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용어
- 프랑스어: élan vital
2. 근대 프랑스 육군의 공격적 군사교리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공격정신 / Offensive à outrance, Attaque à outrance유래는 1번 문단이다. 이 사상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는 전상자의 수나 상대국 영토의 획득 여부가 아니라, 야전지휘관이나 국가지도부가 전쟁을 지속할 의사가 있으냐 없느냐에 있다고 파악한 사상이다. 따라서 전쟁이란 지도부가 졌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진 게 아니며 이러한 전쟁지속의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의 높은 사기가 담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 이론은 지도부의 전쟁지속의지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짓는 핵심 요소가 아니라 전쟁이 언제 끝나는지 그 시점을 결정 짓는 요소라는 점을 잘 설명하게 되었다.[1]
따라서 프랑스의 이런 엘랑 비탈은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보어 전쟁, 러일전쟁에서 기관총, 야포 등의 진보된 화력 장비의 위험성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한 채 보병돌격을 고집하게 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론이었다.[2] 그렇기에 심지어 '모든 화기의 진보와 발달은 공세의 강화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 기관총'이라는 딱 세 글자로 반박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의 일선 보병들이 거의 분대마다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경기관총이 없던 시절인 만큼 기관총은 당대의 대표적인 방어용 화기였다.
이를 집대성한 인물을 제1차 세계 대전의 명장 페르디낭 포슈 육군 원수로 꼽지만 정신론과 사기론만 중시하는 엘랑 비탈 교리는 포슈 장군의 군사사상과 멀리 벗어난 이단에 불과했다. 포슈가 엘랑이란 개념을 언급하며 프랑스 육군의 정신력의 우월성, 정신력의 중요함을 설파하고 공세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론은 포슈의 군사사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포슈의 군사 사상은 정찰대를 통한 정보 탐색, 적군의 동향을 주변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하기, 우월한 병력과 화력에 대한 중요성, 포병과 보병의 합공, 예비대 운용법, 한 방법만 고집하지 않은 유연한 대응의 중요성 등 나폴레옹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을 접목시킨 사상이었다. 애초에 포슈 자신부터가 포병 장교 출신이었다. 물론 우월한 화력이 방어력을 증대하리라 예상 못한 것은 상당한 문제지만(정확히는 포슈는 화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공자가 전장의 주도권을 갖고 더 많은 화력을 먼저 투입할 수 있으므로, 화력의 증가는 공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포슈의 군사 이론을 정신론 하나로 요약하는 것은 옳지 않다.[3] 애초에 가장 대표적인 엘랑 비탈의 교리로 언급되는, 후술할 그랑메종의 1913년 교리는 화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포슈의 이론과 달리 화력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포슈의 군사이론을 직접 반박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4]. 이런 그랑메종의 교리에 대해 포슈도'당나귀가 쓴 안내서'라는 혹평을 남겼고 페탱, 드브니, 모뒤이, 에밀 파욜 같은 에콜 드 게르 출신의 교수, 장교들도 그랑메종의 교리가 화력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중세 후기에서 근세, 근대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프랑스 왕국은 생산력과 인구, 그리고 이에 기반한 육군 전력에서 서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국민개병제가 도입되면서 다른 경쟁국가들을 압도하는 소위 ' 대육군'을 갖추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기관총, 폭탄, 고성능 야포 등이 나오기 전이라, 방어군이 공격군한테 병력수에서 밀린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13~ 18세기 서유럽의 프랑스에선 지휘부가 전의를 잃지 않고 장병들이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계속 공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종국적으로 승리가 가능하다는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공방 양쪽간에 화력과 기동력의 차이가 크지 않은 조건에서 계속 공세를 퍼부으면 방어자는 지속적인 전력 손실으로 결국 무너질 수 밖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적국보다 우월한 전력(병력 수)을 동원할 수 있는 프랑스 육군은 정보 수집이나 병력 운용 등 전술적 측면에서 크게 실수하지 않고 공세만 유지한다면 결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만 해도 비단 프랑스 제3공화국 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독일 제국과 영국의 많은 장교들도 엘랑비탈의 바탕이 되는 정신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는 전열보병 시대의 영향이었다.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에서는 포탄과 총알 세례를 견디며 와해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하는게 가장 중요하였다. 만약 대열이 붕괴하게 된다면 패주하는 과정에서 적의 일제사격 몇번을 맞아주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 본토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군 장교단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교리를 따랐던 셈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고성능의 기관총과 야포가 등장하면서 우월한 화력에 기반해서 방어자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즉 공격자와 방어자간의 병력 손실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5] 게다가 19세기말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제 프랑스는 서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도 아니게 되었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전투의 양상도 달라졌고, 프랑스의 최대 강점이었던 인구 우위도 상실한 상황. 공업화 이전 육군 강국 프랑스의 전성기를 기준으로 보면 합리적인 교리 체계이지만 20세기 이후의 프랑스를 기준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과거의 추억에 지나치게 집착한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교리였다.
문제는 정신론과 사기론이 워낙 매력적인 탓에 포슈의 제자들은 포슈의 군사사상에서 정신론을 제외한 대부분은 사장되고 형이상학적인 "엘랑"만 강조하게 된다.
포슈가 육군대학 교장이던 시기 프랑스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그랑메종(Loyzeau de Grandmaison) 육군 대령은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의 교육총감에 취임하자마자 '엘랑 비탈'에 기반한 신 전투교령을 공포, 이것에 반대 의견을 보낸 장교들은 가차없이 퇴역시켰다. 그리곤 1913년에 개전된 야전교범에서 "향후는 공격 이외의 어떠한 전술법칙도 배제한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프랑스 육군은 대육군의 영광스러운 전통에 복귀해야 하며, 오직 정면 공세 이외의 어떠한 작전 행동도 인정해서는 안된다. … (중략) … 모든 공세행동은 그것을 궁극적으로 관철 할 수 있도록 강인한 정신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는 종국적으로는
총검 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전과는 오직 피를 흘려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육군은 향후 이 외의 어떠한 구상도 전쟁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으로 판단, 배제해야 한다.
- 그랑메종 육군 대령
- 그랑메종 육군 대령
엘랑 비탈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명문으로 마른강의 기적이라 칭하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포슈 장군이 말한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 중이다. 그야말로 상황은 최고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가 있다. 그러나 포슈가 실제로 이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당시 포슈를 보좌하던 막심 베이강 장군부터 이를 부정했으며 당시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도 미묘하게 부정한 적이 있다. 그리고 포슈가 남긴 또 다른 명언 중 엘랑 비탈과 관련된 것으로 승리, 그것은 곧 의지다.(Victoire c'est la volonte.)가 있다. 왕성한 공격 정신의 강조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삽질을 반성하고자 '위대한 군대' 나폴레옹 시절의 전통[6]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셈인데 사실 보불전쟁에서의 패전은 정치권의 외교적 실패와 군 지도부의 무뇌스런 전술전략때문에 말아먹었지 의지나 정신력이 부족한 탓으로 진 건 아니었다. 사실 포슈의 군사사상의 맥락을 안다면 포슈의 발언은 와전된 것으로 포슈도 지도부의 무능한 전술전략을 탓했으며 아예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는 프로이센군이나 헬무트 폰 몰트케의 유능함이 아닌 프랑스군의 무능함 하나만으로 결판난 것이다 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포슈가 분석하는 보불전쟁의 패배는 절대방어주의에 사로잡혀서, 몰트케의 삽질로 인해 빈틈을 보이던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지 않은 것과 느린 기동때문에 방어를 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증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의지드립은 졌다고 생각할 때까진 진 게 아니다는 오래 전부터 있는 군사 격언이고 딱히 그 시절 프랑스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비슷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전투의 물리적 요소보다 정신적 요소가 3배나 중요하다. 끝까지 싸우는 자가 승리한다." 승리란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 것이란 말을 남길 정도로 전쟁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했다. 나폴레옹 이전 18세기 최고의 군인으로 불리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조차도 "뻔뻔한 자만이 전쟁을 승리한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을 정도다.
문제는 나폴레옹 시절은 100년 이전이고 화력 수준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7] 독일의 군사 전략자인 클라우제비츠가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고 하나[8] 이러한 교리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으론 클라우제비츠를 맹렬히 비판한 리델 하트 경조차 "클라우제비츠를 잘못 읽은 거다" 평할 정도다.[9][10]
1차 대전 당시 BEF(영국 대륙 원정군) 육군에서 복무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평가도 "개인적으로 지휘관이 졌다고 할 때까지 진 게 아니다"라는 말에 원칙적으로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지휘관은 의지보다 사리판단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군의 공적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때 같이 싸웠던 프랑스군 수뇌부를 디스했다. 몽고메리는 한 술 더 떠 1차대전 초기 프랑스 육군 사령관 조프르 장군에 대하여 "그 사람은 전술의 기본을 모른다."라며 아주 대놓고 깠다.[11][12]
이처럼 엘랑 비탈은 명백히 무모하고 무의미한 피해를 조장하는 전술교리였다. 총포와 철조망 대신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짜인 교리는 엄밀하게 교리라고 하기도 미안한 소리고, 구체적으로 전술상 이론으론 결함이 크며 초반 프랑스 육군의 졸전과 큰 피해를 준 교리였다는 점을 어느 면을 보더라도 부인하기 어렵다. 초기 전역에서 일방적으로 패퇴하여 수도의 코앞까지 적군이 진격해오던 상황에서 마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도 공격정신이라기보단 독일 제국 육군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역습받게 생기니까 자진해서 후퇴한 면이 컸고 애초에 파리 코앞까지 적이 들어온 것도 400만에 달하는 독일 육군의 예비군 동원 병력을 잘못 예측한 조프르 장군의 삽질 탓이 컸다. 물론 전쟁의 향방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포슈 장군이 엘랑 비탈의 정신 그대로 왕성한 공격 정신을 유지하여 독일 육군에게 역습을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주어 공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옹호론도 있겠으나, 개전 초기 3달 이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 육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1차대전 당시 수비가 공격보다 극단적으로 유리하다고 감안할 때 명백하게 실패한 전술이다. 개전 초반 최대 공업지대인 북프랑스에 영토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가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 것도 감안해야겠고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 지도부의 엘랑 비탈 정신이 기여한 점도 일부 있긴 하겠지만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특히 인명피해는 너무 극심했다. 독일군이 200만 명 전사, 프랑스가 140만 명 전사로 전사자 수는 독일이 더 컸다지만, 독일군은 동부전선,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아프리카 식민지, 대 이탈리아 전선까지 포함한데다 인구는 더 많았다. 프랑스도 서부전선에서만 싸운 게 아니라 발칸전선의 프랑셰 데스페레장군과 군대를 파견한 것, 갈리폴리 전투에 6만명의 병사를 파견한 일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이고 그저 덤일 뿐인데다가 거의 전 전력이 본토 내에서 있었다는 건 변함이 없다.[13] 1913년 기준 독일 인구는 6500만 명, 프랑스 인구는 3900만 명으로 거의 독일이 5/3배였다. 반면 프랑스는 전선의 몇몇 부분[14]은 영국군과 벨기에군, 후반에는 미군까지 담당한 걸 감안하면 인명 피해가 엄청났다. 더구나 프랑스는 공격이 아닌 자국 영토에서 수비하는 입장이었다.[15] 무엇보다 19세기부터 비롯된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국가에서 청년 인구가 다 날아가버렸다는 건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16]
정신나간 공격정신 탓에 140만의 전사자 가운데 60만 명은 첫해 1914년의 5개월 간 발생했다. 수비가 더 유리한 걸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를 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1915년 이후 전장에서 큰 피해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공격 교리 일변도의 경직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17] 공격 시엔 영국군과 합동작전은 미약했지만 서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한 포격 뒤에 공세를 취했고 방어 시에도 긴밀한 종심방어를 취하기도 했다. 종심방어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건 아니고 독일군 프랑스군 모두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선형방어의 취약함을 깨닫고 1차 2차 3차에 달하는 참호선을 방어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 정신 못 차린 높으신 어른들은 정치인들과 의지력 높은 똥별들은 그딴 걸 왜 하냐고 독전과 총살로 병사들을 죽음에 몰아넣기 바빴다. 완벽한 승리를 보장했던 니벨 공세가 실패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개 병사들도 아닌 사단장들이 무의미한 공격에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로베르 니벨은 북아프리카로 좌천당해 다시는 서부전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베르됭의 영웅 필리프 페탱 원수 덕에 추스릴 수 있었다. 페탱은 엘랑 비탈 교리를 반대하고 화력 중심 교리를 설파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부조리하거나 무능하게 보이지만 어느 정도의 변명은 할 수 있는 교리였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방법 외에는 참호전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18] 또한 이런 참호전은 프랑스 구로우 장군이 개발한 종심 방어 교리나, 포슈가 개발한 이동탄막사격 등으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냈다.
사실 1차대전 독일군도 이 엘랑 비탈에 대항하여 비슷하게 참호전을 한 적도 많으며, 러시아군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건 당시 군사계에서 유행하던 '선제공격이 최고, 수비는 불리함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개념의 영향과 전쟁 초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의 실패와 전선 고착화로 자기들이 하던 게 안되고 다른 선택지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최선의 행동을 하다보니 그런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것조차 엘랑 비탈과 비슷하다고 보고 싶은 관점으로 봐야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독일이나 러시아나 처음부터 엘랑 비탈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일본군은 근대 초기에는 화력집중을 기반으로 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부족한 생산력을 통감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는 교리로 후퇴하고 만다. 이때 참고한 것 중 하나가 이 엘랑 비탈이다. 시간이 지나 이에 경도된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보병돌격을 감행하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만다.
독일군은 양면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슐리펜 계획과 지헬슈니트 작전, 유연한 사고와 높은 자율권을 가진 정예 장교단과 정예 부사관단, 적극적인 선봉대와 전투단 운용, 육군 중심의 제병합동을 망라한 독일식 기동전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고 러시아군은 엘랑 비탈에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어레인지 했다. 즉 닥치고 소총만 든 알보병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 장교들이 본부에서 통제하는 가운데 짠 작전과 기관총부대, 전차, 항공대 등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화력지원을 받아가면서 체계적인 돌격을 했다. 우라돌격 과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참고.
2.1. 프랑스군의 무모한 돌격?
위에서는 프랑스군이 엘랑 비탈 전술로 무모한 인명 피해를 가속화 시킨 무모한 공격이라고만 폄하 하는데 이는 오해도 아니고 역사 왜곡에 가깝다. 한국에는 "엘랑 비탈"로 알려진 공격 정신(Attaque à outrance)이 위에서는 무모햐 돌격으로 묘사 되지만 그렇게 사람을 갈아 넣었을 뿐이라면 프랑스군은 1918년까지 버티기도 전에 몰살 당하고 파리가 함락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극초반을 제외 하고는 독일의 전투력을 점점 따라잡다가 마지막에 가선 협상국 중 유일하게 독일군을 대등 이상의 교환비로[19]로 박살 냈다. 정말로 프랑스군이 그런 닥돌 바보 집단이었다면 거기에 당한 독일군은 그 이상의 바보 집단이며 프랑스군보다 못 싸웠던 다른 협상국 군대는 생각 없이 닥돌하는 것도 못 해서 프랑스군보다 1.5~2배씩 죽어나간 희대의 머저리 집단이 된다. 군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 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한국 넷상에서 정설처럼 수십년간 이어져 온 것은 "1차대전은 무의미한 소모전", "누가 이긴 게 아니라 그저 독일이 먼저 쓰러졌을 뿐"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그런 무의미한 소모전에서 협상국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무한한 지원 때문"이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20] 핑계를 곁들인 후 "참호전은 그저 돌대가리 지휘관들의 무의미한 닥돌의 반복"이라는 이미지를 프랑스군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게 실제와 맞지 않음은 물론이고 실제 전적을 따지면 다른 군대가 더 욕을 먹어야겠지만 서부전선의 참호전 상황에서 싸웠던 것은 주로 프랑스군이었기에 실제로는 프랑스군 비하로 작동 했다.위의 "공격 정신"에 대한 서술도 이미 미국에서 보편적이었던 인식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수입된 것이지만 사실 관계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은 수준에 가깝다. 보불전쟁 시기 프랑스군은 종래의 공격 대열인 '퓌리 드 프랑세즈'를 폐기 하고 무기의 카탈로그 스펙에 의존하여 다가오는 적에게 화력을 쏟아붓자는 '푸 드 바타용'이 주류가 되었지만 '고속으로 기동하여 전선을 분단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직접접근-섬멸론의 프로이센군에게 대패 하였다. 이후 화력론파가 틀렸다는 군부 자아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고속기동과 전선 돌파를 위한 보병의 정신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프로이센 육군의 정신론을 그대로 직수입. 능동 기동하여 전선을 돌파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큰 틀에서 프로이센과 비슷해진다. 여기서 흔히 포슈를 돌격 바보로 왜곡하게 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정작 포슈를 포함하여 조제프 조프르, 조제프 갈리에니, 에밀 파욜 등은 보불전쟁 당시 상대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방어에 급급하려 한 결과 몰트케의 기동에서 뻔히 약점을 드러낸 상황에서도 그것을 구경만 하다가 주도권을 넘기고 오히려 돌파 당해 버렸던 경험에 의거하여 공격 정신을 주장 했고 포슈의 유명한 말[21] 역시 적들의 움직임을 구경만 하며 짱박혀 있지 않고 아군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이다. 그 말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에게 밀리는 상황이지만 겁먹지 않고 용감히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전부 잘라내고 포슈와 프랑스군을 비하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사실 1913년 교리를 창안안 그랑메종은 1915년 전사하기 전까지 실전에서 상당한 공훈을 올리고 대령에서 소장으로 급속 승진한걸 보면,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교리 자체의 실전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1913년 초 프랑스군의 실전 기동훈련을 본 독일군은 '결단력 부족, 겁에 질려있음, 안전해지려는 과도한 욕구, 병사와 부사관의 무기력함, 대담성이 없음, 극도의 조심성'이라는 혹평을 남겼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13년 교리는 분명히 여러 측면에서 극단적이고, 한계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에는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작전술적 영역에 관한 것이었는데, 작전술과 전술의 교리가 분화되기 전 시점의 프랑스 장교들 다수는 작전술적 초공세를 전술적 측면의 초공세로 인지하는 오류를 범했다. 정말로 이들은 적극성을 강조한 그랑메종의 교리를 전술적 닥돌로 착각해버리고, 정작 그랑메종조차도 평지에서의 보병 정면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했음에도 평지에서 보병들만 데리고 정면 닥돌을 감행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 프랑스군 교리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크게 식민지에서 실전을 거친 식민지 학파, 포슈, 페탱으로 대표되는 에콜 드 게르 출신의 기성 장교, 그리고 그랑메종으로 대표되는 에콜 드 게르 출신의 소장파(청년 투르크당)으로 구별할 수 있었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식민지 학파와 에콜 드 게르의 기성 장교들은 초공세 교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1차 대전 초기 프랑스의 졸전은 여러 분열상 때문에 현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통합된 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 이러한 여러 문제를 '엘랑 비탈'이라는 교리 문제로 퉁쳐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돌아와서, 프로이센의 보병 기동 전술을 직수입 해와 발전 시킨 프랑스군은 17계획으로 독일 서부에 비해 프랑스 동부는 철도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차량을 동원해 독일군과 비슷한 속도로 전선에 병력을 전개 시키는 업적을 달성 했다. 이후 1914년 여름의 전투는 프랑스와 독일이 양측 모두 보병 돌격을 통한 고속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초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반격해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섬멸 시켰다. 하지만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대표되는, 1871년에 비교해 진지구축능력과 화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양측 모두 상대방의 전선을 돌파하는 것에 실패 하여 고착 되었다. 이 와중에도 니벨 등의 장군들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수준으로는 적군의 전선을 완전히 돌파하여 적을 분단 시키는 것은 불가능 했다. 이것은 독일군 측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포슈를 위시한 프랑스군은 "돌파"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전 전선에서의 연속된 공세로 독일군이 방어를 하기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여 붕괴 시켰고 이것은 성공했다.
2.1.1. 알자스-로렌을 향해 돌격한 프랑스군?
일반적으로 프랑스군의 제17계획을 군인을 강제로 돌격시켜서 기관총 앞에 갈아버린 무능의 극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19년 5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는 패배의 원인 분석과 지휘관 질책을 위해 주요 장군들을 소환해서 청문회를 열었다. 여기서 제17계획을 세운 중심인물이었던 노엘 에두아르드 드 카스텔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프랑스군 작전참모들이 17계획에 작전계획(Operation Plan)을 포함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동원계획(Concentration Plan)에 대해서만 의논했다."
여기에 대해 의원들이 동원계획과 작전계획의 차이점에 묻자 참모총장 조제프 조프르가 작전계획은 군사작전의 세부사항까지 정의한 것이며 동원계획은 병력을 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전투를 준비하는 성격의 계획이라며 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17계획이 병력 동원계획이며
아르덴 공세를 포함한 작전은 17계획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세작전은 적군의 군사 배치에 관란 첩보를 입수한 후 참모총장이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따라서 초기 프랑스군의 공세와 그에 따른 피해는 17작전 때문이 아니라 조제프 조프르 개인의 무능함 탓이며 엘랑 비탈과는 상관없다. 오히려 수백만의 육군을 전쟁 직전에 국경에 배치한 동원 계획으로 봤을 때 17작전에 한해서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7작전이 군사작전으로 알려진 것은 영국 역사가와 장군들이 17계획 = 공세주의 무능작전 이라는 관점을 퍼트린 탓이 크다.
2.1.2. 프랑스군은 돌격만 했다?
1915년 중부에 출간된 "총공세를 위한 목표와 조건"(But et conditions d'une action offensive d'ensemble-Goals and Conditions for a General Offensive Action) 혹은 노트 5779이다. 1914년말과 1915년초에 프랑스군이 참호전과 화력전을 치르면서 쌓은 경험을 집대성한 결과물로 참호전을 휘어잡는 과정에서 출간된 첫번째 걸작이라 할 수 있다.이 문서는 후일 독일군의 발명물로 취급받는 침투 전술(혹은 '후티어' 전술)을 사실상 최초로 다룬다.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군은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담당하며 1916년의 베르됭 전투까지 방어에 일관한 독일군보다 더욱 공세 전술을 발전할 기회가 많았고 그로인해 궁극의 공세 전술인 침투 전술을 개발해내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게 조나단 크라우스(Jonathan Krause) 교수의 설명이다.
- 보병돌격의 목표는 1차 참호선의 탈취로 멈추지 않고 더 후방의 목표를 노릴 수 있는 요충지를 탈취해야 한다.
- 보병 소대는 경보병과 같이 산개하여 움직이며, 적을 향해 근접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엄폐물을 향해 움직여서 총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 공세에 있어서 1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강습부대로써 적의 방위거점을 위해 최대한 깊숙히 돌파해야 한다. 2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참호 청소병(nettoyeurs de tranchée)으로써 리볼버, 트랜치 나이프,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참호에 돌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참호 청소병들을 엄호하기 위해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추가적인 기관총, 가시철사, 폭파용 폭약, 모래주머니,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고 엄호한다.
- 포병은 공세에 있어서 체계적인 공격으로 적을 압박하고 아군을 엄호한다.
이 전술교리는 보병 돌격의 목표가 적군의 1차 참호선의 탈취뿐만 아니라 후방의 목표를 공략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목적-적방어선의 돌파-을 달성시킬 수 있는 요충지를 장악한다.” 따라서 이 문서의 본문은 ‘무한 전투’(continuous battle)를 강조하고, 포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체계적인 전투’(methodical)를 중시한다. 그리고 보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다시 돌파를 중심으로 한 무한 전투를 강조한다. 이 부록의 설명에 따르면, 보병은 마치 척후병처럼 산개형 대형(dispersed formation)을 유지하면서 여러 엄폐물에 몸을 숨기며 적군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이는 전전(戰前-pre-war)의 이론과 맥락이 닿는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nettoyeurs de tranchée, 혹은 ‘참호 청소병’(trench clearers)에 대한 언급이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정립된 교리 내에서 수 차례 반복되는 첨투전술에 대한 서술 중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로서, 특별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은 병사들이다. 부록에 의하면, 1차로 파견된 보병들은 적 방위거점을 피해 최대한 깊숙이 돌파해야 한다. 또한 2차로 파견된 참호 청소병들은 앞서 강습 부대(assault troop-앞서 언급된 1차로 파견된 보병)가 회피한 적 방위거점을 제거해야 한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리볼버(revolver-회전식 연발 권총), 참호검(trench knives), 수류탄이 지급되어 근접전을 대비하고 이를 위한 특별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기관총, 폭발물(petard), 가시철사(barbed wires), 모래 주머니, 박격포(trench mortar)를 지급받는다. 침투 전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세작전을 기획하면서 가장 필수적인 전술로 사용된다. 이는 ‘후티어’ 전술로도 불리며, 독일군의 발명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실은 프랑스가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후티어 전술 등 침투 전술을 개발할 당시에는 프랑스군은 여전히 "돌파"라는 구시대의 개념이 아직 가능한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에밀 파욜 등의 지휘관들은 "체계적인 공세", 즉 포격으로 확실히 짓밟고 보병은 잔해 처리 및 깃발 꽂이역으로 활용하는 그러한 방식의 공세로 기울었지만 빅토르 위르발같은 지휘관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는 인력을 목표를 향해 공격하는 "무한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하는 노트 5779는 프랑스군의 참호전에 대한 해답이 아닌 과도기를 넘어가는 순간의 이정표라고 봐도 무방하다.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은 오인된 측면이 많고 포슈의 최대 비판자이자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에 대해 여러 서술을 보인 리델 하트조차도 주장하지 않은 것들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군은 1915년의 과도기를 거쳐서 1916년에 이르면 상당한 전술능력을 갖춘 덕분에 영국군이 공세 첫날에 5만의 사상자를 낼 때 프랑스는 겨우 1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는 대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점을 부각하지 않고 1차대전의 프랑스군에 대한 항목은 전초의 군복이나 초반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비웃기 바쁘고 1차대전을 승리했다는 점, 또한 2차대전의 패배나 입은 피해로 인해 무마하고 조롱으로 일관하기 바빴던 것이 사실이다.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고의 명장이라 할 수 있는 페르디낭 포슈조차도 제대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의 츠지 마사노부인양 까인 것은 이러한 풍조의 일환이라 보인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프랑스군의 전술/전략의 발전은 상당히 복잡한 분야지만 로버트 다우티 교수의 "The Pyrrhic Victory"나 "The Seeds of Disaster"을 참고하는게 좋으리라 보인다. 조금 더 첨언하지면, 프랑스군이 1918년에 개발해낸 해답은 결국에는 돌파라는 개념을 버려서 이뤄낸 것이다. 포격으로 적진을 박살내고, 포병의 사거리까지 보병을 진격시키고, 포병 또한 앞으로 들이밀고, 다시 포격으로 적진을 격파한다는 것을 전술적인 국면에서 반복했다. 전략적인 국면의 경우에는 한 전장에 집중하는 개념을 버리고 여러 전선을 서로 다른 타이밍에 공격해서 적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독일군이 방어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묻매를 맞도록 강요했다. 결국에는 2차 마른 전투에서부터 독일군은 거의 120일간 제대로된 반격을 못하고 완전히 완패하며 벨기에와 프랑스에 장악한 영토를 죄다 토해낸 다음에 11월 11일에 사실상 항복하는 결과를 낸다. 이는 "The Pyrrhic Victory"에서 다루는 1918년의 성과이다.
1918년의 교전은 4년만에 부활한 기동전이라는 측면이 부각되긴 허나 화력전 및 소모전으로 말 그대로 독일군의 마지막 전력을 빨아먹어서 군 자체의 붕괴를 이끄는데 주력했지 우월한 기동력으로 적군을 돌파하고 유린하는 방식(가령 1940년의 프랑스 침공이라던가)은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만, 독일군에 비해 매우 열세인 적을 상대로만 선보였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영불 모두 허덕이던 시점에 미군은 애송이에 불과한다는 점에서 1918년에 연합군이 보인 분투는 놀라운 수준이고 그만큼 독일군 또한 그간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연합군은 4년동안 버틴 대가를 받아간 것이다.
2.1.3. 왜 이렇게 비하적인 이미지가 박혔는가?
세계 1차 대전 자체가 방어자들의 화력과 방어 수단들이 공격자들의 화력과 공격 수단들을 모두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고, 이런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 방식은 대규모의 돌격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국가들은 프랑스식 돌격전 교리를 어느 정도 도입하고 있었고 화력기동전을 신봉하던 독일조차 돌격대라는 근접전 병과를 양성하고 있을 만큼, 엘랑 비탈은 시대에 뒤쳐진 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군이 솜 전투에서 자국 병사들을 사단 단위로 갈아버리고 있을 때 프랑스군은 1천명 내외의 손실로 목표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바 있을 정도로, 지휘관에 따라서는 나쁘지 않은 교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미지가 실추된 가장 큰 이유론 이후 세계 2차 대전 시기에 프랑스가 6주 만에 스무스하게 털려나가서 파리까지 정복당해 정부가 그대로 항복했고, 그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적 업적 전체가 완전히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렸던 점에 있다. 2차 세계 대전기의 프랑스군은 서유럽 육군 최강국이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군사적 교리의 구시대적인 부분들을 뜯어 고치는데에 실패했고, 정치적 혼란도 제대로 잠재우지 못 했으며, 그 상태에서 전격전을 통한 기습까지 당하면서 단번에 붕괴 수순으로 들어가 그나마 국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한 수도 파리가 함락당하자 완전히 패배했다면서 독일군에게 유럽을 향한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22] 때문에 프랑스군 =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조금만 질거같으면 바로 항복하는 이탈리아 군보다 조금 더 좋을 뿐인 병신 군대로 이미지가 제대로 박혀버렸다. 이는 단순히 1차 대전의 승전국 이미지가 망가진 수준이 아니다. 프랑스군이 수백년 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며 쌓아올린 강군의 이미지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의 대참사였다.
또한 독일군 역시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군을 까내리기 바빴고, 대중들에게 가장 폭 넓은 주목을 받는 독일 국방군 장성들은 정치나 외교 면에선 상당히 협소한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는 1차 대전 이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정치적 혼란, 대공황으로 인한 군사 개혁의 좌절, 1차 대전의 악몽을 떠올리며 분명 잡을 수 있던 기회와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군 상층부 등에 기인하는 바이나 독일군 장성들은 구시대적인 엘랑 비탈 교리에만 주목하여, 여러 장성들의 자서전에서 프랑스군의 엘랑 비탈 교리를 깎아내렸다.
이렇게 독일군 장성들이 엘랑 비탈을 깎아내리고 그들을 높이 평가한 미군 역시 프랑스군의 6주 참패를 대놓고 무가치한 졸전으로 깎아내리며 자신들의 적들과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때문에 엘랑 비탈의 이미지가 이렇게 박한 것은 진정 엘랑 비탈이란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엘랑 비탈을 탄생시킨 프랑스 스스로가 진짜 병신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의 대규모 졸전을 벌여 히틀러 아가리에 자기 목숨을 갖다 바친 수준의 대참사를 일으키고 이를 경험한 독일군 장성들, 제 3자 입장에서 보던 미군의 악의적인 저술, 그리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중들의 문제이다.
게다가 엘랑 비탈을 더 이상하게 베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군이다. 프랑스군이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키는 모습을 본 일본군 수뇌부는 "아! 독일처럼 비싼 돈 들여서 기동전 펼쳐도 프랑스처럼 돌격하면 다 소용없구나!"라는 이상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엘랑 비탈 교리에서 백병전 교리만 따와서, 일본군사연구소 중 하나였던 토야마학교에서 "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라는 이름으로 백병전 교리를 완성시킨다. 이렇게 완성된 일본군의 백병전 교리는 장교가 병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할 것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장교들에게는 군도가 기본적으로 지급되었다. 1916년에 이런 짓거리를 했으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건 없지만 1944년이 되어서도 "군도의 사용법 및 시참요령" "단기속성 일격필살 훈련요령" 같은 교본을 일선에 배포하며 반자이 돌격을 했다. [23] 일본군의 이 정신나간 행적은 엘랑 비탈 교리 자체마저 일본군식 정신력 우월주의, 의지 드립으로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었다.
2.2.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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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밈이 탄생된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 등에서는 프랑스를 '엘랑스'라고 부르고, ' 항복'이란 뜻으로 '엘랑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24][25] 대표적인 표현이 2차대전에서 독일에 6주만에 항복한 걸 비꼬는 "6주 엘랑".
Hearts of Iron IV의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분열된 정부'라는 국민정신을 달고 시작하는데, 매일 정치력을 0.8 소모하고, 안정도가 10% 감소하며, 항복 한계치가 무려 50%나 감소한다. 이 수치는 협력정부로 깎이는 것(항복 한계치 -30%)보다도 높은 페널티로, 다시 말해 항복도가 2배로 올라 파리 같은 주요 승점 지역이 고작 몇 개 점령되는 것으로 항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26] 이는 게임 밸런스적으로 프랑스를 독일이 공략하지 못하면 독소전쟁 발발시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순식간에 망하기 때문에 주어진 페널티로, 해당 페널티를 땐 프랑스는 국토 전역을 점령해야 항복할 수준으로 끈질기게 버티며 육군메타를 가는 순간 1차대전 당시의 불굴의 프랑스로 단숨에 체급이 떡상한다. 독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위시로 한 몇몇 국가들 역시 프랑스를 먼저 점령하고 시작할 수 있으며, 이 "선엘랑"은 아무리 약한 나라여도 파시로 정부를 바꿔주고 10공수만 준비해주면 열강 하나가 1937년에 사라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게임의 가장 쉬운 날빌 빌드로 통한다. 라이베리아로 공수해서 선엘랑한 사례[27] 그래서 멀티플레이에서는 분열된 정부를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공산주의나 국민 부흥(파시즘) 루트를 간다.
라스트오리진에서는 불굴의 마리의 패시브 스킬 이름 중 하나이다. 실제로 설정상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밀어붙여 가장 피해가 심한 바이오로이드로 꼽히기도 한다.
한국의 파워 메탈 밴드 중에 동명의 밴드가 있다.
[1]
프랑스 뿐만 아니라도
2차 세계 대전의 일본군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일본군은
연합함대가 괴멸되고 육군이 땅굴을 파고 죽어가면서 본토공격을 지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본토가 해상봉쇄에 처할 정도로 패전이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가지도부가 전쟁을 지속할 의사가 충만했기 때문에
가이텐 같은 물건을 만들면서 전 국민 총 옥쇄를 외치고 전투의지를 불태웠지만 전쟁지속의지 따위로는 전황에 눈꼽 만큼의 영향도 없었다. 결국 핵폭탄 두발을 맞고 헛된 전쟁지속의지가 꺾이자 비로소
태평양 전쟁이 끝나게 된다.
[2]
물론 이러한
공격 중심의 사고, 특히 보병의
착검돌격에 대한 로망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가지고 있던 통념이었다.
프랑스의 문제는 이런 통념을 이론화하고 전군에 강요하다시피
세뇌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3]
간단히 말하면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철저히 준비하여 용감하게 공격하라."는 문구에서 앞을 다 떼버리고 "용감하게 공격하라."는 문구만 남긴것이다.
[4]
대표적으로 포슈는 아방가르드(전위의 방호 분견대) 편성을 강조했는데 그랑메종은 이를 직접 비판했다
[5]
이 점을 정확하게 보여준게 바로 1차대전의
참호전이다. 고작 3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서 몇만 명이 하루만에 죽어나가는 대참사는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보호되는 방어군의 참호를 아무리 보병을 밀어넣어 봐야 뚫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통적인 기병은 무력화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기병인 전차(와 항공기)는 미약했기 때문에 방어자가 공격자에 대해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6]
나폴레옹은 체스를 할때도 이 전통을 지켰는데 나폴레옹의 체스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오직 공격만이 미덕이던 낭만주의 시대의 체스를 잘 나타낸다.
[7]
전투의지를 극히 중시하는 위와 같은 관점들 역시 당시의 군사적 상황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립된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연발 자동사격이 가능한 총기나 고성능 폭발물등이 없었던 전근대까지는 전장에서 투사될 수 있는 파괴력 자체가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다수의 병력이 한 방에 몰살당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던 것. 예를 들어 근세 유럽의 전쟁터를 풍미한 밀집 보병 방진을 생각해 보자. 근대~현대의 전쟁이라면 적당한 위치에 배치된 기관총(하다못해 자동소총)이나 파편 비산 효과가 있는 수류탄이나 고폭탄, 보병의 반격을 무시하고 단숨에 보병 대열을 돌파해버릴 수 있는 전차등으로 인하여 이런 밀집 보병 방진은 정신력이고 전투의지고 따질 것도 없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물리적, 생물학적으로 몰살 당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투사될 수 있는 파괴력 자체가 제한적이었던 18세기
라인배틀 시대라면? 머스킷 총의 연사속도는 분당 수 발 정도에 불과했고, 질량탄을 사용하는 당시의 대포 역시 그 살상능력은 포탄의 비행 궤도상에 서 있던 불운한 병사들로 제한되었던 것. 즉, 적의 공세에 노출되면 부대가 말 그대로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근현대전과는 달리 근세 이전의 전장에서는 강력한 공세에 노출된 상태에서도 병력 자체가 깡그리 몰살당하는 일은 쉽게 발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조직력만 유지 가능하다면 공세를 감당하면서 전투행동을 지속하는 것 역시 가능했단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전장에 투입된 부대들은 정말 실질적 피해를 입어 부대가 무너지기 전에 부대 유지에 필요한 조직력을 상실하여 패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의 주요 전략가들이 승리의 조건으로 정신력, 전투의지를 강조한 것 역시 이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당장은 적의 공세에 노출되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부대의 전투의지와 조직력만 유지되면 상당한 시간을 버텨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전황을 역전시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결국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던 관점이 화력 수준의 엄청난 폭증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관점으로 변화한 것.
[8]
전쟁은 국가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과 전투의지를 강조하는 문구가 있긴 한데 역시 독일어 원본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프랑스어판 번역의 오역에 독자들이 '의지'에 너무 심취한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영문판으로 1970년대 이후 번역은 전투의지를 '전투에 필요한 지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다. 현재 제일 최근판 한글번역(김만수 대전대 군사학 연구소)에서도 '국가의 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은 적극적이지만 약한 수단이고, 수비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수단이다"라고 쓴 것도 있다. 또한 1812년 자신이 직접 참전한 러시아 전역에서처럼 대규모의 적군은 국경 안으로 깊숙히 끌어들여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9]
전쟁론 이펙트 (Clausewitz's on war) -휴 스트레이천-
[10]
그러나 리델 하트가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에서 볼 수 있듯이 포슈를 맹렬하게 비판하고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나름대로 백일 전투는 인정해준 것 같지만 포슈를 삼류 공세주의자인양 묘사하게 된 계기가 바로 리델 하트의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다. 그리고 포슈를 비롯한 유명한 군사사상가들을 분석한 <군사사상론>의 경우에는 포슈를 당대 군사사상가 중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꼽았다.
[11]
조프르는 마른의 기적의 공과 고착화된 서부전선의 과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1차대전 초기에 조프르의 뚝심이 없었다면 패배가 확실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12]
몽고메리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프랑스군-영국군의 불화와 상호불신은 큰 편이었다. 전쟁 말기 1918년 4월에야 통합사령부를 구성할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군 평가가 박한 것도 주류인 영미 쪽의 평가가 박하기 때문인 점도 어느 정도 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광탈과 식민지에서 벌어진 추태들이지만 말이다.
[13]
이는 다소 편향이다. 오히려 독일이야말로 동부전선을 빼면 일시적인 일이고, 프랑스야말로 비주류 전선에 대한 상시 파견 비율이 더 컸다. 독일군 전력 상당수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서부/동부전선에 주둔해 있었고,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수십만을 동원했으나 공격전 한번 할 때 일시적으로 동원했으며, 그리고 다른 전선에서는 병력이 적은 편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1915년부터 종전까지 발칸 반도에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켰으며, 독일처럼 아프리카나 이탈리아 전선에도 병력 일부와 물자를 보내주었다. 따라서 동부전선을 빼고 본다면 프랑스가 오히려 독일보다 더 전력이 분산된 상태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동부전선을 포함한다면 독일이 더 분산되었지만.
[14]
영국군이 더욱 큰 비중을 자랑했다는 1917년 말에도 영국군은 겨우 150km의 전선을 담당한 반면 프랑스군은 무려 580km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전선거리 보다 영국쪽이 맡은 지역은 독일의 주침공로이고 프랑스군이 맡은 지역보다 병력 밀도도 높고 자연 지형이 없는 개활지라 병력 손실 비율은 영국군이 높았다. 또한 4차에 이은 이프르 전투중 가장 큰 규모인 3차 이프르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선 독일군과 영국군이 나란히 22~26만씩 손실을 냈다. 북해쪽과 프랑스 동북지역 전선은 영국쪽 부담이 컸다.한편 1차 솜 전투 또한 전통적인 시각으로 영국군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William Philpott등 수정주의자들은 영불공동작전으로 평가한다. 사상자가 영국군이 42만, 프랑스가 19만 6천 명 정도인 걸 감안하면 영국군이 주도한 건 맞다. 프랑스군이 베르됭에 집중하느라 솜 전투에서 역할은 없었다라는 말도 존재하는데 영미사관을 대변해 영문 위키백과 솜 전투 항목에서 포슈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솜 전투에 대해 "The main part of the offensive was to be made by the French Army, supported on the northern flank by the Fourth Army of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라고 적었다. 게다가 이 전쟁과 악명높은 베르됭 전투가 동행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15]
하지만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독일군이 1914~1915.겨울 이후 1918년 공세까지 수세적 입장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16]
당시 프랑스의 젊은 인구층은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여자 빠지고 다 빠지고 나면 140만의 전사자는 18 ~ 27세 남자인구의 27%에 달했다. 이러한 인구 타격은 전쟁 후에도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제약 조건이 되었고 2차대전의 패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7]
물론 초반 병크를 겪으면서 지탄을 받자 이것은 '공격정신'에 대한 '오해다'란 변명도 나왔다. 이 같잖은 변명은 프랑스군의 계속되는 처절한 삽질로 '공격정신'이란 물건이 하등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면서 조용히 묻혔지만.
[18]
물론 몇몇 프랑스군
똥별들의 삽질때문에 피해가 커진 감이 있긴 하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여러 나라들이 비슷하게 참호전 타개책을 펼쳤음에도 프랑스가 더 주목받아 까인다고도 볼 수 있다.
[19]
1:1~1.1:1, 러시아군 1:1.5 ~ 1:2.5 , 영국군 1:1.2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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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마저도 사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미국이 그러한 압도적인 국력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1차대전의 미군은 프랑스군의 장비를 공여 받아 싸우는 2류 군대에 불과 했다. 그 때문에 야드파운드법 나라에서도 미터법 규격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러한 사실은 무시 되었다. 그리고 1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해 비중도 썩 크지 않거니와 그나마 싸웠던 전투에서도 크게 선전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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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 포슈 본인의 항목에도 쓰여져 있듯 실제로 한 말은 아니고 당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용감히 싸우는 포슈를 언론에서 부각시키면서 창작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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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이라는 인물부터가 이렇게 싸울 준비가 아예 안 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압축, 요약한 수준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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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백병전 위주를 완성시켰던 토야마학교에서는 전후
일본검도 토야마 유파로 살아남아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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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렇게 밈으로서 조롱받는 것과는 별개로 유로파 내에선 엘랑은 10%만 올라도 감지덕지인 육군 사기를 20%나 늘려주는 덕에 그야말로 사기적인 종특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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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 1티어 급, 특히 육군 최강인 육각본능
왼쪽 파란 거에 비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선 열강이긴 하나 별볼일 없고 어느 나라가 침공해도(심지어
베네룩스나
스위스에게도!) 독일이 정석대로 안슐루스, 뮌헨협정 루트 타주고 기갑 뽑으면 낫질할 필요없이 마지노선에 무지성 웨이브로 돌격해도 뚫린다.) 패배하기 바쁜 국가로 나오는 영향이 크다. 특히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나라에 상관없이, 협력정부 없이도 수도인 파리만 함락시키면 분열된 정부 패널티를 떼지 못한 민주 프랑스는 그대로 항복하고 사막에서 개싸움을 해야 되기 때문에 멀티에서 프랑스는 십중팔구 파시즘으로 독일에 붙거나 공산주의(프랑스 코뮌), 비동맹으로 갈아탄다. 연합국에 남는다면, 워낙 악명이 높으니 미국, 영국에서 병력을 개때같이 보내 프랑스에 몰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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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상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협력정부를 박고 프랑스 남부에 공수 조금 한 것만으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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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러한 점이 개선된
The Road to 56 모드 같은 경우 프랑스가 뻐기면서 1차 대전의 재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뭐 그래도 십중팔구는 망하지만 바닐라에선 그것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