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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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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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 구성 | ||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
1. 7권
1.1.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오해1.2.
제사에 대한 오류1.3.
욕설에 대한 오류1.4. 게임 관련 오류1.5. 신체 접촉 오류1.6.
단일 민족 국가?1.7.
섬나라와 정치에 대한 오류1.8. 부모 자식 오류1.9.
압존법에 대한 예시1.10. 진화론1.11. 일본의 기업
세습1.12.
이직에 대한 오해1.13.
플라자 합의1.14. 자민당에 대한 오류1.15. 메이와쿠 문화에 대한 예시 오류1.16. 화(和) 문화 오류
2. 8권1.16.1. 반론 및 당시 배경
1.17. 기타2.1. 스슌 덴노2.2. 스이코 덴노2.3. 진신의 난2.4. 후지와라 가문2.5. 겐지, 헤이지의 기반2.6. 혈통 오류2.7. 시라카와 상황2.8.
스토쿠 덴노의 출생2.9.
미나모토노 요시쓰네2.10. 정이대장군에 오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2.1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2.12. 조큐의 난 이후 묘사2.13. 여몽 전쟁2.14. 지묘인통, 다이카쿠지통에 대한 설명2.15. 천황가의 막부에 대한 반감?2.16.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외모2.17. 다카우지와 고다이고 덴노 부분2.18.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교토 입성2.19.
아시카가 요시미츠 책봉 사건의
건문제 묘사2.20.
아시카가 요시노리 묘사2.21.
오닌의 난2.22. 센고쿠 다이묘 묘사2.23. 오다 노부나가와 무로마치 막부2.24.
도쿠가와 이에야스2.25. 조총에 대한 인식2.26. 3단 철포 전략2.27.
도요토미 히데요시2.28.
도요토미 히데츠구2.29. 무신파2.30.
이시다 미츠나리의 실각2.31. 세키가하라 전투의 후처리2.32.
오사카 전투2.33. 에도 시대의 덴노에 대한 묘사2.34.
참근교대 관련2.35. 겐로쿠 시대 이후 묘사2.36.
안세이 대옥2.37.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외모2.38. 도사 번 지형 오류2.39. 조슈 번이 군벌의 본거지?2.40.
보신 전쟁2.41.
세이난 전쟁2.42.
하마구치 오사치의 사망2.43.
사이토 마코토2.44.
태평양 전쟁2.45. 기타
수정된 부분은 다음 표시.
21세기판 - (03)
전면 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7권
1.1.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오해
한 사람 앞에 음식상을 하나씩 따로 차리는 것은 일본 특유의 이치닌마에(一人前), 한 사람 몫을 다하는 것을 중시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국에서 한 찌개 냄비에 여러 사람이 숟가락을 담그고 떠먹는 것을 비위생적이라 비판함과 동시에[1] 일본은 한 음식을 여럿이 함께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며 반드시 개인 접시를 놓고 따로 덜어 먹는 위생적인 것으로 묘사한다.그러나 이는 잘못된 부분으로, 후술하겠지만 한국 역시 원래 독상 문화였으나 조선 말기부터 현대까지 여러 가지 시대적, 경제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변한 것이지 한국이 정이 두터워서 한 상을 쓰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한 사전 조사 없이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또한 1986년 방영된 한지붕 세가족 드라마에서도 개인 식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왔듯이 꽤 예전부터 한 냄비에 숟가락질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어 왔다.
한국 전통 반상 또한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차리는 개인상이었으며 김치 등 밑반찬이나 찌개 같은 것까지 전부 개인별로 따로 상을 차렸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6.25 전쟁 등으로 인해 개인별로 상을 챙길 여력이 없어져 어쩔 수 없이 과거에는 마이너했던 겸상이나 두레상으로 밥을 먹게 된 것이 지금까지 굳어진 것이다. 그럼 한국도 과거에는 이치닌마에 정신이 발달했다가 쇠퇴한 것인가? 서로 아무 연관 없는 두 현상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생긴 촌극이다. 역으로 밥과 국, 그리고 기본 3찬은 개인상으로 내는 것이 일반적인 일본이라도 겸상과 두레상 차림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외국인들도 두레상으로 먹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저 때는 급식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계속 도시락을 싸와 비빔밥을 만들어 서로 같이 먹는 것을 추리했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약간 구시대적인 발상과 평가이다.
이는 단순히 문화의 차이고 문화는 낮고 높은 게 아니니까 이런 식의 비난은 좋지 않다. 이원복 교수 본인부터가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서도 문화는 낮고 높은 게 아니라 강조한 게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밥이 찰기 없어서 젓가락을 쓴다 하였는데 일본인들이 먹는 쌀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포니카로 찰기 있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밥이나 요리를 먹을 때 숟가락을 안 쓴다고 하였는데 쓸 때도 있다. 당연히 국이나 오므라이스, 볶음밥 등 일부 밥 요리를 숟가락을 쓴다. 단지 한국과 일본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의 비중과 성격 등에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1.2. 제사에 대한 오류
한국에선 개신교를 믿어도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제사를 철저히 금기시하며, 일부 진보적인 교단이나 가톨릭에서 허용하는 것으로 이마저도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서 할 뿐 소원을 비는 등 미신 행위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저자가 설명한대로 한 번 따른다고 하면 철저하게 지키는 성향이 많은 한국인의 특성상 개신교인들은 장례식장에서도 다들 하는 절은 안 하고 조용히 목례와 기도 정도만 하는데, 이후 업그레이드판에서는 절은 안 한다고 어정쩡하게 수정됐다.1.3. 욕설에 대한 오류
일본에서 가장 심한 욕설은 바카(바보). 칙쇼(짐승)일 정도로 욕설이 약한 나라라고 설명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고 일부 맞긴 하다. 특히,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 즈음 한번 일본 정부 차원에서 욕설을 대대적으로 없애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욕설이 많이 줄어서 현대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한국어보다 욕설이 적다.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도 매우 심한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당장 욕설/일본어 항목만 가 봐도 그 종류가 넘쳐난다. 예시로 언급한 바카(馬鹿)는 한국에서처럼 귀여운 욕설이고[2], 칙쇼(畜生)는 후술하겠지만 번역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일본 현지에서는 꽤 심한 욕이다.[3] 그 외의 욕이라면 쓰레기를 의미하는 '고미(ごみ;塵)', '쿠즈(屑)'나 '카스(滓;カス)'를 내뱉으면, 몇 곱절로 모욕을 느낀다. 장애인을 뜻하는 카타와(片輪)나 정신병자를 뜻하는 키치가이(気違い), '새끼'를 뜻하는 '야로(やろう, 野郎)'라는 욕도 있다.[4] 여기에 강도를 높이고 싶다면 부라쿠민(部落民)이나 백정을 뜻하는 에다(穢多)나 히닌(非人)이라는 말도 있고, 자이니치(在日)까지 가면 핵폭탄급 위력을 낼 수 있다. 여기에 당사자에게 쓰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싸움이 나는 것도 가능하다. 덧붙이자면, 일본어에는 한국어 이상으로 성적인 비속어도 많다. 아나쿄다이(あなきょうだい;穴兄弟), 야리망(やりまん), 아게칭(あげちん) 등등.
다만 일부 의견에 따르면, 일본어에는 씨발이나 fuck에 대응하는 범용성 높고 입에 착착 붙는 욕은 없는 듯하다(...).
또한 칙쇼를 "짐승"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정확히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축생, 즉 개돼지, 좀 더 노골적으로 의역하면 개새끼라는 뜻이다. 이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한국인 여자가 장난으로 남친을 짐승이라 부르는 것에 펄쩍 뛰는 일본인을 그렸는데, 이 장면을 일본어로 제대로 번역하면 일반적인 숲에 사는 동물을 의미하는 짐승이라는 뜻의 게모노(獣), 또는 '짐승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게다모노(けだもの/한자로는 똑같이 獣)로 번역해야 한다. 애초에 한국에서도 비하하는 말을 쓸려면 짐승이란 말은 잘 안쓴다. 그냥 똑같이 개돼지로 비하하지.[5]
그리고 한국과의 비교에서 간과한 게 한 가지 있는데, 한국어는 세계적으로도 비속어나, 축약어, 은어 등을 비롯한 변형어가 많은 편이다. 그 영향으로 최근 신세대들이 만들어내는 말들도 꽤 있다. 외국어의 경우도 얼마든지 그들 사회에서 만들어 쓴다면 많은 비속어나 은어 축약어 만들수 있기는 하나 한국어보단 언어 표현 범위가 넓지는 않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인이라서 자각이 없는 거지 사실 한국어는 비속어나 욕설이 굉장히 잘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6] 그러니까 어떤 언어의 욕설을 한국어랑 비교해서 욕이 없는 건 그냥 당연한 것이며 이것만으로 욕설이 없다고 단정 짓긴 어렵다. 즉, 일본과 한국의 욕설 비교에 대해서는 일본이 특출나게 욕설이 약한 나라라기보다는 한국이 특출나게 욕설이 엄청나게 발달한 나라라고 보는 게 맞다. 정작 우리나라 편에서는 한국의 욕설이 세계 챔피언급이라면서 정상적으로 나온다.
1.4. 게임 관련 오류
일본인들이 플레이스테이션과 같은 비디오 게임을 즐기고 남과 접촉하기 싫어 온라인 게임과 PC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데 한국에 비해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높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당연히 일본인들 역시 한국인들처럼 PC 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을 많이 즐기고 있다.사실 이건 2000년대 초반까지는 팩트였다. 당연히 게임의 종류도 적었고 당시야 딱히 할 만한 게 스타크래프트류 게임이었으니까. 그리고 신체 접촉 자체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치고 봤을 때 온라인 게임을 당연히 일본이 많이 하지 않았으니 거꾸로 말해 한국이 유별나게 온라인 게임을 굉장히 많이 소비하기도 하였으니 아주 틀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에 와서 일본도 20년이 넘도록 각종 발전사를 거치고 인터넷 콘텐츠가 활성화되며 상당히 틀린 말이라고 봐도 좋다. 현재는 일본도 오프라인 게임을 넘어 온라인으로의 참여도 늘어났다. 다만 PC방처럼 아예 게임을 하라고 둔 시설은 한국보다는 적은데 보통 PC 카페라고 부르는 데서 게임을 하기 보다는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최근 일본에도 한국식 PC방이 나오기는 하는 등 아주 완전 집에서 접촉이 싫어 비온라인 게임만 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그리고 그 2000년대 초반에 차이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국민성 때문이 아니다. 앞의 욕설과 비슷한 상황인데, 일본이 특이한 게 아니라 한국이 특이한 것에 가깝다. 대부분 콘솔 및 패키지 게임에서 게임사를 시작한 타국과 다르게,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 전후로 기존 게임사들이 몰락하고 그 뒤에 IT와 PC방의 전국적 도입, 거기에 발맞춘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3대 프랜차이즈(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디아블로)를 통해 첫 단추를 꿰었다. 또한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미비하여 패키지 게임이 불법 복제에 의해 힘을 잃었고 이런 환경 덕에 리니지,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와 같은 MMORPG가 유행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에 유달리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이 빛을 본 것이지, 일본이 특이 케이스인 게 아니다. 물론 한국인이 전투민족이라 게임에 대한 열정이 큰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일본이 남에 대한 간섭을 피하기 때문에 온라인 게임을 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5. 신체 접촉 오류
핵심만 요약하자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신체 접촉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한국인끼리 다 다르고 일본인끼리 다 다른 법이다.[7]한국인은 친구끼리 장난삼아 툭툭 치거나 머리를 쥐어박지만 일본인은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철저하게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고 적혀있다. 당시에는 맞았던 말이라 당시 우리나라는 타국에 비해 친밀한 사람 간의 바디 터치가 문화적으로 많이 허용되는 편이고, 일본이나 서양 등은 반대로 폭력에 민감해 툭툭 치는 것도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실례가 되었다.[8]
그러나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철저하게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는 말은 매우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가키노츠카이 같은 일본 쇼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손으로 남의 뒤통수 후려치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방영된다. AKBINGO에서는 엠씨가 아직 10대인 어린 멤버들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려 맞은 멤버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아예 이런 것을 지칭하는 츳코미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할 정도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중년의 예능 진행자가 저렇게 걸그룹 멤버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리면 시청자 게시판 등에 엄청난 항의가 쏟아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해당 진행자와 제작진, 방송국 측은 큰 구설수에 오르게 되며 이후 대처가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최악의 경우엔 해당 진행자의 방송 커리어는 거의 끝장나며 제작진이 교체되거나 프로그램 자체가 아예 폐지될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몇 개만 뒤져봐도 친한 친구에게 하는 접촉은 수두룩하게 나온다.
그 외에 일본도 접촉에 대한 인식이 지역마다 달라서 모든 일본인들이 저리진 않으며 오사카나 후쿠오카는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 과격하고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데도 있다.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인과 서민층 위주로 발전한 도시기 때문. 네이버 웹툰 세개의 시간으로 유명한 정구미 작가가 그린 '내가 결혼할 때까지'라는 웹툰을 보면 오사카 출신인 작가가 고향에서 하던 대로 남자친구를 툭툭 치다가 싸움이 난 에피소드가 나온다. #
덧붙이자면 아무리 한국인이라도 머리를 쥐어박는 것은 장난이라도 싸움 나기 딱 좋다. 존두 사상이 강하기 때문으로, 친구끼리 장난삼아 친다고 해도 어깨나 등 정도지 머리를 때리는 경우는 거의 못 봤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다. 한국도 남자나 여자끼리 친밀하지 않으면 터치를 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국 또한 친한 친구일 때도 터치를 안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친한 친구에 방점을 두는 게 아니라 그 행동에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친구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한국에도 아무리 친해도 소심하면 단순히 놀고 잘 가라고 인사하고 갈 수 있고, 반대로 일본도 친한 경우에는 가벼운 터치 정도는 허용된다는 거다. 이건 사람 마음가짐의 문제이지 절대로 국가적 특성으로서 엄격하게 지켜야 할 문제는 아니다.
또 이곳에서는 편향성도 있는데 제일 먼저 시대착오적인 것도 들어가 있다. 80~90년대 한국은 약간 버릇없고 막 놀고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었을 듯한데 개인주의라는 것이 미진했고 학생인권조례고 나발이고 없었기에 교사가 학생 맘에 안 들면 패던 시기였으니 어찌 보면 약간 공격적으로 머리를 콩 하고 때리는 게 불가능했을 거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2000년대~2010년대에서는 체벌도 줄고 친구끼리 어렸을 때야 많이 싸우지만 고등학생 이후부터는 친하지 않으면 쓸데없이 머리 콩 절대 안 하며 이성일 경우는 머리 콩은 한국이어도 말이 안 된다.[9] 이는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일본인들과 닮은꼴이 되는데 역으로 일본은 그 당시에는 철저히 친한 친구끼리는 쓸데없는 터치는 자제하는 게 미덕이었을지 몰라도 요즘 약간 천진난만한 10대들은 그 규범을 대다수 깨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 콩을 하기도 하고 몸싸움은 안 하지만 물론 한국 같다까진 아닐지 몰라도 일본이 그렇게 딱딱하고 단편적이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편에서는 친한 친구끼리도 고개를 숙이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고까지 표현했는데 일본인들도 친한 친구끼리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최근 들어서는 일본과 한국인의 터치 영역의 거리감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먼나라 이웃나라의 일본은 없다고[10]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버블 경제 때의 일본과 검정고무신 때의 한국을 단순하게 비교해서 생긴 불상사라고 봐도 될 수준이다. 물론 그 경향성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에서 절대로 타인에게 신체 폭력을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 그런데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것....[11]
이 부분은 일본 편은 물론 한국 편에서도 언급되는 오류인데 일본인들은 신체 접촉을 극도로 꺼려서 악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악수를 청하면 당황하고 서로 목례로만 인사를 한다고 되어있는데 그 역시 사실상 틀린 정보로 일본인들 역시 서양인들처럼 만남에서 악수를 어느 정도는 한다.
이에 대한 가장 큰 반례가 있으니 바로 MM!과 바보걸, 짐승의 길(만화)이다. 물론 애니메이션 표현이긴 하지만 전자의 경우 여자가 무려 남자를 심하게 폭행하는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송출했으며 후자는 아예 남자가 여자한테 저먼 수플렉스도 먹인다. 일본이 진심으로 신체 접촉에 대해 꺼린다면 이런 묘사 자체가 나와서도 안되고 방영될 리도 없다. 일단 서브컬처에서는 신체 접촉을 꺼린다는 표현은 전혀 안 맞고 현실에서도 그다지 안 맞는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19 사태 이후로는 전 세계적으로 신체 접촉을 자제하게 됐다는 걸 생각하면 오로지 과거 버블 경제 시대에서만 맞았던 발언인 셈....
사실 첨언을 하자면 버블 경제 때도 서민층의 신체 접촉은 있었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는 신체 접촉이 한국보다는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건 현대의 한국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신체 접촉하면 고소당할 수 있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경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유럽에 비하면 일본이 신체 접촉을 자제하는 건 사실이기는 하다. 다만 꺼려서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닌 예절에 관련된 것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문화(화 문화)에 영향을 아예 못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으론 미국 편에서는 일본인 부장이 미국 지사에서 파견 가서 일본식대로 부하 직원들과 따뜻한 스킨십을 했다가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같은 먼나라 이웃나라 작품 내에서 서로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오류들 중 하나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일본과 한국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알다시피 한국에 이성과의 신체 접촉은 성추행 방지를 명목으로 굉장히 자제하는 펜스 룰이 적용 중인데 일본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 민폐를 저지르지 말아야겠지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신체 접촉 자제하고 진짜 쇠고랑 찰 수 있어 자제하는 한국의 신체 접촉 금지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이 한국보다 신체 접촉이 자유롭다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연출 가능하다.
다만 동성 간의 신체 접촉은 펜스 룰이 적용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일본이 좀 더 엄격한 편이다. 그래봤자 최근 개인주의와 상호 간 예의가 예전보다 더 올라간 만큼 일본과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건 일본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라 선진국에 주요 특징이라고 보는 게 맞다. 과거 구한말 시대에는 길거리에 인분이 널려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한국도 상당히 선진화 및 개인주의화가 되었다는 것이 맞고 일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늘 똑같은 상황이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곧 한국이 일본보다 신체 접촉을 자제하는 나라가 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신체 접촉 문제는 일본 외에도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다. 괜히 펜스 룰이 나온 게 아니니 말이다. 심지어 그 북한이라는 나라마저도 펜스 룰을 알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현재 일본 외에도 한국,대만이 비슷한데, 대만은 메이와쿠 문화만 없지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과 완전 비슷하다. 다만 대만은 일본과 달리 인사를 하지 않고 악수를 하는 반대로이기에 100% 같지는 않다. [12]
그 외에도 불교권 나라에서[13]는 머리를 만지면 안 되는 문화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깨를 만지는 것도 안 되는 에티켓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꼭 일본이 유별나다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오히려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하는 게 옳지 않았나 싶다.
1.6. 단일 민족 국가?
일본 민족은 2천여 년 동안 타민족과 섞이지 않았으며 일본인으로서의 동질성이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되어 있지만 오류다. 해당 항목을 보아도 알겠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혈통적인 단일 민족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비교적 하나의 민족 국가에 가까운 대한민국도 단일 민족 국가는 아니다.[14]애초에 혈통적인 단일 민족 국가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진짜 작정하고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에 정착해서 극폐쇄주의적으로 살지 않는 이상[15] 피는 섞이기 마련이다.[16] 일본의 경우에도 예로부터 가까이 있던 조선과 중국을 중심으로 교류는 물론 민족의 이동이 있었던 데다 전국 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이민을 갈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일본은 선주민족인 류큐인과 아이누 외에는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온 야요이인과 아이누인과 유사한 파생족인 조몬족과 혼혈인 야마토 민족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래가지고서는 차라리 한국이 더 단일 민족 국가에 가깝다 해야 할 지경.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라는 일본이라는 유의 우익 성향의 몰지각한 발언은 정계나 언론계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견해이다. 앞서 기술한 대로 민족 국가와 관련한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감도 있으며, 소수 민족을 경시하는 태도 및 일본을 단일 민족 국가라 부르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견해도 매우 강하게 존재하는 편이며 실제로 단일 민족 발언에 비판을 받은 유명 인사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보다 동질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는 소수 민족의 존재를 지적하여 '순수'한 의미에서 일본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한다.
한편 인구의 대다수가 야마토 민족인 일본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단일 민족 국가로서 '순수'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단일 민족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 또한 어디까지나 제도나 국가에 대한 언급이라는 면도 있으며, 그 정당성은 논쟁의 여지가있다. 복잡한 피로 섞였다고 했는데 당장 이 말부터가 일본을 두고 한 말이다. 여러 민족들이 단일 민족으로 융화되어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영국과는 전혀 다른 단일 문화를 지닌 섬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며 가로세로 세계사에도 민족은 혈통이 아닌 문화로 결정된다는 말이 나온다. 업그레이드판에서는 단일 민족이란 말이 사라졌다.(18)
한국편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난 것을 보면 당시 민족주의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만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7. 섬나라와 정치에 대한 오류
일본과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며, 섬나라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아직도 군주가 있다는 점을 꼽았지만, 섬나라가 아닌 군주국이나 섬나라인 공화국이 오히려 더 많다.[17] 저자는 비교 대상을 G7 국가로 한정 지어서 그중에는 일본과 영국만 군주국인데 섬나라이기도 하다고 했는데, 섬나라의 특징을 특정 국가들만의 집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더더욱 어폐가 있다. 이 오류는 한국 편에도 존재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국민성을 비교하는 앞부분에 나온 내용.게다가 G7 중 하나인 캐나다는 섬나라가 아니지만 엄연한 입헌 군주제 국가라는 점에서도 오류이다. 사실은 영국 여왕이 캐나다 여왕을 겸하는 것이긴 하지만,[18] 문제는 캐나다의 국가 원수를 수상(총리)으로 묘사해 놓았다는 것이다(...). 신판에선 총독이 추가됐지만 총독도 여왕이 임명하는 것이므로, 캐나다는 입헌 군주제지만 영국의 여왕이 캐나다의 여왕을 겸하므로 논외라는 말을 넣었어야 자연스럽다.
섬나라에서는 역성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서술했지만, 영국 편에서도 나왔듯이 섬나라인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으로 찰스 1세를 사형시키고 올리버 크롬웰이 종신 호국경으로 집권한 사례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크롬웰 사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도로 복위하였기 때문에 약간 애매하다.[19]
다만 영국과 일본에 한정해서 보면 이들이 섬나라였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으로 완전히 정복당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왕가의 혈통이 상당히 길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는 하다. 일본의 경우 2차 대전에서 패하여 미국에 점령당하기 전까지는 타국에 완전히 정복당한 적이 없고[20] 이른바 '만세일계'론은 분명히 허구가 맞지만 만세일계가 아닌 3왕조 교체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507년 즉위한 게이타이 덴노 이래로 천황 왕가의 혈통이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국의 경우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로는 타국에 완전히 점령당하거나 정복당한 적이 없으며 윌리엄 1세부터 현 국왕 찰스 3세까지 모든 영국 국왕들은 혈통으로 이어져 있다.[21][22]
영국의 의회와 일본의 바쿠후(막부)를 예로 이중 권력은 섬나라의 특징이라고 나왔지만 이중 권력은 다른 나라에도 존재했다. 자세한 것은 8권 기타에서 후술.
1.8. 부모 자식 오류
일본에선 자기가 살 고가 물건(특히 자가용)을 100% 자기 돈으로 하고 한국에선 고가 물건 살 때 부모님이 버는 돈에 의존해서 산다고 쓰여 있다. 후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거의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에 제안하면 홍보 자료로 아주 좋겠다고 칭찬 받을 만한 수준의 오류로 일본인들은 청년기부터 아주 굳건하게 자립과 노력을 잘하고 한국인들은 나이가 든 후에도 부모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의존하는 무능한 성향과 국민성을 지닌 것처럼 잘못 표현해 놓았다. 이는 저자의 다른 작품인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에서도 작지 않은 비중으로 나오면서 한국의 젊은이들, 아이들을 깎아내리는 듯한 묘사를 보여준다.물론 국민 정서상 일본에서는 좀 더 자기가 어떻게든 해야 하고, 한국은 좀 더 부모가 도와줄 수 있다는 식으로 차이가 있다는 정서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일본이든 한국이든 단순히 어느 쪽은 100% 독립이고 어느 쪽은 무조건 얹혀살 수만 있다는 얘기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일본에선 귀금속이나 가전제품 같은 자신의 고가 물건을 살 때 자신의 돈을 모아서 사는 경우가 많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돈이 좀 부족하면 부모님이나 지인과 은행이나 카드로 좀 빌리거나 보태며 사는 경우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도 고가 물건을 살 때 부모님에게 100% 물건 자금을 대주라 하면 등골 브레이커 취급 받는다. 오히려 요즘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모은 자금으로 사고, 만약에 조금 부족하면 부모님과 지인 그리고 은행에게 빌려서 보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무엇보다 이 오류의 문제는 위의 이치닌마에 오류처럼 마치 한국인이 한 사람의 몫을 못 하고 정에 기대는 이성적이지 못한 국민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류를 낸 거라면 모를까 일본인은 땀 뻘뻘 흘려 노력하면서 집을 마련하고 4~50대까지 빚에 허덕이는 반면 한국인은 사치품인 자동차를 산다고 실실 웃고 굽실대면서 부모에게 카드를 받은 다음 일본인한테 한 사람 몫도 못 하냐고 경악을 받는 위치에 있도록 그린 것이 문제다. 설령 한국인이 부모에게 좀 더 기대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생필품을 구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손을 빌리는 경우를 고려하지 않고 그린 것은 오류의 문제를 넘어서 형평성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시대착오적인 오류이다. 당시 한국에는 막 신세대가 나오던 때로 자유분방하고 청춘을 희생하면 안 되며 즐겨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X 세대와 이후 세대가 줄기차게 나오던 시대였다. 당연히 기성세대는 1980년대 경제 호황기에 돈을 벌었기에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노력하면 돈이 들어오는데 그 노력도 하지 않고 돈을 축내는 신세대에 대한 태도가 어찌 보면 맘에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IMF 사태도 지난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이때부터 청년 실업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청년 스스로 노력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들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일본 또한 버블 경제 이후 경제 파탄으로 청년들이 살기 다소 힘들어졌다.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경제 호황기 시선으로 한국과 일본을 평가한 것이 아닌지 상당한 의구심이 든다. 심지어 일본 이상으로 자식의 독립 성향이 강한 서양에서조차 경제 위기로 청년 실업이 심각해지면서 부모에게 손을 벌리거나 얹혀사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다. 반대로 한국 역시 외환 위기와 실업난과 학벌주의 등을 겪으면서 일본과 별다를 바가 없어져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마냥 의존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아르바이트와 공부 등을 통해 자립하려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고 2010년대에 들어선 이후로는 청년 창업 역시 크게 논의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둘 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호황기와 경제 위기, 세대 갈등과 변혁 등을 다 겪어서 현시점은 물론 이미 그런 차이가 없게 된 지는 오래인데 일본인들은 굳건하고 한국인들은 나약하다는 편향적 관점이 깔려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오류는 아니지만 대사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일본인은 무조건 돈을 벌고 나서 부터는 이치닌마에랍시고 당연히 줘야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에 비해 한국은 나잇값도 제 몫도 못 하고 돈이나 받는 등골 브레이커를 일종의 문화로 설명하고 있는 게 문제가 있다. 먼저 일단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부모도 또한 자기가 좋아서 애를 낳은 것이므로 아이를 성인까지 양육할 의무가 있다. 이는 지켜야 하며 어겨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녀는 커서 부모에게 돈을 줄 의무는 없다. 요구를 해도 부모한테 돈을 줄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규범으로 그게 정석인 마냥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어디든지 자식을 미성년기에도 성인기에도 버릇없이 키우는 못난 부모들과 반대로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들러붙는 나약한 자녀들, 그리고 그와 상반되게 자식들을 강하고 똑 부러지게 키우려고 하거나 반대로 부모님에게 의존하며 짐이 되어 불효하기 싫어 본인이 애쓰며 노력하는 굳건한 자녀들까지 그런 케이스들은 어디에나 다양하게 비슷한 비율로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둘 다 상술하듯이 호황기에 따른 경제 위기 이후 패턴과 비율 등은 매우 비슷해졌고 또한 그렇게 되고 있다.
또한 그걸 하지 못하는 한국인을 일본인을 배치시키면서 은근히 디스를 하는데 이 또한 사정이 있어 돈을 빌린 경우도 있고 다양한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걸 이치닌마에를 못 한다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 압존법에 대한 예시
일본의 예절상 남에게 자기 상사를 말할 때 "님(존칭)" 자를 안 붙인다면서 '듣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대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낮추는 어법'인 압존법의 예시로 들었다.그러나 일본어에서는 직책명에 사마(様)를 붙이지 않는 것은 원래 직책 뒤에 붙이지 않는 문법적인 문제이며, 압존법과 무관하다.[23]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선생(先生)을 선생님으로 부르지만 일본어로는 센세-라고 하지 센세-사마라고 하지 않는다. 즉 일본인들은 자기 상사의 면전에서도 그냥 부장, 사장이라고 부르지 한국에서 부장님, 사장님 하는 것처럼 部長様나 社長様 라는 말을 쓰지 않으므로 이걸 압존법의 예로 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는 한국어에서는 직책명은 직책 그 자체만을 나타내고 존칭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일본어에서는 직책명 그 자체에 이미 존칭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24][25] 즉, 만약 선생님을 先生様라고 호칭한다면 '선생님님'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매우 어색한 표현이 되어 버린다. 만화에서 올바른 회화로 소개되는 "사장은 없습니다" 같은 경우도 이 사실을 감안하면 "사장님은 없습니다"가 되는 엉터리 압존법이다.[26]
물론 일본에서 압존법이 고착화된 건 사실이고 "계시지 않습니다" 같은 문맥에는 압존법이 적용되므로 아예 틀린 지식은 아니다. 다만 한국 정서에 맞춰 "님" 자까지 압존법으로 지칭하다 보니 문법적인 오류가 생겼다는 것.[27] 그러나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높임법을 쓰면 '지한테나 님이지 나한테도 님이야?'라며 화를 내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이 부분은 오류라기보다는 그냥 만화 특유의 과장법이 지나친 것에 가깝긴 하다.
추가로 일본 비즈니스 대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자기 상사를 성씨(혹은 이름) + 직책이나 직책만으로 호칭하는 것은 크게 실례되는 것이며, 성씨로 호칭해야 한다. 직책을 함께 말해야 할 경우 성씨 + 직책이 아니라 '직책 + の + 성씨'로 호칭한다. 회사 OJT 때, 신입 사원들에게 세뇌하다시피 교육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상사인 야마다 부장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部長(부장님)나 山田部長(야마다 부장님) 등이 아니라 部長の山田(부장인 야마다) 혹은 그냥 山田(야마다)라고만 칭해야 한다.[28] 반대로 상대방에 대해 호칭할 때에는 성씨 + 직책명 혹은 성씨 + 様를 사용함이 옳다.[29] 이 역시 직책명 자체에 이미 존칭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존칭을 사용하고, 자신의 상사는 낮추는 압존법 표현이 되는 것이다.
1.10. 진화론
111페이지에서 진화론은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걸 뜻한다는 서술이 언급됐는데 이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원숭이라 함은 유인원을 제외한 영장류를 통틀어 이르는 개념이며 당연히 유인원을 포함한 모든 영장류의 기원인 원시 영장류까지 포괄하므로 이것만 놓고 보자면 문제가 없지만 이를 인류가 현존하는 원숭이 무리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피상적으로 납득해 버린 이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라는 표현보다는 '원숭이와의 공조상에서 분화되었다'라는 표현이 권장된다.1.11. 일본의 기업 세습
일본 재벌과 대기업은 자식에게 회장직 세습을 하지 않는다고 적혀있으나 의외로 세습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30] 다만 한국 재벌처럼 자식에게 경영 실적을 보고 물려주는 경우로 토요타가 대표적인 예시다. 이는 한국 편에서도 있는 오류다.1.12. 이직에 대한 오해
일본과 독일에선 회사를 내 집처럼 생각하므로 직장을 이직하는 경우가 드물며 이직이 잦은 인사를 못 미덥게 여기는 풍조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에선 연봉이나 조건에 따른 이직이 잦다고 설명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엔 이러한 자발적인 이직이 잦은 인재를 반색하는 풍조가 있다는 뜬소문이 한때 한국에서 만연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이다. 미국에서 이직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고용 안정성이 약해서 노동자들의 운명이 파리 목숨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게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일본에선 자영업이나 개인 사업을 할 경우에는 이직이나 폐업이 드물지만 회사 같은 경우 경영 사항이나 업무 조건을 고려할 때 이직하는 경우도 있다. 이직하는 사람이 취직하는 데 별로 안 좋다 하였는데 계약직에서 경험직으로 옮길 때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대우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미국에선 이직을 자주 한다고 하였는데 높은 물가, 실업률 그리고 이민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조건이 안 좋아도 그곳에서 해고 안 당하려고 눌러 일하는 경우가 있다. 이직할 여유가 없고 이직이 자주 일어나고 일자리 얻기가 쉽다면 미국에서 노동 파업이 왜 일어나겠는가? 그리고 미국에선 해고가 쉬워서 어떻게든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그곳에서 고정되게 업무를 종사하려 하고 있다.[31] 이직은 해고당하고 겨우 일자리를 구할 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일본이 상대적으로 이직을 덜 하는 건 맞으나[32] 미국에서 이직이 자발적으로 자주 이뤄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주 이직을 하는 것이 아닌 자주 이직을 당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1.13. 플라자 합의
경제에 대해 전문성이 없어서 벌어진 일에 가깝다. 일본의 엔고(円高)[33]는 90년대 초부터 미국의 엔화 절상 압력으로 시작되었으며, 엔고로 인해 버블이 무너졌다고 서술했다.서술을 보면 미국을 위시한 주요 경제 대국들이 단체로 일본에 엔화 가치 안 올리면 수출입 막고 압력 넣겠다는 식으로 일본을 몰아넣은 것처럼 그려 놓았는데 실제로는 달러를 약화시킨다는 명목하에 엔화뿐만 아니라 독일 마르크, 파운드 스털링,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 등 주요국의 화폐 가치가 모두 한꺼번에 올라갔다.
그리고 일본의 버블이 엔고로 인해 무너진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금리 인하와 부동산 규제 완화가 버블의 형성과 붕괴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일본의 금리 인하와 규제 완화를 이끌었을 뿐이다. 즉, 인과 관계가 정반대라는 것.
정작 개정판 8권에 추가된 내용을 보면, 플라자 합의 이후 부동산 투기와 주식 투자가 늘어나 거품이 생겼다고 했으나 플라자 합의로 수입품이 싸지고 경기가 좋아졌다고 나온다(?). 해외 쇼핑 활성화는 7권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엔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플라자 합의 문서 참조.
1.14. 자민당에 대한 오류
자민당은 전체 의석의 개헌선(2/3)를 넘어서는 거대 여당이었다고 서술했는데, 일본 정치에서 자민당이 거대 여당인 건 맞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중, 참의원 개헌선을 넘은 적은 일본 정치사를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없다. 개헌선을 넘는 여당이었다면 진작에 개헌해서 평화헌법 9조부터 삭제하고 재무장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던 1986년 중, 참의원 선거에서도 중의원 300석(정수 512석, 개헌선은 341석) 참의원에서 143석(정수 252석, 개헌선은 169석)을 얻어 개헌선에 못 미친다. 다만 연립 정당과 합쳐서 개헌선을 넘은 적은 3차례나 이뤄졌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1.15. 메이와쿠 문화에 대한 예시 오류
일본이 메이와쿠 문화가 심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 집에서 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부모는 드물다. 메이와쿠 문화는 일본에 분명히 존재하는 문화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좀 과하게 서술한 면이 있다..[34]또한 기쿠바리 문화도 다소 과하게 설명했는데, '상대가 목마르다는 걸 빨리 캐치해서 물을 준다'.는 묘사는 옳지만, '물을 마시고 싶은데 메이와쿠가 될 거 같아 말을 못 한다'는 묘사는 이상하다. 일본도 사람이 사는 곳이므로 물이 마시고 싶으면 물을 마시고 싶다고 간곡하게 요청할지언정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참고로 전자에 비하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자식 부모 사이에도 혼네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부 과장되었다. 일례로 자녀가 부모에 집에 와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데 대놓고 돈 달라고 안 하고 부모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마지막에 은근 슬쩍 주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초장부터 돈 얘기하는 가족은 한국에서도 드물며 나중에 넌지시 돈을 준다는 점도 한국과 일본의 비슷한 점인데 다만 이것 또한 일반화를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돈 얘기가 하나도 안 나오지는 않고[35] 나온다고 해서 메이와쿠다라고 규정돼 있지도 않다.
이 경우는 메이와쿠와 가쿠바리 문화를 설명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예시가 좀 과하다는 게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정도로 돌려 말하는 화법은 일본에서도 일반화하긴 어렵고, 오히려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교토 지역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에 가깝다.
또한 한국은 예절을 지키기는 하나 안 지킬 때도 있다고 묘사하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을 비교하더라도 맞지 않다.
더불어 한국을 신문을 넓게 펼처놓고 지하철에서 읽는 예절 없는 국가로 묘사하고 일본은 접어서 민폐를 안 끼치려고 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이 민폐를 많이 끼치는 나라여서가 아니라 일본이 유독 민폐를 적게 끼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외에도 다른 국가들이 2000년대 초반까지 신문을 읽을 때 펼쳐서 읽었지 접어서 읽는다는 생각을 안 하다가 2004년을 기점으로 신문을 접어서 읽자는 공익 광고들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36]
그리고 가장 핵심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오류일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을 에티켓도 없는 나라라고 비하를 한다. 기본적으로 무뚝뚝하고 불친절해서 에티켓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는데 지금 와서 보면 이런 내용은 그냥 없는 게 나았다고 볼 정도로 심각하다. 당시 한국의 배경이 IMF로 인해 기본적으로 기분이 좋을래야 좋을 리가 없던 상황이었을 텐데 친절과 에티켓이 어딨겠는가? 당장 나 혼자 먹기도 바쁠 게 뻔해 보이는데 말이다. 일단 2020년대의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틀린 이야기이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국을 비아냥대는 것 그 이상도 아니다.
그리고 정(情) 문화를 언급하는데 한국에 정 문화는 알다시피 2000년대 초반에도 핵가족화 및 도시화로 인해 어느 정도 사라진 상태이며 2022년 기점으로는 사실상 사장된 문화나 다름없다.
배려와 이해, 질서 의식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면서 하나로 모이기 힘들다는데 대표적인 반례인 금모으기 운동을 두 눈 똑봐로 보았을 텐데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마치 이걸 각각 다른 성격에 정이라는 접착제로 붙여서 일본보다 더욱 강해진다는 말도 하는데 당장 금모으기 운동만 해도 정이라는 것도 존재했지만 서로 배려와 희생을 통해 시민 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결코 정이라는 말로는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알다시피 국까들은 한국을 굉장히 까지만 한국은 세계적으로 엄청 양호한 편의 국민성을 가지고 있으며, 먼나라 이웃나라에 0점짜리 에티켓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들도 외국인에게 친절한 경우가 많으며, 사실 일본의 타국 배타성과 선택적 국민성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라 일본의 국민성이 좋다고 하면 비판이 오고 그렇다고 일본의 국민성이 나쁘다고 하면 일본보다 나은 게 뭔데라는 식으로 까는 뭘 해도 일본에 대해 언급하면 욕먹는 상황이 먼나라 이웃나라에 서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이며 대부분 자국 우선주의이기에 국내 사람과 외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다른데 일본이 유독 심한 건 맞다.[37]
1.16. 화(和) 문화 오류
이 오류를 설명하려면 먼저 기초 설명이 필요하다.화(和) 문화, 즉 섬나라에서는 전쟁을 하면 도망칠 곳이 없기에 싸우면 모두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화(和)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대륙 같은 경우 전쟁이 일어나면 다른 국가에 도움을 청해서 이기면 그걸로 승리인 데다가 땅덩이도 넓어서 한쪽이 망해도 다시 재기할 수 있지만 섬나라의 경우 누구나 힘이 비슷하기에 힘이 강해져서 공격하면 다른 국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고로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멸망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래서 전쟁을 막기 위해 성스러운 통합적 존재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것이 천황이라고 불리는 자라고 설명한다. 또한 천황이라는 존재의 명령으로 싸움을 멈추게 하며 통합적 존재로 정권이 바꿔도 천황의 역할은 변한 적이 없다고 한다. 각종 사건들이 일본에서도 발생했지만 결국 힘센 자를 견제하기 위해 화(和) 문화는 발전해 왔고 덴노의 신하는 권력을 갖고 싶은데 반발할 경우 하극상이 되고 그것은 화(和)를 깨는 것이므로 그걸 막기 위해 덴노의 역할을 신의 역할로 정하고 신하가 대신 실권을 잡는 것으로 변화했다.
다만 첫 번째 문제가 왕의 신하의 하극상을 막기 위해 화(和) 문화가 섬나라 곳곳에 적용되었고 그래서 모든 섬나라는 왕과 내각이 분리돼 었있다는 말이다. 이는 오류이며 모든 섬나라가 화(和) 문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며 섬나라인데도 단독 통치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1천 400년 동안 화(和) 문화를 지켰으므로 현대 일본인도 화(和)를 지킨다고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이 "분수"이다. 분수란 각자가 힘의 균형에 맞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화(和)를 지키는 것으로 실제로 일본이 분수라는 단어를 많이 들을 수 있기는 하나 문제는 다음이다. 일본의 지리적 특성이 과연 분수 문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다줄 수 있다.
두 번째 문제, 과거 일본에 싸우면 다 같이 멸망하는 상황으로 화(和) 문화가 만들어지고 이로 인해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어떻게 메이와쿠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냐는 것이다. 세상은 1차원이 아니기에 공식처럼 딱딱 맞춰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과거 권력자들끼리의 싸움으로부터 망했던 것에 대한 나비 효과가 과연 메이와쿠로까지 커졌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심지어 이는 분수에 맞게 자신의 한계 속에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이치닌마에 문화하고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일본이 개인 식사를 하는 이유가 이치닌마에라는 얘기를 하는데 이 부분은 논의해 볼 만한 부분이다.[38][39]
결정적으로 이 이치닌마에 문화가 1인 밥상 문화 외에도 소식 문화로도 연결되는데, 과식을 하면 음식을 남기고 그러면 이치닌마에를 지키지 않는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40][41] 이 이치닌마에는 노력하지 않으면 이치닌마에가 아니게 되므로 공짜가 없다는 말로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이가 계산을 하는 상공업 국가라는 이미지를 주며 또한 그곳에서 잘 살려면 신용은 생명이므로 신용을 지키기 위해 정직함이 미덕이라는 논리가 생긴다. 이 논리는 가족끼리도 예외가 아니라는 논리가 생기는데 이게 그 성인이 됐을 때에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42]
알다시피 이 서술에 대한 문제는 부모 자식 오류에 설명했으므로 재차 언급하지는 않겠다.[43]
또한 화(和) 문화가 메이와쿠 문화로 파생되었다는 것에 대한 문제는 메이와쿠 문화에 대한 예시 오류에 설명하였다. 굳이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물을 마시고 싶어도 상대방이 눈치를 채서 배려받은 물을 마셔야 한다"는 약간 이상한 문화가 나오는데 이건 일본의 문화가 아니다.[44][45][46]
일본에서 "물을 마시고 싶으니 주세요"라고 하면 그것이 민폐라는 억지 논리도 서술하였다.[47]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기쿠바리 문화가 일본의 완곡어 문화로 파생이 되는데 이게 얼마나 이상하게 비치냐면 에어컨도 대놓고 틀 수 없고 엘니뇨 현상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지구 온난화까지 논하는 일종에 완곡어를 쓴다는 것이다. [48]
결국 이 완곡어 문화는 혼네와 타테마에 문화로까지 파생되는데 이 정도면 화(和) 문화가 참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혼네와 다테마에는 과거 화(和) 문화 때문은 아니더라도 존재하는 문화이므로 알아두면 좋다.[49]
화(和) 문화는 곧 준 게 있으면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은(恩) 문화로 이어져, 선물 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성급한 일반화를 해서 월세를 사는 데도 중개업자, 집주인에게 은(恩) 명목으로 돈을 헌납하는 예시를 보여주는데 이것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르다.
이번에는 이 화(和) 문화가 파생해서 데이네이고(丁寧語, 겸손어) 문화까지 언급한다. 이것 때문에 일본은 악수보단 90도 인사를 한다고 언급하는데 문제는 일본인들도 글로벌화에 휩쓸렸기에 외국인을 만나면 악수를 한다는 것이다.[50]
또한 민주주의보다 화(和) 문화가 조직을 이끌기 좋아서 지켜왔다는데 이는 시대착오적인 오류이다. 작가도 최근 젊은이는 이를 어기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슬프게도 이게 처음 나온 시기가 2003년 즉 20년 전이다. 즉 민주주의와 수평적 문화를 가진 당시 20~30대가 지금은 40~50대 기성세대이다. 그렇다고 당시 2003년 초판 때 일본이 민주주의 지수는 높았다. 사회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회사에도 말이다. 적어도 당시 한국의 답답한 서열 문화와 비교할 바는 결코 아니다.
이 데이네이고 문화로 인해 생긴 압존법에 대한 문제는 압존법에 대한 예시에서 알 수 있다.
그나마 맞기도 한 점은 데이네이고 문화가 서열 문화로 불거지면서 가정, 회사, 사회에서의 서열이 만들어졌는데 그게 남자가 여자보다 위이고 연장자가 연소자 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가부장적인 일본과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가 바로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긴 하다. [51][52]
화(和) 문화로 인해 에티켓 문화도 잘 정착됐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 한국을 무시한 건 메이와쿠 문화에 대한 예시 오류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인이 왜 비디오 게임을 잘하고 PC 게임을 적게 하냐고 하면 오타쿠 문화 때문에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것이고 PC 게임을 안 하는 건 사람을 접촉하는 것은 메이와쿠라는 일종에 접촉 자제 문화라고 서술하였으나, 이 또한 맞지 않다는 것이 게임 관련 오류에 있다.
그리고 이 화(和) 문화는 남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므로 저절로 친절해야 함을 베이스로 깔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일본이 세계 1위이고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뉘앙스로 서술하였다.
참고로 메이와쿠나 친절함 문화는 일본 국내 한정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타 국가에게 큰 민폐를 저지르고도 인지를 못 하는 아이러니한 부분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일본 극우들의 혐한성 발언, 독도 영유권 주장, 후쿠시마산 어류 수출, 와사비 테러 등이 있다. 이 정도면 한국과 일본 둘 다 평균을 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보통 이렇게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심한 경우 국가적으로 좋지가 않다.[53][54]
1.16.1. 반론 및 당시 배경
자세한 내용은 일본인의 국민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55]사실 일본인들은 다소 이중적이라서 딱 이거다라고 명확하게 서술하기 굉장히 힘든 면이 있다. 그나마 쉽게 설명하면 '일본은 있다'와 '일본은 없다'가 있다.
위의 내용은 '일본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이고[56] 이 문서의 내용이 '일본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다.[57]
- 일본은 화(和) 문화가 존재한다.
- 일본은 메이와쿠 문화가 존재한다.
- 일본은 실제로 민폐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기도 하다.
- 일본은 공기를 읽는 문화가 실제로 존재한다.
- 일본은 거절을 못한다.
- 일본은 혼네(본심)과 다테마에(곁치레)가 존재한다.
- 일본은 네마와시 문화가 있다.
- 일본은 은(恩) 문화가 있다.
- 일본은 가부장적이며 계급적인 면모가 보인다.
- 일본은 이치닌마에(일인분) 문화가 있다.
일본을 1차원적으로 규정한다면 위에 사실은 팩트이며 실제로 컨트리볼에서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의 내용은 아주 틀렸다기보다는 압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일본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비판거리를 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2000년이었으며 당시 일본 문화 개방이 된 지 진짜 얼마 안 됐다는 걸 고려하면 일본 문화의 특징을 단순화해 표현해 알릴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17. 기타
- 지리적 특성이 일본 문화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지리적 특성을 유독 심하게 강조해 마치 지리 때문에 일본이 이렇게 됐다는 1차원적인 사고를 한 내용이 많이 있다. 당장 그런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무려 72년 동안 북한이라는 나라 때문에 사실상 섬처럼 사는데 왜 일본처럼 욕을 적게 하거나 에티켓 점수가 높지 않다거나 메이와쿠 문화나 혼네나 타테마에가 생기지 않았는가? 72년이면 이미 한 세대가 노인이 됐을 수준인데 한반도 특성상 싸우면 다 망하는 게 뻔하기에 선물 문화까지는 파생되지 않더라도 메이와쿠 문화는 존재해야 하지 않는가? 다만 이는 지리적 요인이 영향을 끼치려면 수많은 대로 내려와야 하는 것도 있거니와 이런 문화는 지리적 특성보다는 교육, 정치, 문화, 경제적인 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일본이 혼네와 다테마에가 분리된 것은 화(和) 문화도 일종의 영향을 끼쳤겠지만 국가의 개혁으로 인한 선진화 그리고 교육 수준과 무사도 문화, 그리고 계급 사회도 무시를 할 수 없다. 다만 교육 수준과 현대 교육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무라이 시절 무사도 교육으로 본심을 표현하면 그것은 죽음이다라는 교육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은 400년 동안 막부끼리 치고받고 싸우다 보니 애초에 싸울 일 자체를 만들지 말자는 일종의 행동 강령이었다. 이것이 지리적인 특징이라고 하기에는 영국을 비롯한 많은 섬나라에 예외가 존재하고 있다. 즉 축약해서 말하자면 일본이 섬나라여서 이렇게 된 게 틀린 건 아니나, 그것만으로 서술하기에는 다른 섬나라들도 예외가 많고 기본적으로 모두 일본의 선택이었으며 교육이 깊게 작용했다는 게 정론이다. 단순히 섬나라 같은 꼴이 됐거나 섬나라라고 해서 모두 일본과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고 주장하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다행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섬나라라고 다 같은 건 아니며 일본이 유독 특별한 거라고 서술했다. 다만 그 전에 섬나라 = 일본인 것처럼 서술한 것도 사실이다. 당장 섬나라는 왜 화(和)가 중요할까라는 일본에게만 통하는 법칙을 섬나라 전부에게 적용시키려고 한 것도 보인다.
- 아이누가 유럽 계통의 민족이라고 나온다. 정작 그림에는 인도게르만계 뒤에 (?)를 써 놨지만. 업그레이드판에는 유럽 계통으로 추측된 적도 있었다고 나오지만 8권에는 여전히 인도게르만계라고 나온다.(18)[58]
- 122페이지를 보면, "9세기 여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소설인데"라는 대사가 있다. 하지만, 무라사키 시키부는 973~1014 및 1025년경 현존했던 10세기~11세기 작가다.
- 191페이지를 보면 일본은행의 마이너스 채권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1백만 엔 맡기면 보관료 50억 엔을 떼고 돌려준다"고 나와있다. 0.005%니깐 원래 50엔을 떼야 한다. 단순한 오타인 것 같다. 21세기판에는 50엔으로 수정되었다.(03)
- 한국 음식이 맵고 짠 데에 비해 일본 음식이 밍밍하고 간이 싱겁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한국 사람들 입맛에는 일본 요리가 비교적 덜 매운 건 맞지만 음식의 매움을 통한 자극이 적을 뿐이지 감칠맛과 짠맛을 위시한 자극은 한국 요리 이상이다. 와사비부터가 맵고 알싸한 느낌의 소스이며, 라멘에도 간장이나 된장을 왕창 부어 넣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일본에서의 간장과 된장은 한국 것보다 감칠맛과 짠맛이 더해서 음식보다 물을 많이 들이킨다 할 정도. 편차는 있지만 대체적인 한국인 기준으로 대체로 홋카이도 것은 간이 맞고 오사카는 너무 강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리고 일본의 1인당 평균 나트륨 소비량은 한국에 이어 2위였으며 그마저도 압도적인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2010년대 후반부터는 역전되어 일본의 1인당 평균 나트륨 소비량이 한국보다 더 높다. 한마디로 일본 음식 역시 만만치 않게 짰으며 이제는 오히려 일본 음식이 더 짜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 편에서는 "비교적 맵고 뜨거운 음식이 적다"면서 서술을 축소했다. 이는 한국 편에서도 발생한 오류인데 한국 음식 중에서도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들이 많고 서양이나 일본의 요리 중에서도 맵고 자극적인 요리는 널려있다고 지적받은 전례가 있다.
- 일본의 세대 차이 파트에서 1945년생 이후 전후 세대가 "어렸을 적 굶어본 기억은 없다"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일상에서 굶어보지 않은 세대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생부터이다. 일본은 당시 동맹국이던 독일만큼의 실력을 갖추지도 못했었고[59] 전쟁 때 미군과 연합군의 공습과 총력전에서의 소모로 경제적 타격이 엄청나서 1940년대 이후 곧바로 빈곤을 청산할 정도가 되지는 못했다.
-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에 의해 신토가 금지됐다고 하는데 사실 국가신토가 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내에서는 국가신토와 신토를 전혀 분리하지 않고 있는데 그래서 생긴 오류들 중 하나다.
- 소련 이야기 부분에서 봉건제와 노예제가 위치가 바뀌어 있다.
- 일본이 저축만 하고 소비는 별로 하지 않는다? 반은 맞는 애기지만 사람이 생활을 할 때 소비하는 경우와 그리고 취미 생활이나 오락이나 문화생활을 할 때 일본인들도 소비를 많이 한다. 일본도 그 덕분에 여러 대중문화들이 많이 발달해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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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본의 기업들은 사원에게 복리와 서비스를 잘해준다?
일본 기업들은 사원에게 복리와 서비스를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블랙 기업 같은 사원들의 업무를 과중하게 강요하고 갑질을 저지르는 등 부정적인 경향도 있다.
- 일본의 군사력이 세계 3위라고 상술했는데 현시점에서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순위이고, 20세기 후반 일본이 세계 경제 대국 2위로 잘나갔던 시기 때도 과연 미국과 소련에 이어 군사력이 3위까지 오른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의 전성기에 비하면 빛이 많이 바랜 데다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한창일 때 미국과 소련의 압도적인 포스에 밀려 더더욱 과거에 비해 약해 보였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런 것일 뿐 냉전 시기에도 강대국 지위를 유지했으며 핵무장도 50년대와 60년대에 해냈다.[60] 독일[61]과 인도, 파키스탄 역시 영국ㆍ프랑스보다 아래인 느낌이어도 강대국화가 진행된 지 오래여서 21세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이미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는 일본이 한국과 더불어 군사력 순위가 10위권 안에 들어있지만[62] 일본이 3위에 오를만한 군사력을 갖췄다는 말은 정확도가 낮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2020년대 기준으로 군사력 3위는 중국이다. 더군다나 일본의 우경화로 군사력이 팽창화되는 건 2010년대가 시작이었다. 2012년 개정판에서는 3위라는 수치를 빼고 그냥 강력한 군사력이라고만 해놓았지만 그림은 여전히 과거의 오류를 반영해서 미국과 러시아 다음의 군사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 정경관 유착 부분에서는 정경관 유착으로 부정부패가 심하다고 했으면서 정작 규제 부분에서는 또 일본의 정치는 깨끗한 편이라서 후진국처럼 뇌물로 규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서술이 있다.
-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 인사 철학인 연공 서열제와 종신 고용제를 잘못 설명하였는데 마쓰시타는 입사 시기와 연륜과 경험에 따라 승진을 시킨다는 논리는 맞지만 비효율적인 업무 처리와 업무 능력이 없이 승진시킨다는 책의 설명은 잘못되었다. 고노스케는 연공 서열제는 경험과 연륜에 업무 능력도 겸비하여 실적에 따라 승진시킨다는 애기지 무능하다고 무조건 연륜에 따라 승진시킨다는 경영 이론은 아니었다.
그리고 종신 고용제는 위에 내용과 같이 무조건 회사가 직원들에게 종신 고용하는 것은 아니다. 중과실로 인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거나 윤리적인 문제와 업무 능력에 부진에 의하면 사표를 쓰거나 얄짤없이 해고시킨다. 종신 고용이 되려면 직원들의 업무 능력에 따라 적용되는 이론이다.
- 일본은 사회적 성향에서 정(情) 문화가 없어도 원리 원칙이나 예의를 지키지만, 우리나라는 정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부정부패와 비리가 생긴다고 사회 문제와 함께 비하하는데, 일본도 사회적 생활에서 정(情)은 있고 겉으로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다른 나라와 비슷하다. 일본은 엔자이와 메이와쿠 문화의 나쁜 점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당한 무고한 자를 철저히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그들을 동정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나라보다 피해자나 억울한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데 냉정하고 각박한 사회이다. 우리나라도 물론 공과 사를 구분할 때 정 문화 때문에 비리나 부정부패도 있을 수 있지만, 일본의 엔자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냉정한 태도와 같은 것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 주거나, 무고한 자를 동정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어느 정도 도와주는 데 있어 정 문화가 꼭 나쁜 것이라 볼 수 없다.
-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에 현직 총리에 있을때 일본 검찰에 구속되었다고 하는데 다나카는 현직 총리 상태에서 구속되지 않았다. 단지 이 사건의 의혹이 생기자 총리직에서 사임하였고 사건이 커지자 퇴임 후 구속되었다.
2. 8권
2.1. 스슌 덴노
스슌 덴노는 소가노 우마코의 외손자가 아니라 외조카다. 그리고 상당히 젊게 그렸는데, 그가 죽었을 때 당시 나이가 논란이 많아서 출생 연도로 유력하다고 여겨지는 552년으로 잡으면 사망 당시 40세니까 맞지만, 520년, 521년설도 있어 그걸로 치면 70대다. 물론 소가노 우마코의 외조카인 만큼 70대일 가능성은 낮겠지만....2.2. 스이코 덴노
스이코 덴노가 소가노 우마코의 딸로 나오나 스이코 덴노는 소가노 우마코의 여동생이 천황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 즉 조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천황가는 왕족의 직계와 방계로 물려주지 누가 황후라고 하여 외척의 딸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는가? 그리고 스이코 덴노는 쇼토쿠의 이모가 아니라 쇼토쿠 태자의 이복 작은아버지 비다쓰 덴노의 황후이면서 고모와 친조카이다.2.3. 진신의 난
진신의 난이 이 덴지 덴노의 아들들 간의 후계자 싸움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동생인 오야마 황자와 덴지 덴노의 아들인 오토모 황자 간의 싸움이었다. 뒷날 명나라의 정난의 변처럼 숙질간의 왕위 계승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싸움 끝에 숙부 오야마 황자가 이겨서 덴무 덴노로 즉위했다. 오토모 황자는 자결했고 사후에 고분 덴노로 추존되었다.2.4. 후지와라 가문
후지와라가와 결혼한 덴노 목록에 고산조 덴노가 들어가 있다고 묘사하였다가 뒤에 고산조 덴노가 출현할 때는 후지와라 어머니도 후지와라 부인도 없었다고 나온다. 동궁비는 후지와라노 요시노부의 양녀였지만 중궁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자체는 특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앞서 묘사한 내용을 뒤집는 것은 독자에게 혼란을 유발하기 쉽다.또한 나카노오에 오우지가 나카도미노 가마타리에게 후지와라 성을 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용 자체는 사실이 맞지만 그가 후지와라 성을 하사받은 건 그의 사후의 일이다. 시기 역시도 당연히 을사의 변 직후에 하사받은 게 아니라 나카노오에 오우지가 덴지 덴노로 즉위한 후 시기다.
2.5. 겐지, 헤이지의 기반
겐지의 기반은 서일본, 헤이지의 기반은 동일본(간토)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다만 헤이지의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반란의 본거지가 간토였다는 것을 보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온 헤이케, 가와치 겐지로 좁혀보면 틀린 거 맞다.2.6. 혈통 오류
고산조 덴노가 고레이제이 덴노의 손자로 나오고 다이라노 시게모리가 다이라노 다다마사의 조카로 나온다. 고산조 덴노는 고레이제이 덴노의 이복동생이며 시게모리는 다다마사의 종손(조카의 아들)이다. 개정판에서는 고산조 덴노가 이복동생이라고 했지만 시게모리는 업그레이드판에도 조카로 나온다.(18)2.7. 시라카와 상황
시라카와 상황( 조코)이 곧장 인세이를 행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시라카와 상황이 양위 후 곧 실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고, 섭관가 인물들이 요절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을 이용해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분량 문제상 생략한 듯하나 인세이는 덴노의 아버지의 자격으로 상황이 행하기는 했으나 당시는 관례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시라카와가 선례를 만든 것이었다.2.8. 스토쿠 덴노의 출생
스토구 덴노가 시라카와 상황의 사생아라는 출생 비화가 정설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고시라카와 덴노와 스토쿠 상황의 갈등이 스토쿠 상황의 일방적 전횡으로 그려져 있다.그러나 이 비화는 정설로 확인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공식적으로 스토쿠는 도바 덴노와 제1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의 장자이자 고사라카와 덴노의 형이다. 그리고 스토쿠 상황은 오히려 도바 상황에 의해 정치 참여가 봉쇄되어 있었고, 양자의 동생이던 고노에 덴노 사후 도바 상황이 미워하던 스토쿠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의 계승을 막고자 하여 황태자도 아니었던 4남 마사히토를 즉위시킨 것이었다. 이는 마사히토의 아들인 후의 니조 덴노가 총명하다는 평을 받았던 데다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바 상황은 죽기 직전에도 스토쿠 상황의 문안을 거부했으며, 고시라카와 덴노는 즉위 후 스토쿠 덴노를 계속 압박했다. 그리고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이후 니조 덴노의 즉위는 고시라카와 덴노가 인세이를 하고자 하여 양위했다기보다는, 니조 덴노와 그 양모이자 도바 상황 소유의 막대한 장원 상속자였던 도쿠시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조 덴노 치세에 고시라카와는 실권을 잡지 못했으며, 니조 덴노 사후 후일 동서가 되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협조하여(고시라카와는 기요모리의 아내의 여동생이던 겐슌몬인 시게코를 측실로 들였다.) 권력을 장악해 인세이를 행하게 된다. 그리고 고시라카와 덴노의 비호 아래 기요모리는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된다.
2.9.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요시쓰네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4남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9남이다. 그래서 풀 네임은 미나모토노 구(九)로 요시쓰네. 개정판에선 수정.(12)2.10. 정이대장군에 오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실제로는 정동대장군(세이토타이쇼군)으로 정이대장군(세이이타이쇼군)과는 다르다.2.1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은 요리이에, 사네토모, 구교뿐이며 2대 쇼군인 요리이에는 요리토모의 장남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요리토모에겐 일찍 죽은 지즈루마루라는 장남이 있었으며 요리이에는 차남이다. 게다가 형제 조카들보다 오래 살았던 3남 조교가 있으며 요리이에에게도 구교 외에 세 아들과 딸 하나가 더 있었다. 3대로 대가 끊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만 맞고 가계도는 엉망이 되었다.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젊고 물러터져서 위기에 몰린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호조 가문이 실세로 군림하였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그냥 권력 싸움이고 요리이에 역시 일방적으로만 당한 게 아니라 나름 권력을 지키려는 시도를 하긴 했다.
2.12. 조큐의 난 이후 묘사
-
조큐의 난 이후 덴노는 계승 문제마저 허락받아야 했다?
막부가 덴노 계승 문제에 개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고토바 상황이[63] 일으킨 조큐의 난이 덴노의 패배로 끝나자 막부는 고토바 상황과 협조한 준토쿠 덴노를 유배 보내고 상황이던 쓰치미카도 상황도 자진 유배된 후 아예 고토바 덴노의 직계가 덴노가 못 되게 하려고 주쿄 덴노마저 폐위한 뒤 고토바 덴노의 이복형인 고호리카와 덴노를 즉위시켰고 그 이후에도 고토바 덴노 혈통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긴 했지만 이것은 고토바 덴노가 조큐의 난을 일으켰기에 막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64] 실제로 막부는 고토바 덴노 혈통만 강하게 배척했지 그 외엔 누가 되든 별 신경도 안 썼다. 다만 당대 일본 입장에서는 동부 벽촌 출신의 가마쿠라 막부가 덴노 계승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매우 아니꼬웠는지 고사가 덴노 즉위 당시 조정에서는 '이젠 덴노 즉위마저 동이[65]가 결정하니 말세 아니냐.'라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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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사후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자리는 공석이다?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그림을 통해서 그런 것으로 묘사했지만 이후에도 쇼군은 있었다. 다만 4, 5대 쇼군은 후지와라 가문 출신이고 그 이후 멸망할 때까지는 아예 친왕들이 맡았다. 물론 다들 실권 없는 허수아비긴 했다.
2.13. 여몽 전쟁
여몽 연합군을 막아낸 호조 가문은 권위가 더욱 세지고 막부의 권위도 든든해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실제로도 천황 가문이라든가 일본인 차원에서의 긍지가 올라갔고, ' 가미카제'(神風)로 잘 알려진 일본의 신국(神國) 의식은 강화되었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단일체로서의 일본의 정체성은 강화되었다.그러나 '호조 가문'과 ' 가마쿠라 막부' 쪽의 권위에 있어서는 급격히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승전(?)을 거두고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보상해야 할 토지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적국 공격이 아닌 국토 방어라는 전쟁의 성격상 전리품이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실추된 막부의 권위는 가뜩이나 귀족들의 토지 겸병과 경제난을 겪던 무사들의 불만을 급격히 증폭시켜 결국 막부 몰락에 직접적인 단초를 가져왔다. 다만 2차 침공 직후로 한정 짓는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호조가의 멸망은 고케닌 체제를 미우치비토 체제로 원활하게 바꾸지 못함과 고다이고 천황이 직접 반기를 들면서 정통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2.14. 지묘인통, 다이카쿠지통에 대한 설명
지묘인통을 조우고파, 다이카쿠지통을 덴노파라 설명한 것도 잘못되었지만 두 계통의 시조인 고후카쿠사 덴노와 가메야마 덴노가 유배되었다는 것도 잘못되었다. 두 천황 모두 천황 - 상황 - 출가(법황) 루트를 밟았고 특히 고후카쿠사 덴노가 출가한 절의 이름이 지묘인이라서 유배지 이름보다는 두 덴노가 출가한 절 이름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2.15. 천황가의 막부에 대한 반감?
막부와는 달리 천황가는 더 무기력해지고 두 패로 갈라져 서로 막부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는 설명 마지막에 지묘인통, 다이카쿠지통 모두 막부 캐릭터를 붙들고 자기편으로 삼으려고 하자 다음 컷에서 "거 싸우지들 말고 돌아가면서 덴노 노릇 하면 될 거 아뇨? 로테이션이라는 말도 몰라?"라고 말하는데 이에 둘 다 덴노가 뭔 줄반장이냐느니 역시 막부는 건방진 역적 놈이라고 이를 간다.그러나 양쪽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66] 어쨌거나 진짜로 고다이고 덴노 전까지는 로테이션으로 10여 년 주기로 돌아가며 맡았다.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덴노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후 지묘인통의 황위 계승권을 박탈시켰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두 계통이 교대로 계승하는 동안 정작 덴노가와 싯켄가의 갈등보다도 덴노가 내의 두 혈통 간의 대립이 더 심해서 가메야마 덴노 때 막부에 의해서 두 계통이 교대로 계승한다는 룰이 세워졌는데 불과 다음 대인 후시미 덴노는 그런 거 무시하고 자기 장남에게 양위하려다 암살까지 당할 뻔했고, 그러고도 기어이 물려주는 바람에 다이카쿠지통에서 반발하는 바람에 막부에서 다음 덴노는 다이카쿠지통에서 세워주기로 해서 봉합되었다. 로테이션 때문에 막부를 증오하는 것치고 두 계통은 그다지 사이도 좋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를 토벌하려 할 때도 지묘인통은 협조 안 했고 오히려 유배된 고다이고 덴노 대신에 덴노 자리를 차지했다.
2.16.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외모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초상으로 알려졌던 이 초상화를 바탕으로 본작의 다카우지 또한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2.17. 다카우지와 고다이고 덴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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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덴노는 율령 국가 재건을 목표로 했다?
물론 말로는 그랬을 수 있지만 실상은 영원토록 자기 후손으로만 황통을 이어나가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막부에 불만을 품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묘인통도 다이카쿠지통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다만 겐무 신정 때 율령 국가 재건에 힘쓴 건 사실이다. 그래도 속셈을 이루기 위해서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 모두 계승권을 박탈하긴 했지만.... 그리고 율령 국가 재건을 모토로 한 것치고는 고다이고 덴노도 법령의 집행에 모순을 두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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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유배된 고다이고 덴노?
실상은 오키섬으로 한 번 유배된 게 전부다. 그는 3차례 시도하고 2차례 거병했는데 첫 번째 시도는 사전에 들통나서 망했고[67] 첫 번째 거병은 진압되어 폐위+유배 크리를 맞았으며 세 번째 시도이자 마지막 거병 때에야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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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우지와 고다이고 덴노의 만남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의 유배지로 찾아온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고다이고 덴노가 먼저 유배지에서 탈출해 거병하고 막부에서 다카우지를 보내 진압하게 했으나 막부에 쌓인 불만도 있었기에[68] 냉큼 고다이고 덴노에게 붙어버렸다. 즉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에게 딜을 건 게 아니라 고다이고 덴노가 다카우지에게 딜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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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우지의 개명
다카우지가 빅 딜을 제안하자 고다이고 덴노가 감동해서 즉석으로 해준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겐무 신정 무렵에서야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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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우지의 "우리 선조가 세운 바쿠후를 왜 내 손으로 없앤다요?" 대사
일단 다카우지가 겐지 혈통이고 미나모토모 요리토모와 꽤 가까운 일족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혈연상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선조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요리토모의 증조 대인 요시이에 대까지 올라가야 공통 조상이 나온다. 즉 아시카가가 요리토모를 직접적으로 선조라고 하기엔 애매하게 먼 관계다.[69]
2.18.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교토 입성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의 호조 잔당들을 토벌하고 바로 교토로 회군하여 덴노군을 공격, 손쉽게 이를 격파하여 교토에 입성했다고 되어 있다. 사실은 가마쿠라의 호조 잔당을 격파한 후 가마쿠라에 눌러앉아서 권력을 행사하다가 덴노군이 다카우지를 공격하자 군사를 일으켰다. 교토에 입성하긴 했지만 덴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70] 다카우지는 교토를 일시 점령했지만 곧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교토를 포기하고 규슈까지 도망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내분으로 또다시 교토를 상실하고 고곤 덴노, 고묘 덴노, 스코 덴노는 포로로 잡혀 남조로 끌려가기도 했다. 일단 적어도 다카우지 생전에는 북조가 남조를 앞지르지 못한 채 지리한 공방전만을 일삼았고[71] 다카우지 이후에야 북조가 남조를 앞지른다.2.19. 아시카가 요시미츠 책봉 사건의 건문제 묘사
정확히는 명나라 건문제를 잘못 묘사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일본국왕 책봉을 받을 때 건문제를 희끗희끗한 고령의 노인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건문제는 1377년에 태어났고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일본국왕을 책봉한 시기는 1401년으로 아직 서른이 되기 전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 건문제라는 호칭이 직접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작가가 그냥 단순히 '명나라 황제'의 이미지만 생각해서 별 생각 없이 그린 듯 하다.2.20. 아시카가 요시노리 묘사
요시노리가 투표로 옹립되었고 이 때문에 권위가 약했으며 이를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정도로 묘사하는데 사실관계와 조금은 다르다. 우선 요시노리는 다이묘들 간의 제비뽑기로 선출되었지만 그렇다고 권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고 그리고 요시노리가 무조건 폭력으로 찍어 누르기만 한 건 아니다. 폭력을 많이 쓴 건 사실이나 덴노 계승 개입, 감합 무역 재개, 간레이 권한 제약 등 다른 방법도 많이 썼으며 특히 군재 면에서 능력이 있어서 군제 개혁을 단행해 군사력을 키웠으며 막부의 적들을 상대로도 잘 싸워서 사사건건 무로마치 막부와 대립하던 가마쿠라 쿠보를 자기 대에 멸망시켰고 심복인 오우치 모치요가 야마나 가문과 손잡고 시부카와씨, 쇼니씨, 오토모씨 등을 격파하자 그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해 규슈를 막부 통제하에 두려고 하였다.다만 그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묘사는 꽤 사실적인데 만화에서 사용한 '개 같은 죽음'은 과장이 아니라 당대에도 그런 표현이 있었다.
2.21. 오닌의 난
오닌의 난이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동생에게 한 약속을 씹고 후계 자리를 아들한테 넘겨줘서 발생한 사건으로 묘사했으나, 실제로는 요시마사가 동생과 아들 사이에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다이묘들끼리 편을 가르고 일이 커지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또한 쇼군 가문의 계승 문제뿐 아니라 다이묘 가문들의 계승 문제까지 달려있던 사건이었다.또한 요시미가 쇼군 후계자를 지명받고 좋아하며 요시마사가 약속을 취소하자 불만을 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72] 이 역시 오류, 요시미는 처음에는 만일 요시마사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후계 문제가 꼬일 게 분명하다고 여겨 거절했지만 요시마사가 아들이 태어나도 후계자 자리를 무르지 않겠다고 하고서야 받아들였다. 게다가 요시미에게 지명한 것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들이 안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지명했다는 뉘앙스지만 실제로는 요시마사가 아들이 없어 요시미에게 물려주겠다고 한 건 맞지만 그보단 요시마사 본인이 정무는 관심 없고 빨리 쇼군 자리를 누구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들이 안 태어나 요시미에게 약속한 거다. 혈통에 집착했다기보다는 그냥 개인적으로 쇼군 자리를 빨리 때려치우고 싶은데 아들이 안 태어나니 대타로 동생에게 떠넘겨 버리고 싶어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닌의 난의 해설 글귀에 '동군 24국 16만 명, 서군 16국 11만 명'이라고 설명되어 독자들이 다른 나라에 국가와 연합하여 전쟁을 치렀나 하고 오닌에 난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는데, 그 '국(國)'은 일본어로 '쿠니(国)'라는 옛 일본의 행정 명칭으로 동군의 예로 들면 24개의 쿠니의 슈고 다이묘, 즉 24개 지방의 지방 영주들이 참전했고 16만 명이 총참전하여 연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2.22. 센고쿠 다이묘 묘사
센고쿠 다이묘를 두고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지 평화와 현상 유지이며 권력 기반이 오직 자신의 지역이며 다른 지방, 전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철저한 지역 이기주의의 현지의 영웅이고 지역적, 보수적, 현상 유지에 급급한 평화 제일주의의 지방 유력자라고 묘사한다.그러나 몇몇 부분에서는 사실과 다르다. 이 부분만 빼고는 센고쿠 시대가 먹고 먹히는 시대라고 강조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포르투갈과 교역을 한 것도 조총이 들어온 것도 다이묘들끼리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오히려 다이묘들은 서로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바꿀 것은 바꿔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보수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모리 모토나리처럼 보수적이고 보신주의적인 다이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73][74]
다이묘들이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다는 것도 다르다. 열심히 자기 영역을 발전시켜 힘 기르면 천하를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건 당연하고 실제로도 오다 노부나가에게도 같은 시기에 세력을 크게 불린 다케다 신겐 같은 라이벌도 존재했다. 심지어 신겐은 라이벌 정도를 넘어 그 노부나가를 크게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신겐이 병사하지만 않았다면 노부나가를 교토에서 내몰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외에 센고쿠 다이묘를 슈고 다이묘와 명백히 다르다고 말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로서 상당수의 센고쿠 다이묘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센고쿠 다이묘로 올라선 사례지만 앞서 말한 신겐의 다케다 가문(가이국), 다테 마사무네의 다테 가문(무쓰국), 시마즈 가문(사쓰마국) 등 슈고 다이묘 출신에서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로 변모한 사례도 존재한다.
2.23. 오다 노부나가와 무로마치 막부
오다가 막부의 팻말을 걷어차며 아직도 이딴 게 남아있었냐고 심드렁하게 말했는데, 매우 힘이 약해졌어도 노부나가 포위망을 주도할 정도로 영향력이 아예 없진 않았다. 외려 노부나가는 이 포위망 때문에 큰 위기를 맞았고 그의 동맹 겸 꼬붕이던 이에야스는 혈기만 믿고 포위망 일원인 다케다 신겐에게 덤볐다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대패하고 바지에 똥을 싸며 도망치는 굴욕을 당했다.또한 쇼군을 쫓아내며 쇼군은 없다고 말해 쇼군을 쇼군직에서 쫓아낸 것으로 보이기 쉬운데, 그래도 교토에서 쫓겨나고도 15년간 직위를 유지했다. 그래서 교토 추방 후 직위를 완전 반납하기까지 시기를 도모 막부라고 하기도 한다.
2.24.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를 느긋하고 성질 급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의외로 성급한 면도 있었다. 젊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도 불리한 상황에서 신겐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던 적도 있고[75]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 동군이 불리했을 때 시동이 등에 달고 있던 깃발의 깃대를 베어버린 적도 있었으며,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말을 타고 지휘할 때에도 처음에는 지휘채로 지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맨손으로 말안장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쳐 가며 지휘했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 꽤 다혈질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분은 먼나라 이웃나라만의 오류는 아니다. 도서에도 언급된 새 이야기를 비롯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처럼 성질이 급하지 않고 느긋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그리고 도쿠가와가 아들인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2년만 하고 자리를 물려주어 아들인 히데타다 위에 군림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데 이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쿠가와는 쇼군으로 취임했을 때 60이 넘은 고령이고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에다가 후계 구도가 불완전해지면 다른 쪽이 반란을 일어날까 봐 막부의 안정과 자신의 아들의 안전을 챙겨주기 위한 것도 있다. 히데요시도 60에 가까운 나이에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이에 간바쿠자리를 조카인 히데츠쿠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상왕격인 태합 자리에 오른 경우도 있지만, 후계 구도를 망쳐놓아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넘겨준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잘못된 후계 구도를 반면교사를 삼아서 일찍 양위를 한 것과 다름없다.
2.25. 조총에 대한 인식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꿰뚫어 철포를 도입했다고 쓰여 있다. 조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철포를 처음 도입한 건 타네가시마이다. 당장 일본식 화승총을 타네가시마 총이라 부른다는 걸 생각해보자.최초로 사용한 것은 키모츠키 가문이고, 1549년 시마즈 가문에서 키모츠키 가문과의 전투 이후 시마즈 가문에서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이 그 중요성을 처음 꿰뚫은 것이며 오히려 당시 조총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다이묘들을 찾기 힘들 정도다. 다만 대대적인 생산공방을 구축할 정도로 돈이 있던 다이묘들은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이이의 미요시 나가요시, 시마즈 타카히사, 오토모 소린, 모가미 요시아키 등등 정도. 다케다 신겐과 다케다 가츠요리도 철포의 중요성은 알았으며 어떻게든 철포의 숫자를 늘려야만 한다. 라는 기록도 남아있으나 마련할 돈이 없었기에 가신들에게 알아서 조달할 것을 맡겼고 그 결과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철포를 200정 정도 밖에는 준비하지 못하였다.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할수있다.
2.26. 3단 철포 전략
오다 노부나가가 3단 철포 전략으로 적을 무찔렀다고 쓰여 있으나 이는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현재 정설이다. 오다 노부나가 항목 참조. 사실 이 오해는 일본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오해이다.2.27.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즉시 출동해 아케치 미츠히데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정확히는 히데요시가 즉시 출동한 건 사실이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는 패전 후 도주 중 농민에게 살해당했다. 전국 시대의 농민들은 땅만 파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농사도 지으면서 다이묘가 소집령을 내리면 즉시 응하여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예비병 비슷한 사람들이었다.[76] 또 농민들은 이 점을 이용해 패잔병들을 습격하여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낙오무사사냥(落武者狩り)' 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이묘들도 적의 수급을 가져오면 상을 주는 방식 등으로 이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주군을 배신한 배신자였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농민에게 살해당한 건 별로 이상한 건 아니다. 개정판에서도 수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에야스와의 대화 장면에서도 틀린 장면이 있다.
-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나랑 싸울래 강화할래" 말투로 나오긴 했으나, 실제로는 한번 붙은 적이 있었다. 이 땐 이에야스가 이겼지만 이에야스가 후원자로 내세웠던 오다 노부카츠가 독단으로 히데요시와 강화하는 바람에[77] 싸울 명분이 없어져 강화한 것에 가깝다.
- 히데요시가 에도로 가라고 할 때 이에야스가 "가마쿠라로 가면 안되겠냐"고 반문한 장면도 오류. 당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간토 등 6개국으로 가증 전봉시킨거였지 이에야스의 본거지까지 직접 결정한 건 아니었다. 물론 당시 가마쿠라는 오다와라와 함께 이에야스의 본거지 후보에 있었지만 그 당시 가마쿠라는 전란으로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지역[78]이라 나가리. 결론은 그냥 이에야스가 스스로 에도를 본거지로 택한 것이다.[79][80]
2.28. 도요토미 히데츠구
히데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으로 나오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은 도요토미 히데나가이다. 히데츠구는 조카 겸 양자. 거기다가 해당 페이지에서 히데츠구를 히데나가로 바꿔도 오류다. 히데나가는 임진왜란 발발 1년전에 이미 병으로 숨진 상태였다. 21세기판에선 수정되었다.(03)참고로 히데요시는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겠다며 히데츠구를 죽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휘하 가신들까지 히데요시 사후 다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손자 도요토미 쿠니미츠까지 처형했을 당시 백성들이 인과응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2.29. 무신파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칠본창의 무장들을 대표로 하는 무신파는 반 도요토미 파벌이었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 출신이었으며, 그를 포함한 많은 무신파 일원들은 문신파와의 대립과는 별개로 여전히 도요토미 가에 우호적이었다[81]. 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는 동군의 편을 들었고 서군의 편을 들었던 라이벌 격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많이 흡수했다. 오히려 이들은 같은 도요토미 파인 이시다 미쓰나리를 더 싫어했다. 그래서 도요토미 파벌 내에 여러 파벌이 있고 무신파는 그들 중에서 '반 미쓰나리파' 라고 보는게 옳다.2.30. 이시다 미츠나리의 실각
미츠나리가 무신파에게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났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가토 기요마사 등이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위기를 느껴 도쿠가와에게 도망친 것이며, 도쿠가와는 그를 보호해주고 무신파와 화해시켰고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해 줬다.[82] 물론 이것은 자신의 인망 쌓기와 도요토미파의 분열을 위해 그렇게 한 것. 그리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화해하는 대신 오봉행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31. 세키가하라 전투의 후처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파인 자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다이묘 자리를 박탈했다고 되어 있다.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된 인물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 이 3명 뿐이었고, 그 외에 자결한 인물로 구키 요시타카, 나츠카 마사이에, 오노기 시게츠구 등이 있다. 실제로 영지삭감으로 끝난 것은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타케 요시노부, 모리 데루모토 3명에 불과하고 영지보존을 받은 것은 가독승계를 조건으로 한 시마즈 요시히로, 조선과의 화해를 조건으로 한 소 요시토시, 마사무네의 중개[83]로 개역을 면한 소마 요시타네 정도에 불과하다. 우키타 히데이에, 오노데라 요시미치, 쵸소카베 모리치카, 사나다 마사유키,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은 아예 영지가 날아갔다. (더불어 이부분은 초판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앞뒤가 안맞다는 말.) 후일 메이지 이신을 주도한 이들이 바로 이 도자마 다이묘 및 그 가신들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수의 가신 및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후 이들 낭인과 그 자손들이 시마바라의 난에 가담하게 된다.[84]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다.
2.32. 오사카 전투
1614년, 오사카성 공격이 시작되었어. 그러나 예상 밖으로 단단한 수비력은 한 해 가까이 이듬해 4월이 지나도록 무너질 줄 몰랐지.
라는 대목이 있다. 한 해 가까이란 말이 나왔으니 적어도 봄이나 초여름 쯤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말. 그리고 이듬해까지 4월까지 공선전을 하다 바깥 해자만 메우는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밤 사이에 재빨리 안팎의 호수를 모두 메워버렸어 이제 오사카성 공격을 가로막는 호수가 사라져 버리고 오사카성은 간단히 함락되었지.
실제론 1614년 음력 11월(즉 가을~겨울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음력 12월에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인 1615년 음력 5월에 전투가 재개해 결국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오사카 전투에 대해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는 상식 이하고, 성의 해자라고 그려놓은 그림은
일본의 성에 대한 기본 지식도 1%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2.33. 에도 시대의 덴노에 대한 묘사
작품에서는 에도 시대의 덴노는 완전히 병풍에 무시당하는 신세였다고 묘사한다.[85] 이건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만약에 에도 시대에 아이들이 지나가는 덴노한테 돌을 던지면서 무시했다? 그러면 그 애들의 부모들의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에도 막부 시절에는 여전히 실권은 없었지만 쇼군직을 맡은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여러 가문들과 사돈을 맺고 영지를 받기도 하는 등 실권만 없다 뿐이지 대우는 좋았다. 또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나오는 내용인데, 에도 막부는 전대들과는 달리 그래도 형식상 덴노를 상전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있다. 추신구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자결해야 했던 아사노 나가노리 같은 다이묘도 있었을 정도다. 즉 덴노에 대한 충성이 반역으로 취급되었을 수도 있겠고 은둔을 강요받았을 수도 있겠지만[86]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그정도의 시궁창은 아니었다.
'덴노가 병풍에 무시당하는 신세'라는 묘사와 어울리는 시대는 에도 시대가 아니고 전국 시대로, 전국 시대의 덴노는 푸대접이 극에 달해서 고나라 덴노의 경우 할아버지인 고쓰치미카도 덴노가 1500년에 병으로 붕어했음에도 돈이 없어서 성금이 온 뒤에야 장례를 치렀을 정도였고[87], 아버지인 고카시와바라 덴노 또한 21년차에 즉위식을 치렀을 정도였다. 고나라 덴노 또한 즉위식에 쓸 돈이 없어 즉위하고도 10년이나 즉위식을 거행하지 못했고, 여러 센고쿠 다이묘 가문들이 성금을 보낸 뒤에야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물론 그 후에도 돈없기는 마찬가지라 어필을 팔아 수입에 보태고 궁녀들은 매춘을 하는 등[88] 비참함의 끝을 보여주었고, 이는 오기마치 덴노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상락한 이후부터 나아지기 시작한다.
2.34. 참근교대 관련
참근교대가 첫 언급되었을 때는 '참근교대는 다이묘의 가족들을 에도에 볼모로 잡아둔 채 다이묘 자신은 1년간은 영지, 1년간은 에도를 오가게 하는 제도' 라고 소개해 놓고서 몇 페이지 뒤에는 다이묘의 아내로 추정되는 여성이 "자기야, 에도 가면 지갑 하나 사 주라" 라고 한다(...) 위에 말했듯 다이묘는 영지에 갈 수 있어도 다이묘의 가족들은 에도에서 지내야 해서 이런 일은 못 일어난다. 단, 다이묘의 가신나 휘하 무사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해설에는 '다이묘, 부하 부시'로 같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오류로 봐야 한다.2.35. 겐로쿠 시대 이후 묘사
겐로쿠 시대 이후 막말까지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에도 도쿠가와 요시무네에서 이에시게로 이어지는 중흥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쇼군인 이에하루 치세도 다누마 오기쓰구라는 인물이 나서서 그럭저럭 이끌기도 했고...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제대로 개혁도 실패하고 에도 막부가 쇠망하기 시작하는건 이에나리 치세부터다.2.36. 안세이 대옥
이이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으로 다이묘, 조정대신을 포함한 반대파를 100명 넘게 처형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론 처형당한 사람은 8명에 지나지 않았고 다이묘나 조정대신은 1명도 처형당하지 않았다. 단지 숙청당한 사람이 100여 명 가량이었을 뿐이다.2.37.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외모
1867년 같은 해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메이지 덴노가 각각 쇼군과 덴노에 즉위했다는 부분에서 요시노부의 외모를 너무 늙게 묘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요시노부의 모습을 참고한 듯 한데, 요시노부는 1837년생이므로 쇼군에 즉위할 때는 겨우 30세였다. 게다가 이후의 대정봉환을 거쳐 보신전쟁에서 요시노부가 항복할 때까지 쭉 이런 모습으로 나오는데, 보신전쟁이 완전히 끝난 해도 1869년으로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2.38. 도사 번 지형 오류
사카모토 료마의 소개에서 출신지인 도사 번[89]이 규슈섬에 위치한 것으로 나온다.[90] 실제로는 시코쿠 섬에 소재한다. 다른 페이지의 지도에서는 제대로 묘사되었고 개정판에서 이 부분도 수정되었다.(03)2.39. 조슈 번이 군벌의 본거지?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조슈 번은 일본군 중에서도 육군의 기원이다. 그나마도 조슈가 군을 장악한 것도 초기의 일이지 육군사관학교가 세위진 뒤부터는 육군을 특정 출신이 주도권을 쥔 것도 아니다. 당장에 도조 히데키(도쿄도)[91], 스즈키 데이이치(치바 현), 기무라 헤이타로(사이타마 현), 사토 겐료(이시카와 현), 사나다 조이치로(홋카이도) 등 2차대전 도조와 그 측근들 중 지금의 야마구치 현 출신은 한 명도 없다. 결국 일본 육군의 발상지가 조슈 번이라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조슈 번이 군벌 자체의 발상지이며 그 영향력이 2차대전까지 이어진 것은 명백히 오류다. 다만 그 개념이 잔존하긴 했다.2.40. 보신 전쟁
정부군이 에도까지 진격하여 막부와 협상하여 정전했다고 쓰여 있으나 보신 전쟁은 협상이 아니라 전쟁으로 종결됐다. 정부군과 막부군의 협상 이후로도 막부측 강경파는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였고, 결국 홋카이도의 하코다테까지 올라가서 반정부군인 에조 공화국과 끝까지 치열하게 싸워 이듬해인 1869년 가까스로 평정했다. (" 대통령"이란 표현도 에조 공화국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이 전쟁의 피해 역시도 만만치 않아서 도호쿠 지역의 경우, 다이쇼 시대에야 겨우 피해를 회복했다.또한 ' 막부육군은 창칼같은 구식 무기로 무장한 데 반해 정부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해 막부 측에서 당해낼 수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 사실인 내용도 있으나 결코 사실이 아니다. 당장 보신 전쟁이 벌어진 계기부터가 막부가 서구 열강에 굴복해 개항을 한 쿠로후네 사건 때문에 반발한 사츠마, 조슈 등 존황양이파들과의 대립 때문이며, 먼나라 이웃나라 내에서도 그리 서술해놓곤 나중에 가선 구식 무기로 무장한 막부 vs 신식 무기로 무장한 삿쵸의 구도를 내세우니 눈썰미가 있는 독자들은 어리둥절.
실제 무진전쟁 직전 막부는 샤스포 소총과 암스트롱 포를 수입해 배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군사고문단에게 훈련받은 막부의 최정예군 전습대는 신정부군도 크게 경계할 정도로 우수했다. 해군에서도 네덜란드제 프리깃함인 가이오마루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막부 한정이라서 막부를 따르는 번들은 구식 화승총이나 잘 해봐야 미니에 탄을 사용하는 전장식 라이플이 주력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신정부군은 번의 군사력 대다수가 신식 소총인 슈나이더 후장식 라이플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막부군 측에서도 사카이 다다즈미[92]의 쇼나이 번처럼 슈나이더 소총 같은 신형 소총이 번 군사력의 주력인 번도 있었지만 신정부군에 비해 모자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개전 시점에서 막부군의 병력은 15,000명으로 신정부군의 병력 3,000명을 크게 앞섰고 추가적인 병력동원 여력도 충분히 있었으며, 에도성을 무혈개성하고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도 충분히 신정부군과 운명을 걸고 싸워볼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나라의 상황과 민심이 좋지 않았고, 천황을 적으로 돌린 탓에 사기 저하가 심각했을 뿐이다.
2.41. 세이난 전쟁
위의 보신 전쟁과 마찬가지로 구식 창칼로 무장한 사츠마군 vs 신식 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의 문제를 답습하고 있다. 사츠마는 이미 이전의 보신 전쟁에서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한 신정부군의 주역이었음에도 뜬금 구식 군대로 돌아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실제로는 당연히 사츠마군 역시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신정부군에 맞섰다. 그리고 구식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에 신정부군의 상대가 못 되었다는 본작에서의 서술과는 반대로 사츠마군은 의외로 신정부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신정부군은 주로 징집한 평민들이 주축이었던 반면 사츠마군은 전쟁에 이골이 난 무사 계급이 주축이 되었기에 총기를 다루는데도 매우 능숙했고, 이 때문에 최신 소총이 아닌 전장식 조총으로도 매우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다만 앞서 전장식 조총 얘기가 나온 것처럼 사츠마군이 신정부군에 비해 총기 등 무장 수준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인데, 이는 전쟁 이전에 중앙 정부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규슈 지역에서 세력을 양성하며 거병의 낌새를 보이자 불안함을 느낀 신정부 측에서 사츠마측의 화기를 대거 빼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즉 라스트 사무라이[93] 마냥 전통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아닌,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츠마군은 구식 총기는 물론, 아예 칼을 뽑아들고 접근전을 펼치는 발도 돌격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 발도 돌격도 접근전에 익숙지 않은 평민 출신 신정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기 때문에 신정부 측에서는 검술에 능한 구 무사계급 출신자들을 대거 선발한 발도대를 구성해 여기에 맞서야 했다.
2.42. 하마구치 오사치의 사망
하마구치가 1930년에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실제로 그 해에 총에 맞긴 했지만 암살미수가 되었으며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이듬해인 1931년에 죽었다.2.43. 사이토 마코토
5 15. 사건[94] 이후 후임 총리대신이 된 사이토 마코토를 군부 출신이란 이유로 강경파로 묘사했다. 하지만 사이토도 해군 출신이란 점에서 짐작되듯이 온건파에 현상유지파였다.[95] 한편 이누카이 츠요시 역시 재임중에 만주사변으로 중일 전쟁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여하간 사이토 역시도 황군파 장교들에게는 적대시되었으며, 결국 총리 퇴임 이후 1936년 2.26 사건(쿠데타)에서 다른 대신들과 함께 암살되었으며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후 정권은 육군에게 넘어가게 된다.2.44.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장면에서 제로센[96]의 날개를 후진익기로 그려놨다. 전투기에 후진익기가 도입된 것은 제트전투기 시대까지 가야 한다. 또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전함을 타고 있는 것으로 그려놨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은 전함이 모두 망가져서 없었으며 항공모함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또한 "과달카날 전역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펼쳤다"고 했는데, 과달카날 전역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군이 반격을 했다기보다는 일본군이 저 혼자 비행장 버리고 나갔다가, 나중에야 미군 다 포진한 범굴에 발을 디밀었다가 아작난 전투다. 또한 "포츠담 선언을 불복하자 히로시마에 핵을 투하했다"고 했는데 히로시마 핵 투하 명령은 포츠담 선언보다 빨리 내려졌다. 투하가 늦었을 뿐. 그리고 원폭 투하 직후에야 급해진 소련이 전투를 개시했다고 적었는데 소련군의 작전 계획에서부터 이미 8월 7일로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급하게" 개시한 것은 아니었다.[97]
2.4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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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슌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외손자였다.
스슌천황은 요메이 천황의 이복동생이고 소가노 우마코의 큰누나의 아들로 외조카이다. 나이로는 스슌천황이 우마코 보다 30세연상이다. 쇼토쿠 태자의 숙부이다. 그리고 스이코 천황의 이복오빠이기도 하다.
-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다메요시의 차남으로 표기되는데 다메토모가 8남이고 요시토모는 겐지가의 장남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는 장면에서 덴노가 성인으로 나오나 당시 덴노인 고요제이 덴노는 15살이었고 히데요시가 "독자 여러분 지금까지 내 성은 하시바 였다우!" 라고 하는데 이게 히데요시가 원래부터 하시바 성이었다는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장면이다. 실제로는 키노시타 도키치로라 처음 칭했고 나중에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로 바뀌었다가 이 때에 도요토미 성을 받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된건데 이 설명이 모두 생략되고 히데요시가 원래부터 도요토미였던건 아니라는 것만 보여주다 보니 히데요시가 원래부터 하시바인줄 오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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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전후
일본을 탈공업화해 농업국가로 만들려 했다.
탈공업화를 통한 전쟁불가국가로 만들려는 계획은 독일을 대상으로 한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이라는 실행되지 않은 계획만 존재했었고 일본을 대상으로 한 계획은 미국의 대일본 전후계획에도 없었다. 1 사업가 에드윈 폴리가 일본의 공업시설을 일부 해체하여 인근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구상을 편 적이 있긴 하나 1946년 당시부터 비현실적이라며 욕을 먹었고, 그마저도 중국이 통째로 공산화되면서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 착각된 내용을 근거로 한국전쟁 탓에 일본이 공업화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98] 그저 먼나라 이웃나라로 퍼진 주장들 중 하나일 뿐이다. - 전통적인 농업만으로 전 국민을 먹여살릴 수 있는 현대 국가는 없다. 오죽하면 상술한 모겐소 계획의 경우 독일을 완전히 탈공업화할 경우 독일인의 40%를 학살(...)하던지 다른 나라로 강제 이주라도 시키지 않는 이상 엄청난 규모의 대기근이 발생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지경이었으며, 미국 내에서도 몇몇 초강경파를 제외하면 저 계획을 그대로 시행하려는 미친놈은 없었다.[99] 설상가상으로 이 소식이 괴벨스 등 독일 지도층의 귀에 들어가버린 탓에 수많은 독일인이 선동에 넘어가[100] 집단 자살 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독일보다 경작 가능한 땅면적이 좁으며, 섬나라인 탓에 인구 대다수를 강제이주 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본의 공업시설을 싸그리 날려 버렸다가는 어떤 개판이 벌어질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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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후에 대한 챕터표시가 있는데 바쿠후시대가 끝난 후에도 다음 챕터표시가 없다.
실은 나중에 자민막부가 들어서기 때문이라더라
- 일본, 조선, 중국을 비교하면서 이중권력이 일본의 특수성이라고 서술했는데 사실 이중권력은 어느 나라 역사들에서나 존재했다. 중국의 경우 망탁조의 중 왕망을 제외한 3명은 군주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새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알려진 것과 달리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보다 왕권이 강력했다는 반론이 있지만 조선에도 정종, 단종, 명종, 순조, 헌종, 철종 등 허수아비된 군주들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 반론 - 이 부분에서 작가의 의도는 단순한 권신의 유무가 아닌, 제도적인 차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한국사나 중국사에도 분명 여러 대를 이어가며 황제를 실각시키고 권력을 휘두른 가문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게 정식적인 제도까지는 아니었다. 가령 3대동안 권력을 휘두른 사마의 - 사마사, 사마소 - 사마염의 경우, 사마의는 직위가 태부였고 사마사와 사마소는 대장군, 사마염은 상국으로 각자 달랐고 이러한 직위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부여받는 직위일 뿐, 일본의 정이대장군처럼 대대로 세습하며 실권만을 장악하기 위해 존재하는 직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는 무려 15대까지 쇼군 직위가 세습되었고, 중간의 과도기를 제외하면 정권이 바뀌어도 쇼군이라는 직위와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막부와 쇼군이라는 제도 자체가 율령 밖의 제도다. 쇼군이라는 제도의 모태격 제도가 있긴 했지만 그 제도조차 임시직에 지나지 않는 제도였다는걸 감안하면 사실상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애매한 제도를 좀 더 확장하여 정식 제도로 발전시킨 셈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에 비견되는게 고려 중엽의 무신정권 정도인데 그나마도 막부나 쇼군처럼 안정적으로 지속된건 정방 정도밖에 없다. 비변사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비변사는 초기에는 왕과 집권세력이 키워주었고 비대해진 뒤에도 왕이 말 한마디만 하면 한 큐에 날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막부에 비견될 존재가 아니다.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지에 의해 이즈 반도로 유배된 나이가 8세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13세 때 일이다.
- 혼다의 고급 브랜드는 아큐라인데 애발론이라고 적혀 있고, 애발론[101]은 혼다 제품이 아니고 도요타 제품이다. 토요타의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의 로고도 잘못되었다. 아래의 애발론이라고 적혀 있는 로고가 진짜 렉서스 로고이다.
- 1854년에 에도에 온 미국 군함은 7척이 아니라 9척이다.
- 사쓰마와 조슈와 바쿠후 대립 부분에서 조슈와 죠슈 표기를 섞어서 쓰고 있다. 개정판에선 조슈라고만 나온다.(12)
- 에도 막부 시절 신분 질서를 위해서, 만약 사무라이가 평민에게 모욕을 당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나와 있고 이를 기리스테고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00%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오해를 하기 쉬운 묘사이다. 이 부분은 기리스테고멘(부레이우치) 문서를 참고할 것. 만화에서도 실제로 농민이나 조닌을 죽인 일은 거의 없다고 나온다. 또한 기리스테고멘을 무례한 농민을 그 자리에서 확 베어 죽이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결투 형식이었다.
- 사쓰에이 전쟁은 묘사만 보면 사쓰마가 영국에게 참패당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전쟁 결과 자체는 무승부였고 사쓰마 측의 시설과 무기 장비 피해는 컸어도 인명피해는 영국측보다 경미했다.[102][103][104] 물론 해당 부분에서 강조하려는 내용은 사쓰마가 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고 서구 열강의 군사력을 제대로 경험하여 인식을 바꿨다는 점이기 때문에 승부 자체는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작가도 승부 자체에 대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고.
- 메이지 시대에 모든 국민에세 성씨를 정해주는 파트에서 전근대 일본에는 평민들이 성씨를 가지지 못한 이유로 평민들에게 성씨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쪽이 정확하다고 설명하기는 했는데, 여러 일본 역사학자의 연구결과를 정리하자면 전근대 시절 일본의 평민들은 성씨를 가질 수는 있었다[105]. 높으신 분들에게 인정을 못 받았을 뿐. 성씨를 아예 못 쓰는 것과 쓸 수는 있는데 인정을 못 받는 거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 가미카제는 1944년 6월이 아니라 10월에 등장했다.
- 이탈리아 편의 폼페이우스와 비슷한 오류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평범한 체격을 가진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놨는데,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무려 키가 197cm, 몸무게가 161kg에 달하는 거구였다.[106]
- 리크루트 사건을 리쿠르트 사건이라고 일본식으로 썼다.
- 기본적으로 인명·관직명 등의 고유명사를 일본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기반해 표기하고 있으나, 여러 종류의 자료를 참고한 탓인지 비공인 표기가 가끔 보인다. 위에서도 설명한 조슈/죠슈 표기라든가,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쇼군의 이름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아시카가 요시미쓰라고 표기하지 않고 아시카가 요시미츠라고 표기한다든가.
[1]
한국 특유의
정 문화라는 말을 끼워 넣었으나 전체적인 묘사로 봤을 때 비위생적이라고 까는 내용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침이 숟가락과 함께 냄비에 들어가고, 그로 인한 감염이 생길 수 있다. 실제로도 음식을 이런 식으로 먹는 건 1급 발암 요인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의 전염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고.
[2]
비슷한 욕설로 '아호(あほ, 阿保, 바보)'와 '마누케(まぬけ, 間ぬけ, 얼빠진 놈)'라는 욕설도 있다. 관동 사람들은 '아호(あほ)'를, 관서 사람들은 '바카(ばか)'를 더 심한 욕으로 친다. '바카(ばか)'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심심찮게 들리며
모에 요소로도 자주 쓰인다. 심지어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게 아주 희대의 명대사이다.
[3]
야인시대에서 신불출이 자신이 규로다 규이치로 개명했는데 그 기원이 사실 칙쇼라는 사실을 밝히자 조선인들은 박장대소하고 일본인은 부르르 떠는데 이것도 칙쇼가 모욕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개명하는 척하며 일본에게 모욕적인 말로 엿을 먹인 셈
[4]
바카나, 쿠즈를 야로에 붙이면 바보 새끼, 쓰레기 새끼라는 큰 욕이 될수있다.
[5]
물론 2000년 초반 때까지만 해도 짐승이 욕에 들어가긴 했지만 대체로 성적인 의미에서 주로 쓰였고, '짐승돌'과 같이 남성미 넘치고 야성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 짐승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경우도 생겨버려 요즘엔 애매해졌다.
[6]
한국은 검열이 높은 수준에 속하는 지상파에서조차 새끼, 쓰레기, 미친 놈, 또라이 같은 단어가 별문제 없이 송출되고, 보는 시청자들도 별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지랄, 병신 등의 욕설은 방송에선 걸리지만 일상에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자이니치'와 한국의 '친일파' 가 비슷한 뉘앙스의 욕설로 쓰이나, 한국에서는 친구들끼리 장난 정도로 친일파라고 말하는 정도는 받아들여진다. 한국처럼 동성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웃으면서 이 새끼 저 새끼를 쓰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욕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할 뿐. 만화 내에서 "한국인이 술자리에서 하는 대화를 일본인에게 번역해서 들려주면 거품 물고 쓰러질 것이다"라고 비교가 나오는데, 이것만큼은 맞는 말이다.
[7]
일단
섬나라여서 서로와의 마찰을 줄이려면 접촉을 줄여야 한다는 일종에 화(和) 문화를 언급하는데 이것도 그닥 맞다고 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반례가 일제 강점기인데 정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화 문화를 중시한다면 일본은 일제 강점기 때 말 그대로 화를 위해 대륙 진출을 할 게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보호 수준으로 그쳐야 했다. 일단 그러지도 않았으며 결국 미국에 핵폭탄 두 방에 갑자기 화 문화를 되찾은 굉장히 독특한 민족이 돼버린다.... 물론 일본에
갈라파고스 문화와 어느 정도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문화는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매너지 법이 아니며 진심으로 화 문화를 이행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즉 '절대로'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화 문화를 지킨다고 보긴 어렵다.
[8]
일본은 실례를 범하는 것에 민감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신체 접촉은 자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만 친구끼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신체 접촉이 꽤 자유롭다. 그런데 작가는 친한 경우도 신체 접촉을 안 한다고 해버려 수많은 일본의 미디어에서의 반례들을 부정해 버리는 결과가 발생하였다. 당장 만화 도라에몽에서의 퉁퉁이가 노진구를 패는 거 자체도 친한 친구끼리의 신체 접촉을 꺼린다의 반례가 될 수 있다. 고로 작가의 문화를 일반화하느라고
뇌절을 한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9]
머리는 물론이고 목을 건드리는 것도 상대에게 모욕감이나 압박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므로 의도적으로 괴롭힐 때가 아니고서야 친한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라도 잘 없으며 성격에 따라서는 그보다 약한 터치도 잘 안 할 수 있는데 한국인들이 그렇게 마구 치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오류가 될 여지가 매우 많다.
[10]
더 정확하게는 일본 예절 서적에나 있다
[11]
한국에서도 폭행죄로 처벌될 수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성추행으로 오인받을 만한 짓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식인이면 국적 상관없이 알 것이다. 아주 대표적인 것이
똥침이 있다.
[12]
사실 대만은 한국 다음으로 일본과 비슷한 나라기에 비슷한 면이 강한 거 같다. 똑같이 식민지를 겪기도 했고 심지어 대만은 친일 국가이기에 일본에 문화와 많이 비슷하다.
[13]
태국,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
[14]
중국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유입과 혼혈이 이루어졌다.
[15]
비록 인도양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근접한 사례가 있다. 외지인에 대한 배척 의식이 상상을 초월한다.
[16]
당장 단일 민족 국가 어쩌구에 가장 가까울 한국도 몇몇 성씨들은 외국에서 온 경우도 있다.
화산 이씨는 베트남계 성씨이며 그 흔한 김씨도 어떤 건 시조가
일본인인 것도 있다.
[17]
영국, 일본, 영연방 왕국을 제외한 섬나라 겸 군주국은
브루나이,
바레인, 그리고
통가뿐이다. 가장 섬 많은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그 뒤를 이은 필리핀은 공화국이다. 다만 두 나라는 식민 지배를 겪고 독립했기에 그럴 수 있다. 작가도 발칸반도 편에서 식민 지배를 겪다 독립한 나라는 거의 다 공화국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는데 실제로도 섬나라 중에서도 아주 오래전에 독립한 나라, 식민지였되 왕조는 끊기지 않은 나라, 아예 식민지였던 적이 없는 나라 정도를 빼곤 공화정이다. 그나마도 아주 오래전에 독립한 나라도 정치적 변동에 따라 공화정으로 변모하기도 했고....
[18]
캐나다에서는 영국 여왕을 국가 원수로 모신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다소 부정확한 표현이고, 정확히 말하면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여왕이면서 캐나다의 여왕이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겸직인 셈.
[19]
이 외에도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2세를 몰아낸
명예혁명이 있지만 현임 국왕만 몰아냈을 뿐 그 이후에도 제임스 2세의 두 딸인 메리와 앤이 연달아 국왕으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냥 혁명이지 '역성'혁명은 아니다. 애초에 기존 왕조를 뒤엎지 않고 유지하면서 혁명에 성공했다고 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튜어트 왕조가
하노버 왕조로 바뀐 것은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제임스 2세의 사촌인 팔츠의 소피를 다음 후계자로 정했고 소피가 앤보다 2달 먼저 사망하자 소피의 아들인 하노버의 조지 1세가 즉위한 것이지 혁명으로 왕조가 바뀐 게 아니다.
[20]
애초에 정복은커녕 공격당한 것도
원나라의 일본 원정 때가 처음이고 그 이후로도 일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공격은 2차 대전 말이 유일하다.
[21]
영국 역사에서도
왕조가 바뀐 경우는 많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의 왕조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전 국왕의 친척이나 모계 혈통의 자손이 즉위하였고 윌리엄 1세 즉위 이후로는 왕가의 혈통이 완전히 교체된 적은 없다.(동양의 왕조 개념과 서양의 왕조 개념은 상당히 달라서 조선의
선조나
철종,
고종이 즉위한 것도 서양식으로는 왕조 교체에 해당한다.) 물론 여왕의 자녀나 모계 혈통의 자손이 즉위하면 '역성'은 맞으나 '혁명'은 아니다.
[22]
그리고 이 역시도 섬나라의 특징이 아니라 유럽 그 자체의 특징으로 유럽은 중세부터 왕조의 대가 끊기면 마지막 왕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친척을 앉혔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의 덴노제는 그냥 일본만의 특징이라 보는 게 좋다. 애초에 일본의 계승 방식과 영국 + 유럽의 계승 방식부터가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23]
비즈니스 메일에서는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거래처인 A 상사의 스즈키 과장에게 메일로 연락을 할 경우 첫 부분에 누구에게 쓰는 것인지를 표기할 때 'A商事 鈴木課長様'라고 쓰는 식. 다만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잘못된 표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메일에서도 직책명+様의 사용이 줄어 가는 추세이다. 물론 회사에 따라 차이는 있으며, 대화를 할 때에는 직책명 뒤에 様나 さん 등을 붙이지 않는다.
[24]
직책명만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님' 자를 붙여서 호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25]
영어권의 미스터, 미스, 마스터, 닥터 등등 여러 문화권에서 직책이나 호칭에 존칭이 들어가있는 언어권이 많다.
[26]
예를 들어 일본 수상에게 총리님도 총리 각하도 아닌 총리님 각하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7]
올바른 압존법을 적용한 일본어로 표현하면, 사장의 성씨가 사토(佐藤)라고 가정했을 때 "(社長の)佐藤はただいま席を外しております。"라는 표현을 사용함이 옳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사장인) 사토는 지금 자리를 비웠습니다'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괄호 안의 말은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는 표현으로, 주로 성씨가 같은 사람이 2명 이상 있는 경우 어느 직책인지를 통해 구분하기 위해 붙이는 편이며, 동성(同姓)인 사람이 없다면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28]
様나 さん을 붙여서도 안 된다.
[29]
상대방의 직책명을 알고 있는 경우 성씨 + 직책명으로 호칭하는 쪽이 상대방이 어느 직책인지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좀 더 정중하고 세심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선호되는 편이다. 성씨 + 様의 경우 상대방의 직책을 모르거나, 상대방이 특별한 직책이 없는 평사원일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30]
애초에 일본은 기업뿐만 아니라 정치인이 자식한테 지역구를 물려주는 게 흔해빠진 동네다.그러나 이 분야의
넘사벽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31]
이러한 문제를 인지한 것인지 미국 편에서는 미국은 복지 제도와 교육 보장 등 사회 안전 시스템이 매우 약해서 한번 잘리면 생활고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사실상 끝장 나므로 직장에 하루라도 더 박혀있는 것이 안전하지 이직하겠다고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상히 설명한다. 여기저기에서 스카웃하려고 하는 인재라면 모를까 직장에 계속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가 흔할 리 없다.
[32]
바꿔 말하면 일본의 고용 안정성이 미국보다 강한 것이다.
[33]
엔화의 가치를 높이라는 압력. 가령 이전의 1달러가 90엔이었다면 85엔 정도로 취급하도록 변경하란 뜻이다.
[34]
다만 이런 유의 메이와쿠 문화 교육(일본판 밥상머리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다른 집에 가서 밥 먹기 전에 돌아가기는 역설적으로 그 집에서 제공한 식사를 안 먹고 가겠다는 메이와쿠를 저지른 거기에 답이 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다른 집에서 밥 먹기 전에 가기처럼 뭘 해도 메이와쿠인 문화는 보통 가르쳐주지 않고 공공장소에서는 떠들지 않기나 다른 집에서 뛰어다니지 않기나 사람을 보면 인사하기 정도로 순화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35]
만화에서도 부모가 "요즘 경기가 어렵지?"라고 넌지시 묻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36]
나중 일이지만 2010년대에 오면서 스마트폰의 개발로 인해 신문 읽는 문화는 사장되었다.
[37]
다만 친절한 일본인이라는 인식은 실제로도 외국인에게도 적용되며 일부 혐한들이 친절하지 않을 뿐이다.
[38]
참고로 한국이 겸상을 한 것은 의외로 얼마 안 됐는데 일제에 식기 수탈로 최소한의 식기를 공유하면서 먹어야 했다는 주장과 신분제 폐지로 인해 서로 가볍게 먹던 두레상이 발전하였다는 주장과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전부 틀린 얘기는 아니다. 특히 정작 일제는 한 번도 겸상이라는 걸 해보지 않았는데 식민지 수탈로 인한 물자 부족 불만 해소를 위해 겸상을 독려하는 아이러니도 발생했다. 이후 전쟁으로 인한 물자난으로 겸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문화로 잡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39]
조선이 독상을 한 이유도 유추할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은 유교가 퍼져있었다. 각설하고 소반 형식의 독상을 일제가 겸상을 하도록 장려를 한 거니 지금 와서
일본이 한국의 겸상 문화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보인다.
[40]
이래버리면 최근 유행하는 일본 대식 유행에 대해 설명을 해버릴 수가 없게 된다.
[41]
이치닌마에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문화라고 보는 게 맞다. 일제 전쟁 이후 못 먹은 케이스 그리고 급격한 선진화로 인한 음식 고급화로 인한 소식, 그리고 짜고 기름진 음식 특성상 많이 못 먹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42]
즉 싸우면 망하는 섬나라라는 특징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다소 억지 논리가 생겼다는 거다.
[43]
변수라는 걸 전부 제하고 단순히 일본을 보니 생긴 문제이다.
[44]
일본을 벙어리 국가로 만드는 어찌 보면 제일 심각한 오류이다. 이게 일본에 실존하는 문화라면 일본은 오로지 비언어적 표현으로만 대화하며, 일본어의 존재 가치도 사라진다.
[45]
물론 상대방이 원하는 걸 눈치채서 알아서 갖다주는 것은 흔히 공기(空氣)를 읽는다고 하며 실제로 눈치를 통한 배려는 일본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으며 쿠키요미(공기 읽기)라는 게임도 나온 건 사실이다.
[46]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국의 배려보다는 높은 수준의 무언가이지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고 심각한 메이와쿠거나 역으로 물을 갖다 달라고 주장을 하는 것까지 메이와쿠라고 바라보는 건 분명히 과장돼있다. 일본에서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대신 부탁조로 말해야 한다. 일본이 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벙어리처럼 있지는 않고 -ください라고 하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이것은 진짜 친하지 않는 친구인 이상 통용되며, 명령조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정해야 하는 오류인 거다. 일본은 상대방이 알아채서 배려를 해주기 전까지 메이와쿠임을 알고 참아주지 않고, 명령조를 써서 상대방에게 메이와쿠를 저지르지 않고 완곡어나 요청조로 상대방이 깨닫지 못함을 메이와쿠라고 인식하지 않도록 생각하게 배려해 준다. 누가봐도 뉘앙스가 다르다.
[47]
모든 것의 시작이 화(和) 문화에서 나비 효과처럼 시작됐는데 섬나라라고 다 이렇지 않다. 아니 이런 나라는 일본이 아니다.
[48]
알다시피 일본 애니메이션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면 에어컨 틀어달라고 할 때 엘니뇨 현상을 언급하는 경우를 본 적 없다는 걸 알 것이다. 쉽게 말해 일본도 생각보다 직설적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완곡어법은 일본에서도
교토 사람들이나 한다는
교토식 화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만큼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저렇게까지 돌려 말하지 않는다는 반증도 된다.
[49]
다만 한국에도 겉치레나 빈말이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아주 다르다고 말 못 하겠다.
[50]
일본은 악수를 안 하는 국가가 아니다. 상대방이 악수를 청하는데 안 하고 90도 인사를 하는 것도 메이와쿠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방이 먼저 하기 전까지는 잘 안 하는 건 사실이다. 당장 수많은 해외 정상과 천황이나 총리끼리의 악수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51]
다른 것은 많이 해소되었으나 아직도 남녀 차별은 남아있다. 다만 이마저도 최근에 많이 개선돼 가는 중이다.
[52]
다만 이게 섬나라여서 발생한 건 아니다. 억지로 화(和) 문화로 엮으면서 발생한 문제이다.
[53]
그런데 일본 측 입장을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다. 먼저 방사능 방류는 안 하게 될 시에 받을 피해가 너무 심하기도 하고 매우 안전하게 처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 두 문장은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혐한 발언은 한국의 반일 발언과 똑같은 취지로 국내 결속용에 불과한 게 맞으나 일부는 혐한 단체를 만들고 5ch에서 혐한 글 적는
승인 욕구가 높은 행위를 하며 독도 영유권 주장도 자기 나름의 논리라는 건 존재한다. 물론 한국인이 봤을 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일제 강점기 보상은 실제로 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원금 명목으로 주었지 배상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준 지원금의 양을 따져본다면 일본이 독일을 배워야 하는지는 의문일 정도로 많이 준 건 사실이다. 또한 후쿠시마산 어류 수출은 지역 활성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친절하다는 일본인들이 왜 한국인을 상대로 와사비 테러를 하냐는 것에 따르면 그것이야말로 일본에도 예외가 있다는 반증이다. 일본에 편을 들자면 모든 가게가 와사비 테러를 하지는 않으며 일본인 중에서도 예의 없는 소수가 저지른 짓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행을 하거나 욕설을 하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건 두 나라의 팩트이나 이걸 일반화할 수 없다.
[54]
사실 일본이 외국에게 예의가 없는 이유는 집단주의의 특성인데 집단으로 묶이는 가장 큰 카테고리가 일본인 거다. 아직 전 세계까지 패치가 된 것이 아니고 미국과 대만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 그 외에는 집단 내에 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집단 대 집단 혹은 개인 대 개인으로 규칙이 적용된다. 다만 그 규칙에는 메이와쿠 문화가 일부 빠져있고 타테마에와 혼네도 일부 빠져 있으며 친절함도 조금 빠져 있다.
[55]
위에 내용과 굉장히 충돌하는 문서이다.
[56]
일본인들도 평범하며 화(和) 문화가 있지만 그걸 심각할 정도로 지키진 않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은 없다는 것이다.
[57]
일본은 세대, 나이, 문화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지키는 규범이 있다.
[58]
아이누는 서구적인 외형과 다르게 유전적으로
백인과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동아시아인에 더욱 가깝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누의 선조는 일본 원주민 더 정확하게는 조몬인이라고 불리는
조몬 시대 사람들로 원래는 일본 본토에서 살다가
야요이인,
도래인 등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외지인들이 넘어오면서 조몬인들은 오늘날 오키나와,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섬 등으로 쫓겨났고 야요이인과 도래인이 일본 본토의 주류 민족이 되어 오늘날 일본인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물론 현대 일본인에게도 조몬인 유전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소수라고 한다.
[59]
공업 생산력부터가 막장이라 가내 수공업으로 군수 물자 만들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군수 물자 품질이 썩 좋지 못했다. 그나마도 있던 숙련공조차 총알받이로 날려먹고 미숙련공들로 공장을 돌리다 보니 오각형 너트가 나오는 등 막장이었다.
[60]
프랑스는 미국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독자적 강대국화를 하는 과정에서 연합체를 탈퇴하기까지 했다.
[61]
냉전 시기에는 서독과 동독 둘 다 각각 강소국으로 손꼽혔다.
[62]
대략 6위~10위 사이의 구간이다.
[63]
덴노 아니냐 싶겠지만 이미 고토바 덴노에 이어 쓰치미카도 덴노를 이어 준토쿠 덴노가 즉위한 뒤였다. 그래서 고토바 덴노와 쓰치미카도 덴노는 당시 상황이었다(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도 덴노가 조기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64]
그나마도 나중에는 고토바 덴노의 손자인 고사가 덴노를 즉위시키지만 이는 고사가 덴노의 아버지인 쓰치미카도 덴노는 조큐의 난 당시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5]
가마쿠라 막부를 뜻한다.
[66]
어쨌든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연합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겐무 신정을 단행했다.
[67]
이때는 무슨 이유인지 측근만 유배되고 끝났다.
[68]
이전에도 한번 고다이고 덴노가 거병했는데 이때 상중에도 불구하고 막부의 압력으로 어거지로 토벌하러 가야 했다. (이때 고다이고 덴노는 패배하고 오키섬으로 유배된다.)
[69]
단 요리토모의 직계나 가까운 후손은 아니지만 똑같이 가와치 겐지의 후손은 맞다.
[70]
한때는 다카우지가 관직이고 뭐고 다 내려놓을 테니까 제발 사면해 달라고 싹싹 빌 정도였다.
[71]
그래도 일단은 대체적으로 북조가 꿀땅을 더 많이 먹은 반면 남조는 영토 자체도 크지 않거니와 그나마 있는 영토 여기저기로 분산되어 있다.
[72]
이때 요시미의 마음속 대사가 걸작이다. '오리발, 어찌 한 입으로 저런 거짓말을....
공업용 재봉틀로 입을 박아 버려야....
[73]
그러나 이런 모토나리마저도 젊은 시절에는 꽤 야심이 많았는지 한번은 신사에서 소원을 빈 부하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보자 주군께 주고쿠를 달라고 빌었다고 말했는데 이에 모토나리는 천하를 달라고 해야 주고쿠를 얻을까 말까 한데 고작 주고쿠를 달라고 했던 거냐고 말했고 실제로도 주고쿠를 얻긴 했다. 마냥 보신주의자는 아닌 셈.
[74]
그리고 모토나리가 보수적이고 보신적으로 나와야 했던 이유도 있긴 했다. 원래 모리가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오는 권위가 없는 고쿠진에 불과했고 그래서 같은 고쿠진들을 확실히 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모토나리가 젊은 시절에는 오우치 가문이나 아마고 가문 같은 강자들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고 그가 가독을 물려받을 때는 친척들이랑은 죄다 적대 관계, 가신들은 주군의 위세를 위협할 정도라 많이 고생해야 했다. 그가 주고쿠를 손에 넣는게 죽기 딱 3년 전인 71세 때 일이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다.
[75]
이때 가신 여럿을 잃을 정도로 왕창 졌고 심지어 본인은 바지에 똥을 지렸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도 이때는 본인도 자기가 성급했던 것을 인정했기에 스스로 이때 패배했을 때의 심정을 담은 그림을 그리게 해 객기, 혈기에 대한 교훈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76]
이는 이 만화에서도 언급된다.
[77]
노부카츠는 노부나가의 아들이긴 했지만 노부나가의 능력을 전혀 물려받지 못한 무능한 사람으로 당대에 선교사로 온 프로이스는 그를 두고 지능이 정상인보다 딸린다고 평해쓸 지경이다. 정작 이렇게 무능한 노부카츠는
결정적인 순간에 편을 잘 서서 5만석 규모의 다이묘로, 형제, 조카들이 모두 일찍 죽어나갔음에도 본인은 오사카 전투로부터 15년이나 더 살아 73세로 사망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노부나가의 후손들은 모두 노부카츠의 후손이다.
[78]
가마쿠라시 역사 페이지에서도 간토 쿠보가 코가로 이전한 시점부터 활력을 잃어 농어촌으로 전락했다고 나와있다. 애초에 가마쿠라 시대에도 가마쿠가 일대인 간토 지역은 그리 발달된 지역이 아니었다.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에도 역시도 마찬가지.
[79]
사실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전봉 안 되는게 베스트인데 생판 모르는 곳에서는 초창기의 통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에야스는 어찌저찌 자리잡았지만 카와지리 히데타카는 잇키로 사망. 삿사 나리마사도 잇키에 대한 책임으로 할복해야 했다. 이에야스도 고생을 했으니 전봉 조치는 '죽이긴 뭣하니까 내가 지정해준 곳에서 고생 좀 해봐라 (일 못해서 죽으면 더 좋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80]
그래도 이에야스의 에도 전봉은 장기적으론 그에게 이득을 안겨주었는데 에도 일대는 아직 개발이 덜된 곳이라 잠재력이 있는 땅이고 또한 기존에 가진 지역도 영향력을 가져 책에서도 나왔듯 250만석의 거대 다이묘로 성장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30만석이니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가 히데요시는 이렇게 전봉시켜놓고 정작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에야스가 뭘 하든 신경을 제대로 쓸 수 여유도 없었다. 이에야스에게 병력을 지원해달라는 요구를 했으나 이에야스는 반란 진압과 영지 경영을 이유로 이리저리 피했다. 심지어 히데요시는 기껏 일으킨 임진왜란이 명나라와 조선에 반격당하고 바닷길에서는
이순신장군에 의해 보급력이 막히고 함선들이 대거 격파당하는 등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자기측 힘이 약해지고 있어서 이에야스가 안 보내줘도 뭐라 할 수 없었다.
[81]
그래서 이후 가토와 후쿠시마는 당장 세키가하라 전후엔 다이묘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자손대에 개역당해 다이묘 지위를 잃었다.
[82]
배웅해준 사람은 친아들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유키 히데야스.
[83]
마사무네의 군대가 부득이하게 자신의 가문과 사이가 나빴던 소마 가문의 영지를 통과해야 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 때 소마 가문이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
[84]
시마바라의 난 주동자로 알려진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 역시 아버지가 고니시의 가신이었다.
[85]
덴노에 대한 충성은 곧 반역으로 취급되었다느니 덴노는 유폐 생활과 다름없는 은둔을 강요받았다느니 돈이 없어 끼니를 굶거나 기운 옷을 입은 덴노도 있었고, 덴노 본인이 길을 걷다가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면서 무시했다는 것.
[86]
막부가 정한 덴노가 해야 할 일에서 '덴노는 공부가 제일이라'(=세상 일에 관심 끄고 공부나 해라)가 있다.
[87]
그 기간동안에는 황실 창고에 방치되었다고 한다.
[88]
일본의 궁녀들은 귀족들의 여식들을 위주로 선발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궁녀와 동급 취급하면 안된다.
[89]
지금의
고치현
[90]
규슈는 료마가 삿초동맹을 이끌어냈던 사쓰마 번이 있던 곳이다.
[91]
아버지인 도조 히데노리가 조슈 파벌한테 찍혀서 가시밭길의 군생활을 하다 예편했기 때문에 조슈 출신들을 굉장히 경계했다.
[92]
이 사람은 진성
밀덕후라 서구의 신무기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래 자신 번의 병사들을 신무기와 신전술로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에 누구보다 앞섰다. 그 덕에 막부에 동참한 번들이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동안 사카이 다다즈미의 번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오히려 신정부군과의 전투이서 거의 항상 승리했었다.
[93]
실제로 해당 작품은 세이난 전쟁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
[94]
이누카이 츠요시 당시 총리가 강경파 장교에게 암살당한 사건.
[95]
심지어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온건했던
문화통치를 처음 시행한 총독도 사이토 마코토다.
[96]
다른 폭격기를 그렸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후진익기는 없었다.
[97]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참조.
[98]
도움이 되긴 했다.
[99]
계획 입안자인 헨리 모겐소 2세 본인부터가 '독일인 아이들을 빼앗아 재교육 학교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는 정신나간 발언을 하는등 그냥 복수심에 내놓은 계획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
[100]
미국인들이 독일을 말려죽이려 한다면서 더 거친 저항을 유도했다.
[101]
국내에서는 아발론이라고 적지만, 영어 발음은 애발론에 가깝다.
[102]
결국에는 영국인들이 실질적으로 더 많이 죽거나 다쳤다는 얘기이다. 역사책들을 보면 그 당시에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등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이 무지막지한 힘과 위력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는데 물론 당시 정세를 봤을 때 그 자체는 맞지만 그래도 시대가 옛날인 근대인지라 그런 서양 강대국들도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 등 물리적 국력이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고 무기들도 전술과 전략도 구식이어서 생각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을 공격하거나 정벌하는 데에 어려움과 고난이 많았다. 당장 청 제국만 해도 역사책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과 달리 서양 열강들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등하게 싸우기도 했는데 내부의 부패와 부조리로 자멸해갔던 측면이 강했다. 다만 강자가 약자를 이기거나 괴롭힌 사실 자체를 묘사하다보니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103]
그렇다고 사쓰마의 피해가 결코 작은건 아니라서 쌍방의 피해자 수로만 보면 사쓰마의 승리에 가깝지만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고 금전적 손실이 막대했기에(이는 예상외의 졸전에 분개한 영국 해군이 민간인을 공격한 탓도 있다.) 결국 무승부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국은 큰 충격에 빠졌는데 딴에는 세계를 누비는 영국 해군이 일본의, 그것도 일개 지방 하나와의 전투에서 졸전했기 때문이다. 아예 미국은 일본이 의외로 서구식 전술에 익숙하기에 절대 만만히 봐선 안된다고 평했을 정도
[104]
여담으로 이렇게 영국과 사쓰마는 이러한 사건 이후에 오히려 서로간에 호감도가 높아졌다. 먼저 사쓰마번은 어쨌건 비겼긴 한데 예상외로 영국이 만만치 않아서 어떻게든 영국과 손잡고 싶었고 영국은 또 통상이 목적인데다 사쓰마 쪽에서 유화적으로 나왔으며 경쟁자인 프랑스가 친막부 성향이었기에 당연히 사쓰마와 손잡게 되었다. 배상금을 받아먹었긴 한데 또 그만큼 군함과 무기도 팔아줬다. 애초 배상금을 내는 조건도 그거였고
[105]
특히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이름만으로는 헷갈리기 딱 좋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서 평민들 사이에 쓰인 성씨인 가쿠시가바네(隠し姓)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신센구미의
히지카타 토시조의 성인 히지카타도 지배층에 의해 공인된 성씨가 아닌 가쿠시가바네이다.
[106]
물론 이 기록이 과장일 가능성이 더 크다. 오류라기 보다는 작가가 해당 기록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