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Gaius Scribonius Curio |
생몰년도 | 기원전 90년 ~ 기원전 49년 |
출생지 | 불명 |
사망지 | 로마 공화정 바그라다스 강 전투지 |
튀니지 아리아나 주 메제르다 강 | |
지위 | 불명 |
칭호 | 불명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아버지) 가이우스 그라쿠스(처조부) 풀비아(아내) 클로디아 풀크아(의붓딸) |
직업 | 호민관,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 |
계급 | 불명 |
복무기간 | ? ~ 기원전 49년[1]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우티카 전투(기원전 49년) ┗ 바그라다스 전투(기원전 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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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인물. 여담이지만 아버지와 이름이 완벽히 똑같아서 로마 시대나 서구권에서는 아버지 쿠리오, 아들 쿠리오 식으로 구분을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역사인 로마사가 한국에서는 시대별로 고르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고 포에니 전쟁, 기원전 1세기의 로마 내전 같은 몇몇 주요 사건 위주로 알려져 있는 관계로, 내전 정국에서 이름을 날린 이 아들 쿠리오가 아버지 쿠리오보다 더 유명하기 때문에 보통 쿠리오하면 아들을 지칭한다. 참고로 아버지 쿠리오는 기원전 76년 이후(기원전 76년에 콘술을 지냈고 그 이후 프로콘술의 자격으로 사령관으로 부임되었으므로)에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일리리아 계열 이민족과 싸우면서 로마군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처음으로 갔던 사람이다.[2]2. 생애
정확한 생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어렸을때부터 절친이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안토니우스와 동년배일 것으로 추정중이다. 그와 이름이 같았던 아버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는 연기자(라틴어로는 Burbulieus)라는 별명이 붙은만큼 탁월한 연설가이자 공화주의자로 키케로, 폼페이우스 등과 절친한 친구였다. 아버지에게서 이 연설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쿠리오 역시 당대 로마에서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친다. 정치성향 역시 아버지의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키케로, 폼페이우스와 깊은 친분관계를 가지는 한편 강경한 카이사르 반대파로, 로마 민회에서 카이사르를 호되게 비판하는 연설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 키케로가 쿠리오를 보는 시선은 공화정파의 꿈과 희망 그 자체.기원전 52년경에는 친구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미망인 풀비아와 결혼하는데, 이를 통해 클로디우스의 민중파 정치깡패 세력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후의 카이사르 지지 커밍아웃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강경한 카이사르 반대파였던 쿠리오가 호민관에 취임한 기원전 51년을 기점으로 갑작스럽게 카이사르 지지자로 전향한다! 무슨 이유 때문에 쿠리오가 급작스러운 변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정 시기 역사가인 타키투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쿠리오가 지고 있던 막대한 빚을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쿠리오의 호감을 샀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 본인도 젊었을 때 빚쟁이로 유명했는데,[3] 쿠리오 본인의 빚은 카이사르보다도 1.5배 정도됐다고 한다. 특히 기원전 53년 아버지 쿠리오가 사망했을 때 이를 기리기 위해 로마 최초로 회전하는 관객석을 갖춘 가설 극장을 세우고 대대적인 연극 공연과 검투사 경기를 벌이면서 큰 빚을 졌다고 한다.[4] 혹은 안토니우스와 어릴때부터 절친이었던 점을 들어 원래부터 숨은 카이사르파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쿠리오 본인의 급작스러운 전향은[5] 원로원 측에게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원로원 측에서는 더러운 매수라느니, 요즘 젊은이들은 도덕심이 없다라느니 하는 한탄이 가득했다. 이 시기 키케로가 지인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카이사르의 '보이지 않는 긴 팔'이 로마까지 뻗쳤다는 표현이 보인다.
이후 쿠리오는 갈리아 총독으로 일하느라 수도 로마에서 부재중일 수밖에 없던 카이사르를 대신하면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6] 카이사르 진영의 대표로 맹활약한다. 하지만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집정관 부재중 출마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다가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행하면서 사실상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자, 안토니우스와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카이사르에게 간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발발했고, 내전 극초기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와 쿠리오에게 수하의 병력 일부를 떼어주면서 수도 로마로 가는 길목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고, 둘은 카이사르의 기대에 걸맞게 맹활약을 한다. 쿠리오와 안토니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카이사르는 빠르게 이탈리아를 점령했지만,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내전은 장기화됐고 카이사르는 쿠리오에게 고대 로마의 식량기지였던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할 것을 지시한다. 쿠리오는 소 카토를 시칠리아에서 쫓아내고 섬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쿠리오는 적을 과소평가하여 4개 군단 중 2개만 이끌고 침공했고, 그 결과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누미디아 왕국과 폼페이우스 파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 유언은 "카이사르의 병사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는 없소." 전투 도중 참패가 확실해지자 측근이 도주할 것을 제안했을 때 답한 말이라고 한다.
로마 진군 당시부터 안토니우스보다 입지가 높았고 독립된 전역 사령관까지 맡을 정도로[7]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았지만 이른 죽음으로 정계에서 탈락해 버렸다. 살아 있었다면 다른 카이사르 휘하 장군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었을법한 인물. 안토니우스와 달리 군사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가 있다.
율리우스 왕조 이후에 쓰여진 탓인지 카토와 키케로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쿠리오를 상당히 비하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어느 순간부터 증발해버린다...
여담으로 젊은 시절 안토니우스의 동성 애인이었다는 루머가 있다.[8]
[1]
사망년도를 기준으로 볼때
[2]
영어 위키백과
Macedonia (Roman province) 중, 'He campaigned from 75 to 74 BC, becoming the first Roman commander to lead an army to the Danube and reduced the Dardanians to submission.' 및,
Gaius Scribonius Curio (consul 76 BC) 중, 'He was the first Roman general to reach the Danube.'
[3]
안찰관 시절 빚을 내가며 자신의 이름으로 축제를 주관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사비를 털어 축제를 개최하거나 후원해서 시민들에게 환심을 사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 덕분에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몰려와 부임도 못할 뻔 했지만 크라수스가 보증을 서주며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재밌는 건 보증을 서준 크라수스 본인도 카이사르에게 엄청난 양의 돈을 빌려준 상태였다.
[4]
훗날
대 플리니우스는 쿠리오 가설극장의 남아있던 설계도를 보고 '회전 관객석의 구조가 어찌나 부실한지, 검투사들보다 관객들이 더 죽을 확률이 높았겠다.'라는 평을 '박물지'에 남겼다.
[5]
거기다 카이사르의 밀명으로 인해 쿠리오는 최대한 자기가 카이사르 지지파로 돌아선 것을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거부권을 던지면서 원로원 측에게 빅엿을 먹였다.
[6]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전쟁 말기까지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활동했지만 기원전 50년에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호민관에 당선되어서 갈리아를 떠난 상태였다. 물론 이유는 쿠리오와 함께 다음 집정관 선거의 사전정지 작업을 하기 위해서.
[7]
옵티마테스파의 주 근거지 중 하나인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원정의 최고 사령관으로 맡기고 무려 4개 군단이나 그에게 준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전기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원정 후속군단 지휘를 맡았을지언정 쿠리오처럼 4개의 군단을 이끌고 한개의 전역을 담당하지 못했다.
[8]
다만 로마에서는 동성애는 그리 장려되지 않았고 또, 쿠리오와 안토니우스는 클로디우스의 아내였던 풀비아와 재혼한 적도 있어서(클로디우스가 풀비아의 첫번째, 쿠리오가 두번째, 안토니우스가 세번째 남편이다.) 그냥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애시당초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에 빠졌던 적도 있고. 참고로 로마에서 동성애를 그리 장려하지 않은 이유는 박을지 언정 박히면 안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