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5:08:11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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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장교 시절4. 튀르키예 독립 전쟁5. 엔베르와의 갈등6.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 서구화 개혁7. 튀르키예어 문자 개혁8. 국제 정세 식견9. 가정사1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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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생애에 대한 다룬 문서이다.

2. 유년기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سلانيك / Selânik)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집은 당시 아타튀르크의 부모가 집주인은 아니고, 세관공무원인 알리 르자 에펜디가 이슬람 호자(hoca, '현자')였던 집주인 압둘라 아아와 20년 임차계약으로 세를 내서 살고 있었는데 현재 주소는 아야 디미트리아 동 아포스톨로스 파블로스 거리 17번지에 위치해 있다.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튀르크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으며, 현재에도 이 거리 끝에 튀르키예 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아타튀르크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를 덮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아타튀르크의 호적 또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타튀르크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의 호적에는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로 "중간키, 푸른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이다."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 라고 되어있다.[1] 하지만 아타튀르크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 스스로는 아타튀르크를 낳을 당시 날씨가 무더웠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현재로썬 아타튀르크의 주장인 1881년 5월 19일이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장 한국에서도 중장년층 이상의 경우엔 출생신고를 늦게해서 실제 생일과 호적상 생일이 불일치 하는 경우는 종종 찾아볼수 있다.

아타튀르크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종교적이고 가정적인 전근대적 여성이었지만,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당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아타튀르크는 어릴적부터 지도력있고 똑똑하고 고집센 성격이었다고 한다. 아타튀르크는 회고록에서 셀라니크에 처음으로 가스등이 들어오던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밤나들이를 나가며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고 회고하고있다. 유럽으로 향하는 국제항구이자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서구적인 지역이었던 셀라니크의 풍토 또한 아타튀르크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사실 그는 푸른눈[2], 하얀 피부, 그리스 지역 출생으로 정말 전통적인 동양계 튀르크족의 외모와는 거리가 있고 순혈 튀르크인이 아니라는 혼혈 논란도 있었다. 아타튀르크도 생전에 그 점을 인정했으나 워낙 다인종이 섞인 튀르키예의 특성상 튀르키예인을 "튀르키예어를 쓰고 튀르키예 문화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정의했고 평생 튀르키예를 위해 살았다.

사실 '튀르키예인'의 정의는 아타튀르크의 정의처럼 언어와 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는 지중해 연안에서도 손꼽히는 풍요로운 지방이고 게다가 일찍부터 문명의 기틀을 쌓아올린 그리스 및 서아시아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제국 내에서도 부유한 인구 밀집 지역이었으며,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예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이자 심장부 역할을 담당했던 것. 즉, 현재 튀르키예 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는 튀르크인의 정복 이전부터 이미 세계적인 인구밀집 지역이었으며, 튀르키예인이라는 정체성은 아나톨리아에 선주하던 다수의 그리스인, 아나톨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족과 비교적 소수였던 튀르크인이 융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튀르크인들의 아나톨리아 정복이 있기 전에 먼저 페르시아와 중동의 이슬람 제국 정복이 있었음까지 생각한다면 페르시아계 및 아랍계 혈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단 아나톨리아 정복 시점에서부터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으로서' 튀르크인의 혈통적 정체성은 없다. 애초에 중앙아시아계 유목민들의 경우 혼혈이나 외부 문화의 도입에 대단히 개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하는 것. 따라서 튀르키예 공화국 성립 당시 '튀르키예인'의 정체성을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의 혈통적 순혈성을 기준으로 정의했다면? 21세기 기준으로 해당 조건을 제대로 충족하는 튀르크계 국가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다. 이들 국가의 주류 민족인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들이 원시 튀르크인의 형질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우 각국의 주류 민족이 튀르크계와 페르시아계의 혼혈인 유라시안 민족이며 문화적으로도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주류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들은 튀르키예인들처럼 언어적으로만 오구즈어파에 속하며 혈통적으로는 이란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 튀르키예 공화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성립할 수 없거나, 성립하더라도 순식간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3대 요소 중 하나인 국민이 없어질 것이고, 국민이 없으면 주권과 영토를 영유할 실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순혈 튀르크인'을 논하는 것은 해당 지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나 할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3. 장교 시절

7살때 아버지인 알리 르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라그프 베이(Ragıp Bey)라는 무역상과 재혼했다. 라그프는 무스타파와 누이동생인 마크불레에게 잘 대해줬지만 그는 자신이 일하는 무역업체에서 후계자처럼 따르길 바랐고 군인이 되려던 무스타파와 충돌을 빚었다. 결국 부모에게 아무 말없이 1893년 육군유년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3년 뒤에 육군군사고등학교로 들어가서 공부했고[3]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미 1826년에 구시대의 상징적 군대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상태로,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유럽의 군사제도를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오스만과 친밀하던 독일 육군사령관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Wilhelm Leopold Colmar Freiherr von der Goltz, 1843–1916)에 의해 오스만의 군사제도가 재정비된 상태였고, 아타튀르크는 운 좋게 당대 최고의 군사강국인 독일식의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대 중 한 명이었다. 훗날 아타튀르크가 유럽식 근대화를 강하게 추진한 것은 이 시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타튀르크가 육군 소위로 임관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꽤 늦게 장교로 임관했던 이유는 1902년에 소위로 임관될 것을 마다하고 다시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전문사관학교를 재학하면서 더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임관은 늦었지만 재학생 및 성적 우수 특혜로 곧 중위로 진급했다. 아타튀르크가 공부했던 왕립육군사관학교(Mekteb-i Harbiye-i Şahane)는 현재 무진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컬랙션을 자랑하는 튀르키예 군사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도 보존되어 있다.

파일:Harbiye-Askeri-Müzesi.jpg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의 모습. 맨 앞에 앉은 아타튀르크의 상 옆에 앉아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파일:external/www.veataturk.com/mustafakemal_annesi_kizkardesi(makbule).jpg
아타튀르크의 소위 임관 당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타튀르크의 여동생 마크불레, 어머니 쥐베이데 하늠, 오른쪽이 청년기의 아타튀르크이다.

시리아 주둔 부대로 들어갔던 아타튀르크는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서 보수적인 상관들에게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보수정책 (범이슬람주의 및 전제군주정)에 반대하는 젊은 군인들이 대거 가입했는데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도 여기 가입하여 알게 된다. 1908년에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령인 리비아 주둔 부대로 전속되었고 1910년에 리비아로 쳐들어온 이탈리아 왕국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소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1911년 리비아 투브루크 전투에서 2백 명의 오스만 군을 거느리고 2천 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면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를 넘겨주고 전쟁을 끝내자 아타튀르크는 분노했다. 곧이어 터진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1913년 불가리아 왕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한다.[4] 이후 제2차 발칸전쟁이 벌어지자 볼라이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 불가리아군을 격파한다. 그러나 볼라이르 전투의 패배를 이유로 주류에서 밀려나 버렸고, 아타튀르크는 1914년 불가리아 주둔 주재무관으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에서 지내게 되었다.

리비아 주둔 시절 당시의 일화가 있다. 아타튀르크가 셀라니크 출신의 고향친구들과 함께 시장을 거닐던 중 한 집시 점쟁이가 아타튀르크의 관상을 보더니 "당신은 파디샤가 될 것이다. 그리고 15년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타튀르크는 이 말을 듣고, "그래 15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군요."하면서 웃어 넘기고 고향친구들은 "어디로 모실깝쇼 폐하?"하면서 장난을 쳤다. 대신 공화정의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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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주둔 시절에 현지인 차림을 한 모습 (1911년) 소피아 주재무관 시절에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파티에 나갔을 때 찍은 사진 (1914년)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전하고 아타튀르크도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선다.[5] 대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영국군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우고 군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장군이 되었다.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1차 세계 대전 최악의 작전 중 하나로 꼽히며, 영국군은 대규모의 함대와 병력을 투입하고도 피해가 막심했다.


1차 대전 당시 무스타파 케말의 칼라 복원 영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rkish_trenches_at_Gallipoli.jpg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 (1915년)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늘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준장이 된 그는 에디르네 방어전에서 협상국을 막아내면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캅카스 전역에서 러시아 제국군을 물리치면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겨우 3년만에 쾌속진급으로 36살 나이로 오스만 제국 육군 7 군단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오스만 제국군은 다른 전선, 특히 캅카스 전선에서 계속 밀려났고 결국 1차 대전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4. 튀르키예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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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끝나고, 협상국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협상국은 세브르 조약을 맺어서 수도 코스탄티니예와 그 주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아나톨리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튀르키예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당시 야사로 영국 육군 장교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한 영국 육군 장교들이 한 호텔에서 술을 마시는데, 케말을 보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서 한 잔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케말은 "이곳은 우리 땅이오. 그러니 당신들이 내 테이블로 와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케말이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케말은 되려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했으며 이스메트 파샤 대령[6]도 그를 만나게 되면서 합류한다.[7] 이에 경악한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은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의 힘은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뻤다.

7월 8일 그는 이제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아닌 튀르키예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했고 에르주룸(Erzurum)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와스(Sivas)에서 항전결의를 한다.

1920년 4월 23일(이날은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케말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8]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다. 케말 장군은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이에 시달린 그리스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튀르키예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그의 뜻에 맞춰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 프랑스 같은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튀르키예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Ayıntab)에선 프랑스 육군이 1년이나 압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Şahin Bey, 1877–1920)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보다 12배가 많은 프랑스 육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급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 육군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여길 재공격했고 결국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병력 수도 그렇고 무기와 총알도 부족했다)에서 샤힌 베이와 부하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가 군인이 아닌(젊은 시절 징병되어 사병으로 복무하긴 했다) 민간인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이 동네 사투리로는 안텝이라고 불렸다)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테프시가 된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을루(Yusuf Beyazoğlu, 1880–1956)가 이끄는 민병. 군부대에게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서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탈환하려던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을루가 이끄는 부대에게 역습당해 2천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군 군이 1만 6천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엄청났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는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 1882–1948)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오스만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홀로 남아서 끈질기게 싸우던 게 바로 그리스군이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은 그리스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인다.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강 전투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군을 물리쳤으며 큰 피해를 입은 그리스는 1922년 케말의 대공세로 점령지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협상국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하여 코스탄티니예와 타우르스 산맥 사이의 아시아 튀르키예를 보장할 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당연히 케말은 씹었다.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의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1869–1956)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군 19만 6천 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300여 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군은 1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 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압도적으로 패한다. 이날은 튀르키예에서 '승리의 날(Zafer bayramı)'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9]이다. 이후 국민회의군은 퇴각하는 그리스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한다. 9월 이즈미르에서 거주하던 튀르크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튀르크계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리스군의 학살로 많은 튀르크인들이 학살당하자 케말은 이스메트 파샤와 함께 이를 세계에 알린다.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계들이 보복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되었다. 더불어 케말 장군은 술탄을 추방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일시 휴전되었다.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을 비롯한 다른 협상국도 전쟁을 지겨워하면서 오스만 내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3년 2월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미 그리스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회의군은 계속 그리스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군 거점이던 이즈미르를 탈환하고 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으로 얻은 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923년 7월 24일 마침내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의 승리로 튀르키예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는 대부분 사수해 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ustafa_Kemal_Pasha_Time_magazine_Vol._I_No._4_Mar._24%2C_1923.jpg

1923년 3월 24일에 발간된 타임지에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10]

5. 엔베르와의 갈등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직전, 케말은 동갑내기 장교학교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엔베르는 튀르크인의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야심에 젖어 있었고, 케말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지금은 너무 위험하고 이르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나톨리아에서 다시 힘을 찾으면서 여기서 시작하자고 되려 엔베르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번에는 엔베르가 거부하고 떠난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케말에 의하여 멸망하자, 엔베르는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중앙아시아로 건너가 반러시아 이슬람 운동인 바스마치 운동(Басмачество)에 가담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그곳에 살던 튀르크인들과 갈등 속에 중앙아시아의 적화를 위해 남하해온 붉은 군대에 의해 사살되어 죽는다.

비록 케말도 민족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케말과 엔베르는 방향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케말의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튀르키예를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 만드는 것에서 한 발짝도 어긋난 적이 없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을 포함하는 식의 다양한 문화의 집단을 아우르는 제국은 내재적 동질성을 지닌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상충하는 것이었으므로 튀르키예인들의 국가라는 케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케말의 외교정책은 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하고 2차 세계 대전의 참전도 거부하는 등 튀르키예가 전쟁이나 외부의 간섭으로 국가 형성에 방해받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을 지향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쟁을 야기하고 러시아 등의 반발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수 있는 정책에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지야 괵알프(Ziya Gökalp)[11]가 제시하고 아타튀르크가 수용한 튀르크 민족주의는 "튀르키예 땅에서 튀르키예어를 사용하고, 튀르키예 문화 속에서 생활하며, 본인을 튀르키예인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남녀노소는 피부색, 인종,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튀르크인이다"이다. 독일식 배타적 민족주의사상을 수용한 엔베르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6.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 서구화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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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헌법을 발표하는 케말의 의정연설 (누투크)

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과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 성립된 튀르키예 공화국에서 케말은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12],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년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썼다.[13], 1925년에는 모자 및 복식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인 페스 히잡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가족법을 통과시켜 스위스식 민법을 도용했고, 달력법을 통과시켜 그동안 사용되었던 달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도입했고, 1926년에는 샤리아를 금지했고, 1928년 11월 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 문자를 채택하는 언어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히잡 금지를 두고, 아타튀르크가 "모든 매춘부 반드시 히잡을 써야 한다."라는 법령을 만들어서 일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히잡을 쓰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썰이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참신한 발상은 없었고 단순히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했을 뿐이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살던 B612 소행성을 발견한 튀르키예인 천문학자 이야기는 아타튀르크 개혁 제도를 모델로 쓴 것이다. 튀르키예 전통 복식으로 나와 소행성 발견을 국제 천문학자 회의에 나가 말하던 것을 무시당한 그 학자가 11년 뒤 양복을 강요하는 튀르키예 독재자 때문에 서구풍 양복을 입고 같은 자리에 나와 이야기하자 다들 믿어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린 왕자에서는 옷차림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케말이 서구화 개혁을 밀어붙인 이유 중 하나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그 결과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튀르키예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세속주의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전통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 간에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튀르키예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저서 ''이 이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 학자들도 뒤에서 아타튀르크를 흉보곤 했다. 이런 진영에서 아타튀르크는 그야말로 이슬람을 파괴하고 서구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이고, 튀르키예의 이교도적 문화를 부흥시키려 한 악마 취급을 당한다.

러시아로부터 카르스, 아르다한, 베숨주를 돌려받았고 1930년에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더불어 여군 사관학교를 인정하였고 미군이 선정한 20세기 세계의 명 조종사 100인에서 유일한 여군으로 들어간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 1913년 3월 22일 ~ 2001년 3월 22일) 공군대령이 바로 아타튀르크가 여군사관학교 공군부 수석으로 높게 인정하고 양녀로 받아들였던 인물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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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딱 88년 살았다. 그녀의 이름을 딴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에 있다.

7. 튀르키예어 문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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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튀르키예어 문자를 시연하는 아타튀르크 (1928년)

튀르키예어에 라틴 문자가 도입된 것은 아랍 문자라서 문제이고, 라틴 문자가 좋다는 문제가 아닌,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는 합리적인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의 이란이나 이라크, 리비아,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아랍문자를 썼음에도 문맹을 퇴치한 사례나 글자수가 많은 한자를 쓰고 있음에도 문맹률이 10% 이하인 중국, 대만, 일본, 홍콩의 사례를 볼때 튀르키예어도 아랍문자를 계속써도 문맹퇴치는 되었을것이나, 이 당시에 초등교육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을 정도로 학교시설의 부족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는 아랍문자 대신에 단기간에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라틴 문자를 채택한 것이다.

튀르키예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 문자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튀르키예어에 유입되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공용어인 오스만어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고 표기 문자 역시 아랍 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 문자는 자음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 문자가 적었기 때문에 튀르키예어 표기에는 적절치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튀르키예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15]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튀르키예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자,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언어개혁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 만들고 땡이 아니라, 입말에서도 기존 오스만어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일상적인 단어를 기존 튀르크 계통의 고어와 방언에서 대체하여서 서구식 어휘를 차용해서 새로운 튀르키예어의 기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랍, 페르시아 계통의 외래어를 없애고 튀르키예 고어를 샅샅이 조사해서 복원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한자, 영어 외래어를 없애고 고전에 나오는 향찰, 이두 등의 순우리말을 복원해서 새 단어를 만들어낸 셈.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그리고 케말 자신이 순회학교에 나가서 순회학교 일일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도 보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케말은 알파벳 행진곡이란 노래까지 직접 작사, 작곡을 하고,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그대로 넣으려고 했지만, 불과 하루 만에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별로다(...)"라는 평가를 내려 그대로 폐기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 문자개혁 직전에 튀르키예어 학자, 다른 국가 어학자들[16]이나 정부에서는 정착까지 약 2~3년 걸릴 것이라고 봤고 그때까지는 혼란방지와 튀르키예 국민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튀르키예 새 문자-아랍 문자 병행표기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케말은 "몇 개월 정도 해보고 아니면 말든지"란 태도로 혼용없이 바로 새 문자체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튀르키예 사회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국민들이 "존경하는 가지[17]께서 우리를 위해 문자를 만들고 개혁한다는데 당연히 따라야지"란 생각으로 이 문자를 배우려는 열의가 너무 커서 가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문맹률이 높아서 역설적이게도 새로 배워야 할 사람이 적었다. 그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튀르키예 교육부, 공무원들의 엄청난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왜 하필 라틴 문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제국의 상류사회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던 전통이 있었고, 이스탄불 같은 경우 어딜 가든 상점이든 호텔이든, 관공서든 오늘날 한글 밑에 영어표기를 병기하듯 프랑스어를 병기했다. 당시 상류층들은 튀르키예어를 라틴 문자로 옮겨서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다. 때문에 라틴 문자는 선진적인 유럽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고, 이미 라틴 문자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라틴 문자를 개량해서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도 투라니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당시 해독되어 한창 연구 중이던 돌궐의 문자를 현대 튀르키예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돌궐 문자를 현대 생활에 맞게 사용하려면 타자기 자판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이래저래 비용과 노력이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는 문자를 개량해서 사용하는 것에 비해서는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아랍 문자와 페르시아 문자 이외에 당시 튀르키예인들에게 잘 알려진 문자라고 해봐야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 라틴 문자 정도였는데 수백 년간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인해 튀르키예인들 사이에 반러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국민 감정상 러시아가 쓰고 있는 키릴 문자를 보급할 수는 없었고, 그리스야 뭐 더 말할 것도 없는데, 튀르키예 독립 전쟁 이후로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인들이 쓰는 그리스 문자는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다.[18]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라틴 문자밖에 없었고 라틴 문자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문자이기도 했으니 튀르키예를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케말은 당연히 새로 도입할 문자로 라틴 문자를 선택했다.

8. 국제 정세 식견

국제 정세를 바탕으로 한 식견도 대단해서 추축국 편에 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당시 국제적으로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아돌프 히틀러[19]에 대해서도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했다. 둘 다 한 치의 오류 없는 정확한 평가였고, 특히 무솔리니는 실제로 분노한 국민들의 손에 처형당해 밀라노 시내의 주유소에 문자 그대로 매달리게 되었다. 목은 아니고 발목이란 차이가 있었을 뿐. 아타튀르크가 무솔리니를 별로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저 무솔리니의 대한 평은 패트릭 킨로스판 아타튀르크 전기에서 나오고, 또 앤드루 망고의 전기에서도 무솔리니를 "전장에서 한 번도 승리한 적 없는 주제에 군인인 척 거들먹거린다"고 경멸한 것을 보면 적극적으로 적대하지만 않았을 뿐 상당히 싫어한 듯하다.[20]

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머지않아 제1차 세계 대전급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 전쟁에 미국이 필연적으로 참전하게 되고 미국의 손에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는 과거 동맹이던 튀르키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했고 이에 프란츠 폰 파펜을 비롯한 나치 간부들이 계속 튀르키예를 꼬드겼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가 패전국으로 낙인찍혀 그것이 영토 상실 및 오스만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기에 독일과 엮어서 좋은 꼴 못 본 경험도 있던 튀르키예는 독일에게 립서비스나 날렸고 독일은 1941년에 우호 조약 하나 체결하는 성과 밖에 내지 못했다.[21] 결국 전쟁 말기까지 중립국으로 남아 있다가 전쟁 막판에 미국에 줄을 서서 연합국 쪽에 붙었다. 아타튀르크 사후, 2차 대전 당시에는 튀르키예는 소련을 좀 더 경계하고 있었고,[22] 튀르키예가 한국 전쟁에 파병한 것 역시 당시 튀르키예가 공산주의 및 소련을 적대시했었던 게 이유이기도 했다.

9.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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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 케말과 라티페 우샤키 (1924년경)

케말 아타튀르크는 정치가로서의 카리스마는 물론 해당 문서 내에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선이 굵직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성적인 인상의 미남상이라 남성으로 지닌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했었고, 그에게 목숨을 건 여자가 최소 알려진 것만 4명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직계 자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양자와 양녀를 합해 8명을 들이긴 했지만 친자식이 아니라서인지 그 후손들은 그렇게 심각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고 있다. 아타튀르크의 방계 후손들 또한 말 그대로 방계라서 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편이다.

사실 여자와의 관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닌 게, 공화국 수립 이후 라티페 우샤키(Latife Uşşaki, 1898–1975)라는 여성과 1923년에 결혼한 적이 있다. 허나 자신이 자손을 남기게 될 경우, 이미 튀르키예 국내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대통령을 해먹고 독재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끝에 2년 만에 이혼하였다. 이혼했어도 우샤키는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다면서 27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다시는 재혼하지 않고 50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찾아온 기자가 "당신이 숨어서 사는 이유가 아타튀르크에 대한 가정사를 털어놓을까봐 협박당해서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자 격노하며 "냉큼 나가라! 그분께서는 그런 적도 없었고, 나 스스로가 괜히 나 때문에 그분이 곤란해할까봐 알아서 조용한 곳에서 산 것뿐이다!"라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 외에 케말 아타튀르크를 짝사랑했던 피크리예 하늠(Fikriye hanım)은 의붓아버지의 친척이었는데, 아타튀르크의 일기를 보면 피크리예 하늠은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는지 몰라도, 아타튀르크는 피크리예를 그냥 친한 동생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다. 주로 격무에 지친 아타튀르크와 어울려서 라크 와인을 마시며 말벗이 된 정도. 상기했듯 아타튀르크만 그렇게 생각한 거지 피크리예 쪽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케말의 결혼소식을 들은 이후 정신이상을 일으켜 그의 집에서 자해해서 피 흘리는 것을 경호원들이 발견해서 옮겼을 정도다. 그리고 치료 중 독일에서 사망했다.

애초에 아타튀르크는 '결혼이란 건 하면 하는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인데, 상관할 게 뭐 있나'며 결혼에 관심이 없었기에 아직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결혼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변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우샤키와의 결혼도 공화국 수립 이후 주위에서 하도 닦달하니까 어쩔 수 없이 주위에서 맺어준 여인과 결혼한 것이다.[23] 아타튀르크와 달리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나라를 세운 '창립자'들의 상당수는 괜찮은 업적을 남기고도 세습 독재와 철권 통치를 일삼는 경우가 보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짐바브웨의 '독립 투사 겸 독재 전문가' 로버트 무가베다. 후술하듯 아타튀르크 사후 엄청나게 신성화된 것을 보면 아타튀르크의 이러한 판단은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자기가 죽은 후까지 내다보는 어마무시한 통찰력인 셈이다.

결혼은 안 하려고 한 것 때문에 사실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냐는 악의적인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다.

앤드루 망고의 전기에 의하면 아타튀르크가 개인적으로는 자식을 두고 싶어했다는 말도 있으나[24], 이 또한 어디까지나 설이다. 아타튀르크 개인의 능력이나 권력 정도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고 자식을 두는 것 정도는 본인이 불임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가능했을 테니 아타튀르크가 불임이라는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이러한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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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말년 모습.[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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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돌마바흐체 궁전의 방에서 열리는 추도식.

아타튀르크는 전통술인 라크 담배를 좋아해 대통령 시절 내내 둘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고, 때문에 1937년 경부터 몸에 이상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후에는 상태가 조금 나아졌으나 휴가를 마치자마자 지방 시찰을 다녀온 이후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그래서 병세를 알아볼 겸 이스탄불로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 간경변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아타튀르크는 간경변 치료 및 요양을 위해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집무를 봤는데, 몸을 추스려야 할 시기에 격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결국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다. 사후에는 재산의 극히 일부를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튀르키예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가 되면 5분간 묵념을 한다.[26]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든지 여러 문화유적지에서도 시계는 항상 이 시간에 멈춰져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를 열렬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시계를 이 시간에 맞추어 놓기도 한다고 한다.


[1]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일부 기독교 가문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공서에서 임의로 성 비슷한 분류코드를 부여했었다. [2] 현재 튀르키예인 혈통엔 슬라브인, 튀르크인, 토착 아나톨리아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인종이 섞였지만 유전적으로 열성인 푸른눈을 가졌다는 건 그가 전통적인 튀르키예보다는 서양인에 더 가까운 유전을 가졌다는 뜻이다. [3] 이 곳에서 수학 교사가 무스타파의 가운데 이름이 될 케말(Kemal)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케말'이란 '완벽' 또는 '뛰어남'을 뜻하는 아랍어 '카말(كما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스타파가 동년배 학생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보였기에 이런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4] 제1차 발칸전쟁 당시 벌어진 볼라이르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작전이 제대로 꼬이면서 불가리아 군이 3자리 수가 전사하는 동안 오스만은 1만에 가까운 병력이 갈려나갔다. [5] 정작 엔베르 파샤는 반대파인 케말의 전선부임 요청을 몇 번이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사르카므쉬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자 그제서야 케말을 갈리폴리 주둔군인 19사단에 파견한다. [6] 이스메트 파샤는 튀르키예에서 성씨사용법이 통과되자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그가 분전했던 전장을 흐르는 이뇌뉘강에서 딴 이뇌뉘(İnönü)를 성씨로 삼게 된다. 이뇌뉘는 훗날 튀르키예의 초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케말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7] 이래서인지 삼순시는 아예 도시 상징물이 말을 탄 아타튀르크 모습이며 연고지 축구팀인 삼순스포르 상징도 이걸 따르고 있다. 삼순은 아타튀르크 지지자에겐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8]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 역사 초기에 티무르 제국과 결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첫 번째 수도는 앙카라가 아니라 쇠위트(Söğüt)였다. 또한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 창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도 아니었고, 오스만 제국이 앙카라를 점령한 것은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56년이다. [9] 당연하지만 그리스에선 굴욕적인 날이다. 이 대패로 이 전투를 지휘한 트리쿠피스 중장과 부사령관 키몬 디예니스(Κίμων Διγενής) 소장, 참모장 페트로스 수밀라스(Πέτρος Σουμίλας) 소장 등의 그리스군 장군들은 죄다 군대에서 불명예 퇴역당했다. [10]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을 뽑기 시작한 건 1927년부터로 그 이전에는 매회마다 화제의 인물을 선정했었다. [11] 오스만 제국 후기, 튀르키예 공화국 초기의 사회학자로 본인은 소수민족 자자족 출신이다. [12] 재미있는 것은 현재 이 정당은 케말리즘(아타튀르크주의: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과 사회민주주의를 정강으로 추구하고 있는 정당이라는 점이다. [13] 튀르키예의 여성 투표권, 참정권은 1930년에 허용되는데 이는 당연히 이슬람권에서는 최초고 다른 서방권 국가들과 비교해봐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서있다. [14] 여사는 훗날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10130002091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1-01-30&officeId=00020&pageNo=2&printNo=8421&publishType=00010 [15] 보충설명을 하자면, 아랍어로는 모두 별개의 음가를 가지고 있지만 튀르키예어로는 모두 s의 음을 가지는 ث, س, ص 와 튀르키예어로는 모두 z의 음을 가지는 ذ, ز, ض, ظ 가 있으며 모음표기는 더 열악해서 튀르키예어에 존재하는 8개의 모음 가운데 ا (엘리프)로는 a, e를, ي (예)로는 ı, i 를, 심지어 و (바브)는 자음인 v를 포함해 o, ö, u, ü 다섯 개의 음가를 모두 담당하는 구조다. 튀르키예어의 모음조화 규칙을 알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만 모음부호를 붙이지 않는 단어들, 이를테면 لاله (튤립, lâle), پادشاه ( 파디샤, padişah), دکيز (바다, deniz), صحته (가짜, sahte) 같은 건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찌 읽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위 글자들을 현대 튀르키예문자로 1:1로 전사하면 lalh, padşah, dniz, shth가 된다. [16] 문자개혁에서 자문위원으로 초대된 학자들이다. 아타튀르크는 서구의 학자들을 초청해서 개혁을 자문받았는데 대표적으로 교육 철학으로 유명한 존 듀이가 있다. [17] 신앙의 수호자라는 튀르키예식 칭호. 케말은 튀르키예 독립전쟁과 1차 대전, 특히 갈리폴리 전투의 활약으로 이 칭호를 얻었다. 아타튀르크는 세속주의 개혁으로 이슬람 세력의 비판을 종종 듣지만 그들도 아타튀르크의 독립전쟁은 까지 않는다. 또, 튀르키예의 도시 명인 가지안테프 시의 어원이 된 단어이기도 하다. [18] 그리스-튀르키예 관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심지어 지금도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서로 한일관계 못지 않은 앙숙으로 유명하다. [19] 당시에는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고, 노벨평화상(?) 후보기도 했다! [20] 일각에서는 아타튀르크가 추축국을 비난만 했을 뿐 추축국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당시 튀르키예는 건국된 지 겨우 10년을 조금 넘긴 상태임을 감안하지 않은 비난이다. 신생국의 기틀을 닦느라고 한창일 와중에 추축국과 전쟁까지 치를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비슷하게 건국된 지 20년밖에 안된 유고슬라비아는 섣불리 나치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가,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 세력이 독일 국방군을 쳐부숴서 몰아내기 전까지 나라 전체에 헬게이트가 도래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21] 튀르키예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튀르키예는 1939년 영국, 프랑스와 상호원조조약을 비준했고 이후로도 영국에 참전을 약속했으나 참전을 무기한 연기한다. [22] 프랑스 침공 이후 반영 동맹을 만들려는 독일에게 소련은 동맹 참여 조건 중 튀르키예에서의 소련군 주둔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연히 독일의 입장에서는 영국의 중동 패권과 소련 견제에 가장 중요한 튀르키예에서 소련의 주둔을 찬성할 수 없었다. [23] 이는 다르게 본다면 아타튀르크가 단순히 남들에게만 서구적인 마인드를 강요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그 자신부터 진짜로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4] 아타튀르크가 상술한 것처럼 무려 8명의 아이를 입양한 것도 이러한 설을 진지하게 믿도록 부채질하는 감이 있다. [25] 지도자로서의 풍채와 무게감이 느껴지면서도 오른손에 담배를 쥐고 있거나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등 소탈한 모습 또한 느껴지기 때문에 튀르키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타튀르크의 사진 중 하나이자 튀르키예 리라의 7차 도안 중 10만, 25만, 50만, 100만리라, 500만리라, 1000만리라, 2000만리라권과 새 튀르키예 리라권에서 1,5,10,20리라권에 들어가있다. [26] 심지어 아타튀르크의 유산을 지우려 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조차 이 묵념을 거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