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관문화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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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박화성 소설가 |
1978 김환기† 화가 |
1978 나운규† 영화감독 |
1978 이중섭† 화가 |
1978 현진건†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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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박수근† 화가 |
1980 조치훈 바둑기사 |
1984 박두진 시인 |
1988 김광균 시인 |
1988 김중업 건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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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이봉상 화가 |
1989 조남철 바둑기사 |
1989 조훈현 바둑기사 |
1992 김영주 화가 |
1992 김춘수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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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장리석 화가 |
1992 전광용 소설가 |
1992 한갑수 교수 |
1995 박노수 화가 |
1995 전왕영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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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이창호 바둑기사 |
1998 김남조 시인 |
1999 박홍근 아동문학가 |
2001 권영우 화가 |
2001 박용철†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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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박태현 작곡가 |
2001 신경림 시인 |
2001 유종호 문학평론가 |
2001 이지관 문화연구가 |
2001 최일남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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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홍연택 지휘자 |
2002 고은태[1] 시인 |
2002 김종하 화가 |
2002 나춘호 출판가 |
2002 민경갑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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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 |
2002 이수홍 한국문화협회 이사장 |
2002 이오덕 아동문학가 |
2002 이형기 시인 |
2002 이호철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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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정수봉 교육인 |
2003 박봉석 사서, 국립도서관학교 교장 |
2003 신동엽 시인 |
2003 이종상 화가 |
2003 천상병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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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황병기 국악인 |
2004 김동혁[2] 연극인 |
2004 김사엽 국문학자 |
2004 김서봉 화가 |
2004 김충현 서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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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김희조 지휘자 |
2004 박연희 소설가 |
2004 엄대섭 도서관연구회장 |
2004 임동권 민속학자 |
2005 고우영 만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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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성구[3] 불교인 |
2005 김충실[4] 무용가 |
2005 전숙희 수필가 |
2005 이문열 소설가 |
2006 이규태†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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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 |
2006 한명희 국립국악원장 |
2006 홍기삼 교육인 |
2007 김주영 소설가 |
2007 이강덕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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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안병희 국어학자 |
2008 박광진 예술인 |
2008 오세영 시인 |
2008 최종태 조각가 |
2008 한백유[5]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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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이미자 가수 |
2010 김희진 무형문화재 매듭장 |
2010 레프 콘체비치 러시아인 한국학자, 훈민정음 해례본 러시아어 번역 공로 |
2010 백건우 피아니스트 |
2010 백성희 연극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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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장민호 연극배우 |
2010 전혁림 화가 |
2011 신영균 영화배우 |
2011 이수만 가수, 연예기획사 사장 |
2011 하춘화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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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이근배 시인 |
2011 해의만 국악인 |
2012 최영필[6] 가수 |
2012 김기덕 영화감독 |
2012 김순옥[7] 드라마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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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손숙 연극배우 |
2012 윤일봉 배우 |
2013 구봉서 희극인 |
2013 안성기 영화배우 |
2013 조용필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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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최인호 소설가 |
2013 김혜자[8] 가수 |
2014 김승옥 소설가 |
2014 박정란 드라마 작가 |
2014 송해 희극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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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최영한[9] 배우 |
2015 이천백[10] 희극인 |
2015 이덕화 배우 |
2015 이성희 음반제작자 |
2016 김윤식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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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백영수 화가 |
2016 홍경일[11] 배우 |
2016 김명자[12] 배우 |
2016 김덕용[13] 희극인 |
2017 김남진[14]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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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박근형 배우 |
2017 윤여정 배우 |
2018 이순재 배우 |
2018 김민기 가수 |
2018 조동진†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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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김혜자 배우 |
2019 양희은 가수 |
2019 봉준호 영화감독 |
2020 변인철[15] 배우 |
2020 고두심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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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유영기(1936) 인간문화재 궁시장 |
2021 김병기 화가 |
2021 이장희 가수 |
2021 이춘연† 영화인 |
2021 안숙선 국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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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한석홍† 사진 작가 |
2022 강수연† 배우 |
2022 박찬욱 영화감독 |
2023 원종철 삼원인쇄 대표 |
2024 신순기[16]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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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강부자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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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문화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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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이매방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춤 보유자 |
1987 강수연† 배우 |
1988 김송† 소설가 |
1988 유현목 영화감독 |
1991 김희조 작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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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구봉서 희극인 |
1992 금수현† 작곡가 |
1992 김길봉 향토문화인 |
1992 김학수 화가 |
1992 도동환† 영화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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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오승우† 화가 |
1992 윤장섭 건축가 |
1992 이인표 기업인 |
1992 천혜봉 서지학자 |
1992 황금심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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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금난새 지휘자 |
1995 박춘석 작곡가 |
1995 고성현 성악가 |
1998 고운봉 가수 |
1999 안숙선 국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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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최민식 사진작가 |
2001 권성덕 연극인 |
2001 마에다 켄지 영화감독 |
2001 박형진 문화원장 |
2001 송대관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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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유광열 도예인 |
2001 장석웅 건축가 |
2001 주남철 건축가 |
2001 하춘화 가수 |
2002 김민태 국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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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김혜식 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 |
2002 명계남 배우 겸 제작자 |
2002 문소리 배우 |
2002 문장호 2002 |
2002 서경선 작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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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신응수 대목장 |
2002 이명동 사진작가 |
2002 이배구 출판가 |
2002 이성강 애니메이션 감독 |
2002 임동진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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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장세건† 만담가 |
2002 최완귀[1] 시나리오 작가 |
2002 조방헌[2] 가수 |
2002 황일인 건축가 |
2003 구희서[3] 연극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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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김기덕 영화감독 |
2003 김숙자† 중요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 |
2003 김춘옥 화가 |
2003 박노을 온양문화원장 |
2003 박행보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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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배만금†[4] 가수 |
2003 안종만 출판가 |
2003 윤승중 건축가 |
2003 이장호 영화감독 |
2003 이토 아비토 문화인류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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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 |
2003 최은순 중요무형문화재 매듭장 보유자 |
2004 강영중 기업인 |
2004 김기찬 사진작가 |
2004 김정동 고건축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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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성백엽 애니메이션 감독 |
2004 우제길 추상화가 |
2004 이정호 애니메이션 제작자 |
2004 정석진 문화원장 |
2004 최기영 대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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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최민식 배우 |
2004 태덕수 탈춤연구자 |
2004 한용희 작곡가 |
2005 권창륜 서예가 |
2005 김규원[5] 무용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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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태원 문화원장 |
2005 박기정 만화가 |
2005 오윤† 판화가 |
2005 조남식 문화원장 |
2006 강상수[6]†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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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김준섭 서예가 |
2006 김태근 연극연출가 |
2006 백락구 문화원장 |
2006 이병훈 PD |
2006 이정일 출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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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임남곤 문화원장 |
2007 고두심 배우 |
2007 김상옥[7] 불교인 |
2007 오기수 건축가 |
2007 위황량 장흥문화원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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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도연 배우 |
2007 정재만 전통무용가 |
2007 정재욱 문화원장 |
2007 카네코 카즈시게 일본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장 |
2007 파트리스 드 라 페이에 미술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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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창조 조각가 |
2008 김산호 만화가 |
2008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2008 김준식 문화원장 |
2008 박만식[8] 불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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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박주환 한국화랑협회 회장 |
2008 안선재[9] 서강대 명예교수, 번역가 |
2010 김동학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장 |
2010 박춘석† 작곡가 |
2012 박재상[10]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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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이무호 서예가 |
2012 이정진 배우 |
2012 조민수 배우 |
2015 정재도 한글학자 |
2019 송강호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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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백영규 도예가 |
2024 이문세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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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희조 Heejo Kim | 金熙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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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희조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20년 11월 21일 |
경기도
경성부
수창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 |
|
사망 | 2001년 9월 4일 (수 80세) |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 |
군역 | 육군 중령 퇴역 ( 군악대 6기 / 육군본부 군악대장)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작곡가, 지휘자. 호는 춘봉(春峰).대한민국의 국악과 뮤지컬 발전에 기여한 음악인으로 손꼽힌다.
2. 생애
1920년 11월 21일 경기도 경성부 수창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매동공립보통학교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익혀 야마하 하모니카 합주단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졸업 후 한성은행(이후 조흥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김흥조에게 피아노, 안성교에게 비올라, 안병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외에 화성학과 대위법을 독학으로 익혔고, 임동혁과 김순남에게는 작곡을 배웠다.[1]
1944년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군수산업체인 조선전공회사에 경리 직원으로 입사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는 철도국 직원 자격으로 조선호텔 실내악단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실내악 연주 경험도 쌓았다. 해방 후에도 명동의 7인조 경음악 합주단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1946년에는 현제명이 창단한 고려교향악단에서 비올라와 콘트라베이스 주자 겸 편곡자로 활동했다. 고려교향악단이 내분으로 와해된 뒤에는 김생려가 창단한 서울관현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직계 모체)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 겸 편곡자로, 서울시립취주악단에서는 튜바 주자로 활동하는 등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연주 경험을 했다.
1948년에 더 나은 수입을 위해 육군 정훈음악대( 군악대) 장교 모집에 지원해 6기생으로 임관했고, 광주에 주둔하던 제5여단 군악대장으로 부임했다. 6.25 전쟁 발발 후에는 육군본부 군악대장으로 이임했고, 1957년에 중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여러 행진곡과 군가를 작곡했다. 동시에 김소희와 박귀희 등 판소리 명인들을 군악대 문관으로 초빙해 이들의 음악을 채보하고 편곡하는 등 전통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2]
전역 후에는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의 작곡과 전임강사로 부임해 작곡 이론과 취주악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58년에는 KBS의 방송 전용 소편성 관현악단인 KBS 스몰 오케스트라[3]의 상임 지휘자로도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민요를 비롯한 전통음악들을 채보하고 편곡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서양 관현악과 국악기들인 단소, 피리, 가야금의 협연 작품과 민요의 합창 편곡들인 '울산아가씨', ' 아리랑', '베틀노래', '옹헤야', '한강수타령' 등을 지휘/방송했다.
1962년에는 신흥대 강사직에서 퇴임해 정부가 갓 조직한 뮤지컬 등 무대예술 공연 단체인 예그린악단에 작/편곡자로 들어갔고, 여기서도 '신고산타령' 과 '경복궁타령' 을 비롯한 민요들을 합창으로 편곡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국악예술학교(현 국립국악고등학교) 양악 교사로도 활동하면서 지영희, 성금연, 신쾌동, 박녹주, 박초월 등 당대의 국악 명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고, 이들의 연주를 듣고 채보하는 등 계속 전통음악 자료의 수집에 몰두했다.
1965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자 작/편곡자로 기용되었고, 여기서도 여러 민요를 국악관현악으로 편곡했다. 1968년에는 지휘자로도 부임해 악단을 이끌었고, 같은 해 예그린악단의 의뢰로 뮤지컬 '대춘향전' 을 작곡해 초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작곡에도 뛰어들었다. 1974년에 예그린악단이 국립가무단으로 재창단되면서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고, 여기서도 '대춘향전' 의 개정판이나 '종이여 울려라', '시집가는 날', '상록수', '심청전' 등 전통 소재에 기초한 뮤지컬을 계속 작곡했다.
이외에 '심청' 과 '춘향전' 등의 무용음악과 '처용' 등 창작 발레의 음악도 작곡했고, 판소리 '심청가' 의 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편곡도 남겼다. 1982년에는 서울예술대학 국악과 교수로 부임해 1987년까지 재직했고, 같은 해 국악관현악을 위한 합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아시안 게임 개막식의 음악 작곡과 총감독을 맡았고, 1988년의 서울올림픽에서도 개막식과 폐막식의 매스게임 음악을 작곡했다.
이후 주로 국악관현악 작품들의 작곡에 주력했고, 특히 1999년까지 작곡한 11곡의 합주곡은 지금도 한국 국악관현악단들의 기본 연주곡으로 자리잡고 있다. 2000년까지 계속 작/편곡 활동을 했지만, 이후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원주기독병원에서 투병 중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유해는 강원도 원주시의 귀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
국악관현악산조 주제에 의한 합주곡 (1977)
합주곡 제1번 (1982)
합주곡 제2번 (1983)
합주곡 제3번 (1987)
합주곡 제4번 (1988)
축전 1988 (1988)
플루트 독주와 국악 합주를 위한 무용환상곡 (1989)
박상근 산조 주제에 의한 합주곡 (1990)
김죽파류 산조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 (1991)
윤윤석류 산조에 의한 아쟁 협주곡 (1991)
한범수류 산조에 의한 대금 협주곡 (1992)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국악 칸타타 '서울교성곡' (1993)
합주곡 제5번 (1993)
가야금 3중주를 위한 협주곡 (1994)
농부가 주제에 의한 사시풍경 (1994)
합주곡 제6번 (1994)
서용석류 대금 산조와 관현악 (1995)
성금연의 흥을 주제로 한 가야금 협주곡 (1995)
합주곡 제7번 '자작 주제에 의한 여섯 개의 변용' (1998)
합주곡 제8번 '다심, 다악, 다선 삼매' (1998)
합주곡 제9번 '영남의 봄' (1998)
합주곡 제10번 '축전 서곡 1999' (1999)
합주곡 제11번 '짓밟힌 우리소리 움티운 찬가' (1999)
서양관현악/국악관현악+서양관현악 협주
피리와 관현악을 위한 민요 스케치 (1957)
단소와 관현악을 위한 수상곡 (1958)
성금연류 가야금 산조와 관현악 (1958)
한/양 관현악 합주를 위한 '봄의 찬가' (1988)
한/양 관현악 합주를 위한 '아름다운 농촌 풍경' (1997)
무용음악/발레
무용음악 '종송(鍾訟)' (1967)
무용음악 '심청' (1975)
발레 '처용' (1981)
뮤지컬
대춘향전 (1968. 1974 개작)
종이여 울려라 (1974)
시집가는 날 (1974)
상록수 (1975)
심청전 (1976)
태양처럼 (1976)
달빛 나그네 (1978)
신데렐라 (1980)
양반전 (1986)
아리랑아리랑 (1988)
영화음악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창근 감독, 1959)
젊은 표정 ( 이성구 감독. 1960)
귀거래 (이용민 감독. 1960)
종자돈 (김진규 감독. 1967)
장군의 수염 ( 이성구 감독. 1968)
당신 ( 이성구 감독. 1969)
여진족 (이규응 감독. 1969)
결사대 작전 ( 고영남 감독. 1969)
마님 (주동진 감독. 1970)
내 아내여 (유현목 감독. 1971)
분례기 (유현목 감독. 1971)
춘향전 ( 이성구 감독. 1971)
의사 안중근 (주동진 감독. 1972)
을화 ( 변장호 감독. 1979)
조선왕조 500년 - 임진왜란 (MBC 대하드라마. 1985)
군가/행진곡
대한 국군의 자랑
대한의 방패
개선행진곡
한글 노래
승공의 노래
6.25의 노래
현충일의 노래
나의 조국
충성을 다하라
묵념곡
자유의 표상
의례곡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사가
계몽사 사가
데이콤 사가 (1991)
신동아화재 사가 (1994)
우리증권 사가
제일제당 사가 (1990)
한국통신 사가
교가
충남대학교 교가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가
삼육대학교 교가
건전가요
잘 살아보세
조국의 찬가
민족의 노래 등
체조/체육음악
국민체조 음악
전국체전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 음악
1988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 매스게임 음악
종교음악
천주교 찬송가와 불교 찬불가 다수
여타 편곡
판소리 '심청가' 와 '춘향가' 의 창과 국악관현악 편곡
뮤지컬 ' 지붕위의 바이올린' 의 서울시뮤지컬단판 편곡
뮤지컬 ' 사운드 오브 뮤직' 의 신시 뮤지컬컴퍼니판 편곡
민요의 합창과 서양관현악용, 합창과 국악관현악용 편곡 다수
4. 수상 경력
제4회 방송문화상 음악상 (1961)제1회 청룡영화상 음악상 (1963)
옥관문화훈장 (1991)
뮤지컬의 날 공로상 (1993)
MBC 가곡 공로상 (1994)
어린이문화예술원 반달동요대상 (1994)
5. 음악적 특징
보통 작곡을 음악대학이나 음악원에서 전공하고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달리 주로 연주 분야에서, 그것도 대부분 독학이나 개인 교습으로 배우고 시작한 인물이라 '음악은 듣기 쉬워야 한다' 는 철칙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김희조가 본좌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서양음악을 배우며 커리어를 시작한 음악인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국의 전통음악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창작에 응용했다는 점이다.이러한 성향은 작곡 스승이었던 김순남에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김순남도 월북 전 함화진을 비롯한 국악인들에게 국악 이론을 배우거나 민요 등을 채보하면서 창작에 응용하는 등 민족적인 요소를 상당히 중시했다. 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 전위적인 경향까지 보였던 스승에 비해, 김희조는 오히려 음악이 어려우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쉽다고 판단해 통속성을 더 중시하면서 국악과 양악의 요소를 긴밀히 접목시키는데 집중했다.
한국전쟁 직후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양악계와 국악계는 서로 선을 그어놓듯이 나뉘어져 있었고, 적대하는 관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소 닭 보듯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김희조의 경우 군악대장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명창이나 명인들이 녹음한 판소리나 시나위 등을 비롯한 전통음악 SP를 모으고 국악인들을 군악대에 편입시키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국악계와 소통했고, 이렇게 형성된 경험이 이후 국악관현악의 태동기와 발전기에 쏟아낸 작품들에 녹아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뮤지컬의 한국 유입 과정에서도 외국의 명작을 그대로 공연하는 것이 아닌, 한국적인 소재를 통한 독자적인 뮤지컬 창작 노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한국 뮤지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특히 '대춘향전' 이나 '시집가는 날' 은 김희조 사후에도 계속 반복 상연되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합창단에서도 김희조의 민요 편곡 합창은 지금도 정평있는 레퍼토리로 계속 애창되고 있고, 군악대의 연주 곡목에도 지금까지 김희조 작곡의 군가나 행진곡, 편곡 작품이 들어있는 등 다방면에서 이 사람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음악에 문외한이거나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학창 시절 국민체조 음악에 맞추어 체조를 했거나 '잘 살아보세' 의 가락을 흥얼거리는 등 알게 모르게 이 분의 음악과 자주 마주칠 수 있다.
비록 통속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러 실험적인 시도에는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있고, 5.16 이후의 군사 정권이 주도한 문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이유로 삐딱하게 보는 시선도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국악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음악인들은 김희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조국의 찬가' 와 '민족의 노래' 같은 건전가요는 차지철이 작사를 맡은 바람에 공인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예그린악단에 들어가 뮤지컬에 전념하기 전에는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소소하지만 한국 오페라 역사에 업적을 남겼는데, 베르디의 ' 일 트로바토레' 와 플로토의 '마르타' 한국 초연을 지휘한 인물도 김희조였다.[4] 이후에도 7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계속 정기적으로 지휘대에 올라 자작곡들을 지휘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음악 전공자 외의 일반인들에게는 정작 존재감이 덜한 편인데, 세기가 넘어간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동명이인 여성 아나운서 때문에 더 공기화 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구글링을 해보면 이 분보다 아나운서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6. 사생활
군악대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어서 매우 완고하고 고압적인 인물로 여겨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작곡할 때는 영감이 안떠오르면 시간이 언제든 그냥 잤다가 삘꽂혔다 싶으면 마찬가지로 밤이든 낮이든 계속 악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마감 기한은 거의 어기지 않아서 높으신 분들이 좋아했다고 한다.다만 일에 치여서 살다 보니 담배도 하루에 한두 갑 정도 피웠다고 하는데, 깊이 들이마시지는 않았고 그냥 뻐끔거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외에는 군악대장 시절 미군들과 어울리면서 익숙해진 초콜릿이나 오레오,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커피(소위 '다방커피') 같은 달달한 군것질 거리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자식 농사도 잘 지었는데, 1946년에 결혼한 부인 지정숙과 평생 좋은 금슬을 유지하면서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이들 중 큰아들인 김은기는 의사로, 작은아들인 김덕기는 성악 반주자 겸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외손녀인 박윤영도 외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뮤지컬을 비롯한 무대 작품의 작/편곡자와 대본 작가로 일하고 있다.
[1]
다만 김순남의 경우 해방 후
월북했기 때문에, 김희조가 김순남에게 배웠다는 사실은 월북 문인과 예술인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진
노태우 정권 시절에야 공개적으로 밝혀졌다.
[2]
조선 시대 후기에도
군악을 맡은
취고수가
국악을 주도했음을 생각하면 공교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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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 KBS 관현악단.
KBS 교향악단과는 별개의 조직이다.
[4]
일 트로바토레는 1960년 5월에 고려오페라단에서, 마르타는 1961년 12월에 푸리마오페라단에서 한국 초연했다. 두 공연 모두 관현악단은 김희조가 당시 이끌고 있던 KBS 스몰 오케스트라가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