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2:26:13

김응국

김응국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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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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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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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3번
결번 김응국
(1988~1989)
공필성
(1990~199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7번
김용희
(1985~1989)
<colbgcolor=#000> 김응국
(1990~2003)
박정준
(2004~2006)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85번
양승관
(1994~1999)
김응국
(2006)
결번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87번
김용달
(2003~2006)
김응국
(2007)
팀 해체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 / [[서울 히어로즈|서울 히어로즈]] 등번호 71번}}}
팀 창단 김응국
(2008)
조규제
(2009~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7번
정영기
(2007~2008)
김응국
(2013~2015)
장재영
(2016~2019)
한화 이글스 등번호 87번
니시모토
(2015)
김응국
(2016~2017)
추승우
(2018~)
}}} ||
파일:external/news20.busan.com/20110524000048_1.jpg
김응국
金應國 | Kim Eung-Gook
출생 1966년 1월 14일 ([age(1966-01-14)]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전곡초 - 동대문중 - 동대문상고[1] - 고려대
포지션 투수 외야수, 지명타자,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8년 2차 2라운드 (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88~2003)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4)[2]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04)[3]
롯데 자이언츠 2군 작전·주루코치 (2005)
현대 유니콘스 2군 타격코치 (2006~2007)
우리- 서울 히어로즈 1군 타격코치 (2008)[4]
우리-서울 히어로즈 2군 타격코치 (2008~2009)[5]
부산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0)
김해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0~2012)
롯데 자이언츠 1군 주루·외야수비코치 (2013)
롯데 자이언츠 1군 주루코치 (2014)[6]
롯데 자이언츠 1군 외야수비코치 (2014)[7]
롯데 자이언츠 1군 작전·주루코치 (2015)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6~2017)
부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9~2020)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연도별 주요 성적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자이언츠 전성기의 디딤돌, 김응국

2. 선수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2, 1996)
원래 프로 입단시에는 투수로 입단했으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도 프로에서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입단 첫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한뒤 개막 3연전 삼성전에는 선발투수로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몇경기 부진하자 더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이후에는 1군과 2군을 들락거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 당시 2군은 선수가 부족해서 투수도 타자로 나설 때가 많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아마야구 시절 타격에도 재능이 있었던 투수 안창완과 홈런을 누가 많이 치는지 연습배팅 때 내기를 했는데 10개 중 3개를 담장 밖으로 날렸다. 이러한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고 그 이후로 2군 경기에서 종종 안타를 쳤고 한번은 투수로 나선 경기에서는 만루홈런을 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이 때 타자 전향을 권한 장본인이 이성득이다. 결국 2년차 시즌인 1989년 말미 롯데는 김응국을 1군으로 불려올렸다.

1990년부터 주전으로 기용되며, 매년 3할 타율-20도루를 달성하고, 삼진보다 많은 사사구를 얻어내는 롯데의 확실한 외야수로 자리잡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남두오성의 일원이자, 롯데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으로 활약하였다. 1991년엔 올스타전 MVP가 되었고, 팀이 우승한 1992년에는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3명 가운데 일원으로 수상하기도 했다.[8] 1996년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하였다.[9][10]

이후 1997년과 1998년 연달아 부진하면서 하락세를 타나 싶었지만 박정태, 펠릭스 호세, 마해영이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로 활약했던 1999년에는 1번 타자 겸 지명타자로 타격에만 집중하며 .293의 타율에 8홈런 60타점으로 쏠쏠하게 활약하면서 롯데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 때려낸 141안타는 자신의 한 시즌 최다기록인 1996년의 143안타에 이어 본인 통산 2위의 안타수.

2002년엔 역사의 남을 역전승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4월 10일 당시 롯데는 9회까지 1:5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투아웃까지 간 상황에서 1,2루를 채운 롯데는 박현승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갔고 김대익이 볼넷을 얻어 만루를 채웠다. 그리고 김응국이 마무리 김진웅을 상대로 역전 끝내기 만루포를 터트려 6-5로 승리를 거뒀다. 이는 역대 9회 2사 후 최다 점수 차 역전승[11] 기록이며, 김응국 본인은 이동수와 함께 3점차 뒤집기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 몇 안되는 선수로 남게 되었다.

통산 3루타 62개를 기록해 전준호, 정수빈, 박해민, 이용규에 이어 5위에 랭크되어 있다. 심지어 3개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하기도 해서 역대 1위에 랭크돼있다. 이쯤 되면 기록의 사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산 15시즌 동안 타율 0.293, 홈런 86, 타점 667, 도루 207, OPS 0.788을 기록했다. 전성기 시절은 90~99시즌까지라 볼 수 있는데, 항상 3할이 넘는 타율과 8할이 넘는 OPS를 기록한 중거리형 타자. 도루도 해마다 20개 이상씩 기록하는 호타준족의 타자였다.

1990년대 롯데를 빛낸 몇 안되는 프랜차이즈 외야수라고 할 수 있으나[12] 전준호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지라 전준호가 현대로 이적한 뒤로도 끝없는 전준호 사랑에 2인자 취급을 받은 불운의 선수이다. 그래도 롯데라는 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덕분에 롯데 구단 개인 통산 스탯으로는 한동안 다양한 부문에서[13] 1위를 차지했다. 다만 이마저도 이대호 손아섭 등 출중한 실력을 갖춘 후배들이 등장하면서 그의 기록도 후배들의 뒤로 물러서게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롯데 타자 중 개인 통산 스탯 1위를 차지하는 항목이 있다. 통산 62개의 3루타로 독보적 1위다.

1990년대 전체 야수 중 WAR 7위를 기록했다.[14]

여담으로 1995년 선동열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이제야 내 스윙을 하게됐다고 좋아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2년 후 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즈에게 15승을 헌납하며 해태 타이거즈 9번째 우승의 제물이 되고 만다.[15]

3. 지도자 경력

2003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뒤 곧바로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양상문 감독 체제이던 2004~2005년 2시즌간 롯데에서 코치를 하다가, 2005년 말 양상문이 롯데와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그도 롯데에서 잘렸다. 2006년부터 현대 유니콘스의 2군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이 시절 장기영을 타자로 전향시키기도 했다.[16] 현대 해체 후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도 코치직을 유지하다가 2009 시즌 후 히어로즈와 재계약에 실패했고, 잠시 고교 지도자와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2012년 11월 11일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7년만에 롯데에 복귀했다. 보직은 2군 타격코치.

2014년에는 1군 주루 및 외야수비코치로 보직을 변경하면서 오랜만에 사직야구장 그라운드에서 그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다가 8월 21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 외야수비코치만 담당하고, 대신 1군 주루코치는 이종운이 담당하였다.

2014년 시즌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종운이 감독이 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았고, 2015 시즌에도 롯데의 1군 작전 및 주루코치를 맡게 됐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나쁜 편이다. 차라리 임재철이 3루 코치를 보는게 낫다는 팬들이 많다.

2015년 9월 2일 울산 kt전에서 강민호가 친 파울타구에 엉덩이를 맞았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엉덩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2015 시즌 후 이종운이 경질됨과 동시에 김민호, 염종석, 안상준, 박현승 등과 함께 재계약에 실패하며 다시 롯데를 떠났다.

롯데와 재계약에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화 이글스의 2군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2017 시즌 종료 후 한화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1년 공백 후 부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하여 2019~2020년에 부경고를 지도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선수 시절 전성기에는 주로 좌익수로 뛰었고, 말년에는 지명타자로 활약했다. 때때로 주전 1루수였던 김민호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체력 안배 차원에서 선발 출장 하지 않으면 1루수를 보기도 했었다.[17] 맞히는 재주, 선구안, 주루, 수비 모두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으며 이따금 홈런도 터뜨린, 1994년 이종범의 압도적인 활약이 없었다면 타격왕도 가능했을 선수였다.[18] 롯데 자이언츠를 대표한 소총 타선이였던 남두오성의 일원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전성기와 추락을 함께 겪은 박정태와 함께 팀의 90년대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레전드 타자이다. 교타자로서 1번타자에 적합한 선수였으나 전준호가 있던 시절에는 주로 3번 또는 5번타자로 포진했다. 타격에서 장담할 수 있으며 수비와 주루 모두 준수했던 선수.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88 롯데 8 19.2 0 0 0 0 5.03 24 1 15 6 11 11
1989 6 2.2 0 0 0 0 6.75 4 1 1 0 2 2
KBO 통산
(2시즌)
14 22.1 0 0 0 0 5.32 28 2 16 6 13 13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롯데 10 29 .483 14 0 0 1 3 5 2 1 .586 .500
1990 108 377 .292 110 20 4 7 47 53 21 49 .422 .368
1991 121 436 .300 131 17 9
(3위)
9 51 77
(5위)
25
(4위)
64 .438 .388
1992 119 401 .319 128 20 12
(2위)
10 79
(5위)
76 29
(4위)
63 .504 .399
1993 108 369 .285 105 26
(4위)
3 3 48 49 12 40 .396 .349
1994 100 350 .323
(2위)
113 24 4 8 55 63 20 48 .483 .398
(3위)
1995 104 364 .299[19] 109 14 4 8 61 58 31 62 .426 .394
(5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롯데 126 446 .321
(4위)
143
(4위)
22 6
(2위)
9 64 62 26
(5위)
67 .457 .406
(4위)
1997 62 204 .250 51 17 3
(5위)
2 22 26 2 29 .392 .340
1998 94 305 .266 81 11 2 4 36 32 2 35 .354 .340
1999 125 481 .293 141 27 7 8 60 98 12 63 .428 .372
2000 107 401 .277 111 15 3 6 45 57 9 36 .374 .336
2001 89 274 .277 76 10 1 4 33 35 2 23 .365 .331
2002 116 373 .284 106 15 3 3 49 35 12 36 .365 .34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롯데 51 140 .236 33 5 1 4 14 18 2 14 .371 .305
KBO 통산
(15시즌)
1440 4950 .293 1452 243 62
(5위)
86 667 744 207 630 .419 .369

6. 여담

  • 선수 시절 별명은 김흥국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호랑나비였다. 김응국의 현역 시절에는 선수별 등장곡이 없었지만[20] 만약 등장곡이 있었다면 김흥국의 호랑나비가 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는 김응국이 타석에 들어설 때 정우영 캐스터의 음성으로 중계를 켜면 정우영이 호랑나비를 짧게 한 소절 부르며 김응국이 타석에 들어선다며 소개한다.
  • 서울특별시 출신이지만 부산 사투리를 쓴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롯데에 입단해서 17년을 부산에서 거주하며 롯데 선수와 코치로 살다보니 사투리가 입에 붙었다는 것. 쉽게 말해 환경 때문에 20세 이후 사투리를 쓰게 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21]
  • 고교시절 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 때문에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마운드에 섰다가 어쩌다보니 투수로 보직이 굳어졌다. 방망이로 때리는게 재미있어 투수보다 타자를 원했고 고3 때 추운 날씨에 던지다가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이후로 계속 아픈 상태로 공을 던져야 했던 기억과 함께 투수 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는 선동열 박노준 등 쟁쟁한 선배들이 있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198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의 2차 지명을 받아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갔다. 원래는 태평양의 지명을 받을 줄 알았는데 롯데의 지명을 받아 타지에서 적응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해, 관두고 모교에서 체육 교사나할까 고민도 했다는 후문.[22] 결국 타자 전향이 성공하면서 프로에서 순조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7. 관련 문서


[1] 동대문상업고등학교 → 청원정보산업고등학교. 2000년 12월에 야구부는 같은 재단의 남학교인 청원고등학교로 이관되었다. [2] ~6월 29일 [3] 6월 30일~ [4] ~7월 6일 [5] 7월 7일~ [6] ~8월 20일 [7] 8월 21일~ [8] 일종의 우승 프리미엄이었는데, 만약 그해 빙그레가 우승했다면 이강돈이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9] 이 사이클링 히트는 단타 - 2루타 - 3루타 - 홈런을 순서대로 성공시켜 만든 것으로 일명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라고도 부르며, 이는 KBO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김응국은 2번째 타석에 유격수 땅볼을 기록해 5타수 4안타를 기록했다. [10] 2024년 KIA 타이거즈 김도영이 28년 만에 2번째로, 그리고 우타자로는 최초로 기록했으며 4타수 4안타로 최소 타수 힛 포 내츄럴 사이클을 기록했다. [11] 참고로 2024년 3월 24일에 롯데는 2사 후 0-6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6-6으로 따라가며 이 기록을 경신하는가 싶었지만 역전까지 가지는 못했고 에레디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졌다. [12] 출신이 서울이지만 한 팀에서 데뷔와 은퇴를 했다. 같은 프랜차이즈인 김대익, 이종운과 다른 점이라면 김대익과 이종운은 다른 팀으로 이적했지만 김응국은 끝까지 남았다는 정도. [13] 출장경기, 안타, 2루타, 볼넷, 득점 등등 [14] 김응국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은 홍현우, 김기태, 장종훈, 양준혁, 이종범, 김동수였다. [15] 롯데가 해태에게 1997년에 거둔 성적은 3승 15패, 철저한 밥이 되었다. 정작 선동열 있을때도 7승 11패 정도는 하던 자이언츠였다. 하지만 1997년 롯데가 꼴찌를 했다는 것과 해태가 정규리그를 우승했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야 한다. [16] 2007년 시즌 중 2군 경기에 나갈 타자 인원이 부족하자 장기영이 땜빵으로 타자로 나섰는데 그 경기에서 안타와 타점을 뽑아냈고, 이를 본 김응국 코치가 곧바로 타자 전향을 제안했다고 한다. [17] 차기 주전 1루수인 마해영이 입단하기전인 1994년까지는 그랬었다. 마해영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 가끔씩 1루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18] 1994년에 타격 2위를 하였다. [19]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아깝게 3할에 실패한 기록으로 2할9푼9리4모5사. 반면 1998년 강동우는 2할9푼9리5모1사로 3할 타자가 되었다. [20] 선수별 등장곡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김응국의 은퇴 이후인 2000년대 중반부터다. [21] 이런 현상은 지방의 대기업 계열사 사업장이나 군부대에서도 일어난다. 한 예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는 직영은 과거 포스코에서 일하다 온 경상도 사투리 사용자가 많아 그 이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자연스레 쓰게 되고, 협력은 당진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당진 특유의 어눌한 사투리는 물론이요, 동료의 출신지 사투리를 그대로 구사하게 된다. 비슷한 예로 같은 롯데 출신인 노장진도 롯데와 삼성에 뛰면서 입에 익숙해졌는지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 영남 지방에서 오래 살았다고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도 케바케다. [22] 김응국의 대학 전공이 체육교육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