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3:49:02

성경/논란/윤리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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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약성서3. 원죄 문제4. 악신을 부리는 야훼5. 일부러 파라오의 마음을 조종해 놓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 야훼6. 희생된 욥의 가족들7. 금송아지 사건8. 가나안/페니키아 침략 및 제노사이드
8.1. 정의로운 전쟁 이론
9. 여성 혐오 조장
9.1. 구약9.2. 신약
10. 바빌론 아이들을 저주함11. 다윗과 간통한 밧세바에 대한 처결 문제12. 무신론자는 어리석고 악하다13. 호모포비아14. 인신공양15. 노예제16. 조롱의 대가17. 장애인 문제

1. 개요

성경은 신약과 타나크를 막론하고 현대의 보편적 윤리[1]에 반하는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21세기인 현대와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청동기 시대 ~ 고대 말기의 전근대 사회 가치관의 괴리로 해석해야 하며 그 당시의 가치관으로 해석했을 때에는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들도 몇몇 존재한다.

반면, 애초에 과학 사실이나 고대 윤리를 전하기 위해서 쓰인 책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구원 논리를 쓴 책이라고 보는 기독교인들도 많다. 기독교 내 최대 종파인 가톨릭부터 과학적, 역사적으로 성경이 완전한 사실에 기반했다고 보지 않으며[2], 이는 성서비평학을 수용한 모든 종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극단적인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개신교인들의 주장대로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야훼가 개입해서 성경 집필에 관여했을 경우, 그들은 그러한 주장대로 진행할 경우 야기하는 불편한 감정들을 야훼의 전지전능함을 바탕으로 그러한 감정들을 회피하려 드는 모순을 통해 논란을 키운다. 그들은, 성경이 어떻게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21세기에도 진리로 받아들일 면모가 있는지를 곱씹어보지 않고, 오히려 야훼의 선함을 내세워서 무조건 성경의 진리가 자명하지 않냐고 우김으로서 성경에서 시대초월적인 가치를 찾는다는 그들의 주장에 반감을 키운다.

2. 구약성서

여성차별과 호모포비아, 종교적 관용 같은 문제의 경우 신약성서만으로도 충분히 시비를 걸 수 있지만, 그 외 어지간한 윤리적 문제들은 전부 구약성서에서 기인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납이 어려운 수준의 서술이 넘쳐나기 때문에, 구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이상 윤리적 문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는 신약성서가 훨씬 더 비중이 크지만, 구약도 엄연히 핵심 경전으로 인정하는 만큼 구약에 등장하는 시대착오적인 서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독교가 어떻게든 해명해야 할 부담 요소가 된다. 그렇기에 마르키온이 이미 2세기에 구약성서를 버리려 시도했으나, 결국 이단으로 몰려 사라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물론, 예수부터가 일단 유대교적 전통 속에서 자랐고,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큰 차이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던 만큼 기독교 교리상 구약을 배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저서 '철학적 단편들'에 의하면, 예수 생전 예수를 직접 본 사람들과 예수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접근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후세대'는 단순히 전세대의 기록을 견해를 무조건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마주하는 각 세대는 각 세대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과 공감하는 지를 스스로 찾아낸다.

3. 원죄 문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 창세기 2:16-17, 공동번역성서)
선악과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오죽 업보를 쌓았는지 대홍수를 위시한 강제 리셋(...)까지 당한 적도 있고, 심지어 이스라엘을 상대로 '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야훼를 모세가 여러번 말리는 묘사도 나온다.

애초에 야훼가 모든 미래사건을 아는 아는 전지한 신이라면,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이 선악과로 타락할 것임을 미리 다 알고 있었을 것인가? 악의 문제 참조. 특히, 단순히 성악설이라던지, 자기애성 성격장애, 학습된 무기력함, 보편적 무기력함과 같은 성질의 은유적 설명이라든지, '우리는 처음부터 고통을 받게 되어있었다'는 불만에 대한 공감 등을 떠나서 '전 인류가 아담을 위한 보속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귀결될 경우, 이는 신학적 근거고 뭐고 연좌제스러운 전근대적 발상의 산물 밖에 더 되는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아담과 하와인데, 왜 그로 인해 인류가 대대손손 죄를 이어 받아야 하는가? 내가 먹지도 않은 선악과 때문에 덮어놓고 나를 죄인이라고 하더니만 뜬금없이 예수를 보내 있지도 않은 죄를 사해줬다는 언급에 어이가 없게 느껴질 수 있다. 심지어 이는 일찍이 '이단' 펠라기우스도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원죄 개념에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개로 자주 쓰이는 유머도 있다.
A: 내가 개를 암수 1쌍 키웠는데 말이야. 내가 아주 이 개들을 예뻐했어. 그래서 안방에서 길렀지.
B: 정말 아꼈나 보구만.
A: 그런데 하루는 내가 삼겹살을 구워다 먹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급한 전화가 왔어. 그래서 나는 먹고 있던 삼겹살을 그냥 두고 나가야 했지.
B: 개들이 먹으면 어떡하려고?
A: 그래서 개들을 불러서 앉혀 놓고 단단히 이야기해 두었지. 이 삼겹살을 먹지 마라. 먹으면 정녕 너희가 죽을 것이다.
B: 그리고 나서?
A: 그리고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한 시간쯤 뒤에 돌아왔다네.
B: 개들이 삼겹살을 안 먹었던가?
A: 웬걸. 다 먹어 치웠더군.
B: 화가 많이 났겠구만. 그래서 어떻게 했나?
A: 안방에서 마당으로 내쫒아 버렸지.
B: 그리고?
A: 그 개들이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들도 죄견(罪犬)이라고 해서 마당에 그대로 두고, 그 새끼의 새끼들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그렇게 취급해 줬다네.
B: 아니 먹은 개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새끼 개들이 삼겹살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그건 너무 심하지 않나? 그 새끼 개들이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A: 그래도 한번은 타지에 있던 내 아들이 와서 그 개들을 용서하라면서 나에게 삼겹살을 사 줬다네. 나는 그래서 개들에게, "내 아들이 너희 대신 내게 삼겹살을 사 줬다는 것을 믿는 개마다 죄를 사해 주겠다"라고 이야기했지.
B: (...)

설사 원죄를 연좌제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초래된 악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에 가깝기 때문이라 할 지라도 -창조된 인간에게 스스로 살아갈 자유의지가 있는 한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경향성도 인간에 대대로 내재되었다-, 어쨌든 우리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조상 탓이라는 감정으로부터 회피하려 들면, 원죄에 대한 그 어떠한 신학이라도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선악과 에피소드는 이런 개념을 유대 문학적인 우화 장치로 설명했다고 볼 뿐인 것. 기독교 신학에서는(심지어 성서근본주의 종파마저도) 위의 예시처럼 간단하게 원죄 개념을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아두자. 다만 이렇게 원죄 개념이 설명되어져도, 원죄의 근원이 된 자유의지 허용의 문제와 관련한 악의 문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악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을 타고났다는 것은 이미 자유의지 이전에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인데(그렇지 않다면 원죄라고 표현할 수 없으므로), 왜 동등하지 않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그리고 여기에 원죄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주장까지 더해지면 논란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결국 원죄가 존재한다면 사산된 태아나 태어난지 며칠되지 않아서 표면적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은 영아가 죽었을 경우, 조상(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 때문에 몇천년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영유아가 많았는데, 그러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수많은 아이들을 조상이 불순종한 명령때문에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심판하고 있는 미친놈이 된다.[3]

또 기독교 신학에서는 죄로 치우치는 인간의 경향성을 원죄로 표현하지만, 단순히 악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을 로 표현한것은 우화로서 원래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매우 부적합한 표현이라는 주장도 많다. 경향성과 죄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데, 죄라는것은 어떤 일을 저지른 뒤에 붙는 평가이고 경향성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알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바로 위의 문단에서 한 얘기는, 현실에서의 죄는 행위를 기준으로 하지만 성경에서의 죄는 마음의 내적 상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마태오 복음서 5장 28절, 공동번역성서)는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더라도 음욕을 품는 마음만 가지고도 이미 죄를 지었다고 본다. 따라서 악에 치우치는 경향성을 가졌다는것 자체가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죄가 되는것이다. 세속 법률 용어를 빌려서 설명하자면, 원죄는 곧 우리는 모두 'mens rea'를 가지고 타고났다 정도가 된다.

참고로 이 문제에 대해서 정교회의 경우에는 아예 '조상의 죄는 하와와 아담 선에서 끝났지만 그 여파에는 우리가 대대로 시달린다' 라고 확실히 선을 그어놓고, 성공회 감리회는 '창세기 무렵에 저런 일이 있었고, 지금도 본성 자체가 글러먹은 양반들이 태반이지 않은가' 정도로 일축하지만, 가톨릭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는게 라틴어 'peccatum originale'가 굉장히 중의적인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며[4], 이를 고심 끝에 번역한 결과물이 '원죄'이다.

3.1. 아우구스티누스 이레네우스의 영향

참고로 원죄에 대해 이러한 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강세를 보이는 종파들인 장로회 가톨릭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5] 특히 장로회의 경우,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혁교회와 칼뱅이 나오는데, 칼뱅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을 흡수해서 아주 극단적으로 가져갔다. 일단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원문을 읽어보면, 이 문단의 논란의 씨앗들을 그대로 제공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지으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셨을 리 없다 (신국론 14권 11장)
교만 이 외의 다른 원인이 악의 의지의 시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악의 근원은 교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6] (신국론 14권 13장)
이러한 불변의 선으로부터 떨어짐은 영혼 스스로의 행동이다 (신국론 14권 13장)

하지만, '아담의 과오는 너희도 반복할 수 있다'와 같은 주장은 있을 지언정, '인류는 아담을 '위해' 보속해야 한다'와 같은 주장은 신국론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저 옛날 교부들 중에서도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분별력이 없었다' 라는 가정을 한 양반이 없는 것은 아닌데, 바로 이레네우스 되시겠다. 심지어, 이 양반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무조건 대책점에 있는 것도 아닌데, 미숙이 교만에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주장을 한 번 살펴보자.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개인적으로 저주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중략) 하지만 인류는 땅을 힘겹게 갈고, 노동으로 인한 땀이 얼굴에 흐르며 빵을 먹고, 흙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단 논박 3권 23장 3번째 문단)
아담은 그의 본성과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잃어버렸으므로... (이단 논박 3권 23장 5번째 문단)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만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중략) 하느님의 피조물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창조된 만큼 아직 덜 무르익었습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이론적으로는 고형식을 먹일 수 있지만 일단은 유동식부터 먹이듯이, 최초의 인류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 있었지만 아직 아기와도 같은 상태이기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단 논박 4권 38장 1번째 문단)

4. 악신을 부리는 야훼

성경엔 분명 ' 야훼는 인자하시다'고 나오며, '야훼는 너무도 선해서 악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원죄설)이 마주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성경을 보면 사울 왕이나 아합 왕을 죽일 때에 야훼를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악신'을 부리고, '거짓말하는 영'을 시켜서 그 둘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란은 번역으로 인해 공의의 야훼가 직접 악신을 부리는 것이라 보인다. 이 '악신'이 야훼에서부터 나오는 것(an evil spirit from Jehovah)이 의미하는 것은 악마들 또한 야훼의 타락한 피조물이므로 그의 권역과 지배하를 벗어날 수 없고, 그의 허락 안에서 한정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단 말하건데, 만약 주변 환경, 조상, 심지어 창조주에 의해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감정이 들면, 그러한 감정 자체는 유효하며, 공감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그를 공감해주기는 커녕 '성경에는 공의의 야훼와, 사랑의 야훼가 나오는데, 선하고 인자하시다는 사랑의 야훼이고, 벌을 주시는 부분은 공의의 야훼인데, 살인자를 처형하는 것도 공의롭다'는 식으로 풀려 들면, 이것은 감정을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집필될 당시 기준으로 공의로웠다는 이야기는, 21세기 현대의 보편적 윤리관에는 당연히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얘기는 절대선이라고 선한 신을 여태 신자들은 생각하였지만, 실은 전근대적인 '선함'을 가진 신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하긴, 당시 기준으로 선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혹은 매우 먼 미래 기준에서 '선함'이라면 이건 이것대로 문제다. 너무 미래의 도덕관념이 맞춰진 신은 과거의 우리가 인권을 알게모르게 차별했듯 우리도 몰라서 자행하는 차별을[7] 그 신의 입장에서 징벌할지도 모른다.

5. 일부러 파라오의 마음을 조종해 놓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 야훼

출애굽기에 따르면, 파라오는 그때 애굽 당시에 많이 불어난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국에게 많은 노역을 하고 있었기에 스스로 이스라엘 인들을 억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야훼 히브리인의 아기들을 학살한 책임으로 이집트에 심판을 내렸다. 그러나 이 심판의 이유가 논란이 되는데는, 파라오를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자신에게 반(反)하게 해야 자신이 재앙을 내리고 기적을 보이며 이집트인들에게 스스로가 강하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논리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여,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베풀어 내가 얼마나 강한지 그 증거를 이집트 땅에서 드러내리라. 파라오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손을 들어 이집트를 호되게 쳐서 나의 군대,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집트인들은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 탈출기 7:3~5, 공동번역성서)

능동태의 사용을 보다 문자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하면 "하느님께서 직접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실제로 탈출기/출애굽기에서 이집트에 재앙이 내려지고, 7장 20절 즈음에 가면 재앙이 해결된 뒤 다시 파라오가 유대인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에서 '야훼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 파라오가 유대인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이 나온다. 즉, 이 말은 야훼가 파라오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그를 마인드컨트롤 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악의 문제에 대해 악이 인간 세상에 만연한 이유가 '신께서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정작 탈출기/출애굽기에서는 신이 파라오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파라오는 자신의 자의가 아니라 야훼에게 조종당하는 상태에서 '난 유대인들 안 내보냄!'라고 말하고, 그걸 꼬투리를 잡아 더 많은 재앙을 내려 이집트인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야훼 본인이 스스로 파라오에게 '유대인을 내려보내지 말라고 해라!'고 조종한 걸 가지고, 자기가 조종한 그대로 했다고 해서 재앙을 내리는 게 윤리적으로 말이 되는가?

또한 종교 세계관에서는 하느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끊임없이 관계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야훼가 학살자가 아니라면 '대량 학살 말고도 다른 수단을 통해서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는가?"(심지어 이집트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도!)는 반박이 비종교적 입장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또한 야훼가 전지전능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야훼가 맘만 먹는다면 굳이 학살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야훼는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살해하는 대량 학살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 무엇보다 굳이 히브리 인들을 노예로 계속 유지하려던 건 야훼가 영향을 끼쳤든 아니든 파라오의 행동인데 대체 그 행동을 왜 모든 이집트인의 장자를 몰살하는 것으로 벌하는가요 대한 답이 없다. 통치자의 문제로 피지배자들을 몰살시키는 행동은 위에 언급된 연좌제보다도 더한 비논리적이고 비윤리적인 처벌 방식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론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할 자유를 주진 않으셨다. 이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성경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그 자유의지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면 그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파라오의 경우도 그의 국가가 조직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고 어린 남자 아기들을 학살한 책임을 지기 위해 파라오가 그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도록 그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셨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죄인과 배교자는 지옥에 간다고 복음서와 신약 성경을 전체를 통해 말하고 있다. 만약 인간의 영혼이 선택할 수 있다면 지옥에 가는 선택을 할 영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판, 즉 자유의지에 대한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심판은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일어난다. 그것이 성경을 전체를 통해 가르치고 현대 사회에서도 계승되고 있는 자유의 의미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자유로운 행동"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파라오의 입장에서 몰입하면 안되는 것은 그렇다면 숫자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없이 살해되었을 남자 아기들의 목숨과 노예 노동에 시달리며 죽어갔을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악행들의 책임자인 파라오에 대한 자유의지 운운은 어처구니가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밖에도 기독교인으로써의 반론은,

그 중 첫 번째로 소개할 것은, 파라오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오죽 파탄으로 치달았는지, 하느님이 하는 모든 행동이 파라오 입장에서는 악수로만 이어졌다는, 즉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파라오를 엿먹였다는 감정 자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인간의 고발 따위를 감당 못 할까?

또, 출애굽기 1장에서 파라오 본인이 이스라엘 장자들의 학살을 명령한 적이 있다. 또, 장자 학살까지 가기 전에 분명히 여러 번 겁을 주었다. 요컨대, '말 안 들음? 너 학살'이 아니고, 사실은 9번이나 더 기회가 있었으며, 심지어 파라오가 정신을 몇 번 차릴 한 적도 있었다. 출애굽기 7장의 일부 재앙들을 보면 '주님께서 예견하신 대로 파라오가 기어코 스스로 고집을 부렸다', '파라오가 이집트의 마법사들도 비슷한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으며, 이는 주님의 예견대로였다' 하는 식의 서술도 나온다. 사실 성경 내 다른 사례를 보더라도, 걸핏하면 대홍수 등의 이벤트를 통해 리셋 버튼을 눌러대기도 했으며, 심지어 나중에 이스라엘에게도 몇 번 그럴 뻔하기도 했지만, 모세 등의 애원을 듣고 심판을 보류하거나 취소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여기서의 요점은 성경 내적으로 야훼가 섣불리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지는 않는다는 것. 하느님의 목소리를 능동태로 쓴 것은, 문자 그대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기 보다, 힘이나 주권, 필연성을 강조하는 문학적 장치로 설명함으로서 조직적인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무언가 비상식적으로 대단한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으레 이를 외부의 힘/신이 개입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실제로 완전 자연적으로만 놓고 봐도 참으로 적절히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석이 가능한데[8], 고대 기준으로 그 임팩트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게 이집트 전체가 패닉에 빠졌을 때 그 틈을 타서 도망친 것을 '하느님께서 이러이러하게 도우셨다'는 식으로 후대에 기록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10'이라는 숫자에 주목해야 하는데[9], 구약을 보면 '10'이라는 숫자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십계명,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의 계보, 십일조 등.

여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가 그때 당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2살 아래 남자 아기들을 학살하였기에 위의 목차 2번과 같은 허락을 하고 바로에게 마음을 억지로 부리게 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성경의 성격은 다른 수많은 신화나 교훈처럼 사람의 인도에 있는데 '그냥 하느님이 다 좋게 만들었으니 에브리띵 이즈 오케이' 해버리면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으니 적당히 악역도 필요하고 선역도 있어야 권선징악이 되지 않겠느냐고 본다. 실제로 이 부분의 경우 이야기의 서사구조상 신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반항할 때 이렇게 된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석이다.

다만 문제는 성경에서 어느 정도는 고려한 사항이긴 하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 파라오와 그 신하의 마음을 굳게 했다고 말한다. 큰 표징에 대한 기록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대로 전해져야 한다는 이야기. 다만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입장이고 윤리적 문제를 피해가지는 않는다. 자기 능력 보이려고 이집트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에라스뮈스의 경우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굳게 하셨지만, 파라오가 회개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파라오의 잘못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에라스뮈스는 이것이 교부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10]

6. 희생된 욥의 가족들

다음 욥기의 구절을 살펴보자.
야훼께서 사탄에게,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 ( 욥기 2장 3절, 공동번역성서)

보면 알겠지만 욥기에는 야훼가 욥을 시험하려고 충동적으로 사람(욥의 자식들과 하인들)을 죽이고 재산(양과 낙타)를 빼앗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있다. 심지어 욥에게 극심한 피부병까지 주었다. 결과적으로 욥에게 더 많은 재산과 하인, 새 가족, 건강을 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면 이전에 죽은 욥의 가족과 하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뭐든지 나중에 돌려주기만 하면 이렇게 함부로 시험에 들게 해도 된다는 것일까?

게다가 본문을 보면 야훼 스스로가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으므로, 사탄이 그랬대요(…)라는 기독교인들의 해명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다는 표현은 욥기 초반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탄이 야훼에게 '인간은 당신께서 이래저래 여러 축복과 혜택을 주니까 순종하는 것이지 다 뺏고 시련을 주면 금방 돌아서 버릴 거다' 라는 식으로 도전했고, 그에 야훼가 응하여 '그럼 그렇게 해봐라' 라고 '사탄이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므로 전후 맥락을 제외하고 저 부분만을 보고 야훼가 '직접' 욥에게 저런 고통을 겪게 했다고 보기엔 비약이 크다고 주장한다. 또 신자들에게 고난받는 신앙인의 모범을 욥을 통해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논박을 펼친다.

특히, 한국의 장로회와 이를 기반으로한 근본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서 이를 극한으로 가져가는 경향을 보이는데[11], '전지' 중에서도 '선견지명/예지력/예정' 측면을 아주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욥기는 사후과잉확신편향적인 모순에 빠진다. 야훼는 어차피 전지전능하여, 욥이 자기를 배반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지전능한 통찰력을 지닌 야훼가, 이미 욥이 배반하지 않을 것임을 다 아는 상황에서도 사탄의 내기에 응하여 욥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심지어 해당 대화의 막판에서는 '내가 베헤모스 레비아탄을 만들고 다룰 정도로 강하고 복잡한 존재인데 고작 피조물인 너희가 뭘 안다고 설치는가?'와 같은 논리로 욥기를 끝내는데, 이러한 증명책임을 회피하는 논증은 선견지명/예지력/예정을 극단적으로 가져간 상황에서 이는 전형적인 무지에 호소하는 논리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 없다.

사족으로, 신에겐 감정이 없다고 가정하고[12] 선견지명/예지력/예정을 더욱 극단적으로 가져가면, 심지어 야훼는 아무것도 안해도 전부 알기에 행동 자체를 취할 필요가 없지만 고작 피조물 몇몇에게 인정받기 위해 혹은 과시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귀결되며, 이걸 보고 교인들이 감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귀결을 짚어가다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부터가 하나의 쇼로 보이는 기현상을 느낄 수 있다. 왜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에. 즉, 이중예정설을 이단으로 공격할 수 있는 빌미가 되며, 심지어 보편교회에서는 중세시대에 이걸 이미 이단으로 못박아놨다.

욥기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 폭정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욥의 이의제기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고, 심지어 '너희가 뭘 안다고 설치냐?'며 꼰대질로 일관하는 야훼는 폭군을 상징하며, 이런 부조리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 정상이다. 이를 세속적으로 치환하면, 생활고에 지친 피지배층에 지배층에게 ' 당신은 지금 우리 사이의 사회 계약을 위반했어'와 같은 항의를 할 때, 만약 지배층에게 '고통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신학이 존재하면 이를 바탕으로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당연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당장 '착하게 살면 죽어서 천국 가는' 교리부터가 '현생은 입 닥치고 나를 위한 착취를 당하거라, 죽어서라도 보상받을테니' 하는 식으로 악용되고, 불교의 윤회 사상도 그런 식으로 악용되는 마당에[13], 더 이상 고통에 대한 필연성과 정당성을 찾으려 해 봤자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판을 가했는데, 이는 기성 종교의 교리가 그러한 식으로 패권과 폭정을 정당화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7. 금송아지 사건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이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부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떠드는구나!"

탈출기( 출애굽기) 32장 1~7절 ( 공동번역성서)[14]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금송아지 우상숭배 관련자들이 대부분 살해당하는데, 물론 아론이 강요를 받은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여호와의 절일'에 지도자로서 치안 유지를 방관했거나, 좋게 봐줘도 실패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책임이 있는데도 관련자가 모두 살해당하는 가운데 아론만이 별다른 벌을 받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15]

아론이 회개를 했기 때문일까? 금수저였기 때문이다이러면 다른 사람들 가운데 회개한 자가 없다는 뜻이다.[16]

이에 대해서는 아론이 최초의 대사제로 임명될 사람이며, 탈출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위인이라 하느님이 아꼈다는 견해도 나온다. 구약에서 갈렙이 별다른 취급을 받지 않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위인이 떳떳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금을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툭 치니 '억' 하고 죽었다'급의 변명이나 시전하는 구차한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신명기 9장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야훼께서는 아론에게도 몹시 화를 내시어 그를 없애버리려고 하셨는데, 나는 그 때 아론을 위해서도 빌어야 했다.

신명기 9장 20절 ( 공동번역성서)

그 때 금송아지를 주도하였던 아론을 야훼가 죽이려고 했던 것을, 모세가 기도를 통해 야훼의 뜻을 거두게 했다. "찌질이가 빽 잘 만나서 운 좋게 뒷탈없이 넘어갔느냐"[17]는 지적에 오히려 힘을 실어준다.

세월이 조금 흘러, 신명기 10장 6절, 민수기 20장 23~29절 등을 보면, 불신의 댓가로 결국 객사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민수기 내 다른 이들이 받은 가혹한 처벌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낮은 수위의 처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칸 자손의 우물들이 있는 그 곳을 떠나 모세라로 향하였다. 거기에서 아론이 죽어 묻히고 그의 아들 엘르아잘이 뒤를 이어 사제직에 올랐다.

신명기 10장 6절 (공동번역성서)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은 카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다. 에돔 땅 접경에 있는 호르 산에 이르렀을 때에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아론은 선조들에게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너희가 므리바 샘에서 나의 명령을 어겼으므로 아론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잘을 데리고 호르 산으로 올라가서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잘에게 입혀라. 아론은 거기에서 죽어 선조들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모세는 야훼의 분부대로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호르 산으로 올라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잘에게 입혔다.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자, 모세와 엘르아잘은 산에서 내려왔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아론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삼십 일 동안 아론을 위하여 곡을 하였다.

민수기 20장 22~29절 (공동번역성서)

8. 가나안/페니키아 침략 및 제노사이드

아무리 정통성과 전통 때문에 구약 성서를 안고 간다지만, 자(字)의적으로 해석했을 시의 구약 성서의 야훼의 뿌리 및 한계가 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먼저,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해 놓고, 이미 창세기부터 대놓고 셈족, 즉 이스라엘/유대계가 주인공 보정을 받기 시작한다. 심지어 가나안은 셈족에 비해 열등한 것이 당연하다, 가나안은 당연히 셈족의 신을 믿어야 한다[18]는 밑밥을 깐다:
한편, 노아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마침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아들이 한 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그는 또 말했다.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하느님께서 야벳을 흥하게 하시어 셈의 천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어라." 노아는 홍수가 있은 뒤에도 삼백오십 년이나 더 살아, 모두 구백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

( 창세기 9장 20-29절, 공동번역성서)

가나안 땅을 앞 뒤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툭 떼어주는가 하면 (참고로 해당 떡밥은 출애굽기로 넘어가서도 그 전체를 아울러서 끊임없이 투척된다):
그 날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이 곳은 켄족, 크니즈족, 카드몬족, 헷족, 브리즈족, 르바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기르갓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창세기 15장 18-21절)
네가 몸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리라.

창세기 17장 8절(공동번역성서)

신명기와 여호수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이 침략[19]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화평을 맺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을 맺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로 삼아 부려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을 맺을 생각이 없어서 싸움을 걸거든 너희는 그 성을 포위 공격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부치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밖에 그 성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원수들에게서 빼앗아주시는 전리품을 너희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신명기 20장 10절~14절( 공동번역성서)
전지전능한 야훼께서 ' 전쟁할 때는 이렇게 하라'면서 직접 제시해 주시는 가이드 라인 되시겠다. 가만히 보면 참으로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데, 치고자 하는 성에 접근해서는 화평을 맺자고 낚시질을 시도하여 성에서 그 화평 교섭을 믿고 성문을 열어주면 그 성의 거주민들을 노예로 잡아 부리고[20], 만약 화평을 맺자는 낚시질에 걸리지 않으면 공격해서 다 쳐죽이고 여자와 가축과 아이들을 전리품으로 차지하라는 명령이다. 화평을 맺겠다고 하면 노예가 되고, 안 맺겠다고 하면 살해당한다. 잔혹하기도 악명높은 몽골군도 순순히 항복한 상대에게는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다![21] 얼핏 보면 '이교도를 벌하는 성전' 쯤으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자와 아이를 전리품으로 삼는 시점에서 의도가 불순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가나안 등 일부 민족에 대해서는 더 잔혹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다음 구절들을 보자.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 신명기 20:16~17, 공동번역성서)
사무엘 사울에게 전하였다. " 야훼께서 나를 보내시어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소. 그러니 이제 야훼의 말씀을 들으시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 여자, 아이와 젖먹이, 떼와 떼, 낙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 사무엘상 15:1-3, 공동번역성서)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 여호수아 6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그냥 모조리 죽이라고 한다. 온 세상을 창조한 사랑 넘치고[22] 전지전능하다는 야훼가, 자기를 믿지 않는 자유의지를 행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준답시고 한 지역의 민족들을 전멸시키라고 명하는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충격적이고 비윤리적인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젠 젖먹이 아기들까지 죽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다.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해명들이 있다. 한번 살펴보자.
  • 암세포를 도려낸 것이다.
    R. A. 토리[23]는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가나안과 예리코의 장정들 뿐 아니라 힘 없는 노인과 아녀자, 갓난아기까지 죽이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이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 민족의 죄악이 심각했다고 봐야한다. 이 죄악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에 심각한 패해를 주는 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암세포를 제거해내야 했다. 암세포를 절제하는 수술은 매우 무서운 수술이지만, 나머지 건강한 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도덕적인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 부모의 죄와는 상관없다.[24] 또한 가나안과 예리코인들이 그 정도로 타락했다는 주장 자체의 신뢰도도 떨어지는데, 이는 뒷 부분을 참고하시라.
설사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지전능하다는 야훼가 교육이나 제도 정비를 통해 교화하는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냈을 법한데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떤 변명을 덧붙이더라도 이러한 학살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학살자들도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온갖 변명과 핑계, 명분을 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것.
좀 더 도발적으로 말하면, 이게 홀로코스트와 뭐가 다를까? 나치스가 할 만한 변명에 똑같이 대입해보자.
유대 민족의 장정들 뿐 아니라 힘 없는 노인과 아녀자, 갓난 아기까지 죽이라고 한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이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 민족의 죄악이 심각했다고 봐야한다. 이 죄악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에 심각한 폐해를 주는 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암세포를 제거해내야 했다. 암세포를 절제하는 수술은 매우 무서운 수술이지만, 나머지 건강한 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히틀러는 인류를 위해 도덕적인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 정당방위일 뿐이다
    만일 가나안인들과 예리코인들이 멸절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인들과 예리코인들에게 멸절됐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였다.

    청동기 시대의 전쟁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스라엘의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더욱이 야훼가 전지전능하면 굳이나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시키지 않더라도 새로운 땅 하나 정도는 뚝딱하고 만들어서 히브리인들을 거주하게 하면 될 것이다.[25] 그들이 먼저 침략해온 거라면 이 논리가 먹혔을 지 모르겠으나, 침략자는 엄연히 이스라엘 인들이다. 먼저 침략한 주제에 정당방위 운운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단, 이집트를 탈출해서 난민 생활을 할 시절에 최소한 일부 민족들에 대해 선제공격을 당하는 묘사가 나오기는 한다.[26] 물론 이마저도 그럼 그것들만 격퇴하거나 굴복시키면 되지, 저 애꿎은 다른 민족들은 왜 휘말렸는가 하는 반론이 나오게 된다.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다. "장정을 뽑아서 내일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나는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겠소."

탈출기(출애굽기) 17장 8~9절( 공동번역성서)
  • 예수가 오기 전이라서
    부모들의 타락으로 인해 아이들도 오염되었을 것이며 이는 예수의 복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는데, 당시는 예수가 오기 전이었다.

    연좌제의 늪에 빠진 논증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부모의 죄를 이유로 아이에게 죄를 덮어씌울 순 없다. 게다가 전지전능하니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터, 갓난아이를 죽이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의 가능성마저 미리 끊어버릴 정도라면 처음부터 가나안과 예리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으면 되었을 게 아닌가? 아니면, 어차피 신의 입장에서 몇천년이야 인간의 1초보다도 짧은 시간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 잘난 예수의 복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는거면 그냥 몇천년 앞당겨서 메시아가 강림했으면 그만 아닌가?
  • 구약 시대니까 당시 시대 가치관의 한계로 보자
    성경에서 예리코 성 전투의 시점은 분명히 구약이고, 이방인들의 믿음과 구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시점은 신약이다. 즉 구약 시대에는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만의 신이었으므로 성경에 쓰인 기록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다. 처음부터 모두의 구원자로 기록되지 않았고, 예리코 전투 당시에는 선택 받았다는 유대인만의 신이었던 시대에 쓰여졌으므로 성경의 중심 사상에서 전체를 놓고 보면 벗어나지만 쓰인 시점만을 놓고 보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구약 시대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건 쉽게 말해서, '그 시대 사람들은 야만적이었으니, 야훼도 야만적인 명령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이런 주장은 야훼를 '시대가 바뀌니까 말을 바꾸는 신', 혹은 '이스라엘의 민족처럼 야만적인 신'으로 격하시킨다.
게다가 구약성서 레위기에서 야훼는 스스로도 분명, 부모의 죄로 그 자식을 죽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래놓고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아말렉의 젖먹이 아기까지 참살하고 있다. 야훼가 당시 기준으로도 이중잣대를 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약이 쓰여졌던 그 당시 시대를 감안해도 야훼의 행위는 21세기 현대의 보편 타당한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비윤리적이며 잔악하기 때문에 기독교 외부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구약 성경의 비윤리적 내용을 21세기 현대에 가치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 아기들은 죽는 것이 나았다
    가나안과 예리코의 아이들은 타락한 사회에 있느니 차라리 죽어서 하느님 품에 있는게 나았을 것이다.

    전술했던 것처럼 메시아가 일찍 강림했으면 그만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타락한 사회'를 어차피 붕괴시킬 것이 분명한데, 히브리인의 사회는 '타락'하지 않은 것이 분명함에도 그곳에서 살도록 하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나을 이유가 없다. 또한 아무리 신앙인이라도 죽여서 주님 곁으로 보내준다/타인에게 죽어서 주님 곁으로 간다는 개념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인 마당에[27], 이를 비신앙자, 그것도 아기들에게 대입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 무지에 의거한 논증
    하느님의 계획은 크고 광대해서 지각이 제한된 인간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무지에 의거한 논증이며,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냐는 의문밖에 만들 수 없다.
  • 구약을 완성하는 신약
    기독교 측에서는 윤리적, 율법적, 신앙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던 구약 시대를 완성하는 신약의 가치를 강조하며, 이러한 점들을 구약 시대의 한계로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구약이 원본이라면 신약은 패치(?)와 같은 개념이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충돌하는 부분은 신약에서의 관점이 더 완전한 관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신약에서 예수에 의해 야훼의 성향이 다르게 그려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야훼가 구약에서 저지른 이러한 학살 행위를 미화하거나 덮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는 성자 하느님으로서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만물이 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야훼가 명한 예리코의 학살이 이루어지는 동안 예수의 위격은 성부의 위격과 성령의 위격이 그 깽판(...)을 놓는 동안 모든 것을 엄연히 지켜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 성경이 좀 틀릴 수도 있지
    여기에 대해 상당수의 가톨릭 신학자들과 진보/중도적인 개신교인들은 성경에 나온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사실 근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가톨릭, 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감리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측의 부분적 교세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서도 구약의 야훼의 학살을 애써 무시하며 조롱해도 상관 없지만 성경이 신화도 섞여 있으며 왜곡도 섞여 있고 편집과 필사상의 비의도적 오류도 있으며 고대인들의 낙후된 세계관과 유대인들의 민족성 등이 섞여있는 경전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문단의 비판은 사실 조금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 개신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이 신화도 섞여 있으며 왜곡도 섞여 있고 편집과 필사상의 비의도적 오류도 있으며 고대인들의 낙후된 세계관과 유대인들의 민족성 등이 섞여 있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한계점이 존재하는 경전이라면,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와 같은 다른 신화와 다를 바가 대체 무엇이냐 라는 비판적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 타락한 사람들을 죽였으니 문제 없다
    이에 대해, 지혜서 12장에는 예리코를 비롯한 가나안인들의 죄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나안들에게 내린 하느님이 신중한 징벌 - 당신의 거룩한 땅에 살던 옛 주민들, 당신께서는 그들의 가증스러운 관습 때문에, 마술과 불경한 제사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셨습니다. 아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음복한다며 사람의 살과 피에다가 내장까지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광란의 의식이 한창 벌어질 때에 그 참가자들을, 힘없는 생명들을 살해한 그 부모들을 당신께서는 저희 조상들을 통하여 멸망시키시어 모든 땅 가운데에서 당신께 가장 값진 이 땅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훌륭한 이주민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인간이기에 당신께서는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 군대의 선봉으로 말벌들을 보내시어 저들을 조금씩 멸망시키게 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싸움터에서 저 악인들을 의인들 손에 넘기실 수도 무서운 야수나 엄중한 말씀으로 단번에 파멸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조급씩 심판하시어, 저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물론 당신께서는 저들이 근본부터 악하고 악을 타고났으며 그들의 사고방식이 영원히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저들은 처음부터 저주받은 종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저지른 죄를 당신께서 용서하신 것은 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지혜서 12장 3절~11절, 가톨릭 성경)

    그러나 구약성서의 가나안 관련 서술은 교차 검증이 제대로 되는 역사적 기술이 아니며,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인들을 진멸시켰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혜서의 해당 서술은 후대 유대인들의 아전인수격인 서술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논란이다. 또한 가나안인들이 불의한 사회 체제를 가졌으므로 몰살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서술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을 충분히 가질 수 있기도 하다.
또 불의한 사회체제를 가졌다고 해서 젖먹이 아기까지 다 칼로 몰살시키는 것은 명백한 연좌제이므로 전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온갖 살육과 학살을 저질러 온 자들도 온갖 핑계와 변명을 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지혜서의 해당 서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한 해명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바알 숭배 운운하면서 가나안 정벌을 정당화하기 전에, 야훼 숭배도 인신공양의 정황증거가 완전히 없지는 않다.

* 사랑에서 벗어나서
예리코의 전투를 비롯한 가나안 정벌에 대한 가톨릭 신학계의 주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분노는 우리가 하느님 자신이신 사랑에 대해 어긋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 사는 사람, 선을 벗어나 사는 사람은 그럼으로써 그 분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은 부정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분노는 지배욕에 찬 독재자가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내적인 논리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 곧 우리를 지탱해주는 사랑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공허와 어둠 속으로 빠져 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는 이른바 사랑의 영역에 존재하지 못하고, 분노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하느님의 형벌은 하느님께서 벌금을 부과하시고 사람에게 무엇인가 제재를 가하시는 데서 재미를 느낀다는 의미의 형벌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형벌은 우리가 실제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노선으로 들어서고 올바른 삶을 벗어날 경우에 느끼게 되는 당연한 결과들의 표현입니다."
최대한 빙빙 돌려 썼지만, 실제로는 바로 위의 주장을 더 세련되게 포장한 버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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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도우 복싱이다
성서주석학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야훼의 가나안 민족 전멸 명령은 실제 명령이 아니라 일종의 섀도우 복싱이라는 것이다. 이미 사라진 민족들을 대상으로만 학살을 명하고, 실재하는 모압이나 에돔과는 평화를 명한 것에서 볼 때, 이는 단순히 유대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28] 더 나아가 성경은 역사책이나 과학책이 아니므로, 역사적 정확도보다는 그 안의 '하느님의 말씀'과 '교훈'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시편처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적 표현이 성경에 있듯, 이것도 그렇게 보면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역시 논점 회피에 불과하다. 학살 기록을 문학적 비유로 치부하고, 이를 종교적 교훈으로 포장하려 한다. 시편은 처음부터 시로 쓰였지만, 이는 명백히 성경의 설정에서 '역사 기록'임에도 갑자기 비유로 해석하려는 무리한 논리일 뿐이다.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 경전에서 왜 역사적 팩트를 찾느냐"고 반문하지만, 팩트든 아니든 쓰여져 있는 것에 어떠한 뜻이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일관된 입장이므로[29] 이는 다뤄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는 윤리적 문제를 '해석'이라는 미명하에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8.1. 정의로운 전쟁 이론

어떻게 보면 이 '가나안 침략 연대기'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갖는 근본적 문제점들을 예견하고 있다.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어떤 논리적, 윤리적 함정에 빠지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라 할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전개할 때, '전쟁은 어떤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겠으며, 여기에 대한 답은 '자위/방어를 위해', 혹은 '우리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쪽이 무언가 잘못을 하고 있으니까' 정도가 나온다. '정의로운 전쟁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쪽으로 갈 경우, '가급적 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30]'와 같은 내용이 반드시 튀어나오게 된다.

그런데 가나안 침략이 보여주듯, '우리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쪽이 무언가 잘못을 하고 있으니까' 류의 주장들은 필연적으로 '저 번지르르한 말 뒤에 어떤 정치적 계산이 들어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다. 실제 예시를 들자면, 공산주의를 막겠답시고 섣불리 설쳐대면서 서방 기업들의 영업을 용이하게 만든 독재 정권들의 수립을 초래하거나, '테러에 대한 전쟁'을 공표하고 석유를 뺏기 위해 중동을 침략한 미국의 경우가 있다. 물론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세계 인민 대단결을 외쳤으면서 실제로는 패권 확대만을 꾀하며 세계 여기저기 개입했던 소련의 행태도 다를 바 없다.

또한 '정의로운 전쟁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쪽으로 갈 경우에도, 가나안 침략은 어떤 '공의로운' 가이드라인도 결국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설정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이성으로 여기서 논란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9. 여성 혐오 조장

하와가 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아담에게까지 선악과를 먹자고 권유하는 내용 등을 포함해, 성경에서는 신약의 디모데서의 내용과 더불어 성경에서는 마치 여성이 무능한 허당에 지속적으로 실수를 하는 존재처럼 묘사되어 있고, 그래서 합동 등의 보수 교단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여성을 목사로 세우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구약의 여성 사사인 드보라 하나만으로 바로 반박이 가능하며,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성 지도자들 등의 반례도 있다.

디모테오전서에 나오는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등의 구절은 '여자는 남자의 권위에 순종하며 배우고 따라야 한다'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를 '고대 사회에서는 남존여비가 매우 강하므로 여성에게 무언가를 배우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시대상에서는 매우 진취적인 발언이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정작 그 말을 한 바울이 한창 전도를 펼치던 고대 로마에서는 여자도 멀쩡히 초등학교에 갔다. 그 이상은 귀족이 아닌 이상 드물었지만 이건 남자 평민도 마찬가지였다.

9.1. 구약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창세기 2장 7절, 공동번역성서)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주리라." 하시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아담은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의 일을 거들 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창세기 2장 18-24절( 공동번역성서)
창세기 1장에서는 그냥 '하느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어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정도로 일축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는 꽤나 자세히 풀어쓰고 있다.

남자는 그냥 갑툭튀했는데, 여자는 굳이 '사람/남자가 독거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라는 서두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처음부터 여자를 콩라인 취급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애초부터 여성은 애초부터 남성을 보조하기 위해서, 외로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란 말인가?[31] 남자가 불완전하니 여자가 만들어졌다고? 남자가 완전했으면 여자는 안 만들어졌어도 괜찮았을 것이란 말인가?

단,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반박을 할 수 있다: 창세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실 사람은 맨 나중에 창조되었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사람이야말로 으뜸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섣불리 하등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약간의 유머를 첨부하자면, 여자는 최소한 사람 뼈를 재료로 썼지, 남자는 그냥 진흙과 모래 덩어리다.

사람이 나중에 만들어졌음에도 사람의 우월함을 결코 의심치 않으면서, 여자는 남자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섣불리 쟁기 문명권의 가부장적인 색안경을 쓰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 창세기 3장 16절,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남자와 동등한 대상이 아닌 상명하복의 관계로 여자를 규정하고 있다. 즉 원래부터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여성이 남성을 섬겨야 하는 징계를 받게 된 것이다. 다만, 아담도 선악과를 먹은 것에는 피장파장이기에 이를 빌미로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는 것을 정당시하면 안 된다.

선악과를 먹고 쫓겨나는 장면에는 사실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약간 앞부분의 선악과 장면을 보면, 이브는 약간의 설득 끝에 선악과를 먹었지만 아담은 이브에게서 별 말 없이[32] 선악과를 건네받아 먹었으니 오히려 아담(남성)이 (의지력 측면에서) 약자가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높은 확률로 여성이 남성에게 농사를 가르쳤을 것이라는 인류학적 정황 증거와, 특히 쟁기로 밭을 가는 농사가 단기적인 수명 저하를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주 원인으로 꼽혔음[33]을 생각해보면, 가뜩이나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남성이 전투력을 바탕으로 근소하게 우위를 점했었는데, (쟁기를 활용한) 농사를 지음으로 인해 남성이 여성의 기여도/잠재력 등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능력 하나만으로 크게 우위를 점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역사적 해석이 가능하다.

또, 무조건적으로 야훼를 신뢰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던 아담과 이브의 상태를 어린아이, 그리고 부끄러움을 알며 나름대로의 판단력을 가지고 야훼를 의심하는 상태를 어른에 비유하자면, 어른으로서의 성장에 따른 여파에 대한 내용이라는 은유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 ( 민수기 31장 17절~18절)
히브리인들이 남의 땅을 침략하고 다른 민족을 약탈할 때, 처녀들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죽이라고 하는 구절이다.[34] 전술했던 전리품 구절과 상당히 유사한데, 전후 사정을 모르면 강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예, 너희를 위하여라고 콕 집어준다.
그런데 그 고발이 사실이어서 그 여자가 처녀였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아비의 집 문 앞에 끌어다 놓고 친정이 있는 성읍의 시민들이 돌로 쳐죽일 것이다. 그는 제 아비의 집에 있을 때 몸을 더럽혀, 이스라엘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부정한 짓을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뿌리뽑아야 한다. ( 신명기 22장 20~21절)
결혼을 했는데 처녀가 아니면 돌로 쳐 죽여도 정당하다는 구절이다. 처녀인지 아닌지는 당시 아니 지금도 중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병맛의식[35]을 보면 답이 나온다. 참고로 현재 유대교계에서는 투석형을 행하지 않고 있고, 기독교계에서도 간음한 여인과 예수의 일화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투석형을 폐기하였고 행하지 않는다.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를 다른 사람이 성읍 안에서 만나 같이 잤을 경우에는, 둘 다 그 성읍 성문 있는 데로 끌어내다가 돌로 쳐죽여야 한다. 그 처녀는 성읍 안에서 당하면서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일 것이요,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범했기 때문에 죽일 것이다. 이런 부정한 짓을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뿌리뽑아야 한다.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를 다른 남자가 들에서 만나 겁탈했을 경우에는, 그 여자를 겁탈한 남자만 죽여야 한다. 그 처녀는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므로 손댈 것까지는 없다. 이것은 이웃에게 맞아죽은 것과 꼭 같은 경우다. 그 일을 당한 곳이 들이므로, 약혼한 그 처녀가 소리를 질러도 와서 건져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신명기 22장 23~27절)
실제 강간이 벌어질 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매우 억울할 수 있다.[36] 강간당할 때 협박이나 구타 등 여러 이유로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면, 강간이 아니라 화간으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근데 남자는 상황이 어떻든 무조건 맞아죽는데 너죽고 나죽자가 아니라면 억울이고 뭐고 보통은 강간 자체가 덜했을 것이다 고대 사회의 전근대적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율법이라 할 수 있겠다. 더구나 성읍 안이 아닌 들에서의 강간에 대해서는 여성을 처벌하지 않으니 진보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성 관념에 대해 완전히 진보적이라고 하기에는 물증이 매우 부족하다.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데 한 사람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셈으로 손을 내밀어 상대편 불알을 잡았을 경우에는, 그 여자의 손을 잘라버려야 한다. 조금도 애처롭게 여기지 마라. ( 신명기 25장 11~12절)
이쪽도 참으로 전근대스럽기 그지없는 부분. 최악의 경우 남자를 의사양반에게 보낼 수도 있고 내가 고자라니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남편을 도울 수 있지만, 손을 자르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전근대적인 내용이라 이래저래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다만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있다. 당장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고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고대의 유대교 사회에서 생식 기능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으며 이를 훼손해버린 여자를 가차 없이 처벌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차별인지, 아니면 남자는 안전할 수 없고 나가서 싸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남자가 남자의 것을 훼손한 경우에 대한 조항은 없다.
'여자가 아기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1주간, 월경하는 동안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아기 포경을 잘라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여인은 30일하고 3일간, 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이 되기까지 집에 있어야 한다. 거룩한 물건에 결코 닿으면 안 된다. 기간이 차서 몸이 깨끗하게 되기까지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계집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2주간, 월경하는 동안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그리고 피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하게 되기까지 66일간 집에 있어야 한다. ( 레위기 12장 2~8절)
이 부분 역시 원죄의 연좌제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1주일간 부정하다고 하면서 여자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그 2배인 2주간 부정하다고 하는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단, 모세오경에서의 '부정함'은 진짜로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위생을 위한 행위 및 격리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해석해야 하며, 이것을 섣불리 하와의 원죄로 치부하기 보다는 남자가 식량 생산과 전쟁 양쪽에서 우위를 점하는 환경[37]에서의 남존여비에 대한 예시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네가, 창녀가 되어서 음행을 일삼고, 마술을 써서 사람을 홀린 탓이다. 음행으로 뭇 나라를 홀리고, 마술로 뭇 민족을 꾀었기 때문이다."이제 내가 너를 치겠다. 나 만군의 주가 선언한다.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 위로 걷어 올려서 네 벌거벗은 것을 뭇 나라가 보게 하고, 네 부끄러운 곳을 뭇 왕국이 보게 하겠다.( 나훔 3장 4절~5절)
여기서 너, 즉 여자는 니느웨인데 니느웨, 즉 아시리아 제국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중동국가도 침입한 고대판 일본 제국 정도로 잔인한 국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 어떤 한국인 작가 내지는 만화가가 일제강점기에 대해 복수한답시고 일본 제국이나 당시 도쿄를 매춘부로 묘사하며 치마를 들추는 묘사를 한다면 같은 한국인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나 그들을 취재하던 오마이뉴스 기자들도 일본인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전반적으로 남성의 희락을 위해 여성을 창조하고, 남의 땅을 침략할때 사내아이는 죽여야 하지만 처녀는 강간을 위해 살려두라는 등, 여성을 성욕 해소 도구 더 나아가 단순히 애 낳는 도구로 취급하며 윤리적인 문제가 나타난다.

사실 아직도 유대교는 여성을 아래로 두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게 유대인들이 이혼할 때 하는 게트(Get)란 풍습이다. 이는 남편이 이혼하는 아내에게 "너를 다른 남자들에게도 허가한다."라는 내용이 써진 종이를 주는 의식이다. 이 종이가 없으면 그 여성은 다른 유대인 남성과 재혼할 때 상당한 애로사항이 생긴다.[38] 이는 명백히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둔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이걸 보면 고대에도 중동 지역의 여성 인권은 시궁창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고대에는 극히 일부를 빼곤 여성인권은 없었다[39]

9.2. 신약

또 신약성경에도 여성을 차별한다고 보여질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정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빼도박도 못하는 일부 구약 구절과는 달리 그나마 해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위안이기는 하지만.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디모테오1서 2장 11~15절)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고린토1서 11장 3절)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고린토1서 11장 7~10절)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고린토1서 14장 34~35절)
아내 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처럼, 아내도 모든 일에 자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에페소서 5장 22~24절)
이 모든 게 대놓고 성차별을 권장하는 구절이라 여성들에겐 매우 불쾌한 구절들이다. 실제로 페미니즘 신학(여성신학)을 연구하는 여성 신학자들이나 여성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에 자주 불쾌감을 표시한다.

신약 구절들의 경우, 앞뒤 문맥이나 당시 상황, 그리고 그리스어 원문을 분석해보면 전혀 다른 해석과 번역을 할 수도 있다. 마침 공교롭게도, 고린토서를 빼고는 해당 문서에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은 전부 사도 바울로의 친필이 맞는지 의심되는 편지들에서 나왔다.

먼저, 기독교가 적어도 로마 황제들에 의해 조직화 및 기성종교화하기 전까지는 여성들에게 전폭적인 인기를 끌며 성장세를 그린 점을 감안해야 하는데, 기독교가 고대 그리스/로마 시절의 가부장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뿐이었다면 여성들로부터 그러한 파격적인 인기를 끌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얄팍한 해석이야말로 이교도적인 풍습과 선입견을 함부로 기독교에 대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에페소서, 디모테오서 등에서 보이는 '순종/복종'의 경우, 'hupotasso' 라는 단어를 썼는데, 문제는 이를 별 생각없이 직역한 데에서 비롯된다. 먼저, 당시 군사 용어로서의 'hupotasso'는 '대형을 이루다' 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뜻으로 씌였는데, '보좌하다, 도움을 주다, 살펴 보살피다' 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또, 그리스어만의 독특한 태가 있는데, 바로 '중간태'다. 예를 들어, 에페소서의 'hupotasso'는 중간태인 'hupotassomai' 로 씌여있다. 중간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면 문서가 산으로 갈 수 있으니 일단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린토서와 에페소서에서 쓰이는 '머리'의 경우, 먼저 구약성서, 그것도 히브리어 원문을 알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로는 'ראש‎' 정도로 적혀있는데, 이 단어는 '머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자의적인 의미로, '기원/뿌리'로서의 비유적인 의미로, 그리고 으뜸/지도자/우두머리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로. 하지만, 그리스어 칠십인역본을 읽어보면, 어느 구절에서는 'kephale'로 번역되어있고, 어느 구절에서는 'arche'로 번역되어있다. 참고로 'kephale'는 자의적 혹은 '기원'을 나타내는 의미가 강하고[40], 'arche'는 '지도자/으뜸'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사도 바울로는 칠십인역본에서 영향을 받은 표현을 사용한 적이 매우 많으며, 따라서 사도 바울이 어느 그리스어 단어를 썼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되는 에페소서와 고린토전서의 구절들은 모두 'kephale'를 사용했다.

또 한가지 흔히 간과되는 점은, 그리스어에서는 '남자/여자'가 곧 '남편/아내'와 동음이의어인데, 이를 감안하고 부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창세기에서의 남녀 창조 이야기로 각도를 바꾸면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해진다.

디모테오서는 그리스어 어휘 뿐만 아니라 또 몇가지 문제가 있는데, '사도 바울로가 참된 믿음의 아들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는 식으로 대충 그 시작을 휘갈겨쓰고 특별한 배경 소개 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서 이러저러한 지시 및 권고사항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위에 논란이 어느정도 있는 데다가[41] 애초에 그 동기가 불분명한 문서를 가지고 함부로 에페소스 교회의 케이스 스터디를 일반화한 결과 가부장적인 여성 비하/혐오 등이 기독교에도 뿌리내리는 원인이 되었다. 다만, 정황상 디모테오서의 주요 동기 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 안에서 퍼지고 있던 영지주의의 타파임을 감안하고,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영지주의 단체들의 존재에 대한 초기 교부들[42]의 문헌이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여자라서 남자를 못 가르치기 전에 에페소 교회에 영지주의 이단을 퍼뜨렸던 사람들이 하필 여성들이라서 그러한 질책이 등장했다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다.

해서 앞뒤 문맥을 적절히 합치고 해당 문서가 작성될 당시의 배경을 감안하고 사도 파울로스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생각해보고 해당 논란이 되는 어휘들에 그리스어 의역을 적절히 적용하면 해당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들을 나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시:
그리스도의 경배/경외 하에 서로가 화합하고 뭉쳐야 할 것입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듯이 남편도 위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교회가 당신께 의지하는 것처럼, (창세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아내/여자는 남편/남자에 의지합니다.[43] 교회가 그리스도를 보좌하는 것처럼, 아내도 모든 일에 자기 남편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에페소서 5장 21~24절)
에페소 교회의 여성 신자들이 학식이 부족해서 영지주의 이단을 퍼뜨리고 있다니, 잠시 좀 참교육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군. 에페소 교회의 여성 신자들은 경청해봐라. 창세기부터 시작하자면, 영지주의에서 가르치는 데로 남녀 자웅동체가 아담과 이브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정통 구약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따로따로, 그것도 아담이 먼저 태어난 것임. 그리고, 뱀이 꼬신 대상은 아담이 아니고 이브였음. 에페소 교회 안에서 영지주의 이단이 퍼진 데에 여성 신자들의 탓이 크다고 전해지는 바, 당분간 이들이 교회의 주요 직책을 맡는 것을 금지한다. 현 세대의 여성 신자들이 영지주의를 버리지 않더라도, 그 자녀들만큼은 올바른 교육을 시켜서 정통 교인이 되도록 하여라. (디모테오1서 2장 11~15절)
교회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듯이, 신자들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창세기 갈비뼈 이야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자는 남자로부터 만들어졌으며, 당연한 잔소리를 또 하는 것 같지만 성자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고린토1서 11장 3절)

고린토전서 34~35절의 경우, 재해석을 논하기 전에 그 진위부터가 대단히 의심되는 구절이며, 실제로 2010년판 옥스포드 NRSV 주석 같은 경우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마찬가지로 머리를 가려야 한다 같은 구절도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현대에서 받아들일 의미 자체는 복장을 단정히 하십시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44] 당장 같은 고린토1서의‬ ‭16장 20절을 보자.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게 진짜로 입을 맞추라는 소리겠는가? 이 구절에서 입을 맞추라는 것은, 당연히 그 당시 저 지역에서는 인사를 저렇게 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당 고린토전서 구절의 경우, 오히려 구약성서를 보면 남자의 치렁치렁한 장발이나 수염이 어떠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45] 얼핏 보면 구약의 그러한 전례에 모순되기까지 하기에 신학 내부적인 관점에서도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여기에 최근 등장한 신선한 해석이 하나 있는데, 신약에서 이렇게 패러다임이 바뀐 원인이 다름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46] 그리고, 'doxa'가 '영광' 뿐만이 아니라 '명예'라는 뜻도 있음을 감안하면 '종교적인, 초월적인 요소에 호소에서 남녀 지위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구절이 아니고 '당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던 히포크라테스 의학을 바탕으로 한 예절에 대한 잔소리'로 둔갑할 수도 있다. 특히 여자가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는 표현은 엄연히 말해서 오역이다. 해당 구절을 적절히 의역 및 해석한 예시:
형제님들은 명색이 깨어있는 기독교도면서 의학도 모른다는 인증을 해 버리면 곤란하니 머리를 가리면 안됩니다. 자매님들은 기독교는 물론이고 특히나 남편 얼굴에 먹칠을 하면 더더욱 안 됩니다- 창세기에서 아내는 남편[47]을 보좌하기 위해 창조되었는데, 자신이 보좌해야 할 사람 얼굴에 먹칠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천사들까지 보고 있는데 남사스러운 줄 알겠으면 머리카락은 성기와도 같은 것이니 머리 좀 가리세요! (고린토1서 11장 7~10절)

이는 해당 구절들이 기록된 시기의 전근대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저 구절을 바탕으로 여성 교우들을 차별해서는 안 될 것이며, 현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나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도덕적 기준 자체가 상대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다만,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신학적 연구 결과가 밝혀지며 그에 따라 과거의 문제를 개혁해나가야 한다.

적어도 기성종교화한 이후의 기독교는 오히려 보수적인 남녀질서로 회귀하는 모습을 심지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 보수적인 성향의 기부 부자들에게 잠식당한 남침례회와, 소련이 만들어질 무렵 해체당했다가 스탈린이 부활시킨 러시아 정교회의 예시를 살펴보자.[48]

실제로 남부 침례회 센터에서 2000년에 '여성들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결정한뒤 칙령을 내렸고, 여성이 교회에서 사제, 목사, 집사, 군대의 군목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만약 여성이 남부 침례회 신학교 교실에서 가르칠 때 교실에서 남학생이 있다면 가르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여자는 남자를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나와있기 때문이다. 관련 연설 참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실상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가정폭력을 비 범죄화 하는 법안을 추진했는데 # 푸틴은 이에 대해 "가정(아버지)는 신성하다"라는 정교회의 정통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실제 러시아 정교회는 이 법안에 대해서 찬성하였다. #

353명이 참가한 설문 조사 #에서 전체 응답자 중 83.3%(294명)가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 여성 혐오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사례를 알고 있는 경우도 10.5%(37명)였다. 여성 혐오를 경험한 적 없다고 답한 사람은 6.2%(22명)에 불과했다.[49]

10. 바빌론 아이들을 저주함

시편 137편은 바빌론 사람들에게 처참하게 파괴당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는 내용을 담았다. 마지막은 바빌론을 저주하는 구절로 끝나는데, 바빌론을 멸망시킬 사람에게 복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9절에서 그들의 아이를 바위에 메어 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며 끝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알겠는데,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또한 바빌론을 직접 겨냥하는 8절에서 바빌론을 여성으로 비유한 것은[50] 현대적인 관점에서 성차별 및 이 문서의 여성비하 서술들 문단의 내용에 포함된다. 공동번역성서와 가톨릭 성서는 완곡어법으로 돌려 말했지만, 다른 번역본에서는 바빌론을 여자나 딸로 비유하는 구절이 남아 있다.

137편의 주제를 정리하면, 나라를 잃고 바빌론 유수로 피해를 본 유대민족의 한을 표현하면서 '우리 주님이 돌봐주시는 유대민족이 낯선 이민족 땅으로 끌려와서 이 꼴이 뭐람? 고향에 가고 싶다! 바빌론 새끼들 싹 다 망했으면 좋겠다! '며 바빌론을 저주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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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역개정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51]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52]
공동번역성서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야훼여, 잊지 마소서. 예루살렘이 떨어지던 날, 에돔 사람들이 뇌까리던 말, "쳐부숴라, 바닥이 드러나게 헐어버려라."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가톨릭 성경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약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약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가톨릭 구 번역(1959년판)[53]
바빌론 강가에 거기 앉아서 우리는 씨온을 생각하며 울었나이다.
우리는 그 땅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거문고들을 걸어 두었나이다.
이는 우리를 데려간 그들이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 부르기를, 또 우리를 괴롭히던 이들이 즐거워하기를 요구하며 「우리를 위하여 씨온의 노래 중에서 불러보라」하였음이니이다.
남의 땅에서 어찌 주님의 노래를 부르오리까?
예루살렘이여, 내가 만약 너를 잊는다면 나의 오른팔이 잊여질찌이다.
만일 나의 모든 즐거움보다 예루살렘을 위에 두지 않는다면, 만일 내가 너를 생각지 않는다면, 나의 혀가 내 목구멍에 붙어 버릴찌어다.
주시여, 에돔의 자손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 날을 회상하소서. 그들은 「무너버리라, 무너버리라, 그 안의 토대들 까지도」 말하였나이다.
침략자인 바빌론의 시민이여, 네가 우리에게 끼친 재앙을 너에게 앙갚음 하는자는 복된자로다.
너의 어린이들을 잡아 바위에 부딛히는 자는 복된자로다.
불가타[54]
Super flumina Babylonis illic sedimus et flevimus, cum recordaremur Sion.
In salicibus in medio ejus suspendimus organa nostra:
quia illic interrogaverunt nos, qui captivos duxerunt nos, verba cantionum; et qui abduxerunt nos: Hymnum cantate nobis de canticis Sion.
Quomodo cantabimus canticum Domini in terra aliena?
Adhaereat lingua mea faucibus meis, si non meminero tui; si non proposuero Jerusalem in principio laetitiae meae.
Memor esto, Domine, filiorum Edom, in die Jerusalem: qui dicunt: Exinanite, exinanite usque ad fundamentum in ea.
Filia Babylonis misera! beatus qui retribuet tibi retributionem tuam quam retribuisti nobis.
Beatus qui tenebit, et allidet parvulos tuos ad petram.
NIV
By the rivers of Babylon we sat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There on the poplars we hung our harps,
for there our captors asked us for songs, our tormentors demanded songs of joy; they said, "Sing us one of the songs of Zion!"
How can we sing the songs of the LORD while in a foreign land?
If I forget you, O Jerusalem, may my right hand forget its skill .
May my tongue cling to the roof of my mouth if I do not remember you, if I do not consider Jerusalem my highest joy.
Remember, O LORD, what the Edomites did on the day Jerusalem fell. "Tear it down," they cried, "tear it down to its foundations!"
O Daughter of Babylon, doomed to destruction, happy is he who repays you for what you have done to us-
he who seizes your infants and dashes them against the rocks.
KJV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We hanged our harps upon the willows in the midst thereof.
For there they that carried us away captive required of us a song; and they that wasted us required of us mirth, saying, Sing us one of the songs of Zion.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If I forget thee, O Jerusalem, let my right hand forget her cunning.
If I do not remember thee, let my tongue cleave to the roof of my mouth; if I prefer not Jerusalem above my chief joy.
Remember, O LORD, the children of Edom in the day of Jerusalem; who said, Rase it, rase it, even to the foundation thereof.
O daughter of Babylon, who art to be destroyed; happy shall he be, that rewardeth thee as thou hast served us.
Happy shall he be, that taketh and dasheth thy little ones against the stones.

11. 다윗과 간통한 밧세바에 대한 처결 문제

우선 다음의 기록을 보자.
어떤 자가 남의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다가 붙잡혔을 경우에는, 같이 자던 그 남자와 여자를 함께 죽여야 한다. 이런 부정한 짓을 이스라엘에서 송두리째 뿌리 뽑아야 한다. ( 신명기 22:22)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일 수 없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죽을 사람은 죄지은 바로 그 사람이다. ( 신명기 24:16)
보다시피 아비가 자식의 죄 때문에, 혹은 자식이 아비의 죄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며, 각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만 책임지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들켰을 경우[55]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이도록 되어 있다.
그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나는 네 상전의 딸과 아내들까지 네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딸들까지 너에게 주었다. 그래도 모자란다면 어떤 여자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나를 얕보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죽였다. 암몬 군의 칼을 빌려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 사무엘하 12:7~10)
야훼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준 아이에게 중병을 내리셨다.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베옷을 걸친 채 밤을 새우며, 어린 것을 살려달라고 맨땅에 엎드려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늙은 신하들이 둘러서서 일어나라고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더불어 음식을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기는 마침내 7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 사무엘하 12:15~18)
분명 자기가 내린 율법에서는 연좌제를 금해놓고, 정작 사무엘하의 기록에 의하면 간통과 불륜을 저지른 다윗과 밧세바는 살고, 죄 없는 아기가 부모의 죄로 죽게 된다.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라 다윗의 집안에도 저주가 내린다.

신명기의 이야기와는 모순되게 분명 연좌제를 금지한다 했음에도 처벌 방식은 영락없이 연좌제다. 불륜의 주체인 다윗과 밧세바는 왜 처벌받지 않는데 아무런 죄없이 태어난 갓난아기는 뭐가 되는가? 야훼 스스로 내린 율법을 스스로 어긴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다. 회개해서? 본인이 회개해서 벌받지 않을 죄였다면 왜 애꿎은 자식들에 저주가 미치는가?

현실적으로 봤을때 야훼가 벌로서 아기를 죽인 게 아니라 아기의 죽음으로서 자기의 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조작일 것이므로 야훼와는 별 관련도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 관점에선 그냥 왕 혼자서 자기 죄를 자기 자식한테 뒤집어 씌우고 자기 죄를 해결한 패륜아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그와는 별개로, 사람들이 대개 비결정론적인 사고를 싫어하는지라[56], 백신이 없던 시절의 영아사망률 때문에 죽은 것을 가리켜 '아이고 불륜을 저지른 벌을 받았구나' 하는 인식과 함께 해당 구절이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죽이는 주체가 야훼면 야훼 자신은 율법을 초월한 존재니 문제 없다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야훼의 명령으로 연좌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율법에 맞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연좌제로 처벌할 때 야훼가 시켰다하면 정당화 될테고 그러면 연좌제를 금지한 신명기의 이야기는 뭐가 되는가? 결국엔 야훼 스스로가 어김으로서 율법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는 셈이다. 그럴거면 뭐하러 연좌제를 금지했는가? 연좌제로 벌을 주고서 그게 야훼의 명령이었다고 한다면 율법을 넘어서 정당화 가능할텐데 그럼 율법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신명기 23장 3~5절을 보면
사생아는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 후손은 10대에 이르기까지도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 후손은 10대가 아니라 언제까지라도 야훼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와 이리로 오는 도중에,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을 가지고 나와서 너희를 맞이하기는커녕, 브올의 아들 발람을 메소포타미아 지방 브돌에서 불러다가 돈을 주며 너희를 저주하게 하였다.
연좌제를 금지하는 율법 바로 전 장에 연좌제로 처벌하는 구절이 나와 있다(…). 물론 24장에선 어디까지나 연좌제로 죽는 것만 이야기했다고 넘어갈 순 있지만, 결국 연좌제가 금지인 건지 아닌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다.

참고로, 이후 인구조사룰 하다 죄를 지은[57] 다윗은 처벌로 가뭄 7년/전쟁 3달[58]/전염병 3일 중 택일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다윗이 전염병 3일을 고른 대가로 백성 7만명이 죽는다. 그 와중에 다윗이 하는 말이, 이 문항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
다윗은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야훼께 아뢰었다. "죄를 지은 것은 저입니다. 못할 짓을 한 것은 저입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제발 손을 돌려 저와 제 집안을 쳐주십시오."
사무엘하 24장 17절(공동번역 성서)

12. 무신론자는 어리석고 악하다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시편 14장 1절, 공동번역성서)
어리석은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한데다가 좋은 일은 안한다고 말하고 있다(...).[59][60] 그렇다보니 이 구절을 토대로 무신론자를 공격하는 기독교측의 해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무신론자들도 이 구절에 대해서 자신들에 대해 공격하는 구절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이다. 외국의 무신론적 성경비판 사이트에선 이 구절에 대해서 Fool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부분까지 비판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본다. 한국의 교회들도 시편 14장을 근거로 무신론자를 공격하는 말도 많다. 이 구절을 인용해 무신론을 비난하는 말이 많자 이런 식으로 반박하는 영상도 올라왔다.[61]

이에 대해서 이 구절이 무신론자가 비도덕하다고 단정짓는게 악인들은 모두 무신론자 즉 무신론자=모두 악인은 아니지만 악인들은 모두 무신론자라는 역으로 말하면 악인 중에선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잘못된 선악관을 심는 구절이라는 의견이 있다. 무엇보다 어리석은 자=Fool의 원래 의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 도덕심이 부족한 자라는 의미였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쪽으로 보더라도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훼(or알라)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된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로 히틀러나 스탈린이 무신론자였고 그들은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있는데 히틀러의 종교관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적어도 그는 기독교를 (이유가 어찌되었든)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고,[62] 스탈린은 그가 무신론자라 악행을 저지른게 아닌, 공산주의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해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누가 무신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나 애당초 모든 악인이 무신론자란 것도 무신론에는 악한 경향성이 있다는 해석을 낳을 여지는 남는 것이다. 반대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선하다는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는 오류도 범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기본인데 무신론자는 부도덕하다고 못박아버리면 자신의 부도덕함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몇몇 사이비 종교의 교리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확실히 할 것은 무신론자를 현대의 기준에서 신을 안 믿는다는 것 하나로 그의 모든 선행을 부정하고 악인으로 낙인 찍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성경은 야훼를 모르는 것을 선한 것으로 쳐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선과 악은 보편 도덕의 선/악이 아니라 신 기준에서의 선과 악이라... 모든 선한 것이 신으로부터 오는데 정작 신을 부정하고 그를 모르는 자가 선하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그런 것을 봤을 때 성경의 입장에서 무신론자 내지 반신론자는 (신보다는) 어리석고 (신보다는) 악한 이들이 맞다. 물론 의인도 인간인 이상 (신보다는) 어리석고 (신보다는) 악하지만, 그래도 이쪽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전능한 신과 비교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전능한 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무신론자와는 달리 자신의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신 앞에서 무릎 꿇는다는 것이 차이점.

역사적으로 봤을때 당시엔 야훼=국가체제나 다름없으므로 야훼를 부정하는것은 곧 체제를 부정하는것이 되므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악행과 동일시 되더라도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본래 종교란 것이 당시의 도덕이나 법체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도 있으므로 신을 부정하는 것=도덕과 법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왕권신수설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 로마서 13장 1~2절)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조차도 무정부주의자를 디스하는 이야기가 돼버리는데다가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권위는 국민이 국가에 내린 것으로 보며 저 이야기의 정 반대가 된다(...). 결국 이 이야기들은 고대인들에겐 국가에 권위를 내리는 합리적 방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점에서도 무신론자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다른 사상을 가지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이야기였고 국가체제, 도덕, 철학등이 발전해서 더이상 신의 권위가 필요 없어진 이후에는 국가체제, 도덕, 철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현재 이 구절의 의미는 야훼의 교리를 잘 따르고 법을 잘 지키자 정도가 되니 큰 문제는 없을 수도 있다.[63]

방어 쪽 균형을 맞추자면, 먼저 '무신론자'의 경우, 견문이 좁고 힘의 논리가 앞서며 종종 선량한 시민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비상식적인 행보를 보이는 시골의 무학력자[64]와 오늘날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논리정연하게 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대도시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무신론자' 하면 전자를 떠올리는 기성종교인들과 '무신론자' 하면 후자를 떠올리는 현대의 대도시 사람들간의 불화에 크게 한 몫 한다.[65][66] 특히 세속적 공교육 인프라가 열악했던 시절에는 종교 시설이 곧 학문 기관이기도 했기에 '무신론자는 무학력자'라는 논리도 성립했다.

'도덕은 신으로부터 온다'는 등의 발상이 자의적으로 보면 말이 안될 수 있어도, 인류학/사회학적으로 놓고 보면 마냥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완전 기독교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슬람이 유독 '무신론자'에 대해 엄격[67]한 이유도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이유야 어쨌든 정교분리가 제대로 안 된 환경 기준으로 '종교가 없다'라는 말은 곧 '무학력자'라는 뜻도 되니까.

로마서의 경우, 고금과 관련 배경 지식에 대한 숙련도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이게 '세속 권력'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한다. 이러한 노선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뒤집는 방법도 있고, 비교적 최근의 신학 연구를 동원하자면 아예 초점을 돌리는 방법이 있다.

로마서 13장 4절에서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벌을 대신 주는 사람입니다. ( 로마서 13장 4절, 공동번역성서)
그렇다면, 해당 명제에 대한 대우를 취하면 합당한 이유 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지도자는 과연 하느님의 사자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역사적인 교부들이 비슷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 전례를 예로 들자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96문 4장에서 사람의 법에 대한 공정성을 따지며, 사도행전 5장 29절을 언급하며 '사람의 법은 하느님의 선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서 불공정할 수 있으며, 이는 폭군에 의한 우상숭배와도 견줄 만하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언급되어 있기도 하고.' 와 같은 서술을 한 바 있다. 특히나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파격적인 요소들이 많았고, 그것 때문에 이런저런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운동권 세력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중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립서비스는 할 지언정, 진심으로 세속 권력층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68] 따라서 로마서 13장을 가지고 섣불리 세속 권력에 대한 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아예 초점을 확 돌리자면, '로마서 13장이 가리키는 것이 사실은 세속 지도자들이 아니라 루카 복음서 등에서 언급된 시나고그의 회당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요컨데,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그렇게 엄격한 구분이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곳에서 모이는 등의 행위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로마서 13장의 내용은 시나고그 내에서의 에티켓에 대한 잔소리라는 해석이다.

다만 '폭군도 하나님의 사자가 맞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절대예정과 연결되기에 결정론적이게 보일 수 있다.[69]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 지식과 파라오 앞에 나가서 말할 수 있을 권위를 갖추기 위해 이집트의 교육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선 노예 신분에서 이집트의 귀족이 되어야 했으며 모세는 부모의 손을 떠났어야 했고, 그를 위해선 유아 대학살이라는 폭군의 폭정이 있었어야 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필요한 인재들과 만나기 위해 떠돌이 생활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사울의 추격이라는 압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렇다고 해서 폭군 자신이 자신에게 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닌데, 신이 자신이 필요없어지면 바로 왕권을 박탈당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3. 호모포비아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 레위기 20:13, 공동번역성서)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서로 헐뜯고 하느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꾀하고 부모를 거역할 뿐더러, 분별력도, 신의도,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들을 행하는 남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로마서 1장 26~32절, 공동번역성서)
사악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고린토1서 6장 9~10절, 공동번역성서)
아주 대충 요약하면 레위기에선 동성애자는 죽어야 하며 로마서에선 동성애자는 중범죄이며 고린토1서에선 니들 천국 못간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요약하면 동성애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하며 천국갈 일은 절대 없다. 다만, 로마서와 고린토1서(전서)에 나오는 구절은 예수가 직접 한 말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정도 변론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딱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동성애를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들이 동성애를 한다고 딱히 도덕적 문제를 야기하는것도 아니다. 물론 동성애를 하면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없는건 아니지만, 똑같이 이성애를 하면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결국 동성애나 이성애 같은 어떤 성적 지향성도, 그 성적 지향성을 지닌 개인의 도덕성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70]

이 몇구절이 미친 영향은 엄청난데 이 구절들 때문에 동성애는 죄악시 되었고 그들을 박해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비기독교권에도 동성애에 대한 적대의식이 퍼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71]사실상 동성애자들에게 악의 근원이나 다름없고 심지어 종교를 배척하는 공산주의에서도 그런 동성애 박해 문화의 영향으로 동성애자를 박해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정말 진보적인 일부 개신교 계열의 교단(대표적으로 선진국 지역 성공회)이 아닌 이상 비교적 온건한 측의 기독교 종파들(특히 가톨릭)마저도 동성애자들의 결혼엔 반대[72][73]하고 있으며 그 외엔 동성애자를 저 구절 그대로 볼 정도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선 호모포비아 참고.

방어 쪽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해명을 하자면, 먼저 레위기의 경우에는 사원매춘 금지와 관련된 허점을 차단하기 위한 구절이며, 로마서와 고린도서는 칠십인역을 읽어보면 다름이 아니라 레위기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키벨레 신앙과 그와 관련된 정황을 좀 알아야 한다. 심지어 'homosexuality'라는 단어를 쓰는 성경번역본 자체가 역사적으로 굉장히 최근 등장한 정황이 있는 가 하면[74], 성인 세르기우스와 바쿠스처럼 정황상 동성 커플로 의심되는 기독교 성인들(!)도 철저히 뒤져보면 더러 있다. 그와는 별개로, 영아사망률이 높고 의학 수준이 낮았으며, 허구한날 전쟁에서 얻어터진 데다가[75] 머릿수가 직접적으로 국력에 연관되던 옛 시절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다산이 덕목이었던 지라 아무도 그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아카 민족처럼 어지간한 주류 종교들이 전혀 접촉하지 않은데다가 어지간한 문명화된 현대 사회 뺨치도록 여성 인권이 좋음에도 불구하고[76] 출산을 목적으로 한 성행위 이 외의 모든 다른 행위들은 금기시되는, 요컨데 높은 영아사망률과 일손 부족이 겹치면 종교와는 상관없이 자연히 출산장려적인 풍토가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류학적 연구 사례도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비교적 평화롭고, 영아사망률 낮고, 의학 수준 높고, 다문화적인 환경에 와서야 출산장려책이 전적으로 높으신 분들의 관심사라는 것이 천천히 재조명되며 호모포비아가 재평가를 받게 된 것.[77]

이 분야에 있어서 기독교를 정확하게 비판하려면 콘스탄티누스의 칙령 이후로 기독교가 보수 기득권화했으며, 조금 더 과격한 주장을 하자면 '오늘날의 어지간한 기독교 종파들은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립서비스를 해 주며 얻은 헌금으로 돌아가고 있고,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섣부른 자신감을 심어 주는 악기능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78][79] 하지만, 호모포비아는 기독교의 산물이었으며, 기독교가 없었으면 호모포비아도 없었을 것이다는 류의 주장은 곤란하다.

성경의 내용으로만 반박을 하면 공리적인 내용인데, 하나님이 처음부터, 거의 모든 동물까지 '남자+여자'를 짝으로 만드셨고, 그 조합으로 자손이 태어나며 자식은 부모로부터 언약을 전달받는다. 하지만 '남자+남자' 조합이나 '여자+여자' 조합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조합으로, 언약 전달을 막는 사탄의 전략이라는 것이 성경을 해석한 내용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공리적인 명제로, 남자+남자나 여자+여자더라도 입양이나 교육계 또는 교회에 봉사하는 방법으로 언약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여자'는 하나님이 정한 관계이기 때문에 깨면 안된다'라는 주장 정도가 반박 없이 주장이 가능하다. 즉 깨면 지옥가니까 하면 안된다

14. 인신공양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 창세기 22장 2절, 공동번역성서) #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판관기 11장 30~31절, 공동번역성서)
입타가 미츠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입타에게 그 아이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자기 딸을 본 순간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 (판관기 11장 34~35절)
창세기와 판관기(사사기) 양쪽 모두 제물을 바치는 방식이 번제물인데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인신공양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선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인되는 의도여서 다행히 미수로 그쳤지만, 사사기에(판관기) 대해선 진짜로 번제물로 바쳤을 것이라 보는 시각이 크다. 이에 대해서 or로 해석하냐 and로 해석하냐에 따라 달라지고 or라면 번제물로 안바쳤다는 식의 해명도 있긴 하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주석성경을 비롯하여 현대의 많은 성서학적 견해에서도 이 부분은 인신공양으로 해석하고 있다.

판관기는 입타의 말실수로 자신의 딸을 바치게 되는 결과를 통해 야훼와의 약속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충고를 보여준다. 그나마 입타의 딸이 스스로 순종하여 공양을 선택했기 때문에 타의에 의한 강제 인신공양이 아닌 반 자의적 선택이라는 해명은 가능하다.
범접하지 못할 것으로 바쳐진 사람이 된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대속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레위기 27, 29
특히 레위기의 이 구절에서도 인신공양은 개념적으로 옹호되고 있다. 다만 레위기의 경우는 똑같은 27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누구든지 사람을 봉헌하겠다고 주님에게 서원하고, 그 사람에 해당하는 값에 따라 서원을 채우려 할 경우, 스무 살에서 예순 살에 이르는 남자의 값은 성소 세켈로 은 쉰 세켈이다. 여자이면 그 값이 서른 세켈이다. 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는, 남자의 값이 스무 세켈이고 여자는 열 세켈이다. 한 달에서 다섯 살까지는, 남자의 값이 은 다섯 세켈이고 여자의 값은 은 세 세켈이다. 예순 살 이상인 남자의 값은 열다섯 세켈이고 여자는 열 세켈이다. 너무 가난하여 이 값을 낼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사제 앞에 세우고 사제가 그 값을 매기는데, 서원한 사람의 능력에 따라 값을 매긴다.
레위기 27, 2-8
즉 사람을 봉헌하였을때는 돈으로 대신하면 된다는 의미다. 즉 원론적으로는 봉헌된 사람을 인신공양하는게 맞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어린 예수를 성전에 봉헌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의미다.그 외에도 같은 레위기 안에서도 인신공양에 회의적인 구절들(18, 21; 20.2-5)이 병존하고, 후대의 예언자들에게 비판을 받으며(예레 7,31; 19,5; 에제 16,20-21; 23,39) 신명기에서도 율법 차원에서 금지된다. 따라서 봉헌은 인신공양이 아닌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 그런 식으로 해드리면 안 된다. 그들이 저희 신들에게 해드리는 일은 한결같이 야훼께서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시는 일이다. 그들은 심지어 제 아들딸마저 불에 살라 자기네 신들에게 바친다.
신명기 12, 31(공동번역)
다만 레위기 27장에서는 '완전 봉헌'을 일반적인 '봉헌'과 구분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봉헌(2-8절)은 대속이 가능한 것으로, 전쟁에서 적국에게 가해지던 '완전 봉헌'은 대속이 불가능한 인신공양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결국 성경에서의 인신공양 논란을 정리하자면, (성경 내부에서도 전승에 따라 엇갈리는 예외들이 있지만) 대속 가능하되[80] '전쟁에서의 살육'은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주님 곁으로 보내기

참고로 인신공양 시비는 가나안의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주요 구실로 자주 이용되는데[81], 이는 '가나안 침략/제노사이드' 의 내용과 더불어서 내로남불, 내지는 그냥 처음부터 침략 전쟁에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던 거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붙이기 딱 좋다.

물론 가장 온건한 형태의 인신공양이라고 가정할 시에는 종신 성무 보조인 등의 노동력으로 종신공양 되었다는 말이겠지만... 고대 종교가 그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15. 노예제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때려 당장에 숨지게 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 종이 하루나 이틀만 더 살아 있어도 벌을 면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 공동번역성서)

And if a man smite his servant, or his maid, with a rod, and he die under his hand; he shall be surely punished.
Notwithstanding, if he continue a day or two, he shall not be punished: for he is his money (KJV)

If a man beats his male or female slave with a rod and the slave dies as a direct result, he must be punished,
but he is not to be punished if the slave gets up after a day or two, since the slave is his property. (NIV)
출애굽기 21장 20~21절
종을 때려 죽이면 형벌을 받지만, 하루나 이틀 연명하면 형벌을 면한다. 다시 말해, 죽지 않을 만큼만 패면 괜찮다는 이야기. 그리고 명백하게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노예 해방을 감행할 때, 반대파들이 "노예제는 성경이 명하는 권리이고 법"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대하여 출애굽기 21장 16절에 사람을 훔쳐서 팔거나 자기 손에 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되어 있으며, 이것은 사람들을 납치해서 팔아 넘기는 노예 상인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라고 주장한다.

즉, 다시말해 당시 이민족들에 비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수준의 사회 제도였다는 것. 기독교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런 법을 제정한 이유가 잔혹한 노예 제도가 이스라엘 시대의 노예 제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서의 노예 제도는 일종의 파산법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대엔 재정에 문제가 생겨 빚을 갚지 못하게 될 때에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빚을 못 갚으면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데 모세가 제정한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와 다르게 한 사람이 빚을 못갚게 되면 채권자나 다른 부자에게 가서 자신을 종으로 팔고 싶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동의하면 그는 빚을 갚아주고 거처를 제공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도록 가령 목수, 미장이로 훈련시켜 급여를 주면서 부렸고 저축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리고 6년이 지나면 7년째 그들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켜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정부가 개입을 하는 대신 사람들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종 제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경이 이를 노예 대신 종이라고 번역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노예 제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 있었던 잔학한 노예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맹점이 있으니, 이들이 근거로 제시한 출애굽기 21장 16절의 구절에 명시된 것은 같은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의 종 제도가 비교적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는 내집단 도덕이었지, 타민족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유대인 내수용 내집단 도덕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야훼의 명령으로 예리코의 학살 같은 사건을 저지르고 심지어 자랑까지 해 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쨋든 본 항목에 게재된 출애굽기 21장 20~21절에 의하면 종은 주인의 재산이라고 본 것은 맞다...[82] 더욱이 성경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고대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도 노예에 대한 처우가 좋았는지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히브리 사회에서 종이라는 개념이 파산 상태의 개인을 회생시켜 재사회화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대체 왜 본 항목의 구절에서 그 개인을 다른 개인의 소유물 내지는 재산으로 명시했는지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일언반구도 없으며, 주인이 종을 때리더라도 이틀 동안만 생존하면 주인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될 수 없다. 즉, 기독교인들은 본문에 게재된 출애굽기 21장 20~21절에 대한 직접적 해명을 회피하고 다른 구절들을 가져왔다는 것이다.[83] 따라서 성경 내에서 언급되는 종이 파산자를 회생시키고 재사회화 시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가 당시 여성의 인권을 일부 신장시켰다 해서 지금도 여성의 인권이 높은 종교가 아니듯이, 상대적으로 본다고 해서 구약이 허락하는 노예제를 반박하기는 힘들며, 성경 내부에 산재해 있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성과 시대적 한계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현대 시대에는)가톨릭과 개신교 등 기독교 계열의 종교들은 모두 인류는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

16. 조롱의 대가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84] 성에서 나와 "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2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였다.
열왕기하 2장 23~24절
단순히 이런 아이들이 자신의 종을 보고 대머리라 놀리니까 곰을 보내서 아이들을 찢어서 죽였다는 것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사실 번역이 모호하게 되어서 그렇지 '꺼져라'는 '올라가 보아라' 정도가 좀 더 정확하다.[85]

허나 모든 반론을 다 받아들이더라도,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곰을 소환해서 42명이나 찢어죽이는 것이 과연 맞냐는 물음은 나올 수 있다.

다만, 신성모독 문제는 기독교에서 중죄취급하는 것 중 하나라는 것을 감안하면,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저게 정의구현일 수가 있다.

우선 엘리야의 승천을 농담거리로 삼은 것도 야훼를 무시한 일이지만 엘리사는 야훼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선지자인데, 그런 엘리사를 모독한 것은 엘리사를 보낸 야훼를 모독한 것이다.[86] 게다가 대머리는 고대사회에서 굉장히 취급이 좋지 않았는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경우 대머리가 되면 신으로부터 저주받았다고 여겨 제사장을 참수할 정도였다. 고대사회에서 머리칼과 수염은 지혜와 권능의 상징이었으므로 대머리라는 이유로 놀렸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진짜 대머리라서 재미로 놀린 것이 아니라, 야훼로부터 받은 엘리사의 직무를 저주하고 부정한 것이다.

즉, 엘리야의 승천이라는 야훼의 기적을 두고 조롱한 것=야훼를 조롱한 것, 야훼가 세운 엘리사를 부정한 것=야훼를 부정한 것이 되므로 성경기준으로는 신벌을 받아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중죄를 지은 것이 맞기는 하다.

17. 장애인 문제

우선 다음 성경 구절을 보자.
야훼께서 그를 꾸짖으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를 만들고 눈을 열어주거나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게 하느냐? 나 야훼가 아니더냐?"
출애굽기 4장 11절
야훼가 병자나 불구자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음 성경 구절을 보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의 후손 대대로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하느님께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소경이든지 절름발이든지 얼굴이 일그러졌든지 사지가 제대로 생기지 않았든지 하여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다리가 부러졌거나 팔이 부러진 사람, 곱추, 난쟁이, 눈에 백태 낀 자, 옴쟁이, 종기가 많이 난 사람, 고자는 성소에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중략)
몸이 성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하느님께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레위기 21장 16~21절
분명 야훼는 자신이 불구자와 병자들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래놓고선 그 불구자와 병자들더러 예배도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신학자들은 이것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위생적인 측면에서 구별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성막과 성전 주변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에), 장애가 전염이 될 리가 없음에도 장애인을 성소로 오지 못하게 하는 구절은 유대인 특유의 선민의식이라 할 수 있다. 번제에 상한 제물을 바치지 말라는 말과 맞추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나, 상한 제물은 보통 순전히 바친 사람 탓이지만 장애를 가진 건 보통 그 사람의 탓이 아니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만약 위생적인 측면에서 구별을 해야 한다면 따로 격리시켜 예배를 수행하거나,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위한 예배당을 하나 만들라고 언약할 수도 있었다. 야훼가 딱히 선하지 않은 신이라면 이해가 되겠으나, 진정 전지전능하시고 전선하신 신이라면 정말로 저의가 의심될 지경인 부분.

이는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다. 고대 사회의 가치관에서 장애는 부정하거나 수치스러운(어딘가 모자라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런 인식이 강하다. 예수는 직접 장애인의 편에 서면서 그들을 돌보거나 치료해주었으며 부정한 것을 정결한 것으로 직접 바꾸기까지 했다. 따라서 장애인은 야훼의 회중에 들 수 없고 부정한 사람이라고 하는 율법 중심의 유대인들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교리상 신약성경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로 따지면 여전히 장애인 및 병자 혐오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긍정하는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일부' 유효한 옹호일 뿐이다. 예수 이후 시대야 예수가 율법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됐다 쳐도, 그러면 예수가 오기 전에 태어났다가 예수가 오기 전에 죽은 장애인과 병자들은 무슨 죄인가?


[1] 특히 현대 세속주의, 자유주의 윤리 [2] 성경의 역사 기록을 무의미한 허구로 여기는 건 아니다. 단지 성경을 역사책처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이것이 성경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3] 죽은 영아가 어떻게 되는지는 기독교 내에서도 논란이 있다. 고성소 문서 참고. [4] 'peccatum': 죄, 흠, 결함. 'originale': 조상의, 태초의, 원초적인. [5] 정교회, 성공회 감리회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이 약한 편이다. 정교회야 지리/문화상의 여건이 있지만, 성공회나 북유럽 루터교 국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극단적인 성향이 화합과 일치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거르는 편이며. 감리회 성공회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으니 비슷한 성향을 공유하는 것이 당연하다. [6] 전도서 10장 13절 인용 [7] 우리는 뭔지도 이해못하고, 뭔지 알아도 그게 왜 잘못인지 모를 거다.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 노비를 부리는 건 나쁘다"고 하면 그 시대 사람들이 보일 반응과 똑같을 거다. [8] 특히 첫 6가지. 개구리들은 양서류라고 한들 여전히 피부를 통한 호흡이 매우 중요한데, (1)물이 오염됨으로서 (2)개구리들이 깨끗한 물을 찾아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탈수로 인해 사망하고, 개구리들이 없어지니 개구리들이 잡아먹던 (3)이나 (4)파리 등이 설치며, 이는 (5)가축과 (6)사람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결과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은 굳이 초자연에 호소하지 않고도 어필이 가능하다. [9] 장자 학살 포함 10가지 재앙. [10] Erasmus, "On the Freedom of the Will" 참조. [11] 당장 그 시조인 장 칼뱅부터가 그렇게 개혁교회 신학을 전개했다. [12] 각본가가 영화를 만들 때 자신도 영화에서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말은 틀릴 가능성이 높은 말이긴 하지만, 뒤에 나올 말을 성립시키기 위해선 필요한 가정이다. [13] 이런 악용이 극단적으로 치닫을 경우 가난은 전생의 업보이니 당연한 것이다같은 소리까지 나온다. [14] 사실 금송아지 사건 이야기는 32장 전체를 아우름은 물론,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도 반복해서 언급되기 때문에 콕 집어서 말하기가 힘들다. [15] 다만 유대인의 전설을 다룬 <미드라쉬>에서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상을 만들면서 시간을 끌었다고 하기는 했다. [16] 실제로 구약에서는 특정 인물을 제외하고 막나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17] 자조적으로 적어놓은 "금수저였기 때문이다"라는 비아냥과 일맥상통한다. [18] 그런데, 레바논 지역의 주류 종교들은 그 옛날의 가나안 다신교, 심지어 그 바알 숭배에서 인신공양 자해만 순화시킨 그런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 계열이다. 기독교 이슬람이건 이런 식으로 가나안을 까내리면서 시작하는데, 정작 오늘날 페니키아의 후손들은 자기네들을 디스하고 자기네들에 대한 야욕/지배욕을 드러내는 종교를 믿고 있는 셈. [19] 가나안은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가는 길에 여러 왕들에게 길을 좀 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왕들이 거절하고 이스라엘민족을 공격한 경우는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에 '길을 빌려달라'는 요청은 '우리가 지나가던 도중에 통수치고 니들 땅 먹어도 되지?' 라고 말하는 거나 별 차이 없었다. 당장 가도멸괵이란 고사성어와 임진왜란의 발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20] 영어 성경 등에서는 대놓고 slave, forced labor 등 노골적으로 강제노역임을 표기한다. 여호수아기의 기브온 사람들처럼 강제노역이 아니라 히브리 공동체와 야훼의 성전에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반노동 처우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 내에서 이런 자비를 베푸는 행동은 야훼의 명령에 반하는 것이며, 또한 우상숭배의 원인이 된다고 끊임없이 지적된다. [21] 이 경우엔 신이 직접 명령한다는 점에서 임팩트가 크다. [22] 다만 이러한 묘사는 야훼 신앙이 후기로 가서 다른 지역의 종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원래 야훼는 유대인들만의 부족신(수호신)이었고, 따라서 유대인 이외의 다른 이방인들에게 잔인하고 배타적으로 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또, 원래 고대의 원시 부족들은 지금 같은 인권 사상이 없었으므로 상대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면 무자비한 학살과 폭력을 태연하게 저질렀다. 오히려 이 부분이 구약성경을 기록하던 유대를 비롯하여 고대 중동의 살벌했던 진짜 모습을 잘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3] 1856~1928 미국 목사, 성향이 복음주의자다. 그의 1907년 저서 <성경의 난제 해석>에 잘 나와 있으며, 아래의 의견도 여기서 발췌한다. [24] 성경은 연좌제를 부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일의 전제에 연좌제를 깔아두는 듯한 구절 역시 상당히 많다. 원죄부터가 연좌제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25] 심지어 야훼보다 격이 훨씬 떨어지는 홍길동조차 율도국의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시킨 명군이 되었다. [26] 추후 다른 예시들이 최대한 작성될 예정이다. [27] 후술할 엘리사의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28] 그러니까, 유대인이 잘못 처신하면 사라진 민족들처럼 야훼의 손에 멸망하리라는 것이다. [29] 게다가 성경 내에서는 역사 기록이라는 설정이기도 하다. [30] 이를테면 화친할 기회를 준다든지, 최대한 살상을 자제한다던지, 항복은 여건이 된다면 최대한 받아줘야 한다든지. [31] 단,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아담이 직접 야훼에게 조른 적은 없었다. [32] 사람들이 간과하는 건데, 이브는 뱀과 약간의 논박을 펼치기라도 했지 아담은 그냥 받아먹었다. [33] 의외로 간단한데, 상반신 근력 때문이다. [34] 전쟁 이후 히브리군이 살려낸 여자와 아이들을 본 모세가 이방민족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더럽혀진다며 직접 학살을 지시했다. [35] 여성할례를 참고하라. [36] 이건 현대 가치관으로 볼 때 뿐 아니라, 당시 여성들 입장에서도 매우 억울할 노릇이다. [37] 즉, 쟁기로 밭을 가는 문명권. [38] 랍비의 주례를 받을 수 없다. 물론 대다수의 국가에서는 헌법이 최고법이니 강제성은 없어서 여성이 안 받을 수도 있고, 남성 쪽에서 안 줘도 이혼할 수 있다. [39] 수렵/채집 사회와 호미로 밭을 가는 문명권의 경우 상당한 여성인권을 자랑했는데, 두 사회 모두 여성의 식량 생산 기여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단, 쟁기로 밭을 가는 문명권이라면 얄짤없었다. 그나마 게르만이나 켈트 문명권은 사정이 괜찮았는데, 이쪽은 여자가 남자와 같이 밭을 갈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40] 'kephale'에 '지도자'의 뜻이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해당 단어가 해당 의미로 초대 교회 시절부터 사용되었는가 등은 아직도 큰 논란에 휩싸여 있기는 하다. [41] 대표적인 것 하나 꼽으라면 그 진위를 의심받지 않는 로마서, 고린토서 등과는 달리 문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42]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기 교부들 중 상당수가 남자였던데다가 고대 그리스식 인문 교육을 받으며 올림포스 12신교 시절 특유의 남존여비적인 사고관을 그대로 담습한 경우가 많았고, 기독교가 교부들의 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안 좋은 영향이 알게 모르게 기독교에 투영된 바가 적지 않아 있다. [43] 이것을 섣불리 매도하기 전에, 하다못해 오늘날에도 남자에게 무거운 것을 들게 하거나, 나방이나 거미 등을 잡게 하거나, (특히 서구권의 경우) 여자들이 클럽에 놀러갈 때 게이 남사친을 로 동원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남자가 식량생산에서도 월등한 우위를 점하는 옛날의 쟁기로 밭을 가는 문명권이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4] 다만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지에서는 이 구절에 따라 여성들이 미사보나 머리수건을 미사 때 쓰기도 한다. 교리적으로 엄격히 정해진 건 아닌데, 많이들 관습적으로 쓴다. [45] 모세, 삼손 등의 전례를 참조. [46]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학에 의하면 머리카락이 정액 배출 및 흡수에 끼치는 영향 때문에 정액을 쏟는 것이 당연한 남자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야 하며, 정액을 받는 것이 당연한 여자는 머리카락을 길게 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장선상으로, 어떻게 보면 특히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문자 그대로의 성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려야 한다. 마침 성기를 노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구약성서에도 그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이게 묘하게 들어맞는다. 사도 바울이 금수저로서 굉장한 고대 그리스식 인문 교육을 받은 데다가, 사도 바울이 고대 그리스식 의학에 정통했던 루가에게 전도한 적이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아귀가 맞는다. 기독교의 뿌리가 유대교이기는 해도 유럽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면서 원조와 어떻게 미묘하게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47] 그리스어의 여자/남자가 아내/남편과 동음이의어라는 것을 이용했다. [48] 물론 스탈린이 착하거나 신김이 깊어서 이런 게 결코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데, 스탈린은 신학교에 다녔다가 사상적 이유로 중퇴한 경력이 있으며, 공산주의는 기성 종교의 한계와 모순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심지어 스탈린 본인도 한 때에는 탄압에 아주 열을 올렸다. 알 거 다 아는 양반이, 하필이면 본인이 독재를 굳히는 타이밍에, 과연 선심을 가지고 러시아 정교회를 부활시켰을까? [49] 다만 위 기사에 나온 목사들의 발언들 중 일부는 여성 혐오보다는 그보다 광의의 의미인 misogyny에 더 부합한다.일단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외모 언급 등등을 혐오로 부르기는 어렵다. 사전적인 의미의 혐오(싫어하고 미워함)와는 거리가 있다.목사들이 특별히 여성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저런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 [50] 사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남존여비 성향이 매우 강했다. 실제로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람의 수를 셀 때에 여자는 넣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여자를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한 셈... [51] 개역한글판: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입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52] 개역한글판 8~9절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가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53] 당시 번역에선 시편을 '성영'으로 표기. [54] 136장이다. [55]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으로 번역했다. [56] 당장 한 사고력 한다는 역대급 석학들조차 양자역학 특유의 비결정론적인 면모를 가지고 엄청난 논쟁을 벌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57] 이 인구조사 또한 어째서 죄인가? 꼬드긴 것은 무엇인가? 따위의 논쟁이 있지만 여기서는 전부 생략한다. [58] 정확히는 적군에게 3달간 쫒긴다고 쓰여있다. [59] 하지만 도덕과 관련해서 무신론자들은 특별히 악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비종교적인 도시들이 종교적인 도시들보다 범죄율이 낮다는 분석도 있다. 당장 ISIL이 차지하고 있는 라카 모술 지상락원인지 생각해 보라(...). [60] 물론 무신론 문서에서도 나와있듯이 이를 종교가 범죄를 조장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61] 영상을 보면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무신론자는 애국자는 커녕 시민도 아니라는 비난을 했다는 것도 알수 있다. 미국의 극단적인 기독교의 시각을 알수 있는 부분. [62] 다만 종전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히틀러의 종교관 단락 참조. [63] 그러나 권력에 빌붙는 종교인이나 정치가들이 신자들에게 부당한 권력에도 복종하라며 로마서 13장을 악용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64] 전근대 시대에는 당장 문맹률부터가 상상을 초월했다. [65] 물론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대부분이 그렇게까지 고상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 자체가 최종적으로는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보니 어떤 젠틀함을 갖춰도 종교인들에게는 무례하게 비춰질 수 밖에 없기 때문. 결국 결론이 나지 못한 채, 혹은 결론이 나더라도안믿을거니까 어느 한 쪽이 전혀 납득하지 못한 채로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종교인과 무신론자는 젠틀하게 논쟁하기 어렵다. 종교인 입장에서 무신론은 "그래, 쟤는 저렇게 생각하나보다."가 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66] 그러나 의외로 해당구절은 모든 무신론자를 까는 내용은 아니고, "신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며 악행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무신론자라 신을 몰라서 악행을 범했다가 아니라 애당초 악행을 하는 악인인데 거기에 더해 신도 무서워하지 않는 무신론적 성격을 띈 것. [67] 아브라함 계열의 유대교 신자면 '어쨌든 의견은 갈릴 지언정 완전 이방인은 아니군' 취급이고, 기타 종교인이면 '음 그런가보지 뭐' 정도지만 '무신론자'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8] 물론 콘스탄틴, 중세 등을 거치며 기득권층으로 변모한 이후라면 이야기가 확 달라진다. [69] 로마서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나와있으며, 폭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며 저 구절에는 지도자에게만 적용한다는 듯이 서술되어있지만 요셉을 감옥에 보내는 원인이 된 보디발의 아내 등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 [70] 즉, 악인인 동시에 성소수자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악인이지, 성적 지향성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다. [71] 여기가 근거다. [72] 가톨릭 내 진보파에서도 세속정부의 동성혼 입법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지라도 동성커플의 혼인성사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73] 첨언하건데, 가톨릭은 인권침해적이다 싶을 정도로 출산장려적인 면이 더러 있다. 자위 금지와 인공 피임과 낙태 금지, 그리고 혼인성사가 가지는 출산의 메시지를 조합해보라. 심지어 이건 어지간한 전 (다만 낙태는 가톨릭뿐 아니라 대개 어느 종교에서나 반대한다.) [74] 예전 번역본들에서는 buggerer나 sodomite라 해서 '항문성교를 하는 남색자'에 초점을 두는 번역이 주를 이루었다. [75] 특히 중동과 캅카스 지역. [76] 비교적 고립된 환경에서의 수렵 및 채집 위주 사회라는 특징 때문인데, 수렵 및 채집 사회에서는 아무리 남성이 근력을 앞세워서 단백질 공급과 전쟁에서 앞섬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시간 때문에 채집까지 도맡을 수는 없다. 따라서 여성은 비교적 적은 근력을 바탕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인 채집을 담당함에도 어지간한 남성 못지않은 발언권을 낼 수 있다. [77] '당장 애 안 낳으면 다 죽게 생겼는데, 높으신 분들의 말이 백번 옳지!' → '아니, 지금 인구 과잉 때문에 온갖 몸살을 앓고 있는데, 높으신 분들은 아직도 출산을 부르짖네? 저거 좀 이상한데? 애 좀 안 낳는다고 그렇게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LGBT들도 분명히 멀쩡한 사람인데, 무언가 좀 이상하잖아?' [78] 그러나 과연 기독교만 동성애를 싫어하는가? 동성애를 정신병이다, 사탄이 들렸다라고 호도하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맞지만, 이성애자가 다수인 사회에서 이성애자가 동성애를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케이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소수의 동성애자들과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정상이고 나머지 대다수는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인가? 등 해당 주장은 여러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79] 동성애자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잠잠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동성애자가 세상에 존재는 할 수 있는데, 그게 내 연인,가족만 아니면 돼." 정도로 생각하는 케이스가 굉장히 많다. 동성애는 종교를 떠나 생리적으로도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이면서도 호모포비아일 수 있는 것이다. [80] 유대교에서의 구약 해석은 율법서를 우선한다. [81] 자세한 내용은 바알 참조. [82] 영문 kjv와 niv에도 각각 money와 property로 기재되어 있다. [83] 이러한 체리피킹 및 의도적인 논점 일탈, 엄연히 실존하는 성경 구절을 무시하는 행위 등은 성경을 옹호하려고 하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선에서 반박할 근거가 생각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자주 저지르는 행위다. 즉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이란 게 있는 한 종교인조차도 도저히 옹호를 못 할 정도로 미친 구절들이 많다는 걸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 [84]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아 נַעַר(루아)는 의미가 넓은 단어로, 유아부터 청소년기 이후까지의 남자 청년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다. [85] "너도 네 스승 엘리야처럼 야훼가 하늘로 올려주는지 보자"라는 급의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준의 스승을 모독하는 것 + 신성모독이였던 것이다. 더 심하게 해석하면 '너도 주님 곁으로 가라' 따위의, 빨리 죽으라는 저주를 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6] 사절에게 욕을 하면 해당 국가나 그 나라 왕에게 욕을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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