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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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제남공(濟南公)
요옹 | 姚邕 |
|
시호 | 없음 |
작위 | 제남공(濟南公) |
성 | 요(姚) |
휘 | 옹(邕) |
자 | 자화(子和) |
아명 | 황아(黃兒) |
생몰 | 불명 |
출신 | 남안군(南安郡) 적정현(赤亭縣) |
부황 | 태조 무소황제 |
[clearfix]
1. 개요
후진의 황족. 태조 무소황제 요장의 아들이자, 고조 문환황제 요흥의 동생.2. 생애
홍시 연간(399년 ~ 416년)에 문환제 요흥이 흉노의 유발발을 거기장군, 봉거도위로 삼고, 항상 그와 더불어 군정을 의논하며 총애하였다. 이에 요옹은 형 요흥에게 경고하였다."유발발은 천성이 잔인하여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 그를 총애하시니, 신은 이것이 매우 의아할 따름입니다."
그러자 요흥이 반박하였다."유발발은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 나는 지금 그의 재능을 모아 쓰고자 하니, 그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는 데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너는 어찌하여 그를 거부하려 하는가?"
그러고는 유발발을 안원장군으로 임명하여, 그의 장인인
몰혁간과 함께 고평(髙平)을 지키게 하려 하였다.요옹은 이러한 인사를 반대하며 말했다.
"이는 불가합니다."
요흥이 물었다."경은 어찌하여 그의 인품을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에 요옹이 간언하였다."유발발은 위로는 교만하게 대하고, 무리를 다스릴 때에는 잔인하고, 교활하며, 탐욕스러워 인자함이 없습니다. 또, 그는 거취가 가벼워 쉽게 떠나려 하니, 폐하께서 그를 지나치게 총애하시면 결국 변방의 화근이 될까 두렵습니다."
요흥은 이를 듣고 임명을 잠정 중단하였다.오랜 시간이 지나고, 문환제 요흥은 이내 요옹의 경고를 잊은 채, 유발발을 지절•안북장군으로 삼고, 잡로(雜虜) 20,000여 명을 그의 휘하로 배속시켜 삭방(朔方)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발발은 반란을 일으켜 영북(嶺北)을 침략하였다. 이에 요흥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황아(黃兒)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후의 요옹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없다.요옹은 식견이 거울처럼 맑았고, 지혜로웠다. 특히 음악에 재능이 있어 모든 곡조의 변화를 이해하였고, 곡조를 늘리거나 감축하여 알맞게 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요옹의 곡을 전하면서 이를 가리켜 '제남신조(濟南新調)'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