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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반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B]: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최일 연기, 고척 스카이돔 중립경기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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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시리즈| 역대 KBO 한국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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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롯데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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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해태 타이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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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LG 트윈스 |
1993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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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KBO 준플레이오프 | 1993 KBO 플레이오프 | 1993 KBO 한국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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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 |
해태 타이거즈 | |
MVP | 이종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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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3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 |
삼성 라이온즈 | 해태 타이거즈 |
정규시즌 1위 해태 타이거즈와 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를 꺾고 올라온 삼성 라이온즈의 맞대결로 성사되었다. 결과는 시리즈 전적 4승 1무 2패로 해태가 7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광주광역시 연고팀과 대구광역시 연고팀이 맞붙은 통산 3번째 한국시리즈 매치업이며 20세기 마지막으로 타이거즈와 라이온즈가 맞붙은 한국시리즈다. 이후 31년이 지난 2024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2. 경기 전
1993 시즌은 KBO 리그에서 중요한 년도로 기억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선동열, 최동원, 김시진, 이만수, 김성한, 장효조 등이 이끌던 1980년대 스타들의 시대가 끝나고 이종범, 양준혁, 구대성, 이상훈, 이대진, 박충식 등 1990년대 프로야구를 이끌어나간 신예 스타들이 데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 초까지 명문구단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기존의 스타들을 대체할 새로운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공교롭게도 이 두 구단이 KBO 한국시리즈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해태가 구단 역대 최고 성적인 81승 3무 42패(승률 .655)를 기록했지만 그해 패넌트레이스에서 삼성에게만은 유독 7승 11패[1]로 약했고 세부 성적에서도 삼성에 밀리는 부분이 많았다. 통산전적은 117승 2무 107패로 우위인게 그나마 위안. 더군다나 간만에 영호남을 대표하는 팀의 매치였다. 이를 증명 하듯이 우수한 신인이 쏟아져 나왔던 이 해에 KBO 신인상 경쟁이 매우 치열하였고 결국 삼성의 양준혁이 해태 이종범과의 경쟁 끝에 우수한 타격 성적으로 KBO 신인상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종범은 5차전부터 그린라이트를 부여받아 3경기에 무려 도루를 7개나 하며 한국시리즈에서의 맹활약으로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3. 일정
1993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VS 해태 타이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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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경기 | 경기 시간 | 경기장 | AWAY | 결과 | HOME | 방송사 | |
1차전 | 10월 18일 18:00 | 무등 야구장 | 삼성 라이온즈 | 1 | 5 | 해태 타이거즈 | |
2차전 | 10월 19일 18:00 | 6 | 0 | ||||
3차전 | 10월 21일 18:00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해태 타이거즈 | 2 | 2 | 삼성 라이온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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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전 | 10월 22일 18:00 | 2 | 8 | ||||
5차전 | 10월 24일 14:00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삼성 라이온즈 | 2 | 4 | 해태 타이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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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전 | 10월 25일 18:00 | 해태 타이거즈 | 4 | 2 | 삼성 라이온즈 | ||
7차전 | 10월 26일 18:00 | 삼성 라이온즈 | 1 | 4 | 해태 타이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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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리즈 전 분위기
4.1. 해태 타이거즈
1993시즌 해태 타이거즈는 1991년의 포스를 되찾은 구단이 되어 돌아왔다. 선동열의 성공적 재활과 마무리 투수로서 맹활약이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였다. 17승을 올린 조계현의 활약과 신인 이대진의 화려한 데뷔, 여타 투수들의 활약으로 투수진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10승 투수 6명의 금자탑을 세웠다. 타선의 힘은 주전들의 노쇠화로 약해졌지만, 신인 이종범이 대단한 활약을 해줬고, 홍현우가 92년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맹활약하면서 조금이나마 화력을 보태주었다. 그러면서 1993년도 해태타이거즈는 당시 구단 역대 최다인 81승을 거두면서 2위인 삼성과의 게임 차를 7게임차로 벌렸고, 정규시즌 1위로 무난하게 KBO 한국시리즈로 직행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해 삼성이 단독 선두로 오른 적이 개막 2연전을 제외하면 딱 한번인데, 그때가 4월 20일~21일 대구에서 해태를 2번 연속 꺾고 이루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해태는 삼성에게 설욕하며 삼성과 7승 4패로 공동선두를 이루었고[2], 그 이후 여세를 몰아 OB, 태평양, LG를 상대로 8연승을 달리며(잠실에서만 5연승) 한번도 다른 팀에게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3]구체적으로 전력을 살펴보면 투수진에서는 1992년도 부상으로 인해 공백기에 있었던 선동열이 돌아와 마무리 투수로 나와서 10승 3패 31세이브에 당시 규정 이닝이던 126이닝을 채우며 평균자책점 0.78을 기록했다. 조계현이 17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선발진 에이스로 부상했다. 마당쇠 송유석이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11승을 기록했고, 신인 이대진이 데뷔하여 특유의 강속구를 앞세워 10승을 채웠으며, 이강철, 김정수도 10승을 달성하여 이 해 10승 투수가 6명이 배출되는 등 해태 투수진은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10승 투수 6명 배출은 지금까지 한국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전해인 1992년 10승 투수 5명(이강철, 김정수, 조계현, 신동수, 문희수)을 기록한 것에서 한층 더 진일보한 것. 흠좀무한 건 당시 팀 방어율이 2.92였음에도 불구하고 1위가 아닌 2위라는 것이다. 1위는 2.89를 기록한 OB다.[4] 3위는 2.95를 기록한 삼성이다. 명불허전 역대급 투고타저의 해였다. [5]
타선의 힘은 그 전 해인 1992년보다 많이 하락했다. 당시 팀타율이 .251로 4위에 그쳤다. 1위는 .271의 삼성. 팀 홈런도 95개로 2위에 그쳤으며 1위 삼성과는 무려 38개 차이였다(삼성은 당시 133개). 이순철, 장채근, 한대화, 김성한이 약속이나 한 듯 집단 노쇠화에 걸리며 그들 4명이 자그마치 그 전해에 쳤던 홈런보다 45홈런을 까먹었는데 그게 1993년 95홈런, 1992년 138홈런 -43을 그대로 차지했던 것이다. 부진했던 자리를 이종범이란 걸출한 신인이 등장하여 1993시즌의 해태를 아니, 그 이후의 타이거즈를 책임지게 되었다. 3할타자나 20홈런타자가 부재했을 만큼 1991, 1992시즌에 비해 타격이 빈약했지만 어차피 1993시즌이 손에 꼽는 투고타저시대였고[6], 1993시즌은 팀득점이 전해에 비해 188점이나 줄었다. 그러나 1993시즌이 워낙 투고타저, 득점력 자체가 삼성에 이어 2위였다. 1991시즌 이후 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해태는 이번에 7번째 우승을 노리는 해였다.
1993년도의 해태의 야수들은 WAR 30.00을 찍었다. .251의 타율에다가 7할도 안되는 옵스를 찍을만큼 허접해보이는 성적을 찍었지만 그해는 역대급으로 투신타병에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타이거즈 역사상 WAR 1, 2, 3위가 1992, 1991, 1993이라는 점도 흥미요소. 말하자면 1993년도 삼성의 화력이 압도적으로 강했었던 것이었을 뿐, 해태의 타선도 강타선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과 해태쪽에서도 정규시즌은 1위를 했지만 전체적인 전력에서는 삼성에서 밀린다는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4.2. 삼성 라이온즈
1993시즌은 삼성 라이온즈에게도 중요한 시즌이 되었다. 일단 기존의 이만수, 장효조, 허규옥, 김시진 등의 팀 초창기 스타들이 사라지고[7] 1980년대 중후반 데뷔한 류중일, 성준, 김성래, 이종두 등 2세대와 그 이후 데뷔한 강기웅, 동봉철, 김상엽, 김태한 등의 신예, 그리고 신인 양준혁과 박충식이 이끈 한해였다. 무엇보다 무릎 부상을 등에 업고 홈런왕과 시즌 MVP를 차지한 김성래의 투혼과 박충식의 한국시리즈 3차전 15회 역투 등…. 특히나 삼성은 1986시즌 이후로 두 번이나 해태에게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번의 막강한 전력으로 6번째 한국시리즈 진출에서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과연 매번 준우승에 머무른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징크스'를 깰 수 있는지도 큰 관심거리였다.무엇보다 타선이 정규시즌 해태 투수진한테 유독 강했다. 삼성은 해태를 상대로 105득점을 올리며 쌍방울(108득점)에 이어 2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렸다. 말이 105득점이지 투고타저가 심한 그해 특성상 그해 해태의 실점은 420실점이었다. 즉 실점 중 1/4이 삼성을 상대로 내준 것이며, 말 그대로 2팀한테 내줄 실점을 삼성 한팀에게만 내준 셈이다. 게다가 그해 8월 7일 대구에서 삼성은 해태를 상대로 9개의 홈런을 쳐내며[8] 15:2로 해태를 떡실신 시켰다. 그해에 해태를 상대로 32개의 홈런을 쳐냈다. 이것은 당시 시즌 특정 팀 상대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9] 체감이 안되는가? 해태가 그해 피홈런수가 76개였다. 그중 원정경기 피홈런이 36개였는데 22개가 대구에서 허용한 것이었다.[10][11] 삼성을 한국시리즈에서 홈런포로 찍어누르던 해태 팬들의 입장에서는 격세지감. (나머지? 전주 6개 청주 3개[12] 잠실 3개 사직 2개 인천에서는 한 개도 허용하지 않았다.
앞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삼성은 투고타저 속에서도 유독 133팀 홈런으로 홀로 불방망이를 과시했다.[13][14] 프로야구 매니저나 마구마구에서도 화려한 전력으로 구현되었다. 프야메에서는 10코 3명, 마구마구에서는 무려 8레어의 팀으로.. 패넌트레이스의 승률을 떠나 개인의 성적은 정말 좋았던 팀이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2024년 기준 중요시하는 wrc+ + EAR+가 239.8로써 당해 223.8을 기록했던 해태를 능가했으면 그냥 크보 역대로 따지면 어마무시했다. 40년 프로야구 역사상 우승팀 중에서도 1993년도 삼성보다 wrc + ERA+를 93삼성보다 좋은 기록을 남긴 팀이 단 4팀에 불과하다(1988, 1991년도 해태, 1998, 2000년도 현대 그중 250을 넘는 것은 1988, 1991년도 해태가 유이하다.) 해태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정규시즌 1위를 하지 못했다.
5. 출전 선수 명단
양팀 선수 소개
5.1.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1993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000000> 감독 | 1명 | 김응용 |
코치 | 5명 | 유남호, 김봉연, 서정환, 차영화, 이상윤 |
투수 | 9명 | 선동열, 김정수, 문희수, 조계현, 이강철, 신동수, 송유석, 이대진, 강태원 |
포수 | 2명 | 장채근, 정회열 |
내야수 | 9명 | 김성한, 한대화, 박철우, 윤재호, 홍현우, 이종범, 김병조, 이경복, 이건열 |
외야수 | 5명 | 이순철, 이호성, 정성룡, 김훈, 이용석 |
5.2. 삼성 라이온즈
삼성 라이온즈 1993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fecd00> 감독 | 1명 | 우용득 |
코치 | 5명 | 조창수, 배대웅, 권영호, 박승호, 양일환 |
투수 | 8명 | 성준, 류명선, 이태일, 김태한, 오봉옥, 김상엽, 박충식, 이상훈 |
포수 | 3명 | 이만수, 김성현, 박선일 |
내야수 | 7명 | 김성래, 김용국, 류중일, 강기웅, 양준혁, 김태룡, 정경훈 |
외야수 | 7명 | 이종두, 강태윤, 윤용하, 동봉철, 한기철, 정영규, 박인구 |
6. 결과
6.1. 1차전
한국시리즈 1차전, 10월 18일 월요일, 18:00, 무등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김상엽 | 0 | 1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1 | - | - | - |
해태 | 조계현 | 0 | 0 | 0 | 0 | 0 | 0 | 4 | 1 | - | 5 | -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홈런: 해태 - 한대화(8회 1점)
다승왕 "팔색조" 조계현(17승)과 탈삼진왕 "만딩고" 김상엽(탈삼진 1위)의 선발 대결. 삼성은 2회초 김성현의 좌중간 적시타로 1점을 선제했다. 김상엽은 5회까지 단 1안타에 6탈삼진을 기록하며 그때까지는 무사히 선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일단 제구 난조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김상엽의 약점대로 6회말 연속 볼넷으로 무사 1루, 2루가 되면서 이종범 타석에서 또 다시 볼카운트 2볼로 몰리자 우용득 감독은 류명선으로 마운드를 교체했다. 류명선은 사인 미스로 보내기 번트에 실패한 이종범을 유격수 앞 병살타로 잡으면서 급한 불을 꺼 일단은 성공적인 투수 교체로 나타났다.
그러나 7회말 투아웃까지 잘 잡아낸 류명선은 연속 볼넷으로 1루, 2루를 채워놓은 뒤 이순철에게 우전 안타를 허용했고 이종두가 홈 송구를 서두르다 볼을 뒤로 빠뜨리는 실책을 저질러 2:1로 역전당하고 만다. 이 틈에 3루에 안착한 이순철은 정회열의 좌전 적시타로 3점째를 올렸고 뒤이은 1루, 2루 찬스에서 이종범이 원바운드로 펜스를 넘어가는 1타점 2루타를 터뜨려 승리를 확인했다. 이후 '전가의 보도' 선동열을 마무리로 투입, 삼성에게 추격할 생각을 단념케 한 해태는 8회말 한대화가 승리감에 도취된 홈팬들에게 좌중월 솔로 홈런의 시원함을 선사했다. 해태의 5:1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삼성은 한국시리즈 12연패에 빠졌다. 삼성의 KS 12연패는 무려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1986년 한국시리즈 3차전 ~ 5차전 3연패, 그리고 1987년 한국시리즈와 1990년 한국시리즈에는 모두 4연패를 당했고, 1993년 KS 1차전도 패하면서 그런 불명예 기록이 탄생하고 만 것이다. 이에 비견될 기록으로는 2020년 한국시리즈 4차전부터 2021년 한국시리즈 전 경기를 패한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7연패(敗)(현재 진행중이다. 만약 두산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패배가 이어지면 이 기록은 계속해서 갱신되는 것.)나 1989년 KS 2차전 ~ 1992년 KS 2차전까지 한국시리즈 10연패(敗)를 기록한 빙그레-한화 이글스 정도.
여담으로 31년 뒤 다시 두 팀이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되었을 때의 1차전도 이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이 부분은 2024 신한 SOL Bank KBO 한국시리즈/1차전 참고할 것.
6.2. 2차전
한국시리즈 2차전, 10월 19일 화요일, 18:00, 무등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김태한 | 0 | 0 | 0 | 3 | 0 | 0 | 3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6 | - | - | - |
해태 | 김정수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 | - | - |
'''중계방송사: [[MBC TV| |
홈런: 삼성 - 김성래(7회 2점)
선발로 해태는 한국시리즈의 베테랑 김정수를, 삼성은 2년생 김태한을 각각 기용했다. 김태한은 안타 7개를 맞았지만 연속 안타를 피해가며 완봉승을 따냈다. 반면 김정수-이강철(4회)로 마운드를 교체한 해태는 고비마다 결정타를 얻어맞고 6:0으로 승부가 판가름났다. 삼성은 4회초 2사 후 연속 안타로 김정수를 쫓아내고 릴리프 이강철로부터 사구를 얻어 만루를 만들었다. 곧이어 터진 류중일의 2루수 키를 살짝 넘어가는 바가지 안타로 3점을 뽑았다. 삼성은 7회초 홈런왕 김성래가 2점 홈런을 터뜨리고 이종두 이만수가 연속 2루타를 터뜨려 3점을 보탬으로써 6:0으로 승부를 갈랐다. 1986년(3차전)부터 이어진 한국시리즈 12연패를 끊은 귀중한 승리였다.
이날 삼성 선발인 김태한의 완봉승은 한국시리즈 사상 첫 좌완 완봉승이었는데 두 번째 좌완 완봉승은 무려 24년 후 양현종에 의해 나오게 된다.
역대 KBO 한국시리즈 완봉 달성자 명단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순서 | 달성자 | 소속팀 | 달성 일자 | 달성 경기 | 상대팀 | 비고 |
1 | 최동원 | 롯데 자이언츠 | 1984년 9월 30일 | 한국시리즈 1차전 | 삼성 라이온즈 | 역대 최초 | |
2 | 문희수 | 해태 타이거즈 | 1988년 10월 22일 | 한국시리즈 3차전 | 빙그레 이글스 | ||
3 | 김태한 | 삼성 라이온즈 | 1993년 10월 19일 | 한국시리즈 2차전 | 해태 타이거즈 | 좌완 최초 | |
4 | 정삼흠 | LG 트윈스 | 1994년 10월 19일 | 한국시리즈 2차전 | 태평양 돌핀스 | ||
5 | 이강철 | 해태 타이거즈 | 1996년 10월 19일 | 한국시리즈 3차전 | 현대 유니콘스 | 언더핸드 최초 | |
6 | 정명원 | 현대 유니콘스 | 1996년 10월 20일 | 한국시리즈 4차전 | 해태 타이거즈 | 노히트 노런 | |
7 | 정민태 | 현대 유니콘스 | 2003년 10월 25일 | 한국시리즈 7차전 | SK 와이번스 | 헹가래 투수 | |
8 | 다니엘 리오스 | 두산 베어스 | 2007년 10월 22일 | 한국시리즈 1차전 | SK 와이번스 | 최소 투구수(99구) | |
9 | 아킬리노 로페즈 | KIA 타이거즈 | 2009년 10월 22일 | 한국시리즈 5차전 | SK 와이번스 | ||
10 | 양현종 | KIA 타이거즈 | 2017년 10월 26일 | 한국시리즈 2차전 | 두산 베어스 | 최다 탈삼진(11K) | }}} |
6.3. 3차전
한국시리즈 3차전, 10월 21일 목요일, 18:01 ~ 22:31 (4시간 30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R | H | E | B |
해태 | 문희수 | 0 | 0 | 1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2 | 7 | - | - |
삼성 | 박충식 | 0 | 1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2 | 6 | - | - |
중계방송사:
[16]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캐스터: 유협 | 해설: 김동엽[타사중계3] |
팀간 1승 1패로 맞선 3차전. 해태의 선발은 1988년 한국시리즈 MVP였던 문희수[18]를, 한편 삼성은 입단 첫 해 14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급부상한 루키 박충식을 내세워 한치의 양보 없는 명투수전을 펼친다. 2회말 2사 2루에서 삼성이 김성현의 좌전 적시타로 선제 득점을 올리자 해태는 3회초 1사 2루, 3루에서 이종범이 3루쪽 내야 땅볼로 반격했다. 삼성이 3회말 2사 1루, 2루의 기회를 잡자 김응용 전 감독은 즉시 선동열을 투입, 불을 껐다.
해태는 6회초 홍현우가 솔로 홈런을 터뜨려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삼성은 6회말 2사 2루에서 이종두가 좌중간 2루타를 때려 다시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끝없는 0의 행진. 박충식은 낙차 큰 싱커와 제구력을 자랑하며 해태 타자들을 차례로 내야 땅볼로 처리하였고, 선동열 역시 최고 151km의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꽂으면서 응수했다. 그러다 7.1이닝 동안 101구를 던지며 1실점을 하고 먼저 내려간 건 선동열. 대구 관중들은 환호했으나, 뒤이어 11회에 등판한 송유석이 특유의 묵직한 직구로 5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오후 6시1분에 시작된 경기는 4시간 30분이 지난 10시 31분에 종료됐으나 연장 15회 2 대 2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1982년 OB VS 삼성 1차전, 1983년 해태 VS MBC의 4차전에 이은 한국시리즈 3번째 연장 15회 무승부였다.
박충식은 15회까지 던지며 문희수 - 선동열 - 송유석이 이어 던진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무려 181구를 던지며 완투했다. 한국시리즈 역대 최고의 투수전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
이날의 무승부가 누구에게 이득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외견상으로는 에이스 선동열을 포함해서 3명을 투입한 해태보다는, 박충식 혼자서 연장 15회를 소화한 삼성이 투수 소모를 줄여서 나은 결과를 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19] 만약 이후의 시리즈 진행이 삼성의 우위로 흘러갔다면, 그러한 평가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다음날 4차전을 이겨 2승을 먼저 올렸지만, 잠실로 옮겨 치른 5차전~6차전을 연거푸 내주어 역전당했고, 급기야 벼랑끝에서 치른 7차전에 다시 박충식을 선발 투입했으나 이번에는 해태 타선에 쉽게 공략당하면서 우승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선동열이 내려가자 삼성 타자들은 '우리가 이겼구나'라고 생각하고 결승타만 치면 내일 모든 스포츠신문 1면에 자기 이름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었고 송유석은 역이용했다고 한다. 해태 코치는 송유석에게 '(이 게임은 어차피 포기한 게임이니)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말했고 송유석도 '어차피 비난은 에이스가 진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던져 게임을 무승부로 이끌었다. 송유석과 같이 출연한 정회열은 송유석의 구위가 좋았다고 말했으며 본인도 연장 15회 풀이닝을 포수로 책임졌다.
6.4.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10월 22일 금요일, 18: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해태 | 이대진 | 0 | 0 | 0 | 2 | 0 | 0 | 0 | 0 | 0 | <colbgcolor=#dcdcdc,#222222> 2 | - | - | - |
삼성 | 김상엽 | 0 | 0 | 0 | 4 | 0 | 0 | 0 | 4 | - | 8 | - | - | - |
'''중계방송사: [[MBC TV| |
홈런: 없음
해태는 4회초 김성한의 우중간 2루타, 이호성의 중전 적시타, 이종범의 우중간 2루타로 2점을 먼저 뽑았다. 이번 시리즈 들어 첫 선취 득점. 그러나 삼성은 4회말 곧바로 무사 1루, 3루의 찬스를 잡아 김성래의 우익수 희생플라이, 양준혁의 중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고 계속된 2사 2루, 3루에서 김성현이 2타점 좌중간 2루타를 터뜨려 4:2로 역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삼성은 5회부터 마운드를 넘겨받은 이강철을 8회말 2사사구를 끼워 집중 4안타로 공략, 4점을 더 보태 8:2 완승을 거두었다.
삼성의 2승 1무 1패 리드. 타이거즈가 12회의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동안 4차전까지의 전적에서 상대팀에게 열세를 기록한 유일한 경우[20]였고, 삼성 입장에서는 한국시리즈 4차전까지 상대팀에게 우세를 기록한 최초의 경우[21]였다. 또한 타이거즈가 2022년 포스트시즌까지 대구에서 치른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기였다. 이 시리즈 이후로 양팀이 포스트시즌에 동반 진출한 적은 꽤 있었지만[22], 맞대결한 적은 2023년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은 삼성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고 우승을 예상했다. 해태측에서도 절망적이여서 5차전에 기존과 다른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6.5. 5차전
한국시리즈 5차전, 10월 24일 일요일, 14: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성준 | 0 | 0 | 0 | 0 | 0 | 0 | 0 | 0 | 2 | <colbgcolor=#dcdcdc,#222222> 2 | - | - | - |
해태 | 조계현 | 1 | 0 | 1 | 2 | 0 | 0 | 0 | 0 | - | 4 | -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캐스터: 유협 | 해설: 김동엽 |
홈런: 삼성 – 이만수(9회 2점) 해태 – 장채근(4회 2점)
시타-시구는 최수종-하희라 부부
지난 경기 패배로 1승 2패로 몰린 해태는 팀 분위기의 반전을 노리고 1차전 승리 투수였던 조계현을 마운드에 올려 5차전을 갖게 된다. 이에 맞선 삼성은 성준을 기용했다. 페넌트레이스에서 한 번도 해태와 맞붙지 않은 점을 감안한 투수 기용이었지만, 주축 투수인 박충식, 김상엽, 김태한을 모두 소모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회말 이순철의 도루를 곁들여 만든 2사 1루, 2루에서 김성한의 우전 적시타로 1점을 선제한 해태는 3회말 좌전 안타로 나간 이종범이 2루, 3루를 거푸 훔친 뒤 홍현우가 2루수 뒤로 넘어가는 짧은 플라이를 때렸을 때 과감하게 홈으로 파고들어 2점째를 올렸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한 리드를 지키던 해태는 4회말 공격 2사 1루 상황에서 장채근이 박철우의 대타로 타석에 들어서 큼지막한 투런 홈런을 잠실벌에 쏘아 올리며 팀 승리를 이끌어 낸다. 해태 조계현은 완봉승에 원아웃을 남겨둔 9회초 2사후 이만수에게 2점 홈런을 내줘 완투승에 그쳤지만 4:2의 승리는 끝까지 움켜쥐고 있었다. 특히나 이 경기를 기점으로 4차전까지 잘하지 않았던 작전야구와 도루,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를 선보이게 된다. 애초 한국시리즈때 해태는 작전야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1승 2패로 몰린 상황이라 코칭스탭쪽에서는 이대로 가면 무조건 진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로 이종범은 한국시리즈 한경기 최다 도루인 3개를 기록하는 등 시리즈 분위기를 제대로 반전시켰다. 특히나 삼성은 포스트 시즌에 수비형 포수 박선일의 부상으로 제대로 된 수비가 되는 포수가 없었던 것이 뼈가 아팠다.
양팀 2승 1무 2패 동률.
6.6. 6차전
한국시리즈 6차전, 10월 25일 월요일,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해태 | 문희수 | 1 | 0 | 0 | 0 | 0 | 1 | 0 | 2 | 0 | <colbgcolor=#dcdcdc,#222222> 4 | - | - | - |
삼성 | 김태한 | 1 | 1 | 0 | 0 | 0 | 0 | 0 | 0 | 0 | 2 | - | - | - |
'''중계방송사: [[MBC TV| |
승리: 선동열, 패배: 류명선
홈런: 해태 – 김성한(8회 2점)
종반으로 치달을 때까지도 깨지지 않던 2:2의 균형은 8회초 김성한의 한 방으로 기울어졌다. 한대화가 1사 후 류명선으로부터 볼넷을 골라 나가자 김성한은 볼카운트 0-1에서 몸쪽 직구를 힘껏 끌어당겨 왼쪽 담장을 넘겼다. 김성한으로서는 한국시리즈 개인 통산 최다 홈런(4호)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6회초 이호성의 좌익선상 2루타로 2:2 동점을 만든 직후부터 마운드를 인계받은 선동열은 6회말 선두 김성래, 후속 이종두에게 연속 안타를 맞아 무사 1루, 2루의 핀치에 몰렸으나 양준혁을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하고 이만수와 한기철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 무실점으로 막아 승리의 기틀을 다졌다. 이 경기에서 김성한은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홈런(35세 5개월 7일)을 기록한다.
6.7. 7차전
한국시리즈 7차전, 10월 26일 화요일,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박충식 | 0 | 0 | 0 | 0 | 0 | 0 | 0 | 0 | 1 | <colbgcolor=#dcdcdc,#222222> 1 | 6 | - | - |
해태 | 이강철 | 1 | 0 | 0 | 1 | 1 | 1 | 0 | 0 | - | 4 | 9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캐스터: 유협 | 해설: 김동엽[타사중계] |
승리: 선동열, 패배: 박충식
홈런: 없음
벼랑끝에 몰린 삼성은 3차전 15회 완투의 투혼을 보여주었던 박충식을 다시 선발로 기용했다. 그러나 3차전에서의 외로운 역투로 구위가 떨어지고, 이미 해태 타자들의 눈에 익숙해진 상태였던 박충식의 투구는 손쉽게 공략당했다.
이날 해태 승리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신인 이종범이었다. 1회말 우전 안타로 나간 이종범은 삼성의 허약한 포수 어깨를 비웃기라도 하듯[24] 망설임 없이 2루를 훔쳐 홍현우의 좌전 적시타로 득점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스코어는 1:0. 3회말 두 번째 타석에서도 빠른 발을 살려 유격수 쪽 내야 안타를 만든 이종범은 다시 2루를 훔쳤다. 이 시리즈의 7호 도루. 한국시리즈 최다 도루 타이 기록이었다. 이것은 득점과 무관했으나 4회말 2사 1루, 2루의 기회가 주어지자 좌익선상 안타를 날려 2:0을 만들었다. 5회말 이호성의 우중간 적시타로 3:0으로 앞서자 김응용 전 감독은 6회초 무사 1루, 2루의 위기에 몰린 송유석을 선동열로 구원하고, 6회말 이순철의 좌전 적시타로 4점째를 보태어 경기의 흐름은 완전히 해태에게 기울어졌다.
삼성은 9회초 우월 2루타로 나간 이종두를 강태윤이 우전 적시타로 불러들였으나 이미 2사 후여서 영패를 면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타자인 이만수가 유격수 땅볼로 그쳤고, 이종범이 1루수 김성한에게 송구해서 아웃카운트를 잡은 후 두손을 치켜들고 포수 정회열을 보면서 환호하는 선동열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화를 완성하는 장면이었다. 올드 해태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다.
7. 총평
7.1. 우승: 해태 타이거즈
정규시즌 우승을 했지만 팀 성적등을 보면 열세라고 예측했으나 5차전 이후 적극적인 주루플레이와 작전야구가 시리즈를 완전히 뒤바꿨다.[25]7.2. 준우승: 삼성 라이온즈
시리즈전 많은 전문가들이 우세로 생각했고, 4차전까지 2승 1패로 몰아붙이며 승기를 잡았지만, 포스트시즌 수비형 포수 박선일의 부상으로 5차전~7차전까지 도루를 12개나 내주며 아쉽게 시리즈를 내주었다.[26] 삼성으로서는 많이 아까웠던 시리즈. 2002년의 코시 첫 우승 이전 가장 우승에 근접했던 시리즈 중 하나였으나,[27] 해태에게 또 다시 패하고 6번째 준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삼성의 1차 전성기가 끝나고, 1980년대를 이끌었던 주축 멤버들의 노쇠화와 맞물려 3년 동안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다시 진출한 건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뒤였고,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타이거즈를 만난 건 31년이나 지난 뒤였다.8. 여담
- 1993년 한국시리즈는 3차전 박충식의 15이닝 181구 역투와 더불어 7차전까지 가는 접전으로 많은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덕분에 2009년 한국시리즈 이전 해태 타이거즈 시절 유일하게 7차전까지 가게 만든 팀이 이 해의 삼성 라이온즈였다.
- 이 시리즈 1차전 8일 전에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가 터졌지만 이태원 압사 사고가 터진 직후에 열린 2022년 한국시리즈 때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지는 않았다.[29]
- 타이거즈의 입장에서는 3승 3패로써 마지막 경기를 이긴 2009년 한국시리즈가 있지만, 해태 시절로만 한정한다면 패배 팀과 비교해서 제일 전력차가 적었다. 서정환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특히 4차전 대구 경기를 지고 1승 1무 2패로 몰린 상황에서 김응용 전 감독이 코칭스태프 회의에서 "야, 이거 어떻게 하냐"하며 걱정을 했고 당시 주루코치이자 작전코치인 서정환은 "제가 (작전지시를) 할께요. 저한테 맡겨주세요"라고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 김응용은 행여나 큰 무대에서 너무 흥분해 게임을 그르칠까봐 작전을 많이 걸지 않았으나 서정환의 말을 듣고 "야! 내가 언제 하지 말라고 했냐"고 말하며 서정환에게 작전지시를 일임했다. 해태는 5차전부터 말 그대로 날라다니는 적극적인 베이스러닝으로 삼성 수비진을 헤집어놨고 승부의 추를 해태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서정환은 훗날 이 시리즈로 인해 삼성에 스카웃되고 감독까지 맡게 된다.
- 단일리그 도입 후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가 모두 최종전까지 치러졌다. 여기에서 “한국시리즈는 6차전까지 해태가 3승 1무 2패인데 어떻게 최종전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는 모두 8차전 이후로 편성되기 때문에 최종전은 무승부를 제외한 시리즈 전적이 3승 3패까지 간 시점이 아니라 무조건 7차전이다. 한국시리즈도 최종전까지 간 것이 맞다. 만약 7차전에서 삼성이 이겼다면 8차전은 ‘최종전’이 아니라 ‘3차전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이다.
-
양팀이 잠실로 이동한 후 가진 첫 경기이자 해태의 홈경기 성격으로 열린 5차전의 시구-시타는, 그해 11월 결혼 예정이었던
하희라-
최수종 커플이 했다.
최수종이 어떤 팀을 응원하지는 모르겠지만 해태의 이날 승리는 왕의 기운 때문이었을지도[30]
-
시리즈 막바지인 6차전, 7차전에서 해태 선수들은 유니폼 어깨에 검정 리본을 달고 출전했는데, 시리즈 기간 중에 사망한 외야수 이호성의 아버지를 추모하는 의미였다.
나중에 이호성이라는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면..
- 초창기부터 전통의 영호남 라이벌이었던 두 팀이 2023년까지 포스트시즌에서 맞붙었던 마지막 시리즈였다. 이 한국시리즈 이후로 두 팀은 31년이 경과된 2024년까지 한국시리즈는커녕 포스트시즌에서 맞붙는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타이거즈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모기업 해태제과의 부도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가 2001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뀐 이후 다시 강팀의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고 반대로 삼성은 엄청난 자금력을 뽐내며 1997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12시즌 연속 가을야구 진출의 성과를 이뤄냈다. 삼성이 한국시리즈로 직행한 2001,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 2015년에는 KIA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고 KIA가 한국시리즈로 직행한 2009, 2017년에는 삼성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먼 길을 돌아 KIA가 정규시즌 1위, 삼성이 정규시즌 2위를 확정하며 2024년 한국시리즈에서 서로 맞붙을 가능성이 생겼고, 2024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준플레이오프 승리팀 LG 트윈스[31]를 3승 1패로 격파함에 따라 2024년 한국시리즈에서 31년 만의 '달빛 한국시리즈'가 성사됐다.그리고 결과는 또다시 타이거즈의 승리.
- 이 시리즈 이후 비수도권 팀들간의 한국시리즈 맞대결은 1999년(롯데 vs 한화)과 2006년(한화 vs 삼성), 2024년(KIA vs 삼성)이다.
9. 관련 문서
- 해태 타이거즈/1993년
- 삼성 라이온즈/1993년
- 2013 한국야쿠르트 7even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 5차전, 6차전, 7차전 승리팀이 우승한거까지 동일하다. 우승은 1993년 준우승팀 대구 삼성 라이온즈.
- 2020 신한은행 SOL KBO 한국시리즈 - 3차전 무승부를 제외하면 스코어가 똑같다. 1승 2패로 뒤진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고 흐름을 바꾸게 한 투수( 조계현- 송명기)가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우승은 NC 다이노스.
- 2024 신한 SOL Bank KBO 한국시리즈 - 31년 만의 맞대결이자 KIA 타이거즈 탄생 이후의 첫 포스트시즌 맞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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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홈 4승 5패, 원정 3승 6패.
[2]
그 경기가
이호성이 연장에서 홈런을 치며
오봉옥의 무패 행진을 깬 날이다. 오봉옥은 1992년 13승 무패를 거두며
김성근의 황태자로 등극한 상태였다.
[3]
태평양을 상대론 무려 17승 1패로 압살했다.
[4]
당시 마무리투수 김경원이 129이닝으로 규정이닝을 채우며 선동열에 이어 1.11로 방어율 2위를 기록했다.
[5]
롯데는 한 시즌 팀홈런이 29개, 태평양은 35개, 쌍방울은 46개를 기록할 정도 였다.
[6]
쌍방울과
태평양은 그 짧은 중앙 110m짜리 홈구장을 쓰는 팀이었지만 팀홈런은 46개, 35개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공격력을 보였고, 롯데는 무려 29홈런으로 역대 최소 홈런 기록을 세웠다. 홈런왕
김성래와의 대결에서 단 1개 차이로 이겼다.
[7]
장효조와 김시진은 롯데에서 1992년 은퇴. 허규옥은 1992년 삼성에서 은퇴. 유일하게 이만수가 삼성에 살아남았었다. 그러나 노쇠화 등으로 포수 수비가 불가능한지라, 지명타자, 대타로밖에 못 나왔다. 여담으로 7차전 마지막 타자가 대타로 나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난 이만수.
[8]
이것은
97년 삼성이 LG를 27:5로 이길 때 9홈런을 치며 타이를 기록했으며, 2000년의 현대가 4월5일 대전 개막전에서 한화를 상대로 10홈런을 쳐내며 깨고 만다.
[9]
공교롭게도 1988시즌 해태가 삼성을 상대로 31개의 홈런을 쳤는데 그것을 경신했다. 그때와 똑같이 팀간 대결은 18경기였다.
[10]
원정경기 특정팀 상대 피홈런율 61%는 앞으로 깨지기 힘들 것이다. 특히 홈런 펜스가 점점 멀어져가는 2020년대 이후로는.
[11]
덧붙여 2000 현대에게 홈구장에서 42개의 피홈런을 기록한 한화는 그래도 너무 많이 얻어 맞아서 40퍼 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12]
그해 빙그레는 태풍으로 대전구장의 조명탑이 휘어지는 사고를 당해서 6월부터 8월 중순까지 청주에서만 홈경기를 치렀다. 즉 해태 vs 빙그레 빙그레홈의 9경기중 6경기가 청주에서 열렸다.
[13]
이 해 삼성의 팀 타격 성적이 이상하리만치 1997년도의 해태와 닮았다. 133홈런으로 같고, 득점도 이해 삼성은 615점, 1997년 해태는 616점. 20홈런 이상 타자인
김성래,
양준혁과
이종범,
홍현우 둘이 타선을 이끌었다는 것도. 다만 리그 성향은 1997년 쪽이 훨씬 타자 친화적이였다. 그 1997년도 해태를 능가하는 핵타선이 1997년도 삼성이었다.
[14]
1993년도 삼성의 타선은 wRC+(조정 득점 기여도)를 통해 역대 팀들과 비교하면 스탯티즈 기준으로 1987년도 삼성에 이은 2위에 해당하는 강타선이였다. 다만 득점만을 놓고 비교하면 투고타저의 영향으로 평범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역대 리그 OPS를 비교해 보면 0.668으로 역대 최하위에 해당하는 압도적인 투고타저였다.
[타사중계2]
KBS 제2라디오 캐스터 김재영 - 해설.
[16]
9시에 예정되어 있는 KBS 뉴스 9를 이 경기를 마치고 내보냈다.
[타사중계3]
MBC 라디오 캐스터 송인득 - 해설 허구연.
[18]
문희수는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던 1988년을 비롯해서 1989년,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의 3차전 전담 선발투수로 나왔다.
[19]
이러한 평가는 본 문서의 시작부분 영상에도 나오는, 3차전 중계 방송 종료 직후의 해설에서도 나온다.
[20]
나머지 10회 중에서 4차전까지 2승 2패로 맞선 경우도 1996년과 2009년이 유이하다. 공교롭게도 이 두 번 모두 상대는
인천
연고팀이었다. 나머지는 4승 2회(1987, 1991), 3승 1패 6회(1986, 1988, 1989, 1997, 2017, 2024), 3승 1무 1회(1983)를 기록했다.
[21]
삼성은 한국시리즈 4차전까지 상대팀에게 우세를 기록한 경우가 의외로 적다. 1993년을 비롯하여 2002, 2005(스윕승), 2006, 2011년 등 5회뿐이다. 단, 1993년을 제외하면 4차전까지 우세를 기록한 4회 모두 우승에 성공했으니 1993년에 4차전까지의 열세를 뒤집고 우승한 해태의 저력을 알 수 있다.
[22]
1997, 2002, 2003, 2004, 2006, 2011, 2024년.
[타사중계]
MBC 표준FM 캐스터 한광섭 - 해설 김소식.
[24]
1980년대 최고의 포수였던
이만수는 이 해 노쇠화로 포수 대신 지명타자나 대타로 주로 출장했다. 이 해 삼성의 포수는 대부분 공격형 포수
김성현과 수비형 포수
박선일이 번갈아가며 맡았다.
박선일은 플레이오프에서 부상당하며 한국시리즈 출장이 불가능했고, 김성현은 1993년 2할 7푼의 타율에 11홈런 45타점으로 포수로서 좋은 타격을 과시했으나 당시 도루 저지가 약점으로 꼽혔던 선수였다. 김성현도 방송에서 자신의 포수 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였고, 이종범이 이 시리즈에서 허점을 잘 파고들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25]
5차전~7차전까지 해태는 도루를 무려 12개나 했다. 이중 7개가 이종범.
[26]
당시 삼성에 포수는 이만수와 김성현이 있었지만 이만수는 이미 포수로써 능력이 떨어져서 지명타자로 나왔고 김성현은 타격은 좋았지만 수비능력은 떨어졌고 정규시즌 161개로 도루 2위를 한 해태에게 도루를 쉽게 내주게 된다.
[27]
다른 하나는 1984년 롯데와의 한국시리즈.
[28]
김응용이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선수 말년 시절을 보낼 때
대구상고를 막 졸업한
우용득이 막내로 들어왔고 약 2년여간 최고참 선수와 막내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다. 그리고 1973년
김응용이 감독으로 승진하자 감독과 선수 관계로 지냈다.
[29]
서해훼리호 사건이 터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위도 앞바다는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 연고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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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시절까지만 해도 최수종은 하이틴 스타 이미지가 강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사극 속의 왕 or 장군 전문 배우 이미지는 2000년대 이후에 고정된 것이다.
[31]
1983년,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