 성공 소식을 알려드렸더니, "이젠 피아노 사준 돈 다 갚아"라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2주 후에 운명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사주신 그 피아노로 곡을 만들었고, 골든디스크상을 세 번이나 받을 수 있었다. #
이영훈은 원래는 연극, 방송, 무용 등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비교적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작곡가였다. 이영훈은 데뷔하기 전까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주제가를 작곡하거나 피아노 세션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84년 김의석 감독의 데뷔작인 단편 '창수의 취업 시대' 영화음악을 맡으며 작곡가로서의 서막을 올리며, 1985년에 대중음악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다. 작곡가로 데뷔하기 전, 이영훈은 영화와 미술 음악을 하면서 클래식 감성을 쌓아왔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감각은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지속됐다.
Q.
이문세 씨를 처음 만난 날은?
이영훈: 제가 녹음하던 킹레코드라는 녹음실에 놀러왔었어요. 그 당시엔 그곳이 메카였어요. 조용필 선배님, 나훈아 선배님, 김추자 선배님 등이 다 그쪽 출신이신데, 이문세 씨가 놀러 오셨더라고요. 당시 저는 아르바이트로 선배님 밴드의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선배님께서 이문세 씨와 저를 소개시켜주셨어요. #
이영훈: 제가 녹음하던 킹레코드라는 녹음실에 놀러왔었어요. 그 당시엔 그곳이 메카였어요. 조용필 선배님, 나훈아 선배님, 김추자 선배님 등이 다 그쪽 출신이신데, 이문세 씨가 놀러 오셨더라고요. 당시 저는 아르바이트로 선배님 밴드의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선배님께서 이문세 씨와 저를 소개시켜주셨어요. #
한편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1977년 가수 겸 MC로 데뷔한 이문세는 1집과 2집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과 '파랑새'를 발표하지만, 가수보다는 오히려 라디오 DJ로서 명성을 더 얻고 있었다. 1985년 어느 날, 이문세는 신촌블루스의 엄인호를 만난 자리에서 새 앨범 작업을 위한 작곡가를 부탁하였다. 이때 엄인호는 마침 그의 연습실에서 작업하고 있던 신인 작곡가를 소개하게 된다.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이문세가 작곡가 이영훈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굉장히 수줍어하는 그에게 곡을 좀 들려 달라고 했다. 그가 마지못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첫 멜로디가 내 심장을 쳤다. 지금의 ' 소녀'였다. 나한테 곡을 줄 수 있느냐고 묻자, 자기는 아마추어여서 히트도 안 될 거라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6개월에 걸쳐 8곡을 완성한 이영훈은 "쉬운 노래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니 30분 만에 한 곡을 만들었다. 그 곡이 바로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였다. 이문세의 3집 대표곡이 된 이 노래는 KBS의 '가요 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였으며, 동시에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에서 10주 연속 1위를 거머쥐는 대히트곡이었다. 이 히트로 이영훈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사가, 작곡가로 부상하게 된다.
이문세에게 이영훈은
구원의 손길 그 자체다. 처음 낸 두 앨범은 이렇다 할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3집에서 '난 아직 모르잖아요', '
휘파람', '
소녀'가 연달아 많은 사랑을 받음에 따라 이문세는 한순간에 스타 대열에 들었다. 1987년에 발표한 네 번째 앨범에서도 '
사랑이 지나가면', '
이별 이야기', '가을이 오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 다수의 노래가 인기를 얻어 이문세는 가수로서 탄탄대로를 걷는다.
#
서정가요의 발전을 추동한 이영훈과 이문세를 이러한 발라드 집착과 연결짓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앨범은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고, <이문세 4>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나가면'을 시작으로 고급스러운 현악연주가 수놓인 '밤이 머무는 곳에'와 '이별 이야기', 신스 팝과 록을 반영한 '그대 나를 보면'과 포크송 '가을이 오면'으로 채워진 A면은 물론, '깊은 밤을 날아서'와 '슬픈 미소', '굿바이'와 '그녀의 웃음소리뿐'으로 이어지는 B면까지의 모든 곡들이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영훈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다듬어 써 내리듯 앨범을 만든 완벽주의자였다. 이들의 성공은 잔뜩 부푼 풍선에 바늘 끝을 갖다댐으로써 이루진 것이 아니었다. 이영훈은 화성적인 안정성과 구조적인 완결성을 중시했으며, 대중성을 획득하면서 품격을 유지하는 대중음악의 조형방식을 제시했다. 어렵지 않으면서 틀이 잡힌 곡들의 저변에는
바흐의 숨결이 남은 클래식과 팝의 새로운 조류를 수용한 감각이 흐른다. (중략) '이문세 3'부터 이문세 5'까지 연이어 성공하면서 이영훈과 이문세는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 가뜩이나 천편일률적이었던 대중음악의 소재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 나도원 (대중음악 평론가), 〈 故 이영훈을 말하다〉
― 나도원 (대중음악 평론가), 〈 故 이영훈을 말하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어딘가 모를 막연한 느낌의 친화력, 한국인이라면 즉각적으로 호응할 듯한 그 친밀감은 숨길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20대와 30대 여성은 물론 참신한 유행에 민감한 10대 여고생들은 특히 그랬다. 그들은 너도나도 ‘빠르게’ 이문세 노래에 흡수되었다. 실은 그의 보컬에 실린 이영훈의 멜로디에 속속 포박된 것이다. 한마디로 곡이 너무 좋아서였다.
이영훈이 국내 대중음악 역사에서 ‘게임 체인저’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들의 성원에 있다. 팝 발라드가 고통 속에 주류에 안착한 게 아니라 무혈입성이라고 할 만큼 부드럽게 착지하게 된 것 또한 그들 덕이다. 이것도 게임을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영훈은 더 큰 게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중략) 하지만 이영훈의 곡들이 음악수용자들에게 어필하면서 판은 다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팝을 들어야 했던’ 그들 사이에선 ‘이제 우리 가요도 들을 만하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가요를 듣는 애들은 수준이 낮아!’라는 이전의 무시를 고려하면 거의 천지개벽이었다. 팝 프로는 하향세, 가요 프로는 상승세가 이어지더니 1988년에 가서는 마침내 팝과 가요의 역전이 이뤄졌다. 게임 체인지, 가히 혁명이었다.
이영훈의 진정한 업적은 멸시의 늪에 허덕이던 가요가 팝을 넘어 유행음악의 주체로 거듭나는 기초를 마련한데 있다. 이영훈의 궤적을 단지 예술적 측면에서가 아닌 시대적 사회적 측면으로도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K팝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성공을 쾌척해낸 우리 대중가요가 서구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한 서막을 이영훈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
이영훈이 국내 대중음악 역사에서 ‘게임 체인저’가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들의 성원에 있다. 팝 발라드가 고통 속에 주류에 안착한 게 아니라 무혈입성이라고 할 만큼 부드럽게 착지하게 된 것 또한 그들 덕이다. 이것도 게임을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영훈은 더 큰 게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중략) 하지만 이영훈의 곡들이 음악수용자들에게 어필하면서 판은 다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팝을 들어야 했던’ 그들 사이에선 ‘이제 우리 가요도 들을 만하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가요를 듣는 애들은 수준이 낮아!’라는 이전의 무시를 고려하면 거의 천지개벽이었다. 팝 프로는 하향세, 가요 프로는 상승세가 이어지더니 1988년에 가서는 마침내 팝과 가요의 역전이 이뤄졌다. 게임 체인지, 가히 혁명이었다.
이영훈의 진정한 업적은 멸시의 늪에 허덕이던 가요가 팝을 넘어 유행음악의 주체로 거듭나는 기초를 마련한데 있다. 이영훈의 궤적을 단지 예술적 측면에서가 아닌 시대적 사회적 측면으로도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K팝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성공을 쾌척해낸 우리 대중가요가 서구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한 서막을 이영훈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
이영훈은 3집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필두로 '휘파람', '소녀'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팝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인기의 절정은 1987년에 발표한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이 수록된 이문세 4집. 4집을 통해 이영훈은 그야말로 '발표는 곧 히트'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며, 그해 골든디스크 대상과 작곡가상을 휩쓸며 최고의 작곡가로 등극한다. 무려 285만 장이나 팔린 4집은 그때까지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상 최다 음반판매기록을 세우는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1988년에 나온 이문세의 5집 앨범은 선주문만 수십만 장에 달했다. 5집에 실린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 광화문 연가', ' 붉은 노을' 등은 10~20대의 입에서 저절로 흥얼거리게 만들었고, 전파를 탄 이문세의 노래는 온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 음반으로 이문세는 골든디스크상 3연패를 이룩하게 되었고, 이영훈이 추구했던 고품격의 팝 발라드는 대중가요에 대한 이전 인식을 바꾸게 하였다. 그들의 인기로 그동안 라디오 음악의 전성기를 누렸던 팝송 프로그램들이 서서히 사라지며, 가요 프로그램들이 대거 편성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팝 발라드의 태동은 대중가요 변화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현대 한국 발라드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각각 1989년에 발표된 이문세 6집과 1991년에 발표된 이문세 7집에도 변함없이 참여하여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문세와의 갈등으로 이문세는 8집을 이영훈이 아닌 다른 작곡가와 작업을 했고, 둘은 1995년 발매된 9집에서 재회하게 된다.[4] 9집은 예전처럼 전곡을 이영훈이 맡았는데, 이 앨범이 다소 부진한 뒤, 10집과 11집에서 이문세는 이영훈의 곡을 한 곡 씩만 불렀다.[5][6] 또 다시 모든 노래를 작사/작곡하게 된 이문세 12집에서 이영훈은 1987년부터 만들기 시작해 2001년에야 발표하게 된(가사를 쓰기 전 이미 연주곡으로는 한 차례 발표했었다.), 스스로 꼽는 최고의 작품 '슬픈 사랑의 노래'를 발표한다.[7]
2003년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떠나 몇 년간 휴식기를 가지기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이문세와의 작업 이외에도 드라마,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고 히트한 자신의 곡을 편곡하여 관현악으로 구성된 소품집들을 발표한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ABBA의 히트곡으로 구성된 뮤지컬 맘마미아처럼 자신의 히트곡들로 구성한 광화문 연가라는 뮤지컬을 구상했지만 대장암 판정을 받은 후 투병하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한 바람은 이영훈과 함께했던 제작진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8] 마침내 2011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다.
고인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몇 편의 글을 남겼는데(본문도 그 글을 많이 참고했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첨부한다.
제목 : 또 일주일...
작성자 : 작곡가 이영훈
작성일 : 2007-12-20 17:20
아마 몇 일간 내 모습이 궁금들 하지 않았어?
퇴원하고 닷새 만에 또 입원했다가 그저께 퇴원했습니다.
나도...
할 말이 없어.
지쳤구.
지겹구.
한편으론 웃기기도 하구.
그러다가도 고통이 밀려 오면 ..
아무소리, 못하지. ^^
병원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이야.
나를 보는 사람들이 또 얼굴 본다해서...반갑다고 웃을수도 없고
병원에선 서로 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들 다짐들 하고 퇴원들 하잖어.
그러다가 뜻밖에 또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민망들 하겠어? ^^
아...
이제 병원 좀 제발 안갔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약한 말 하고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는 것 처음이지?
이제 많이 힘이 드는구나.
작성자 : 작곡가 이영훈
작성일 : 2007-12-20 17:20
아마 몇 일간 내 모습이 궁금들 하지 않았어?
퇴원하고 닷새 만에 또 입원했다가 그저께 퇴원했습니다.
나도...
할 말이 없어.
지쳤구.
지겹구.
한편으론 웃기기도 하구.
그러다가도 고통이 밀려 오면 ..
아무소리, 못하지. ^^
병원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이야.
나를 보는 사람들이 또 얼굴 본다해서...반갑다고 웃을수도 없고
병원에선 서로 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들 다짐들 하고 퇴원들 하잖어.
그러다가 뜻밖에 또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민망들 하겠어? ^^
아...
이제 병원 좀 제발 안갔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약한 말 하고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는 것 처음이지?
이제 많이 힘이 드는구나.
아들 이정환: 혼수상태에 빠지셨을 때인데, 가끔씩 의식이 돌아오셨었어요. 그럴 때마다 허공에 대고 지휘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정말 아플 때인데도 옅은 미소 띄시면서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었다고….그때 들은 멜로디 모티브를 노트에 힘겹게 적으셨던 메모가 있어요. 밑에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쓰셨더라고요. 천국에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넘쳐나고 본인 음악은 쓰레기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신기했죠. 나중에 할아버지가 정말 묵묵하신 분인데, 오셔서 병상에 계신 아버지 손을 잡더니 너 같은 대단한 아들을 둬서 정말 자랑스럽다고 처음 칭찬해주셨다고 해요. 저희도 보면서 굉장히 감동스러웠죠.
#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문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룩한 그의 노래들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에 길이남을 걸작들로 칭송받는다. 유재하와 함께 통칭 발라드라 불리는 한국적 팝음악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작곡뿐만 아니라 직접 작사까지 한 노래들은 현 세대 가수들을 통해서도 리메이크 되어서 지금까지도 불려질 만큼 생명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9]
디지털 음원이 음반 시장의 주도권을 잡은 뒤로 가요계의 순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발매와 동시에 음원차트 1위에 오르는 노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 만에, 혹은 하루도 채 안 돼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노래도 흔하다. 세대를 막론한 다수에게 오래 기억되는 노래는 많지 않다.
그에 반해 이영훈의 노래는 음원차트에서 볼 수 없을 뿐 우리 주변에 꾸준히 흐른다. 이문세의 목소리로, 후배 가수들의 음성으로, 더러는 연주자들의 손이나 숨결을 타고 빈번하게 나타난다. 끊임없는 애창 때문에 그의 부재는 좀처럼 실감되지 않는다. 이영훈이 떠난 지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뚜렷하게 빛을 발한다.
― 한동윤 (대중음악 평론가), 〈 작곡가 이영훈을 추모하며〉, 멜론매거진
그에 반해 이영훈의 노래는 음원차트에서 볼 수 없을 뿐 우리 주변에 꾸준히 흐른다. 이문세의 목소리로, 후배 가수들의 음성으로, 더러는 연주자들의 손이나 숨결을 타고 빈번하게 나타난다. 끊임없는 애창 때문에 그의 부재는 좀처럼 실감되지 않는다. 이영훈이 떠난 지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뚜렷하게 빛을 발한다.
― 한동윤 (대중음악 평론가), 〈 작곡가 이영훈을 추모하며〉, 멜론매거진
그러고 보면 이영훈 음악만큼 새로운 대중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음악도 흔치 않다. 이영훈은 그렇게 유행가임에도 시대불변의
명작을 써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자랑이다.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
―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이영훈 생전에 했던 인터뷰가 읽어볼 만 하다. 인터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이영훈이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작곡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만 앉아 커피 40잔, 담배 4갑을 피우며 밤을 새가면서 곡을 써냈다는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행동이 건강에 크게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작곡에 대한 일념으로 몸을 해치며 곡을 써냈으며 결국 47세라는 짧은 생을 대장암으로 마치는 데도 이 점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뮤지션으로서의 이영훈
'음악'이란 인간의 가장 깨끗한 상태의 ' 영감'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 논리'와 ' 방법'이 만든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쓰레기일 뿐이다.
― 이영훈, 1986년 9월 冬天
이영훈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스테디셀러’인 이문세의 전성기 음반들의 작곡가라는 이유만으로도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다.
― 한국대중음악 최고의 작곡가 10인
― 한국대중음악 최고의 작곡가 10인
3.1. 작곡가로서
악상은 영화적으로 잡아요. 뭔 곡을 써야 되겠다 싶으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면서 명상을 하죠. 어느 장면을 생각할까, 젊었을 때 대학로나 시청 앞에 섰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버스를 타고 이런 구체적인 장면을 생각하면 그 배경음악이 떠올라요. 그럼 그걸 바로 쓰는 거죠.[10]
이영훈의 음악을 내게 감히 정리하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바로 그렇게 정리하고 싶다. 그의 음악은 실로 만든 이와 듣는 이가 같이한 음악이라고, 그래서 존귀한 음악이라고. 1980년대 중반 이문세의 목소리로 전해진 이영훈의 곡은 얼핏 혁명적 경이로 다가왔다. 당시 청취관행으로 볼 때, 그의 음악이 대중과 쉬 동화되기는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의 멜로디 패턴은 이전까지 음악계를 지배해온 트로트적(음악계에선 이를 '뽕'이라고 한다)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클래식의 영향이 느껴지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그러면서도 예쁜 코드워크와 선율로 발라드의 새 장을 연 것이다.
기존 문화와의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정반대로 대중들에게 가뭄 속의 단비처럼 환호되고 빠른 속도로 수용되었다. 특히 그들 감수성에 부합한 가요가 없어서 허전하던 20대와 30대 여성들에게는 축복 그 자체였다. 당대의 음악시장이 판매량 100만장 신화에 도전할 정도로 몸집을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소비의 가장 큰 고객인 이 20대와 30대 여성이 (처음으로) 대거 음악시장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영훈선생의 역사적 스탠스가 거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80년대에 새로운 발라드 스타일의 창조로 가요계 전성기를 일궈낸 것은 '이문세 노래'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이영훈 곡'의 각별한 위업이다.
― 임진모, 〈 작곡가 이영훈 1주기〉
기존 문화와의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정반대로 대중들에게 가뭄 속의 단비처럼 환호되고 빠른 속도로 수용되었다. 특히 그들 감수성에 부합한 가요가 없어서 허전하던 20대와 30대 여성들에게는 축복 그 자체였다. 당대의 음악시장이 판매량 100만장 신화에 도전할 정도로 몸집을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소비의 가장 큰 고객인 이 20대와 30대 여성이 (처음으로) 대거 음악시장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영훈선생의 역사적 스탠스가 거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80년대에 새로운 발라드 스타일의 창조로 가요계 전성기를 일궈낸 것은 '이문세 노래'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이영훈 곡'의 각별한 위업이다.
― 임진모, 〈 작곡가 이영훈 1주기〉
그 이전의 발라드가
트로트적인 과장된 창법과
신파조의 멜로디로 이어져왔다면, 이영훈의 발라드는 팝 팬의 취향까지 자극할 수 있는 세련된 애수의 노래였다. 그래서 이영훈은 한국 발라드의
모더니즘을 확립한 작곡가였다.
― 김작가, 〈 이영훈이 갔습니다, 팝 발라드가 웁니다〉, 시사IN
― 김작가, 〈 이영훈이 갔습니다, 팝 발라드가 웁니다〉, 시사IN
이영훈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적 기초는 바흐, 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의 느낌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클래식을 가요에 대입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 방식으로 그만의 '팝 발라드’ 스타일을 주조해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음악은 클래식에 우리 정서를 섞고 휘젓고 새롭게 빚어낸, 일종의 ‘퓨전’이다.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팝 발라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영훈 음악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회고적이나 당대의 감성을 아우르는 서정적인 곡, 감정 극대화에 의한 슬픈 감성의 곡, 그리고 상대적으로 빠른 리듬에 살짝 격정을 머금은 곡. 대표적인 서정적인 곡은 ‘ 광화문 연가’와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이문세 노래를 접한 지금의 기성세대가 가장 추억에 매몰되는 노래들이다. 두 번째 애조와 비감(悲感)은 그야말로 이영훈의 특장 정서인데, 여기선 ‘ 소녀’, ‘슬픈 사랑의 노래’가 해당될 것이다.[11] 세 번째 스타일인 ‘ 깊은 밤을 날아서’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 붉은 노을’과 같은 속도감 있는 리듬 터치를 들으면 이게 과연 같은 작곡자의 곡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이영훈의 눈부신 업적은 우리만의 팝 발라드를 굴착해낸 것과 더불어 상기한 것처럼 음악의 다양성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이영훈의 작법에 대해 한국인 특유의 이른바 '뽕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비판도 있으나, 오히려 클래식적인 작법을 대중음악에 훌륭하게 접목시킨 데다가 당대에도 히트할 정도로 시대 흐름에 앞서가는 곡을 써 낸 훌륭한 작곡가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뽕끼'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이영훈의 음악이, 특히 초기에 그런 멜로디적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는 많은 공감이 있다.[12]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대표곡으로 삼는 '슬픈 사랑의 노래'에 이르면 그런 점도 많이 희석되고 순수한 이영훈의 색깔이 더 잘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는 유재하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되지만 유재하의 음악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었다는 점을 가지고 이영훈의 트렌디함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당대의 맥락으로는 이영훈의 작법이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에 호소력이 짙은 방법론이었음을 평론이나 음반 판매량 모두가 입증해 주고 있다.
말년에 그가 밝힌 바로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의 빈 자리를 메우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이문세가 밝혔듯 이영훈의 음악은 보컬이 빠지고 오케스트라만 들어오면 그대로 클래식이며, 이문세라는 보컬의 독보적인 음색과 기교를 빼고 부르는 창법이 더해지면서 대중음악의 영역까지 넓어지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이영훈은 자신의 의도한 바의 음악을 해 낸 것이다.
Q. 음악작업 하실 때의 모습을 기억하시는지요.
아들 이정환: 제가 기억하기로는 흰 벽 앞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놓으시고 흰 벽을 바라보면서 작곡을 하셨어요.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모티브를 잡으신 후에 전개, 구성 같은 것들을 작업하신다고 하셨어요. 작업할 때는 주로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예쁘게 깎아 놓고 악보를 고치면서 다듬어 나가셨어요. 평소에 모티브는 정말 빨리 나오는데 비해 곡을 완성하기까지는 굉장히 오래 걸리셨어요. 한 곡, 한 곡 심혈을 기울여서 만드셨거든요. 지우고 또 쓰고. 후렴구에 바리에이션(variation)도 많고요. 1년에 한 열다섯 곡 정도를 완성하셨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굉장히 신성하게 생각을 하셨던 분이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혜화동 로터리 아카데미극장 2층에 작업실을 두고 하셨어요. 주로 조용한 새벽에 편한 마음으로 작곡을 하다가 해가 뜨면 가로수 무성한 동숭로를 거닐면서 영감을 받았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결혼하신 후에는 아파트에 사니까 전자 피아노를 사셔서 주로 밤에 헤드폰 끼고 조용히 작업을 하셨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작업하실 때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리고 밤늦은 새벽에 도둑질 하듯 곡을 쓰셨던 분이에요.
Q. 어디서 음악적 영감을 받으셨을까요.
아들 이정환: 아버지는 음악을 잘 듣지 않으셨어요. 대신 소리에 민감하셨던 분이고 오감에 민감하셨던 분이죠. 창 밖 많이 내다보시고 바람 소리를 비롯해서 자연에 많이 집중하고 영감을 받았던 분이에요. 가사를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서울 하늘을 정말 좋아하셨고 떨어지는 낙엽, 바람 소리, 새벽의 그 고요함 같은 것들에 되게 집중하셨어요. 거기서 지난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을 그런 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멜로디도 떠올리고 그러셨던 것 같아요. 평소에 일기를 쓰셨어요. 그림도 많이 그리시고. 어머니한테 사랑 고백하는 편지 많이 쓰셨죠. 곡을 완성하면 보컬 트레이닝, 믹싱, 마스터링을 해야 하니까 녹음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녹음실 갔다 늦게 들어오는 게 미안하셨는지 그렇게 고백 같은 메모를 적어 놓고 나가셨었어요. 어렸지만 훈훈했죠. 가정적이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
아들 이정환: 제가 기억하기로는 흰 벽 앞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놓으시고 흰 벽을 바라보면서 작곡을 하셨어요.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모티브를 잡으신 후에 전개, 구성 같은 것들을 작업하신다고 하셨어요. 작업할 때는 주로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예쁘게 깎아 놓고 악보를 고치면서 다듬어 나가셨어요. 평소에 모티브는 정말 빨리 나오는데 비해 곡을 완성하기까지는 굉장히 오래 걸리셨어요. 한 곡, 한 곡 심혈을 기울여서 만드셨거든요. 지우고 또 쓰고. 후렴구에 바리에이션(variation)도 많고요. 1년에 한 열다섯 곡 정도를 완성하셨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굉장히 신성하게 생각을 하셨던 분이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혜화동 로터리 아카데미극장 2층에 작업실을 두고 하셨어요. 주로 조용한 새벽에 편한 마음으로 작곡을 하다가 해가 뜨면 가로수 무성한 동숭로를 거닐면서 영감을 받았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결혼하신 후에는 아파트에 사니까 전자 피아노를 사셔서 주로 밤에 헤드폰 끼고 조용히 작업을 하셨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작업하실 때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리고 밤늦은 새벽에 도둑질 하듯 곡을 쓰셨던 분이에요.
Q. 어디서 음악적 영감을 받으셨을까요.
아들 이정환: 아버지는 음악을 잘 듣지 않으셨어요. 대신 소리에 민감하셨던 분이고 오감에 민감하셨던 분이죠. 창 밖 많이 내다보시고 바람 소리를 비롯해서 자연에 많이 집중하고 영감을 받았던 분이에요. 가사를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서울 하늘을 정말 좋아하셨고 떨어지는 낙엽, 바람 소리, 새벽의 그 고요함 같은 것들에 되게 집중하셨어요. 거기서 지난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을 그런 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멜로디도 떠올리고 그러셨던 것 같아요. 평소에 일기를 쓰셨어요. 그림도 많이 그리시고. 어머니한테 사랑 고백하는 편지 많이 쓰셨죠. 곡을 완성하면 보컬 트레이닝, 믹싱, 마스터링을 해야 하니까 녹음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녹음실 갔다 늦게 들어오는 게 미안하셨는지 그렇게 고백 같은 메모를 적어 놓고 나가셨었어요. 어렸지만 훈훈했죠. 가정적이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
3.2. 작사가로서
그의 팝 발라드가 이전 가요와 구별된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가사였다. 생전에 그는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가사 쓰기가 선율 만들어내는 것보다 한 50배는 어려워요. 멜로디는 못 써도 하루에 다섯 곡을 쓰지만 가사는 한 달에 하나를 쓰기가 벅차고 ‘슬픈 사랑의 노래’처럼 10년 만에 하나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가사 때문에라도 곡을 조금밖에 쓸 수가 없었죠.”
#
가사에 정말 공을 많이 들이셨어요. 가사를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셔서 작업할 때 그렇게 담배도 많이 태우시고 커피도 많이 드셨어요. 멜로디보다 가사를 만들 때 음악적 고통이 크게 왔던 것 같아요. 박목월의 ‘나그네의 은빛 수첩’이라는 책을 가지고 다니셨다 하더라고요.
#
― 이정환
― 이정환
작곡가로서의 이영훈이 이룬 성과도 어마어마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작사가로서의 재능이다. 작사적인 탁월함이라는 면에서도 이영훈이 유재하와 공통점을 보인다.
이영훈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그가 생전에 남긴 자기 곡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아쉽게도 '옛사랑'의 가사에 대한 평가는 없으나 그의 치열한 작곡 과정이나 삶에 대한 생각 등 여러 가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글들이다. 이영훈의 가사에 대해서는 작사가 스스로의 평가처럼 '옛사랑'을 듣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이다.[13]
이영훈 작곡가의 아들인 이정환이 말하길, 이영훈이 음악을 만드는 데 공을 많이 들인 게 작사였다고 한다. 가사 만드는 것을 진짜 어려워했고, 창작의 고통을 느끼며 몇번이나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면서 가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3.3. 유재하와의 비교
유재하와 함께 한국형 가요(팝) 발라드를 개척한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둘 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친 뛰어난 뮤지션들이지만, 굳이 비교해보면 공통점은 비슷한 나이[14], 비슷한 활동 시기, 클래식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미한 독특한 작법, 작사가로서의 뛰어난 재능 등이 있다. 반대로 차이점은 유재하는 다룰 수 있는 악기도 많고 작법에서도 참신하고 창의적인 방안을 만들어내고, 편곡까지 도맡아 하는 등 전형적인 천재형 음악가인데 비해 이영훈은 깊은 성찰을 거쳐 피땀을 짜내듯 가사를 써낸다거나, 피아노 앞에 담배와 커피만 가득 놓아둔 채로 밤새워 곡을 써낸다거나 하는 등 수양에 가까운 작곡을 해 내는 인물이었다.두 사람이 함께 프로듀싱에 참여한 앨범도 있는데, 바로 1985년에 발매된 이문세의 정규 3집이다.
4.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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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사랑을 시로 노래한 작곡가 이영훈 노래모음 | 이영훈 작곡가 메들리 |
4.1. 이문세 앨범
년도 | 앨범명 | 트랙리스트[15] |
1985년 | <colbgcolor=#ffffff,#191919> 이문세 3집[A] |
<colbgcolor=#ffffff,#19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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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 이문세 4집[A] | |
1988년 | 이문세 5집[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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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 이문세 6집[A] | |
1991년 | 이문세 7집[A] | |
CHRISTMAS & REMEMBRANCE[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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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LEE MOON SAE GOLDEN LIVE 86-9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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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 95' Stage with composer Lee YoungHun[A][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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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休=사람과 나무 그리고 쉼'[A][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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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chapter 13[A][B] | |
2002년 | OLD AND NEW[33][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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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소품집
년도 | 앨범명 | 트랙리스트 |
1993년/1994년 | <colbgcolor=#ffffff,#191919> 이영훈 소품집 1 | <colbgcolor=#ffffff,#191919> |
이영훈 소품집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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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소품집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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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 이영훈 소품집 1[C][40] | |
이영훈 소품집 2[C] | ||
이영훈 소품집 3[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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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사랑이지나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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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드라마 및 영화
년도 | 제목 | 트랙리스트 |
1995년 | <colbgcolor=#ffffff,#191919> MBC 창사 특별기획 드라마 《 까레이스키》 |
<colbgcolor=#ffffff,#19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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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미니시리즈 《사랑을 기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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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 영화 《 인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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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특별 기획 드라마 《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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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영화 《 보리울의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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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프로젝트 앨범
년도 | 앨범명 | 트랙리스트 |
2006년 | <colbgcolor=#ffffff,#191919> The Story Of Musicians - 옛사랑 1 | <colbgcolor=#ffffff,#191919> |
2007년 | The Story Of Musicians - 옛사랑 2 |
4.5. 그 외 제작 앨범
년도 | 앨범명 | 트랙리스트 |
1987년 | <colbgcolor=#ffffff,#191919> 이광조 《세월가면》 |
<colbgcolor=#ffffff,#19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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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이은저 《1집 - Monotone》[43][44] | |
1998년 | 유열 《7집 - 겨울 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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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 박소연 《1집 - 별과 바람의 노래》[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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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참여 앨범
년도 | 앨범명 | 참여 트랙 |
1986년 | <colbgcolor=#ffffff,#191919> 태희 《문밖에서 / 사랑은 이제 안녕》 |
<colbgcolor=#ffffff,#191919>A-1. 문밖에서 B-2. 그대는 비가 좋아서 |
1989년 | 신촌블루스 《 신촌 Blues II》 | 02. 바람인가, 빗속에서 |
정민 《정민 1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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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김영현 《지금의 내생각처럼》 | 01. 지금의 내 생각처럼 |
1994년 | 김장호 《김장호 1집》 | 05. 내가 너를 보고 있는 동안 |
1997년 | 홍종명 《망망대해 (茫茫大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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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TERN 《Dance Group Tern》 | 05. 수다쟁이 |
2002년 |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공식음악 | 아시아의 꿈 (The Dream of Asia)[47] |
쥬얼리 《Again02》 | How Are You?[48] | |
2003년 | JK김동욱 《Multiplepersonalize》 | 03. 헤어질때면 언제나 |
Y*Me 《Y*Me The 1st Story》 | 03. THE WAR[49] |
5. 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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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와 이영훈 |
기자: 이문세와 이야기하면서 이영훈이라는 이름을 건너뛰기란 불가능하죠.
이문세: 그럴 필요도 없고요. 이문세의 새 노래를 듣는 사람이 “이영훈 노래보다 어떻다”는 식으로 감상하는 것도 자연스럽죠. 이영훈과 이문세는 작곡가와 가수만의 입장을 뛰어넘었죠. #
이문세: 그럴 필요도 없고요. 이문세의 새 노래를 듣는 사람이 “이영훈 노래보다 어떻다”는 식으로 감상하는 것도 자연스럽죠. 이영훈과 이문세는 작곡가와 가수만의 입장을 뛰어넘었죠. #
이영훈과 이문세 콤비는 한국 대중음악사 최고의 작곡가-가수 콤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문세의 명곡들 특히 19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 곡들은 대부분 이영훈이 작사/작곡 한 것이다.[51] 이문세가 이영훈을 만난 것이 행운이고, 이영훈이 이문세를 만난 것도 행운이라고 이문세가 직접 말할 정도.
어쩌면 스타시스템을 본질로 하는 대중문화 예술과 산업의 운명이겠지만 이 점에서 이문세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다. 뒷전의 작곡가는 커녕 그의 이름만 들먹여도 마치 조건반사처럼 작곡가 고(故) 이영훈이 따라온다. 옆에 있는 게 아니라 ‘곁’에 살아있는 것이다. 이문세의 타임리스 음악은 이문세의 노래 이상으로 발군의 이영훈의 작곡 역량, 그 천재성의 산물임을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이다.
― 임진모 #
― 임진모 #
2018년 이문세는 '이문세가 아픈 이영훈을 매몰차게 대했다'는 루머는 '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다. "(루머 관련) 기사와 동영상이 어떻게 유포됐는지 모르겠지만 악의적."이라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썼어요. 진실을 밝히려면 저나 유가족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 당연한데, 혼자 드라마틱하게 추측을 해서 안티를 생산했어야 하나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토로했다.이문세는 "사실 영훈씨와 품성, 인격이 아니라 취미활동, 선호하는 음식들은 달랐어요."라면서 "정말 '부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는 말을 할 정도였죠. 음악할 때는 너무 둘 사이가 찰떡궁합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각자 삶에 충실했죠. 그러다 영훈씨가 세상을 떠났어요."라고 돌아봤다. #
이영훈은 2006년 인터뷰에서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이영훈의 관계를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작곡가로서는 독선적인 스타일이에요. 그때 스물네살이었는데, 한 2, 3년 같이 하니까 코치하고 운동선수처럼 편해졌어요. 다른 가수 연습시키는 게 귀찮기도 했구요. 그렇다고 이문세씨가 부른 노래에 다 만족한 것은 아니었어요. 편안하게 가사를 말하듯이 옮겨주는 부분과 파워풀한 가창력은 만족했지만, 정서적인 표현 부분은 불만족스러웠어요. 특히 〈 붉은 노을〉처럼 빠른 곡에서 제 리듬을 못 타고 응원가처럼 부르는 것은 불만이었죠."라고 말했다. #
6. 어록
여태 살아온 것이 그러했듯이 난 아직도 대중에 익숙하지 않다. 그저 내 음악으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해하길 바랄 뿐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대중과 영합하지 않는 음악으로 남길, 또한 내 음악이 여러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기쁨으로 존재하기를 기도할 뿐이다.(나, 이영훈)
음악의 존엄성이란 음악을 만든 이와 듣는 이가 같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든 이 따로, 듣는 이 따로인 음악은 내팽개쳐진 음악일 뿐. 그런 것은 없다.[52]
필요에 의해 곡이 척척 나오고, 노력 좀 한다고 해서 가사가 술술 나오면 차라리 벽돌을 찍어내고 말 일이다. 신성한 노동이 나에게는 더 편할 텐데 몇 년에 걸쳐 한 곡을 완성하려고 왜 애를 쓰겠는가. 또한 몇 년에 걸쳐서 한 곡을 완성한들 누가 알아줄 것인가? 어차피 유행가로 치부될 것인데 말이다...(중략)...사실 음악은 그 자체가 사랑이다.[53]
노랫말 하나만 살펴봐도 그래요. 메시지 전달조차 제대로 안 되는 노래가 수두룩하잖아요. 습작 정도의 수준에서 만족하고 음반을 내는 거죠. 그렇게 대중을 우롱하고 속이려들면 안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예술가라면 말입니다. 가수도, 제작자도 예술과 상업의 경계에서 너무 쉬운 쪽만을 택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요. 표절 또한 문제다 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구요.
#
자포자기에서 나를 일으켜세우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발소리마냥 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젠 절망과 폭음과 자폐에서 우울과 기쁨과 억압에 이르는, 그 모든 형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요즘 아들과 예쁜 아내와 재미있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작곡이란 것이 내용 면에서 상충되어 빚어진 모순적 결과로 인해, 조울증에 시달려 왔음은 사실이다.(여름이 시작되며)
하고 싶은 말들과 적고 싶은 글들을 가슴에 묻습니다.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적지 않아도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이고 그런저런 너와 나의 같은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삶과 사랑은 하늘의 구름과 같이 흘러만 갑니다.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하지만 바라보면 그 사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이제 많은 기도가 필요한 저입니다. 항상 사랑하고 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옛사랑> 서문)
피곤하다. 약을 세 번이나 먹었는데도 통증이 온다. 잠을 좀 자면 나을 것 같은데…. …예전에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곡을 쓰면서 몸이 피곤하고 지치면 내가 내 명을 줄이는구나, 하고 말이다. 한 곡을 쓰기 위해 몇 날 몇 밤을 새워가며 하루 대여섯 갑씩 담배를 피우고 스무 잔 정도의 커피를 물 마시듯 하며…. 그것도 모자라 며칠씩 잠을 안 잔 날도 허다했다. … 그러나 작업이 없는 동안은 그까짓 술, 남들의 두세 배씩 먹는다. 이유가 있다. 내 마음속에 있던 것들을 어렵게 끌어낸 상처를 치유하는 거랄까. … 음악의 존엄성이란 음악을 만든 이와 그 음악을 듣는 이가 같이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든 이 따로, 듣는 이 따로인 음악은 내팽개쳐진 음악일 뿐.(음악은 존엄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삶과 사랑은 하늘의 구름과 같이 항상 흘러만 갑니다.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하지만
돌아보면 그 사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 없습니다.
항상 사랑하고 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여러분께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
삶과 사랑은 하늘의 구름과 같이 항상 흘러만 갑니다.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 하지만
돌아보면 그 사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 없습니다.
항상 사랑하고 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여러분께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
제 소원은 살아가며 좋은 곡들을 많이 쓰고
깨끗한 작곡가로 살며 평생을 그렇게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속에 한 작곡가로는 유일하게
골든디스크를 세번이나 받았었고 무지와 교만으로
무턱대고 곡을 써왔지만 이제 음악이란 것을 어렴풋이 알며
세월과 삶 속에 仔신을 돌아보며 완성의 의미를 배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완성의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음악의 존엄성과 그 예술적 가치와 음악가로의
仔존심만은 조심하여 잃지 않도록 하렵니다.
이 世上을 사랑하듯 이 봄을 여러분과 함께 맞을 수 있음과
부족하고 볼품없는 저의 음악을 사랑하여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이영훈 소품집 머릿글중에서
깨끗한 작곡가로 살며 평생을 그렇게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속에 한 작곡가로는 유일하게
골든디스크를 세번이나 받았었고 무지와 교만으로
무턱대고 곡을 써왔지만 이제 음악이란 것을 어렴풋이 알며
세월과 삶 속에 仔신을 돌아보며 완성의 의미를 배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완성의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음악의 존엄성과 그 예술적 가치와 음악가로의
仔존심만은 조심하여 잃지 않도록 하렵니다.
이 世上을 사랑하듯 이 봄을 여러분과 함께 맞을 수 있음과
부족하고 볼품없는 저의 음악을 사랑하여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이영훈 소품집 머릿글중에서
7. 여담
- 본인을 음악으로 인도한 인생의 곡이나 아티스트에 대해서 그는 "소녀들 여성들 팬을 많이 확보했던 멜로디로만 제가 알려져 있지만 이문세씨를 통해서 못했던 게 뭐가 있냐면 센 소리에요. 조 카커(Joe Cocker)나 레이 찰스(Ray Charles) 같은... 국내에선 고 김상국선배의 '불나비' 같은 곡은 정말 없다고 생각해요. ' 봄비'의 박인수선배도 좋아했죠. 또 하나의 텍스트는 비틀즈죠. (웃으며) 전혀 유사성이 없죠? 제 곡이랑. 그들 음악은 상당히 클래시컬해요. 딥 퍼플(Deep Purple)도 클래식적인데, 건반주자 존 로드(John Lord)를 무지 좋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 2011년 대중음악 무크 '대중음악 사운드' 제3호(2011년 11월자)가 '한국 대중음악 명예의 전당에 추천하는 100인'중 한 분야인 '최고의 작곡가 10' 설문조사에서 이영훈은 신중현, 김수철, 김창훈, 박시춘, 윤상, 박춘석, 이봉조, 이정선, 유희열과 함께 언급됐다. #
- 어린 시절에는 음악적 재능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어머니가 보시기에 형님과 누님이 너무 공부만 하니까 피아노도 가르칠 겸, 또 막내는 다른 쪽으로 시켜보고 싶으셨나봐요."라고 말했다. 또 "어렸을 때 기초적인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게 작곡을 시작했어요. 바이엘이랑 체르니 연습하면서 이런 곡들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쳐보니까 쉽게 되더라고요. 서너 곡정도 만들었어요. 어렸을 땐 악보 그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대충대충 그렸는데, 지금 연주해도 최근에 쓴 곡만큼 짜임새가 있더라고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
- 노래 가사들의 언어 감각이 탁월하다며 책을 많이 읽었냐는 질문에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근데 읽다보니까 한계도 느끼고, 뭘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책을 읽고 나면 머리도 맑아지고 성숙해지는 걸 느끼겠는데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두꺼운 장편을 며칠에 걸쳐 읽고나면 "아, 이건 너무 무거웠다, 과중한 짐을 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그런 식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라고 답했다. #
- 작사와 작곡 중 뭘 먼저 하냐는 질문에 "노래에 따라서 달라요. 난 아직 모르잖아요 같은 경우 멜로디 한 줄 쓰고, 가사 한 줄 쓰면서 만들었어요"라고 말했다. #
- 대학때는 그림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림을 전공했어요. 군대 제대 후 연극과 영화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봤어요. 당시엔 그런 쪽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기관이 없었어요. 음대에서 가르치는 고전음악은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요. 오케스트레이션 빼고 화성법이나 대위법은 이미 숙지가 되어있었거든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
- 2009년 이영훈의 사망 1주기를 추모하는 노래비 제막식이 2월 1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돌담길 정동교회 앞에서 열렸다. 서울특별시가 허가하고 지원한 최초의 대중문화 노래비였다. 이날 행사에는 이문세가 참석해 노래를 불렀고 당시 시장인 오세훈도 참석했다. 노래비는 과거 아날로그 마이크 형태로 만들어졌다. # 걸으며 만나는 동상 (정동길 옆 사진관)
- 2018년 10주기를 맞아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그를 전설로 하는 특집을 방송했다. 또 10주기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
- 2019년 11주기를 맞아 그에게 헌정하는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
- 2021년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1화 한국형 발라드의 계보 특집에서 그를 '한국형 발라드의 원형을 만든' 인물로 평가하며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후배 가수들이 메들리로 불렀다. #
- 이영훈이 기획했고 그가 작곡한 음악들로만 꾸며진 주크박스 뮤지컬 ' 광화문 연가'는 2011년 공연됐다. 2017년에는 새로운 버전으로 공연됐고 2021년 세번째 시즌으로 돌아오면서 꾸준히 공연중이다. 연출가 이지나는 "이영훈 작곡가님들의 80년대 히트곡이 세월이 지나면서 명곡이 되고, 다시 고전이 됐어요. '광화문연가'의 모든 곡은 히트곡으로 시작해 고전의 대열에 들어선 음악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그의 음악은
조성모,
이수영,
빅뱅,
아이유,
오혁 등 세대를 초월해 많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되고 있다. 2020년 음악예능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에서는 그가 작곡한
이문세의 노래가 가장 많이 커버되기도 했다.
새천년을 전후해 아이돌 그룹이 대거 출현하고 힙합이 득세함에 따라 대중음악 주요 소비층의 연령대가 과거에 비해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 경향으로 기존에 활동하던 발라드 가수들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었다. 이문세 또한 영향을 받아 예전만큼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이영훈과 다시 짝을 이뤄 제작한 12집, 13집에서는 '슬픈 사랑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 정도만 소소하게 전파됐다. 하지만 이 대전환기에서도 초기 히트곡들은 살아남았다. 아니, 어깨를 펴고 대중음악 시장을 활보했다. 리메이크 앨범의 붐 덕분이었다. 조성모가 부른 '깊은 밤을 날아서'를 필두로 이수영의 '광화문 연가', 성시경의 '소녀', 서영은의 '가을이 오면' 등으로 환생 퍼레이드가 벌어지면서 이영훈의 노래는 젊은 세대에게도 확산됐다. 이때 음반 제작자들, 가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히트하고 싶으면 이영훈의 노래를 리메이크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조언이 돌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이영훈의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수시로 접하게 된다. 일반인, 프로페셔널 가수 가리지 않고 많은 이가 그의 노래를 선곡한다. 작금의 현상은 원작이 높은 작품성과 강한 대중성을 보유했음을 재차 일러 준다. #
- 그가 남긴 사랑 노래의 대부분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가 유명세를 얻기 전, 20대 초반에 만났던 첫사랑이다. 그래서 그의 부인 김은옥씨는 남편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은옥씨는 "나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옛사랑에 관계된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좋아하게 됐다"며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가 참 좋더라. 서정적이고 내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라며 말했다. #
- 이영훈은 그가 만든 많은 곡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시 만나리'를 가장 애착하고 있었던 곡이고, 그 다음에 '슬픈 사랑의 노래'나 ' 옛사랑', ' 광화문 연가' 이런 곡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 그의 노래에 왜 빠지지 않고 광화문이 등장하냐는 질문에 "' 광화문 연가'에 광화문 네거리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실제로는 없는 지명이었어요. 저는 이순신 장군이 서 있는 곳을 말한 건데(웃음). 사실 제 감성의 출발은 언제나 광화문과 덕수궁이죠. 워낙 궁을 좋아하니까(웃음). 유년기부터 광화문 주변을 자주 찾았고 그 시간에서 감성을 키웠어요."라고 답했다. #
- 이영훈과 이문세 콤비의 최고의 명반은 보통 4집과 5집이 꼽힌다. 이 앨범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기념비적인 명반 중 하나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도 들어가 있다.[54] 3집, 4집. 5집을 '명반 3부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작사를 직접하는 이유로는 "처음엔 제 멜로디에 제가 가사를 붙이는 게 편해서 한 건데요. 나중엔 다른 작사가들에게 부탁을 해도 좀 어려워하면서 잘 안 써주더라고요."라고 말했다. #
- 2006년 당시 음악저작권협회에서 가장 많은 저작권료를 받는 작곡가가 이영훈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120곡 정도 발표했는데, 그 중 3,40곡이 히트를 한 덕분에 저작권료를 많이 받는 작곡가 중에 한 사람이 됐다고 한다. #
- 2007년 당시 한국음악계의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영훈은 대중음악의 계보가 끊기는 이유로, 젊은 음악인들이 어려운 일을 참고 견뎌내려는 근성이 없다는 것을 꼽았다. 그는 “연주자들은 이름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 연습하고, 선배들에게 인정받아야 되는데, 이 기간을 참지 못한다. 그게 요즘 세태다. 작곡가들도 스스로 연구하고 개발하려 하지 않는다. 연주든 작곡이든 오랜 기간 연습해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야 되는데, 거기까지 힘든 시간을 참지 못한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 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 표절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라며 개탄했다. 이영훈은 작곡가들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다보니 표절논란이 불거지게 된다고 했다. “작곡가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돈을 벌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죠. 자기 세계를 만드는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세계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는데, 곡을 팔기 위해서만 노력해요. 그러다 결국 남의 세계를 몰래 가져오게 되죠.” 또한 작곡가들이 대중에 조금 인정받은 자기작품을 표절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를 나타냈다. “대중에 좀 인정받았던 자기 곡을 표절하는 경우도 많아요. 도자기 만들어놓고 조금이라도 흠이 발견되면 깨버리는 도공들처럼, 작곡가들도 곡을 쓰다가 다른 곡과 비슷하다거나 내 것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폐기해야 합니다. 작곡가들은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습작을 많이 써봐야 해요.” #
- 2016년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해 이영훈의 유족들이 저작인접권(음반 제작자의 권리)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유영선 판사)는 이영훈 작곡가의 아내와 아들이 지난 2014년 음반 기획사 뮤직마운틴과 유통사 유니버설 뮤직 등을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침해 정지 등의 소송’에서 이 같이 조정했다고 밝혔다. 성립된 조정 결정에 따르면 그간 문제가 된 음반의 저작인접권은 이영훈 작곡가의 유족에게 최종 귀속됐다. #
- 이영훈의 음악들의 저작권은 그의 가족들이 설립한 회사인 '영훈뮤직'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훈뮤직은 이영훈 작곡가의 음악 저작권을 관리하는 법인 회사다. 하는 일들은 뮤지컬 ' 광화문 연가'를 비롯해 이영훈의 저작물 관리 및 저작물로 만들어지는 콘텐츠 기획, 제작, 관리까지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
- 이문세의 노래외에도 가수 이광조의 ‘ 세월가면’을 비롯해 이은저, 유열, 박소연 등의 음반이나 노래들도 만들었다. 걸그룹 쥬얼리의 2집의 수록곡 ' How Are You?'를 작곡하기도 했다.[55] 또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 인샬라’, 드라마 ‘ 까레이스키’ ‘ 사랑을 기억하세요?' ‘ 산’ 등의 OST도 완성했다. 그가 담당한 영화 음악 중 가장 유명한것은 2003년 개봉한 영화 ' 보리울의 여름'의 사운드트랙이다. # 이 영화의 나온 테마곡은 개그콘서트의 코너 봉숭아 학당의 오프닝곡으로 유명하다.
-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의 공식 주제가 <아시아의 꿈(Dream of Asia)> 를 작곡하기도 했다.[56]
- 김현식에게도 곡을 줄뻔했다. 2006년 이영훈은 인터뷰에서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아주 절창이었죠. 그 시대에는 몇 분 안계시는 가창력이 뛰어난 분이셨는데, 그 당시에 작곡가분들이 많지가 않았었어요. 장르가 급변할 수도 있는거기 때문에.. 제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작곡을 하던 중에, 10곡을 드리고 싶었는데 그걸 완성을 다 못하고 먼저 가셔서 아직도 가슴에 여운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 배우 이병헌이 이영훈의 팬이다. 이병헌은 이영훈 추모 10주기 콘서트의 깜짝 출연해 이영훈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를 불렀다. 이영훈의 팬이어서 선뜻 섭외에 응했고 한 달간 노래 연습을 했다고 한다. #
- 이영훈의 아들이 찾은 그의 미발표곡만 200곡이 넘는다고 한다. 400곡 정도 모티브를 적어 놓은 게 있다고 하며 그의 일기에 써놓았다고 한다. 그 곡들을 다 찾지 못했으며, 모티브만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가사 없이 멜로디만 써놓은것도 있고 가사만 따로 적어 놓은것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들어볼수 있냐는 질문에는 "작곡가의 의도와 스타일, 순수성에 공감해주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언젠가는… 그런데 이제 본인이 안계시니까 어렵죠. 누군가 결정을 해서 세상에 선보여야 하는데 본인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하기엔 조심스럽고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거의 완성돼서 발표하려다가 미뤘던 곡들이 조금 있어요. 그런 것들 위주로만 약간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
- 한국 가요계에서 엄청난 위상을 지닌 음악인이다. 2006년 대장암 투병 중 제작한 컴필레이션 앨범 <옛사랑> 작업 당시 전인권, 박완규, 윤도현, JK김동욱, 임재범, 이승철, 김건모, 박선주, 신혜성, 김연우, 이소은, SG워너비, 박혜경, 버블시스터즈, 정훈희, 나윤선, 전재덕, 리쌍, 윤건, 성시경, 윤종신 등 가요계에서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모두 참여한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아마 기존 가요를 리믹스한 앨범이 아닌 이상 이렇게 많은 가수들이 참여하는 앨범은 앞으로 보기 어려울 지 모른다.
- 상술했듯 하루에 커피 40잔을 마시고, 담배 네 갑을 피우며 노래를 만든것으로 유명한데[58] 아들 이정환[59]은 그 일화에 대해 "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어요.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고요. 진짜로 커피 40잔을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마시긴 하셨죠. 그리고 작곡할 땐 지우개가 달린 주황색 연필을 쓰셨어요. 그 때문에 피아노 건반 위에는 늘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곤 했었죠."라고 말했다. #
- 사망 1주기인 2009년 이영훈의 삶과 음악을 북아트 작품으로 출판했다. 모두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한 권은 이영훈의 가사들을, 한 권은 그가 홈페이지에 남긴 글과 덧글들을 함께 엮었다. 본문 한 장 한 장 원형 커터로 잘라 접지하여 LP판 디자인으로 만든 책이었다. 이 책은 이영훈의 글과 아내 김은옥의 글을 함께 엮은 <삶> 그리고 작곡 노트와 함께 편집한 가사집 <음악>, 이렇게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권 중 한 권인 <삶>은 1989년부터 2008년 초까지 작곡가 이영훈이 남긴 기록들을 모았다. 음악 노트뿐 아니라 일기, 메모 등에서 발췌한 글에는 그의 삶의 구체적인 흔적들이 남아 있다. 나머지 한 권인 <음악>은 1985년부터 그가 쓴 가사들을 모아 발표순으로 정리했고, 그가 쓴 ‘작곡 노트’를 함께 편집하여 그의 노래들을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 곡은 <옛사랑>과 더불어 내 음악 세계의 두 기둥이 되는 곡 중 하나다.”(<광화문 연가>의 작곡 노트, p. 58)라는 글이나 “이 곡 이후에 쓴 내 노래의 가사들은 모두가 별첨 정도일 뿐이다.”(<옛사랑>의 작곡 노트, p. 100) 등의 작곡 노트에는 곡을 쓸 당시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
- 그의 악보에는 '모든 이의 가슴에 숨어 있는,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되찾게 하는 음악을 만들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처럼 남겨 놓은 글이 있다고 한다. 본인의 음악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정서들을 일깨울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문이라고 한다. # 또한 그의 아들에게 예술품이라면 모름지기 아름다워야하고 음악은 듣는 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고 한다. #
8. 관련 문서
- 발라드
- 이문세( 음반 목록)
- 사랑과 평화(김명곤)
- 뮤지컬 광화문 연가
[1]
국내 음악 발전에 공로를 세운 작곡가를 추대하는 상이다.
#
[2]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1화에 나온 방영분.
[3]
해당 시기에 발표된 대표적인 앨범이
이문세 3~7집이다. 참고로 이영훈이 작사/작곡한 노래의
편곡은,
록밴드
사랑과 평화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했고, 이후에도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편곡자로 활동했던 김명곤이 대부분 담당했다.
[4]
이 점에 대해서도 단순한 인간적인 화해라는 의견, 이문세가 이영훈 없이 상업적 실패를 겪고 계산적으로 화해했다는 의견 등이 있다.
[5]
이 때는 이문세가 솔로예찬, 조조할인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던 시기다. 1, 2집 때의 이문세의 음악을 생각해 볼 때, 조조할인이나 알 수 없는 인생 등 템포감 있는
팝이 이문세의 다른 쪽 스펙트럼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쪽 스펙트럼은 이영훈류
발라드.
[6]
이문세의 앨범은 이영훈이 빠졌거나 적은 참여도를 보인 경우와 이영훈이 거의 전곡을 다 맡은 경우에 있어 컨셉이 완전히 바뀐다. 밝고 템포감 있는 노래를 타이틀로 하고 약간의 익살스러움(이문세가 예능에 나와 곧잘 보여주는 캐릭터와 맥이 닿아 있는.)이 더해진 컨셉의 전자와 무게감 있는 발라드
보컬로서의 컨셉이 살아 있는 후자인데, 과연 이 컨셉의 차이가 기획 단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영훈+이문세의 정체성과 이문세 개인의 정체성 사이의 차이인지도 흥미롭다.
[7]
원곡은 이문세와
이소라의 듀엣, 이영훈 '옛사랑' 앨범에서는
김연우와
이소은의 듀엣으로 들을 수 있다. 두 곡 모두 필청.
[8]
광화문 연가 초연에 출연했던
윤도현의 경우 이영훈이 살아있을 때 직접 출연해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9]
임진모는 더 나아가서 아직도 이영훈의 노래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을 추모하는 글에서 임진모는 언젠가 이영훈의 남은 노래들도 재평가될 날이 올 것이라는 글을 썼다.
[10]
'작곡가 이영훈 1주기' 중에서,
임진모 글.
[11]
이영훈은 세상을 떠나기 9개월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대표곡으로 ‘슬픈 사랑의 노래’를 꼽았다. 1987년 모티브를 잡았으나 늦게 가사를 완성해서 1999년 이문세 12집에서 이소라와의 듀엣 곡으로 수록했다.
[12]
이영훈과
유재하가 고평가되는 이유가 사실 여기에 있다.
임진모가 남긴 글처럼, 이영훈 이전에는
팝이 고퀄리티의 음악인 데 비해서 가요는 기껏해야
트로트적인(이것이 속칭 '뽕끼'다.) 감성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는 2류 음악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구조를 뒤집어 엎은 것이 이영훈이고,
임진모가 그런 이영훈을 일종의 혁명가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재하나 이영훈은 모두 기존의 가요 작법도,
조영남처럼 스탠다드 팝을 번안하거나 팝의 흐름에 따라가는 작법도 아닌 독창적인 형태의 음악을 시도했다.
유재하의 음악을 이영훈보다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유재하의 음악이야말로 순수하게 기존 한국 가요의 반복 구조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그런 평가를 내리고, 이영훈을 더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서양음악적 구조를
대중음악에 천재적으로 녹여낸 유재하에 비해 기존 가요와
클래식 모두에서 장점을 고루 취한 이영훈의 특징에 높은 평가를 내린다.
[13]
이영훈이 스스로 가사에 대해 가장 만족하는 곡이 '옛사랑'이다. 생전에 그는 "'옛사랑'의 가사를 써 낸 뒤 더 할 말이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만족했다."라고 회고했으며 그런 생각에 따라 그의 장례식장에도 옛사랑의 가사가 붙어 있었다.
[14]
유재하는 1962년생, 이영훈은 1960년생이다.
[15]
이영훈이 작곡, 작사한 노래만 표기한다.
[A]
정규 앨범
[A]
[A]
[A]
[A]
[21]
장혜진과의 듀엣
[22]
캐롤 앨범.
[23]
라이브 앨범이다. 2002년 발매된 'OLD AND NEW'에서 들어볼 수 있다.
[A]
[B]
이영훈이 레코딩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A]
[B]
[28]
자신이 뽑은 본인의 최고곡.
[29]
트럼펫 솔로
[30]
이영훈 소품집 노래
[A]
[B]
[33]
베스트 앨범이며 전곡이 이영훈의 작품이다.
[B]
[35]
1992년에 발표한 이문세의 라이브 앨범 'Golden Live 86-92'을 스튜디오 버전으로 복원한 곡들로 작곡가 이영훈이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이문세 전성기 시절의 음악들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당시 아날로그로 제작되었던 음악들은 디지털이란 새 옷을 입고 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36]
다양한 시도를 거친 이문세의 중반기 노래들이 담겨져 있다. '옛사랑'을 비롯해 영국에서 녹음했던 '영원한 사랑'등이 수록 아날로그의 뭉툭함과 거친 듯한 연주가 오히려 음악적 깊이와 함께 정감어린 감성을 불러 일으킨다.
[37]
당시 기준 최근 앨범에서 발췌한 곡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문세의 젊은 감각이 느껴지는 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3집의 수록곡인'기억이란 사랑보다...'와 트럼펫, 트럼본, 클라리넷등의 관악기의 연출이 돋보이는 흥겨운 재즈 스타일의 '애수(哀愁)', 가수 이소라와 듀엣으로 부른 어쿠스틱한 분위기의 '슬픈 사랑의 노래'등의 곡들이 자리잡고 있다.
[38]
작곡가 이영훈의 배려를 느끼게 하는 보너스 CD로 92년 발표된 이문세 라이브 앨범 '86 ~92 Live'를 CD로 복원해 실었다.
[C]
볼쇼이 시어터 심포니 연주
[40]
늘 염원하던 작업이었다고 한다. 1992년에 연주를 했으며 10년 전부터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문세 3집 앨범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작품이다. 이문세 7집이 끝난 후 꼭 하고 싶었던 작업이라고 편곡자 김명곤과 함께 러시아로 갔다고 한다. 이영훈은 그의 소품집은 영혼을 담은 프로젝트라고 말했다고 한다.
#
[C]
[C]
[43]
이영훈이 처음으로 프로듀싱을 맡은 여성보컬로,
공원소녀
레나의 어머니다.
[44]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는 1993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적도 있다.
[45]
이영훈이 생전 마지막으로 프로듀싱을 맡은 앨범이다. 박소연 씨는 가수이자 치과의사로, 우연히 카페에서 이영훈을 소개받게 되면서 음반작업을 같이하게 되었다.
[46]
작사만 담당
[47]
이 곡도 이문세가 불렀다.
[48]
그룹 TERN의 수다쟁이가 원곡.
[49]
작곡만 담당
[50]
2008년 1월 18일, 말기 암 투병 중이던 이영훈의 병실에 찾아간 이문세에게 이영훈이 한 말이다.
[51]
유재하가 이문세에게 준 '그대와 영원히'처럼 예외도 있긴 하다.
[52]
2003년 5월 2일 일기.
[53]
2001년 12월 22일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 남긴 글, '그 춥던 겨울 날' 중에서(문체, 오자 등 수정.)
[54]
4집 13위, 5집 42위.
[55]
이영훈의 곡을 받은 유일한 아이돌이다. 사족이지만 이영훈의 팬들 사이에서는 이 곡이 기존 이영훈의 스타일과 매우 달라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56]
이 노래도
이문세가 불렀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마지막 곡이다.
[57]
태성출판사의 음악교과서에 '대중음악의 세계로'라는 소단원에 실렸다.
[58]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거북이의
터틀맨도 이영훈과 마찬가지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곡작업을 했다고 한다. 터틀맨은 유전적으로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는데 이러한 식습관까지 더해져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고 결국 취침 중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9]
뉴욕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고 한다. 코딩, UI/UX 등을 다루는 IT 전공을 했고, 부전공으로는 광고를 공부했고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경험을 많이 쌓았고, 뉴욕에서 웨어러블 테크(wearable tech) 스타트업을 세우고 운영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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