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 想 界
1. 개요
1953년부터 1970년까지 발행된 월간 시사잡지. 당대 지식인과 학생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현대 한국 문학과도 깊은 인연을 자랑하는데 황석영, 김지하, 이청준과 같은 쟁쟁한 한국 현대 문인들이 사상계에 의하여 발굴된다. 동인문학상을 처음 제정한 것도 사상계에 의한 것이었다2. 역사
사상계가 주는 이미지와 달리 사실 초기에는 전형적인 어용언론(...)으로 1952년 문교부가 간행하기 시작한 <사상>(思想)이 전신이다.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근무하던 장준하가 서영훈과 함께 창간을 주도했다. 미국 공보원이 발간 작업을 도왔다. 하지만 어용언론이라서 싣는 내용이야 뻔했다. 게다가 당시 나라 꼴이 정상이 아니었던 탓에 당연히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어처구니 없는 일로 폐간됐다. 서영훈이 원고 청탁을 위해 고형곤을 찾았다가 문리대 학장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됐다. 하필이면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이던 박마리아였다. 잡지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던 박마리아는 이승만에게 백낙준이 " 흥사단과 서북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사상이란 잡지를 만들었다고 모함한다.[1] 이승만은 안창호가 살아있을 때부터 흥사단과 서북 지방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2]이후 장준하가 독자적으로 사상계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사상계의 역사가 시작된다. 통일[3][4], 민주주의 지향, 경제발전,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 등을 기치로 내걸었던 1953년 4월 사상계 창간호는 전쟁 중임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순식간에 매진된다. 일반적으로는 창간호가 3,000부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각에서는 그건 한국 언론 특유의 과장화법이었고 실제로는 2,000부 내외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한국전쟁으로 밥 한끼 먹기도 힘들었던 당시의 사회를 생각해보면 대단한 판매량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창간 당시 총 지면수가 A4 100매 정도였는데 독자들이 '지면수 좀 늘려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라고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수를 400매 정도로
이후 휴전이 되면서 1953년 12월부터는 서울에서 출간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1955년 무렵이 되면서 전쟁의 혼란이 가시기 시작하자 부수량은 급증하기 시작해서 1만부를 넘어서게 된다.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 문예를 장려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 또한 이 무렵부터 이승만 정권과의 알력이 시작되기 시작하는데, 1958년에 첫 필화가 발생한다. 함석헌이 기고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에서 남한을 꼭두각시로 묘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함석헌과 장준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이후로도 이승만 정권과의 다툼은 계속 되는데, 가장 유명한 사건은 바로 자유당의 독재에 반발하여 권두언(머릿말)을 백지로 출판해 버린 1959년 2월의 백지 권두언 사건. 권두언 자체가 백지이면 편집 실수라고 독자가 생각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머릿말 제목은 적혀있었다. 바로 무엇을 말하랴.
결국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붕괴되지만 이후로도 당국과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다들 알다시피 5.16 군사정변을 거쳐 박정희 정권이 수립됐기 때문. 제2공화국의 혼란에 실망해있던 사상계는 초기에는 군사정권과 쿠데타에 대하여 비교적 우호적이었지만 결국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64년 무렵[8]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치는 공개장〉이라는 기고문이 문제가 되어 또 한번 편집진들이 단체로 코렁탕을 먹었고, 정권 차원에서의 압박으로 인한 광고 취소, 판매량 감소 등이 겹치면서 사상계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지면수도 다시 100면 내외로 줄었을 뿐만 아니라 정기 구독을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발행될 정도의 막장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사상계를 지탱하려고 애쓰던 장준하는 결국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된다.
한편 사장이었던 장준하가 신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됨에 따라 국회의원 겸직 금지 조항에 의거하여 장준하는 사상계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뒤를 이어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인 부완혁[9]이 취임한다.
부완혁은 몰락해가던 사상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1970년 김지하가 사상계에 투고한 풍자시 오적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자신들을 통렬히 비판한 <오적>을 읽은 높으신 분들은 당연히 진노했고 저자 김지하를 비롯하여 편집진들이 다시 한 번 줄줄이 쇠고랑을 찬다. 게다가 칼을 갈고 있던 당국은 이 사건을 단순한 필화로 매조지하지 않았고, 결국 사상계는 반공법을 어긴 혐의로 1970년 9월 법원에 의하여 폐간 판결을 받게 되면서 16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3. 복간 시도
2001년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차관이 '(주)디지털사상계'란 법인을 세운 뒤, '디지털 사상계 준비모임'을 만들어 준비과정을 거쳐 9월에 'www.sasangge.com' 도메인으로 창간됐으나, 2004년 4월부로 홈페이지를 닫았으며 법인은 현재 폐업 상태다. 반면 장준하 전 발행인의 장남 장호권은 2001년 '(주)장준하사상계'를 세워 2005년에 웹진 'e-사상계(www.esasangge.com)'를 먼저 창간한 후, 2007년 1월 25일 '사상계 복간 추진위원회' 발기인 대회를 열고 8월부터 종이잡지로 복간할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난과 준비 부족으로 미뤄져 2009년에 복간준비호로 6월호를 낸 것 외에 정식 발간을 이루지 못했다. 2012년 '장준하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를 꾸린 후 진상규명 작업에 매진코자 사이트를 닫았다.4. 여담
- 정확히 말하자면 사상계는 아직 폐간되지 않았다. 발행인 부완혁이 항소한 끝에 폐간 취소 판결을 받아냈던 것. 하지만 이 시기 동아일보 광고 사태에서 보이듯이 박정희 정권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에 대하여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했고, 각종 부채 문제로 인하여 휴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고 그 휴간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 사실 정말 드문드문 일회성으로 발간이 되긴 했다. 근데 그것도 어떤 재간을 위한 결과물이 아니라 '2년 이상 발행을 중단할 경우 등록을 취소한다'는 내용의 정기간행물 등록법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결과이다.
- 지금 시점에서 보아도 굉장히 선진적인 출간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편집 위원회가 그랬는데, 이들 편집위원회는 발간 3달 전에 미리 어떤 주제를 다룰지를 결정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주제 선정이 설렁설렁하는게 아니라 엄청난 마라톤 회의를 거친 끝에 정해지기 때문에 정말로 귀신같이 3달 뒤에 해당 주제가 사회에서 핫이슈로 부각되는 경우도 잦았다고.
- 1950년대 후반에는 <총비판 자유당>과 <총비판 민주당>이라는 칼럼이 같은 호에 실린 적도 있었다. 1공화국 시기 한국 정치계가 여야를 막론하고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
- 2018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판본이 스캔본 형식으로 디지털화되었으며, 열람 시엔 협약 공공/대학도서관 내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접속해야 한다.
- 장준하는 훗날 사후 이 사상계 잡지를 통해 문화산업에 공헌했다는 공로로 1999년 국민의 정부[10]에 의해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다. 이때 문화관광부 장관 자격으로 장준하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 이가 박지원. 원래 한 단계 낮은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될 예정이었던듯 하나 유족들로부터 반발이 일어나는 등 여러 논란이 일어나자 최종적으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장준하와 서영훈 모두 평안도 출신이고, 서영훈은 흥사단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둘은 해방정국 때
이범석의
족청에 가담한 적도 있다.
[2]
대한민국/지역감정 참조
[3]
사상계가 이후 정권에 맞서 싸운 것 때문에 통일 노선 역시도 평화 통일을 내걸었다고 지레짐작하기 쉬운데 사상계의 통일 노선은
반공 그 자체였다. 애초에 장준하 본인 역시도 독재에 맞서 싸운 것 뿐이지 정치적인 스탠스 자체는 전형적인 친미우파였다. 오죽하면
박정희를 깔 때 흑역사인 남로당 이력을 들춰내어서 깠을 정도
[4]
그나마
함석헌과
백기완같은 재야인사들과 교류가 잦아진 70년대부터
반공 색채가 많이 빠지기는 했고 모든 통일은 다 좋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수필 <민족주의자의 길>을 발표하는 등 어느정도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면모도 드러내기도 했다.
[5]
내외가
리어카 끌고 서점을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그것도 '난리통에 이런 교양잡지를 누가 보냐'면서 난색을 표하는 서점 주인에게 '돈 달라고 안할테니까 그냥 받아만 주세요'라고 거의 빌다시피 해서 간신히 입고할 수 있었다고(...)
[6]
사실 이는 문맥에서 '꼭두각시'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에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썼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북한이 지금과는 달리 꼭두각시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나타냈음을 생각하면 타당한 표현. 물론 남한도 꼭두각시라고 쓴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언임은 틀림이 없다.
[7]
게다가 이 글을 직접 쓴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은 것은 물론이고 땅을 물려받은 것때문에 지주라고 쫓겨났는데 정작 그 땅과 재산을 형성하고 물려준 함석헌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소작농과 독학으로 명의의 반열에 오른 한의사였다.
[8]
1965년 1월호
[9]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관료로 일했고, 이것 때문에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오른다. 해방 이후에는 고려대 법대 교수, 국무총리 비서관,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내다가 5.16쿠데타 이후 에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면서 재야와 야당에서 활동했다. 후술하는 사상계 폐간 이후에는 야인으로 돌아갔다가 사위 신선호가 경영하던
율산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했지만, 1979년 율산그룹이 부도로 공중분해되면서 자연스레 물러났다. 이후 1984년 사망하였다.
[10]
김대중 대통령 또한 청년시절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서 실은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