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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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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개요2. 약사3. 목록
3.1. 후발해3.2. 정안국3.3. 연파국3.4. 올야국(오사국)3.5. 흥료국3.6. 고욕국3.7. 대발해(대원국)
4. 소멸5. 괴뢰국6. 고려와의 관계7. 한국사8. 평가9. 발해부흥운동을 기록한 역사서10. 유사사례11.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渤海復興運動
926년 ~ 1116년

926년 발해-요 전쟁에서 거란족 국가인 요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요나라에게 정복당한 만주 일대에서 발해 계통의 반요 세력들과 발해의 후계 왕조들이 수차례 발해의 재건을 시도한 움직임이다.

결국 장기간 존속에는 모두 실패했고, 한국 내 사료도 부족하면서 족보도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연구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상황이다. 일단 산발적인 반란이 아닌 나름의 국가 체제를 이룬 듯한 후발해, 오사국, 정안국부터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심지어 1998년에 몽골에서는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대씨 왕실과 지배층, 유민의 일부가 '서발해'(西渤海)라는 왕국을 세웠다는 논문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문서의 서술 내용도 구체적인 존속 기간 등의 정보에 대해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2. 약사

국명 존속 기간
동란국[2] 926년 ~ 936년1대 10년(혹은 6년)
후발해 926년 ~ ?년
정안국 938년 ~ 986년2대 48년
연파국 975년 ~ 995년1대 20년
올야국[3] 995년 ~ 996년거란에 투항 ~ 1114년여진에 병합
흥료국 1029년 ~ 1030년1대 1년
고욕국[4] 1115년 2월 ~ 7월1대 4개월
대발해( 대원국) 1116년 1월 ~ 5월1대 4개월

3. 목록

3.1. 후발해

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에도 929년 5월에 고정사(高正詞)가 발해 사신으로 중원의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파견되는가 하면, 송대(宋代)에는 ‘오사성발해왕'(烏舍城渤海王)이란 칭호가 공식적으로 송나라에서 사용되어 후발해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5대(五代) 및 송대에 외교 활동을 벌였던 ‘발해’를 ‘후발해'(後渤海) 또는 ‘오사성발해'(烏舍城渤海)라 부른다. 자료 부족으로 후발해의 건국 연대 및 지속 기간, 그리고 권력 기구 및 통치 세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견해들 모두 후발해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다.

중심지는 후발해·정안국이 모두 자리잡은 압록강 유역으로 비정하기도 하고, 과거 발해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지역 혹은 옛 부여부(扶餘府)에 가까운 곳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후발해의 발전은 군사·외교적인 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발해 멸망 직후 발해 국왕의 동생 부여성를 포위했으며, 975년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 온 발해 유민 출신의 장수 연파(燕頗)와 함께 발해의 옛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또한 발해의 옛 장령부(長嶺府) 지역이었던 휘발하(輝發河: 回跋河) 유역에서의 싸움에서도 원군 7,000명을 보내기도 했으며, 979년경에는 정안국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기도 했다.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고정사, 성문각(成文角) 등을 후당에 7차례나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후발해와 중국과의 관계는 936년 열주도, 오현명이 사신을 온 것을 끝으로 외교 사절이 파견되지 않았으면, 18년 후 954년 7월 발해 호족(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0인이 후주(後周)에 귀화했던 기록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의 후발해는 주로 내정과 거란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았던 것 같다.[5]

후발해인들은 주변 국가로 정치적 망명이나 이주도 했다고 생각되는데, 934년 고려에 내투한 대진림(大陳林)과 938년에 내투한 박승(朴昇) 등과 같이《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는 ‘발해’인들의 상당수도 후발해인일 개연성이 크다.

그 존속 혹은 멸망 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일본의 학자인 와다 키요시(和田 淸)는 후발해의 중심을 압록강으로 보며, 후발해의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을 별개로 보고, 정안국의 건국 시점인 938년 무렵까지인 10여 년간 존속했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 또 다른 일본 학자인 히노 카이사부로(日野 開三郞)는 후발해에서 정안국으로 바뀐것이 아니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대광현과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6]를 중심으로 한 ' 대인선의 동생',[7] 즉 ' 대광현의 숙부'가 있었고, 두 세력의 갈등 관계에서 대광현이 패배하여 934년 고려로 망명했으며, 이후 오사성을 거점으로 한 올야(兀惹) 정권이 후발해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옛 발해 남경남해부의 열씨 정권이 대광현의 공백을 틈타 압록강에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동란국이 요양으로 이동한 까닭도 후발해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올야 정권이 거란(契丹)의 공격으로 붕괴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후발해의 멸망을 1007년으로 보고 있다.

발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1003년경에 후발해가 소멸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북한의 학자인 박시형은 《 요사》(遼史)에서 1114년경에 올야, 성주, 빈주, 양주 등이 여진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들어 그 때를 소멸 시기로 보고 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발해 유민들이 살던 곳으로 추정된다. 1115년 금나라가 세워졌지만 곧 1116년에 요동에 대발해가 세워졌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시형 역시 후발해의 중심을 오사성으로 보고 있다. 남한의 학자인 이용범은 와다 키요시의 견해를 따르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에도 후발해를 10여 년간 존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한규철은 《고려사》에 기록된 1050년경을 후발해의 멸망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발해 멸망 이후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 여진으로 왔고, 11세기까지 발해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이들은 발해의 후속 국가 소속의 유민들이기 때문이다. 1029년과 1030년 사이에 내투한 발해인들은 흥료국의 실패로 내투한 것이고, 1116년 내투한 발해인들은 대발해의 실패로 내투한 이들이다. 그래서 1050년 고려로 내투할 때 스스로 발해인이라 한 이들은 후발해인들일 것이고 흥료국, 대발해와 관계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내투한 시점을 후발해의 멸망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1114년경에 여진에 들어갔다는 올야, 성주, 빈주, 양주 등은 후발해의 잔당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중에 보면 또 이런 설도 있다. 일부 중국책[8]에는 1114년 또는 1115년에 금나라가 세워지면서 후발해가 망했다고도 하는데, 후발해가 1114년에 망하고 일부 발해 유민들이 다시 대발해를 세웠다가 금나라가 발각하여 항복하거나, 금나라가 무너트렸다는 설도 있다.

3.2. 정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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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48년 정도 지속된 발해부흥운동의 국가 중 하나이다. 928년에 옛 고(구)려의 수도였고, 발해의 주요도시였던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정안국(定安國)이 건국되었다. 정안국도 '후발해'(後渤海)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세력을 갖췄으나 결국은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986년 요나라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 여요전쟁)을 계획하면서 중간에 끼어 있던 정안국은 장애물을 없애는 겸해서 없어지고 말았다. 정안국의 멸망과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시점이 맞물리기 때문인지 한국사 교육과정에서는 발해의 후계국가 중 유일하게 간단히라도 언급되는 나라다.

3.3. 연파국

정식 국명이 아니며 연파(燕頗)라는 장수가 975년 부여부에서 항거를 일으켰다. 그 후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서 반란을 벌이다가 995년 올야에 도망친 뒤 올야국과 함께 거란에게 저항했다고 한다.

오사성발해왕 염부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며, 올아국과 달리 995년 이후 기록이 없어서 연파의 세력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3.4. 올야국(오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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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자인 히노 카이사부로(日野 開三郞)는 발해 멸망이후 존재했던 후발해(오사성발해왕: 烏舍城渤海王)에서 정안국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사성를 거점으로 한 올야(兀惹) 정권이 후발해를 차지했다는 설을 내놓았다.

반면 중국 학자인 량위둬(梁玉多)는 올야국과 정안국을 같은 세력으로 보고 있다. 올야족이 발해 멸망 이후, 반거란 투쟁으로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북송은 정안국을 인정했지만 거란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정안국이 있음에도 '올야'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올야(정안국)의 중심지는 상경용천부와 가까운 수분하의 중상류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히노 카이사부로, 박시형, 한규철과 같은 다른 학자들과도 비슷한 견해다.

3.5. 흥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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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 발해 왕족이었던 대연림(大延琳)은 1029년 8월 3일, 요나라의 제2도시인 요동 동경(東京) 요양부 흥료국(興遼國)을 건국하고, 거란과 전면으로 맞선 발해부흥운동을 벌였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반란 1년만에 요나라에게 진압당하여 대연림이 요군에게 사로잡히면서 흥요국은 멸망했다.

3.6. 고욕국

역시 정식 국호는 아니고, 건국자인 고욕(古欲)의 이름에서 따왔다.

1115년, 요나라의 내몽골에 위치한 요주(饒州)[9]에서 고욕이 발해 유민들과 발해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왕(大王)을 칭했다. 그러나 5개월만에 실패하였다.

3.7. 대발해(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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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 발해부흥운동이 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거란 반대 운동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좀 성공한 운동으로는 요말 금초의 "대발해국"이 있는데, 1116년 1월에 고영창이 8,000명으로 동경요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했는데 이를 대원국(大元國)이라고도 한다. 금나라한테 패망했다.

4. 소멸

발해부흥운동은 주로 요나라 시기에 지속되다가 흑수말갈이 바탕이 된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이들이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고 이주 및 동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라졌다고 보는 게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특히 마지막 부흥 운동인 대원국이 요말 금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초기의 금나라는 발해 유민을 포용하였다. 이는 완안아골타가 "발해와는 본시 동일한 집안"이라고 말한 데서 근거한 대목이다. 그 결과 대원국을 바탕으로 마지막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고영창이 패망한 후 상당수의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건국을 돕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 원해서 협력했다기보다는 2세기 가까이 일으켜왔던 부흥운동들이 모두 실패하면서 생긴 환멸로 인하여 그랬을 여지도 있다. 실제로 발해인들은 멸망 이후 200여년 가까이 부흥운동을 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알려진 것 중에서는 50년 가까이 유지된 정안국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거란의 탄압은 더더욱 심해졌고, 그에 따라 생계를 잇는 것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0] 게다가 실패 이후 거란은 발해인들의 반발을 무작정 억누르고자 발해부흥운동에 연관된 발해인들을 거란 내지로 강제이주 시키면서, 그나마 요동에 자리를 잡았던 발해인들도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다. 후에 발해인들을 이끌 지도자급 인재들도 모두 흩어져 버린 건 덤.

결국 이같은 요나라의 지속적인 강경책은 발해인들의 응집력을 약화시켰다. 물론 이는 요나라 멸망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되려 요금교체기 때 발해인들이 부흥운동세력, 친요세력, 친금세력, 반요세력 등으로 분열되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는 요인이 되어버렸다. 쉽게 표현하면 우리를 못살게 하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게 우선이냐, 아니면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게 우선인가로 나누어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고욕의 항쟁, 요양에서 일어난 고영창의 대발해국 등의 부흥운동, 건국파가 우세했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발해인들은 요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우선적인 목표를 수정하게 된다. 하지만 발해인들만으로는 확실히 한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똑같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여진족의 금나라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두 세력은 결국 손을 잡게 된다.

그러나 이런 포용은 금태조 때만 한정된 처사였다. 결국 금은 건국 초기 발해 유민을 북송 공격군의 선봉으로 활용하다가[11] 이후 1141년 맹안모극제 집단에서 배제하여 거란, 여진과 달리 한족과 동일 취급하고 산동으로 강제 이주시켜버린다.[12] 하지만 발해 유민들 중 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군인이나 관리로 금 조정에 진출에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황제의 어머니를 배출하기도 했다.[13] 하지만 두 황제에 걸쳐 외척이 발해인이었기 때문에 금장종 이후 점차 중앙 정계에서 발해인들이 밀려났다. 또한 발해 유민들은 금세종 때는 한족과 함께 통혼 혼혈시켜 철저히 동화시키고 형사취수를 금지하는 한편 삼년상을 강요하며 양자 제도를 불허하는 등 철저하게 한족 취급당했다.

당시의 상황은 당대 사료인 송막기문 발해국에 꽤 자세히 나와있다.

그렇지만 발해부흥운동이 소멸한 이유는 몽골 제국의 침략이 결정적인 원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에서도 대몽항쟁 이전까지 삼국의 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꽤 남아 있어 삼국부흥운동을 일으켰었지만 여몽전쟁 기간 동안 그러한 의식들은 모두 소멸해버렸다. 금나라에 있던 발해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몽골과의 전쟁 속에서 제압당하고 금나라 멸망 이후에는 남송 정벌에 몽골제국군의 일부로 동원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발해인들의 민족의식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진족 같은 경우는 중원으로 가지 않고 만주 산림지대에 남은 여진족들도 상당수가 있었기 때문에 후에 다시 만주족으로 발전하여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허나 이때 죄다 한족에 동화된 것만은 아니라서 명나라 초기까지도 발해인 관련돼서 기록이 나왔었고 금나라가 멸망한 뒤로 심왕 자리에 고려 왕족이 내정되었다는 기록이나 요동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그래도 조선초기까지도 요동에 예맥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14][15] 그러나 고려가 당시 한반도 남반부를 휘저으며 침탈했던 왜구들의 준동으로 인해 끝내 요동 정벌에 실패하면서 요동을 명나라가 차지하였고, 고려를 뒤엎고 일어난 조선은 명에게 조공을 하면서 항쟁을 중단했기에 결국 요동 일대는 현재까지도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게 되었으며 요동의 고려-조선인들은 점점 동화되었다가 근현대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다시 유입되어 만주 거주 민족 중의 하나로 여명을 유지하게 된다.

5. 괴뢰국

5.1. 동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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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뜻은 동쪽에 있는 거란의 국가로 발해부흥운동의 일부분이 아닌 거란의 괴뢰국쯤 되는 국가이다. 그러나 신동준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괴뢰국이 아니라 준 독립국 수준으로, 감로(甘露)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외국과의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발해 유민 190만여명이 살았다고도 하며 동란국 외교 사절이 거란을 욕했다는 기록도 있고[16] 일본과도 발해 때처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했다는 기록도 있다.[17]

6. 고려와의 관계

발해의 부흥운동을 고려는 돕지 않았다.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태조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후대 왕들이 재위기간 5년을 못 넘기고 죄다 요절했던 데다가 왕건의 호족 우대 정책으로 인해 왕권이 불안정했고, 고려의 중앙 제도나 군사 제도 등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원군 파병은 어림 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들 나라를 우대하느라 고려는 요나라와 국가적 존망을 걸고 세 차례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사실 많은 발해 후계국이 건국되었지만 이들과의 외교 관계 성립을 위한 고려의 노력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여요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고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요나라는 요성종의 죽음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에 당시 고려의 국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발해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여진족등에 영향력을크게 행사한것을보면 그럴가능성이높다. 다만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에 대한 성급한 군사적 지원을 지양하는 대신 망명해오는 발해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받아주면서 고려에서 왕실 제사를 지내게 해주거나, 왕씨 성을 하사하여 안정적인 생계유지 및 정착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려의 보수적인 대외정책은 금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각각 요나라와 금나라, 북송의 지원군 요청과 화친요청, 책봉제의를 거절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는 점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요나라가 비록 고려를 집어삼킬 수 없었다 해도 엄연히 유목 민족과 정주 문명의 장점을 합친 당대 동아시아 1타의 엄청난 강대국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홈 그라운드와 지형의 이점 등을 통해 이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가 대단했던 거지 아무리 요성종 이후로 잠시 혼란에 빠졌다고 해도 다시 역공을 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고려 입장에서도 가증스러웠을 요나라를 뒤흔들 수만 있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당대의 정세는 당대인들이 훨씬 더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요나라에 비해 세력이 미약했던 부흥국들이 고려가 돕는다고 성과를 내기에는 게임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고려가 거란을 압도할 만한 국력이 있었다면 발해부흥운동이 활발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기였던 이후의 요-금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확률이 높다.

고려는 발해와 '친척의 나라'였으되 '고구려 계승'이 정체성 그 자체인 왕조였기에, 발해 유민의 편입은 어디까지나 자국 밑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발해가 일찍 멸망한 탓에 발해와 고려의 외교 관계는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는데 만약 발해가 망하지 않거나 발해부흥운동이 성공했어도 서로 고구려의 적통의 정체성을 지닌 발해와 고려 간 양국 관계가 영 미묘해졌 것이란 예측이 더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이 발해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발해부흥운동의 성공은 곧 고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여진족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장 흥료국이 세워지자 동쪽과 북쪽의 여진족들이 합류하였고, 금태조가 발해와 여진은 같은 집안이라고 언급하였다. 고려는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거란의 견제를 받았으며, 거란이 혼란스러워지자 많은 여진 부족들이 고려에 내부 혹은 귀화하여 기미주를 자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부흥운동의 성공으로 발해가 다시 건국된다면 북방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을 상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려의 입장에서 발해부흥운동의 성공이 영 반가운 일은 아니었을수도 있다.[18]

외세의 개입이 없어 발해가 멸망하지 않았던가 혹은 발해부흥운동을 성공시켰더라면 천리장성 혹은 청천강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발해 후계국이, 남쪽에는 고려가 위치하여 흡사 남북국시대의 연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정체성이나 별다른 접촉이 없던 발해와 신라 간의 관계보다는 나았겠지만, 오히려 고려와 발해 간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정통성과 그 강역을 둘러싸고 삼국시대 고구려- 부여 고구려-백제같이 더욱 심한 경쟁과 대치가 펼쳐졌을 수도 있다. 혹은 당대의 발해 또한 이미 왕조 말기의 증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발해 왕실 또한 고려 왕실과의 결혼동맹이나 정복전쟁을 통해 귀부하게 되었거나 역으로 발해가 중흥하여 고려를 정복하게 되어 고려 혹은 발해가 후삼국과 남북국을 완전히 통일한 왕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19] 물론 이 가정들은 모두 당대의 상황이 너무 불확실해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그냥 상상의 영역에 그친다.

7. 한국사

한국 국사 교육에서는 여요전쟁 직전 부분에서 정안국을 살짝 언급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육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고려 후삼국시대 통일과 발해 유민들의 투항을 계기로 고려를 실질적인 한국사의 통합이라고 보려는 역사관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에 투항한 발해 유민이나 부흥운동의 실패로 이후에 남하한 유민들, 그리고 고려, 조선을 거쳐 이어지는 북방개척에서 합류했을 소수 발해계 주민들[20]을 제외하면 나머지 발해 유민들은 만주에 남아서 한반도의 한국사와 관련없는 쪽으로 흘러간 '곁가지'로서 요나라의 거란, 금나라의 여진족, 몽골,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기에 특별히 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보인다.

청나라는 금나라의 시조 함보를 통해 신라와 자신들을 연관지었던 적은 있지만 딱히 발해를 자국사로 끌어들이려 한 적은 없다. 이는 금나라 당대에도 발해인과 엄격한 구별을 두었기에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조선에서는 이전부터 간간이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이라는 명목으로 제왕운기나 삼국유사, 고려사에서 민족사의 영역에 넣는 등 은근한 관심을 보이다가 실학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발해사를 자국사로 끌어들이려는 학자들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관념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닌 게 고려-조선은 태자 대광현과 대신들, 수많은 유민들의 귀부로 방대한 인적자원을 흡수한데 이어 발해 5경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가 위치해있었음은 물론 중심지 인근이었던 함경도를 점유하는 데도 성공해 지리적 지분 또한 이미 일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발해와 마찬가지로 삼국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국가였으니(이는 타국에는 없는 요소다.) 즉 동부여가 부여의, 남연 전연의, 서요가 요나라의 유산을 계승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일정한 지분을 주장하기에는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8. 평가

한국사에서 발해부흥운동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삼국시대로 대표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운동보다도 더 치열하고 더 오랜 기간동안 매우 끈질기게 이어진 부흥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여타 부흥운동의 사례 가운데 고구려 부흥운동 같은 경우 멸망 직후의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간 후 소강기를 거쳐 약 30여 년만에 고구려의 국통을 잇는 새 왕조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발해부흥운동은 거의 190여 년 동안 지속된 매우 장기적인 투쟁이었다.

전술했듯 발해부흥운동은 길고도 끈질기게 일어났는데, 그 원동력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이야기되는 피지배층 다수의 말갈인과 소수의 지배층 고구려인이 지배하는 발해의 사회로는 이러한 발해부흥운동은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부분이다. 요사에 기록된 발해인과 말갈인이 원수 지간이라는 말에서 여기서 지칭하는 말갈인들은, 일찍이 발해 건국의 주체로 참여한 속말말갈부와 백산말갈부 말갈이 아니라 선왕대에 새로 편입된 흑수말갈부와 기타 만주- 연해주 퉁구스 계열 말갈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학계에서는 피지배층 대다수가 고구려인이 아니라 단순 말갈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학자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차라리 대조영의 출신 성분에 관한 논란이 있을지언정, 피지배층 상당수도 기존에 만주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 후대의 관점으로 이 시기를 바라봐서 착각과 오류가 생기는 것인데, 발해의 수도 지역인 두만강 일대는 고구려 시대 때부터 천년 넘게 예맥 계통의 민족들 즉 한민족의 조상들이 또한 살던 곳이다.

즉, 발해의 수도 지역 두만강과 그 일대는 발해 전성기 시절에도 이미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계 주민들이 다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국에서 보통 인식하는 '피지배층으로서의 말갈인들'은 아마 예맥화된 말갈인들뿐만 아니라 선왕 대에 새로 편입된 연해주와 아무르강 일대의 퉁구스 계열 흑수부 말갈인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게다가 위의 금나라 시절의 사료를 확인하면 애초에 금나라의 여진족들은 발해인들을 이질적인 집단으로 취급하며 차별하였다. 만약 발해의 피지배층 상당수가 금나라의 여진족과 동류의 집단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발해 주민 상당수는 엄연히 고구려-발해인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이토록 길고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끈질기고도 긴 항전을 계속했는데도 실패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1.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한때 같은 식구였던 여진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인데, 이미 선왕 시절의 복속으로 서로 원한 관계가 깊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기록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진족들은 당연히 금나라의 조상인 흑수부 말갈 계열의 여진일 것이다.
  2. 각 부흥운동 세력간의 통합적인 전선 구축이 안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도 보듯 이곳저곳에서 부흥운동이 시간차로 일어났지만 결국엔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되고 만다. 발해 건국기의 대조영과 같은 통합적 리더십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을 텐데 아마 그런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2번의 이유와 연계되는 설명인데, 남쪽에서 동류집단인 고려가 지속적으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한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산이 풍부한 귀족층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고려가 흡수한 발해인들은 아마 상당수가 발해의 엘리트 계층들 즉 핵심 인적 자원들이었을 것이며,[21] 위에서 발해부흥운동이 대조영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지 못한 것도 고려로 이미 유능한 인재풀이 많이 유출되었던 게 원인일 수도 있다.
  4. 마지막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부흥운동을 막은 거란족 요나라, 여진족 금나라의 존재들이다. 고구러를 멸망시킨 당은 시안이 수도였고 토번이나 거란 같은 만만찮은 세력이 옆에 있었으며 무주(측천무후 황제)로 개편될 무렵 거란 족장이 반란을 일으키며 대조영에게 기회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란/요는 발해 바로 옆에 있으면서(내몽골) 발해를 병탄함은 물론 북송에서 연운 16주를 뺏는 등 당대 최강이었고 이후 일어난 여진/금은 발해와 영역이 거의 겹치기도 해서 오히려 발해부흥운동을 억눌러야 했다. 금 태조가 굳이 ‘여진과 발해는 한 몸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 방증.

최근 들어 과학적 연구의 발달로 정확히 946년 11월 무렵 백두산의 분화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22] 이는 정확히 발해의 옛 중심지 인근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드는 한편 당대인들에게 가히 세기말적인 공포를 주었을 것이니 부흥운동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위의 '발해유민의 고려 유입'을 엄청나게 가속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실제로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의 분석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발해부흥운동 역시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안이니만큼 앞으로 관심있게 지켜볼 만한 사항이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여진족 부흥의 실마리를 찾을 커다란 단서가 될 수도 있는 만큼,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한국사의 주 계통으로 이어지는 고려 입장에서도 건국 초기에 꽤 큰 도움을 받았는데, 정안국 등의 발해부흥운동 세력이 만주의 거란을 견제해주면서 광종 대에 대거 호족들을 숙청하고 중앙 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등 행정에 집중할 여력이 마련되었다. 고려 초기는 왕건의 혼인 동맹으로 후계를 노리는 호족 간의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광종 대에서 이를 겨우 제압하고 거란의 침입 직전 성종대에서야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국가 초기의 혼란기에 발해부흥운동의 세력이 미약했거나 거란이 발해부흥운동을 단기간에 제압하고 바로 고려로 쳐들어왔다면 고려의 운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발해의 멸망부터 여요전쟁 전후의 100여년 간 발해부흥운동이 거란의 침입을 맞아주는 일종의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고 그 덕분에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이 일어난 기간 동안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시키고 국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또한 부흥운동이 몰락할 때마다 대규모로 유민이 유입되면서 건국초기 인구가 모자랐던 북방의 인력확충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9. 발해부흥운동을 기록한 역사서

10. 유사사례

11. 같이 보기


[1] 사진에서 흥료국-대발해가 있었던 요동성 지역은 동경이 맞지만, 발해의 용원부가 아닌 거란의 동경요양부였다. [2] 요의 괴뢰국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3] 兀惹國. 발해계 귀족 오소경이 발해의 고도가 위치한 상경용천부 주변에서 일어났다. '오사성 발해국' 혹은 '오사국'이라고도 불린다. [4] 古欲國. 다만 한국사로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 발해부흥운동이고, 고욕을 비롯한 발해 유민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발해의 옛 땅이 아닌 내몽골에 위치한 거란의 한 주에서 일어났던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5] 후당 이후 들어선 후진(936-946) 왕조가 건국 과정에서 거란의 도움을 받았던 탓에 친거란노선인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6] 히노 카이사부로, 박시현, 이용범, 한규철 같은 학자들은 발해 멸망 후 이곳을 오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7]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8] 《요사》 [9] 발해의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거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발해인들이 거란의 영토로 끌려왔는데, 요주 역시 강제이주된 발해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10] 실제로 대연림의 부흥운동 또한 막대한 중과세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된 발해인들의 반발을 기반으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11] 이는 여진이 거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랬다. 여진인과 발해인이 서로 원수였기 때문이다(거란국지 1116년 기사). [12] 물론 금 건국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딱 한번 일어나기는 했다. 발해의 옛 정리부에서 항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 [13] 해릉왕 금세종의 어머니가 바로 발해 유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해릉왕과 금세종이 쿠데타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어머니는 추존 황후들이다. [14]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그 시절 그곳에 살았던 고려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비단 그 이전 살았던 이들 뿐만 아니라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끌려온 포로들과 이후 원간섭기 시절 고려와 원나라의 착취에 못이겨 도망온 유민들이 대부분으로 있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5] 다만 그렇다고 해도 당시 요동의 예맥계 주민들 대다수는 고려에서 온 유이민 세력들보다 토착 발해계 주민들이 주류였다. 옛 요동성 일대는 발해 멸망 직후 요나라의 강제이주로 인해 발해인들의 집결지로 자리잡게 된다. [16] 옛 발해인이었기 때문이다. [17] 동란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발해 때도 일본에 사절로 갔다온 적이 있던 배구(裵璆)라는 사람이 파견되었는데 일본측에 나라가 망했는데 정복자들에게 종사하면서 여전히 잘 먹고 잘 사냐면서 욕 먹고 리턴당한 사례가 있다(...). [18] 다만 역시 고려의 최대 주적은 최강대국인 요나라였기에 발해부흥국이 금나라처럼 엄청난 포텐을 터뜨리며 요나라에다 북송까지 한꺼번에 멸망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국력을 낼 정도가 아니었다면 함께 요나라에 대항하는 동맹이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 더불어 한 가지 지리환경적 요소를 더한 추론을 해보자면 발해 멸망 후 발해의 구지는 이상할 정도로 정주문명을 발전시키기에는 그 포텐셜이 몹시 떨어진 상태였다. 당장 만주에서 성공한 금나라의 경우도 초기 수도는 농경과는 한참 거리가 먼 저 북쪽의 현 하얼빈시였고, 완안부는 그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여진족의 순간 군사력으로 혼란기에 빠졌던 요나라를 한순간에 밀어내고 금나라를 건국한 것이었지, 어떤 장기적인 기반을 갖고 국력을 통해 요나라를 멸망시킨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시 환경상 정주민인 발해인이 주도한 발해부흥국은 금나라 수준까지 성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고, 요나라와 여진족의 공세에 대해 고려의 지원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도 정안국이나 흥료국은 자체적으로 요나라의 공세를 버티기 힘들어 내내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지원을 구한 바 있다. 중앙집권화와 생산력이 크게 진전된 중기를 지나며 국력이 신장된 고려가 성공적으로 발해부흥국을 지원하는 데 성공했다면, 발해부흥국은 심지어 고려의 제후국으로까지 전락했다가 서서히 종속 및 흡수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만주의 발해인이 아예 유목/수렵 문화를 받아들여 여진족을 흡수하고 부흥에 성공했을 것이란 시나리오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그건 그냥 여진족에 동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라 금나라와 차이가 전혀 없을 것이기에 가정에 별로 의미가 없다. 당장 그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또한 시조를 고려인인 함보라 하긴 했지만 결국은 그냥 여진족의 문명을 형성했을 뿐이었다. [19] 발해 말기 알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한 이유로 온난한 기후가 끝나고 소빙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란 가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발해는 요나라의 침공이 없어 살아남았다고 해도 정주문명으로서는 유지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20] 이성계 요동정벌 당시 일대의 1만 호(戶)가 고려군에 투항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1] 대표적으로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신덕, 대심리, 박어 등의 각종 고위 관료급 인물들이 있다. [22] 고려사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23] 조선 후기 학자인 류득공 저. [24] 중국 학자인 김육불(金毓黻) 저, 화문서국(華文書局), 19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