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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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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수상 내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10회 동인문학상 수상
송병수
(1964)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65)
최인훈
(1966)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
-
-
김승옥
서울의 달빛 0장
(1977)
이청준
(1978)
제57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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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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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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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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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이중섭
화가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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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박수근
화가
1980
조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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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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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김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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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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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이봉상
화가
1989
조남철
바둑기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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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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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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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장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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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전광용
소설가
1992
한갑수
교수
1995
박노수
화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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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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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기사
1998
김남조
시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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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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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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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승옥
金承鈺
파일:Kim_Seung-ok.jpg
출생 1941년 12월 23일 ([age(1941-12-23)]세)
일본 제국 오사카시[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前 소설가, 각본가, 작사가
학력 순천남국민학교[2] (졸업)
순천중학교 (졸업)
순천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 불어불문학 / 학사)
데뷔 1962년, 〈생명연습〉
배우자 백혜욱(1967년 11월 결혼)
자녀 2남[3]
종교 무종교( 무신론) → 개신교

1. 개요2. 생애
2.1. 대학 입학 전
2.1.1. 유년 시절2.1.2. 학창 시절
2.2. 대학 입학과 시사 만화가 시절2.3. 등단2.4. 산문시대2.5. 무진기행2.6. 영화로의 외도2.7. 김지하 구명 운동2.8. 서울의 달빛 0장2.9. 기독교 귀의와 뜻밖의 절필2.10. 최근의 작품 활동2.11. 근황
3. 문학계의 평가4. 여담5. 작품 목록
5.1. 소설5.2. 수필5.3. 영화
6. 서울대 60학번 등단 현황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booknreader.com/2070753647_vYagr5tA_ok.jpg
젊은 시절의 모습
대한민국 소설가이자 각본가이자 작사가.

그가 20대였던 1960년대, 그는 작가로서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분량인 10편에서 20편 정도의 중, 단편소설을 썼다. 현재 한국문학사는 그를 한국 문학사 불멸의 천재이자 진정한 한글 세대를 일군 문장가로 높이 평가한다.

2. 생애

2.1. 대학 입학 전

2.1.1. 유년 시절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김기선은 니혼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도쿄 유학생이었고[4] 어머니 윤계자는 오사카에 이민 와 있던 한의사의 딸이었다. 태평양 전쟁을 피해서 1945년쯤에 두 사람은 전라남도 순천으로 이주했고 종전 이래로 거기에 정착하게 된다.[5] 아버지 김기선은 보통학교 졸업후 옥곡면 면서기로 일하다가 독립운동인 '광양독서회' 사건에 참가했고 재판 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해방 직후에는 광양독서회 사건의 주역들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광양지부에서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으며, 현재 광양 남일타운예식장 자리에 있던 남일당에서 '희양휘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파일:external/img.hani.co.kr/144922923480_20151205.jpg
2015.12.5. 한겨레신문에 실린 그의 사진들
순천남초등학교 1학년 때이던 1948년 11월, 그의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났다. 여순사건에 가담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승옥이 함께 광양까지 걸어가다가 할머니와 김승옥은 광양으로 가고, 아버지는 ‘산’으로 갔다고 한다.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6]

김승옥의 아버지가 산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결국 막내 여동생 김혜경은 유복자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형사의 닦달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삯바느질로 4남매를 부양했다. 스물여덟에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동안, 어린 여동생을 업고 먹이고 재우는 건 온전히 맏아들인 김승옥의 몫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돌보던 여동생이 세 살 되던 해 갑자기 죽었다. 1951년, 김승옥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7]

그 1년 후인 1952년에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했다. 이것이 게재되어 될성 부른 떡잎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그때만 해도 달궁으로 유명한 서정인과 더불어 순천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하나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2.1.2. 학창 시절

학창 시절엔 소설에 광적으로 빠져 있었던 모범생으로, 순천고 전교회장과 배구 대표 선수였으며 문화의 밤 행사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8]

어려서부터 공부를 워낙 잘해서 어머니의 기대가 컸다. 김승옥은 법관이 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큰아들이 법대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였다. 그의 아버지처럼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의사’와 ‘법관’의 타협안으로 ‘외교관’이 될 생각을 했다. 영어와 독일어는 고등학교에서 배웠으니 새로운 언어를 배워 외교관이 되겠다는 생각에 불문과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문학은 취미로만 즐기려고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소설가 지망생 중에서 자신만큼 소설을 많이 읽은 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김승옥은 동네 책방을 순회하며 원없이 소설을 읽어댔고, 어머니가 월말마다 책값을 정산해줬다고 한다.[9]

2.2. 대학 입학과 시사 만화가 시절

1960년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와 같은 해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던 동기들, 즉 서울대 60학번은 한국 문학에 한획을 그은 학번인데, 불문과 김승옥, 김현, 김치수, 하길종, 독문과 이청준, 염무웅, 김주연, 김광규, 영문과 박태순, 정규웅 등이 포함되어 있다. 관련 글 한 학번 위에는 미학과의 김지하가 있었고, 한 학번 뒤에는 불문과 김화영, 국문과 오세영 등이 있다. 심지어 당시 문학과목 교양수업은 불, 독, 영문과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당시 강사는 김동리와의 논쟁으로 문학평론의 새 시대를 연 27세의 이어령이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4.19를 겪었다. 숱한 또래 문인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4월 19일과 25일의 결정적인 시위에 모두 참여하였다. 참고로 당시는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그냥 총을 막 쏘던 시절이었다.

글솜씨만 좋았던 게 아니라 그림실력도 뛰어났던 그는 친하게 지내던 독문과 김주연의 소개로 격주로 간행되는 서울대 문리대 신문 <새세대>에 '학원만평'이라는 만화를 그려주다가[10] 기자로 활동하며 동시대의 의식구조에 대해서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난한 고학생이어서 하숙비가 밀리면 <세세대> 편집실에서 잠을 청하는 일이 빈번했고,[11] 단벌 코트를 사시사철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동기들은 비슷한 꼬락서니를 하고 다녔던 김승옥, 김지하, 하길종, 주섭일 등을 '문리대 거지떼들'이라고 불렀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서울경제신문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4컷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한국일보에서 새 경제신문을 창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샘플 몇장을 그려 무작정 문화부장 앞으로 보냈는데 연재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생각보다 적은 고료였지만 대학생 한명이 하숙비를 내고 등록금을 내기는 충분한 액수였다고. 그의 시사만화는 1961년 2월 14일까지 모두 134회에 걸쳐 신문에 실렸다. 만화 작가로서 본명 대신 ‘김이구’라는 필명을 썼다. 순천 고향 집 번지수에서 가져 온 이름이었다. 만화를 연재하던 시절 동아일보에서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던 김성환 화백과 연배를 뛰어넘어 친한 친구가 된다. 5.16 쿠데타 이후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자, 만화연재를 중단한다.

2.3. 등단

대학에 입학한 후 알베르 카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에세이를 통해서 "문학의 심상치 않음"[12]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광규, 이청준, 박태순 등이 박태순의 집 문간방에서 돌아가며 발표회를 하는 동인회를 결성하였는데, 여기에 김승옥을 끌어들여 처음으로 습작을 쓰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문학을 시작하게 된 첫걸음이 되었다고 한다.

2학년 때 어려운 집안 형편에서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 겸, 군대 가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글을 쓸 수 있는지 시험도 해 볼 겸 해서 같은 처지였던 이청준을 꼬드겨 함께 신춘문예에 투고하였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접수 마지막 날 밤에 신문사에 뛰어가 마지막으로 퇴근하던 기자 손에 억지로 원고를 쥐어준 김승옥은 "설마 되겠냐"라는 마음으로 서울 하숙집을 정리하고 이청준과 고향으로 내려가 군대가기 전 마지막을 불사른다는 마음으로 술을 마셔대다가 12월 30일에 '급 상경요망'이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한다.

새해가 되자 김승옥의 〈 생명연습〉은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되었고, 이청준은 혼자 쓸쓸히 군대를 갔다.[13]

김승옥의 등단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서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꾀죄죄한 몰골로 수업도 거의 들어오지 않던 2학년생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성과였고, 동기들이 연이어 신춘문예에 지원하는 동인이 된다. 해방 이후에 한글로 정규 교육과정을 시작하여 이전 세대 작가들과 차별화된 한글 문장력과 표현력을 보여주는 김승옥, 이청준, 최인훈 등의 문인들을 흔히 4.19 세대라고 부르는데, 이들 중 '감수성의 혁명'[14]이라는 평을 들으며 가장 먼저 문단에 충격파를 던진 사람이 김승옥이었다.

1964년 〈 무진기행〉을 사상계에 발표했고, 대학교 졸업반 시절 작성했던 〈 서울, 1964년 겨울〉로 사상계에서 주최하는 당대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최연소 (만 24세)로 수상하며 문학계의 기린아로 떠올랐으며, 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유명세를 탄다.[15] 당시 받은 상금으로 막내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댈 수 있었다고 한다.

2.4. 산문시대

파일:sanmoonsidae.jpg
김승옥과 평생의 친우였던 불문과 동기 김현은 김승옥의 등단 두 달 후 〈나르시스의 시론〉으로 자유문학지 평론 부문에 등단한 뒤, 동인지를 만들자고 친구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김승옥, 김현, 최하림이 62년 6월 발표한 동인지가 《산문시대》 1호이다. 김현은 동인지의 이름으로 "질주"를 제안했으나, 너무 청년문학 냄새가 난다는 지적에 김승옥이 주장한 "산문시대"로 최종 결정되었다고 한다.

당시 동인지라면 등사기로 인쇄한 열악한 종이뭉치가 당연하던 시절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유복했던 김현이 가족들에게 지원을 이끌어내고,[16]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인쇄소를 섭외한 덕에 제대로 활판 인쇄를 한 책이 나올수 있었다고 한다. '있어보이려고' 일부러 독자가 페이지 끝을 한장한장 잘라야 하는 프랑스식으로 인쇄를 했다고. 이후 2호에서 강호무, 김창웅, 김치수, 3호에서 김성일, 서정인, 염무웅, 5호에서 곽광수 등이 합류하며 '4·19 세대'를 대표하는 동인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산문시대는 단 5호밖에 나오지 않은 동인지였지만, 국내 문학 시장에서 사실상 첫 시도 되었던 가로쓰기라는 충격적인 혁신과 참가한 필진들의 네임밸류 덕분에 전설이 되었다.[17] 60학번이 주축이 된 필진들은 이후 한국 문단계를 이끌고 가는 인물들이 되었다. 한국 문학의 양대 축이라면 문학과 지성사 창작과비평사가 뽑하는데, 창비사의 경우 김승옥, 김주연 등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백낙청의 도미 이후에는 염무웅이 발행인을 맡아서 이끌어 나갔다. 문지사는 아예 산문시대의 주동자인 김현, 김치수, 김주연 등이 창립한 회사이다.

김승옥은 〈 생명연습〉, 〈건〉, 〈환상수첩〉,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 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5편을 산문시대에 발표했다.

2.5. 무진기행

김승옥! 순천고 9회 김승옥! 아따~ 무진기행 김승옥.
- 해태, 응답하라 1994에서 여수 꼴초와 서로 고향 자랑으로 싸우며
〈무진기행〉은 김승옥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 받지만 김승옥 자신이 생각하기엔 진부한 구성의 작품이고, 김현은 이게 무슨 소설이냐, 차라리 찢어버리라고 면박을 줬었다고 한다. 전후소설의 '전쟁으로 인한 무기력증'을 벗어나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효과적인 공간 선택과 동시에 어울러지는 캐릭터성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의 의의가 높은 작품이다.

당시 김승옥이 한 살 연상의 여성을 사랑했다가 결별[18]했던 첫사랑의 느낌을 모티브로 쓴 소설로, ' 무진시'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배경은 김승옥의 고향인 순천시라고 한다. 순천과 순천만 연안 대대포 앞 바다와 그 갯벌에서의 체험이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고. 서울에서의 경쟁적 삶을 구가하기보다는 한 번쯤 무진과 서울을 왕복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경험하는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라고 한다.

〈무진기행〉은 지금도 습작을 하는 지망생들이 한 번쯤은 필사해보는 소설 중 하나다.[19] 이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김승옥의 문장력은 정말 요 근래의 작가들과 비교해보더라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반세기 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지금(2020년)의 10~20대 젊은이들이 읽어도 문장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술술 읽어진다는 점에서 문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2.6. 영화로의 외도

동인문학상 수상 이후 문단의 기린아로 불린 김승옥이었지만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 맞는 호흡을 가진 집필 스타일 덕분에 지속적인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대한민국 출판 시장은 작가가 책만 팔아서는 굶어죽기 딱 좋은 시장인 데다가 대부분의 작가들은 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여 나오는 원고료로 먹고 사는 실정이었다. 1970년대에 등단한 이문열은 "내가 등단할 무렵 소설가 중에서 부업 없이 글만 써서 밥 먹고 사는 소설가는 최인호 선배 정도뿐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승옥의 대표작은 전부 단편 소설이며, 장편을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대부분 연중하여 완결한 작품은 두 편뿐이다. 심지어 완결한 두 편(〈보통여자〉, 〈강변부인〉)도 6개월간 연재한 작품들이라 장편이라기 보다는 중편에 가깝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월간 샘터사의 편집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67년에 무진기행이 '안개'로 영화화가 되자 극본을 각색하며 영화계와 인연을 맺는다. 1968년엔 김동인의 〈 감자〉를 각색, 감독하여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르몽드 신문에 소개가 된다.[20] 감독을 계속하고 싶은 열망이 컸으나, 영화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기겁한 신혼의 아내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시나리오만 쓰는 것으로 타협하게 된다.

이후 《 겨울여자》, 《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 《 장군의 수염》 등 영화의 흥행을 성공시키며 톱클래스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해진다. 특히 장미희 주연의 《 겨울여자》는 서울관객 57만으로 1990년 《 장군의 아들》이 갱신하기 전까지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 신기록을 12년간 보유한 작품이었다. 《 장군의 수염》으로 제7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들은 '한국의 장 콕또 김승옥 각본'이라는 문구를 포스터에 대문짝만하게 써붙일 정도였다.

시나리오를 쓴 영화들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생활고를 해결했고, 번듯한 양옥집을 지어 이사를 가게 된다. 하지만 문인들은 영화에만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소설로 복귀하라고 지속적으로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2.7. 김지하 구명 운동

김승옥은 1969년 보통여자 연재 이후 한동안 붓을 꺾게 된다. 위에 언급되어 있듯 생활고로 인해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시나리오를 쓰고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친우였던 김지하의 구속이었다. 한 학번 선배였던 김지하는 김승옥과 막역한 사이였다. 신입생 시절 문리대 거지떼들이라 불리며 모여다니기도 했고, 툭하면 상대방 하숙집에 나타나 밤을 새며 술을 마시고 글을 짓던 친구였던 김지하는 1970년 정치인과 재벌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풍자시 〈 오적〉을 발표하여 수배의 몸이 된다.

중앙정보부 반공법으로 고소된 김지하를 찾기 위해 주변인 200여 명을 연행하여 괴롭혔고, 자신 때문에 남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버티기 어려워진 김지하는 자수를 결심한다. 자수하기 전 김지하는 마지막으로 김승옥을 찾아 부탁을 남긴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재를 대라는 당국의 요구에 고통을 받고 있다. 박정희가 날 죽일 작정인 것 같다. 내일 자수해서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들어갈 테니 네가 밖에서 문인들을 모아 내 구명운동을 해주기 바란다”
김지하가 남산으로 들어가고 난 뒤 김승옥은 이호철, 박태순, 이문구 등 문인들을 끌어 모아 이후 10여 년 동안 감옥을 들락날락 했던 김지하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인권 변호사였던 한승헌, 황인철과 함께 재판마다 변호인 측 증인으로 참여한 김승옥은 서슬퍼런 검찰앞에서 과거 김지하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며 ’그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증언을 했다.[21] 당연히 김승옥에게도 중앙정보부의 미행이 따라 붙었고, 김승옥은 잘 못 마시는 술에 의지하여 불안감을 떨치게 된다. 유신시대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고 감옥에 갈 사람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에 문인 친구들과 모여 술이라도 마시는 시간이 불안을 벗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10.26이 있고 신군부가 들어온 뒤에도 김지하가 풀려나오지 못하자, 김승옥은 당시 국보위 위원으로 5공 창립에 가담했던 대학선배 이영일을 찾아가 자신이 보증인이 될 테니 김지하를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이영일은 전두환의 비서였던 허문도에게 문의를 하고, 이후 허문도는 지학순 주교 등의 추가 보증을 받고 김지하를 석방하게 된다.

2.8. 서울의 달빛 0장

문학 평론가 이어령은 김승옥이 돈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해서 특급호텔인 반도호텔의 방을 빌려서 김승옥에게 내주고,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소설 한 편을 완성해달라고 하였다. 김승옥은 비싼 호텔 값과 밥 값을 이어령에게 청구시키는 부담감 때문에 제대로 소설을 쓰지도 못하고 결국 호텔에서 달아나 버렸다. 이어령은 달아난 김승옥을 다시 한 번 통조림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장충동 파크호텔의 방을 두 개 빌려놓고, 한 방에는 김승옥이 들어가서 소설을 쓰게 하고, 다른 방에선 이어령 자신이 사실상 발행인으로 있던 문학사상의 편집부장과 편집 기자를 김승옥의 원고를 정리해준다는 명분으로 들어가 있게 해서 김승옥이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했다고 한다(...). 본격 문밀레

당시 옆방에서 김승옥을 감시하던 문학사상의 서영은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저와 다른 편집부 직원하고 둘이서 바로 옆방에 투숙했습니다. 천장 가까이에 아주 작은 창문이 있어 의자를 놓고 거기로 빠끔히 보면 옆방이 보였습니다. 방 안 가득 구겨진 원고지가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김승옥 선생님은 진행이 잘 안되는지 손톱으로 한쪽 이마를 긁고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는지 계속 긁고 있었습니다."
김승옥은 이때 '서울의 달빛'이라는 제목의 장편 소설을 구상하고, 프롤로그 격으로 짧은 분량을 완성하였다. 그러자 이어령은 "김승옥이한테서 다음 제1장의 원고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것이다. 이 0장만으로도 단편 소설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으니……"라며 본문 맨 처음에 나와야 할 0장이라는 낱말을 제목에 붙여서 보내온 원고를 단편 소설로 발표하게 만들었다. 단편 소설이 된 〈서울의 달빛 0장〉은 초대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의 영예를 김승옥에게 가져다주었다. 김승옥은 훗날 "이 선생의 예언대로 나는 그 다음 제1장을 오늘 날까지 아직 못 써내고 있다."라고 하며 당시를 추억한다.

참고로 당시 김승옥은 《초우》의 감독이었던 영화감독 정진우에게 시나리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선금을 받은 상태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며 원고를 넘기지 못한 상태였고, 열받은 정진우는 이상문학상 상금에 대해 가압류를 걸었다. 김승옥을 아끼던 이어령은 정진우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김승옥은 시상대에서 돈이 들어있지 않은 빈 봉투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중앙일보의 문화부 기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정규웅은 〈서울의 달빛 0장〉이 발표 당시 돌아다니던 연예계 스캔들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는데, 김승옥이 정말 모티브를 딴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 듯.

2.9. 기독교 귀의와 뜻밖의 절필

1980년 "먼지의 방"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3회부터 신군부의 검열 대상이 되어 몇 줄씩 내용이 삭제 되다가,[22] 15회 연재 후 5.18 민주화운동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주류언론의 작태에 염증을 느끼고 연재를 중단하고 술만 마시게 된다.[23] 김승옥은 후일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분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온 국민이 분노했다. 나 역시 얌전히 소설을 쓰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취해서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는 듯 "하나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부르짖기도 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불쑥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외침이 저절로 나왔다.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이 게재되기 시작했지만 분노와 충격 때문에 소설이 잘 써 지지 않았다. 군 검열에서 몇 줄씩 잘리기도 했다. 유신시절 10년 동안의 젊은 지식인들 이야기이니 계속 떠들어 봤댔자 나와 신문사만 골치 아프게 생겼다. 연재 15회 만에 소설연재를 중단해버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술만 마시던 남편을 보다못한 아내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이후 교회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무신론자 김승옥이었지만 아내가 안쓰러워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에서라도 뭔가 위로받는 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아내는 곧 김승옥을 전도하기 시작했고, 주변인들을 끌여들여 협공을 펼쳤다고 한다.

아내의 성화로 순복음교회를 억지로 나가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기복신앙적인 요소에 대해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말그대로 앉아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1년 4월 26일 밤에 하나님의 손을 눈으로 보게되는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도에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1983년 예수님의 전신이 발현하는 체험을 한 이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 알콜 중독 수준이던 술도 끊고, 하루 두세 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을 수 있었다고.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는 주변에 전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 그의 행실을 잘 알던 지인들은 "미친놈, 술 좋아하더니 결국 돌았군"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24] 이장호 감독 같은 사람은 면전에서 "이 형 날샜구만"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교회로 끌려가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이후 선교여행도 다녀오고, 간증도 하다가 2001년 성결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목사가 될 생각이었으나 2년 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소설을 쓰는 것이 스스로를 사로잡은 허무함에서 구원받는 길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나서부터는 더이상 소설 쓰기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며 사실상 절필 선언을 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 안 가서 소설 쓰기를 재개했을 거라고 한다.

2.10. 최근의 작품 활동

1986년 수필집 《싫을때는 싫다고 해라》를 출간했다.

1998년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시내산에서〉, 〈뤼순 감옥에서〉 등 성지 순례기 2편을 특별기고 형식으로 발표했다.

2002년 출간된 <4월혁명과 한국문학>에 김병익, 염무웅, 이성부, 임헌영, 최원식 등과 함께 한 좌담 내용이 실렸다.

2004년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출간했다. 신앙간증이 위주인 책이지만, 후반부에 산문시대 창간 전후에 대해 대학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모아서 수록해 놓았다.

2011년 〈서울, 1964년 겨울〉의 연극 극본화에 참여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다른 문학 원로인 이호철 작가, 평론가 전규태 전 교수랑 같이 힘을 합쳐 다자이 오사무 선집을 냈다[25]

2016년 7월 8일부터 7월 21일까지 서울 동숭동 혜화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수채화 전시회를 열였다. 스토리펀딩 링크(삭제됨)해 진행되었으며 목표의 119%를 달성했다고. 화집 《그림으로 떠나는 무진기행》은 2017년 3월에 출간되었다.

2.11. 근황

2003년 문우 이문구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에 가기 위해 막 자동차에 오르는 순간 뇌졸중으로 운전대를 향해 몸을 기울인 자세로 쓰러졌다. 불행하게도 신원확인이 늦어져서 초기대응에 시간이 걸렸고, 아내가 병원에 도착 했을 때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뇌 단층촬영 결과 좌뇌의 3분의 2가 기능을 상실했다. 한글 파일이 통째로 날아간 것처럼, 좌뇌의 손상은 순식간에 김승옥의 뇌에서 문자체계 자체를 고스란히 날렸다. 8일간 일산병원에 있다가, 경희대학교 한방의료원으로 옮겨 6개월간 더 입원한 후 퇴원했다. 병세는 비교적 빠르게 호전되어 곧 보행이 가능한 정도까지 회복되었으나 언어는 회복되지 못했다고 한다. 시대를 뛰어넘는 문장력을 보여주었던 언어의 마술사가 언어를 잃어버렸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최근에는 짧은 문장으로 필담이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되었다고 한다.

1999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했으나, 뇌졸중 투병으로 2004년 사임했다.

2010년 고향인 순천에 김승옥 문학관이 생겼다. 문학관 한쪽에는 김승옥 작가의 집필실이 마련되어 있고, 한 달에 절반 정도는 순천에 내려가서 집필을 하신다고 한다. 팬들이 방문하면 싸인도 해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신다고.

2012년 제5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

2013년 순천시와 KBS 순천방송국 후원으로 김승옥 문학상이 개최되었다. 살아있는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2015년 3회까지 시상을 하고 중단되었으나, 2019년 문학동네 주관하에 부활하였다. 2022년 수상작은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이며, 본상 상금은 5천만 원이다.

2014년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최근 인터뷰로는 2015년 12월 6일 한겨례에 실린 녹취 인터뷰가 있다.

2024년 4월 4일 무진기행 6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에 실린 필담 인터뷰 다시 최근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2003년 뇌졸중이 발병한 이후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어진 그는 재작년 허리 부상에 이어 지난해 초 장협착증이 발견됐다. 큰 수술을 3번 받아 기력이 급격히 약해졌다는데, 이후로는 서울의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다고.

3. 문학계의 평가

유종호 "감수성의 혁명"
김지하 “김승옥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별이었다.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신경숙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스무살에 만난 빛이었다”
공지영 "한국문학사에 있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상징하는 작품"
이동진 "한국어로 적힌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명징하고, 가장 쓸쓸한 문장들"
이응준 “김승옥은 내게 있어 빛과 그림자였다. 닮고 싶어했을 때는 찬란한 빛이었으나 빠져 나왔을 때는 잔혹한 어둠이었다.”

4. 여담

김승옥의 등장이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김훈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70년대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1964)했을 때, 아버지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이미 갔다"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 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 푼씩 주고 돌아갔다.
생계를 위해 순수 문학의 꿈을 잠시 접고 신문에 무협지를 연재해야 했던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작가와 그 친구인 문인들에게 보통 충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당시 김승옥의 나이는 23세였다.

화려한 문체만 보았을 때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글을 쓰기 위해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성격이라고. 작가 본인의 표현으로는 '피를 짜내서 원고지에 써내려가는' 느낌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친동생 분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 무렵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진도는 나가지 않았는데 온 방에 찢어진 원고지가 널려 있고 밤새도록 '팬티가 누래질 때까지' 담배를 피워대며 머리를 긁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고.

1970년에 단편소설 <50년 후, D.π.9 기자의 어느 날>에서 귀요미라는 단어를 처음 썼다. 귀요미 항목 참조. 선구자

2005년 EBS 문화사 드라마 《 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김승옥과 당시 시대상을 다뤘다.

김승옥의 등단작 생명연습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생식기를 거세한 전도사가 등장한다.[26] 약 20년 뒤, 김승옥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는 절필을 한다.

문체가 참 화려한 작가이긴 한데, 그의 소설에는 은근히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당대 작가 치고 굉장히 거침없는 듯.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학과지성사 최인훈의 〈 광장〉의 표지를 그린 사람이 바로 김승옥이다.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에서 역사(力士)가 출제됐다.

5. 작품 목록

5.1. 소설

<rowcolor=white> 연도 제목 소설 연재 비고
1962 생명연습 단편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1962 단편 산문시대
1962 환상수첩 중편 산문시대
1963 역사 단편 문학춘추
1963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단편 산문시대
1963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단편 산문시대
1964 무진기행 단편 사상계
1964 차나 한잔 단편 세대
1964 싸게 사들이기 단편 문학춘추
1965 서울, 1964년 겨울 단편 사상계 제10회 동인문학상 수상
1965 들놀이 단편 청맥
1966 다산성 중편 창작과 비평
1966 염소는 힘이 세다 단편 자유공론
1966 빛의 무덤 속 장편 문학 연재중단
1967 내가 훔친 여름 중편 중앙일보
1968 60년대식 중편 선데이서울
1968 동두천 장편 신동아 연재중단
1969 야행 단편 월간중앙
1969 보통여자 장편 주간여성
1970 50년 후 Dπ9(디파이나인) 기자의 어느날
상편 하편
단편 동아일보
1972 그와 나 단편 지식산업사 콩트집 위험한 얼굴 수록
1977 서울의 달빛 0장 단편 문학사상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
1977 강변부인 장편 일요신문
1979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단편 문예중앙
1980 먼지의 방 장편 동아일보 연재중단
출판사별로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엮은 단편선이나 전집이 아닌 오리지널 단편집은 하나뿐이다. 1966년 창문사에서 출간된 《 서울, 1964년 겨울》이 그것이다.[27] 서울의 달빛 0장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대표작을 21~25세 사이인 단 5년 만에 쏟아냈다!

5.2. 수필

<rowcolor=white> 연도 제목 출판사 비고
1977 위험한 얼굴 연희출판사 꽁트집
1977 뜬세상에 살기에 지식산업사 수필집
1986 싫을때는 싫다고 해라 자유문학사 수필집
2004 내가 만난 하나님 작가 산문집
2017 그림으로 떠나는 무진기행 아르떼 화집
2017년 수필집 "뜬세상에 살기에"가 카카오 메이커스를 통해 복간되었다.

5.3. 영화

<rowcolor=white> 연도 제목 분야 비고 관객
1967 안개 각색 무진기행 각색[28] 136,000
1968 여(女) 각본 49,000
1968 감자 감독 김동인의 감자 각색 20,000
1968 장군의 수염 각색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 각색 102,000
1974 어제 내린 비 각본 최인호의 내 마음의 풍차 각색 147,823
1974 황홀 각색 무진기행 각색 34,950
1975 내일은 진실 각본 김지연의 배꽃 각색 6,645
1975 영자의 전성시대 각색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각색 361,213
1976 여자들만 사는 거리 각본 조선작의 모범작문 각색 78,921
1977 겨울여자 각본 조해일의 겨울여자 각색 585,775[29]
1979 태양을 훔친 여자 각본 양인자의 혼자 사는 여자 각색 51,645
1979 갑자기 불꽃처럼 각본 오태석의 환절기 각색 11,208
1980 강변부인 각본 강변부인 각색 29,632
1981 도시로 간 처녀 각본 7,400[30]
1986 무진 흐린 뒤 안개 각본 무진기행 각색 4,566
90년대 후반 멀티플렉스 붐이 일기 전까지 대부분의 한국 영화는 단관상영이어서, 관객 자릿수가 다르다. 70년대 기준으로 5만이면 성공, 10만을 넘으면 대성공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위와 같은 관객수는 서울 개봉관 관객수만 집계한 것이므로 서울 재개봉관 관객수와 지방 관객수는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겨울여자》나 《 영자의 전성시대》는 지금으로 치면 천만 관객 수준의 대흥행작이다.

6. 서울대 60학번 등단 현황

<rowcolor=white> 이름 연도 제목 종류 연재
김승옥 1962 생명연습 소설 한국일보 신춘문예
김현 1962 나르시스의 시론 평론 자유문학
염무웅 1964 최인훈론 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박태순 1964 공알안당 소설 사상계 신인상
이청준 1965 퇴원 소설 사상계 신인상
김주연 1965 소설을 재미없게 하는 것 평론 세대
김치수 1966 자연주의 양고(兩考) 평론 중앙일보 신춘문예
정규웅 1974 구미의 여성문학론 평론 한국문학
김광규 1975 유무(有無) 문학과지성
김화영 1963 육성 조선일보 신춘문예
오세영 1965 새벽 현대문학
김지하 1969 황톳길 시인


[1] 성장기는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보냈다. 본적은 전라남도 광양시. [2] 現 순천남초등학교 [3] 김민주 · 안진형, " 뇌졸중 극복한 「무진기행」 김승옥 작가의 세상을 향한 노크", 「레이디경향」, 2009년 2월호 [4] 엄상섭, 조재천과 함께 광양 삼재(三才)라고 불린 수재였다고 한다. [5] 우연이지만 1910년 김승옥의 조부가 구매해서 김승옥의 부친과 김승옥이 유년기에 살았던 생가는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산 60번지'로 매천야록으로 유명한 매천 황현 선생이 살던 집이다. 김승옥은 유년기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순천으로 이사간 뒤에도 89년까지 본인 명의로 이 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광양시가 보존 목적으로 사들인다. [6] 그 후 6·25가 터지고 1950년 7월에 광주가 인민군에 점령당했을 때 낯선 여자 하나가 김승옥의 가족을 찾아왔다. 자신은 1950년 4월까지 아버지의 비서였다고 하면서. 그들 일행이 월출산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경찰과 마주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거기서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김승옥의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사망하였으며, 유해도 찾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겨우 서른세 살 창창한 나이이던 때였다. [7] 당시 엄마는 일 나가서 부재중이었고, 병원에 데려갈 돈도, 의지할 어른도 없던 김승옥은 열이 펄펄 끓어 죽어가는 동생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의 마음에, 약 한번 못 쓰고 보내버린 여동생의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깊고도 내밀한 상처였다. [8]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삼형제가 모두 순천고와 서울대학교 코스를 밟은 엘리트 집안이다. [9] 사업 수완이 있던 어머니는 당시 송광사, 선암사 등에 돈을 주고 벌목권을 따낸뒤, 목재를 여수나 광주등에 팔고 생선을 사서 돌아오는 산판(山坂) 사업을 벌여서 가세가 좀 폈다고 한다. 다만 김승옥이 대학에 진학한 직후 어머니는 순천에서 지방지를 만들어보자는 아버지 친구의 말을 듣고 산판에서 번 돈을 투자 했으나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사이비 언론 및 언론 기관 정화'에 걸려 계획이 무산되고 투자금을 날려 가세가 다시 몰락한다. 이 충격으로 어머니는 몸져 누워 김승옥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6개월간 입원하셨다고 한다. [10] 실제로 그는 나중에 동인지 <산문시대>에 문우들의 캐리커처를 그렸으며, 여러 단행본 표지 그림과 장정을 맡았고, 자신의 연재소설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11] <파고다 영감> 연재를 그만둔 후에는 아예 편집실에 살림을 차리고 눌러 앉았다고 한다. [12] "문학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걸 가르쳐준 책이 있었지요." <김승옥 소설전집 4권>(문학동네)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13] 이 둘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제대한 이청준이 1965년 사상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자 김승옥은 그해 사상계가 주최하던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친구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등단 후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한 이청준은 2년 후 1967년 동인문학상을 받아 친구를 따라 잡았고, 10년 가까이 문학을 멀리하던 김승옥이 1977년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자 다음해 제2회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김승옥이 타고난 천재라면 이청준은 꾸준한 장인이라 할 수 있다. [14] 문학 평론가 유종호의 표현. [15] 동인문학상 역사상 20대 수상자는 김승옥과 이청준 둘뿐이며, 24세 수상은 한국 주요 문학상 중 최연소 기록이다. [16] 김현의 부친은 목포에서 전남 도서 지역의 의약품을 도매 공급하는 큰 사업을 하고 있었다. [17] 1930년대에 황순원이 출간한 가로쓰기를 시도했던 동인지가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산문시대를 발간할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18]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부친의 좌익 전력 때문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19] 신경숙은 작가지망생 시절에 이 작품을 수도 없이 필사해봤다고 하며,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자기 인생의 책으로 이 작품을 꼽았다. 단순히 자기 손으로 적은 이 작품이 가지고 싶다는 이유 만으로 고1 때 이미 여러 번 필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동진의 서재 [20] 이때 '한국의 장 콕또'라는 평을 받았다. [21]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김지하의 변호인이었던 한승헌이 두 번 투옥되고 변호사 자격까지 정지당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22] 삭제된 부분의 내용은 1995년 출간된 전집에도 누락되어 있으므로 내용은 알 수 없다. [23] 당시 친한 지인인 하길종, 이만희 등의 부음을 듣고는 '다음은 내 차례 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고. [24] 작가가 간증에서 직접 밝힌 말이다 [25] 전집과는 다르다. 김승옥이 낸 다자이 오사무 선집은 열림당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다자이 오사무의 전집은 도서출판b에서 출간되었다. [26] 하지만 소문으로만 그러했을 뿐, 소설속 주인공은 선도사가 밤에 몰래 자위행위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27] < 생명연습>, <건>, <역사>,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 무진기행>, <차나 한 잔>, <싸게 사들이기>, <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환상수첩> 등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출간되는 김승옥 전집에 수록되는 작품들 대부분의 출전이 이 저작이다. 평론가들도 "1966년 초판으로 나온 <서울, 1964년 겨울>의 저작들에 김승옥의 문학사적 의의를 기대고 있다"라고 표현할 정도다. [28] 정훈희가 부른 주제가 '안개'의 작사가가 박현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김승옥 작가가 작사했다고 한다. [29]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 90년 장군의 아들에 의해 갱신 [30] 한국노총의 항의로 상영 8일만에 상영중단. 검열후 재상영되나 재상영 관객기록은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