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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 전투 영어: Battle of Mun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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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45년 3월 17일 | |
장소 | 히스파니아 문다 | |
원인 |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 | |
교전 세력 |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 |
지휘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페디우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
병력 |
총원: 40,000명 기병: 8,000기 50,000 ~ 60,000명[A] |
총원: 70,000명 |
피해 | 7,000명 | 30,000명 |
결과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 히스파니아의 폼페이우스 세력 소멸. |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5년 3월 17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등이 이끄는 옵티마테스군이 히스파니아 속주의 문다 시 앞 캄푸스 문덴시스 언덕(Campus Mundensis)[2]에서 맞붙은 전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일생 최후의 회전이다.
2. 배경
기원전 46년 4월, 아프리카 속주에 똬리를 틀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적하던 옵티마테스파는 탑수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해안가로 달아나 함대를 타고 탈출하려 했으나, 히포 레기우스 해전에서 카이사르의 편을 든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함대에 가로막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자 자결했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해안가를 따라 육로로 히스파니아로 향했다가 시티우스의 급습으로 체포된 뒤 며칠 후 처형되었다. 또한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는 옵티마테스파를 도왔던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함께 저녁식사 후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우티카에 남아 있던 소 카토는 카이사르가 도착하기 전에 단검으로 배를 찔러 자결했다.그러나 모든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이 죽은 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아프리카 속주 총독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그리고 갈리아 전쟁 시기 카이사르의 심복으로 맹활약했으나 카이사르의 내전 발발 후 카이사르의 강력한 적수가 된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의 추격을 피해 히스파니아 속주로 달아났다. 히스파니아 속주에는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대단히 많았고, 카이사르가 일찍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한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폭정을 일삼는 바람에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그래서 속주민들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일행을 환영하여 그들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대신해 히스파니아 총독에 선임된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반란을 토벌하려 했지만, 그가 이끌던 2개 군단이 폼페이우스 편으로 넘어가 버리자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카르타고 노바, 타라코나, 울리아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한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장악한 뒤 독자적으로 주화를 주조했으며, 13개 군단과 6천 명의 기병대가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들은 카이사르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전투 의지를 불살랐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의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견제하게 했지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격퇴하여 오쿨보에 가뒀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돌아가자, 카이사르는 자신이 직접 히스파니아로 진군하여 옵티마테스파를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46년 11월 5일, 카이사르는 로마를 출발하여 히스파니아로 진격했다. 그는 이 원정에 8개 군단과 8,000명의 기병을 통솔했다. 8개 군단 중에는 갈리아 전쟁 때부터 그를 따른 베테랑 군단인 5군단, 6군단, 10군단이 있었고, 나머지는 신병으로 구성된 새로운 군단이었다. 12월 2일 히스파니아 국경 지대에 도착한 그는 코르도바 시민들로부터 "당신을 따르고 싶으나 적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서신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울리아로부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자신들을 포위 공격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카이사르는 대다수 도시가 돌아서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지한 울리아를 돕기로 하고, 루키우스 비비우스 파키아쿠스에게 6개 코호트를 맡겨 울리아로 향하게 했다.
파키아쿠스의 부대가 울리아 인근에 이르렀을 때, 마침 폭우가 내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도시를 에워싼 적군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는 이 점을 살려 매우 좁은 대형으로 성문에 천천히 접근하게 했다. 그러다 한 경비병이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암호를 대라고 요구하자, 파키아쿠스의 군단병 하나가 "조용히 해라! 적에게 다 들리겠다."라고 윽박질러서 더 묻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적의 감시를 피해 도시 안으로 들어갔고, 울리아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렇게 울리아 구원군을 성공적으로 보낸 뒤, 카이사르는 코르도바로 진군했다. 당시 그곳에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울리아를 포위 공격하던 형 그나이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나이우스는 포위를 풀고 전군을 이끌고 코르도바 쪽으로 향했다.
섹스투스가 베티스 강을 건너 코르도바로 이어지는 다리를 파괴하자, 카이사르는 임시 다리를 건설하고 코르도바 인근에 진영을 세웠다. 그나이우스가 그 다리를 장악하려고 군대를 파견하자, 카이사르군이 즉각 응전했다. 양군은 좁은 다리를 놓고 한바탕 혈전을 벌였는데, 시체가 다리 양쪽에 수북이 쌓일 정도로 격렬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형제를 양면에서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날 밤, 그는 진영에 불을 활짝 피워서 적군이 "카이사르군은 계속 숙영지에 머물고 있구나"라고 착각하게 한 뒤, 어둠을 틈타 강행군하여 베티스 강을 건넌 뒤 아테구아로 진군했다. 그는 곧 그곳에 도착한 뒤, 며칠만에 참호를 파고 방벽을 세워서 도시 전체를 포위했다.
카이사르가 딴곳에 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폼페이우스 형제는 즉각 아테구아로 달려갔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포위망이 매우 견고하지만, 강이 가로지르고 지세가 험한 우쿠비 쪽의 방벽이 덜 갖춰졌다는 걸 파악했다. 그들은 이 쪽을 뚫기로 하고, 야간을 틈타 강력한 분견대를 파견하여 우쿠비 언덕에 주둔한 적을 기습하게 했다. 그러나 그곳을 경비하고 있던 부대가 조기에 눈치채고 경보를 울렸고, 제5, 제6, 제10 군단이 즉시 투입되어 이들을 격퇴했다. 폼페이우스 형제는 일단 아테구아에서 6마일 떨어진 지점에 숙영지를 세우고 카이사르와 대치했지만, 라비에누스의 조언에 따라 카이사르가 원하는 결정적인 회전을 회피하고,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하여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양군이 대치하던 중, 아테구아의 친 카이사르 파벌이 카이사르에게 밀사를 보내 도시를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수비대가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처형했다. 그 후 그들은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격퇴되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자, 폼페이우스 형제는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서쪽으로 철수했다. 얼마 후 아테구아는 항복했고, 그때까지 폼페이우스 형제를 따랐던 속주민들은 이 소식을 접한 뒤 카이사르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뒤이어 살숨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적 숙영지 인근에 새 숙영지를 건설하게 했다. 그때 그나이우스가 그들을 급습했고, 이로 인해 숙영지 건설에 투입되었던 부대가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이때 제5군단의 두 백부장이 동료들이 후퇴할 틈을 만들고자 후방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그 덕분에 장병들은 무사히 살숨 강을 건너 본진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소리카이라로 이동했다. 3월 4일 소리카리아 마을 근처에 도착한 그는 마을에서 살숨 강 사이에 참호를 건설했다. 또한 그나이우스가 아스파비아 시에 남겨둔 수비대와 그나이우스 본진 간의 통신로를 차단하는 새로운 진영을 살숨 강 건너편에 세웠다. 그나이우스는 이를 막으려고 경보병과 기병대를 파견했지만, 미리 자리잡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이 그들을 격퇴했다.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불명확하나, 양측간에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는데 카이사르 쪽이 유리했으며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탈영자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폼페이우스 형제는 이대로 가다간 군대가 붕괴될 수 있다고 보고, 문다 시에 자리를 잡고 유리한 지형을 기반으로 카이사르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했다. 카이사르 역시 조속히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고 싶었기에 적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카이사르의 내전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문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기원전 45년 3월 17일, 카이사르는 문다에서 베티스 강 건너 편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문다 시에 틀어박힌 적이 전투에 나서지 않을 거라 보고 새로운 이동 경로를 계획했다. 그런데 정오가 되었을 때 첩자들이 "적군이 도시에서 나와 언덕에서 전투 대형을 펼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카이사르는 적의 전투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베누스 여신에게 승리를 기원한 뒤 전투 대형을 갖춰서 적을 향해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히스파니아 원정기>에 따르면, 그는 10군단을 우익에 배치하고 3군단과 5군단을 좌익에, 나머지 5개 군단은 중앙에 배치했다고 한다. 또한 문다 주변의 지형이 매우 험준해서 기병이 대규모 기동전을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기병 대부분을 후방에 배치했다. 한편 폼페이우스 형제는 13개 군단을 3개 대열로 배치하고, 라비에누스에게 우익 부대와 기병대 전체의 지휘권을 맡겼다.카이사르군은 평야를 가로질러 행군했지만, 베티스 강 앞에서 멈춰섰다. 적이 가파른 언덕 위에 포진한 채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장교들에게 진군을 계속할지 말지 논의했다. 그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적을 공격하길 원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물러선다면 적의 사기를 드높이고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이며, 신병이 많은 아군에게 악영향을 미칠 거라 여겼다. 이에 불리하더라도 진군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진군 나팔을 부르도록 했다. 이후 카이사르군이 강을 건너면서 전열이 다소 흐트러졌지만, 폼페이우스군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군이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자, 그들은 일제히 필룸을 던진 뒤 적을 향해 돌진했다.
카이사르는 적의 필룸 세례에 흔들리는 신병들에게 "선배들에게 뒤지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했으며, 그를 따라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한 베테랑 군단병들에게 "저 어린 것들에게 모범을 보여줘라"고 격려했다. 라비에누스의 기병대가 아군 좌익 측면을 위협하자, 카이사르는 6군단에게 그들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6군단은 기병대를 밀어냈지만, 곧이은 적 군단병들의 맹렬한 반격으로 강 쪽으로 서서히 밀려나다가 전열을 다잡았다. 이후 양측은 몇 시간 동안 접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쉽사리 가려지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신병들은 물론이고, 베테랑 군인들조차 유리한 지형을 기반 삼아 악착같이 버티는 적의 기세에 차츰 압도되어 밀려났다.
그 순간, 카이사르는 말에서 뛰어내려 물러나려는 자들을 붙들고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그는 이내 투구를 벗어던진 뒤, 전사한 군인의 방패를 들고 장교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이 내 삶의 끝이오, 너희의 군 복무가 끝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친 직후 언덕 위의 적을 향해 접근했다. 적군 진영에서 200개가 넘는 투창이 날아왔지만, 카이사르는 일부는 피하고 일부는 방패로 막아내며 버텨냈다. 그는 뒤돌아서서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세상이 그의 발 앞에 있었지만, 이제는 남부 이베리아의 외딴 전쟁터에서 죽으려 한다!"
오래도록 카이사르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군단병들은 이 광경을 보고 전의를 불태우며 적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이윽고 카이사르가 가장 총애하던 제10 군단이 적 좌익 대열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나이우스는 즉시 라비에누스에게 우익에서 병력을 빼서 좌익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예비대로 편성되어 있던 우익 부대가 좌익 쪽으로 이동하자, 그때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마우라테니아 국왕 보구드의 기병대가 적의 우측면을 파고 들어가 후방 기지를 위협했다. 라비에누스는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5개 코호트를 이끌고 기지를 지키려 했다.
라비에누스가 기지로 달려가는 걸 본 폼페이우스 군단병들은 그가 달아난다고 오해해 공포에 질려 패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선이 무너졌고, 카이사르군은 이때를 틈타 맹공을 가해 적을 잡히는 대로 쳐죽였다. 그나이우스는 패배를 직감하고 개인 경비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를 향해 달아났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폼페이우스군은 기지를 점거한 보구드의 기병대에게 가로막혀 모조리 몰살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3만 명에 달했으며, 카이사르군은 7천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이 전투에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전투가 끝난 뒤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승리를 위해 싸웠지만, 오늘은 내 생명을 걸고 싸웠다."
한편,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오래도록 괴롭혔던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가 전사했다. 두 사람의 수급은 카이사르에게 전달되었고, 카이사르의 지시에 따라 매장되었다.
4. 이후
카이사르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문다 시 공략을 맡기고, 자신은 코르도바로 이동했다. 짧은 공방전( 코르도바 공방전) 끝에 코르도바는 함락되고 수많은 주민이 집단 학살되었다. 한편 문다 시를 포위한 파비우스는 전사한 폼페이우스군의 시체로 봉쇄용 방책(palicade)을 세웠고, 그 방책과 함께 놓여있는 창에는 전사한 폼페이우스군의 수급을 꽂아 놓았다. 문다 시에 포위된 14,000명의 병사들은 한동안 버텼지만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자 항복했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중상을 입은 채 해안가로 도피하여 배를 타고 히스파니아를 탈출하려 했지만, 가이우스 디디우스가 이끄는 함대의 공격으로 배를 상실하고 라우로 숲으로 도주하여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루키우스 카이세니우스 렌토가 이끄는 추격대가 이들을 습격했다. 그를 끝까지 따랐던 장병들은 방어 대형을 편성하여 2차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세번째 공격에 결국 무너졌다. 들것에 실려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서 자기에게 달려드는 적에게 용감하게 싸웠으나 끝내 살해되었다( 라우로 전투). 그의 수급은 기원전 45년 4월 12일 카이사르에게 전달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를 매장하도록 했다. 한편 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발레아레스 제도로 피신했다.
카이사르는 섹스투스 혼자서 어찌할 수 없을 거라 여기고 사면령을 내린 후 로마로 귀환했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그가 외국 장군이나 야만인 왕을 물리친 게 아니라 가장 위대한 로마인 중 한 사람의 자녀와 가족을 파괴한 걸 기념하는 개선식을 벌이는 것에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한다. 그 후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으로 군림했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하기 전에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등 의원들에게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