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9:03

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독일

먼나라 이웃나라 문제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 한국
미국 중국 에스파냐
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러시아 인도와 인도아대륙
공정성 구성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1. 개괄2. 역사
2.1. 중세2.2. 근대~세계대전2.3. 통일~현대
3. 종교4. 사회


도이칠란트는 독일의 원어 발음이다. 오류가 아니니 참고할 것.[1]

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개괄

  • 개정판 첫 부분에 영국( 잉글랜드) 축구팀 최대 라이벌이 맨유 첼시라고(...) 써 있으며[2], 이탈리아팀 최대 라이벌이 AC 밀란 AS 로마로 돼 있다.[3] 이쯤이면 작가가 아예 축알못인 듯. 다만 2000년 후반에는 맨유와 첼시가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놓고 가장 치열하게 다투는 사이이긴 했지만, 스포츠에서 두 팀이 우승권 1, 2위라는 이유 하나로 죄다 라이벌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지역이나 스폰서 등에서 두 팀의 독특한 공통점이 있거나, 수십 년 가까이 1, 2위를 나눠먹을 정도로 대결구도가 고착화돼야 한다.
  • 독일에서 우연히 강의를 하고 돈을 받은 한국 교수에게 독일 관리가 이러면 위법이니 절차를 거치라고 경고하고 한국 교수는 대학 측에서 불러서 간 것이고 강의를 해서 돈을 받은 것인데 어쩌라는 거냐며 어이없고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사실 이 대목이 나온 이유는 독일인들은 원리원칙을 중시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예시로 든 것인데,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외국인이 강의나 취업 등 영리활동을 하려면 취업비자나 유학비자를 받아야 하며, 이는 대학에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본인 스스로 각국 정부 기관을 찾아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이 작품이 나온 1980년대는 한국이 지금과 달리 개발도상국이었고, 이 당시에는 정서적으로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일단 해외 출국 자체가 1989년에나 자유화되었다.) 나온 예시로 보인다.[4] 또한 독일은 연방제로 주법이 다르기 때문에 저 교수가 외국인 취업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강의하면 당국에서 제재를 걸 수 있다. 당연히 이 대목은 87년~98년판까지만 나오고, 이후의 판본들에서는 삭제된 상태이다.(03) 다만 스위스편에 붙었다.
  • 그리고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대화할 때 독일인이 프랑스인은 원리원칙을 지키지 못한단 말이야 프랑스인이 독일인 친구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단 말이야 라고 이야기 한적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국민들이 이렇다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선입견과 오류이다. 독일인들도 융통성이 있는 독일인도 있고 프랑스인도 원리원칙을 지키며 고지식한 사람도 있다. 그나라의 국민적 성격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보는 오류이기도 하다.

2. 역사

2.1. 중세

  • 서로마 멸망 후 부분에서 큰 물고기(프랑크)가 작은 물고기들을(부르군트,동고트,반달 등)잡아먹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오류가 하나 있다. 동고트 반달이미 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니까 반달과 동고트는 프랑크 왕국이 팽창해지기 전에 이미 멸망하고 없어졌다는 것. 또한 반달은 애초에 북아프리카에 세워진 나라이므로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프랑크와 반달 사이에는 서고트가 있다.
  •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교황을 겸했다고 나오며, 아예 성직자 복장을 입고 주교관에 월계관을 겹쳐 쓴 모습으로 등장한다.[5] 실제로는 황제는 세속군주로서 교회의 권위보다 우위를 인정받기는 했으나, 교회 내에서는 어디까지나 평신도였지, 절대 교회의 수장을 겸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 널리 퍼져 교과서에서조차 황제가 교황을 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 동로마 내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따로 있었다.
  • 교황에겐 한 나라의 왕도 대들수 없다?
    실제로는 초기의 경우, 정 반대로 교황이 정확하게는 황제에게 대들 수 없었다. 예시에서 '도이칠란트 왕이 로마 교황에게 대들었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데 독일왕은 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태자 사이의 지위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독일왕이 따로 있다면 독일왕이 황제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면 황제가 교황에게 군대를 보내어 폐위시키면 그만,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교황에게 인정을 못 받은 상태라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폐위를 시킬 수 있다면 장땡 이러한 문구가 어느정도 먹히는 것은 보름스 협약 이후로 이 사건을 전후하여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강해진다. 이러한 가정은 실제에 어느정도 근거한 것으로 이 파트 앞에서 나왔던 오토 대제와 카노사의 굴욕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의 경우 재위중에 몇번이고 교황을 갈아치웠다.
  • 신성 로마 제국에 관한 서술 오류가 많이 있다. 문서 참조. 딴건 몰라도 “무늬만 제국이지 실상은 별볼일 없는 소국들을 대충 묶어놓은 허울좋은 나라”라는 서술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성립 시점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처럼 껍데기뿐만 제국이 아닌, 오히려 당시 한창 잘나가던 독일 왕국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력을 자랑했다.[6] 만화 내에서도 당시 독일 왕국의 강력함을 잘만 설명해 놓고 이런 모순된 서술을 하니 독자 입장에서는 어리둥절이었다.[7] 30년 전쟁을 기점으로 시시한 나라로 떨어지기 시작하긴 하는데 그것도 오토 대제의 대관으로부터 700년 뒤의 이야기다.

2.2. 근대~세계대전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의 프랑스에 대해서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처럼 태평세월에 노는데 빠져서 적국이 이 가는 줄도 몰랐다고 되어있는데 둘 다 틀렸다. 일단 양국의 다수 정서는 전쟁에 대한 큰 걱정을 안 하는 분위기였지만 조선은 전쟁이 안 일어날 거라고 여겼고 프랑스는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프로이센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는 식으로 달랐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원수는 생각이 달라서 선조나 나폴레옹 3세나 전쟁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알았고 특히 나폴레옹 3세는 이길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어서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선조는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했지만 조선은 근 200년간 전쟁다운 전쟁이 없던 나라였던 반면 일본이 정복 야욕을 드러내고 겨우 2년만에 전쟁을 일으킨지라 제대로 성과를 못 보았고[8]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지만 국민적 정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선택했으며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공화파, 보나파르트파, 부르봉 왕가 지지, 자본가, 노동자, 사회주의자 등등의 온갖 정치세력들이 난립해 있는걸 나폴레옹 3세의 정치력으로 끌고가는 수준이었고 나폴레옹 3세의 바닥을 기는 외치 때문에 외부적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설명하는 칸에서 파리가 포위될 당시 에펠탑으로 파리를 표현했지만, 에펠탑이 완공된 것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고 약 20년 후인 1889년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이건 에펠탑이 파리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라 그려 놓았을 수 있다. 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에투알 개선문[9]으로 수정.(98)
  • 독일이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개척을 많지 하지 않았던 이유는 독일이 통일 후 능력을 갖췄을 때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대부분 다 갈라먹어서 남은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 이 역시 100%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설명 부분에서 오류의 측면이 많다. 당시 독일의 식민지가 적었던 것은 남은 땅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술된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수상이자 탁월한 외교관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패전 후 독이 바짝 올라있던 프랑스를 자극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고립을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했고, 엄청난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식민지 개척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차츰 성장하는 독일 내에서 세대 교체가 일어나며 국민들의 반발심을 불러왔고 그 중 하나였던 빌헬름 2세가 비스마스크가 물러나도록 하고 적극적인 팽창 정책, 확장 정책인 세계 정책을 시행하면서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시작되었다.
  • 사라예보 사건이 보스니아가 아닌 세르비아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 1차 대전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일본을 형상화한 캐릭터가 '나도 한편이데스! 덴사이(전쟁)다앗~!'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단, 이 일본어는 인쇄판 말고 87년 작가의 초판에 실려 있다.) 일본어로 전쟁은 센소-(せんそう)다. 덴사이는 でんさい(덴사이) 혹은 てんさい(텐사이)로 적을 수 있는데 애초에 일어사전에 덴사이라는 단어 자체는 실려있지 않고 텐사이는 천재를 의미한다. 즉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저 적당해보이는 일본어 발음을 마음대로 생각해 붙인 것. 21세기판에서는 '전쟁이다~앗!'으로 수정되었다. 같은 독일편에 나오는 알라 아구암빵과 비슷한 맥락의 오류로 보인다.(03)
  •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전까지만 해도 공업력이 유럽보다 뒤떨어진 2류 국가였다.
    반어법 수준으로 정반대된 오류이다. 당시 미국의 세계 공업력 비율은 34%로 영국의 3배였으며 단일 경제력만 따져도 영국의 모든 식민지를 합친 양 또는 유럽의 모든 경제력을 합친 것보다 높거나 동급이었다. 미국은 이미 19세기에 전쟁을 벌여 멕시코로부터 영토를 잔뜩 획득하고 캐나다를 합병해 북미를 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울 정도로 강대국이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20세기에는 더 말 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허나 막강한 경제력을 지녔어도 세계 사람들에게는 역시 세계를 분할했으며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제국주의 유럽의 국가들이었으며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나마 그저 돈많은 2류 국가 취급이었기에,(영국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이런 언급이 나온다) 국력으로써 2류였기보다는 세계 무대에서의 취급이 2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원인에 대해 미국의 물량공세만 언급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전세를 사실상 뒤바꿔놓은 것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고 미국이 뛰어난 산업과 자원과 인력 등을 앞세워 물량을 퍼부은 것이 승리의 주원인 중 하나인 것은 1, 2차 세계 대전 둘 다 해당되는 것이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이 패망한 주원인은 물량으로 밀어붙인 것보다는 전술이 뛰어나서이다. 1차 대전은 기존 전쟁에서 사용된 적이 없거나 미미했던 무기들이 대량살상무기로 사용되고 참호전의 양상이 강해지는 등 전쟁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계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기갑부대를 만들어 전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비롯해 전술의 전환으로 독일을 수세에 몰 수 있었다. 그가 절정에 이르며 입증된 것이 백일 전투이고 그를 통해 후퇴를 거듭하던 독일군이 항복하며 1차 대전이 사실상 종결된다.[10] 미국이 물량을 퍼부은 것만으로 선천적 호조건들을 활용해 비교적 단순하게 이겼다고 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 독일편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투르크 제국은 영토가 조각조각 났지만, 독일은 단일민족이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영토를 조각내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 실제로는 독일 제국 역시 예외가 아닌지라 영토의 상당 부분이 뜯겨져 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구 폴란드 영토였던 서프로이센 및 실레시아 지방을 신생국 폴란드에 넘겨준 것과[11] 알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프랑스에 넘겨준 것이다.[12]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이 뜯긴 것에 비하면 영토 상실에서는 상당히 양호한 편이긴 하다. 오스트리아는 아예 제국 자체가 공중분해되어 내륙국으로 전락하고 영토가 터키,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이 줄어들어 강대국에서 영구히 이탈했고, 터키는 오스트리아보다는 덜하다지만 독일보다는 많이 잃었고 잃은 지역도 오늘날 중동 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인데다 그나마 아나톨리아 반도, 이스탄불 등 그나마 건사한 지역들마저도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그리스에게 침공받아 전쟁터가 되기까지 했다.[13] 구판에서 존재한 오류로, 개정판에서는 사라졌다. 그리고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아서 3.1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추가됐다.(12) 그러나 사실 영토의 일부를 상실한 정도지 영토가 조각나지 않은 것은 맞으므로 표현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독일은 패전의 대가로 식민지들과 본토의 일부를 잃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처럼 패전의 대가로 아예 나라가 잘게 쪼개져 여러 나라로 분할되지는 않았으며 영토의 일부를 잃은 것을 가지고 조각났다고 볼 수는 없으니 표현 자체는 틀리지 않으며 작중에서도 알자스와 로렌을 비롯한 여러 영토들을 잃은 것이 언급되어 있다.[14]
    • 한술 더 떠서 오헝제국과 오스만의 영토가 뜯기는 장면도 잘못되었다. 오스만의 일부로 나오는 그리스는 진작에 독립했고 오헝에서 떨어져나오는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오스만의 땅이었으며 역시 이미 독립해 있었다.
  •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부족한 물자 생산이다?
    그렇지 않다. 당시까지는 제대로 된 공군이 없어서 적 후방을 폭격하기 애매했고 애초에 적기끼리도 서로 만나기 힘들어서 어떻게든 서로 만나기 위해서 자기가 잘 보이게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지상군은 어땠냐면 지상군도 사실 독일의 본토 깊이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단적으로 백일 전투에서 연합국이 무너뜨린건 겨우 힌덴부르크 선에 지나지 않았다. 즉 독일의 생산설비가 파괴되어 물자 생산이 모자란 것은 오류다. 물론 연합군의 장기간의 봉쇄로 독일은 루타바가 아니면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주식이 바닥나버렸기에 물자가 모자란건 맞았다. 근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전쟁이 끝나면 어느정도 해결될 문제였다. 독일 인플레이션의 진짜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 지불 때문이다. 독일 제국이 멸망한 후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막대한 빚을 돈을 찍어서 현물을 사 그 현물로 갚는다는 방침으로 찍어냈는데 그게 부작용을 일으켜서 그런거다.
  • 대공황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 일본 같이 식민지가 없었던 나라들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타국을 침략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지를 가진 열강들은 식민지에 상품을 강제로 떠넘기는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 대공황 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지표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게 악화되지 않아서 나오는 오해인데,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특히 영국은 대공황 직전까지도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쉽게 말해 이미 대공황 전부터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대공황 시기 더 악화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블록 경제는 식민지로 이득을 보았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짐덩어리인 식민지를 각종 이유로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손해를 최소화하는 고육지책에 가까웠다.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는 정치적 이유로 확장되었을 뿐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짐만 되었다는 연구가 현대 학계의 대세이며, 특히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는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는 시장과 인력 등의 확보보다 관리와 유지를 위한 인적, 물적 자원 등의 소모 측면에서의 부담이 더 클 여지가 더 많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어 부담은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식민지가 거의 없던 독일이나 소련은 그 덕에 자국의 산업 발달에 힘씀으로써 영국, 프랑스 등보다 대공황을 비교적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실제로도 이는 대공황 직전의 GDP를 기준으로 놓고 본 통계에서도 드러나는데, 대공황 후반으로 갈수록 식민지가 없거나 적은 소련,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프랑스나 영국보다 더 빠르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5]
  • 개정판에서는 오스트리아 합병, 뮌헨 협정이 나오는데 오스트리아 합병 장면에서 오스트리아가 히틀러 품에 안겨서 울고 있다. 그러나 실제 오스트리아는 과거 같은 독일 민족이었고 통일 독일에서 배제된 주 원인이었던 헝가리를 비롯한 여타 지배국들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립하자 다시금 독일과의 통일을 원하는 여론도 많았다. 실제 합병 당시에도 오스트리아 주민 대다수는 합병을 지지했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나치 독일군이 들어올 때 오스트리아인들이 열렬히 환영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나치 독일이 워낙 강력한 세력이어서 합병을 해버리면 자신들도 그 세력권에 편승할 수 있기 때문에 찬성하는 분위기가 더욱 강했을 것이다. 따라서 사실은 웃어야 고증에 맞다. 독일-오스트리아 관계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오스트리아는 지금도 독일과의 통합을 내심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16] 다만 독일과 영원히 합병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연합군의 점령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말을 않는 것뿐이지.
  •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 해당 문서 참조.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중 하나인데, 사실 이 부분도 상당히 과장된 부분이 있다. 첫째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에는 아직 유대인을 "절멸"까지는 하려는 계획이 없었으며[17] 설사 절멸을 원한다고 해도 그런 걸 대놓고 말할 리가 없다. 아무리 히틀러가 막 나가는 인간이고 당시에는 전 유럽에서 유대인을 배척하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있었다고 해도 대놓고 한 민족을 절멸시키겠다는 소리는 당대 기준으로 봐도 미친 소리나 다름 없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등은 실체가 확인되기 전까진 풍문으로만 떠도는 도시전설이었으며 의외로 독일인들 상당수도 그런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는 줄 모르고 있었다.[18] 본인들도 이게 미친 짓인 걸 알고 있어서 이를 은폐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연합군에 의해서 강제수용소의 실체가 드러나며 독일인들이 엄청난 충격과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9] 그 당시만 해도 상당히 옛날이었기 때문에 요즘처럼 작은 사건도 인터넷과 스마트기기 등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가고 가짜 정보나 의혹 등이 마구 양산되는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 대규모의 사고를 쳐도 독일 정도 되는 스케일의 국가는 그런 전시 상황에서 충분히 종전 직전까지 은폐가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진짜로 히틀러가 이런 말을 대놓고 했었다면 당시 독일인들에게도 그냥 피에 굶주린 살인마나 미치광이로 보였을테고 설령 진짜로 히틀러처럼 유대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독일인들에게조차도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아닌 히틀러의 최측근 수하 중 하나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반제회의에서 드러낸 것이 유대인을 남기지 않고 몰살하겠다는 공식 발언에 가까운 것으로[20] 히틀러가 아무리 선전선동을 과격하게 했고 반유대주의를 주창했다고 해도 대놓고 저렇게까지는 못 했다. 둘째로 해당 만화에서 " 라틴족"과 " 동양인"을 열등한 민족의 예시로 들었는데 당장에 나치 독일은 바로 그 라틴족인 이탈리아 왕국과 동양인인 일본 제국을 동맹국으로 뒀다.[21] 그런 이유에서 현재 개정판에서는 저들 대사가 사라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는데, 워낙에 인상깊은 컷이다보니 오히려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다만 흑인을 매우 폄하한 것은 사실이라서 심지어 전쟁에서 밀리고 있을 때 흑인들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선정해 영국 내에서 내분을 부추겨야 한다는 주장을 히틀러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다.
  • 유대인 3대를 멸하라?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을 차별하기 위한 법이었고 이 법에서는 순수 유대인 차별 뿐 아니라 혼혈 유대인 차별도 행하는 법이었는데 이 법은 '증조부모 중 유대인이 몇 명이 있느냐'는 것으로 기준이 갈려서 증조부모 중 3~4명만 유대인인 경우에는 독일 시민권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증조부모 중 반(4명)이 유대인인 경우에는 몇가지 조건을 지켜야[22] 독일 시민권이 인정되었다. 탄압이 더 심해졌을 때는 1급 혼혈(증조부모 중 3~4명이 유대인)의 경우 위의 조건을 충족하고 불임수술을 받아야 비유대인으로 간주하고 2급 혼혈(증조부모 8명 중 2명이 유대인)은 기본적으로는 비유대인으로 간주하나 유대인 외형을 갖추고 있거나 유대인의 정치적 종교적 견해를 따른다면 유대인으로 간주했지만 어쨌거나 3대 중 하나라도 유대인이 있으면 닥치고 가스실행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말이 이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유대인의 기준은 나치 독일이 정하기 나름이고 그게 제대로 시행되지도 않았던 터라 원칙대로 행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3대 중 하나라도 유대인 혈통이 섞여 있으면 무조건 가스실에 넣어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진 않았다.
  •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대비해 마지노 선을 건설했지만 독일이 이를 피해서 쳐들어와 허무하게 점령 당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 독일이 마지노 선을 피해 벨기에 방면으로 넘어온 것은 맞지만, 프랑스가 패배한 결정적인 요인은 마지노 선만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후 벌어진 독일의 낫질 작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서였다. 마지노 선이 직접적으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프랑스는 마지노 선만 믿고 독일이 벨기에 방면으로 넘어올 것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독일이 쳐들어올 곳은 이곳 뿐이라고 생각하고 벨기에 방면에 병력을 집중해 철저하게 대비했기에, 간접적으로는 프랑스에 유리한 판을 깔아주었다는 데서 나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프랑스군이 이후 독일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마지노 선의 역할도 함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렸다는 거지만 자세한 건 프랑스 침공 참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양쪽이 1,00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라고 하는 데 이건 완전 잘못된 오류다. 사망자 + 부상자 개념인 '사상자'를 다 합쳐도 저런 수치는 안 나오는데 전사자, 즉 사망자만 저 정도가 나왔다고 하는 건 맞는 수치일 수가 없다. 실제로는 사망자 + 부상자로 사상자 규모를 추산할 때, 추축군 사상자 85만, 소련군 사상자는 1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청색 작전까지 포함해도 양쪽의 사상자는 300만이 조금 넘는다. 제 2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5,000만~7,000만 명 가량인데[23]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무리 치열했어도 그 10분의 1이 넘는 수치가 가능할 수 없다. 아마 스탈린그라드 전투 사망자 수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포함된 독소전쟁의 사상자 수와 착각한 듯 하며, 이 경우 양쪽이 아닌 소련측에서만 그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개정판에서는 독일군 15만, 소련군 50만[24]의 전사자를 냈다고 수정.(12)
  •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지도자들과 나치에 적극 협력, 가담했던 정치 인사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처참한 처벌을 받거나 최후를 맞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 정말 처참한 최후를 맞은 인간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카를 되니츠나 펠릭스 슈타이너처럼 전범 재판에 회부되고도 가벼운 처벌을 받고 석방되어 살아남은 인물들도 있었고 그 중 천수를 누린 사람들도 있다. 또 그렇게 따지면 일본도 이 인간같이 같은 전범들에게도 인간 취급 받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얻어터지다 교수대로 간 인간도 있다.
  • 독일은 5월 7일이 아니라 5월 8일에 항복했다. 21세기 판에서 히틀러가 4월에 자살했다고 한 것은 새로만든 시리즈 개정판에서 5월로 수정되었다. 정작 이건 수정할 필요 없었다.

2.3. 통일~현대

  •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은 다시 부흥했는데, 이 때 서독은 특히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
    ☞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가장 많은 지원을 받은 것은 영국이었다. 서독은 1위인 영국, 2위인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지원을 받았다.
  • 소련-노르웨이 국경은 북극 지방이라 보급 문제로 전쟁이 터질 확률이 낮다?
    물론 노르웨이의 공산화 등을 노린 노르웨이와 소련의 전쟁은 소련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없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핀란드가 소련과 겨울전쟁 계속전쟁을 벌인 바 있으며 노르웨이의 경우 노르웨이 자체와는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노르웨이에서 전투를 벌인 적은 있다. 특히나 겨울전쟁의 경우 일방적인 침공전이니만큼[25] 방어전이나 역공의 개념으로 한정할 문제도 아니다.(12)
  • 예전에 독일이 통일되면 얼마나 인구가 많아지는지 영국과 프랑스와 비교했는데 영국 인구수가 600만이다. 서울보다 인구수가 떨어지는 영국 사실 이건 그냥 오타라고 봐도 무방하다. 21세기판에서는 6천만으로 수정.(03) 그런데 새로만든 개정판에서 다시 600만이라는 오타가 생겨났다. 문제는 현재 독일의 인구가 8천 3백만.[26]
  • 1990년 독일 통일 후 동서독에 주둔해있던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의 군대가 독일에서 철수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비록 소련군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방 연합군들은 철군했지만 정작 주독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독일에 남아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다.
  • 개정판에 있는 유럽연합 설명은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사실상 하나의 나라 드립까지 나올 정도다. 작가는 다른 책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유럽연합에 대해 긍정적이며 아이슬란드 위기 이후에 출판된 판본에서도 여전히 유럽연합에 대해 유럽연합 초창기에나 보일 법한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유럽연합 최대 수혜자 중 하나가 독일이라서 독일 유학 갔다 온 작가의 애정 보정이 들어가서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극우파가 득세하게 된 2014년 유럽의회 선거의 결과는 유럽연합의 앞날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2016년에는...

3. 종교

이하 종교 관련 내용들은 개정판에서 삭제되었다.
  • 개신교에서는 술, 담배를 입에 대지 못하게 한다.
    ☞ 독일, 영국, 네덜란드, 북유럽 등의 개신교인들은 신앙적 진정성과 관계 없이 술, 담배를 즐기는 이들이 1950년대 이전에도 많았고, 영락교회 담임목사로써 목회를 한 장로교 영성가인 임영수 목사가 쓴 <임영수 목사의 나누고 싶은 이야기>(홍성사)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신학자나 개신교 목사들이 술이나 담배를 자유롭게 하지만, 금주를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영국과 미국의 개신교는 19세기부터 속칭 '티토털리즘'으로 불리는 금주운동을 활발하게 벌였고, 구한말 한반도에 들어왔던 개신교 선교사들도 대부분이 금주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가 금주, 금연을 강조하게 된 것이지만 원래 개신교 자체가 술, 담배를 교리적으로 금지했던 건 아니다. 사실 술과 같은 경우는 문서에 나오듯 신자 내에서도 왈가왈부하는 편이다. 그리고 담배의 경우 조선 후기에 한국을 방문한 청교도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에 지나치게 취해 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고 금주와 금연을 주장한 것이 한국 개신교의 풍조가 된 것으로(실제 민족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은, 그래서 광복이후 소련군정과 공산주의자들이 정치활동을 하면서 도움을 받은 분인 고당 조만식 선생도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는데, 본래 술을 지나치게 즐기다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술을 끊었다고 한다.), 정작 담배는 영국편에 나오듯 아메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수입된 것이라, 유라시아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이전에 쓰인 성경에는 담배가 없다. 정작 미국편 10권을 보면 담배를 피우는 청교도가 나온다....(12)
  • 개신교 목사와 신부들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못하는게 원칙이다.
    ☞ 위의 내용 때문에 목사들은 술과 담배를 즐기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이나 미국 개신교 교회 한정이다. 유럽 대륙의 개신교는 목사도 신학적 방향성과 상관없이 술과 담배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영국의 경우도 성공회사제(신부)나 평신도는 음주, 흡연이 허용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성공회도 마찬가지이다. 술과 담배는 개인의 기호이며,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보기 때문. 개정판에서는 삭제.(12)
  • 미국이 독실한 청교도 국가라면서 그 예로 모르몬교를 예시로 들고 있다.
    ☞ 흔히 모르몬교라고도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기독교의 한 종파라고 볼 수 있으나 흔히들 생각하는 장로교나 감리교 등과 달리 몰몬경이라는 경전을 가지고 신에 대한 개념에도 차이가 있다. 또 한가지 사족을 달자면 몰몬교도들이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젊잖은 남자가 "한잔 할까요?"라고 하자 부인이 "커피? 홍차?"라고 말하며 커피나 홍차정도는 먹는것처럼 묘사돼있는데, 실제로는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듯 커피나 녹차, 홍차를 전혀 마시지 않는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는데 커피와 홍차는 마시는 것은 청교도에 뿌리를 둔 한국 개신교의 모습에 가깝다. 술을 안 마신다고 들었지만 커피와 홍차를 안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서 대체음료를 상상했는데 하필이면 커피와 홍차인 것....다만 '독실함'의 기준이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청교도의 예시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네덜란드편에서도 모르몬교가 개신교 교파라고 나왔다. 다만 대게 모르몬교는 이단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기독교내 이단 판별 기준중 하나인 '정경이외의 다른 성경 추가'라는 기준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단으로, 천주교에서는 아예 이교도로 본다. (12)
  • 유대교는 예수를 예언자로 여긴다.
    ☞ 사실 유대교에서 예수를 호의적으로 보는 것도 오래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예언자로 보는건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대교 계열에서는 거짓 예언자, 이단 등으로 예언자라는 평가는 차라리 나아보일 정도로 좋지 않았고 그나마 호의적인 계열도 비운의 젊은 개혁가 랍비/사상가 정도다. 그나마 메시아주의 계열은 좀 다른데 헌데 이쪽은 이쪽대로 달라서 이쪽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여긴다. 기독교와 다른 점은 단지 신성의 차이일 뿐이나 기독교처럼 메시아로 여기기에 유대교나 기독교나 메시아주의 계열은 유대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가깝게 본다.
    오히려 이러한 서술은 이슬람교에 부합하는데 이슬람교는 25인의 예언자들 중 24번째가 예수라고 주장하며 예수에 대해 상당한 애정도 가지고 있다. 이슬람권 남자 이름으로 이사( 예수의 아랍어식 이름), 여자 이름으로 마리암( 마리아의 아랍어식 이름)도 많이 쓰이는 편이다. 단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신격과 구원자 위치는 철저히 부정한다. 이슬람교에서 예수를 보는 입장은 기독교에서 세례자 요한을 보는 시각과 비슷하다.[27]

4. 사회

  • 과거의 전쟁은 대개 군인들만 희생됐지만 무기 기술이 발전할수록 군인, 민간인 가릴 것 없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 현대전뿐만 아니라 대량살상무기가 없던 근대, 전근대의 전쟁 중에서도 민간인이 잔뜩 희생된 전쟁은 숱하게 있었다. 작가가 작중 설명한 30년 전쟁만 해도 전장이 되었던 독일 내 인구 3분의 1이 희생되었으며 빈 포위, 임진왜란, 십자군 전쟁,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 등 민간인이 잔뜩 희생된 전쟁은 전근대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작중에서는 그 근거로 대부분 군인만 희생된 1차 세계대전과 민간인 희생자가 절반을 차지한 2차 세계대전,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던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었지만, 이는 참호전으로 인해 국경지대에서의 접전만 벌어진 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이나 레벤스라움 등으로 인해 민간인 학살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던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념 대립으로 인해 민간인 학살이 많았던 6.25와 베트남전의 전쟁 양상의 차이로 인한 것이지 현대전과 구식 전쟁의 차이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 범죄 그런거 없던 전근대와 달리 인권 개념이 생기고 민간인에 대한 무분별한 살상은 전쟁 범죄로 취급받아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는 현대가 민간인 살상 측면에서는 전근대보다 나은 면이 많다.[28][29]
    ☞ 다만 과거에 비해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비율은 무기가 발전할수록 높아진다는 것도 사실이다.[30] 구식 전쟁은 적어도 전방에 전력이 전멸을 당하거나 군사력이 완전히 와해되거나 기습으로 공격을 당해 민간인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제외하면 후방에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일이 적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주요한 거점을 요격하거나 미사일의 발명과 공군의 비약적 발전으로 후방까지 공략할 수 있게 되면서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일이 구식 전쟁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예전과 달리 비약적으로 인구가 성장했다는 점도 있다 즉 민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비율로 봤을 때 군인보다 많다는 애기다. 거짓말은 아닌데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개정판에서는 삭제.(12)
  • 독일편의 몇 페이지들 중에서 독일은 침략, 전쟁 등 과거사를 사과, 반성하는데 반해, 일본은 독일에 비해 과거의 잘못에 사과는 커녕 반성하지 않는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일단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물론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서 침략 밑 전쟁범죄 잘못을 사과, 반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알자스, 동프로이센, 칼리닌그라드 등 소련, 프랑스, 폴란드가 차지한 옛 독일 영토들을 포기하여 영유권 분쟁을 종식시켰다. 그런 독일이 반성, 사과도 없고 아예 다른 나라 영토인 독도를 자국 영토라 우기고 옛날에 제2차 세계대전 때 빼앗긴 쿠릴 열도 섬 4개를 돌려달라 주장하며 한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 영토분쟁을 유발하는 일본과 천지차이는 맞다. 하지만 문장에서 보면 좀 더 추가했어야 하는 부분들이 누락되어 오류가 생겼는데, 가령 일본과 늘상 비교되는 독일의 이러한 과거사 반성도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 영국 등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이나 유대인 학살에나 적용되며,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과 같이 인종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집시 독일 제국 시절 독일이 식민지로 삼았던 나미비아,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 대해선 딱히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하고 있다. 거기에 분단 시절 동독은 과거사 사과, 배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단 데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 이후에 식민지를 모두 빼앗겼기에 기간도 짧아서 그렇지, 독일 제국도 해외에 식민지들을 보유한 서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다. 독일은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미비아 탄자니아에서 흑인 원주민들 6만명, 7만 5000명 가량을 학살하였고, 이 외에도 카메룬 토고, 비스마르크 제도 등지에서도 각종 수탈과 인권 탄압, 비인간적인 강제 노역들을 자행했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다른 유럽 열강들도 식민지였던 국가들을 식민지배한 일에 대해 사과, 반성을 안 하고 있기는 독일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는 국내의 대다수 국민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반일/ 혐일 정서가 강한 한국인들도 많이들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일본도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안한 건 아니다. 물질적 배상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독립축하금이란 명목으로 일본에게 물질적 보상을 어느 정도는 받아 내기도 하였고 말로는 "유감이다" 정도는 하였지만, 문제는 물질적 보상 여부를 떠나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세가 국가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은 아직 한참 부족한데다 이를 정부가 바뀔 때마다 매번 뒤엎기를 반복하기 때문에(거기에 독도도발에 역사왜곡도 더해) 한국이 더욱더 분노하는 것이란 거다. 더 가관인건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 같이 친일 국가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 남유럽의 청소년들이 북유럽에 비해 더 빨리 성숙하는 것으로 나온다.
    ☞ 단순히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것을 넘어 남유럽 아이들은 북유럽에 비해 2차 성징이 다소 빠르다고 언급됐다. 당연하지만 별개의 종이 아닌 이상 그럴 리가 없다.(12)
  • 전반적으로 북유럽의 출산율보다 남유럽의 출산율이 높고 또한 남유럽인의 평균 자녀수가 4~7명이라고 설명하였다.
    ☞ 2010년 기준으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의 경우 출산율이 2명대 초반정도다. 한편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의 경우 합계 출산율이 1.9명, 벨기에, 핀란드, 덴마크 1.8명대이다. 이는 주요 남유럽 국가들인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출산율 1.2-1.4명대 보다 상당히 높다. 다만 독일이나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출산율은 1.4-1.5명대로 여전히 낮은 편. 따라서 단정적으로 맞다고 보기 어려운 진술이다. 하지만 작가가 유럽에 유학하고 창작을 위해 체류했을 당시라면 1975~1984년 귀국시까지이다. 당시 주요 북유럽 국가의 출산율이 피임약의 보급과 여성 사회 활동 활성화로 출산율이 2명대 중반 수준에서 1명대 후반 정도로 떨어졌었다. 이는 동시기 소련과 호주, 미국, 캐나다에서도 피임약이 널리 보급되면서 벌어졌던 현상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출산율이 2명대 중반에서 1명대 중반 수준으로 급속히 떨어졌었다. 그에 비하면 남유럽 국가들의 당시 출산율은 다소 높았다. 1970년 기준으로 스페인 2.8명 이탈리아 2.4명이다. 물론 70년대 말-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1명대로 떨어졌다. 때문에 작가가 유럽에 유학할 당시의 기준으로는 작가의 설명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요약하면 연재 초기인 1970년대 후반만 해도 얼추 맞긴 했지만, 책이 단행본으로 발간된 1987년쯤에는 알바니아(1987년 기준 3.13명)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남유럽 국가들의 출산율이 이미 1명대로 떨어졌을 때라는 것이다. 1987년 다시 남유럽 국가들의 출산율은 이탈리아 1.28명, 에스파냐 1.47명, 포르투갈 1.57명, 그리스 1.50명, 불가리아 1.96명, 몰타 1.98명이다. 즉, 시간의 간격 때문에 설명이 틀리는 경우가 발생한 것. 작가는 자신의 다른 책인 현대문명진단에서는 남유럽의 저출산 경향을 다루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져서 아이를 많이 낳는 건 옛날 얘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정작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그 내용을 여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 다만 1편 네덜란드 편 개괄 파트에서는 남유럽의 출산율이 북유럽보다 높았지만 세상이 변해 북유럽보다 낮아졌다식으로 작가가 깜빡(...)하고 안 넣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아울러 먼나라 이웃나라 초판본 네덜란드 편에서도 네덜란드의 인구증가율이 타 유럽국가에 비해 높다라는 얘기를 서술해 놓은 적이 있다. 실제로 1950년대 네덜란드 출산율이 타 서유럽 국가에 비해서 괄목할 정도로 높은 편(3명대)이었던 영향이다. 90년대 판본부터는 너무 오래된 정보라 판단해서인지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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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원복 교수는 저서에서 독일이라는 표현 대신 도이칠란트, 도이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성향이 있다. [2] 맨유의 라이벌은 지역 단위로 맨시티( 맨체스터 더비)/역사, 전통 기준으로 리버풀( 노스웨스트 더비)을 꼽는 게 더 정확하며, 첼시는 1:1로 두드러지는 라이벌이 딱히 없다. [3] AC 밀란의 최대 라이벌은 같은 연고지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이며(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 AS 로마의 라이벌은 SS 라치오(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 SSC 나폴리( 라이벌)가 맞다. [4] 현재도 나이 많은 분들이나 시골에서는 관료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5] 사실 이 장면부터가 오류가 있다. 동로마 황제가 로마 교황에게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는 배경설명에 이 장면이 나오는데, 엄연히 교황이 존재한다고 해놓고 황제가 교황을 겸한다는게 말이 안된다. 후에 서방과 동방 교회가 분리된 시점 이후라면 모를까, 이 시기는 엄연히 분리 전으로 오로지 하나의 교회만이 있는 시기였다. [6] 필리프 2세 이전에만 해도 프랑스조차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 아래 취급 받았다. [7] 카노사의 굴욕 시기의 황제, 하인리히 4세도 실은 상당한 권력을 누렸고(카노사의 굴욕도 황제권의 패배가 아닌 그냥 일시적으로 다급해져서 일어난 일에 가깝다. 진짜 황제권의 패배는 보름스 협약이다.) 그 아버지의 경우에는 자기 재위시절에 교황을 세번이나 갈아치우기도 했다. [8] 그나마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라는, 파격적인 인재기용만은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초대박을 터뜨렸다. [9] 1836년 완공. [10] 독일의 항복으로 바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교전이 중단되고 훗날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1919년에 완전히 마무리 된다. [11] 정작 뒤에 2차 세계대전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폴란드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단치히를 가져갔고, 나치 독일이 전쟁의 빌미를 잡기 위해 폴란드에게 단치히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거절 당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제대로 나온다. [12] 이후 이것은 히틀러 집권 후 루르, 라인란트 등을 돌려달라는 근거가 패전 후에는 독일인이 대거 추방당하는 이유가 된다. [13] 그나마 터키는 다행히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승리하여 잃었던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기는 했다. [14] 이것은 후에 문제를 낳는데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오헝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해체했으면서 정작 독일은 현 폴란드 지역은 폴란드인이 사는 지역이라 그렇다고 쳐도 알자스, 로렌, 주데텐란트, 자를란트 등 명백히 독일계 인구가 사는 곳까지 떼가는 바람에 후일 나치 집권 후 히틀러에게 명분을 제공해버렸다. [15] 해당 통계는 프랑스어이므로 ALL이 독일(Allemagne),E-U가 미국(états-unis), R-U가 영국(Royaume-Uni), URSS가 소련(Union des républiques socialistes soviétiques)이다. 나머지 FRA,ITA,JAP는 각각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16] 당장 사용하는 언어만 해도 독일어로 같고 문화적으로도 차이가 적으니 통합 후 불편함도 엉뚱한 나라와 합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적다. [17] 아무리 반유대주의가 득세한 국가에서도 근대쯤 되면 유대인 말살보다는 차별이 주였다. 실제 카를 마르크스의 부친이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이유가 유대인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 자신도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그를 통해 격리하려고 했지, 말살 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18]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면 남편이 유대인 학살에 참여하고 있는 나치 간부라는 사실을 아내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독일인들도 학살현장에서 유대인들 시체를 태우는 것을 보고 공장에서 나는 연기인 줄 알 정도로 그는 독일인들에게도 감춰져 있었다. [19] 홀로코스트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독일이 두번째로 세계대전에서 패전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좌절하고 절망하고 나치와 히틀러를 혐오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몇몇 사람들이 전쟁에서 졌을 뿐이지 그래도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이 그렇게 힘을 떨치고 잘 살았던 옛날이 좋았다는 사람도 꽤 생겼을 수 있다. 당시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벌써 무솔리니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향수의 광풍이 불고 있으며 반대로 독일과 미친듯이 맞붙었던 소련의 경우 모범적, 도덕적인 국가도 아니었는데도 현재 러시아에서 그 시절이 좋았다며 소련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20] 물론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히틀러에게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다. [21] 단 이탈리아 왕국이건 일본 제국이건 나치에 도움준건 하나도 없고 나치는 비록 일본을 두고 명예 아리아인으로 대우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외교관이 모욕을 당하기도 했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그랬을 뿐이고 민간 차원에서는 동양인은 열등하다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2] 유대교 신앙 포기, 독일인과의 결혼 등이 있다. [23] 연합군 사망자 6,100만 추축국 사망자 1,200만 연합군에서 추축군의 배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건 독소전쟁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보인다. [24] 정확하게는 약 48만명이다. [25] 계속전쟁은 핀란드가 공격을 하여 역공한 사례고(물론 그 기저에는 겨울전쟁에서 땅을 뜯어간 소련의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노르웨이에서의 전투 역시 나치 독일을 쥐어패다가 일어난 일이다. [26] 유럽 소속 국가라기보다는 유라시아 전체에 걸쳐있으므로 유럽 국가라고 보기 애매한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통일한국의 인구를 유럽에서 유일하게 추월할 수 있는 인구수이다. [27] 이슬람교 역시 기독교처럼 세례 요한을 존중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에서 예수를 구원자 그리스도로 모시는 데에 반해 이슬람교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의 동급으로 본다는 것이다. [28] 전근대엔 적국 민간인에 대한 약탈은 기본으로 깔고 갔으며 성이나 마을, 도시가 점령당하면 학살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29] 물론 민간인 살상을 전쟁범죄로 생각하지 않는 곳도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이 있다. [30] <가로세로 세계사> 1권 도입부에도 다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