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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5년 4월 초, 히스파니아 속주를 탈출하려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라우로[1]에서 카이사르파 장군인 루키우스 카이세니우스 렌토의 습격으로 전사한 전투.2. 상세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서 참패당한 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카르테이아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함대를 끌고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배에 타던 도중에 그의 발이 밧줄에 걸렸고, 동료 중 한 명이 급히 이 밧줄을 검으로 자르려 했다가 그의 다리를 쳐버린 것이다. 그는 이로 인해 중상을 입고 들것에 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그렇게 함대를 타고 바다로 향했지만, 카르테아에서 급히 떠나느라 식수를 비축하지 못했기에 항해 4일째에 해안가에 상륙하여 식수를 구했다. 그때 가이우스 디디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습격하여 일부 배를 나포하고 나머지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그는 라우로 근처의 숲이 우거진 언덕에 피신했다. 한 지역 주민이 이를 발견하고, 루키우스 카이세니우스 렌토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렌토는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이들을 공격했다.
그나이우스를 끝까지 따랐던 장병들은 방어 대형을 편성하여 2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렌토의 군대는 적을 포위하여 굶주리게 만들려 했다. 이를 눈치챈 그나이우스는 포위망을 뚫고자 돌파를 감행했다. 야간에 기습 작전을 개시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포위망 돌파는 끝내 실패했고, 렌토는 재차 공세를 퍼부어 남은 적군을 제압했다. 그나이우스는 동굴로 도망쳐 숨었지만, 적에게 잡힌 병사들이 그의 위치를 발설했다. 이에 적군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들것에서 일어나 항전했으나 끝내 피살되었다.
그나이우스의 수급은 곧 히스팔리스로 보내서 그곳의 지역민들에게 전시되었다. 한편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루시타니아인들은 많은 부족민들을 모아 해안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가이우스 디디우스의 군대를 공격해 모조리 죽여버렸다. 한편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자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나이우스의 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추격자를 성공적으로 피한 뒤 군대를 재건하여 게릴라 작전을 벌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심한 혼란이 일어날 때, 그는 히스파니아 남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1]
오늘날 로라 다 에스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