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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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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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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삼두정치,( 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 독재관
사건 · 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기타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 차르 ·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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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적 평가
1.1. 긍정적 평가1.2. 부정적 평가
1.2.1. 반론
2. 군사적 평가: 기적의 반전 전술가
2.1. 반론
3. 인간적인 평가

[clearfix]

1. 정치적 평가

내전기 이후로 혼란에 빠진 공화정 로마를 종결시키고 제정의 길을 연 인물이다. 카이사르 개인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끼친 영향이 결과적으로 로마에 긍정적인 것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로서 포에니 전쟁 이후 표류하기 시작한 로마 제국[1]레스 푸블리카 - 공화국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많은 속주들을 거느리고 군사적으로 위압하는 임페리움 - 제국이기도 했다.]의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던 개혁가인 동시에, 공화정을 파멸시킨 독재자라는 양극의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공화정만으로 로마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개혁을 꿈꾸던 인물이라는 평과 그저 최고가 아니면 참지 못 했던 성격 때문에 최고 권력자 자리에 도전했던 사람이라는 평이 갈린다.[2][3] 사실 둘 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 정도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중심 체제의 문제점을 잘 파악했으며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또한 잘 제시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체제의 한계와 부작용 역시 잘 알았겠지만 엄청나게 유능한 거물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하튼 훗날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카이사르가 행운을 타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많이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인의 위대성과 쇠퇴의 원인에 관한 고찰 11장 中[프랑스어][영어]

1.1. 긍정적 평가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6]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는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도 탑 오브 탑에 들어갈 만큼 뛰어났던 정치가였다. 광활한 고대 로마 영토를 볼 때, 당시의 포로 로마노에서 정치를 논하는 식의 공화정은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공화국 말기에 들어서는 공화정과는 거리가 멀어져 과두정으로 변질되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공화정 체제가 한계에 달해 과두화되었다 볼 수 있다.[7] 그 증거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지만, 결국 황제는 탄생한 점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이미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 술라 마리우스의 내전 등을 통해 평민 계급과 원로원 계급의 골은 깊어져 있었다. 즉, 강대한 카리스마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점은 사라질 수 없고 장기적으로 로마를 잠식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개인의 야욕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단순히 사욕에만 불탄 것이 아니라 당대 시스템적인 한계점과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역시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는 1인이 독재를 하되 민중의 뜻을 존중하는 체제였다. 원로원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고 시민들에게 권리를 일부 되돌려주는 방식인 것이다. 카이사르가 시행한 개혁들은 무산자를 비롯한 빈민, 해방 노예, 속주민들을 구제하고 원로원과 기사의 세력을 억제하여 민중에게 실익이 되는 개혁이었다. 그런 까닭에 민중이 카이사르를 지지한 것이지만.[8]

출생도 성격도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카이사르가 민중의 숙원이었던 그라쿠스의 정책을 독재 권력으로 시행한 것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현대적 관점에서 2,000년 전 활약한 인물을 폄하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였다.[9] 자신의 고모부이자 민중파의 상징이었던 마리우스의 장례식, 그것도 술라의 지배하인 로마 한가운데서 10대의 나이에 대놓고 민중파를 지지하는 조문을 읊어서[10] 술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이미 간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타고난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1] 그래서 학계는 제정의 수립 여부를 떠나 "수백 년간 대립해온 평민-귀족 간의 대결과 로마의 모순을 해결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다.

카이사르는 술라에 의해 침탈당한 공적 소유를 복원하여 성장과 팽창에서 분배를 지향해 막대한 부를 지닌 귀족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평민과의 양극화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그라쿠스 형제를 시작으로 민중파는 이러한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보수 귀족 세력에 의해 늘 저지되었는데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거의 100년간 이어지던 민중과 민중파의 숙원을 해결한 셈이다. 호민관 그라쿠스가 이루지 못했던 문제를 역설적이게도 독재관 카이사르가 이루어낸 것.[12][13]

부정적 평가 문단에서 로마 공화정이 문제가 많기는 해도 민주정이기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원로원도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말하며 그라쿠스 형제 폼페이우스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이 주장과 그 예시들이 모두 오류가 심각한 부분으로, 특히 예시로 든 두 가지는 오히려 원로원이 민중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반증사례에 불과하다. 1차적으로 당시 로마 공화정은 민주정이 아닌 귀족 공화정으로 변질되어버린지 오래된 국가였다.[14] 그라쿠스 형제는 그 요구를 들어주려다가 원로원한테 찍혀서 원로원의 친위 쿠데타로 죽었으며 폼페이우스의 개혁책 역시 카이사르의 인기를 조금이라도 깎아내기 위한 기만책이라는 것이 대세다. 이는 억측이 아닌 게 당장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당시, 원로원에서 드루수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더 급진적이고 민중 친화적인 개혁안을 내세우게 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동생)를 낙선시킨 뒤 가이우스의 법안을 철폐시키고 자기네가 내세웠던 개혁안을 모조리 엎어버리고 여기에 반발하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원로원 최종선고로 학살해버린다.[15]

또한, 공화정의 몰락하지 않는 IF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애시당초 역사에 가정은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로마의 공화제는 모순이 너무 많이 쌓여서 설령 공화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한번은 몰락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16][17]

우선적으로 로마 공화정은 그냥 민주 공화정이 아닌 귀족 공화정이기 때문에, 아예 민주 공화정으로 한번에 갈아엎지 않는 이상, 원로원은 귀족 공화정의 집정관도, 호민관도 비교될 수 없는 로마의 정치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 축에 해당한다. 그런데 로마 공화정의 정치 시스템의 핵심 축인 원로원이 기득권이자 타파 대상이라는 게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원로원을 타파하는 순간 로마 공화정은 무너진다.

그리고 민중파의 요구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의 빈민화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건전성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해결되어야 했다는 것에 대체로 다 동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화정을 망가트리지 않은 채 이런 모순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지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이미 농지법이 정식 법안으로 통과되었는데도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민중파들을 다 죽인 뒤 원로원파가 농지법을 무력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중파의 합법적인 요구는 원로원의 불법적인 탄압으로 틀어막히는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현실이었다.

우선적으로 합법적이고 비교적 평화로운 수단으로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시도들을 그라쿠스 형제 같은 민중파가 감행한 것이다.[18] 하지만 그 결과는 길거리에서 대놓고 때려 죽인다거나,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수도에서 지지자 3천여 명을 학살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똑같은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면 카이사르도 같은 꼴이 났을 거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19] 이 경우 우리는 역사책에서 로마의 사실상 첫 황제 취급받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라쿠스처럼 개혁하다가 죽은 카이사르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20] 그리고 민중파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다시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개혁이 성공하거나 로마가 망할 때까지 제 2, 3, 4의 카이사르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원로원의 과격한 대응에 살아남아 맞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제2, 3, 4의 카이사르는 더 강경해져야 했을 것이다.[21] 실제 그라쿠스 형제도 제일 먼저 그나마 온건한 형이 죽고, 동생은 더 강경해졌고, 마리우스 시절에는 휘하의 사투르니누스가 그라쿠스 형제보다도 더더욱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은 결국 원로원의 대응에 의해 살아남기 위해 마리우스 시절보다도 한 단계 더 강경해진 모습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고 원로원 없이 새로운 로마 공화정을 꾸려간다는 시나리오를 본다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도시국가를 넘어서서 지역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국가 중에서 공화정으로 운영되던 나라는 로마 이전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공화정은 세계 역사에서 로마 공화정 이후에는 한참 동안 찾아보기도 힘든 정치 체계이다. 1,800년쯤 뒤의 영국이나 미국 정도는 되어야지 말을 꺼내 볼 만한데, 영국의 입헌 군주정은 긴 시간 왕정 귀족, 부르주아 층간의 갈등을 계기로 긴 시간에 만들어진 타협의 결과물에 가까운 것이고, 왕정도 아니었던 로마에서 단시간에 따라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그나마 비교 대상으로 미국을 정치 시스템을 로마가 취할 수 있었을지 살펴본다면 당대의 최고위 지식인 및 지도자층 55명이 모여 지금까지의 공화정 시스템의 장점을 최대한 취합해서 수개월간의 긴 회의와 극적인 타협으로 간신히 만든 시스템이 미국 정치 시스템이란 걸 감안하면 매우 어렵다.[22]

이렇게 보면 공화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위업인지 알 수 있다. 무려 1,800년의 세월을 넘어야 하며, 세계 역사적으로 또 다시 최초로 기존의 원로원 기반 귀족 공화정이 아닌 또 다른 공화정의 새 패러다임을 그 당시에 제시한다는 것은 시간여행물이나 이세계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의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이다. 또한 통신 기술과 투표 시스템의 비효율성 등 여러 가지 기술적 한계까지 감안하면 당시 소수의 귀족 공화정으로도 의견을 모으기 힘들어서 넓은 영토를 관리하기 힘들었던 게 로마였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이상적인 민주 공화정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한다는 건 한층 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이다.

그렇다고 원로원이 민중파에 양보를 할 수 있을까? 이 양보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그라쿠스 형제 시기에 양보했을 것이다. 이미 최악의 수단으로 최소 3번 이상 민중파를 탄압한 원로원이 갑자기 민중파의 요구를 들어줄정도로 급변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당장 수백 명 단위의 타락한 기득권층을 단체로 개과천선시킨다는 사례는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결국 종합해보자면, 원로원의 무력화 및 기득권의 소실이 사실상 로마 공화정의 종말에 가까운 형태라고 본다면 원로원이 양보하지 않는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감안하면 로마 공화정의 종말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걸 단순한 결과론이라고 보긴 힘든 게, 원로원 자신이 초래한 결과물이므로 사실상 자업자득에 가까운 전개이며, 무려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까지 포함해서 최소한 3번의 해결 찬스까지 자기 손으로 엎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만한 규모의 민중의 요구를 무려 3번이나 무시하고도 멸망 안 당한 시나리오가 드물다는 걸 감안할 때, 그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져버린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더군다나, 초기 로마면 몰라도 당시 로마를 권력이 쪼개진 체제라고 주장하며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라는 주장은 로마 공화정의 정치상황을 하나도 모르면서 그야말로 문제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는 헛소리인데, 공화정 말기 로마의 최대의 문제는 탄핵할 수 있는 집정관이 아니라 바로 원로원 최종권고였기 때문이다.[23]

이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어 집정관에게 권한이 부여되면 거부권이나 탄핵을 모조리 무시하므로, 그야말로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수단이자 그 자체가 자국민 정적을 향한 재판 없는 절대 무력 행사 선언이나 다름없다. 발동되면 천 단위 이상의 자국민 학살조차 정당화하고, 이게 발동된 순간 항복한 정적조차 죽어야 끝났으며 물론 재판따윈 없었다.[24] 어지간한 절대왕정 체제의 왕도 단체 학살을 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므로 함부로 휘두르기 힘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는 이 최악의 수단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지만, 초기 로마에는 이게 발동되지 않는 선에서 로마의 권력 체계가 잘 유지되어 왔다.[25][26]

하지만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이 원로원 최종권고가 남용되었으며, 무엇보다 국가의 이득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남용되었다는 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결정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다. 건강한 국가 시스템에 권력 견제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이것이다. 권력자나 권력 집단이 사익을 포기하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만 결정을 내린다면, 독재의 폐해는 현저히 줄어든다. 하지만 권력자나 권력자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견제가 필요한 것인데 로마 역사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원로원 최종권고가 발동된 안건이 바로 민중의 요구를 주장하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라쿠스 1명도 아니고 그 지지자 약 3250여 명을 싹 다 죽여버린다. 권력 분리가 잘 되지 않은 건강하지 않은 정치 시스템이 일으키는 폐해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원로원 최종권고는 로마에 내려오던 무슨 전통적인 방법 같은 것도 아니다. 원래 로마에 내려오던 제도는 원로원 권고로, 집정관이 도를 넘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로원의 권고로 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느새 원로원 최종 권고가 되어[27] 사람을 마구 학살해도 용납되는 어처구니없는 제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결국 대(對) 민중파 최종병기로, 민중파를 때려잡기 위해 원로원에서 고안된 제도로 봐도 무방하다. 전술하였듯 최초로 발동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를 때려잡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28][29]

오늘날 정확한 표결 수는 알 수 없지만 로마에서는 한번 투표하면 수천에서 수만 명 정도 투표한 것으로 추산되는데[30] 오늘날의 투표 시스템과 로마 공화정의 투표 시스템이 다르므로 투표 수와 지지자 수를 일대일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무려 3000명 단위로 지지자를 학살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특정 지지자의 정치 지지 기반을 추후에도 씨도 안 남기고 학살하려고 한 뒤, 도망치거나 숨지 못한 사람들 빼곤 다 죽였다고 봐도 될 정도의 학살이다.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투표로 인해 돌아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권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이 군주정의 권력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나마 상시 발동이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대신에 상시 발동이 아니므로 한번 발동이 걸리면 군주정에서조차 반란이 무서워서 함부로 못 하는 짓을 끝까지 해버릴 수 있다.

또한 키케로 카토는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절대 민주적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당장 키케로가 자신의 최고 업적이라고 내세웠던 카틸리나 탄핵부터가 문학사적으로는 걸작 소리를 듣지만, 그 내막을 뜯어보면 유력한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 놓고는 그것이 로마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며 정당화하며 법치주의를 완전히 무시한 연설이었다.[31] 당장 키케로는 이 사건에서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킨 뒤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그라쿠스 때처럼, 약 3000명의 지지자들도 학살시켰으며, 이는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을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투표에서 이기는 방법! 경쟁자의 지지자를 다 죽여버리자.[32] 참고로 이게 처음도 아니고, 뭘 잘못 먹고 실언을 한 것도 아닌 게 키케로는 그라쿠스를 죽이는데 앞장 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를 옹호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런 걸 명대사랍시고 남길 정도로 극단적인 반민주적인 인사였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카토 역시 필리버스터를 남발하며 카이사르를 견제했다며 고평가 받지만, 이 인간이 필리버스터로 반대한 안건이라는 게 바로 민중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법안이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카토는 앞서 언급한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 때 누구보다도 키케로에게 찬성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카이사르까지 카틸리나랑 한 패라고 묶어서 보내버리려들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을 정도로 법치주의나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인사였다. 참고로 이게 그나마 원로원파 중에서 나은 인물들로 언급되는 인물들인데도 이런 수준이었다.

심지어 술라가 카이사르보다 낫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술라가 사욕을 위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기득권인 원로원을 위해서 내전을 일으킨 뒤, 내전 이후에도 수천 명 단위로 정적을 학살했다. 사욕으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기득권층을 위해서 내전을 벌이고, 정적을 학살하고 독재를 하다가 내려온 사람이 낫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술라는 군사적 능력과 권력을 잡는 능력은 빼어났을지 몰라도 당시 로마체계의 문제의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성과는 전무했으며, 개혁을 일으키긴 했지만 긍정적인 영향은 없는 반면 내전으로 국내를 피폐화시킨 이후에도 민중파를 학살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 발동 등으로 국가 시스템의 불안정성만 키우는 퇴보나 다름없는 개악이었다. "무능한 리더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말아먹었지만 의도는 좋았다."는 건데, 카이사르가 민중에게 가져온 긍정적인 부분은 " 독재를 정당화할 순 없다."라며 전부 무시한 뒤, 술라가 말아먹은 것에 대한 평가는 다 건너뛰고, 그 좋았던 의도에 대한 평가만 하면 전혀 공평한 비교가 못 된다.[33][34]

결정적으로 일부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이 청렴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니었다를 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원로원이 비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이라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들이 부나 권력을 많이 가져서도 아니다. 로마는 중산층까지 무너져가는 상황에 있고 심지어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병조차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땅도 못 받고, 벌어둔 돈은 부족하기 짝이 없어서 깡통차는 상황이다 보니 내전이나 반란 일어나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원로원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로 부를 독점하고[35], 해결하라고 뽑아놓은 호민관들이 이 점을 개선하려 들면[36]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박살내 버렸다. 그게 악이잖아 하다못해 원로원이 부를 쓸어담더라도 시민병이 입에 풀칠할 정도의 환경이라도 만들어주고 나서 벌어진 빈부격차라면 그래도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이 독재보단 낫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37], 반란이나 내전을 부르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진행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설령 내전이나 반란이 진압되더라도 얼마 안 가서 다시 발발할 게 뻔하고, 다시금 진압되더라도 무한반복될 게 뻔하다. 그 원로원 의원 중 몇 명이 개인적으로 청렴했다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그 상황을 수습할 의지조차 없었고, 그 해결을 하려는 민중파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남발하거나 필리버스터로 토지 재분배를 막는 데 앞장서기까지 한 모습을 보인다면 더더욱 옹호의 여지가 없다.

카이사르가 정적을 숙청한 뒤, 절대 권력을 구축한 것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당시의 원로원이 이끌어가던 공화정은 민중을 위한 법을 만들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원로원한테서 권력을 뺏은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라고 볼 수가 없으머, 카이사르의 오점을 찾는다면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독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인간적 한계이자 당시 시대 그 자체의 한계라고 봐야지, 카이사르가 야망이 넘치는 폭군이라서 그랬다고 보는 것은 심한 처사다. 그리고 전제정은 고대와 중세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효율적인 정치 체제이다. 오늘날에야 교육의 질 상승, 계몽주의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둔 인권 의식의 상승, 정보 통신 기술과 교통수단의 발달 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자리잡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그러질 못했으며 영역이 넓어지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진 로마 입장에서 민주정이든 과두정이든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한 사람이 모든 정권을 위임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다. 전제정에는 무능한 한 사람에 의해 나라가 기우는 형세를 만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마저도 민주정 혹은 과두정에서의 지지부진한 일처리와 다수라는 명목하에 개혁 의지를 없애버리는 것보단 낫다. 전자는 유능한 한 사람이 나오면 나라가 개혁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다수가 전부 바뀌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카이사르는 유능했고, 불안한 정세를 바로잡고 다수의 의견을 수용할 능력이 있었다.

애시당초 당시 공화정이 망하고 원수정으로 간 것도 공화정이 시대적, 시스템적 한계 때문에 제대로 운영되지 못 했기 때문인 것이지[38] 공화정 그 자체의 비효율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파괴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지만, 카이사르가 살아 있을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로마의 공화정은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존속했다. 로마가 황제정이 된 것은 그 후임자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총사령관)가 절대 권력을 지닌 채로 그 후계자들에게 세습되면서 왕과 같은 권위를 갖추며 종국에는 엠퍼러(황제)의 어원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공식화된 거지, 당장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을 부를 때는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불렀고, 공식적인 직함은 어디까지나 그전부터 있던 호민관이었다. 정확히는 국가의 대표가 모든 권력을 잡고 정국을 다스리는 전제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더불어 무엇보다 로마 공화정의 본질이 귀족 과두정인 것이 현실인 시점에서 귀족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1인 독재정을 만들었다고 한들 그것이 민주주의의 파괴로 비판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이 시점에 이미 로마의 공화정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한 일이지 카이사르가 한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누리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왕에 취임한 적이 없으며, 기존의 임시직이었던 독재관직을 종신화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이마저도 원로원의 거두였던 술라가 먼저 한 짓이지 딱히 카이사르가 오리지널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1년도 안 되어 암살로 숨을 거둔지라, 그가 평생 독재자로 살았을지, 아니면 술라처럼 2년 만에 은퇴하고 내려왔을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게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당대 로마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개 도시국가가 아닌 거대 제국으로 변모했고 내부적으로는 거대 제국으로 변화한 상태에서 현 체제는 이를 수용하기에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공화제 자체가 비효율적인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사회 발전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39] 거기에 더해 로마의 공화제는 귀족과 평민 간 차별이 존재하고 로마인과 외부인 간 신분상 차이가 있는 등 불완전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런데 기존의 원로원파들은 이런 변화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하고 오히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한 과실을 독점하는 데만 급급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변화를 읽고 민중의 편에 서서 기득권과 싸웠다. 이 점만 놓고 봐도 카이사르는 쉽게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인물이다.

1.2. 부정적 평가

독재자들이 제정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아테네에서 저 유명한 30인(三十人) 독재자가[40][41] 법률을 부과하려고 한다면, 또 설령 아테네인들 전부가 독재자의 법률을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 그 법률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법률론」 1.15.4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여! (중략) 제가 염려하는 바는 당신이 영예의 참된 길을 망각한 채, 당신 혼자가 우리 모두보다 강한 것을 영예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며, 동료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영예의 길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시민이 되는 것, 국가에 공헌하는 것, 칭송받는 것, 존경받는 것,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영예의 길입니다. 실로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감과 혐오와 미약하고 덧없는 길입니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다." 극중에서도 이렇게 말했던 사람은 파멸의 길을 걸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몰락을 보고서도 사랑받기가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여전히 원한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카이사르가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련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살해자에게 처벌이 아니라 최고의 명예를 안겨 주게 될 그런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필리피카이」 中
역사서를 읽었고 고대에 벌어진 일들의 기록을 잘 활용한다면, 공화국에서 개인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분간을 반드시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민 자격으로서는 카이사르나 스키피오 같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스키피오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중략) 또 고대의 저술가들이 카이사르를 아무리 칭송하여도 그 영광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를 칭송한 사람들은 그의 좋은 운명에 현혹되었거나, 카이사르(황제)의 이름으로 운영된 제국이 너무 오래 지속하여 그에 대하여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겁먹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술가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카이사르에 대하여 어떤 글을 했겠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저술가들이 카틸리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면 된다. 카이사르는 이 사람과 비해 보면 더욱 더 혐오스러운 자이다. 카틸리나는 고작 국가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품었을 뿐이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생각을 실천했으니 더욱 비난 받아 마땅하다. 또 독자들은 저술가들이 카이사르 암살자인 브루투스를 어떻게 칭송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카이사르의 권세에 눌려 그를 비난하지 못하니까 그 적수를 높이 칭송했던 것이다.
(중략)
그리고 그가 그 다음으로 암군들의 시대를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전쟁으로 적개심이 가득한 시대, 소요 사태로 의견 분열로 가득 찬 시대, 전시나 평시나 가리지 않고 잔인한 시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는 카이사르가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온 세상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0 中
후일 이 파당의 지도자로 올라선 카이사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얹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7 中

우리나라에선《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무슨 결함이 없는 완벽한 체제를 그린 영웅으로만 통하지만, 정작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42] 정치적인 의미에서 카이사르라고 까면 독재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도 통한다.[43]

로마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혼합정의 형태를 한 공화정 체제이다. 즉, 왕정의 요소를 지닌 행정관, 귀족정의 요소를 지닌 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를 지닌 민회가 상호견제를 하면서 권력이 쪼개진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근현대의 국가들에 비하면 문제점이 많으며, 실상은 원로원 위주의 체제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에서는 폭주하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탄핵할 수 있었고, 뻘짓하는 원로원 의원을 제명할 수 있었고,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조영관 등 행정관들을 선출했다. 반면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된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에 대한 합법적인 견제 장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최고 권력자의 폭정에 대항할 수단은 군사 쿠데타와 암살만이 존재하게 되었다.[44][45][46] 마키아벨리가《로마사론》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탄핵이 아니라 암살로 정치 커리어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파괴해버린 로마 공화정은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까지 이어진다. 로마 황제의 형식적인 견제 및 권고 기관인 원로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어갔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사후 로마의 정세는 황제를 꿈꾸는 군인 야망가들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성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민중을 존중했네 어쩌네 하는 것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러한 존중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자 한 명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의지가 돌변해버린다면 이라는 선택지만 남아버리는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한참 이후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거론하며 비판하는 게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공화정의 권력 견제 장치를 파괴해버린 것은 분명하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잘 알았을 것이다. 만약 몰랐다면, 그건 공화정 로마의 정치가로서 무능한 것이고.

게다가 "공화정 체제는 답이 없었고, 원로원은 부패했고, 따라서 군주정으로의 복귀는 필연이었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입장이다.[47] 카이사르의 옹호자들 일부는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가 아우구스투스의 체제로 쇄도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필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비판이다. 이미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린하고 파괴하여 원로원의 권위를 박살내버린 상황이었는데, 이걸 토대로 공화정의 필멸성을 논하는 것은 당대의 공화정 지지자들에게 너무 억울한 평가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공화정의 몰락을 거의 예정된 일처럼, 즉 마치 버틸 수 없는 늪에서 어쩔 수 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보기 쉽다. 사태의 전개에 어떠한 외부 위험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요구들에 공화정 시기의 사회와 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졌고, 로마의 팽창 동력이었던 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압박에서 비롯되었다. 사병화된 군대들, 점점 늘어가는 부로 인해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수중에 위엄, 부, 군사적 지배권이 집중될 때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도 진정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시점에서조차 사람들은 공화정과 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의 몰락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망과 자기희생, 천재성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결국 부정적 평가를 요약하자면, "카이사르가 제아무리 민중을 위해줬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이 독재자라는 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일 것이다. 민중의 지지는 결코 독재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독재의 반대말은 다수의 지지가 아니라 권력의 분립과 상호 견제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권력을 좋아하던 탐욕스러운 개인에 불과했으며, 인민의 것(Res populi)공공재산(Res publica, 의역하면 공화국)을 박탈하여 자신의 사유재산(Res privata)으로 만들어버렸다. 카이사르의 패악질에 비한다면, 차라리 술라는 잔혹했을지언정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라는 신념이라도 있었다. 물론 술라의 개혁에는 구체적인 여러 문제점이 있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군벌이었기에 모순이 가득했으나, 술라는 마지막에 스스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개인의 생활로 은퇴함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진심이었음을 입증했다.[48][49] 물론 그 과정에서 결국 로마 역사에 쿠데타라는 굉장히 안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오점은 있지만.

또한 카이사르의 일부 옹호자들은, 카이사르의 적들을 구시대적인 기득권층으로 모조리 몰고가는데, 이는 너무나 부당한 평가이다. 키케로는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였으며[50] 카이사르가 유린한 공화정을 수호하느라 인생을, 그리고 최후에는 목숨을 바쳤다. 소(小) 카토는 깨끗하고 검소하며 총독으로서의 내정[51]도 마찬가지였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내전이 사실상 카이사르의 승리로 결착나자 자살로 생에 마침표를 찍었으며,[52][53]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개인적 호의에 힘입어 자신에게 보장된 장래의 공직을 뿌리치고 가시밭길의 모험에 나섰다.

카이사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먹이는 카이사르의 관용 또한, 진심으로 용서하고 관용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회유책이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안티 카토》집필이다. 이 글은 소 카토의 자결을 찬양하는 키케로의《카토》라는 글이 카토에 대한 동정론을 불러일으키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쓰였다고 전해지는데, 본문은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문헌에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카토가 아내를 잃은 친구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에게 아내를 얻어주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호르텐시우스와 재혼시켰다가 호르텐시우스가 몇 년 만에 사망하자 다시 자기 아내와 재결합했던 일이나 카토가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을 아내 팔아먹은 주정꾼이라는 식으로 디스하는 내용이어서 오히려 카이사르의 쪼잔함만 드러낸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54]

또한 의외로 측근들의 배반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망 높은 이미지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후하게 대우하여 측근으로 삼았는데도 그를 배반한 네임드 측근만 해도 갈리아 전쟁 당시 아트레바테스 족장인 콤미우스, 갈리아 전쟁 당시 오른팔이었던 라비에누스, 역시 핵심 참모였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제2 상속자로 삼을 정도의 측근이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 아들처럼 대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있고, 친위대처럼 아끼고 혜택을 베풀어준 10군단이 파업을 벌이는 사건도 겪었다. 폼페이우스의 측근들 중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이탈자가 거의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카이사르는 겉으로는 인망 높은 지도자 이미지로 한껏 자신을 포장했지만 막상 아랫사람들의 불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이기적인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1.2.1. 반론

우선 카이사르에 반대한 원로원파에 대한 저술은 긍정적 평가에서도 기술했듯이 원로원파들이 보인 위선적 면모 때문에 그리 호응받지 못하고 있다. 긍정적 평가에서도 기술했듯이 키케로는 원칙주의자라고 하지만 카틸리나 음모 사건 때 국법을 어겼으며 카이사르 내전기와 이후에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상당히 많이 했고[55] 그 본인 역시 평민 계층에 생각만큼 개방적이지 않았고 카이사르에 대한 비판 사항을 보면 결국 원로원 기득권 수호라는 면에 갇혀 있다. 또한 키케로는 내전 직전 원로원 최종 권고에 찬성안을 던졌다. 카토 또한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원로원과 대지주 평민들만 변호했다. 본인은 청렴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부패에 비판하지 못했으며 평민 지원책에 정당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형식으로 오히려 공화정이 소중히 여기는 토론으로 의사결정을 위반했고 이러한 행위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에게 "카토의 일부 인기를 얻은 정책이 인기 영합 정책이 아니냐?!"고 비판을 들었다. 이 문제의 정점은 바로 술라로,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옵티마테스이면서 로마에 군대가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을 어기고 로마로 진군했으며, 재판 없이 로마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댔다. 이미 술라 시대에 로마 공화정의 도덕성은 끝장나 있었던 것이다.[56]
  • 로마 공화정의 위기는 전근대에 로마에 모이는 몇몇 시민들만이 통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으나 당대에는 그런 구조적인 결함보다는 원로원 의원들의 지나친 탐욕으로 인한 양극화 때문에 시민 계급이 몰락하는 게 더 큰 문제로 여겨졌다. 당대에도 이 문제는 잠재적 군단병인 로마 시민들의 경제적 몰락으로 인한 국방력 악화와 경제 불안 등의 이유로 매우 진지하게 다뤄져서 그라쿠스 형제, 사투르니누스 등 수많은 민중파 호민관들이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로원은 이런 개혁가들을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초법적인 조치로 죽이기에 바빴다. 호민관은 신체 불가침권이 있는 이들인데도 말이다. 호민관의 신체 불가침권은 로마법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지만 원로원 최종 권고는 법에 근거가 없는 초법적 행위다. 이것만 봐도 원로원에게는 법적, 도덕적 결함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체제 내부적인 개혁은커녕 원로원이 앞장서서 공화국의 전통을 스스로 짓밟아오다가 결국 카이사르라는 민중의 지지와 무력을 가진 독재자가 나타나서 공화국이 종언을 고한 것이지 멀쩡하게 운영되던 공화국을 갑자기 나타난 독재자가 뒤집어 엎은 게 아니다.

그리고 논점을 가장 벗어나는 부분은 이 원로원파 인사들이 개인적인 면모가 얼마나 청렴했냐를 떠나서 원로원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대처가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었다는 점. 제정이 카이사르가 원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카이사르는 최소한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분명히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57] 그리고 원로원파는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얻은 전리품을 또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민중들에게는 나누어 줄 생각이 없이 기득권인 원로원이 독점해 버렸다. 정작 그 전리품을 얻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포에니 전쟁에서 종군했던 민중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로 말이다. 거기에 단순히 독점을 넘어서

그리고 카이사르의 인덕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 카이사르를 배신한 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결국 카이사르의 관용을 저버린 자들이었다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다. 콤미우스는 카이사르 덕분에 갈리아 족장까지 오른 자였음에도 베르킨게토릭스의 회유에 넘어가 카이사르의 뒤통수를 쳤던 것이고, 라비에누스 역시 카이사르의 군문에서 활약했었으나 결국 자신의 사욕을 위해 카이사르를 배반하고 원로원측으로 투항한 자이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모두 내전기까지 카이사르의 편을 든 자들이었으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회유에 넘어가 카이사르 암살을 획책한 자들이다. 실제로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최고 심복이라는 10군단 에퀴스트리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트레보니우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카이사르의 관용을 배신한 더러운 변절자들"이란 낙인이 찍혀 로마에서 도주했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한 2차 삼두정파의 손에 전멸한다.

10군단의 경우는 사실상 8년 넘게 갈리아에서 종군하다가 내전기까지 휘말려 무려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복무하게 된 군단병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특히 이들은 본래라면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토지 등을 분배받고 제대할 부대임에도 이후까지 내전이 질질 끌렸던데다 그들을 제대시키고 영토 및 보상을 집행할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갑자기 소식이 끊겨버렸으니 자신들이 제대 이후 받을 배상에 대한 불안감이 생길 가능성에 일을 벌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카이사르가 직접 도착하자 반란을 거두고 다시금 충성을 맹세한걸 넘어, 카이사르를 배신한 배신자 폼페이우스파를 철저히 응징한데다 그가 다시 자신들을 원하자 기꺼이 종군했을 정도로 카이사르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폼페이우스측은 배반이 없었다는 것도 어불성설인데, 폼페이우스는 어디까지나 옵티마테스의 얼굴마담에 가까웠을 뿐, 옵티마테스들의 지배자가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그의 세력권이던 그리스, 소아시아, 이집트는 모두 폼페이우스를 배신했고,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반면 카이사르가 정복했던 갈리아는 로마의 대혼란기인 카이사르의 내전기 당시에도 카이사르를 배반하긴 커녕 묵묵히 그의 세력권으로 남았던걸 고려하면, 로마 시민들의 모습만 보고 카이사르에겐 배신자가 많았고 폼페이우스에게 없었다는 소리는 웃음벨에 가까운 소리나 다름 없다. 애초에 폼페이우스 암살을 획책한 자들은 과거 폼페이우스 아래에서 종군했다가 이집트에 정주한 로마 군단병들이다. 따지고 보면 폼페이우스도 같은 로마인에게 배신당해 죽은 셈이다.

거기에 위에서 말하는 원로원과 민회의 상호 견제 구조를 박살내버린건 다름 아닌 원로원 본인들이었다. 좀 더 자세히는 원로원의 폭주에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민회에서 상호 견제의 목적으로 원로원의 폭주를 견재하려고 하자 원로원 본인들이 직접나서서 살해하고 나중에 술라때는 그것도 부족해서 군대까지 동원해서 민중파를 죽여버린게 자칭 상호견제의 결과물이었다.

2. 군사적 평가: 기적의 반전 전술가

카이사르가 얼마나 훌륭한 장군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싸운 곳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그가 정복한 지역도 매우 광대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민족들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부하들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장군이었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58]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中

군사적 영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은 상당히 특이하다. 역사상 대부분의 명장들은 알고 보면 전투 이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승리를 거뒀다. 예를 들어 한니발 바르카의 경우 자신이 싸우고 싶을 때만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고 언제나 승리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정상적인 전투에서는 곤경에 처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상황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예상 외로 승리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으로 다음 전투들이 있다.
  • 사비스 전투: 숲길을 지나던 중 두 배에 달하는 네르비족의 매복에 걸려 장기인 로마군의 조직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지만 결국 승리한다.
  • 알레시아 전투: 공성전에서 갈리아 구원병에게 역포위를 당하는 치명적인 상황에 놓였지만 오히려 역전에 성공한다.
  • 파르살루스 전투: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친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하여, 기병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보조병으로 기병을 맞받아치는 변칙 전술로 승리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의 변칙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이 불후의 전술임에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던 폼페이우스가 이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변칙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병의 열세(1:7의 비율)를 만회하기 위해서 기병을 뒤에 투석병을 매달고 뛰면서 잠시 정차후 투석, 다시 질주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견제하게 한 후 정예 중보병을 이용하여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섬멸한 것은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59] 이는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과 같은 선배와 달리 기병의 전력이 열세인 점에서 '정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하긴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효하며 훌륭한 변칙이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카이사르는 정석적인 길을 걸어간 지휘관이 아니라 타고난 임기응변과 재치가 뛰어난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바꿔 말하면 개인의 자질에 의존하는 인물로써 후세의 장군들이 배워 따라하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알렉산더 한니발과 달리 군사적인 정석을 세우지는 못했다. 사실 카이사르는 타고난 정치가로 무력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면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한 것에 가깝다. 물론 드넓은 갈리아 지역을 단 10년 만에 평정하고, 여러 위기 상황을 기가 막힌 임기응변으로 돌파했으며 나아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폼페이우스를 격파했으며 내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군단병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을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 다만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 자체가 지극히 입체적이어서 누구도 배워서 따라할 수없는 것일 뿐.

애초에 그가 이렇게 독특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상황의 유불리를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과 병사들에게서 거의 광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낼 정도의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를 통솔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로마 군단병들 역시 전투력 수준이 남달랐다. 물론 카이사르의 군단병의 수준은 수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다져진 것이지 처음부터 뛰어난 병사들을 통솔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갈리아 전쟁기 초반에는 경험없고 우왕좌왕하는 군단의 모습이 나오나 베테랑이 되어간다. 같은 군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갈리아 전쟁기 초반과 후반의 군단들은 질적, 경험적으로 엄청나게 차이나는 역량을 보여주는데, 갈리아 전쟁 후반기에는 현지 동맹부족들까지 하나 빼고 모조리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보급이 완전히 차단되어 쫄쫄 굶는 와중에서도 총사령관에 대한 무한 신뢰 하나만 가지고 풀뿌리를 캐먹으면서 버티는 고참병들의 모습을 보면 카이사르의 지도력이 거의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에 비견할만한 수준이었음을 짐작 할 수있다.《 갈리아 전쟁기》를 읽는 재미 요소 중 하나가 이렇게 오합지졸에서 역전의 용사로 변해가는 군단의 모습이다. 이는 항상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이사르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자신의 부대를 무적의 군대로 키워낸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훌륭했음을 나타내준다. 예컨대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그와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전략은 독창적이다 못해 잘 단련된 병사가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당시 반대파의 지휘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수년간 갈리아에서 생존한 카이사르의 베테랑 부대를 맞아 양 진영 간의 거리를 정석의 두 배쯤으로 늘린 후 휘하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는 카이사르 측 병사가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치는 것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이사르 측 병사들은 절반쯤 뛰다가 상대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중간에 잠깐 숨을 고른 후 다시 뛰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그쪽에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시켜서가 아니라 군단병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멈춘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전략가로서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으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쓴《전쟁의 역사》다. 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 에르빈 롬멜과 자신의 대결로 미화하고, 조지 S. 패튼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60] 마켓 가든 작전마저도 억지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 어쨌든 몽고메리는 철저한 계획이 아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전후 서술 과정을 보면, 감히 브리튼을 침공한 괘씸죄로 카이사르를 깎아내리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든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억측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다수의 영국인들은 로만 브리튼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며, 몽고메리가 교육받았던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게, 로마한테 털리고 점령당한 당시의 영국 민족은 켈트족이고, 지금의 영국을 구성하는 앵글로색슨족은 로마가 물러난 뒤에 켈트족이 용병으로 끌어들인 거다. 그 뒤 앵글로색슨족이 고용주를 스코틀랜드 쪽으로 내쫓고 잉글랜드를 먹고 퍼진 것이 현대의 영미 계열 국가다. 민족적으로 볼 때는 로마와 척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사례를 보아도 위의 두 전투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있는데 일부러 찾아 들어간 것이다. 카이사르가 워낙에 전술가로서 능력이 뛰어나고 기회를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 보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카이사르만 아니고 전술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경향인데 기회를 포착하고 밀어붙이는 성향상 위험한 작전을 선택하는 모험주의에 전술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방에 모든 것을 거는 대결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실수를 만회하려 하거나 단점을 고치려 하기 보단 대역전승의 기회를 찾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을 정도니 그 성향이 이해된다. 본래 병법에선 이렇게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구하려 하는 건 무능한 장수나 하는 짓[61]이라고 경고하는데, 카이사르는 이 것의 반례라 할 수 있다.[62]

베르킨게토릭스 폼페이우스를 상대해서 카이사르가 패배한 두 전투, 게르고비아 공격, 디라키움 포위전을 볼 때, 카이사르는 너무 공세적인 작전을 선택했고 이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전략적인 열세에서 강대한 적을 공격하는데, 상대방은 전략적 우세를 이용해서 카이사르의 병참을 끊으면서 자신은 병참선을 확보한 뒤에 요새화한 진지에 틀어박혀서 소모전을 펼친다. 당연히 결전을 벌이려는 카이사르는 군량 부족과 포위의 위협 때문에 장기전에서 불리해진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회전 이외의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지만 로마군의 장점은 조직력에서 나오고 방어전에서는 조직력과 전투력을 상쇄할 수 있다. 거기다 수적으로 밀리면서 꼭 일부 병력을 떼어놓아서 다른 쪽을 견제한다는 식의 작전을 구사한다.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자신을 가지니까 하는 것이지만 직접 전투를 회피하고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략에 스스로 걸려들어가는 식의 전투를 벌임으로서 쓸데없이 패배하고 만다는 면도 있다.

요컨대 카이사르는 공세일변도 전술 때문에 위기를 자초하는 면이 강한 만큼 상대가 판짜기를 잘하는 방어적인 장군이면 살짝 휘둘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전략적 식견은 군사적인 면보다 정략적인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갈리아 전쟁 때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게르만족과 대결상황에서 충분히 갈리아에 동맹군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갈리아가 통일되지 않은 상황을 잘 활용했다. 그러다가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물이 나타나서 갈리아 전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립되었다. 내전에서도 원래대로라면 북아프리카부터 차분하게 공략하려는 당초 계획이 무너지자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한 뒤에 가한 공세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없었고 항상 적지에서 혼자 싸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환경적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갈리아 전쟁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에 대군을 조직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고[63], 내전도 예상치 못한 싸움에 동족과의 전쟁이라는 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가장 큰 불운이라면 카이사르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소모전을 벌이려는 우수한 지휘관을 두 번이나 연달아 상대한 것이고 가장 큰 행운이라면 둘 다 소모전을 하면 더 유리할 상황에서 승기를 탔다고 섣불리 전투를 걸었다가 카이사르에게 회생과 승리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전투 실력이라면 의외로 모자라기는 커녕 뛰어난 편이었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의외로 뛰어난 검술과 기마술, 격한 전투에도 지치지 않는 강한 체력을 가져 군단병들이 처음엔 무시하다가 나중엔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말을 잘 타서 등자가 없었기에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텨야 하는 승마 자체가 매우 힘든 시대에 경기장에서 안장도 고삐도 없는 말을 그것도 양손을 뒤통수에 짚고 타는 기행을 벌이는 바람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폭주족이나 바이커 갱이 하는 핸들 놓고 오토바이 타기 수준의 서커스인데 그러다 낙마하면 절대로 곱게 안끝난다. 서양에서 등자가 보급된 시기가 중세 쯤인데 이 정도 기행을 보일 정도면 카이사르가 말을 잘 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나 여느 기마 민족들이 말을 태어날 때부터 타고 자랐듯이 본인이 말을 계속 타고 지냈다면 이런 묘기를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이래저래 대단하기는 하다 갈리아 전쟁 중에서는 하루 동안 말을 타고 무려 100km를 돌파하는 고대 최고 속도의 진군을 한 적이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맏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스페인에서 치른 문다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에 앞장서서 싸운 기록이 나온다. 높은 지형에 있던 적군의 공격에 고전하자 직접 선두로 나섰고 선봉에 선 카이사르에게 적군의 공격이 집중됐다. 아피아노스는 “카이사르에게 날아온 투창이 200개나 됐다”라고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투창을 피하기도 했고 일부는 방패로 막기도 했다. 투창 몇 개는 방패에 매달려 덜렁거리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카이사르는 상처 하나 없었다. 카이사르는 투구를 벗어 자신이 누구인지 병사들이 쉽게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고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정예 10군단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대들은 그대의 장군이 고작 아이들에게 패배하도록 놔두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플루타르코스) 주춤하던 병사들은 다시 전진했고 끝내 승리를 거둔다. 후에 카이사르는 “나는 항상 승리를 위해 싸웠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살기 위해 싸웠다”라고 토로했다. 수십, 수백 명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운빨과 실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배짱이 군인들에게 신뢰를 받아서 나중에 군인들이 파업을 해도 카이사르가 타이르면 곧장 귀담아 듣거나 전쟁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리더십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2.1. 반론

리델 하트는 카이사르를 단순히 부관형 지휘관이라 평가하고 있다. 이는 카이사르의 전공이 일레르다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 외엔 잘쳐봐야 능력 좋은 부관급 지휘관 수준이고, 여기서 두 전투를 더해봤자 결국 일급 지휘관급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다만, 리델 하트는 극성 스키피오빠이며, 리델 하트의 평가와 별개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갈리아 전쟁이나 카이사르의 내전을 모두 성공적으로 승리한 시점에서 그의 지휘력 자체는 최정상급이라고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리델 하트의 주장이 주류는 아니다.

다만, 이를 빼놓고 보더라도 카이사르가 전술적인 임기응변 능력은 뛰어나지만, 전략적인 식견은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다.[64] 실제로 갈리아 전쟁 말기에 일어난 암비오릭스의 난이나 카이사르의 전략적 실책으로 지적되는 게르고비아 공방전 디라키움 공방전이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다. 실제로 3개 사례는 모두 상대측의 실수와 이를 포착한 카이사르의 대처가 맞물리지 못했으면 그대로 전략적으로 패배할 뻔 했던, 매우 위험한 상황들이었다.

암비오릭스의 난의 경우, 뒤에 이어진 베르킨게토릭스의 난이 워낙 커서 묻혔을 뿐, 실제론 굉장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암비오릭스의 난 때문에 로마는 14군단을 포함해 9000여명의 군단병을 초기에 손실했기 때문. 물론 카이사르는 이를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이때 독단적으로 '로마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죄목으로 세노네스족의 지도자 아코를 처형한 결과, 갈리아족의 이탈을 부추기며 결국 베르킨게토릭스의 휘하에 갈리아 연합이 등장해 로마에 반기를 드는 상황을 초래하게 됐다.

게르고비아 공방전 역시 카이사르 실책의 대표였다. 물론 반 로마 연합의 수장인 베르킨게토릭스의 거점을 치는건 중요했다곤 하지만, 카이사르는 보급을 비롯해 여러 불안점이 있었기에 공방전을 하기 적합하지 못했고, 결국 퇴각 전 무리한 공격을 지시한 결과 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함에 따라 하이두이족까지 반란에 가담하며 전 갈리아가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갈리아가 부족 연립 체제가 아니라, 강력한 중앙 권력으로 통제하는 체제였거나, 베르킨게토릭스가 부족장들을 제어하고 청야전술을 계속 밀어붙여서 빈게네 전투와 같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난 6 ~ 7년 간의 갈리아 원정 자체가 수포로 돌아갔을 정도로 전략적으로도 매우 뼈 아픈 패배였다.

디라키움 공방전 역시 카이사르의 전략적 실책이었는데,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빠르게 정리하고 싶어서 조급해한 결과 숫자상 열세임에도 폼페이우스군을 무리하게 포위한 결과 패배했었다. 만약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추격해 카이사르에게 큰 피해를 줬다면 파르살루스 전투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최악의 상황에선 카이사르가 전사하여 내전기가 폼페이우스의 승리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높았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카이사르의 전술적인 안목이나 순간의 임기응변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상급 지휘관이었으나, 지나치게 공세적인 전술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전략적으론 도박수를 던지는 경우가 많았던, 그럼에도 비상한 안목 덕분에 패배한 이후에도 이를 잘 수습하고 역습을 가해 승리할 수 있었던,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형 장수에 가까웠던 셈이다.[65]

3. 인간적인 평가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적인 능력과 매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계자처럼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었으나 게다가 탈모까지, 풍부한 교양,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먼저 나서는 카리스마, 뛰어난 언변과 유머 감각, 사적으로는 관대하고 여유로운 성품 등으로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었다. 수많은 유부녀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 남편들에게조차 사적인 원한을 샀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천성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부분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었다. 민중파로서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 관군인지 반란군인지 애매한 입장에서 수 년 간 치른 내전에서도 부하들이 그를 믿고 따른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매력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특유의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이는 여러 일화를 통해 드러난다.
  •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자신의 최정예 10군단 제대를 요구(본 목적은 임금 인상)하며 파업하자 그 즉시 ' 전우 여러분(Commilites)'이 아닌 ' 시민 여러분(Quirites)'이라 불러 파업을 철회하게 만들었다는 일화.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다소 야사로 여겨진다. 허나 이후 탑수스 전투에서 10군단이 유별나게 용맹하고 괴물같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언급되는 사실이다.
  • 키케로와는 죽을 때까지 원로원에서 싸워 댄 정적이었지만, 사적으로는 그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까딱하면 피를 보았던 고대 시대의 정적 치고는 우호적으로 지낸 편이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지속적으로 키케로의 정치적 지원을 원하며 우호적 제스쳐를 보냈고, 키케로 또한 카이사르가 인간적으로 싫다기보단 정치적 신념의 차이 때문에 제안을 거절하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내전 발발 직전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고 유능하기까지 한 카이사르" 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정치적 신념이 일치하는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물론 결과적으로 폼페이우스를 선택한 것은 키케로 답다면 다운 일이고, 카이사르도 이를 문제삼아 그를 박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본인도 덕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카토가 로마인이 같은 로마인을 "관용" 해주는 것은 공화정 정신에 어긋난다며 맹비난한 카이사르의 관용을 키케로는 "그래도 피를 보지 않는 것이 더욱 현명한 행동이다" 라는 취지에서 칭찬하고 지지해주기도 했다. 물론 카이사르도 키케로의 드물지만 값진 지지 선언에 매우 기뻐했다고.
  •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된 뒤 키케로의 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키케로가 카이사르와 밤새 술을 마신 뒤 내린 평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솔직히 즐거웠다는 점은 인정한다" 였던 것을 보면 서로간 개인적인 감정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전 말기 폼페이우스가 패망한 후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카이사르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키케로를,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가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그에게 먼저 다가가 친근하게 대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
  • 키케로가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 본래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집무실도 제집 드나들듯 편히 방문하고는 했는데,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된 후 업무량이 늘어나 새로 충원된 비서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키케로를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한때는 자신이 선배 정치인이자 대등한 사이였는데 이젠 이런 처지라니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감은 곧 말끔히 해소되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 잠시 집무실을 나왔던 카이사르가 대기실에 있는 키케로를 보고는 "이래서야 내가 미움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 마르쿠스 키케로조차도 자유롭게 내 집무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이라고 비서들을 갈군 것이다. 키케로는 당연하겠지만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키케로의 자뻑하는 성격을 감안한 카이사르의 의도적인 오버액션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이런 일화를 친구에게 편지로 보냈다는 사실에서 키케로의 성격 또한 엿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장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다. 다음 세 사람만 보아도 카이사르의 사람 보는 안목을 엿볼 수 있다.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용맹한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어 봤다. 일선 지휘관으로는 용맹하지만 최고사령관으로는 부족하다는 카이사르 생전의 평가는 그 이상 정확할 수 없었다.[66] 사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재 시 로마의 정치를 담당했다가 이미 많은 실책으로 카이사르를 실망시킨 바 있기 때문에 애초에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유언장에서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자 실망하여 시간을 끌다 오히려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만 더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카이사르 사후 당장의 표면적인 세력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이후로도 숱한 실책을 저지르며 끝내 몰락했다.
  • 옥타비아누스
    말 그대로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는 수준이다. 적자가 없었던 카이사르에게는[67] 누나의 손자라 그저 가까운 혈육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으나, 미리 아그리파를 붙여 주는 등 확실한 후계자로 키울 생각을 일찍부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카이사르 개인에게뿐 아니라 로마 역사상 가장 탁월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때이른 죽음으로 십대의 나이에 급작스레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아 입지조차 불안정했으나, 뛰어난 능력으로 로마 내전을 평정하고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가 되어 제국의 기틀을 닦음으로서 종조부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위 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안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옥타비아누스는 뛰어난 정치력과 권모술수에 비해 군사적 능력은 꽝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해 아그리파를 붙여준 것인데, 과연 기대에 완벽하게 부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제위에 올린 일등 공신이 되었다. 역사 속의 공신들이 흔히 저지르던 사소한 실책 하나 저지르지 않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친구로 남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업적도 남겼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건강이 나쁜 자신이 단명할거라 잘못예상하여, 자신이 죽고나면 후계자가 성장할 때까지 죽마고우 아그리파에게 임시이지만 황제위를 넘기려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둘 사이의 믿음과 신뢰는 엄청났다.
    거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평민 출신이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즉, 평민인 데다가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았던 아그리파는 철저히 옥타비아누스에게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아그리파는 단 한 번도 옥타비아누스에게 거역하지 않고 철저히 그의 명령을 받들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그를 붙여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의 선택에 있어 더욱 대단한 부분은 당시 둘은 아직 십대였다는 것이다. 즉 딱히 어떤 전공이나 실적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카이사르는 그들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쯤 되면 가히 천재적인 안목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카이사르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람 보는 안목이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치명적으로 어긋난 것은 자신의 암살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1] 당시 로마 제국은 [2] 사실 당시의 로마 공화정 체제가 유지 되는 것은 힘들었다. 아테네와 비교해 보면 아테네는 민중이 권력을 뒤집는 데 성공하여 귀족과 민중의 차이가 줄어들고 결국 평등한 입장에서 정치를 할 수 있었는데, 그 요인 중 가장 중요한 점은 아테네는 인구가 도시국가 수준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로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 카르타고 등에 속주들을 두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들도 로마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고, 이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공화정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았던 데다가 원로원은 이런 문제에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고, 또한 공화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귀족 중심의 과두정에 가까웠다. 호민관이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런 막대한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에서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남발해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억눌렀다. 이를 통해 로마의 공화정은 말기로 갈수록 모순으로 가득찼으며 이를 개혁하여 체제를 바꾸는 길밖에는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로마 공화정은 포에니 전쟁 이후로 바뀐 저변에 대해 적응하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제정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 물론 꼭 공화정을 대신해서 제정이 성립해야 할 당위성이 없긴 하겠지만 그렇다면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해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들이 노력해야 했는데 정작 그들은 공화정의 모순에 대해 무심하였고 모순을 시정하라는 요구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남발해 밟아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런 모순을 견디다 못해 공화정은 무너졌고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차례가 돌아왔던 것. [프랑스어] On parle beaucoup de la fortune de César. Mais cet homme extraordinaire avait tant de grandes qualités, sans pas un défaut, quoiqu’il eût bien des vices, qu’il eût été bien difficile que, quelque armée qu’il eût commandée, il n’eût été vainqueur ; et qu’en quelque république qu’il fût né, il ne l’eût gouvernée. [영어] Much is said of Caesar's good fortune. But this extraordinary man had so many great qualities, without a single defect — although he had many vices — that it would have been very difficult for him not to have been victorious, whatever army he commanded, and not to have governed any republic in which he was born. [6] 단순한 역사가가 아닌 19세기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로마에 관한 연구에서는 당대 사람들 중 가장 독보적인 업적을 자랑한다. 불멸의 명작인 로마사의 저자이며 1500편이 넘는 로마 관련 연구를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7] 현재야 과학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를 누릴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공화정의 한계는 도시국가를 넘어설 수 없었다. 당장 투표를 위해 몇 번이나 고향에서 로마로 오고갈 수가 없었기 때문. [8] 민중이 카이사르의 군공만으로 지지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술라 루쿨루스 역시 화려한 군공을 세웠음에도 그들은 보수파라는 이유로 인기가 없었다. 애초에 술라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면 그런 피의 숙청을 할 필요가 없었다. [9] 카이사르는 뼈대 있지만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 서민들이 몰려 살던 수부라에서 평범하게 나고 자랐다. 일단 카이사르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서 공직으로 활약한 사람 자체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말고는 역사에 없을 정도. 민중파 마리우스가 고모부였고 친척이 술라의 숙청에 목이 베이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10] 학자들은 10대였던 카이사르의 첫 정치 무대라고 평한다. [11] 카이사르는 10대의 나이에 살생부로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던 로마의 지배자 술라의 이혼 명령을 대놓고 쌩까서 몇 년간을 죽음의 위협 속에서 도망쳐 다녔다. 고열이 난 채로 노예의 간병을 받으며 술라의 군사들이 추적하는 와중에 동굴 속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일화도 있으며 유명한 해적 이야기도 이때 시절. 10대 시절부터 이미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12] 그만큼 이때까지 쌓아은 로마의 모순을 해소하는 일은 워낙 거대하다보니 비록 권한은 많지만 그 권한을 밀어붙일 힘은 부족한 호민관보다 로마의 모든 권력을 거머쥔 독재관 정도가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13] 또 늘상 나오는 말이지만 로마에서 독재관 자체는 합법적인 지위였다. 다만 카이사르의 경우는 종신 독재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14] 라기보다는 사실 엄밀히 말해서 로마는 처음부터 귀족 공화정이었다. 그러다 로마의 덩치가 커지면서 평민들의 역할이 커졌고, 그에 맞춰서 평민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 그래도 로마는 나름 이런 신흥 평민 세력들을 흡수하고 또, 일부 권력을 평민들에게 이양하면서 이에 맞춰왔으나 이 또한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이 정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5] 그리고 이후로도 원로원에서는 비슷한 짓을 계속 벌였다. [16] 공화제가 가장 선진적인 정치 제도 중 하나긴 하지만 적어도 당시에 로마 정도 되는 체급의 거대 국가가 공화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정교한 시스템이 선행되어 있어야 하는데(교육, 과학 및 행정 제도의 발전, 인식의 변화 등),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에서 그 정도로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범위는 도시국가가 한계였다는 게 문제다. [17]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교통, 통신 등 과학 기술이 과거에 비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18] 이들이 했던 행동 중에 로마법을 어긴 것은 단 한 건도 없었고 모두 적법하게 민회를 거친 것이었다. 만약 불법적인 짓을 했다가는 처음부터 게임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원로원의 벌족들은 이들이 전례를 지키지 않았다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19]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널 때까지 최대한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심지어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술라가 만든 법까지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 정작 술라파였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는 술라가 만든 법을 무시했는 데도 말이다. [20] 실제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려 했을 때,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군대를 데리고 오는 것을 금지했다. 말이 좋아 금지지 카이사르를 암살하기 좋게 "단신으로 와야 한다."는 말인데, 이런 뻔히 보이는 수작인데도 어기면 반역자로 취급하겠다며 협박했다. 그것도 전쟁에서 승리하여 거대한 영토를 획득한 장군을 대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 [21] 이미 제2, 3, 4의 그라쿠스 형제가 나온 상황이었다. [22] 다만 미국 정치 시스템이 최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런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은 원래 미국이라는 나라가 각 주의 권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이고 그렇다보니 수렴진화한 것이 현재의 시스템이다. 당연하지만 이건 미국에서나 최선의 방법이지 다른 나라에서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방법이다. 당장 중앙집권체제가 가장 굳건한 국가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에서 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23] 현대에 비유하자면 임기제 대통령이 문제가 아니라 종신 국회의원의 집단적 타락이 가장 큰 문제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은 반쯤 허수아비로 국회의 나팔수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집단적으로 국유지를 탈취하고 서민층의 재산을 갈취하며 이에 대한 시정 및 개혁 요구에는 나몰라라 하고, 간혹 대중의 의견을 반영하는 의원이 등장하면 국회 비상의결계엄령을 선포하여 국민들을 탄압하는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이쯤가면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된다는 집정관/대통령이 문제가 아니라 탄핵조차 불가능한 절대권력을 가진 원로원/국회가 문제인 것인데 애초부터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은 말이다. [24] 원로원 최종권고의 대상이 된 인물 및 그 추종자들을 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죽인 자들을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하는 일도 없었다. [25] 라기보다는 초기 로마에는 아예 이런 수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이 제도는 사실상 민중파를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제도나 마찬가지였다. [26] 애시당초 그라쿠스 형제와 함께 등장한 것이 원로원 최종권고였다. 괜히 이 수단이(제도가 아니다!) 민중파를 때려잡기 위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이 수단으로 인해 피해를 본 인물들은 하나같이 민중파였다. [27] 라고는 하지만 원로원 권고와 원로원 최종권고 사이에 연관점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28] 그리고 당시 법은 민회에서 만들었는데 민회에서 이런 법이 통과될 리 없으니 사실상 원로원 최종 권고는 법적 근거조차 없는, 제도조차도 아닌 셈이다. [29] 거기다 이 제도 아닌 제도는 항상 민중파를 탄압할 때만 발동되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00가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게 명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핑계일 뿐이다.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남용된 것이 원로원 최종권고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농지법이 제정, 시행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30] 키케로의 언급에 등장한 집정관 1명을 뽑는 투표를 두고 오늘날 역사가들의 추산한 결과 약 6,000명에서 16,800명 사이의 총 투표수가 나왔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주류 의견이며 오히려 키케로 당시에는 동맹시 전쟁으로 로마 시민권자가 로마시 주민에서 이탈리아 반도 주민들으로 상당히 늘어난걸 생각하면(비록 차별제도 때문에 폭발적인 변화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그라쿠스 당시 전체 유권자는 더 적었을것으로 추정된다 [31] 그 뿐만이 아니다. 카틸리나는 비록 계획은 세웠지만 정작 실행은 하기도 전에 먼저 키케로에게 당해서 체포, 처형된 것이다. 즉, 탄핵이라고 하지만 심지어 탄핵도 아니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는 탄핵이라는 말조차도 난센스일 뿐이다. [32] 이 방식이 하도 지독했기에 나중에 가면 로마인들은 투표로 키케로를 추방하는 안건에 찬성하여 결국 키케로는 로마에서 쫓겨나게 된다. [33] 사실상 술라가 한 잘한 짓은 그가 적당한 기간 내 독재관 임기를 마치고 내려왔다는 것밖에 없고, 그가 그 적당한 기간 내 한 짓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호평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그가 적당한 기간 후에 독재관 자리에서 내려온 것 자체가 정적을 죄다 죽여서 그에게 더이상 왈가왈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그 정도 짓을 저지른 사람인 만큼 독재관이라는 직책따위는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34]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런 교훈(?)을 잊어버리고 정적들을 살려두었다가 암살이라는 형태로 뒤통수를 맞았고, 그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술라와 카이사르의 교훈을 잊지 않아서 정적들을 죄다 때려잡았기 때문에 살아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35] 단순히 부를 독점한 것도 아니고 국유지를 독식하는 형태였다. 즉, 이들의 재산은 자기네들이 번 것도, 차라리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도 아니고 국가의 재산을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불법적으로 가로채 자기 욕심을 채운 것에 불과했다. [36] 사실 처음에는 호민관도 개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호민관이라는 직책도 면면을 살펴보면 사실상 원로원 예비의원 같은 자리인지라 호민관들은 자기 선배인 원로원에 불이익이되는 적극적인 개혁에 나서려고 하지않았다. 그리고 이런 구조적 모순을 꿰뚫어보고 개혁을 시도했던 인물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였다. [37] 실제로 이걸 해결한 건 결국 아우구스투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퇴역병에게 퇴직금을 주는 법을 만들어 이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민중파 출신이다. 그리고 이 전통이 적어도 군인황제 시대까지는 쭉 이어져 황제의 지지 기반은 오히려 원로원보다는 민중이나 기사 계급이 차지했다. 원로원은 권력은 잃었으나 권위는 남은 채 황제를 성가시게 만드는 견제 기관이자 동시에 최고급 인재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협력 기관으로서 제국 멸망 때까지 존속했다. [38] 즉, 공화정 멸망의 책임은 시대적인 문제 및 원로원파 때문이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게 책임을 물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가 죽는 꼴을 봤을 텐데 자기도 그렇게 죽기는 싫었을 것이다. [39] 까놓고 말해 산업혁명 이전까지 공화제의 범위는 도시 이상을 벗어나지 못 했다. [40] triginta illi :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 등으로 인해 아테네의 민주정이 휘청거릴 무렵, 크리티아스를 포함한 30명이 아테네에서 전권을 장악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트라시불로스(Thrasybulos)의 반격으로 내전 끝에 민주정이 회복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30인 참주(僭主)'로 흔히 번역된다. 주도자격이었던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친척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는데, 민주정 회복 이후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원인으로도 꼽힌다. [41] 허나, 정작 당시 로마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원로원이 30인 참주였고 카이사르가 트라시불로스에 가까웠던지라 셀프 디스냐며 까인다. [42] 애초에 로마인 이야기는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부터 "나는 카이사르의 열성적인 팬"이라고 천명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평가를 100% 신뢰해선 안된다. 물론, 당시 카이사르는 체제를 전복시키려던 자였기 때문에 동시대 학자들의 평가도 다소 걸러들을 필요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인물은 절대 아니었던 셈이다. [43] 예를 들어《 스타워즈 시리즈》의 팰퍼틴 황제는 카이사르를 모델로 묘사되었다고, 조지 루카스가 인증했을 정도. 솔직히 팰퍼틴이 적들까지 동시에 컨트롤한 거만 빼면 두 사람의 노선의 차이는 거의 없다. 공화국을 전제정의 제국으로 만드는 것.《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도 템플 기사단의 중시조로 묘사된다. 또한 프랑스의 유명 만화 시리즈《 아스테릭스》의 실사 영화들에서도 카이사르는 강력한 자기 에고이즘과 자뻑질에 빠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44]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처럼 원수정이 황제와 원로원의 권력 분립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있으나 다수의 역사가들이나 학자들은 황제의 일인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이후로 원로원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어서 사실상 견제가 가능했던 세력은 군사력을 가진 속주의 총독밖에 없다. [45] 하지만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체제가 가진 문제점이다. 카이사르의 구상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맡았던 독재관직은 원로원이나 시민이 맘에 들지 않아하면 탄핵할 수 있었다. 이미 포에니 전쟁 시절 파비우스가 독재관 3개월차에 탄핵당한 사례도 있다. [46] 오히려 아우구스투스가 원수정을 만든 자체가 애시당초 죽기 싫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 킨나, 카틸리나, 카이사르 등 민중파 정치인들 중 제명에 죽은 인물들이 별로 없고 대부분 암살이나 원로원 최종권고로 인한 폭동, 사법살인 등으로 사망했을 정도다. 그러니 민중파 정치인으로서 죽지 않고 뭔가를 하려면 이렇게 원수정이라는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 [47] 군주정으로 복귀가 필연이라는 주장이 결과론적 입장이라는 거지, 술라가 그랬듯이 아무리 민중파를 밟아버려도 잡초처럼 계속 자라나듯 부패한 원로원이 이끌었던 로마는 어떤 형태로든 부당하게 차별받고 로마 제국의 과실을 나눠줄 것을 요구했던 민중이 원하는 대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그라쿠스가 민중파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뤄줬던 것처럼. [48] 다만 오랜 시간 민중에게 나눠준 권력, 예를 들어 호민관의 특권이나 민회의 권리 등을 회수하고 원로원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술라 이후로 민회는 민중의 대변자가 아니라 기득권의 하수로, 호민관 원로원과 뜻을 맞추는 관직이 되어버렸다. 이는 결국 카이사르가 삼두정치를 펼치기 전까지 원로원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당시 술라는 죽은 뒤에까지 사병들이 그를 위해 들고 일어날 정도의 충성심을 확보해놓고 있었던지라 공직이 있든 없든 간 로마 최고 지도자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그가 죽기 전까지 그를 비난하는 말 한 마디 안 나오다가 그가 죽자마자 장례를 치를 명예도 박탈해야 한다는 과격한 말이 튀어나온 것만 봐도 그 당시가 공포정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49] 사실 민회가 그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초법적 권한을 남발하여 민중파를 때려잡은 결과지 원래 민회나 호민관은 평민이 자신의 힘을 쟁취한 권리이다. 이걸 왜곡한 것 또한 원로원이니 남말할 처지가 못 된다. 그리고 비록 왜곡되었다고 하지만 이건 민회나 호민관 문제 이전에 로마의 정치 제도 자체의 문제고 (원래 로마의 선거는 에 좌우되었다.) 민회와 호민관 자체는 민중파 정치인을 꼬박꼬박 배출해냈다. 물론 원로원에 매수되거나 원로원파인 인물이 호민관이 되는 일도 적잖게 있었지만 이건 공화정인 이상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정도였다. [50] 라고 하지만 사실 키케로가 한 카틸리나 탄핵만 봐도 원칙은커녕 위법과 편법의 극치였다. 애시당초 카틸리나는 아무런 짓도 저지르지 않은 상태였는데 키케로가 나서서 "분명 카틸리나는 뭔가 일을 저지를 것이다."라는 억측만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카틸리나를 탄핵해서 자살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거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애시당초 당시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출마한 선거일을 선거 직전에 바꾸는 짓을 저질렀는데 이런 짓은 주로 로마 외의 시민권자(= 동맹시 시민)들은 로마에 와서 투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카틸리나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요소였다.[68] 그런데 키케로는 의도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69] [51] 기원전 58년에 키프로스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로마를 나와 키프로스로 내려갔고, 2년 후인 기원전 56년이 되어서야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52] 다만 카토의 자살은 공화정 수호라는 대의도 대의지만, 카이사르가 내전기에 표방한 관용의 수혜를 입지 않겠다는 의도가 더 컸다. 한평생 카이사르를 증오하다시피했던 그에게 카이사르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부지하는 한편 카이사르가 극도로 반목하던 상대에게도 은혜를 베풀 아량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정치적 선전물로 이용되는 일은 참기 힘든 굴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패배자의 자살은 결코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카토가 스스로 생을 마쳤다는 이유로 그가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진짜였다고 고평가 받는다면 히틀러도 독일 민족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한다. [53] 카토는 카틸리나 탄핵 시절부터 카이사르에 반목하는 사이었으며, 카이사르에게 집정관 선거와 개선식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게 하도록 의미없는 필리버스터까지 한 인물이었다. [54] 물론 이것도 웃기는 소리다. 이유가 뭐였든 간에 (설령 그게 그냥 정치적 회유더라도) 카이사르는 분명히 자신의 정적들을 살려두었다. 죽이는 게 훨씬 더 나았을 텐데도 말이다.[70] 그럼에도 죽은 건 내전에서 사망한 자들을 제외하면 자살한 소 카토 정도였고 폼페이우스도 카이사르가 아닌 이집트 왕가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에 비해 원로원파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동원해 민중파 정치인을 씨를 말리는 식으로 전원 살해했다. 그런데 고작 카이사르가 소 카토에 대해 디스하는 책을 내놨다고 관용이 거짓이라고 말하다니 그 자체가 이미 난센스일 뿐이다. [55] 당장 카틸리나를 처형한 것부터가 재판에 의하지 않고 로마 시민을 처형한 위법적인 행위였다. [56] 이런 점은 남북 전쟁 당시 남부의 노예제 옹호론자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자기가 하는 짓이 주의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미화했지만 정작 이들은 노예 폐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권리는 전혀 지킬 생각이 없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스가 링컨을 살해한 직후 외친 말이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살해할때 했다고 알려진(진위여부는 불명) Sic semper tyrannis!(폭군은 이렇게 되리라!)였다고 한다. [57]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를 국유화해서 그곳에서 나는 밀을 제대군인들에게 퇴직금으로 지불함으로써 로마 공화정 말기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대군인에 대한 처우를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해결했다. [58] 메리 비어드의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에 의하면 이를 학살로 일컬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로마인들 중 이를 근거로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59]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전부 귀족출신이라 얼굴에 돌을 던지자 얼굴 안 다치려고 피해서 와해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60] 다만 이건 좀 이상한 비판인 것이 일단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의 주축은 영국군이었고 그걸 지휘한 게 자신이니 미국 쪽 지휘관 언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패튼은 2차 엘알라메인 전투에는 관여한 바가 없기 때무에 언급이 없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그와 별개로 두 사람의 사이가 더럽게 나쁘기도 했고. [61] 손자병법 군형편 [62] 단, 이러한 전투도 극단적이거나 최후의 선택에서 빠르게 승리를 끌어내기위해 한 행동이지, 카이사르 본인도 갈리아 전쟁때는 보급을 위해 각 부족으로부터 최대한 받아낼 수 있도록 하였고, 내전때도 로마에서 최대한 보급되도록 지시하였다. 즉, 전투로 한정되면 일부 임기응변으로 승리하였으나, 전체적인 국면으로써는 항상 보급에 신경쓰고, 병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할 수 있게 지휘한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임기응변에 많은 할예를 하는건 가장 큰 전투를 임기응변으로 진행하다보니 그런 사람의 일면으로 남은것이다. [63] 애시당초 갈리아 전쟁이라는 게 원래 게르만족의 갈래인 헬베티아족(오늘날의 스위스 민족)의 준동을 막으러 간 거였는데 정작 지키려 한 갈리아족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전쟁으로 불이 붙은 것이었다. [64] 이는 상술했듯, 카이사르가 전통적인 장군이라기보단 군사적 식견이 높은 정치가에 가까운 인물이어서일 가능성이 크다. [65] 위에서 카이사르가 군인에 앞서 정치가라는 점이 많이 언급되는데, 바로 이점 때문에 카이사르가 일반적인 장군들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순신이나 염파 같은 장군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같은 정복군주들은 확실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 비교적 조심스럽게 전략ㆍ전술을 짜지만, 카이사르는 선거제 공화정의 정치가이니 인기를 위해서 화려한 전공을 거둘 필요가 크다. 당장 전공을 세워야 지휘권과 보급 등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특히 수적으로 열세 같은 이유로 위기에 빠졌지만, 기지로 이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는 민중의 인기를 끌기 딱 좋다. 다만 월급쟁이 장수든 본인이 주인인 정복군주든 장군쯤 되면 정치를 신경쓸 수밖에 없다. 중립세력이나 적을 회유하고 갈라치기에 능한 카이사르만 해도 그렇고, 이순신은 군주의 의심을 사며 짤리기도 했다. [66] 안토니우스의 몰락을 확정지은 악티움 해전이 가장 적절한 예시. 일선 지휘관으로는 악티움 해전의 전황 자체를 팽팽하게 만들었으나, 이집트로 도주하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간다는 판단을 내려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자격을 망각한 행위를 저질렀다. [67] 엄밀히 따지면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서 본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있긴 했으나, 혼외자식인건 둘째치고 어머니가 이집트의 파라오이며 본인도 차기 왕위 계승자라는 특수성 때문에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아무리 인정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 없는 아들이었다. 이 문제로 클레오파트라가 분노한 정황은 없는거로 보아 비공식적으로나마 아버지로서의 애정은 충분히 준 것 같지만, 자칫하면 이집트 왕가에 로마 정계가 귀속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과 그로 인한 시민들의 반발을 고려하면 카이사리온은 공식적으로는 누구의 아들도 아닌 채로 있는게 로마와 이집트 양측 모두에게 바람직했다. 때문에 유언장에서조차 카이사르는 친아들 카이사리온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 다만 이를 이해하지 못한 클레오파트라의 장대한 삽질 덕분에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가만히만 있었으면 무난히 차기 파라오 자리를 물려받고, 카이사르의 정당한 양자와 비공식적인 친아들이 서로 협력할 수도 있었던 좋은 기회였으나 클레오파트라의 야망 때문에 모든게 어그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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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카틸리나 역시 민중파인데 기본적으로 민중파는 동맹시 시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원로원파였던 술라가 동맹시 시민들의 토지를 뺏아서 자기 병사들에게 나눠줬기 때문. [69] 아이러니한 건 이 당시 로마에서 가장 원칙을 충실히 지킨 인물은 카이사르였으며 사실상 카이사르가 로마법을 어기는 짓을 저지른 건 루비콘 강을 건널 때가 처음이었다. 또, 심지어 카틸리나 탄핵 당시 소 카토와 키케로는 카틸리나 탄핵과 관련해서 카이사르가 위법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찾아 고소하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해서 기소를 단념했을 정도였다. [70] 후술하겠지만 그렇게 관용을 베풀어 살려준 자들이 카이사르의 뒤통수를 치고 암살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카이사르는 평생 배신을 당했으니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디스를 받고 있다. 당연하지만, 배신은 한 놈이 나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