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000> |
알렉산드로스 3세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fff> 생애 | <colbgcolor=#fff,#1f2023> 생애 | |
원정 | 틀: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 ||
창작물 | 창작물 | ||
기타 | 알렉산드리아 · 오피스 연설 · 코린토스 동맹 · 부케팔로스 |
1. 개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생애에 대해 다룬다.2. 어린 시절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7월 20일경[1]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는 날 일리리아 인과의 전쟁에서 마케도니아가 승리하고, 올림피아 제전에서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말이 우승하는 소식이 같이 들어왔는데, 이를 두고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불패의 인물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소년 시절의 유명한 일화로 부케팔로스를 길들였다는 일화가 있다.더불어 이 시기에 아버지 필리포스가 스승으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붙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3년 동안 각종 학문들을 전수받았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정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고귀한 삶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유로 친아버지 필리포스 2세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까지 자주할 정도였으나, 훗날 그리스 우윌주의를 시종일관 고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과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왕권 강화 차원에서, 알렉산드로스 본인에게 사사건건 직언을 올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처형한 일들로 인해서 둘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류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16세이던 시절, 아버지 필리포스가 비잔티온(오늘날 이스탄불)으로 원정을 떠나자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섭정을 맡았는데 그때 마이도이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마이도이족을 추방한 다음 다른 민족들을 데려와 이곳에 알렉산드로폴리스를 건설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군사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에도 참여해 좌익의 부대를 이끌고 테베의 최정예 부대인 신성부대를 선두에서 격파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보면 그가 이런 왕자 시절의 업적들로 인해 당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이고 필리포스는 장군이다.
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 2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기뻐했다고 한다.[2]3. 즉위
비록 알렉산드로스의 전공은 높았지만 같은 시기 아버지 필리포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필리포스가 클레오파트라[3]와 결혼[4]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는데 게다가 여기에 결혼식날 클레오파트라의 큰아버지 아탈로스가"클레오파트라가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을 적법한 아들을 낳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실언을 했고,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해 아탈로스에게 술잔을 던졌다. 이 광경을 본 필리포스가 칼을 빼들고 분노하다가 취기 때문에 넘어지자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아버지를 비꼬며"이분(필리포스 2세)은 에우로페(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갈 준비[5]를 한다면서 긴 의자에서 긴 의자로 넘어가다가 넘어져 누워 있군요."
라고 조롱했고, 이에 필리포스는 제대로 분노해서 다음 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에페이로스로 사실상 추방시켜 버렸다. 이후 테마라토스라는 사람이 간신히 설득해서 수도 일뤼리콘으로 두 사람은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6]기원전 336년 이 소동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카리아 지역의 페르시아 사트라프 픽소다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인 아리다이오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아리다이오스가 이 결혼을 통해 자신을 제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될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막기 위해 역으로 자신이 픽소다로스와 사돈이 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배우였던 텟살로스를 카리아로 보내 사생아에 정신박약이던 이복형 아리다이오스 대신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픽소다로스와 사돈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했고 픽소다로스는 이 제안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필리포스는 이 결혼 소식을 알게 되었고 분노해서 알렉산드로스를 찾아가 질책한 뒤 (이 결혼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을 전부 추방시켜 버렸다.
그런데 얼마 뒤 아버지 필리포스가 호위병인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주변인을 조사해본 결과 공식적인 암살 배후는 필리포스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백부 아탈로스로 나왔지만 암살 시기와 전후의 이해득실 관계가 너무 절묘해서 알렉산드로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당대에도 제기되긴 했다. 특히 올림피아스가 가장 많이 비난받았다. 필리포스 2세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 거란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다.[7] 하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암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
군부 최선임자 파르메니온 장군이 군부를 대표해 알렉산드로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이복 동생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필리포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용히 살고 있었던 사촌 형 아민타스 4세 등을 비롯한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를 붙여준 데다 추방의 계기가 되었던 축사를 해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던 장군 아탈로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가족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아탈로스는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박살난 뒤 힘에 눌려 코린토스 동맹으로 묶여 있었는데,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겨우 20세에 불과한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폴리스들의 반란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000기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했다. 이러한 전격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테살리아가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는 선처를 베풀었다.
1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 이전 우선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자 지금의 이스탄불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했다. 이후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했다. 그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지역, 현재의 크로아티아, 알바니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지역에도 가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근거없는 엉뚱한 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졌고, 이를 들은 평소에도 마케도니아를 야만인이라면서 무시하던 테베가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복귀시키고, 반대로 친 마케도니아 인사인 티몰라오와 아민타스를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케도니아 군대가 주둔하던 카드메이아 요새를 포위하여 본격적으로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반란에 참여했다. 이를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33,0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신속히 남하했다. 그가 군대와 함께 테베에 도착하자 테베인들은 처음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왔다고 믿지 않았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가 2주 전만 해도 무려 480km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에 테베의 반란에 동참한 다른 폴리스들은 군사 행동을 멈추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 성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을 배치한 채 반란의 주모자만 넘기고 항복하면 테베인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테베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젊기만 한 애송이 취급하면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오히려 알렉산드로스의 군 사령관 두 명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큰소리친 뒤 완강히 거부했다. 3일간의 준비 후 알렉산드로스군과 테베군은 교전을 개시했다. 양측 군대는 성벽 사이에 두고 넓게 퍼져 사방에서 싸웠는데 이 와중 한 성문에 생긴 빈틈을 파악한 알렉산드로스가 예비대를 투입해 차지하게 한 뒤 군을 성내로 진입시켰다. 이것이 싸움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뒤이어 벌어진 시가전 끝에 테베는 점령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의 반란에 가담한 폴리스들에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은 모두 학살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테베는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워버렸다. 이 패턴은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 계속해서 재현되었다. 항복하는 도시에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저항하는 도시는 무자비하게 박살냈다. 각설하고 이로써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었던 강력한 도시국가인 테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시인 핀다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절대로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에 아테네가 진심으로 투항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의 안전과 문화와 재산을 보장해주는 너그러운 조치를 베풀었다.
알렉산드로스 사망 후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주장한 카산드로스가 뿔뿔이 흩어진 테베인을 불러 테베를 재건케 했다. 이들은 파괴된 테베의 성벽과 건물을 재건축하여 옛 모습을 갖추게 하였으나 한번 크게 손실된 국력까지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테베는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4.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그라니코스 전투,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65년 |
기원전 334년 저런 바쁜 군사 활동을 단 1년 만에 마무리 지은 알렉산드로스는 다음해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넜다. 사실 비잔티움 쪽으로 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이긴 했으나 이 지역은 독립된 도시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대군을 이끌고 건넜던 바로 그곳이다. 알렉산드로스 무적 신화의 제1보를 내딛는 순간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그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지방관)였던 스피트리다테스와 아르시테스가 방어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젤레리아에서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장수 멤논은[8] 청야 작전을 주장했지만 아르시테스 등 사트라프들이 반대해 무산되고 전면전이 준비되었다. 두 군대는 그라니코스 강이라는 곳에서 조우하였다. 페르시아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수들은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허를 찌르기 위해 자신의 기병대로 즉각 도강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대담하게 강을 건너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격파되었고, 스피트리다테스의 도끼가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쪼개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사령관인 스피트리다테스와 주요 지위층을 포로로 잡으며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그라니코스 강 전투의 승리로 인해 페르시아인들이 죽거나 도망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보단 그리스와 친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9]하며 거침없이 남하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선을 따라 쭉 돌면서 항구도시들을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항구도시들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출신의 멤논이라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으나 거의 성공할 무렵 멤논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데다 항구도시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렇게 점령하는 동안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관련된 일화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5. 이소스 전투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를 제압한 뒤 겨울을 나고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 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인 이소스라는 곳에서 그는 다리우스 3세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조우했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총 병력은 110,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40,000명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상으론 알렉산드로스가 불리하였다.그러나 이소스는 의외로 좁은 평야였고, 따라서 적은 병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리우스가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우기로 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다리우스가 병력의 우세에 우쭐했을 수도 있고 다리우스가 아나톨리아 지역의 침략을 1년간이나 방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급하게 싸움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접근으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고 했는데 이는 즉 다리우스가 늑장을 부린 것 때문에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소스 전투 초기에 다리우스 자신의 병력을 강 북쪽으로 포진시킨 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소스에 포진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아나톨리아 지역과 그의 본대의 길목을 차단하였으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주문대로 강 건너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기엔 다리우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수적으로나 전황으로나 불리한 상황을 보고 다리우스를 직접 노리기로 한 전술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노리기 위해 보병의 우익에게 명령하여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밀어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장창을 이용해 잘 밀어내자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겼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예 기병인 헤타이로이를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짓점에 위치한 후 그대로 그 틈을 통과하여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최고 사령관이 도주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격파당하고 말았다.
다리우스의 천막,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60년 |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활과, 전차를 전리품으로 빼앗았고, 다리우스의 어머니 시시감비스, 아내 스타테이라 1세, 그리고 두 공주인 스타테이라 2세와 드리페티스를 모두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였던 스타테이라 1세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겨진 여인이었는데 생포된 지 1년 뒤 사산으로 목숨을 잃었다. 기록에 누구의 아이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감히 누가 일국의 왕비한테 접근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알렉산드로스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포된 다리우스의 두 딸 중 스타테이라 2세는 그대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인 드리페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성애 상대로 알려진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원정 내내 뚜까맞은 이미지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지만 그래도 용감히 분전한 명장이 있었으니, 바로 킬리키아 사트라프(총독) 마자이오스였다. 다리우스 3세 이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에 이미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라는 꿀땅의 사트라프를 역임한 베테랑이었던 마자이오스는, 아마 상당히 신뢰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치세 당시 제국 서방에서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할 때 활약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다리우스 3세 치하에서 그는 마케도니아군에 맞서 이소스 전투에 참전했지만, 이소스 전투에서 활약을 했다는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트롤링을 하진 않았어도 별 힘은 쓰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그는 이소스 참패 이후 시리아의 페르시아 제국령이 와르르 무너질 때도 내륙의 시리아군들을 수습하여 다리우스 3세 측으로 합류시키는 공을 세웠는데, 이로 보아 인망이 상당히 있었던 총독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그 후, 다리우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간단하게
"대체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서 어쩌자는 거요?"...
였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답장은"옛날부터 마케도니아를 수차례 먼저 공격했던 것은 당신들이잖소.[11] 이제 당신과 나 중에 누가 진짜 왕인지 따져볼 때가 된 것 같으니, 당신이 먼저 덤비시오."
라는 내용이었고, 답장을 보낸 직후 지중해 연안과 그 부근도 모두 정복한 후, 이집트에 방문했다가 돌아온다.이소스의 패배 뒤 다리우스 3세는 강화를 제의하는데 내용은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0,000 탈렌트를 지불하고 유프라테스 강부터 그 서쪽 지방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양도하며, 거기다 자기 딸까지 얹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000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덧붙여
"와서 항복한다면 용서해 주겠지만 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벨 수밖에 없소."
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마음 속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 이때 부하 장군인
파르메니온과의 대화도 유명한데 노장 파르메니온은"제가 왕이라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내가 파르메니온이면 그랬을 거요."
라고 답했다고 한다.6.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
이소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는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을 휩쓸었다. 다음해에 24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남하했는데 이때 티레와 가자와 같은 도시들은 격렬하게 농성을 했으나 모두 격파되고 이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말았다. 특히 티레 공방전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공성전을 직접 지휘하면서 그가 회전뿐만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결점 지휘관임을 입증하였다. 티레는 섬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공략하기 위해 인공 길을 바다 위에 만들고, 50m에 해당되는 공성탑을 건설하며, 배에 공성충차를 실어 성벽을 타격하는 등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2]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분풀이로 마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게 한 것처럼 항복한 티레 사령관을 전차에 매달고 죽을 때까지 자갈밭 위에서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때 또 다른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성문을 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시 항복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 때문이었다고 한다.알렉산드로스가 어릴 적 향로에 향을 잔뜩 쏟아붓다가 스승 레오니다스[13]에게
"향료가 특산물인 나라의 지배자가 되시기 전에는 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라는 꾸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에서 얻은 향료를 마케도니아에 보내며 스승에게"향료를 많이 보내니 걱정 마시고 제사에 사용하십시오."
라고 편지를 동봉해 보냈다고 한다.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인들에게 '해방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또 시와의 아문 신전에서 그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 아닌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14] 그는 이 신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그리스인들에게 제우스 신은 아문과 동일 신으로 여겨졌다)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15]까지 발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각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곤혹스럽게 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원전 331년, 마자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프라테스 강 도하를 타프사코스에서 저지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주어진 병력이 너무 적어 다리를 놓는 마케도니아군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유프라테스 강 도하에 성공하자, 마자이오스는 퇴각하여 티그리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던 다리우스 3세의 본군에 합류했다.
7. 가우가멜라 전투
다음해에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짜내 모은 90,000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섰다.[16] 그런데 전 항목에서 서술했던 교섭 제안이 결렬되고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으로 출격한 직후, 포로였던 다리우스의 왕비 스타테이라 1세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장례를 아주 성대하게 치러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는 신에게 기도를 올린 후 진격 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신이시여, 이 늙은이가 이 전투에서 혹 이긴다면 알렉산드로스에게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또한 혹 제가 패한다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의 왕좌에 앉게 해 주소서.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이소스 때처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부대의 정예기병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도록 한 뒤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마케도니아군을 짜부라뜨리는 전술을 짰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헤타이로이 부대가 견제당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익 끝까지 이동하여 페르시아의 별동대를 중앙에서 멀어지게끔 유인했다. 중앙군을 남기고 우측이 떨어져 나가자 중앙군의 옆에 틈이 생겼고, 필연적으로 다리우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때 우익으로 유인된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페르시아 기병은 우익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보병의 공격에 붙들리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그 견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소스 때처럼 다리우스는 또 다시 공황에 빠져 달아났는데 이로 인해 승부가 또 결정되고 말았다.
이소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다리우스가 도망치기 전까진 페르시아군이 꽤 우세했는데,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익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돌진에 과감히 대항했으면 그토록 어이없게 패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겁이 많아졌는지 조금만 위협을 받으면 바로 도망쳤는데, 그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손쉬운 승리를 선사한다. 다리우스 3세는 즉위 전 장군이었을 때는 적장과 일기토를 벌여 죽이기도 했고, 왕위에 오른 후 권신 바고아스를 손수 독주를 먹여 죽이는 등 전혀 겁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미스테리한 일이다.
이렇게 다리우스의 겁이 많은 성격은 전투 시 최선두에 서는 알렉산드로스와 대조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한 술 더 떠 이소스나 가우가멜라 전투를 치를 때,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스스로 그 꼭짓점에 자리잡고 눈에 띄는 황금 갑옷을 입고 적진을 항해 돌격했다. 쐐기 대형의 꼭짓점은 당연하게도 사망할 확률이 제일 높은 위험한 자리이다. 또다른 예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침공 첫 전투였던 그라니코스 전투에서도 도강 직후 앞장서서 돌격해 들어가다 본대와 분리된 채로 포위당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휘하의 장군 클레이토스가 제때 달려들어 도와주지 않았다면 페르시아 원정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험하고도 무모한 행동은 마케도니아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왕이 최선두에서 돌격을 이끄는데 누가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헤타이로이 기병은 전투시 대단히 용맹했고, 그 때문에 이들이 이소스, 가우가멜라 양대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바빌론에 입성하는 알렉산드로스,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65년 |
가우가멜라의 패배로 다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재기불능이 되고 말았다. 가우가멜라에서 동원한 병력은 다리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꼭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맹추격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달아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 단숨에 자그로스 산맥을 돌파한 뒤 동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리우스를 놓친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남하하여 바빌론에 입성했다.
한편, 가우가멜라의 결전에서, 페르시아의 명장 마자이오스는 페르시아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우익의 제국 북부 중앙아시아 출신 중기병들을 지휘하여 마케도니아의 좌익을 타격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다리우스 3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날의 전투에서 가장 분전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좌익을 지휘하던 백전 노장 파르메니온은 이소스에서 싸웠던 페르시아군과는 병력의 질도 지휘관의 실력도 차원이 다른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전선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 스키타이와 인도 기병대가 마케도니아군 진영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는 다리우스의 가족을 구출하라는 마자이오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약탈에 정신이 팔려 개판을 치는 트롤링을 벌이는 동안에도 마자이오스는 마케도니아군 정면에 꼬라박아 날린 스키타이 전차대를 밀집 대형을 이룬 중기병대와의 합동 공격에 잘 활용해, 마케도니아군 좌익의 파르메니온의 팔랑크스와 테살리아 기병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파르메니온은 다리우스 3세를 잡기 직전이던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야 했고 이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퇴물이 다 된 무능한 늙은이가 눈앞에 다가온 완벽한 승리를 망쳤다는 억울한 욕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는, 오히려 마자이오스의 맹공을 받고도 그만큼 버텨낸 파르메니온의 굳셈과 마자이오스를 지원하러 와 적들에게 쐐기를 박는 대신 약탈에 눈이 멀었던 이민족 기병대의 탐욕이 결합된 결과였다.
페르시아의 구국영웅이 될 수 있을 만큼 잘 싸웠음에도 알렉산드로스에게 중앙을 급습당한 다리우스가 빤스런을 하면서 전군에 모랄빵이 나 억울하게 패장이 되고 만 마자이오스는 다리우스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졌던지, 아니면 페르시아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여겼던지 바빌론에서 저항하는 대신 도시를 넘기고 명예로운 항복을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 그 보답으로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임명된 그는, 다리우스의 가족들 다음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후한 대접을 받은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오늘날 이스탄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알렉산드로스 석관에는[17] 마자이오스의 용맹한 저항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 장면과, 마자이오스가 항복 이후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사자 사냥을 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 당시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기원전 328년에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새로운 왕으로서 충실하게 섬겼다.
8. 페르세폴리스 점령과 다리우스 추격
바빌론을 방문한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슈쉬에 입성한 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했다.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다리우스가 메디아 지역의 엑바타나라는 곳에 주둔하면서 스키타이와 카두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청야작전과 반격을 벌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알렉산드로스는 급히 군대를 몰아 12일 만에 엑바타나에 도착했고, 아직 지원군을 받지 못한 다리우스는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대피했다는 카스피해 관문(지금의 테헤란 부근)으로 추적을 시도했지만 추적중 라가이에서 다리우스가 카스피해 관문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알랙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추적을 포기하고 카스피해 관문에 주둔했다.[출처1-3]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다리우스를 따르던 바기스타네스(바빌론의 귀족)와 안티벨루스(바빌론 총독 마자이오스의 아들)가 알렉산드로스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베수스[19]를 중심으로 바르사엔테스(아라코시아&드랑기아나의 지방관), 나바르자네스(기병대 지휘관)가 반란을 일으켜 다리우스를 억류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다시 출병시켜 반란군과 억류된 다리우스를 1주일 동안 쉬지않고 추적했고, 반란군을 추적하는데 성공했다. 반란군은 가볍게 진압했지만 다리우스는 이미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상황이었고, 다리우스의 시신을 발견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선왕들의 왕릉에 묻었다.[출처1-3] 일설에는 다리우스가 죽기 직전, 알렉산드로스의 군사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던 그를 발견하고 물을 주자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대신해 그대에게 상을 줄 것이다. 그에게 나의 감사 인사를 전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 뒤이어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발견했을 때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꼭 생포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대단히 실망하며 옷을 벗어 시신을 덮어주었다고 한다.[21]8.1. 페르세폴리스 방화와 그 이유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거대한 석상을 때려부셨다. 뒤이어 페르세폴리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방화를 했다는 기록과 실수로 그랬다는 기록이 모두 있다. 영국 BBC에서 만든 알렉산드로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화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적어도 우발적인 방화는 아니라는 것. 방화에 대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로 고의로 방화했다는 설.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마케도니아군 부사령관 파르메니온이 '이미 알렉산드로스의 재산이 된 (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을 파괴하는 것은 현명치 않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왕으로서 아시아를 안전하게 다스리기보다 정복하고 지나가는 데 급급한 인상을 보인다면 아시아인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방화를 반대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침략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1-3]
-
바빌론으로의 수도 이전과, 아케메네스 잔당들의 부흥을 차단하기 위해 방화했다는 전략적 판단이라는 설.
마치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고려 토착세력의 힘을 꺾어버리기 위해 고려왕조의 본거지인 개성에서 한성으로 수도 이전을 감행했듯, 알렉산드로스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의 역사와 전통이 서려 있는 페르세폴리스를 온전히 자신의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군단은 페르시아 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온 외부세력인지라 현지인들과 융합되기 힘들었고, 또한 페르세폴리스는 그리스에서 지리적으로 지나치게 동쪽에 치우쳐 있어 장기적 관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세력의 본거지의 위상을 깎고 힘을 도려낸 후,[23] 자신의 새로운 본거지인 바빌론에서 페르시아 난민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흡수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의 잔당들을 장기적으로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다민족 국제 도시로서의 바빌론의 부흥을 추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바빌론은 신 바빌로니아 시절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에게 정복당해 도시가 전소되고 크게 파괴되었던 역사가 있는지라, 반 아케메네스 세력의 구심점으로 삼기에도 제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상기된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이란 명분은 결국 구실에 불과한 셈이다.
-
알렉산드로스가 만취 상태에서 객기로 왕궁에 불을 지른 것이 도시 전체로 옮겨 붙었다는 설.
알렉산드로스는 술에 취하면 인사불성이 되기로 유명했고, 자신의 부하들을 여럿 죽이는 큰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충신 클레이토스는 술김에 직접 창으로 찔러죽이는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왕이 술김에 궁궐에 불을 지르자, 페르세폴리스 곳곳에 주둔 중이었던 그리스 연합군은 도시를 소각하라는 왕명이 내려진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덩달아 페르세폴리스 곳곳에 불을 놨고,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숙취가 가시자 마자 자신의 명으로 도시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방화를 멈추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도시는 상당히 소각된 이후였고, 나중에 알렉산드로스는 이 일을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화재의 흔적이 페르세폴리스 궁성에서 시작되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 왕궁에서 창녀들을 데리고 파티를 벌이던 중, 타이스라는 이름의 한 창녀와 내기를 벌이다 불을 놓는 바람에 페르세폴리스가 전소되어 괴멸했다는 설.
-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애인을 유혹할 속셈으로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놨다는 설.
9.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으로
이때야말로 진정으로 페르시아 정복 전쟁을 했던 기간이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우가멜라 전투 한 번 이긴 걸로 페르시아 땅 전부를 차지했다고 오해한다.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 반란군을 잡으려고 동쪽 히르카니아 지역을 시작으로 마드리아를 거쳐 아리아 지역으로 진군하며 반란군과 기타 반군들을 진압하고, 나바르자네스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아리아 지역의 수시아에서 반란군 수장 베수스가 박트리아(혹은 자리아스파로 불렸다) 지역으로 도망친 뒤 왕중왕(샤한샤)을 자칭하며 이름까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개명하고 자신의 박트리아 군대와 스키타이의 지원군까지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군대를 모은 뒤 아리아 지역의 아르타코아나로 진군해 먼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에게 회유된 아리아의 지방관 사티바르자네스를 축출하고, 다음으로 드랑기아나(자랑기아)로 진군해 다리우스를 살해했던 지방관 바르사엔테스를 공격했다. 이때 바르사엔테스는 인더스 강 서쪽까지 도망갔지만 현지인들이 오히려 바르사엔테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압송해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살해죄를 물어 바르사엔테스를 처형했다. 자랑기아에서 필로타스의 반란 음모 사건을 겪은 알렉산드로스는 필로타스의 부친인 파르메니온을 제거하는 등 지휘관을 바꾸는 조치를 하고, 달아났던 사티바르자네스가 반란 세력을 이끌고 아리아 지역을 침공하자 진압하여 죽이는[24] 등 군대와 지역을 재정비한 뒤 인도 캅카스(지금의 힌두쿠시 산맥)를 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가 다스리던 박트리아로 향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청야작전을 벌이며 진군을 방해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박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는 옥수스 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없는 박트리아 지역의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한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추적해서 옥수스 강을 건넜다. 이때 배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다 태워버리고 척박한 지역이라 땟목을 만들 나무도 부족했지만 가죽에 짚을 채운 배로 도하에 성공했다. 그렇게 추적하던 중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의 부하인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수스를 억류했고, 이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주겠다는 전갈을 받았는데 이 제안을 따랐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잡은 베수스를 발가벗긴 뒤 목줄을 매어 끌고다니면서 모욕한 뒤 다리우스 살해를 추궁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자신은 공모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며 다리우스를 살해한 이유도 알렉산드로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변호했지만 다리우스 살해 후 도주한 시점부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를 채찍질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를 사로잡은 뒤 타나이스 강(또는 약사르테스 강, 지금의 시르다리야 강) 지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의 부하들과 동맹 세력이던 지역 부족들과 스키타이를 진압했다. 그렇게 가자를 시작으로 키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키타이군까지 패퇴시킨 뒤 스키타이 왕과 휴전을 맺었다. 그 직후 스피타메네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배반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준 사람)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격퇴시킨 뒤 자리아스파(박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끌고와 다리우스 처형을 질타한 뒤 코와 귀를 잘라버린 후 오체분시로 공개 처형을 해버렸다(기원전 329년)[25]
사고디안 부족을 격파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했는데 박트리아는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지역으로 인도와 꽤나 가까운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록사나라는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아내였다.
9.1. 부하들에 의한 암살 시도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군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 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입맞춰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게다가 논공행상을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26][27]9.1.1. 파르메니온의 경우
이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를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아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를 고문한 다음 죽였는데, 파르메니온의 군인들에게서 받고 있는 높은 신뢰는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그를 매우 경계하게 했으며 그 때문에 암살한 것이었다.9.1.2. 클레이토스의 경우
일찍이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로 건너온 뒤 벌인 첫 번째 전투인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생명을 구한 바가 있었던 클레이토스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면서 사적으로도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접근을 거의 허가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모처럼 그들을 모아 놓고 술자리를 벌였다. 그는 모인 장군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출신의 악사가 페르시아의 승리와 마케도니아의 패배를 뜻하는 노래를 불러 그것을 알렉산드로스가 좋게 듣자[28]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불편해하다가 갑자기 클레이토스가
"우리가 운이 없어 패한 걸 왜 들먹이냐."
며 화를 내면서 분위기를 제대로 망친다. 알렉산드로스는"운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라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사태가 점점 나빠졌는데 클레이토스가라는 말로 화를 돋웠고 클레이토스나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때 매우 취한 상태였는데 클레이토스는 멈추지 않고 알렉산드로스와 악사에게 맹비난을 퍼부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덕택이며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이는 필리포스를 무시하며 자신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자화자찬에 도취되어 있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도 '이 인간이 미쳤나' 하고 생각하여 그만하라고 했지만 단단히 화가 나 있던 클레이토스는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으니, 폐하께서 자유가 싫으시다면 우리를 모두 쫓아내시고 노예들만 데려다가 잔치를 하시든지 하십시오."
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불을 질렀고, 하마터면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뽑을 뻔했다.신하들은 왕을 진정시키며 클레이토스를 내쫒으라고 명령했으나 원래부터 거칠어서 술 취하면 더 심해지는 클레이토스는 근위병들한테 끌려가면서도 계속 불평을 토로하여 화를 자초했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나 싶을 때 다른 문으로 도로 들어온 클레이토스가
"우리 수많은 용사들이 세운 공적을 왕이라는 한 사람이 빼앗아갔다!"
고 소리를 질렀고, 가뜩이나 술에 취한 데다 불평과 폭언에 정신이 나간 알렉산드로스는 호위병의 창을 빼앗아[30] 클레이토스를 꿰뚫어 죽였다. 당연히 현장의 사람들은 멘붕했고 창을 들고 있던 왕 역시 패닉에 휩싸여"날 용서하라"
라는 말을 하고는 클레이토스를 찌른 창으로 목을 찌르려 했고, 놀란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제지해서 방으로 끌고 갔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날 술에 깬 상태에서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3일간 죄책감과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되는 바람에 신하들이 설득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왕이 너무 상심하자 장군들은 이미 죽은 클레이토스에 대한 사후
군사재판을 열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는 선고를 내려야 했다. 그렇게 마케도니아인 장교들과 알렉산드로스 간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인도 정벌을 착수하려고 할 때 장병들과도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원정 도중 포기해야 하는 상황마저도 벌어졌다.10. 인도 정벌 착수
알렉산드로스와 포루스,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73년 |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했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었던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했다. 많은 영주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 영주들은 반항하며 거부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군대로 공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그에게 반항하고 부상을 입힌 영주들은 일족까지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영주들 휘하의 도시 시민들도 모두 학살당했으며 건물 기초까지 부숴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그제서야 지방 영주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알아서 기어들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31]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했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히다스페스 전투가 벌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0,000여 명의 병력이었고, 포루스는 50,000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000vs4,000)으로 포루스의 기병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고[32] 배후로 돌아가 포루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포루스의 파우라바군은 전투 코끼리를 통제하는 데 실패하여[33]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에 폭주한 코끼리들이 되려 아군을 짓밟고 피해를 주었기에 공격하기가 더 쉬웠다.[34]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파우라바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포루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루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주었다.
포루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11.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
이때 갠지스 강 남쪽에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루스의 파우라바와는 달리 인도 북부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거대 국가였다. 포루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난다 왕조는 갠지스 강 건너편에 200,000명의 보병, 60,000명의 기병, 8,000대의 전차, 6,0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라고 말했고,[35]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km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베아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 서쪽으로 철군 명령을 내렸다(
히파시스 반란). 이 회군 과정 또한 험난하여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는 남은 병력이 인도에서 출발한 병력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의해 바다 멀리 밀려가 버린 사고 때문이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대는 게드로시아(현대의
발루치스탄) 사막을 지나고 있었으며, 병사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떠다준 물을"나만 마실 수 없다"
라고 쏟아버린 일화가 바로 이 사막 행군 중의 일이었다. 아무튼 이 사람이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어디까지 갔을지에 대한 건 역사에서 유명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거쳐 바다를 통해
희망봉을 거쳐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
카르타고와
로마에 이르는 원대한 중년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사실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을 보면 회군한 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는 코딱지만 한 땅인데 지금 정복 안 하면 언제 정복하겠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가 엄청나게 넓은 것은 물론 예나 지금이나
인구밀도도 매우 높은 땅이었다. 게다가 몹시 덥고, 습하며,
정글 지형까지 있어서 저 멀리서부터 몰려온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싸움이 아니더라도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병력뿐만 아니라 자신도 걸릴 확률이 높아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단기간에 빠르게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페르시아가
아케메네스 왕조라는 하나의 통치 체제하에서 통일된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정치 체제도 문화도 서로 다른 각각의 독립된 국가들이 통치하고 있고 지형상으로도 습지와 삼림이 널린 인도를 단기간에 통일한다는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얘기다.[36] 그런 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원정 도중에 전사할 뻔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을 보면 인도에서 전투 도중 화살을 맞아 사경을 헤멨고 이를 페르디카스가 치료를 해서 살렸다고 한다.12. 원정의 끝과 사망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 축재를 한 것을 발견했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해 귀국할 줄은 예상 못 했고, 또한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 축재를 한 것인데 갑자기 돌아온 알렉산드로스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했다.알렉산드로스는 슈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군에게 보상으로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37] 그래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오피스 연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 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겼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했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소스 전투 때 사로잡은 다리우스 3세의 큰 딸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했다. 재미난 사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 상당수는 이혼했다. 그러나 디아도코이 중 한 명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이때 결혼한 아파마(박트리아 계통이라고 한다)와 이혼하지 않았고 후계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본 안티오코스로 지명했다. 이 덕분에 훗날 셀레우코스가 옛 바빌로니아 지역을 터전으로 삼고 안티고노스 1세를 칠 때 페르시아 기병대를 동원하는 등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반란을 진압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 중 고령이거나 부상을 입어 전투에 부적합한 14,500명을 선별해 마케도니아 제일의 명장으로 병사들의 인기가 대단했던 크라테로스가 이들을 인솔해 마케도니아로 귀국하게 했고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본국의 섭정을 맡았던 안티파트로스를 대신해 새로운 섭정이 되라고 명령했다. 이는 자신의 제국 통합 정책을 반대한 크라테로스를 치워버릴 의도였다고 볼 수도 있다.(어쨌든 모양새는 승진이었기에 크라테로스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최정예 병력이었던 은방패 부대( 아르기라스피데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일평생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자 심복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더불어 헤파이스티온의 갑작스러운 급사 때 자리를 비운 담당 의사의 태만죄를 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38],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했을 때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그 부족의 청장년 장정들을 모조리 목 베어 학살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지기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젊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39]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1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40] 그 다음 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에우메네스가 기록한 《왕의 일지》(Royal Journals)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독살의 징후는 없었던 것으로 나와있다. 사람을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독은 현대에도 드물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려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이시우스 달 18일.[41]
왕은 심한 열 때문에 목욕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왕은 침실로 돌아와서 메디우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왕은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심했다.
20일. 평소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목욕탕에 누워 네아르코스의 항해담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21일. 전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만 열이 심해져서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다음날은 열이 더욱 심해졌다. 왕은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나 목욕통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장군들과 의논을 하여 적당한 사람으로 군대에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24일. 병세가 더욱 나빠졌지만 왕은 일어나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장군들은 곁을 떠나지 말고, 하급 장교들은 문 밖을 지키며 밤을 새우라고 명령했다.
25일. 강 건너편에 있는 궁궐로 자리를 옮긴 뒤 잠을 조금 잤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장군들이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혼수 상태에 있었다. 다음 날도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돌아가신 줄 알고 모두 몰려와 소란을 일으키며 왕의 막료들을 협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을 벗은 뒤 차례로 왕의 침상 곁을 지나며 쾌유를 빌었다. 같은 날 피톤과 셀레우코스를 세라피스의 신전으로 보내, 왕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옮기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28일. 저녁에 마침내 왕께서 붕어하셨다.
왕은 심한 열 때문에 목욕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왕은 침실로 돌아와서 메디우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왕은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심했다.
20일. 평소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목욕탕에 누워 네아르코스의 항해담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21일. 전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만 열이 심해져서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다음날은 열이 더욱 심해졌다. 왕은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나 목욕통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장군들과 의논을 하여 적당한 사람으로 군대에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24일. 병세가 더욱 나빠졌지만 왕은 일어나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장군들은 곁을 떠나지 말고, 하급 장교들은 문 밖을 지키며 밤을 새우라고 명령했다.
25일. 강 건너편에 있는 궁궐로 자리를 옮긴 뒤 잠을 조금 잤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장군들이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혼수 상태에 있었다. 다음 날도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돌아가신 줄 알고 모두 몰려와 소란을 일으키며 왕의 막료들을 협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을 벗은 뒤 차례로 왕의 침상 곁을 지나며 쾌유를 빌었다. 같은 날 피톤과 셀레우코스를 세라피스의 신전으로 보내, 왕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옮기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28일. 저녁에 마침내 왕께서 붕어하셨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42]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 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43]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이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 때부터 독을 먹여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는 낭설에 불과하고 복상사나 성병으로 죽었다는 해석에 대해 설화가 붙은 것.
현대 학자들에게 제일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이다. 말라리아는 혼수 상태와 구토와 심한 발열 증상을 나타내며, 특히 발열 증세가 일정한 주기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 기록상의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묘사와 일치한다. 발열 증세의 주기로 보아 알렉산드로스가 감염된 말라리아 원충은 P. ovale 혹은 P. vivax 가능성이 높다. 또한 열대 풍토병이 많은 인도 원정에서 귀환한 뒤에 사망한 점도 심증을 더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원정 도중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라리아가 가장 흔하게 감염되는 원인은 모기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모기에 물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이도 젊고 지병도 없고 몸에 아무 이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고열로 쓰러지고 말라리아와 거의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원인이 모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의 죽음에 대한 보고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즉시 믿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는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태어났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의 동료들은 임종 때 그에게 왕국을 누구에게 물려주었느냐고 물었고, 그의 간결한 유언은 "가장 강한 자에게"였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은 그의 후계자들이 "tôi Kraterôi", 즉 그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집으로 이끌고 귀환해 새로이 마케도니아 섭정을 맡게 된 장군인 " 크라테로스에게"를 고의적으로 또는 실수로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44]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이 시점에서 말문이 막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것이 불분명한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디오도로스와 쿠르티우스, 그리고 쥐스탱은 알렉산더가 증인들 앞에서 통치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인장반지를 친위대장이자 엘리트 근위기병대( 헤타이로이)의 최선임 대대장인 페르디카스에게 건네줬다는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그를 지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13. 사후, 분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영토 |
그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게 아니라 베어서 세상을 정복한 탓일까, 그가 죽자마자 제국은 곧바로 분열되고 말았다.
록사나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였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형으로 간질에다가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필리포스 3세)를 왕으로 추대했다.[45] 나중에 록사나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아리다이오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지적장애인과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 꼭두각시, 괴뢰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단시간에 넓은 영토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후계자 계승에 대해 제대로 확정짓기도 전에 대왕이 죽어버린 것이 여기에 한몫했다. 후계자 계승 문제의 결말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기존 지배자가 죽어버리면 밑의 사람들이 흔들리다 분열되는 건 의외로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문제였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그의 밑에서 세력이 컸던 장군들끼리 자리 다툼을 벌이다 사분오열이 성공해버린 것을 볼 때 자기가 급사할 걸 대비해서 다음 방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크게 생각해둔 건 없었던 모양. 워낙 빨리 넓은 땅을 먹은 데다가 알렉산스로스 3세 본인도 젋고 갑자기 죽기 전까지만 해도 건강한 사람이었으니 그런 걸 생각하는 게 더 힘들었을 거고, 후대에서도 그를 계획적인 정복자보다는 혈기 왕성한 젊은 정복자로 취급하는 걸 보면 성격 때문에라도 이런 걸 진지하게 대비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다. 사실 후계자 구도를 선대 지배자가 명확하게 하고 죽어도 뒤에서 쿠데타나 반란이 일어나서 왕좌나 황좌를 먹으려 들거나 실제로 먹은 사례도 흔한 게 역사인데, 이런 와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언이랍시고 후계자 구도를 누구에게 명확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강한 자라고 대충 뭉뚱그려서 언급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부터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선 알렉산드로스 사후 거대 제국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파벌과 자기만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파벌이 서로 갈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정복 이후 내치 및 수성의 시기가 없었고 단지 점령만 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상 대제국들은 정복 기간이 끝난 후 수성 및 내치를 통해 영토의 안정을 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정복 직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제국은 그런 내치의 시대를 갖질 못했으며 이는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장군들이 서로 제국을 갈라먹는 원인이 된다. 또한 역사부도 같은 책에 나와 있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지도를 보면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도와 달리 군데군데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은데 이 역시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이 온전하게 내치의 시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그러나 단일 제국 자체는 분열되었어도 분열된 후손인 디아도코이들이 길게는 300년이나 존속하며 그리스계 정복 왕조의 역사를 이어나간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언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결과적으로 그의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이 개막해 그의 헬레니즘 제국을 장군들 중 강한 자들이 나눠 가졌다. "가장 강한 자"의 후보는 초대 제국 섭정이며 알렉산드로스 사후 처리를 주도한 페르디카스, 페르디카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다음 제국 섭정이 된 안티파트로스, 안티파트로스 다음 제국의 패권을 장악한 안티고노스 1세, 안티고노스를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시키고 제국에서 가장 넖은 영토를 지배한 셀레우코스 1세, 부유한 이집트를 차지하고 가장 오래 산 프톨레마이오스 1세 등이 있다.
이후 분열과 이합집산 과정은 디아도코이 문서와 《지중해 삼국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책을 참고하는 것을 권한다.
14. 무덤
스스로를 제우스-아문 신의 아들이라고 여겼고, 남들이 그렇게 대해주길 원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시와 오아시스에 있던 제우스-아문 신전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대왕의 시신은 정통성을 확보할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에 디아도코이들 간에 서로 뺏고 뺏기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페르디카스는 시신을 마케도니아에 보내서 마케도니아 방식대로 화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시신을 중간에 시리아에서 빼돌려 이집트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멤피스에 묻혔다가 훗날 알렉산드리아가 완성된 후 이장되었다.후대에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의 로마 권력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영묘를 방문했고, 칼리굴라는 알렉산드로스의 흉갑을 사용하려고 영묘에서 꺼내갔다고 한다. 서기 200년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영묘를 방문한 후 일반 대중에게 공개를 금지했다. 카라칼라도 영묘를 방문했고, 중세, 근세의 여러 인물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영묘를 언급했으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며 도시 자체가 여러 차례 지진을 겪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해안선이 바뀌어서 현대에는 수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고대 알렉산드리아 유적 발굴은 현대에도 계속 진행하고 있으나 바닷속에 잠겨버린 유적들이 많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무덤 혹은 유해가 수몰되지 않았으며, 이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혹은 이와 관련된 발굴을 해냈다는) 희망을 갖는 고고학자들도 소수 있다. 이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유명한 가설 중 하나는 알렉산드로스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져 산마르코 대성당에 안치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성 마르코의 유해가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라는 것이다.
|
산마르코 대성당 성 마르코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2세기 마케도니아 양식 무덤의 잔해. 보다시피 가운데는 마케도니아식 방패가 새겨져 있다. 만약 진짜 관이었다면 약 3m 길이로 추정된다.
|
이는 전통적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 후 불에 태워졌다고 구전된[46], 성 마르코의 유해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처음 발견되는 시기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한 이교도[47] 탄압 시기 및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영묘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48], 1960년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 바로 근처의 지반에서 발견된 마케도니아 태양 문양이 새겨진 기원전 3세기 마케도니아 석관 (!) 일부,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를 담았다는 전승이 알렉산드리아의 기록에 남아 있으며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발견된 석관의 부분과 크기가 맞아떨어진다고 추산 된, 현재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석관 덮개의 존재가 이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이다.
또 성 마르코의 유해는 앞서 언급했듯이 화장되었다는 전승이 있는데, 베네치아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의 유해를 가져왔을때 묘사를 보면 베네치아 안장 당시 유해 근처에서 기록된 특이하고 강한 향이 언급되었고 대성당 모자이크의 유골이 아닌 비교적 온전한 시신 형태의 유해 묘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세기에 침수 피해 방지를 위해 오늘날의 위치인 주제대(high altar)로 유해를 재안치하는 과정에서 유해를 직접 목격한 Leonardo Conte Manin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에 따르면, 유해는 본래 미라화된 상태로 존재하다 베네치아로의 안장 이후 세월과 환경에 의해 점차 유골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해당 유해는 전승된 성 마르코의 유해에 대한 묘사보단 본래 영묘에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이 전시 가능한 형태로 있어 많은 이들이 참관했다고 하는 기록과 오히려 유사한 면이 있다.
즉 서기 389년에서 391년 사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테오도시우스 칙령"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를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확립하고 이교 관습을 금지했는데 이때 박해에 의한 알렉산드로스의 유해 파괴를 막기 위해 이를 알렉산드리아의 성인인 성 마르코의 것으로 공표했고, 이후 이슬람의 침입 시기에 이제는 성 마르코의 것으로 알려진 유해의 파괴를 막기 위해 (혹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도굴을 통해) 이를 베네치아 시로 옮겼기에,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는 현재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의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 물론 교황청 혹은 베네치아 시는 성 마르코의 것으로 알려진 유해에 대한 과학적 검사를 허용하기 곤란한 입장이므로, 이 가설에 대해서는 (비록 2023년 현재까지 여러 가설들 및 발굴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분석할 만한 유해가 남아 있는 유일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현재로써는 그럴듯하게 해석될 수 있는 몇몇 정황 증거 이상의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1]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는 로오스의 초엿새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20일 설과 21일 설이 있다.
[2]
출처: 휴먼 앤 북스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7 P. 136.
[3]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유명한 그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아니다. 그쪽은 한참 더 나중에 등장한다. 구체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는 기원전 337년에 필리포스와 결혼하지만(생몰연도는 미상),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에 출생했다.
[4]
마케도니아는 일부다처제 국가였다.
[5]
당시 필리포스는 페르시아 공격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6]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전>, 9장.
[7]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전>, 10장
[8]
로도스 출신으로 그리스 용병 출신의 장수다.
[9]
심지어 카리아 도시 알린다에서는 그곳에 웅거 중이던 여왕
아다의 양자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10]
이소스에서 다리우스 3세의 처자를 포로로 잡은 뒤. 그들을 만나러 가자 다리우스의 모후 시시감비스가 알렉산드로스보다 잘생기고 키가 큰 헤파이스티온을 알렉산드로스로 잘못 알고 그에게 절하는 모습이다.
[11]
페르시아와 그리스 국가들과의 여러 차례의 전면전들은 익히 알려진 데다, 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통일을 막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적이었던 아테네와 테베에 많은 병량과 무기, 병력 지원을 반복한 역사가 있다.
[12]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성을 공격할 지름길을 찾으려고 성 주변을 수색하다가 낙오되었는데, 밤중에 우연히 적진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거기에 몰래 불을 질러 함락했다고 한다.
[13]
테르모필레 전투의 영웅 스파르타 왕과는 동명이인.
[14]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때 알렉산드로스가 아문 신전에서 일하는 사제한테 "내 아버지를 죽인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한테도 해를 입을 수 없는 영원한 불멸의 몸이니, 감히 그런 식의
신성 모독적인 불경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는데,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가 필리포스가 아닌 아문(제우스)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15]
알렉산드로스의 두상에 아문 신의 상징인 숫양 뿔이 달린 형상을 새겼다.
[16]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30세, 마케도니아군은 약 40,000명, 페르시아군은 240,000명이었다고 기록했다.
[17]
알렉산더가 들어간 관이 아니라, 알렉산더 이야기가 부조된 관이다.
[출처1-3]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3권
[19]
박트리아의 지방관이며, 다리우스의 친척이자 다리우스 외엔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 유력 영주였다. 그는 다리우스의 지휘 능력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다리우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에 따라 베수스는 다리우스에게 자신이 다리우스 대신 군대를 지휘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를 이긴 뒤 다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다리우스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베수스와 그를 지지하는 장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다리우스를 포로로 잡았다.
[출처1-3]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3권
[21]
출처: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출처1-3]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3권
[23]
페르세폴리스는 이후 기록에 의하면 최소 20년 이상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때, 알렉산드로스군의 방화로 전소된 것은 아니고, 대도시의 기능은 상실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24]
이때 사티바르자네스는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수들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는데 에리기우스(erigyius)가 나서서 일대일로 그를 처단했다.
[25]
출처: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3-4권.
[26]
물론 이는 엄청난 넓이의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조치 덕분에 페르시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큰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렇게 안 하고
선민의식으로 통치하다 화를 자초한다.
[27]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인들도 병사로 고용하려고 해서 더더욱 마케도니아인들의 불만을 샀다고 나온다.
[28]
일반적인 왕이라면 이 노래를 듣고 분노해서 악사를 죽이려고 할 텐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냥 좋게 들은 것을 보면 마음이 꽤 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은 페르시아에게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니 다른 왕들은 실패했지만 나는 이겼으니 저 노래를 들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마인드로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9]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그라니코스 강 전투 당시 알렉산드로스가 로이사케스라는 장수를 상대하고 있을 때, 스피트리다테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죽이려고 했는데, 이때 클레이토스가 끼어들어 스피트리다테스의 팔을 날려버려 알렉산드로스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사실 이때 위험했던 것이 알렉산드로스는 스피트리다테스와의 일기토에서 그의 도끼에 머리를 맞아서 투구가 깨지고 잠시 뇌진탕으로 의식이 흐려져 다음 공격에 맞설 수 없었고 근위병들도 전투 중이라 알렉산드로스를 호위할 틈이 없었다.
[30]
칼은 호위병 아리스토파네스가 알렉산드로스가 일을 저지를까 봐 무서워서 전부 치운 상태였다.플루타르코스는 근위대(somathophylax)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칼을 치웠다고 했지만 근위대에는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고 아리스토누스(aristonous)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31]
이 계획대로라면 인도는 물론이거니와 티베트의 12소방,
전국시대의 중국, 중앙아시아의
흉노, 베트남의
반랑,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산재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인종,
오스트로아시아인,
오스트로네시아인, 한국의
고조선, 일본의
야요이인 등 등을 정복한 뒤 동시베리아의 여러 수렵민들을 굴복시키며
추코트 반도에 도달하여
베링 해협을 바라보는 데즈뇨프 곶에다가
비석을 세워야 한다.
[32]
세계 전쟁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이때 포루스에게 남은 전차와 기병을 이란 지역에서 가져온 궁기병으로 격파했다는 말이 있다. 알렉산드로스도 말에 타면서 활을 쏘는 이들에게 감명받아서 이들을 처음으로 전차를 비롯한 기병을 농락하는 데 썼다고 한다.
[33]
코끼리를 모는 기수들을 저격하거나 팔랑크스 창병으로 코끼리의 눈을 맞혀 죽였다.
[34]
알렉산드로스가 코끼리들에 대한 방안을 잘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코끼리는 덩치와 기선 제압에는 좋지만, 조련사와 제어를 잃으면 그대로 도망가기 위해서 아군을 향해 공격하기도 해서 역대 코끼리 병종을 쓴 국가들은 일종의 거대한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
[35]
사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후대에
마우리아 왕조는 상비군으로만 600,000명의 보병, 30,000명의 기병, 9,0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6]
실제로
대영제국이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시키기 이전까지 그 어느 정복자도 인도의 완전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영국이 통일시키지 않았을 경우 지금의 남인도 지역은 여러 국가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37]
고대 그리스에서는 병사들이
징집병이긴 했으나 이들이 엄연히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고향에 돌아가 일하는 것이 더 수익이 좋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 당시의 자체 무장 같은 것은 자신들이 해야 했기에 만일,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한들 정복자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잘 살리라는 보장은 없다.
[38]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히 알아 두어야 하는데, 당시 헤파이스티온은 의사로부터 소화 불량 증세에 걸렸으니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고 음식을 조금만 먹으라고 권고를 받았다. 처음에 헤파이스티온은 그 말에 따랐으나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파서 닭 1마리를 삶아 먹고 거기에
포도주 항아리 1개까지 모두 비워버리며 마구 폭음, 폭식을 하는 바람에 소화 불량 증세가 심해져 죽고 말았다. 헌데 그 직전에 의사는 자기가 좋아하던 전차 경주 경기를 보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39]
정확히는
아라비아 점령 후 바다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돌아가
카르타고를 공격한다는 발상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Ἱστορίαι)에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Necho II)의 명을 받고 항해에 나선
페니키아인들이 2년에 걸쳐서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대륙을 일주했다는 기록이 나와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가도 힘든데 정복까지 하면서 가는 길이면 고생길이 훤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지중해 정복이라는 것으로 보아
로마 진공이었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가 남긴 알렉산드로스의 기획에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을
피라미드에 맞먹게 짓는 것, 동·서의 인류를 서로 맞바꾸는 민족 대이동을 동반한 통합 정책 등 흠좀무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40]
인간의
뇌는 열에 취약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 뇌가 익어 뇌세포가 파괴된다.
[41]
현재의 4월경.
[4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플루타르코스 당대에 알렉산드로스가 독살당했으며, 독살의 주체는 당시 마케도니아 섭정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이지만 그 배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를 알렉산드로스가 처형한 데 대한 원한이 그 근거이다. 물론 플루타르코스가 참고했던 역사가들은 물론 플루타르코스 본인 역시 독살설 자체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살당한 사체 치고는 독살당한 징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인이 저술한 《영웅전》에서도 까마귀 두 마리가 싸우다가 알렉산드로스의 어깨에 부딪혀 떨어지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43]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부정한다.
[44]
이건 현대 역사가들의 주장인데, '가장 강한 자에게'는 고대 그리스어로 "tôi kratistôi" '크라테로스에게'는 고대 그리스어로 "tôi Kraterôi"라서 일리가 없는 가설은 아니다.
[45]
그 외에
사생아 헤라클레스도 있긴 했다.
[46]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성 마르코는 서기 6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순교했는데 이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최후의 조롱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몸을 불태웠다는 전승이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사망한지 300년이 넘도록 마르코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47]
알렉산드로스는 사후 전통적으로 무신으로 숭배받았다.
[48]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서기 390년경 리바니우스에서 나왔는데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체가 전시되어 있는 알렉산드리아"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그런데 불과 10년 후인 서기 400년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그 유명한 무덤을 보고 싶었지만, 그 위치를 잃어버렸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성 마르코의 유해가 처음 언급된 문헌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나온 지 불과 2년 후이자 테오도시우스 칙령 직후인 서기 392년 성 제롬에게서 나왔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