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33:00

대학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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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상과대학 예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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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도
2.1. 유래2.2. 도입2.3. 보급
3. 목록4. 유사 사례


大學豫科

1. 개요

일본 제국 시기 대학령에 근거해 구제대학에 설치되어 자유학예 교육을 담당하며, 수료생에게는 당해학교 학부의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구제고등학교 상당의 교육 과정을 의미한다. 보통 예과라고 줄여 부른다. 현대 대한민국 의과대학, 치과대학, 한의과대학, 수의과대학에 존재하는 예과 과정이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등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대학교 全학부에 걸쳐 존재했던 것이다.[2]

2. 제도

파일:gakusei.gif
오늘날의 신학제(左)와 일본 제국 시대의 구학제(右)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일본 제국에서는 오늘날의 중학교/고등학교 통합과정에 해당하는 구제중학교를 나와도 바로 대학( 학부)에 진학할 수 없었다. 현재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6-3-3-4 학제와 달리 일본 제국 당시 학제의 진학 트랙은 소학교- 구제중학교-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 구제대학(학부)의 6-5-3-3(4)[3] 시스템이었고, 구제대학 학부는 철저하게 전공지식 중심의 전문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유학예 교육을 담당한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를 마쳐야 진학할 수 있었다.

또한 1945년 이후 미군정 통치기에 도입된 미국식 단선형 학제(單線形 學制, Single Ladder System)가 도입된( 참조) 현대 한국/일본과 달리,[4] 일본 제국 시대의 교육 체계는 유럽식 복선형 학제로서 중등교육기관 단계부터 구제중학교 외에도 실업학교 및 사범학교 등으로 나뉘어있었고 고등교육기관에는 대학 진학 예비교인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 외에도 구제전문학교(고등실업학교 포함)와 대학 전문부 그리고 고등사범학교 등 여러 트랙으로 분화되어있었다. 그러면서도 구제중학교 졸업 후 고등사범학교 또는 구제전문학교에 입학하기도 하고, 갑종(5년제) 실업학교 또는 사범학교 졸업 후에 구제고등학교로 진학하기도 하는 등 현대 독일의 학교제도[5]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교육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대학 학부에서 수준 높은 전공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대학 예비교육을 통해 지식 기반을 형성해줄 필요가 있었다. 특히 유신 이후 서구로부터 신식 문물을 도입에 열을 올리던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제국 정부는 이후 제국대학의 기원이 되는 내각 각 성(省)/청(廳) 소관의 관립 고등교육기관들을 설립하고 구미 선진국에서 교수들을 초빙하여 근대화를 담당할 전문가들을 육성했는데, 이들 외국인 교수들이 들여온 선진 외국문물을 직접 학습하기 위해서 대학 학생들에게 외국어 능력이 필수불가결했고, 이 부분이 학부 진학 전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의 교육 과정에서 선이수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중등교육을 마치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구제전문학교 대학 전문부와 달리, 실업학교나 사범학교에서 진학하려는 사람들을 포함해 구제중학교 졸업생 중 대학(학부)으로 진학하고자 하는 자에게 외국어 교육을 중점으로 오늘날의 대학 1~2학년의 기초교양 및 전공 기초를 가르치는 대학 예비교육기관인 대학예과가 존재했다.

2.1. 유래

유신 이후 서구권으로부터 신식 문물을 도입에 열을 올리던 당시 메이지 시대 초기에 고등교육, 특히 고등전문교육을 받기 위해서 외국어 지식은 필수불가결했다. 당시 일본제국 정부는 내각 각 성(省), 청(廳) 소관의 관립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근대화를 담당할 전문가들을 육성했는데, 해당 학교의 교수진이 구미 국가에서 초빙한 외국인들로 이루어져있었기 때문이다. 문부성 관할 학교 중에서도 도쿄제국대학 법과/문과/이과대학으로 이어지는 동경개성학교(東京開成學校)에서는 영국/미국 출신 교수들이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고,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인 동경의학교(東京醫學校)에서는 영국인들에게 영어로 배우다가 독일인으로 교체되며 독일어 중심이 되었다. 공부성(工部省)의 공부대학교(工部大學校)에서는 영국인 공학자를 초청하여 고급 공학 교육을 실시했고, 홋카이도 개척사의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에서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등 미국인이, 농상무성 소관 고마바농학교(駒場農學校)와 동경산림학교(東京山林學校)에서는 독일인이, 사법성 산하의 법학교(法學校)는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교수들이 초빙되었다. 문부과학성 학제100년사 참조.

이러한 고등교육기관에서 서양인들로부터 직접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했던 외국어 능력 배양을 중심으로 예비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구제고등학교의 전신인 고등중학교였다. 내각 각부처 소관의 고등교육기관을 문부성 예하의 도쿄제국대학으로 통합되었고, 삿포로농학교는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을 거쳐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승격되는 등 제국대학으로 종합되며, 제국대학의 예과로서 고등중학교를 근간으로 하는 구제고등학교 제도가 성립되었다. 일본제국은 소학교령, 중학교령, 전문학교령, 고등학교령, 제국대학령 등을 통해 교육 제도를 정립하면서 제국대학과 달리 자국인 교수요원들이 실무요원을 양성하는 구제전문학교 수준에서는 이러한 대학 예비교육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여 구제중학교 졸업자가 바로 입학할 수 있게 했으나, 제국대학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를 졸업해야 진학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6]

2.2.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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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일람(1945년)

메이지 19년( 1886년) 발족한 제국대학의 예비교육기관으로 규정된 고등중학교의 본과(本科, 2년제)를 전신으로 하여 메이지27년( 1894년) 칙령 제75호 고등학교령에 의거하여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자를 위한 대학예과(3년제)가 구제고등학교에 설치되었다. 다만, 1894년 6월 제1차 고등학교령 공포 당시만 해도 도쿄에 유일한 제국대학을 두고 구제고등학교는 칼리지로서 각 지방의 최고 학부로 의도되어 기존 고등중학교의 전문과(專門科, 3년제)의 후신인 전문학부(4년제)가 필수 과정으로 규정되었고, 제국대학의 예과인 대학예과는 제2과정으로 설정되었다.[7] 이에 따라 당초 7개교가 존재했던 고등중학교 중에서 제3고등학교는 의학부,[8] 법학부[9]·공학부[10] 등의 전문학부만 두고 고등중학교 본과를 폐지하여 대학예과가 설치되지 않았다. 더불어 1896년 폐지된 가고시마고등중학조사관(鹿兒島高等中學造士館) 등 2곳을 제외하고 제1고( 도쿄), 제2고( 센다이), 제4고( 가나자와), 제5고( 구마모토), 야마구치고 등 5개 고등학교에 대학예과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 대청제국에서 받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활용해 서일본의 최고 학부로 제2의 제국대학을 창설한다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구상이 채택됨에 따라 제3고등학교의 법학부와 공학부를 모체로[11] 교토제국대학이 창설되면서 이후 지방의 최고학부 역할은 증설되는 제국대학 및 관립 전문학교가 맡게 되었고, 고등학교는 당초 전문학부(College) 중심 계획에서 제국대학의 예과로서 역할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기존 재학생이 모두 졸업한 1901년 4월 제3고등학교의 법학부와 공학부가 폐지되었고, 동년 각 고등학교의 의학부가[* [구제고등학교의 의학부들은 1887~1888년 고등중학교로 편입되기 전부터 각 번에서 설치한 병원과 의학교로 오랜 역사와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등중학교 본과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던 관계로 1901년에 전부 관립 의학전문학교로 분리되어 나왔다.] 의학전문학교로 독립했다.[12] 1897년 구마모토에 설치된 제5고등학교 공학부가 1906년 구마모토 고등공업학교로 분리되면서 고등학교에는 대학예과만 남게 되았고, 오카야마의 제6고등학교, 가고시마의 제7고등학교조사관,[13] 나고야의 제8고등학교 등 신설 고등학교는 별도의 전문학부 없이 대학예과만 설치하였으므로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의 공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2.3. 보급

1차 대전 후에는 다이쇼 시대의 호황과 맞물려 진학 수요가 폭발함에 따라 구제전문학교 이상의 차상급 고등교육기관 설립 요구에 부응하여 대학령이 시행되면서 관공사립 각종 구제대학의 설립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제국대학이나 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자랑한 관립의대로의 진학이 가능했던 구제고교생들이 여타 대학에 진학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그렇다고 구제고등학교를 증설하는 것은 기존에 고교 졸업시 보장되었던 제국대학 학부 입시를 과열시켜 그 예과격으로 정의된 구제고등학교 제도 자체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구제고교를 늘리는 대신 개별 대학내에 자체적으로 대학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예과를 부설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령(大學令)
- 다이쇼 7년 12월 6일 칙령 제388호
(...)
제9조: (1) 학부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당해 대학예과를 수료한 자, 고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자 그리고 문부대신이 정한 바에 의거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인정받은 자로 한다. (2) 입학 순위에 관한 규정은 문부대신이 정한다.
제12조: (1) 대학은 특별히 필요한 경우에 예과를 둘 수 있다. (2) 대학예과에서는 고등학교 고등과의 정도에 의거 고등보통교육을 실시한다.
제13조: (1)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은 3년 또는 2년으로 한다. (2) 수업연한 3년인 대학예과에 입학할 수 있는 자: 중학교 제4학년을 수료한 자 또는 문부대신이 정한 바에 의거해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인정받은 자. (3) 수업연한 2년인 대학예과에 입학할 수 있는 자: 중학교 를 졸업한 자 또는 문부대신이 정한 바에 의거해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인정받은 자.
제14조: 대학예과의 설비, 편제, 교원 및 교과서 등은 고등학교 고등과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제15조: 대학예과의 학생 정수는 매년 예과 수료자의 인원수와 그 해 당해 대학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수를 초과하는 정도로 한다.
제16조: 대학 및 대학예과의 학칙은 법령의 범위 내에서 당해 대학에서 정하여 문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
대학령 제9조 제1항은 "학부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당해대학예과를 수료한 자, 고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자 그리고 문부대신이 정한 바에 의거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인정받은 자로 한다."고 하여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이 아니더라도 당해대학의 예과수료자는 학부 과정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령에 따라 대학의 부속 기관으로 설치되는 대학예과는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가 개칭된 고등과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는 곳으로 규정되어, 설비 편제 교원 교과서 등 관련 구제고등학교 관련 법령을 준용하도록 했다.

대학령 시행과 더불어 개정된 고등학교령(제2차)에 따라 구제고등학교의 대학예과(大學豫科)는 고등과(高等科)로 개칭되었고, 구제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심상과(4년제)를 같이 두는 7년제 고교 설립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대학예과의 수업연한도 7년제 고등학교 제도[18] 도입에 발맞추어 구제중학교 5년 졸업을 요구하는 곳의 경우는 2년, 4년 수료를 요건으로 하는 곳은 3년으로 했다. 세부 구성 역시 구제고교와 마찬가지로 문과/이과로 나뉘었으며, 설치된 학부에 따라 문과나 이과만 단독으로 설치된 경우도 있었고, 지망 학부에 따라 세부적으로 분반되기도 했다.[19] 외지[20] 및 해외에도[21] 대학예과가 설치 운영되었다.

3. 목록

3.1. 제국대학 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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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의 예과 역할은 당초 구제고등학교내에 설치된 대학예과[29]가 담당했다. 그런데 구제고교가 없었던 홋카이도에 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30] 제국대학 부속으로 예과를 두었고, 이후 홋카이도를 모델로 하여 조선 대만 제국대학에도 예과를 부설하면서 홋카이도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다이호쿠제국대학 등 3개 제국대학에는 부속기관으로 예과가 설치되었다. 이 제국대학의 예과들은 구제고등학교로 분류되며, 상세 내용은 구제고등학교 문서의 제국대학예과 항목 참조.

3.2. 관립대학 예과

관립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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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구제고등학교 의학부로 포괄되기도 했었던 의학전문학교가 승격된 관립의대 관립대학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만큼 제국대학 학부와 동일하게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입학시험을 실시하여[44] 신입생을 충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별도 예과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관립문리대[45] 2개교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소속 기관으로 존치되었고[46] 다른 고등사범학교에서도 신입생 자원이 계속 공급되었기 때문에 따로 예과를 두지 않았다.[47]

고등실업학교를 근간으로 설립된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관립공대 3개교는 모두 대학 승격 이전 기존 고등공업학교 과정 재학생들을 부속 공학전문부에 수용했다가 최후 신입생이 졸업한 후에 폐지했다.[48] 이후 도쿄공업대학 오사카공업대학(구제)은 예과를 설치하지 않고 각지의 고등공업학교 졸업생 등을 받았으나, 관동주에는 구제고등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기관 자체가 부재했던 관계로[49] 현지 학생들의 진학을 가능케 하고 안정적으로 신입생을 확보하기 위해 여순공과대학에는 예과가 설치되었다.[50] 도쿄공업대학 특설예과는 중국인 유학생을 위한 도쿄고등공업학교의 1년제 예비교육 과정이 기원으로[51] 1929년 대학 승격과 함께 고등공업학교 수준의 3년제 과정으로 개편되었으나[52] 관제에도 없는 非편제 과정이었던 것을[53] 1932년 10월 쇼와 7년 칙령 제285호[54]로 개정된 도쿄공업대학관제에 근거를 삽입해 부속 예비부로 제도화되었다.[55]

도쿄상과대학 고베상업대학 등 관립상대 역시 기존 고등상업학교 과정인 부속 상학전문부를 폐지하고 별도 예과 없이 각지의 고등상업학교 졸업자를 입학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다만 비교적 일찍부터 구제대학으로 먼저 정립된 도쿄상과대학에는 도쿄상과대학관제와 그 전부개정안인 관립상업대학관제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미 대학예과가 설치되고 부속 상학전문부도 존치되어있었다. 고베상업대학의 부속 상학전문부 폐지를 앞둔 시점에 정부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당초 목적에 부합하도록 도쿄상과대학의 예과 및 부속 상학 전문부도 함께 폐지하여 구제고교 또는 여타 고등상업학교 졸업생들을 받도록 한다는 구상이었으나, 농성사건(籠城事件)[56] 발생하는 등 반발이 극심했기 때문에 결국 1932년 4월 고베상업대학 부속 상학전문부만 폐지되고 도쿄상과대학 예과 및 부속 상학전문부는 존속하게 되었다. 오히려 1940년 5월 고베상업대학에도 별도의 예과를 부설하게 되었다.

여타 관립대학들과 다소 이질적인 신궁황학관대학은 1940년 대학을 설립하며 예과부터 설치했고[57] 1년 후인 1941년 예과와 별도로 부속 전문부[58] 신설했다. 신궁황학관 본과를 계승한 부속 전문부는 국어한문(國語漢文), 역사, 신도 교과목이 교육 과정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데 반해서 예과는 외국어 교과에 수업 시수의 1/3 이상을 배당하는 등[59] 어학이 강조되었고 구제고등학교와 같이 자유로운 교양주의 학풍 속에서 수학했다고 한다.[60] 외국어 교육과 평가 수준이 높았던 관계로 중도 탈락율도 높았으나,[61] 예과 수료생들은 1942년 10월 설치된 학부의 입학생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62]

3.3. 공립대학 예과


대학령에 의거 설립된 공립대학은 오사카상과대학을 제외한 4개교가 모두 의과대학이었지만, 관립대학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떨어졌으므로 구제고등학교 졸업자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웠기 때문에 예외없이 예과를 설치했다. 공립대학 중 제국대학 설립의 모체가 된 부립 오사카의과대학[78] 관립으로 이관된 현립 아이치의과대학[79] 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80] 등은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신입생을 충원하게 되면서 1930년대에 예과가 폐지되었고, 오늘날 신제 공립대학으로 개편된 교토부립의과대학 오사카상과대학에서는 전후 학제개혁 때까지 예과가 존속 운영되었다.

3.4. 사립대학 예과

관공립대학에 비해 선호도가 떨어지는 사립대학의 경우 1945년 패전 당시 기준으로 내지 소재 28개교를( 참조) 비롯해 만주제국 봉천부 소재 만주의과대학이나 중화민국 상하이시 소재 동아동문서원대학까지 예외없이 전부 예과를 부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와세다대학은 대학예과에 와세다고등학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사립대학 예과는 3년제와 2년제가 혼재되어있었으며 3년제인 곳 중에는 구제중학교 졸업 후 2학년으로 편입가능한 곳도 있었다.

4. 유사 사례


[1] 1933년 9월 現 히토츠바시대학 코다이라 국제캠퍼스 위치로 이전한 예과 교사의 모습이다. 1936년 당시 캠퍼스 항공사진 링크 참조. [2] 오늘날 의예과 2년, 의학과(본과) 4년 과정이라면 당시 예과와 학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예과 3년, 학부 3년(의학부는 4년) 체제로, 학부생들은 오늘날의 연구실과 비슷한 개념의 강좌 또는 세미나에 소속되어 철저하게 전공 중심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교양교과 및 전공기초 교육은 예과에서 담당했다. [3] 구제대학 의학부 또는 구제 의과대학의 경우는 대학령에 규정된 바와 같이 기본 수학연한이 최소 4년이었다. [4] 미군정기 대한민국의 학제 변천 과정과 관련해서는 오성철, "한국 학제 제정 과정의 특질, 1945〜1951", 2015 참조. [5]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803312_STD.jpg [6] 원래 구제고등학교에는 대학예과 외에도 법학부, 의학부, 공학부 등의 전문학부가 존재했다. [7] 고등학교령 제2조 고등학교는 전문학과를 교수하는 곳이며 다만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자를 위한 예과를 둘 수 있다(第二條 高等學校ハ專門學科ヲ教授スル所トス但帝國大學ニ入學スル者ノ為メ豫科ヲ設クルコトヲ得) 원문 참조.) [8] 1888년 오카야마현의학교(現 오카야마대학를 제3고등중학교 의학부로 편입. [9] 1890년 제3고등중학교 법학부 신설. [10] 1894년 제3고등중학교에서 제3고등학교로 개편되면서 공학부를 신설. [11] 원격지인 오카야마현에 소재한 의학부는 교토제국대학에 포괄될 수 없었으므로 1901년 별도의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로 독립. [12] 제1고등학교 의학부는 치바의학전문학교로 독립하여 이후 구제 치바의과대학을 거쳐 신제 치바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제2고등학교 의학부는 센다이의학전문학교로 분리된 후 도호쿠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로 재흡수되었다. 제3고등학교 의학부는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로 독립하여 구제 오카야마의과대학을 거쳐 신제 오카야마대학의 근간이 되었고, 제4고등학교 의학부 역시 가나자와의학전문학교와 구제 가나자와의과대학을 거쳐 신제 가나자와대학 의학부로 통합되었다. 제5고등학교 의학부도 나가사키의학전문학교, 구제 나가사키의과대학을 거쳐 신제 나가사키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13] 고등학교로 [14]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야마구치 고등상업학교로 개칭하는 건(山口高等學校ヲ山口高等商業學校ト改稱スルノ件) [15] 1904년 전문학교령 공포 후 對清,韓 무역 전문가 양성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구 야마구치고등학교를 3번째 관립 고등상업학교로 개편. 상세 내용은 야마구치대학 소개 참조. [16]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와 별도로 1919년 (재흥)야마구치고등학교가 설립되며, 야마구치고상과 야마구치고교는 전후 신제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와 문리학부로 개편. [17] 당초 전문학부로만 구성되어있었던 제3고등학교의 법학부와 공학부를 모체 교토제국대학으로 이관되면서 대신 새롭게 대학예과를 제3고교에 설치. [18] 기존 심상중학교 과정인 심상과(4년제)를 통합한 7년제 고등학교를 만들어 구제중학교(5년)+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3년)의 8년 과정을 1년 단축하고자 했다. 상세 내용은 구제고등학교 문서 참조. [19] 현대 도쿄대학의 문/이과 1~3류 시스템이 과거 구제대학들의 예과-학부 체제에 가까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한다. [20] 조선 경성제국대학 대만 다이호쿠제국대학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 모델을 도입하여 제국대학예과를 설치하고 편성과 기능은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의 것을 본땄다. 이외에 일본제국의 조차지였던 관동주에 있던 관립대학 여순공과대학에도 예과가 설치되어 있었다. [21] 사립대학인 만주 봉천부 소재 만주의과대학 상하이 소재 동아동문서원대학에 예과가 설치 운영되었다. [22] 제1항 "농과대학에 '대학예과', 토목공학과, 임학과 및 수산학과를 부설하고, 조교전임 16인과 조교수전임 7인을 둔다." [23]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을 설립하면서 그 모체인 삿포로농학교의 예수과(豫修科)를 대학예과로 개편. [24] 제1항 "홋카이도제국대학에 '대학예과', 토목전문부, 수산전문부를 부속으로 두고, 교수전임 28인과 조교수전임 11인을 둔다." [25]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이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독립되면서, 그 예과도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로 개칭. [26] 제1항 "경성제국대학에 예과를 둔다." [27] 1928년 3월 17일 쇼와 3년 칙령 제31호 '다이호쿠제국대학관제'를 일부개정하는 칙령. [28] 제1항 "다이호쿠제국대학에 예과를 둔다." [29] 제2차 고등학교령에 따라 1919년 4월 1일부 고등과로 개칭. [30] 정확하게는 1886년 제국대학 성립 이전 구 도쿄대학을 구성한 내각 각부 소속 학교들처럼,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를 비롯한 미국인들을 초빙해 직접 교육을 받던 제국대학급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삿포로농학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내부에 預修課라는 예과격의 예비교육기관이 설치되어있었다. 1907년 삿포로농학교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그 예수과를 농과대학 예과로 개편했고,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독립하면서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가 되었다. [31] 대학령 다이쇼 9년 칙령 제71호 東京商科大學官制에 의거 도쿄고등상업학교 전공부(본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2년제 교육과정)를 모체로 도쿄상과대학 설립. [32] 東京商科大學官制 [33] (1) 도쿄상과대학에 예과를 둔다. (2) 예과에 교수전임 10인, 조교수전임 4인을 둔다. (3) 교수는 주임, 조교수는 판임으로 하고 생도의 교육을 맡는다. (3) 예과주임 1인을 두고 예과교수 중에서 문부대신이 보한다. (4) 주사는 대학장의 명을 받아 예과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며, 직원을 감독하고, 생도의 훈육을 주관한다. [34] 1920년 4월 도쿄고등상업학교 전공부를 모체로 '도쿄상과대학'이 설립되면서 상학부(3년제)와 함께 기존 도쿄고등상업학교 본과 재학생들을 수용할 예과(3년제)와 부속 상학 전문부(관제 제15조), 고등상업학교 등의 교원을 양성하는 부속 상업교원양성소(관제 제16조) 등을 설치. 예과는 당초 도쿄시 칸다구 히토츠바시에 위치해있었으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히토츠바시 캠퍼스의 도서관과 미츠이홀을 제외한 全건축물이 붕괴 또는 대파되자 1924년 4월 네리마구 샤쿠지이 소재 임시교사를 거쳐, 상학부와 상학전문부가 이전한 쿠니타치캠퍼스 인근의 기타타마군 코다이라무라(北多摩郡 小平村), 현재의 히토츠바시대학 코다이라캠퍼스로 이전하였고 구제 도쿄상과대학이 신제 히토쓰바시대학으로 개편되면서 1950년 예과 폐지. [35] 대학령 다이쇼 11년 칙령 제160호 旅順工科大學官制에 의거 여순공과학당을 근간으로 여순공과대학 설립. [36] (1) 여순공과대학에 예과를 둔다. (2) 예과에 다음 직원을 둔다. 교수전임 1인(주임), 조교수전임 2인(주임), 주사. (3) 교수와 조교수는 생도의 교육을 맡는다. (4) 주사는 예과교수 중에서 관동장관이 보하며, 대학장의 명을 받아 예과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며, 직원을 훈육하고, 생도의 훈육을 주관한다. [37] 1922년 4월 여순공과학당을 모체로 '여순공과대학'이 설립되면서 공학부와 함께 기존 여순공과학당 본과 재학생들을 수용할 예과(3년제)와 부속 공학 전문부(관제 제6조) 등을 설치. 1945년 8월 소련군에게 만주가 점령당하여 구제대학 여순공과대학 폐교와 함께 폐지. [38] 대학령 쇼와 15년 칙령 제288호 神宮皇學館大學官制에 의거 내무성 소관 신궁황학관을 모체로 문부성 소관의 관립 신궁황학관대학 설립. [39] (1) 신궁황학관대학에 예과를 둔다. (2) 예과에 교수 및 조교수를 둔다. (3) 교수는 전임 5인 주임, 조교수는 전임 1인 판임으로 하고 생도의 교육을 맡는다. (3) 예과에 예과장 1인을 두고 예과교수 중에서 문부대신이 보하며, 대학장의 명을 받아 예과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직원을 감독한다. [40] 1940년 4월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여 관립 전문학교급 신궁황학관을 모체로 관립대학인 신궁황학관대학이 설립되면서 수학연한 3년의 예과를 설치. 학부(3년제) 진학 코스인 예과와 별도로 기존 신궁황학관을 계승하는 부속 전문부(3년제)를 1941년 4월 설치. 전시수학연한 단축조치에 의해 1940년 4월 입학한 예과 제1회 신입생이 수료하는 1942년 10월 학부가 설치되어 종전 후1945년 9월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신도지령에 따라 쇼와 21년 칙령 제135호 신궁황학관대학관제폐지의건에 의해 신궁황학관대학 학부 2회 졸업생, 부속 전문부 3회 졸업생 배출 후 폐교되었다. 1962년 요시다 시게루의 전폭적 지원하에 재흥 황학관대학( 고각칸대학)으로 복교되었다. [41] 대학령 쇼와 4년 칙령 제38호 官立商業大學官制에 의거 제2관립 고등상업학교인 고베고등상업학교를 기반으로 고베상업대학 설립. [42] 관립상업대학관제 제16조('도쿄상과대학에 예과를 둔다. 예과에 교수와 조교수를 둔다. 교수는 주임, 조교수는 판임으로 하며 생도의 훈육을 맡는다. 예과에 주사를 두고 예과교수 중에서 문부대신이 보한다. 주사는 대학장의 명을 받아 예과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며, 직원을 감독한다.) 중 "도쿄상과대학"을 "관립상업대학"으로, "주사"를 "예과장"으로 고친다. 제19조(관립상업대학, 도쿄상과대학예과 및 도쿄상과대학 부속 상학전문부의 전임직원의 정원은 별표에 의한다.) 중 "도쿄상과대학 예과"를 "관립상업대학 예과"로 고친다. 별표(官立商業大學職員定員表) 도쿄상과대학의 항에 조교수의 정원을 "11인"에서 "10인"으로, 동표 고베상업대학의 항에 조교수의 정원을 "11인"에서 "10인"으로, 동항 학생주사의 정원을 "1인"에서 "2인"으로, 동항 서기의 정원을 "9인"에서 "10인"으로, 동표 중 대학예과 교수 "도쿄상과대학 23인, 고베상업대학 -"을 "도쿄상과대학 23인, 고베상업대학 9인"으로, 대학예과 조교수 "도쿄상과대학 5인, 고베상업대학 -"에서 "도쿄상과대학 5인, 고베상업대학 2인"으로 고친다. [43] 1929년 4월 고베상업대학 설립 당시에는 기존 고베고등상업학교 본과 재학생을 수용할 부속 상학전문부만을 두었으나 관제 개정을 통해 1940년 5월 도쿄상과대학과 동일한 3년제의 예과를 부설. 예과는 구제 고베상업대학(고베경제대학)이 신제 고베대학으로 통합되면서 1950년 고베대학 문리학부・교양부 미카케분교(御影分校)로 개편. 고베대학은 캠퍼스 통합 전까지 교양부가 미카게분교(고베상업대학 예과의 後身)와 히메지분교(히메지고등학교의 後身)로 나뉘어있었다(문리학부는 미카케 캠퍼스에 소재). [44] 1926년 기준 니가타의과대학 60명, 오카야마의과대학 61명, 치바의과대학 61명, 가나자와의과대학 60명, 나가사키의과대학 63명 등 각 관립의대별 60명선으로 총 305명을 모집했다. 참조 [45] 도쿄문리과대학 히로시마문리과대학. [46] 1929년 4월 1일 쇼와 4년 칙령 제39호 고등사범학교관제 및 제40호 문부성직할제학교관제중개정의건에 의거 문부성 직할 학교였던 고등사범학교들이 '도쿄문리과대학 도쿄고등사범학교', '히로시마문리과대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로 각 문리대 소속 학교가 되었다. [47] 물론 도쿄문리과대학 히로시마문리과대학에는 고등상업학교, 고등농림학교 등 기타 고등실업학교 졸업생들이 입학하기도 했다. 참조. [48] 1922년 여순공과대학 설립 후 전신 여순공과학당(4년제) 과정을 여순공과대학 부속 공학전문부로 개편한 뒤 1926년 2월 폐지. 1929년 설립된 도쿄공업대학 오사카공업대학(구제)은 전신인 도쿄고등공업학교 및 오사카공업대학(구제)를 부속 공학전문부로 편성했다가 1932년 3월 폐지. [49] 구제 여순고등학교는 1940년 개교, 여순 의학전문학교는 1942년, 대련 고등상업학교는 1936년 사립으로 설립되어 1941년 관립 이관, 대련여자의학전문학교는 1945년이 되어서야 설립된다. 공학(工學) 교육기관은 여순공과대학이 설립된 192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철 재단의 남만주공업전문학교(南滿洲工業専門學校)가 실업학교(공업학교)에서 고등실업학교( 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었던 만큼 여순고교 설립 전인 1920~1930년대 당시 관동주에서 여순공과대학 학부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여순공대 예과가 유일한 루트였다. [50] 여순공과대학은 전신인 여순공과학당 시절인 1916년부터 일본제국과 학제가 다른 중국의 학생들에게 일본어 및 기초학과 교육을 실시한 후 본과 입학 자격을 부여하던 예과를 설치해 운영한 전통이 있었고, 중국인 학생들을 위한 이 여순공과학당의 예과는 여순공과대학 설립 이후 예비과로 개편되었다. [51] 도쿄고등공업학교는 1901년부터 청나라 유학생을 선과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본과 입학을 희망하는 유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1906년 특별생 규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어 1907년 8월 대청제국 정부와 일본 제국 문부성 간의 교육위탁협정인 '5교 특약(五校特約)'이 체결되어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의 문호가 청국인 유학생들에게 개방되면서 제1고등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치바 의학전문학교, 야마구치 고등상업학교 등과 함께 지정학교가 되어 대청제국 관비 유학생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하자 도쿄고등공업학교는 특설예과를 두어 청국인 유학생들에게 1년간의 예비교육을 시킨 후 본과로 진입시켰다. 5교특약이 1922년 만기 해지되자, 일본 제국 외무성이 대지문화사업(對支文化事業)을 시행하여 제1고등학교, 도쿄고등공업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나가사키고등상업학교, 메이지전문학교( 후쿠오카),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등 7개교에 중국인 유학생을 받았다. 논문 참조. [52] 당초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특설예과는 구제전문학교 본과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고 구제대학의 예과가 아니었으나, 1904년 일본 제국을 모델로 도입된 청나라의 계묘학제(癸卯學制)가 1922년 공포된 임술학제(壬戌學制)로 대체되며 미국과 같은 6-3-3 교육시스템이 북벌이 완수된 1928년경부터 정착에 들어가자, 중국에서는 해외유학 중심이 대학급 이상으로 전환되면서 미국으로 쏠림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인 유학생이 일본의 관립대학에 진학하려는 경우에는 우선 동아고등예비학교 등에서 일본어를 학습하고, 다시 특설예과를 거쳐 관립전문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후에 비로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 대학에 유학하는 것에 대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중국인 유학생은 대부분 사립 대학(주로 부속 전문부)에 유학했고, 제국대학이나 관립대학에 재적하는 케이스는 아주 드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화민국의 초대 주일유학생 감독에 임명된 강기(姜琦)는 '중국 고급중학교 졸업생이 미국으로 유학하면 대학 1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는 데 반해, 일본에 가는 경우는 구제전문학교에 바로 입학할 수 없고 특설예과를 거쳐야 하므로 일본 유학생은 미국 보다 대학 졸업까지의 연한이 4~5년 늦어져버린다.'며 유학생 예비교육도 종래의 전문학교 본과 진학을 위한 것에서 대학 예비교육으로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일본제국 문부성과 외무성은 특설대학예과 설치 작업에 나섰고, 유치 경쟁에 나선 도쿄공업대학은 기존 도쿄 고등공업학교 과정인 부속 공학전문부와 마찬가지로 특설예과를 수료시 학부 진입이 가능한 3년제로 편성했으나, 제국 정부의 결정은 제1고등학교특설고등과를 설치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논문 참조. [53] 특설대학예과 유치 경쟁에서 제1고등학교에 패배한 도쿄공업대학은 그 후에도 3년제 특설예과에서 계속 동 대학 학부에 진학할 유학생들을 위한 대학 예비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도쿄공업대학 관제에 규정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교수도 없이 강사 제도를 이용해 타 학과에 속한 교관이 남는 틈에 출강하거나 외부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특설예과 운영이 유학생의 교육에 결함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사유로 도쿄공업대학은 도쿄공업대학관제에 해당 과정을 포함시켜줄 것을 문부성에 상신했다. [54] 官立工業大學官制中改正ノ件( 관보게재본) 참조. [55] 쇼와 7년 10월 1일 칙령 제285호에 의거 관립공업대학관제를 개정하여 다음과 같이 추가. "제15조2" (1) 도쿄공업대학은 동대학 학부에 입학하고자 하는 외국인 유학생의 예비교육을 하기 위한 부속 예비부를 둔다. (2) 예비부에 교수·조교수·조수를 두고, 교수는 주임, 조교수와 조수는 판임으로 하며 교수와 조교수는 생도의 교육을 담당하고 조수는 교수와 조교수의 명을 받아 원업과 실험의 보조에 종사한다. (3) 예비부에 주사를 두고 예비부 교수 중 문부대신이 보하며, 주사는 대학장의 명을 받아 예비부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직원을 감독한다. [56] 1931년 10월 1일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특종 보도로,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 " 구제고등학교가 있으므로 별도의 대학예과는 필요없고, 구제전문학교가 있으므로 역시 부속전문부 또한 불필요하다."는 대장성의 의견에 따라 도쿄상과대학 예과 및 부속 전문부 폐지를 계획했음이 알려지자 도쿄상과대학의 교수진·학생·동창회(如水会)가 대장대신·문부대신 관저에 몰려가 항의하였으며, 특히 재학생들이 히토츠바시 캠퍼스를 점령 농성하면서 가두 데모를 실시하고 경찰과 충돌해 검속 당하는 학생들이 발생하고, 전교생 2,000명이 총퇴학을 결의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한 사건이다. [57] 30명씩 2개 학급 편성으로 제1회 신입생 63명. [58] 부속 전문부 졸업생에게는 고등신직( 국가신토의 신관 직제)을 부여하고 중등학교의 수신 교과 교원 면허를 주었다고 한다. [59] 주당 수업 34시간 중 제1외국어인 독일어 8시간, 제2외국어인 영어 4시간씩 편성. [60] 이와 관련해 1942년 4월 신궁황학관대학 예과에 제3회로 입학하여 1944년 9월 수료하고 학병으로 나가 중일전쟁에 참전, 2차 대전 종전 후 귀국한 뒤 구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교토대학 교육학부 조교수, 교수, 명예교수를 역임한 모토야마 유키히코(本山幸彥)의 회고 神宮皇学館大学予科の教育 참조. [61] 63명이 예과에 입학해 당초 3년 과정을 전쟁으로 2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학부로 진학하는 시점에는 38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황학관학원보 제79호(2019.3.31) K-라이프 4쪽 참조. [62] 제1회 학부 입학생 58명 중 예과 수료생 38명, 전문학교 시절 신궁황학관 본과 졸업생 18명, 오사카고등학교 졸업생 1명, 교토제국대학 부속 임시교원양성소 수료생 1명 등이었다고 한다. 신궁황학관대학 교지인 황학관학원보 제79호(2019.3.31) K-라이프 4쪽 참조. [63] 1838년 데키주쿠를 기원으로 1873년 오사카부립병원, 1880년 오사카부립의학교가 설립되고 1903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부립 의학전문학교가 된 오사카고등의학교가 1915년부터 부립 오사카의과대학을 칭하고 있다가 대학령이 반포되자 1919년 대학령에 의거한 최초의 공립대학으로 정립되었다. 이를 의학부의 모체로 1931년 오사카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64] 오사카부 전문학교령에 의거 설립된 오사카부립의과대학을 폐지하고, 대학령에 의한 오사카부립대학을 설립하는 건을 다이쇼 8년 11월 22일 인가한다. [65] 의학전문학교 시절인 1915년부터 전문학교령에 의거한 부립 오사카의과대학을 자칭하면서 예과를 3년제로 개편해 4년제인 본과까지 도합 수학기간 7년으로 제국대학 의학부와 동일하게 했고, 1919년 대학령에 의거 구제대학으로 인가받으면서 예과도 함께 공인되었다. 1928년 일본 제국 정부의 고등학교 정비계획 발표 후 대학예과 제도의 일대 개편이 예상됨에 따라, 오사카의과대학은 1929년부터 예과 신입생 모집을 정지하고 1928년 예과 입학생이 수료하는 1931년 3월 예과 폐지. 교직원과 물적 자산 등은 오사카의과대학 예과 캠퍼스를 공유하면서 1926년에 설립된 부립 나니와고등학교로 이관( 역사소개 참조). [66] 1871년 오와리번에 개설된 仮病院, 仮醫學校를 기원으로 1901년 설치된 아이치현립의학교가 1920년 대학령에 의거한 아이치현립 아이치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 현립 아이치의과대학이 1931년 관립(국립)으로 이관되어 관립 나고야의과대학이 되는데, 이를 모체로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이 설립되고 나고야의과대학은 의학부로 흡수. [67] 아이치현 대학령에 의한 아이치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건을 다이쇼 9년 6월 18일 인가한다. [68] 1931년 관립 이관되어 현립 아이치의과대학을 모체로 관립 나고야의과대학이 설립되어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하게 되면서 1931년부터 예과 신입생 모집을 정지하고, 1930년 예과 입학생이 수료하는 1933년 3월 예과 폐지( 논문 참조). [69] 1872년 교토료병원(京都療病院)이 설립되고 1879년 교토부의학교를 교토료병원에 부설. 1903년 전문학교령에 준거한 교토부립의학전문학교를 거쳐 1921년 대학령에 의거한 교토부립의과대학 설립. 1952년 신제 교토부립의과대학으로 개편. [70] 교토부 대학령에 의한 교토부립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건을 다이쇼10년 10월 19일 인가한다. [71] 종전 후 구제 고등교육기관을 미국식 신제대학으로 일원화하는 GHQ의 학제개혁에 따라 1951년 예과 폐지( 교토부립의과대학 연표 참조). [72] 1871년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가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군의관 만스 펠트를 초빙해 창설한 번립 의학소가 기원으로, 폐번치현 후 관립의학소·병원(통칭 古城醫學所)를 거쳐 세이난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878년 현립으로 재건되었고 1904년 전문학교령에 의거한 사립 구마모토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21년에는 공립(현립) 학교로 이관되었고, 1922년 대학령에 근거한 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29년 관립으로 이관되어 관립 구마모토의과대학이 되었다. 1949년 신학제에 따라 구마모토대학 의과대학을 거쳐 1960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로 통합되었다. [73] 구마모토현 대학령에 의한 구마모토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건을 다이쇼 11년 5월 25일 인가한다. [74] 1929년 관립 이관되어, 현립 아이치의과대학을 모체로 관립 나고야의과대학이 설립되어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하게 되면서 1929년부터 예과 신입생 모집을 정지하고, 1928년 예과 입학생이 수료하는 1931년 3월 예과 폐지( 논문 참조). [75] 1880년 사립 오사카상업강습소가 기원으로 1881년 부립 오사카상업강습소를 거쳐 1889년 시립 오사카상업학교를 모체로 1901년 전문학교령에 따른 시립 오사카 고등상업학교를 설립. 이 오사카시립고등상업학교가 대학령에 의거 1928년 구제대학인 오사카상과대학으로 승격. 1949년에 패전 후 일본 최초의 시립대학인 신제(新制) 오사카시립대학이 되고 1955년 오사카시립의과대학을 의학부로 흡수해 종합대학화. [76] 오사카시 대학령에 의한 좌기(左記) 대학을 설립하는 건을 인가한다.
o 명칭: 오사카상과대학(大阪商科大學)
o 개설기(開設期)
  - 학부: 쇼와 4년 4월
  - 대학예과 쇼와 3년 4월
[77] 종전 후 구제 고등교육기관을 미국식 신제대학으로 일원화하는 GHQ의 학제개혁에 따라 1949년 신제 오사카시립대학이 발족하며 예과 신입생 모집을 정지하고, 1950년 예과 폐지. [78] 1931년 오사카제국대학 의학부. [79] 1931년 관립 나고야의과대학, 1939년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 [80] 1929년 관립 구마모토의과대학. [81] 와세다제1고등학원(3년제), 와세다제2고등학원(2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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