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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9년 2월 15일에서 21일,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의 동쪽 측면에 있는 코르피니움(현재 코르피니오)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로마군이 맞붙은 전투. 카이사르의 내전의 첫번째 전투이다.2. 배경
기원전 5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1년간 전후처리를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다가오는 기원전 49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하는 걸 경계하는 원로원 의원들이 많는데, 특히 소 카토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서 저지른 몇 가지의 불법 행위를 지적하며, 그가 로마로 귀환하는 즉시 고발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여기에 한때 카이사르의 동맹이자 그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기도 했던 명장 폼페이우스도 율리아 사망 후 대표적인 옵티마테스파 인사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한 뒤 카이사르의 정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갔다간 정치 생명이 위험할 게 자명했다.그는 이 점을 고려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 머무르면서 원로원에 부재 중에 집정관 서거에 출마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이 이를 묵살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호민관으로 선출하게 한 뒤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게 했다. 이후에도 양자간의 갈등이 계쏙 이어지다가, 카이사르가 한 발 물러나 타협안을 제시했다. 부재중 입후보를 허가해 준다면 원로원이 원하는 대로 8개 군단을 해산하겠으며, 폼페이우스 역시 군단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카이사르의 서신은 기원전 49년 1월 초 원로원에 도착했다. 많은 온건파 의원들은 이 정도면 받아들일만 하다고 여겼지만,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소 카토 등 강경파가 결사 반대했고 폼페이우스는 장교들을 대동한 채 카이사르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데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여기에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지지한다면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위해 의무를 다할 것이지만 만일 의원들이 등을 돌린다면 폼페이우스에게 나중에 도움을 요청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결국 온건파 의원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시켜야 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호민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포해 호민관의 거부권을 무효화시켰다. 그 후 원로원은 아헤노바르부스를 갈리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그는 카이사르의 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중부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1월 12일 제 13군단을 이끌고 루미콘 강 앞에 이르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면 내전이 발발해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이 원하는 대로 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갔다간 모든 게 끝나버릴 것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굴복하느니 명예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다음과 같이 외친 뒤 강을 건넜다.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뒤 아리미눔(오늘날 리미니)에 도착했다. 이후 전령을 보내 갈리아에 머무는 모든 군단병들에게 이탈리아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카이사르가 피케눔 일대로 진군하자, 그곳의 모든 현은 갈리아 전쟁의 영웅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군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소집한 상골리 시 수비대 조차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와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이후 제12 군단이 합류하자, 카이사르는 아스쿨룸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이 도시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코호트를 이끌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접근해오자 병사들이 대거 그에게 가담했고, 렌툴루스는 저항도 못해보고 도망쳐 아헤노바르부스와 합류했다.
한편, 앞서 원로원으로부터 갈리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된 아헤노바르부스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2월 9일부터 10일까지 병력을 끌어모았다.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코호트를 모집하여 아헤노바르부스와 합세했으며, 20개 코호트가 추가로 소집되면서 총 33개 코호트의 병력이 모였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코르피니움으로 이동해 카이사르와 일전을 벌이고자 했다. 얼마 후 카이사르의 군대가 도착하면서 내전 발발 후 첫번째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 지휘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 병력: 제 12군단, 제 13군단, 제 8군단
3.2. 옵티마테스군
- 지휘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부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루푸스
- 병력: 33개 코호트
4. 경과
카이사르는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아스쿨룸에 입성한 뒤,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하루 휴식한 후 코르피니움으로 진군했다. 기원전 49년 2월 15일 도시 근처에 도착한 그는 아헤노바르부스가 강을 건너는 다리를 파괴하기 위해 투입한 5개 코호트와 교전했다. 그들은 곧 도시로 축출되었고,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성벽에 도착한 뒤 포위망을 구축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즉시 이 소식을 아풀리아에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알리고 "두 군대로 카이사르를 쉽게 포위하고 그의 보급품을 차단할 수 있으니 속히 구원하러 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성벽에 군용 기계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도시의 여러 구역에 분배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병사들에게 상당량의 토지를 분배하겠다고 약속하여 지지를 확보했다.카이사르는 참호 건설에 전념하던 중 코르피니움에서 7마일 떨어진 도시인 술모나 주민들이 자신의 편에 서고 싶지만 원로원 의원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와 아티우스 페일그누스가 7개 코호트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5개 코호트를 줘서 그곳으로 보냈고, 술모나 주민들은 카이사르의 휘장을 보자마자 성문을 열고 안토니우스를 맞이했다. 7개 코호트 마저 안토니우스 편에 서자, 루크레티우스와 아티우스는 곧바로 도주했다. 그리하여 코르피니움의 후방 도시인 술모나 장악에 성공한 뒤, 카이사르는 참호와 요새를 건설하여 도시를 둘러쌌다.
카이사르군이 공사를 한창 진행하는 걸 불안하게 지켜보던 아헤노바르부스는 적이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 폼페이우스가 보낸 사절을 접견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폼페이우스의 서신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아헤노바르부스가 자신의 지시와 상관없이 코르피니움으로 가버린 걸 혹독하게 비판하며, 자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군대로 그를 도우러 갈 수 없으니, 당장 코르피니움 시를 버리고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때 쯤이면 이미 카이사르군이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해뒀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일단 병사들에게 "폼페이우스가 곧 그들을 도우러 올 것이다"라고 거짓말한 뒤, 부관들을 은밀히 모아놓고 군대를 버리고 도망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보가 새면서 병사들이 이걸 알게 되었고,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아헤노바르부스를 포로로 잡고 사절을 카이사르에게 보내 항복하고 지휘관을 넘겨주겠다고 밝혔다. 카이사르는 사절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다음날 입성할 테니 성문과 성벽을 잘 지키라고 했다. 다만 적이 기만술을 쓸 수도 있었기에, 보초와 경비병을 배치해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이나 병사들이 은밀히 빠져나가는 걸 방지하도록 했다. 다음날 새벽,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찾아와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자, 카이사르는 "나는 명예를 지키고, 도시에서 추방된 호민관에게 다시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작은 파벌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로마 국민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해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카이사르의 말에 안심이 된 렌툴루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하고 있던 동료들에게 카이사르의 뜻을 전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헤노바르부스는 모든 게 끝장났다고 여기고 노예 의사에게 독약을 달라고 요구하고, 의사가 건낸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곧 카이사르가 모든 포로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자신의 성급한 결정을 책망했다. 이때 의사가 "저는 독약 대신 수면제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몹시 기뻐하며 서둘러 카이사르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귀순한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을 군인들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해준 뒤 자신과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각자 원하는 데로 가라며 풀어줬다. 물론 병사들 역시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고 자신의 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는 코르피니움 원로원으로부터 6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전달받았으나, 이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카이사르는 7일간 코르피니움에 머물렀다가 폼페이우스가 있는 아풀리아로 진군했다.
카이사르의 승리를 알게 된 폼페이우스는 그때까지 모은 병력을 이끌고 루케니아에서 카누시움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 끝자락인 브룬디시움으로 이동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이탈리아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서 내전을 조기에 끝내고자 브룬디시움으로 향했고, 양자는 곧 브룬디시움 공방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