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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옵티마테스군이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해안도시 아스쿠룸을 기습했다가 패퇴한 전투.2. 상세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누미디아 왕국의 군주 유바 1세는 폼페이우스와 가까운 관계인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옵티마테스파와 동맹을 맺었다. 반면 누미디아와 경쟁관계였던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쿠스 2세는 카이사르를 지지했다.기원전 48년 8월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아프리카로 피신한 옵티마테스파는 우티카에 정착한 뒤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기원전 46년 초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옵티마테스파 주력군은 그를 상대하기 위해 우티카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우티카에는 소 카토와 폼페이우스의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포함한 많은 원로 인사들이 있었다.
소 카토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아버지 폼페이우스가 그의 나이대에 세운 업적을 거론하면서, 폼페이우스의 수많은 클리엔테스가 있는 하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병력을 끌어모으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함대를 이끌고 하스파니아로 향했다. 그러다가 마우레타니아 왕국이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걸 염두에 두고, 그들이 카이사를 도울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그는 30척의 배에 자유인과 노예로 구성된 혼성 군대 2,000명을 이끌고 마우레타니아 해안 근처 마을인 아스쿠룸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성벽까지 접근해온 적을 가볍게 격파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생존자들은 함대로 도망친 뒤 발레아레스 제도로 피신했다. 그는 우티카로 돌아가지 않고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이 일로 자극받은 보쿠스 2세는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에게 누미디아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시티우스는 누미디아로 쳐들어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사로잡은 시민들을 모두 죽였다.
당시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도우러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있던 유바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30마리의 코끼리만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부하에게 본국 수비를 맡기고, 재차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 3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해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일전을 벌였으나 참패했고, 본국으로 도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께 가던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