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東仁文學賞 | Dong-in Literary Aw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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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사상계 (1956~1967) |
동서문화사 (1979~1985) | |
조선일보 (1987~ ) | |
상금 | 5,000만원 |
첫 시상년도 | 1956년 ([age(1956-01-01)]주년) |
최근 수상자 | 정영선 (2023년 54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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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5년 소설가 김동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재정된 상. 현대문학상과 함께 국문학계에서 위상이 높은 문학상이다. 원래는 사상계에서 주관했으며 현재는 조선일보에서 주관한다. 또한, 1968년과 1978년 약 10년 동안은 수상이 중단되었다. 이후 1979년부터 동서문화사 주관으로 재개되어 1985년까지 동서문화사가 시상하였다. # 유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가 주관하고 있다.2. 수상작과 수상 작가 일람
- 제01회 1956년: 김성한 - 바비도
- 제02회 1957년: 선우휘 - 불꽃
- 제03회 1958년: 오상원 - 모반
- 제04회 1959년: 손창섭 - 잉여인간
- 제05회 1960년[1]: 서기원 -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이범선 - 오발탄
- 제06회 1961년: 남정현 - 너는 뭐냐
- 제07회 1962년: 이호철 - 닳아지는 살들, 전광용 - 꺼삐딴 리
- 제08회 1963년: 당선작 없음
- 제09회 1964년: 송병수 - 잔해
- 제10회 1965년: 김승옥 - 서울 1964년 겨울
- 제11회 1966년: 최인훈 - 웃음소리[2]
- 제12회 1967년: 이청준 - 병신과 머저리
- 제13회 1979년: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제14회 1980년: 전상국 - 우리들의 날개
- 제15회 1982년: 오정희, 이문열 - 동경, 금시조
- 제16회 1984년: 김원일 - 환멸을 찾아서
- 제17회 1985년: 정소성 - 아테네 가는 배
- 제18회 1987년: 유재용 - 어제 울린 총소리
- 제19회 1988년: 박영한 - 지옥에서 보낸 한철
- 제20회 1989년: 김문수 - 만취당기
- 제21회 1990년: 김향숙 - 안개의 덫
- 제22회 1991년: 김원우 - 방황하는 외국인
- 제23회 1992년: 최윤 - 회색 눈사람
- 제24회 1993년: 송기원 - 아름다운 얼굴
- 제25회 1994년: 박완서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제26회 1995년: 정찬 - 슬픔의 노래
- 제27회 1996년: 이순원 - 수색, 어머니 가슴 속으로 흐르는 무늬
- 제28회 1997년: 신경숙 - 그는 언제 오는가
- 제29회 1998년: 이윤기 - 숨은그림찾기 1
- 제30회 1999년: 하성란 - 곰팡이꽃
- 제31회 2000년: 이문구 -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 제32회 2001년: 김훈 - 칼의 노래
- 제33회 2002년: 성석제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제34회 2003년: 김연수 -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제35회 2004년: 김영하 - 검은 꽃
- 제36회 2005년: 권지예 - 꽃게무덤
- 제37회 2006년: 이혜경 - 틈새
- 제38회 2007년: 은희경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 제39회 2008년: 조경란 - 풍선을 샀어
- 제40회 2009년: 김경욱 - 위험한 독서
- 제41회 2010년: 김인숙 - 안녕, 엘레나
- 제42회 2011년: 편혜영 - 저녁의 구애
- 제43회 2012년: 정영문 - 어떤 작위의 세계
- 제44회 2013년: 이승우 - 지상의 노래
- 제45회 2014년: 구효서 - 별명의 달인
- 제46회 2015년: 김중혁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 제47회 2016년: 권여선 - 안녕 주정뱅이
- 제48회 2017년: 김애란 - 바깥은 여름
- 제49회 2018년: 이기호 -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 제50회 2019년: 최수철 - 독의 꽃
- 제51회 2020년: 김숨 - 떠도는 땅
- 제52회 2021년: 윤성희 - 날마다 만우절
- 제53회 2022년: 조해진 - 완벽한 생애
- 제54회 2023년: 정영선 - 아무것도 아닌 빛
—— 공백기: 1968년부터 1978년까지 ——
3. 기타
사상계, 동서문화사, 조선일보로 주관 주체가 3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주최측의 정치 성향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수상 풍조를 지켜왔다라고 홍보하고 있으나 정작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배제되었다. 초창기 수상자들인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 이범선 등은 국문학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인데[3] 상을 주관하는 사상계와도, 작가들 서로간에도 글의 색채가 확연히 달랐다. 전후세대 문학의 후일담격 작품인 전광용의 꺼삐딴 리나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대작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도 수상했고 창업주가 뼛속까지 보수 우파였던 동서문화사 주관시기에 철거민, 고발문학의 기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수상했다.동인문학상이 논란이 되는 부분은 상의 명칭과, 문학상의 제정에 관련된 뒷배경이다. 김동인이라는 인물의 능력과 업적은 논란이 있긴 해도 분명 인정할 부분이 있지만[4][5]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친일파이자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처음 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논란이 많았던 상이다.
황석영은 장준하와 김동인이 같은 이북 출신이라 상 이름을 붙여준 거라는 독설을 남기기도 했다. 이 문학상을 처음 제정하고 1970년 오적 필화사건으로 폐간되기 이전까지 주간한 사상계는 장준하가 창간하고, 함석헌이 주필이었다. 둘 다 이북 출신의 실향민들로 1958년 이승만 정권을 비판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남산에까지 연행된 적이 있었고 이승만 정권 붕괴 후 당대 박정희 정권에서까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 상이 제정된 배경에는 1950년대 전후 남한출신과 이북출신들의 알력싸움이 있었다. 당시 한국문단은 현재까지도 발간되는 문예지이자 현대문학상의 주최지인 '현대문학'의 주간 조연현과 조연현의 친구인 서정주, 김동리의 영향력[6]이 막강했다. 이들은 모두 남한 출신이었고 전후 '도강파'의 대표주자들이었는데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에 운좋게 피난해 종군작가단에 들어가 활동하거나 아예 염상섭 처럼 군적을 받아 복무하다 돌아온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7] 한강다리 폭파와 잘못된 보도로 미리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숨어 지낸 비도강파 문인들과 이북출신 월남문인들은 서울 수복 후 돌아온 도강파 문인들로부터 사상성을 의심받으며 심문받거나 하는 곤욕을 겪는다.
이런 상황에서 고향을 떠나온 것도 서러운데 의심까지 받는 이북 출신 문인들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슬픈 이야기지만 시대와 국적을 막론하고 문학단체가 친목질, 연줄로 돌아가는 경우가 워낙 흔했고 [8] 이제 막 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고착화된 시점이라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다. 물론 이북 출신의 유명작가로 황순원이 있었으나 그는 일제강점기때 아예 집필을 멈춘채 칩거했던 것처럼 전후의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한 채 문필 활동과 제자육성에만 힘썼다.[9] 급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피바람이 불던 이북의 참상을 겪고 지주로 몰려 어쩔 수 없이 월남했지만 그 서슬퍼렇던 일제강점기에도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고 버텼던 '황고집' 황순원에게 동향인이라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권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
이리저리 줄을 대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자 이북 출신의 문필가였던 백철, 최정희 등이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자 평안북도 출신 장준하( 의주군[10])와 주필 함석헌( 용천군)의 지원을 받아 작고한 이북 문인 중 가장 명성 높았던 평양 출신 김동인의 이름을 따온 문학상을 만들었다. 초창기 수상자들인 김성한,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 이범선이 모두 이북 출신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상 받을만한 작가들중에서 이북 출신들을 챙겨줬다고 보면 된다. 이 작가들이 실력없는데 줄타서 상받은건 절대 아니다.
동인문학상의 초대 심사위원인 백철, 최정희, 김팔봉, 이헌구, 정비석, 이무영은 친일 경력이 명백했다. 그 외 심사위원들 역시도 김동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면서 문학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여러 사안들을 상의 권위로 내세워서 윤색시키고 포장해 가려버렸고, 반공국시의 시국에 영햡하는데 성공한 이들의 색깔론에 묻혀 동인문학상의 심사위원들에 대한 친일 경력을 따지는 것 역시 문단에서는 꽤나 오래 금기시되었다. 특히나 백철과 최정희는 북한군 종군작가 형식으로 남하한 이태준, 임화, 박태원과 재회해 부르주아 사상의 청산을 위한 날선 강연을 듣고 마치 초등학생처럼 북쪽 선전가곡을 배운 다음 시가행진에도 동원되기도 했다. 엄청난 치부였지만 생전에는 친목질과 문단 원로라는 권위를 내세워 친일, 부역 경력을 지적하던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거나 뭉개버렸고 이들은 동인문학상이 출범한 이후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꽤 오랜 시간 동안 또아리를 단단히 틀고 문단권력으로 행세하며 천수를 보낸다. 사실 도강파인 김동리와 조연현은 서울 함락 직후에 바로 피난가지 못해서 9.28 수복까지 약 3개월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는데 은신중 백철, 김팔봉, 최정희의 부역행위나 인민재판 회부를 목격했으나 목숨 오가는 전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며 옹호하고 넘어가주었기에 부역자 처벌에 회부되는 것만은 면하고 목숨을 건졌다. [11]
이러한 전개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에즈라 파운드, 크누트 함순 같은 추축국 부역 문인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과 유사하다. 나치에 부역한 함순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중형을 면제받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재산 대부분을 벌금으로 내는 선에서 끝났다. T.S.엘리엇을 발굴하고 키웠으며 황무지의 편집자로도 유명한 모더니스트들의 대부였으나 동시에 반유대 파시스트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 적극 부역한 에즈라 파운드는 친목질했던 동료, 후배 문인들이 끝까지 옹호해줘서 교도소가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볼링겐상까지 수상하고 말년엔 이탈리아에서 후배 문인들과 교류하며 평온하게 지냈다. 죽을때까지 대놓고 파시스트였는데도 말이다. [12]
동인문학상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장준하 역시 육당 최남선의 서거일에 그를 애도하는 글을 실어준 적이 있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포함된 장면 정권에 혁명 후 새로운 시대에 이바지하겠다며 기꺼이 참여했다.[13]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준하는 쿠데타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사상계 100호 출간 기념파티를 열어 쿠데타 세력과 미군측 관계 개선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군부가 처음 내세운 민정이양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5.16 쿠데타를 비판하는 함석헌의 글을 바로 다음호에 게재한다. 건국 초기에 초대 육군참모총장 송호성이 반공적이지 못하다며 대놓고 비토했던 이범석을 좌파 냄새 난다고 멀리한 지극히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했던 장준하였지만 당대 정치지형도는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그를 통일을 꿈꾸는 민족주의의 기수로 만들었다.
그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입장은 그가 모셨던 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사상계의 중핵으로 자리잡으면서, 원칙적으로 용납하면 안되지만 우리쪽이면 받아들인다는 기존 스탠스가 선우휘같은 지역주의로 바뀐다. 선우휘가 1964년 정치적으로 정 반대의 입장을 지지하던 부하직원 리영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 석방을 위해 힘쓰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직까지 내려놓은 것은 그의 사상에 동감해서가 아니라 평북 삭주 태생 실향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북출신들은 정치적 입장과 견해는 다를지언정 어려울땐 도와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다.
후대 사람들은 장준하와 함석헌이 왜 김동인의 이름을 따서 상을 만들었는지 이해할수 없다는 입장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당시 세태를 감안하면 어려운 실향민들끼리 사상, 정치 떠나 돕고 살자는 의도로 만들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장준하가 옥중에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겸직금지조항에 걸려 사상계를 떠나자 후임 발행인이 된 사람은 조선총독부 관료출신 부완혁인데 둘은 사상계의 경영권을 가지고 한동안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 참고로 사상계 폐간의 원인이 된 오적 필화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부완혁이 아니라 5.16 9주년 기념으로 외주필자였던 김지하에게 원고를 받는 기획을 입안한 편집장 김승균으로 그는 당대 학생운동계의 거목이자 이미 2번의 옥살이를 마쳤던 사람이다. #
이같은 제정 배경 때문에 후보 추천하는 과정에서 동인문학상의 후보작이 되기를 거부하는 입장 표명을 한 사례가 존재한다. 2000년 황석영은 <한겨레>신문 특별기고문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거부한다'에서 이를 피력했다. 2001년 공선옥(소설가)은 언론 권력이 문학 권력과 결탁하여 고도화된 정치적 전략을 펼친다며 비난했다. 2003년엔 고종석(한국일보 논설위원, 소설가)이 비슷한 비판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일곱 명의 문인들이 종신 심사위원으로 정해졌다. 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 이중에서 이청준, 박완서는 타계했고[14], 이후에 오정희와 신경숙이 위촉됐다. 2013년에 유종호가 "다달이 10권 가까운 신작을 읽는 게 육체적으로 버겁다"며 심사위원 자리에서 물러났고, 2015년에 김주영과 이문열이, 2021년 12월에 김인환과 오정희가 물러났다. 소설가 김인숙, 이승우, 구효서, 문학평론가 김동식 등이 중간중간에 합류했다. 현재 정과리· 구효서· 이승우· 김인숙·김동식이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당선작 없이 후보상을 공동 수상.
[2]
동인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에서는 이 작품이 제외되었는데, 이는 작가 최인훈이 자신의 작품이 선집류에 실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창비에서 펴낸 선집인 '20세기 한국소설'에도 최인훈의 작품은 실리지 못했다.
[3]
동인문학상 초창기 수상자들에
장용학을 더하면 전후세대 주요 작가들은 거의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전후세대가 문단 데뷔시기와 생년, 이력이 저마다 달라 굉장히 애매한 구분이다. 예를들어 1920년생 조연현은 전전세대로 분류되나 전광용은 1919년생인데 등단이 늦어서 그의 대표작 꺼삐딴 리는 전후문학 세대 후일담으로 분류된다. 이병주는 1921년생으로 장준하, 김성한 같은 학병세대지만 등단을 1965년에 해서 아예 뒤로 밀린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분류로는 조연현, 황순원, 김동리, 박목월까지가 3세대, 선우휘와 오상원, 손창섭, 이호철부터는 4세대로 분류했다. 4.19 이후 빛을 본 최인훈부터는 5세대. 반면 백철과 김춘수는 8.15 광복을 기점으로 전후세대를 구분했다.
[4]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이광수와 함께 근대 국문학의 첫발을 땐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광수와 마찬가지 이유로 그 첫발이 부정될 일은 없다. 부정적인 부분은 그 외 전부 다첫번째로 낭비벽으로 가산 털어먹고 생계를 위해 닥치는데로 글을 쓴 탓에 작품의 질이 균일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삼대로 장편으로도 성공한 염상섭, 일제의 탄압으로 장편은 제대로 쓰지 못해 검증할 길이 없으나 단편의 균일함은 근대 국문학 작가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현진건과 달리 김동인의 장편은 돈벌기 위해 쓴 역사소설들이고 단편들은 기복이 심했다. 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같은 일본작가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작품이 많다. 대표작 광염소나타, 광화사가 그렇고 장편 역사소설 젊은 그들도 일본 닌자소설을 번역해 내용 조금 바꾼 작품이다. 두번째로 이광수, 염상섭, 김명순 등과 충돌했는데 전부 본인이 먼저 인신공격한 쪽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세번째로 붉은 산,감자 등에서 보이는 중국인 차별 문제도 조선일보에 취직했던 시절 그나마 사내 논조가 민족의 실력양성을 내세우던 시절에 노골적으로 혐오감정을 드러낸 것인데,
조만식을 비롯한 원로들이 일본인 관료들에게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러 갔던 사건에 대해 단순 흥미거리이자 소설적인 소재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 사람에게서 이만큼이나 논란거리가 있는 게 더 문제 아닌가
[5]
사실 이 상을 제정했던
장준하는
김동인뿐만 아니라
최남선과
이광수 등 누가봐도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한국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존경심을 피력하는 면모를 많이 보였었다.
최남선이 죽었을 당시에
사상계 권두언에 추모사를 남기는가 하면, 아예 이 둘을 추모하는 문학행사인 <육당.춘원의 밤>을 주최했을 정도. 다만 별개로
김준엽을 비롯한
사상계 동지들은 이러한
장준하의 면모를 보고 흑역사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나마 독립운동가 경력이 있어서 망정이지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친일파 옹호자로 몰리기 딱 좋았을거 같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6]
현대문학의 편집장은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한 오영수였다.
[7]
해군에서 복무했던 염상섭, 공군에서 활동한 김동리, 황순원 등 많은 문인들이 종군작가로 활동했는데 이때 나온 작품들은 정훈 병과 특성상 정해진 기준 아래 시간에 쫒기며 쓰여진 탓에 대체로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 오늘날 잊혀지고 전집류에도 빠지는 경우가 많아 성취가 크게 주목받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족상잔과 이념대립 속에서 작가들이 각기 표방한 지향점, 열악한 상황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가들의 필력 차이가 상당히 흥미롭다. 김동리나 황순원 같은 거장들은 방향은 달라도 치열하게 고뇌했음이 글에 드러나는 반면 오늘날 웹소설만도 못한 펄프픽션을 찍어낸 작가들도 있다.
[8]
이런 식의 파벌놀이에 희생된 대표적인 문인이
에드가 앨런 포우다. 뉴잉글랜드, 보스턴의 문인들이 그들만의 리그로 돌리던 미국 문단에 새로운 시도를 자주 했지만 당대 미국 문단은 포우를 알아보지 못했고 포우의 사생활을 매도하기에 바빴다. 결국 포우는 이름은 아는데 그저그런 작가, 주류 문인들에게 툭하면 시비거는 괴팍한 비평가로만 인식되다 세상을 떠났다. 사후
샤를 보들레르에 의해 유럽권, 특히 문학의 천조국으로 일컫어지던 영국, 프랑스 문학계에서 작가 취급조차 안 하던 포우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땅을 치고 후회했다.
[9]
황순원은 한국전쟁기 공군 소속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쓴 단편에서조차 상호 이해를 통한 화해와 휴머니즘을 강조할 정도로 이념다툼을 지양했다.
[10]
출생지는
의주군이지만 해방 이후 월남할 때까지 주로
삭주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와서 사실상
삭주군이 실질적인 고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11]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5)에는 그 고통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박완서의 고교시절 은사이자 소설가인 박노갑(1905~51)과 점령 기간 인민군에게 밥해 주는 것으로 근근이 먹고살았던 박완서의 숙부도
1.4 후퇴 전 약식에 가까운 절차를 거쳐 처형되었다는 얘기가 버젓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잔류파 중에서도 부역 의혹이 있던 문인들이 자신들을 옹호해준 도강파 문인들에게 강하게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12]
물론 도강파의 서정주 역시 털기도 전에 먼지가 나올만한 친일전력이 있었지만 당대의 문단권력으로 남은 것은 첫번째로 김동리와 굉장히 친해서 김동리의 영향력으로 자리를 보전했고,두번째로 서정주는 에즈라 파운드처럼 아예 홀로코스트시절 이탈리아까지 가서 전시선전을 하거나 함순처럼 히틀러 자살 후 그를 민족을 위한 정의의 복음의 선지자라며 좌중이 황당해할 찬사를 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던 단순 기회주의자였으며 후일 종군문인단으로 줄을 잘 탔기에 그정도 선에서 끝났다. 막상 60년대쯤 김동리와 서정주도 문단내 이권싸움으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 아예 김동리가 서정주를 친일부역자라는 이유로 공격하고 '월간문학'으로 독립해 동향 친구인
박목월과 제자
이문구를 밀어주게 된다.
[13]
장준하가 참여한 분야는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농촌을 근본으로 해 경제개발을 하겠다는 의도였고 장준하가 직접 면접을 본 인원들의 대부분은
4.19 혁명의 주 참여인원인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을 국토건설요원들로 파견해 지방에 만연한 부정부패 척결과 지방농촌 경험을 3년간 수행한 다음 이들을 지방의 군수로 임명해 민주주의 정권을 실제적으로 이끌어가는 중견세력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전
5.16 쿠데타로 정권이 뒤집어진다.
[14]
박완서 작가는 타계하기 몇 해 전 건강 상의 문제로 심사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