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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역대 트레이드/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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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트레이드 일람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개별 문서가 있는 트레이드
2009년 4월 20일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2006~2014).svg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파일:KIA 타이거즈 워드마크(2001~2009).svg
2013년 5월 6일 파일:KIA 타이거즈 워드마크(2010~2016).svg 김상현, 진해수 ↔ 송은범, 신승현 파일:SK 와이번스 워드마크(2006~2019).svg
2015년 5월 2일 파일:kt wiz 영문 워드마크.svg 파일:kt wiz 영문 워드마크 화이트.svg 박세웅 ↔ 장성우 파일:롯데 자이언츠 워드마크(2009~2017).svg
2017년 4월 7일 파일:KIA 타이거즈 워드마크(2017~2020).svg 노수광 ↔ 김민식 파일:SK 와이번스 워드마크(2006~2019).svg
2020년 6월 7일 파일:두산 베어스 워드마크.svg 파일:두산 베어스 워드마크 화이트.svg 류지혁 ↔ 홍건희 파일:KIA 타이거즈 워드마크(2017~2020).svg
2020년 8월 12일 파일:NC 다이노스 홈 워드마크.svg 장현식, 김태진 ↔ 문경찬, 박정수 파일:KIA 타이거즈 워드마크(2017~2020).svg
2021년 3월 25일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 양석환 ↔ 함덕주 파일:두산 베어스 워드마크.svg 파일:두산 베어스 워드마크 화이트.svg
2021년 7월 27일 파일:키움 히어로즈 워드마크.svg 서건창 ↔ 정찬헌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
2023년 4월 27일 파일:키움 히어로즈 워드마크.svg 김태훈 ↔ 이원석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svg
2023년 7월 29일 파일:키움 히어로즈 워드마크.svg 최원태 ↔ 이주형, 김동규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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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합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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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역대 트레이드/연대별' 문서의 각 문단명 표기 방식
* 다대다 트레이드
ㅇㅇㅇ ↔ ㅇㅇㅇ 등 n대n
각 팀의 메인 칩 선수 1명만 표기
(단, 이적 후 메인 칩 아닌 선수의 활약이 기존 메인 칩 선수를 넘어선다고 판단될 경우 2명 모두 표기. 문단명에 이동한 모든 선수가 이미 기록된 경우 '등 n대n' 표기 생략.)
* 한 팀이 현금만 지불한 트레이드
ㅇㅇㅇ 현금 트레이드
(단, 이적 선수가 3명 이상일 경우 'ㅇㅇㅇ 등 n명' 으로 축약 표기.)
* 현금이 부분 포함된 트레이드
현금을 'n억 n천n백만' 표기
(단, 이적 선수가 3명 이상일 경우 'ㅇㅇㅇ 등 n명' 으로 축약 표기. 총액이 1억 이상일 경우 십만 단위 이하 생략.)
* 지명권 트레이드
문단명에 지명선수 표기 안함
* 선수+현금+지명권의 급부 숫자가 적은 쪽을 좌변에 표기

  • 개별 트레이드 문서의 표제어는 그대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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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000년3. 2001년4. 2002년
4.1. 이도형 강인권, 5억4.2. 노승욱 서한규4.3. 이재주 현금 트레이드4.4. 김태균 임재철, 8천만 등 2대14.5. 장정석 최익성4.6. 조경환 윤재국 등 2대34.7. 김상현 ↔ 방동민 4.8. 김인철 현금 트레이드
5. 2003년6. 2004년7. 2005년8. 2006년9. 2007년10. 2008년11. 2009년12. 관련 문서

1. 개요

KBO 리그에서의 2000년대의 트레이드를 사건별로 기술한다.

세부 제목은 트레이드의 중심이 된 코어 선수 1명으로 최대한 줄여서 서술하고, FA이적이나 방출후 영입같은 선수 이동은 기술하지 않는다.

2. 2000년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심볼(1994~2005).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최익성 박보현
강성우
김종석
김영수
이경수
-
송유석
신국환
김종석
김영수
손석만
박보현 -
1 / 3 2 / 2 3 / 1 0 / 0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김경기 송유석
신국환
손혁
양준혁
김정수
이호준
박계원
성영재
김호
손석만
- 최익성
양준혁
손혁
성영재
김호
김정수
이호준
박계원
김경기
이경수
강성우
1 / 0 4 / 1 3 / 3 3 / 6
Out In

열거된 트레이드 외에도 2000년 3월 24일에 SK 와이번스가 신생팀 전력 보강 차원에서 기존 7개 팀의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을 한 팀 당 한명씩 지명해, 인 당 10억원을 주며 트레이드 형식으로 데려왔다.[1] 이 때, 트레이드로 SK에 이적한 선수는 김충민, 김태석, 강병규, 송재익, 장광호, 권명철, 김종헌.

2.1. 송유석 최익성 등 2대1 사인 앤드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0.03.21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송유석
신국환
최익성

최익성,송유석의 선수협 활동으로 인한 보복성 트레이드. 송유석이 FA 신청을 한 이유에서부터 송유석 측과 LG 측의 이야기가 달랐고[2] 이전부터 여러 이유로 선수와 구단 간 마찰이 있었던 지라 사실상 LG가 33세의 노장이었던 송유석을 팽한 트레이드다. 형식은 사인 앤드 트레이드였다.

최익성은 이 트레이드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저니맨이 되었는데 LG에서는 특별한 활약상은 없이 1년만에 홍현우의 보상선수로 KIA로 떠났다. 송유석은 한화에서 아예 망했고 1년만에 방출되었다. 신국환도 한화에서 백업 내야수로 제한된 출전시간만 가져가다 2002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2.2. 양준혁 손혁

트레이드 일자 2000.03.24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양준혁 손혁

흔히 양준혁의 선수협으로 인한 보복 트레이드로 알려져있지만, 그보다는 김응용 해태 감독이 양준혁에게 딱 1년만 뛰고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행한 트레이드다.

결과적으로 양준혁은 LG에서 좋은 성적을 낸 뒤 김응용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삼성으로 돌아갔고, 손혁만 해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냥 임의탈퇴되었다.

2.3. 김정수 사인 앤드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0.03.30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김정수 5천만원

해태는 FA를 선언한 김정수를 팀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선수로 분류한 상태였고[3] SK는 쌍방울의 처참한 투수 뎁스를 그대로 승계한 지라 시즌을 진행하려면 1군에서 사람 비슷하게라도 던져 줄 투수가 필요했다. 그러한 양측의 요구가 맞아 사인 앤드 트레이드가 이뤄지게 되었다.

김정수는 SK로 이적한 후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곧바로 방출되어 한화에 입단했다. 이후 2003년에 다시 현금 트레이드로 SK에 재합류하기도 했다.

2.4. 박보현 김영수

트레이드 일자 2000.05.07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박보현 김영수

박보현은 두산에서 부진한 성적에도 나름 이닝을 소화하다가 2002년 방출되었고 김영수는 팀의 좌완 불펜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선발 전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SK로 트레이드되었다.

2.5. 성영재 이호준

트레이드 일자 2000.06.01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성영재 이호준

당시 신생팀으로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던 SK가 타선 강화를 위해 단행한 트레이드. 해태는 이강철이 삼성으로 가서 언더핸드 투수가 없었기에[4] 성영재를 잡아왔고, 반대급부로 팀에서 고정 포지션을 따내지 못하던 이호준을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KBO 역사상 차악(次惡)의 조공 트레이드.[5] 성영재는 트레이드 이후 2000 시즌 최상덕과 더불어 무너지는 해태 선발진을 지탱하며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시즌 후 병역비리가 적발되어 은팔찌를 찼고, 그나마 2001시즌 개막 전에 집행유예가 선고되어 풀려나긴 했지만 몇 달을 제대로 훈련하지 못 한 탓에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이는 안그래도 하향세를 타던 성영재에게는 치명타였다. 결국 2001년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 613 잠실대참사[6]의 원흉이 되더니 2002년은 한 경기 뛰고 방출당했다.

반면 이호준은 트레이드 직후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2002년부터 포텐셜이 터지며 팀의 19년 역사상 단 6명[7]밖에 없는 30홈런 타자[8]가 되어 SK에서 13시즌을 뛰고 196홈런을 때려내며 SK를 넘어 KBO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파워히터로 이름을 남겼다. 더군다나 친정팀 KIA와 맞붙은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KIA를 3승 무패로 침몰시키는 데 선봉으로서기도 했고, 이승엽이 일본에 진출한 직후이기는 하지만 2004 시즌에 타점왕 타이틀까지 거머쥐었으며 KIA와의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결승 홈런을 쳐 시리즈를 7차전까지 몰고갔다. 이호준의 트레이드 이후 타이거즈는 2009년 김상현 최희섭이 동시에 각성하기 전까지[9] 거포부재에 시달려야 했다.[10]

그리고 정신 못차린 타이거즈는 2년 후 좌완투수 보강에 눈이 멀어 차세대 거포 LG 트윈스에서 변변찮은 성적을 남기던 투수 방동민[11]과 트레이드한 데 이어 중심타선을 보강한답시고 정성훈에 현금 10억까지 얹어주고 현대에서 박재홍을 받아오는 대실수를 저지르고야 만다.

2.6. 김종석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0.06.01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김종석 1억원

한창 부진하던 김종석은 이 트레이드 후 잠시 부활해 2001년 커리어 하이로 팀을 간신히 4위로 올려놓는 등 활약했지만, 2002년부터 다시 부진에 빠지며 2004년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2.7. 김호 박계원

트레이드 일자 2000.06.02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김호 박계원

이호준-성영재 트레이드에 연달아 발표된 트레이드. 선수협활동에 따른 보복 트레이드 였다. 김호가 해태로 트레이드된 이후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방출된 반면 박계원은 성적은 좋지 않았어도 초창기 암울했던 SK의 내야 상황 때문에 꽤 많은 경기에 나섰다.

2.8. 김경기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0.07.07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김경기 2억 5천만원

신생팀 SK에 대해 적응을 못한 인천야구팬들이 '인천야구 대부'였던 김진영의 장남이자 인천야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김경기의 이적을 요구한 트레이드. 당시 김경기는 에이징 커브로 인한 기량저하로 현대 유니콘스에서 이숭용과 외국인 타자에게 포지션 경쟁에서 밀린 상태였고, 동료 선수와의 불화도 있어서 출장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김경기 본인도 이 트레이드를 반겼다.

하지만 트레이드 이후 어린 선수를 선호하는 강병철 감독은 많이 노쇠화된 김경기에게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고, 결국 2001년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김경기가 인천에서 프로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정도의 의미는 있는 트레이드.

2.9. 이경수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0.07.15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이경수 현금

2.10. 강성우 ↔ 손석만

트레이드 일자 2000.12.19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강성우 손석만

포수가 빈약했던 SK가 신인 손석만과 최기문에게 완전히 밀린 강성우를 바꿨다. 강성우는 99년 김영진과 함께 한시즌 최악의 포수라고 불릴 정도로 활약을 하다 김동수,박경완 등에 밀려 백업,2군을 전전하다 방출당했으며 손석만은 1군 기록 없이 방출되었다.

3. 2001년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장광호
심재학
조웅천
조규제
김홍집
최영필
최만호
심정수
강혁
김주찬
이계성
신동주
김지훈
김영진
조정권
이강철
정경배
김동수
김상진
이용훈
김태한
김기태
안재만
허문회
정현택
심정수
이상열
정현택
심재학 마해영
강영식
김승권
오상민
브리또
장재중
유현승
한규식
최만호
7 / 3 2 / 1 13 / 5 3 / 4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심볼(1994~2005).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마해영
한규식
강영식
양현석
김승권
이상열
장광호
장재중
유현승
이동수
가내영
오상민
브리또
김주찬
이계성
허문회
신동주
김지훈
이동수
가내영
이강철
김영진
조정권
김홍집
최영필
조웅천
조규제
강혁
안재만
양현석
정경배
김동수
김상진
이용훈
김태한
김기태
2 / 3 2 / 5 2 / 4 7 / 11
Out In

3.1. 장광호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1.02.09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장광호 3천만원

현대는 이재주의 부상 이후 백업 포수를 구하고 있었고 SK는 강성우의 영입 이후 포수 뎁스를 정리하고자 양용모, 장재중, 김충민에 밀려 2군으로 내려간 장광호를 내보냈다. 장광호는 2001년 백업 포수로 뛰었으나 2002년에는 2군에 머무르다 은퇴했다.

3.2. 마해영 김주찬, 이계성

트레이드 일자 2001.02.01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마해영 김주찬
이계성

마해영의 선수협 활동에 대한 보복성 트레이드이자 8888577의 시발점이 된 트레이드.

롯데는 당초 포수 진갑용, 외야수 강동우를 요구했다.

마해영은 2001~2003년 3년 연속 30홈런, 그리고 연 평균 .310의 타율과 평균 110타점에 이르는 엄청난 생산력을 보이면서 이마양 트리오로 대표되는 삼성의 막강 타선에 크게 기여했고, 커리어 유일한 골든글러브도 삼성 시절에 받았으며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되며 팀 우승에도 크게 공헌했다. 심지어 뛴 기간이 더 길었던(7년) 롯데 자이언츠 시절보다, 불과 3년밖에 뛰지 않은 삼성 라이온즈의 선수로 자신을 인식할 정도로 엄청난 단기 임팩트를 보여줬다. 삼성을 떠나고 급격히 하락세를 탄게 아쉬울 뿐.

반대급부로 롯데에 입단한 김주찬의 경우는 2001년 자신의 잠재력을 터뜨리면서 테이블 세터로 좋은 성적을 냈으나, 2002년 백인천에 의해 무리하게 장타자로 스타일 전환을 시도하다가 부진에 빠지고 수비 문제로 여러 차례 포지션 변경[12]을 하면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 2007년 베이징올림픽 예선전 때의 맹활약 이후 포텐이 만개하여 롯데의 테이블세터로 완전히 자리잡고, FA에서 대박을 치고 KIA로 가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위 두 사람과 대조적으로 이계성은 선수 시절엔 극소수의 올드팬들만 아는 듣보잡이었고, 은퇴 후 KBO 심판으로 전업하면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3.3. 심정수 심재학

트레이드 일자 2001.02.09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심정수 심재학

심정수의 선수협 활동에 대한 보복성 트레이드. 이 트레이드도 윈-윈 트레이드이긴 하나,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현대가 더 이득을 봤다.

두산으로 간 심재학은 2001년 심정수의 공백이 생각나지 않는 맹활약으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성공했지만, 2002년 이후 다시 평이한 성적을 기록하다가 기아로 트레이드되었다. 반면 심정수는 현대로 이적한 첫 시즌 다소 부침을 겪었으나, 이듬해부터 문자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더구나 심정수는 우동수 트리오의 한 축으로 당대 베어스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심정수의 이적으로 인한 올드 팬 유출도 심각했다.

3.4. 조웅천, 조규제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1.02.09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조웅천
조규제
15억원

신생팀 SK가 창단 첫 해를 꼴찌로 마치자, SK에서는 KBO에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에서 보호선수 20명 외 1명을 현금 트레이드, 준우승팀에서 보호선수 21명 외 1명을 현금 트레이드 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게 받아들여져 현대에서는 이 두명의 투수를 보냈다. 이게 되네?

조웅천은 2001년에는 트레이드 충격으로 부진했으나 그 이듬해부터 다시 제 실력을 내더니 2003년에는 구원왕까지 차지하며 팀의 첫 한국시리즈 진출에 공헌했고 조규제는 SK 창단 초 암흑기 투수진을 지탱하다가 박경완의 보상선수로 현대로 돌아갔다.

한편 현대는 당시 모기업인 하이닉스가 사실상 빚쟁이들의 손에 들어가며 이 때부터 자금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 트레이드로 받은 15억과 정민태 임대료를 합쳐서 운영비로 사용했다.

3.5. 강혁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1.03.1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강혁 6억 7500만원

조웅천, 조규제 트레이드에 이어 두산에서는 아마야구에서는 이름을 날렸지만 프로에서는 활약이 그저 그랬던 강혁을 보냈다. 어차피 강혁은 전년도 8월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로 인해 구단에 제대로 찍힌 상황이었다.

강혁은 SK에 와서도 별반 활약이 없다가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전에 병역 면탈을 시도했던 사실이 드러나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받은 병역특례를 박탈당하면서 선수 생명이 끝났다.

3.6. 강영식 신동주

트레이드 일자 2001.03.21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강영식 신동주

전년도까지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있다가 2001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김응용 감독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뤄진 트레이드다.

강영식은 150km/h대 강속구를 던지던 고졸 2년차 좌완 투수로 피지컬 좋은 좌완 투수를 선호하는 김응용이 해태 감독 시절부터 직접 자기 집에 데려다가 햄 구워서 밥 해먹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키우려고 시도했던 선수였다. 신동주 역시 직전년도에 부진했지만, 그래도 한때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발 빠르고 두 차례나 20홈런을 쳤을 정도로 장타력도 괜찮은 선수였다. 삼성은 외야진 교통정리 겸 김응용 감독이 원하는 좌완투수 보강을, 해태는 타선 보강을 목적으로 양 팀간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어찌보면 아직 검증되지 않은 고졸 2년차 투수를 주전급 외야수 한 명을 내줘가면서 데려온 모험성 트레이드였다.

결론적으로 보면 삼성으로 간 강영식은 트레이드 2년차인 2002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맹활약했고,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승리투수가 되는 등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으나 이후에는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하고 2006년 신명철과의 맞트레이드되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신동주 역시 해태-KIA에서 주전 외야수로 나왔으나 부상 등이 겹친데다 삼성 시절만큼은 못했다. 이후 2003년 말 마해영의 FA 보상선수로 다시 삼성으로 돌아와 백업으로 뛰다가 2005년 다시 KIA로 재트레이드되었다. 두 팀 다 소소하게 이득을 본 트레이드라고 평가할 수 있으나 굳이 따지면 강영식을 데려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본 뒤 다시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신명철을 데려와 주전 2루수로 써먹은 삼성이 더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겠다.

3.7. 김지훈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1.04.16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김지훈 2천만원

삼성은 이미 진갑용이 주전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백업으로는 김동수가 있었던 만큼 김지훈의 자리가 없었다. 반면 해태는 주전 김상훈이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백업인 황성기도 확실한 옵션은 아니었던 만큼 포수 보강에 나섰다. 이후 김지훈은 해태가 인수되고 KIA로 팀명이 바뀌고서도 3년간 백업포수로 있다가 은퇴했다.

3.8. 김승권 김영진, 조정권

트레이드 일자 2001.04.27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김승권 김영진
조정권

삼성의 골칫덩이였던 김영진을 보낸 트레이드.

김영진은 한화로 트레이드된 후 그 해 7경기에 출전했으나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함께 트레이드된 조정권은 트레이드 당해에는 백업 외야수로 1군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주로 2군에 머물다가 방출되었다. 그나마 김승권이 백업이었으나 트레이드 당해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이후 김승권은 트레이드로 다시 한화에 복귀했다.

3.9. 안재만 장재중, 유현승

트레이드 일자 2001.04.28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안재만 장재중
유현승

1군 포수가 전부 부상당했던 LG와 부진한 기존 3루수 이동수를 대체하고자 한 SK 간의 트레이드. 여기에 SK가 구위가 부족한 스윙맨 유현승을 얹어주면서 성사되었다. LG에서 장재중은 무난히 백업 포수 역할을 수행했고 유현승도 트레이드된 해에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이듬해 은퇴했다. 안재만은 SK에서 2001년 주전 3루수로 준수한 활약을 했으나 이후 외국인 3루수 호세 페르난데스를 영입하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외인을 3루로 기용하면서 내야 유틸리티로 밀려났고 김재현의 FA 보상선수로 LG에 복귀했다.

3.10. 양현석 이동수, 가내영

트레이드 일자 2001.05.31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양현석 이동수
가내영

당시 신동주, 김창희, 장일현의 주전 라인에 김경언이라는 기대주까지 있어 양현석에게 출전 기회를 줄 수 없던 KIA와 안재만의 영입으로 수비가 불안한 이동수의 자리가 애매해진 SK 간의 트레이드. 여기에 부상 문제로 기량이 떨어졌던 가내영을 SK가 추가로 내주며 성사되었다.

이동수는 2001년 타이거즈의 클린업으로, 가내영은 2002년 롱릴리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기대를 갖고 영입한 유망주 양현석은 무난한 성적을 거두다가 조경환의 영입으로 자리를 잃고 LG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3.11. 김홍집, 최영필 이상열, 3억

트레이드 일자 2001.06.16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김홍집
최영필
이상열
3억원

인천야구의 산증인이던 김홍집이지만 고질적 어깨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많이 저하된 상태였고, 결국 안터지던 최영필과 묶어서 한화로 보냈다.

현대로 온 이상열이 2004년까지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반면, 김홍집은 잠깐 부활하나 했지만 2003년 은퇴하고 최영필은 2005년에 가서야 뒤늦게 포텐셜이 터지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는 현대의 승리, 장기적으로는 윈윈이라고 볼 수 있는 트레이드.

3.12. 한규식 허문회

트레이드 일자 2001.07.13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한규식 허문회

94년 LG 우승멤버이자 백업 1루수였던 허문회와 내야 유망주였던 한규식 간 트레이드. 둘 다 백업 멤버들간의 트레이드지만 이례적으로 평소 젊은 선수를 보내고 즉전감인 베테랑 선수를 데려오는 걸 좋아하는 김성근 감독 답지않게 역으로 베테랑 선수를 내주고 젊은 유망주를 받아온 특이한 케이스.

허문회는 롯데로 트레이드된 뒤 2001년 후반기에는 3할로 맹타를 휘둘렀고 2002년에는 커리어 중 가장 많은 타석에 들어서며 준주전급으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반면 한규식은 2005년을 제외하면 사실상 2군 멤버로 보내다가 KIA로 재트레이드된 뒤 은퇴하며 롯데가 조금 더 이득을 봤다.

3.13. 최만호 ↔ 정현택

트레이드 일자 2001.07.24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최만호 정현택

박용택을 능가하는 유망주인 정현택이 안터지자[13] 최만호와 바꾼 트레이드인데, 최만호가 그럭저럭 백업으로 있었으나 정현택은 듣보잡이 되어서 은퇴했으므로, LG가 이익을 봤다.

3.14. 이강철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1.07.30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이강철 2억원

FA 이적 1호였지만 먹튀가 된 이강철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트레이드.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해태가 KIA로 간판을 바꿔달기 직전에 성사된 트레이드여서 7월 31일 인천 SK전에서 이강철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이 경기가 우천취소되었다. 그리고 이강철은 KIA에 가서 괜찮은 불펜 요원으로 부활하며 삼성 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3.15. 브리또, 오상민, 11억 ↔ 김기태, 정경배 등 6인

트레이드 일자 2001.12.16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브리또
오상민
11억원
김기태
정경배
김동수
김상진
이용훈
김태한

삼성은 장타력 있는 유격수 보강과 천적 제거를 통해 이듬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SK는 선수단 보강에 성공[14]한 윈-윈 트레이드.

첫 시작은 포수난에 심하게 시달리던 SK가 삼성에서 FA계약 이후 먹튀가 된 김동수를 영입하기 위해 논의가 되었다. 그러다 김응용 감독이 당시 오상민을 강력히 원했고 당시 잉여자원이 많았던 삼성과 뎁스가 약했던 SK와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대규모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SK에서도 삼성 시절 못지않은 좋은 타력과 수비를 보여준 정경배는 정근우가 2루수로 완전히 자리잡기 전까지 주전 2루수로 뛰었으며, 김기태는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2004년에는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마지막 불꽃을 잘 태우고 은퇴했다.

스탯티즈 WAR로 비교해도 상당히 밸런스가 좋았던 트레이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수가 해당 팀에서 뛰는동안, 삼성은 11.67, SK는 16.55 만큼의 WAR을 얻었다.

삼성 : 오상민(3.79) + 브리또(7.88) = 11.67
SK : 정경배(8.48) + 김동수(1.76) + 김상진(2.69) + 이용훈(-0.64) + 김태한(0.11) + 김기태(4.15) = 16.55

4. 2002년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심볼(1994~2005).svg
이도형 이명호
김태균
노승욱
이재주
장정석
강인권
강인권 임재철 서한규
최익성
이도형
1 / 1 2 / 1 3 / 2 1 / 1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최익성
김상현
방동민 박남섭
윤재국
에르난데스
서한규
임재철
조경환
매기
김인철
이재주
장정석
방동민
김상현 조경환
매기
노승욱
이명호
김태균
박남섭
윤재국
에르난데스
2 / 3 1 / 1 3 / 2 5 / 6
Out In

4.1. 이도형 강인권, 5억

트레이드 일자 2002.01.17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이도형 강인권
5억원

2001년 한화는 강인권, 조경택, 신경현 등 여러 포수들을 돌려가며 기용해봤지만 누구 하나 확실한 주전 포수 감이 없었고 결국 주전 포수로 이도형을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반면 두산은 이미 홍성흔이라는 확고한 주전 포수가 존재했기에 이도형을 내주는 대신 백업 포수로 수비가 좋은 강인권을 영입하고 5억원을 챙겼다.

한화는 이도형을 세 시즌 정도 주전 포수로 활용하고 2004년 어깨 부상 이후로는 지명타자로 주로 기용했는데 좋은 성적을 거뒀다. 두산 역시 강인권을 무난한 백업 포수로 2006년까지 잘 기용했고 현금 5억을 확보하면서 양 팀간 윈-윈 트레이드로 남았다.

4.2. 노승욱 서한규

트레이드 일자 2002.04.03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노승욱 서한규

태평양 시절인 1993년에 데뷔했으나 갈 수록 출장기록이 적어지던 언더핸드 계투자원 노승욱, 당시 롯데의 터지지 않던 유격수 자원 서한규가 트레이드 되었다.

노승욱은 롯데 이적 후 등판이 많아졌으나, 경기 중후반 불안한 피칭을 자주보이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왕기름넣을거 최대성능으로 가득염 이전 "지나가던 '노승 욱' 하며 하는 말"로 롯데의 방화범 리스트에 기억될 정도... 서한규는 2004년 시즌 후 확고한 주전 유격수인 박진만이 FA로 떠난 후 유격수 주전으로 출장하였다. 수비 능력은 어느 정도 탄탄해서 주전으로 낙점되었으나, 현대가 해체된 후 바로 은퇴하여 주전으로 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박진만 이후 주전 유격수로 활약한 임팩트 때문인지 서한규가 롯데에서 트레이드 된 선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4.3. 이재주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2.04.04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이재주 3억원

KIA에게 이득을 가져다 준 현금 트레이드.

당시 현대에서 포수 자리는 주전 박경완에 후보로는 동국대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보여준 신인 강귀태가 입단했고 지명타자 자리는 외국인 선수에게 주어졌던 만큼 이재주의 자리가 없었다. 이때의 현대는 중복자원을 뎁스로 데리고 있을 만큼 팀의 재정 상황이 좋지 못했던 지라 결국 이재주는 현금을 댓가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이후 이재주는 김상훈의 백업포수와 대타로 쏠쏠히 활약하며 대타 최다홈런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06년부터는 마해영의 트레이드로 인해 공석이 된 지명타자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KIA의 4번타자로 자리잡았고 침체기 시절 타이거즈의 중심타자 역할을 했었다. 이후 09년까지 기아는 이재주를 쏠쏠하게 잘 써먹었고, 이재주 본인도 KIA에서 우승반지를 하나 더 껴보게 된다.

4.4. 김태균 임재철, 8천만 등 2대1

트레이드 일자 2002.04.29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김태균
이명호
임재철
8천만원

당시 삼성 입장에서는 틸슨 브리또의 영입으로 팀 내 입지가 좁아진 김태균을 롯데로 보내고, 반대로 외야 백업자원을 보강하기 위해 임재철을 영입한 트레이드이다.

이 트레이드를 통해 김태균은 롯데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1군 내야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반대로 임재철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자마자 그 해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었고, 그 다음시즌에 한화로 트레이드된다. 이 트레이드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호인데, 이명호는 좌타 외야 유망주였으나,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백인천에 의해 좌완 사이드암 투수로 전향하면서 커리어에 큰 피해를 입고 처량하게 은퇴하고 만다.

4.5. 장정석 최익성

트레이드 일자 2002.06.16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장정석 최익성

4.6. 조경환 윤재국 등 2대3

트레이드 일자 2002.07.20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조경환
매기
박남섭
윤재국
에르난데스

이 트레이드를 주도 및 실행한 사람은 부산에 들어오면 시체로 나가실 백인천이다. 트레이드 직후 금지어 백골퍼는 시즌 포기를 선언했고 이 트레이드는 롯데 구단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로 회자되고 있다.

조경환은 백인천 감독에 의해 타격폼을 교정했으나 성적이 안 나와 다시 예전 폼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은 조경환이 자신의 말을 거역한 것으로 알고 트레이드시켰는데 트레이드 이후 SK에서 2003년 엄청난 타격 능력으로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 롯데가 대체자로 데려간 윤재국은 평범한 활약을 보여주며 SK 쪽으로 완전히 기운 트레이드가 되었다.
에르난데스는 어깨 부상을 당한 후 SK에서도 웨이버 공시가 예정되어 있었던 선수였다. 그러나 롯데는 그런 선수를 데려갔고 결국 시즌 중 롯데에서 웨이버 공시를 당하며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박남섭이 박준서로 개명한 후 2012년, 2013년 특급 대타 자원으로 활약하며 조금은 위안거리가 됐지만, 이는 무려 트레이드 10년 후의 일인데다가 당시 조경환의 활약상을 생각하면 재평가의 여지는 없다.

4.7. 김상현 ↔ 방동민

트레이드 일자 2002.07.31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김상현 방동민

LG는 김성근 감독이 김상현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있었고[15] 기아는 좌완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트레이드.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완벽한 루즈-루즈 트레이드가 되었다. 김상현도 LG에서는 드넓은 잠실구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2군 본즈의 모습만 보여줬고, 한 때는 포텐셜이 있었지만 1군에서는 별다른 모습을 못 보여주던 방동민은 기아에서도 폭망하고 방출되었다. 타이거즈는 이미 성영재 트레이드때 비슷하게 투수 영입을 위해 유망한 타자를 내보냈다가 대실패를 겪었지만 같은 실책을 반복했다.

4.8. 김인철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2.07.31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김인철 2000만원

KIA 타이거즈는 김장현의 위협구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가 함몰된 이종범의 백업요원으로 김인철을 받고 2천만원을 롯데에게 내주었다.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는 양 팀간 첫 트레이드다.

5. 2003년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임재철
김승권
박연수 박재홍
황윤성[16]
권준헌
김규태
정성훈
손혁
김창희
이동수
키퍼
심제훈
박진철
황윤성[17]
고지행
지승민
허문회 정성훈
송지만
박재홍
진필중
김원섭
최용호
엄정대
허준
황윤성[18]
심재학
2 / 2 1 / 1 3 / 2 9 / 8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심볼(1994~2005).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진필중
김원섭
최용호
문동환
심재학
이용훈 조효상
고지행
지승민
김정수
허준
송지만
채상병
허문회
김영수
엄정대
손혁
김창희
이동수
키퍼
채상병
박진철
황윤성[19]
김정수
김영수
임재철
김승권
권준헌
문동환
김규태
조효상
박연수
이용훈
심제훈
5 / 7 1 / 2 7 / 4 3 / 5
Out In

5.1. 김규태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3.01.14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김규태 현금

기사나 여러 사이트들을 통해 트레이드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김규태가 1군 경력이 전혀 없는 선수인 만큼 당시의 기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단, KBO 연감상에서는 무상 트레이드가 아닌 현금 트레이드로 기록되어 있다.[20]

5.2. 박재홍 정성훈, 10억

트레이드 일자 2003.01.15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박재홍 정성훈
10억원

당시 KIA는 1루수 장성호, 2루수 김종국, 유격수 홍세완으로 고정된 상황에서, 3루수의 경우 포지션이 겹치는 정성훈과 이현곤 둘 중 하나를 트레이드해 내야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KIA는 아마 시절부터 '제 2의 이종범' 이라고 불리던 이현곤을 믿고, 이미 가능성을 보였던 정성훈을 현금 10억까지 얹어주며 현대로 트레이드하고 박재홍을 영입해 중심 타선을 보강하고자 했다. 현대는 구멍이었던 3루수 보강 겸 재정난에 빠진 구단 사정상 자금력 확보를 목적으로 단행된 트레이드.

그리고 결과는 현대의 압승. 현대는 정성훈의 영입으로 오랜 기간 구멍이었던 3루수 보강에 성공하면서 KBO 한국시리즈 2연패에 성공했고, 정성훈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후에 FA 대박도 두 차례나 이뤄낸다. 반면 KIA는 기껏 데려온 박재홍이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부상과 더불어 태업 의혹까지 받았을 정도로 부진했다. 거기에 과거 해태 입단을 거부하고 지명권 트레이드로 현대에 입단한 박재홍은 예전부터 고향팀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로인해 구단과 사이가 더욱 악화되며 결국 2년만에 SK로 재트레이드, 박재홍 본인에게나 KIA에게나 양쪽 모두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추가로 아마추어 시절 명성을 믿고 정성훈을 보낸 뒤 주전으로 기용된 이현곤은 지병인 갑상선 항진증으로 인해 프로에서는 아마추어 시절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2007년 한 해 반짝 활약한 걸 제외하면 나머지 해는 부상으로 골골대다가 완전히 주전에서 밀려나 신생팀 NC로 이적, 거기서도 얼마 못 가 은퇴하고 말았다. 당시 KIA 단장이자 한동안 KIA 팬들에게 욕을 먹었던 정재공 단장의 명백한 삽질 중 하나.

5.3. 진필중 손혁, 김창희, 8억

트레이드 일자 2003.01.1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진필중 손혁
김창희
8억원

박재홍 트레이드 다음날 또한번의 충격을 안겨준 트레이드였다. 임창용 이적 이후 확실한 마무리투수 부재로 어려움을 겪던 KIA는 뒷문 보강을 위해 현금 8억에 손혁과 김창희까지 얹어주며 리그 최강의 마무리였던 진필중을 데려와 기대를 모았으나[21] 사실 진필중은 전년도부터 슬슬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하락세 조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KIA 입단 후에도 팀 분위기 적응에 실패한 것부터 시작해 이 경기의 원흉이 되기도 하는 등 기대치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2003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서울 연고 팀에서 뛰어야 한다' 라는 말을 하는 등 KIA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한편 진필중을 보낸 두산은 대신 받아온 손혁이 1년 만에 돌연 은퇴해버렸고, 김창희는 준주전에 그쳤다가 삼성으로 재트레이드되는 등 양 팀 모두 이득을 보지 못한 루즈-루즈 트레이드로 볼 수 있으나, 두산은 진필중을 보내며 현금 8억을 확보했고, KIA는 진필중이 FA로 이적하자 보상선수로 손지환을 받아 몇 년동안 잘 써먹었으니 두 팀 모두 나름 이득을 본 셈도 있다.

5.4. 조효상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3.04.19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조효상 4천만원

백인천 당시 롯데 감독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트레이드로 이후 백인천 감독 체제에서 기회를 받았지만 부진한 모습이었다. 감독이 양상문으로 바뀐 이후 2005년 잠시 기용되기도 했으나 이렇다 할 기록은 남기지 못하고 은퇴했고 은퇴 후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살았다.

5.5. 고지행 임재철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2003.04.24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고지행
지승민
임재철
김승권

고지행 관련 블로그

2003 시즌을 앞두고 한화는 내야진 보강 겸 타격에도 재능이 있었던 재일교포 고지행을 영입했지만 팀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유승안 감독과 마찰을 빚은 뒤 일본으로 무단 출국해 버리는 바람에 임의탈퇴를 걸고 말았다.

한편 삼성은 전술한 SK와의 6:2 트레이드 후 주전 2루수를 맡은 박정환이 타선에서 구멍이 되자,[22] 고지행의 타격 재능을 눈여겨보고 타선 보강을 위해 한화에게 고지행 트레이드를 제안하였고, 마침 한화도 부실했던 내야진 보강 겸 외야수를 받기 위해 트레이드 카드를 맞췄고, 고지행과 좌완투수 지승민을 삼성에 보내고 대신 내야 유틸리티 김승권과 외야수 임재철을 받게된다.

한편 삼성은 일본으로 무단 출국한 뒤 잠적했던 고지행을 데려오기 위해 당시 재일교포였던 삼성 2군 감독 신용균을 급파해가면서까지 고지행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고, 삼성 선수단에 합류하자마자 박정환을 밀어내고 테이블세터 겸 주전 2루수를 차지하면서 공수 양면으로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2003 시즌 종료 후 삼성이 박종호를 FA로 데려오면서 졸지에 고지행은 밀려났고, 이후 노장진과 무단이탈한 뒤 술을 마시다가 김응용 감독에게 걸려 구단에 제대로 찍혔고 결국 2004 시즌 후 방출당했다. 이후 한화로 복귀했지만 한 시즌 만에 다시 방출당한 뒤 한국을 떠났다. 더불어 고지행과 같이 삼성으로 온 지승민은 병역비리에 연루된 데 이어 교통사고로 인해 커리어가 꼬인 후 채상병과 트레이드.

반대로 한화가 받아온 김승권은 내야가 부진했던 한화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부진하며 방출, 이후 현대에 입단했음에도 거기서도 얼마 못 버티고 방출되었고, 임재철은 고향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23] 1년만에 차명주와 맞트레이드되어 두산으로 이적한다.

결론적으론 2003년 한정으로 고지행을 주전으로 잘 써먹고 이후 지승민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포수 채상병을 받아온 삼성의 소소한 이득이 됐다. 만일 삼성이 FA로 박종호를 영입하지 않아 고지행이 오랫동안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면 한화는 후술할 송지만 트레이드 이상으로 더 철저히 손해를 보고 팬들에게 욕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5.6. 허문회 박연수

트레이드 일자 2003.04.25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허문회 박연수

허문회를 다시 친정팀 LG로 돌려보내기 위한 트레이드. 허문회는 2년 만에 친정팀 유니폼을 다시 입었지만,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 못 가 2군으로 내려간 뒤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한다. 반대급부로 롯데에 건너간 박연수는 평범한 백업 내야수였으나, 그래도 선수층이 얇았던 롯데에서 2006년까지 준주전으로 뛰었다 보니 롯데의 근소 이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담이지만 허문회는 17년 뒤 감독으로 롯데에 돌아 왔다.

5.7. 김원섭 이동수

트레이드 일자 2003.05.0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김원섭 이동수

동무로 불리는 김원섭은 원래 타이거즈 출신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다 이 트레이드를 통해 KIA 유니폼을 입었고 이후로는 롱런하며 기아 외야의 한 축을 지키는 타자가 되었다. 반대로 이동수는 2003시즌을 끝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5.8. 김정수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3.06.09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김정수 5000만원

41세의 나이로 이미 제 몸상태가 아닌 김정수였으나 SK에 좌완이 이승호 하나였고 그마저도 선발이었던 만큼 현금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후 원포인트로 33경기에 나섰으나 12이닝에 안타 17개를 맞으며 부진했다. 그래도 당시 SK의 허접한 좌완 불펜진 덕에 한국시리즈 명단에도 승선하여 등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5.9. 김영수 이용훈

트레이드 일자 2003.06.10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김영수 이용훈

조규제 박경완의 보상선수로 이적한 2003년 SK는 좌완투수가 부족했고 이를 보강하고자 삼성에서 데려왔던 선발 유망주였으나 부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이용훈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좌완 파이어볼러였던 김영수를 데려왔다.

김영수는 SK에서 패전처리만 2년간 맡다가 병역비리 사건으로 망했고 이용훈은 롯데로 간 뒤 스윙맨으로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며 이 트레이드는 명확히 롯데의 이득으로 끝났다.

여담이지만 이용훈은 이 당시 트레이드가 확정됐을 때 고향팀인 롯데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보니 부산으로 운전하면서 내려가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면서 갔다고 한다. 그리고 2011년, 2군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5.10. 최용호 키퍼

트레이드 일자 2003.07.09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최용호 키퍼

트레이드 발표 직후 최용호가 KIA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돌연 잠적해버리는 등 소란이 있었고, 결국 최용호는 KIA에서도 시원찮은 성적만 남기고 2년만에 삼성으로 다시 트레이드된다. 반대로 두산으로 간 마크 키퍼는 트레이드 후 다시 살아나며 재계약에도 성공했으나 다음 해 다시 부진하며 퇴출되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나마 키퍼를 반 시즌정도 잘 써먹은 두산이 소소하게 이득을 본 트레이드.

여담으로 키퍼가 떠나며 생긴 KIA의 외국인 슬롯에 영입된 투수 마이클 키트 존슨은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으나 재계약에는 실패했다. 이후 2005년에는 다시 KIA에서, 2009년에는 SK에서 뛰었다.

5.11. 엄정대 ↔ 심제훈

트레이드 일자 2003.07.16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엄정대 심제훈

흔치 않았던 타이거즈와 자이언츠 간의 트레이드로 서로 외야 자원을 교환했으나 KIA는 이미 외야가 백업까지 꽉 찬 상태였고 롯데도 외국인 타자 이시온부터 손인호, 이계성, 신종길, 시즌 중 트레이드로 영입한 박연수까지 있어 1군에는 자리가 없었다.

5.12. 허준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3.07.23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허준 300만원

역대 가장 적은 액수의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된 당해 허준은 내야 유틸리티 백업으로 기용되었고 2004년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5.13. 황윤성 현금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3.07.31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황윤성 현금

황윤성은 KIA 유니폼을 갈아입은지 겨우 4개월만에 또다시 두산으로 트레이드되며 별 의미가 없는 트레이드가 되었다.

5.14. 송지만 권준헌

트레이드 일자 2003.12.05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송지만 권준헌

한화 이글스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송지만은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통산 300홈런-1000타점의 금자탑을 달성한 반면 권준헌은 2시즌 정도 불펜에서 잠깐의 활약을 끝으로 공두오로 대표되는 방화범이 된 후 은퇴했다. 구단 최초의 프랜차이즈 감독인 유승안이 비난 끝에 불명예 퇴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송지만-이영우의 토종 외야 듀오를 각각 트레이드와 병역 비리로 잃어버린 이후, 한화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된 토종 외야수 한 명을 육성해내지 못하고 있다.[24]

5.15. 문동환 채상병

트레이드 일자 2003.12.10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문동환 채상병

문동환은 FA 정수근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롯데에서 두산 선수가 된 지 하루만에 한화로 떠나게 되었고,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뒤엎고 팀의 200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일조했다. 채상병은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그후 복귀하여 홍성흔의 부상공백을 매우 쏠쏠하게 메꿔준 윈-윈 트레이드의 사례.

5.16. 심재학 황윤성, 박진철

트레이드 일자 2003.12.10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심재학 황윤성
박진철

두산이 당시 부진하고 있던 심재학을 내보내서 구단 연봉을 줄이려 한 트레이드. 그렇다 보니 반대급부로 온 선수들도 타격 안되는 1루수 황윤성과 2003년 아예 뛰지도 못한 투수 박진철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두 선수는 조용히 은퇴했고[25] 심재학은 1년이나마 KIA에서 연봉에 걸맞는 활약을 하며 해당 트레이드는 두산의 패배로 끝났다.

6. 2004년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 양현석
오승준
김희걸
노장진
김승관
이원식
소소경
박재홍
- 이상훈
박재홍
박석진
김대익
홍현우
이용규
김희걸
- 3 / 2 2 / 2 3 / 3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심볼(1994~2005).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임재철 이상훈
홍현우
이용규
김만윤
차명주
윤재국
박석진
김대익
차명주 양현석
오승준
이원식
소소경
윤재국
임재철
김만윤
노장진
김승관
1 / 1 3 / 4 2 / 2 3 / 3
Out In

6.1. 이상훈 양현석, 오승준

트레이드 일자 2004.01.14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이상훈 양현석
오승준

LG팬들 앞에서 절대로 말도 꺼내면 안 되는 트레이드이자 LG팬들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트레이드다. 2002년의 김성근 체제에서의 기록적인 혹사[26]를 당한 이후, 이상훈은 2003년 혈행장애 등으로 이름값에 비해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금지어 이순철 및 LG 프런트가 당시 기타 파동으로 논란이 되었던 이상훈과의 불화로 인해 무명 선수와 트레이드되었다. 이후에도 김재현의 각서 파동과 이적, 유지현의 불명예 은퇴 등의 사건이 터지며 LG는 결국 6668587667을 찍게 된다. 박병호 트레이드에 버금가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라 할 만하다.

이상훈은 SK로 간 후 몇 경기 던지다가 LG 상대로 공을 던질수 없다고 하며 은퇴하였고[27], SK에서 온 양현석오승준은 별다른 활약없이 은퇴하였다.

6.2. 윤재국 ↔ 김만윤, 7천만

트레이드 일자 2004.04.11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윤재국 김만윤
7000만원

정수근이 FA를 통해 롯데로 이적하면서 설 자리를 잃은 윤재국을 처리하기 위해 단행한 트레이드.

윤재국 강봉규, 김창희, 최경환, 전상렬, 장원진과 같이 주전 외야수로 활약했으나 6월 2일, 잠실 LG경기 중 투수 서승화의 고의 태클에 걸려 넘어져 시즌 아웃된데 이어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까지 연루되면서 선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고 만다.

한편 윤재국의 반대급부로 롯데에 온 김만윤은 한 때 좌타 외야수 유망주였고 최진행, 최형우 등과 함께 경찰청 야구단 창단 멤버였으나, 끝내 꽃피우지 못하고 군 제대 후인 2008년 방출되어 은퇴, 이후 잠시 국내에서 스카우트와 전력분석원 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현재는 MLB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스카우트로 근무 중이다.

굳이 따지면 윤재국을 주전으로 잠깐이나마 기용한 두산이 우위긴 해도, 이득을 봤다고는 하기 어려워 결론적으로는 두 팀 모두 이득을 못 본 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6.3. 차명주 임재철, 5천만

트레이드 일자 2004.06.0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차명주 임재철
5000만원

김경문 감독과의 불화가 있던 차명주를 처리하기 위해 단행된 트레이드. 차명주는 한화에서 분식왕으로 엄청 까였던 반면 임재철은 두산에서 병역 비리로 인한 군복무 이후 전상렬을 밀어내고 두산 철벽 외야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그가 거쳐간 5개 팀 중 가장 오랜 기간을 보냈다. 두산의 완벽한 승리.

사족으로 임재철은 투자가 너무 없어서 개판 5분전이었던 한화 구단의 시설[28]에 학을 뗀 나머지 이 트레이드 당시 "롯데보다 X같은 곳은 처음 봤다"라는 임팩트 강한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훗날 한화가 10년 암흑기를 달린 원인 중 하나가 열악한 2군 시설이란 점을 감안하면 참 의미심장한 발언.

6.4. 노장진 박석진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2004.07.12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노장진
김승관
박석진
김대익

시즌 초 삼성에서 음주 및 무단이탈 사고를 쳤던 노장진을 처리하기 위해 이뤄진 트레이드. 롯데 역시 마무리 보강을 목적으로 해당 트레이드를 추진했고, 반대급부로 박석진 김대익이 삼성으로 건너갔다.

트레이드 당시까지만 해도 부상으로 재활하던 30대 불펜투수와 성장 한계가 뚜렷한 외야수를 내주고 검증된 마무리감을 받아온 롯데가 이득을 볼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과는 삼성의 우세로 끝이 났다. 박석진김대익은 삼성에서 각각 불펜과 대타요원으로 쏠쏠한 활약을 보이며 2005년, 2006년 2연패에 보탬이 됐고 둘 다 롯데 시절에 껴보지도 못한 우승반지를 획득한다. 반면 롯데로 건너간 노장진은 트레이드 첫 해에는 나름 철벽 마무리의 모습을 보였으나 1년 후 다시 무단이탈을 하는 등 논란만 일으키다 2006년 FA 미아로 은퇴했고, 김승관 역시 만년 유망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출당하며 은퇴한다. 다만 이 중 박석진은 2006년 시즌 종료 후 삼성에서 방출된 뒤 다시 롯데로 돌아온다.

6.5. 홍현우 이원식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2004.11.0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홍현우
이용규
이원식
소소경

먹튀 홍현우를 처리하기 위해 단행한 트레이드.

홍현우는 KIA에서도 똑같이 부진하긴 했지만 이용규가 이적 직후 대성장을 이루면서 KIA의 완승으로 끝났다. 반면 LG로 간 이원식소소경은 이렇다 할 성적은 거두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이 와중에 금지어 이순철은 트레이드 이후 2군에서 던질 투수가 없어서 트레이드를 단행했다는 말을 해서 욕을 얻어먹었다.

6.6. 김희걸 박재홍

트레이드 일자 2004.12.12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김희걸 박재홍

고향팀에서 분위기 적응 실패,[29] FA 취득시기와 관련해서 코칭스태프 및 프런트와 갈등을 빚은데다가 성적도 현대 시절만큼 안나왔으며 빵 사건 등 팀 분위기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은 박재홍을 처리하기 위한 트레이드. 고향팀 KIA와 상처만 남았던 박재홍은 인천 야구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마케팅을 하던 SK의 러브콜을 받았고, 인천으로 돌아와 부활에 성공하며 SK의 중심타선에서 활약했다.

반면 박재홍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김희걸은 KIA에서 불만 지르다가 2012년 삼성으로 트레이드, 누가 봐도 SK의 승리로 끝난 셈.

7. 2005년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 신동주 전병두 리오스
김주호
마해영
서동욱
최상덕
- 최용호 리오스
김주호
전병두
장문석
손상정
한규식
- 1 / 1 1 / 2 5 / 4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파일:한화 이글스 화이트 심볼(1994~2005).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조원우 장문석
손상정
한규식
조영민 김태균
김태균
조영민
마해영
서동욱
최상덕
조원우 -
1 / 2 3 / 3 1 / 1 1 / 0
Out In

7.1. 김태균 사인 앤드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5.01.31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김태균 1억원

해를 넘기도록 FA 계약을 맺지 못하던 김태균을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SK가 영입했다. 최정이 3루에 자리 잡기 전까지 3루 주전으로 쓰이고 최정이 3루 주전으로 자리 잡은 이후로는 내야 유틸리티로 기용되고 2007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어 은퇴했다.

7.2. 조원우 조영민

트레이드 일자 2005.06.02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0~2005).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조원우 조영민

당시 한화는 외야진 보강을 위해 김인식 감독의 적극적인 주도로 조원우를 영입했고, 반대급부로 영건 우완 조영민을 SK에 보냈다. 트레이드 당시에는 81년생 투수를 주고 71년생 외야수를 받아온 것에 대한 비판이 많았는데, 조원우는 2005년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한 시즌이라도 활약한 반면 조영민은 가능성까진 보여줬으나 1군에서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하다가 은퇴했다. 서로의 득실차가 크지는 않지만 굳이 따지면 조원우를 즉전감으로 써먹은 한화가 조금은 우세를 본 트레이드. 그러나 가뜩이나 하위 라운드 패스 문제로 인해 얇아진 한화의 팜 뎁스는 이 트레이드로 더 얇아졌다.

7.3. 전병두 리오스, 김주호

트레이드 일자 2005.07.10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전병두 리오스
김주호

당시 KIA는 창단 첫 꼴찌를 찍고 있던 상황이라 유망주를 필요로 했고 두산은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 유력해지자 강력한 외국인 선발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행한 트레이드. 리오스는 이 트레이드 전까지만 해도 부진했으나 트레이드 후 3년간 명실상부한 두산의 1선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전병두는 KIA에서 성장하여 2006 WBC 엔트리에도 오르는 등 활약하다가 부상으로 인해 부진했고, 이내 SK로 트레이드되어 SK에서도 뛰어난 활약상을 남겼다. 김주호는 두산에서 1군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그런데 정재공 당시 KIA 단장의 말로는 사실 1:2가 아닌 2:2 트레이드라고 한다. 당시 두산이 보유한 외국인 선수 슬롯이 같이 트레이드 된 것으로, KIA와 두산 모두 영입의사가 있었지만 두산이 먼저 영입하려고 했던 세스 그레이싱어까지 KIA가 영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싱어가 당시 KBO에 정식으로 등록된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 공식적으로 발표된 내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1:2 트레이드로 기사가 나왔다.

이 트레이드를 마지막으로 2023년 현재까지 외국인이 트레이드 되는 경우는 나오지 않고 있다.

7.4. 신동주 최용호

트레이드 일자 2005.07.24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신동주 최용호

최용호는 1군에서 공 한번 못 던지고 2006년 시즌 후 방출되었고, 신동주 역시 2006년 시즌 중 방출되어 두 팀 모두 실패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7.5. 마해영 장문석 등 3대3

트레이드 일자 2005.11.02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마해영
서동욱
최상덕
장문석
손상정
한규식

타선의 중심을 잡아 줄 거포가 필요 했던 LG와 마무리 부재에 시달려온 KIA와의 이해 관계가 맞아서 성립 된 트레이드.

트레이드 중심 선수였던 마해영장문석이 동시에 폭망하면서 결국 루즈 루즈 트레이드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마해영의 잔여연봉을 떠넘긴 KIA가 약간 이득을 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이 와중에 장문석은 나갈 때 팀을 디스했다. 2002년에 김성근의 살려조 일원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큰 지분을 가졌지만 결국 트레이드되자 토사구팽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서동욱이 LG에서 오래 뛰면서 쏠쏠한 활약을 해줬으나, 넥센을 거쳐 KIA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게 되었다.

8. 2006년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강동우
김덕윤
강영식
홍원기
김창희
강봉규
최경환
이승준
조현근
- -
김창희
강봉규
조현근
신명철
장교성
강동우
최준석
김진수
김덕윤
- -
3 / 4 6 / 5 - -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최준석
김진수
신명철
- 장교성 -
최경환
이승준
강영식
- 홍원기 -
3 / 3 - 1 / 1 -
Out In

8.1. 홍원기 ↔ 장교성 사인 앤드 트레이드

트레이드 일자 2006.01.16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장교성 홍원기

FA를 선언했다가 미아가 될 뻔했던 홍원기를 현대가 영입한 사인 앤드 트레이드.

홍원기는 백업 내야수로 있다가 2008 시즌 초 은퇴했고 장교성은 두산 1군에서 5경기 출전 후 방출되었다.

8.2. 강동우 김창희, 강봉규

트레이드 일자 2006.03.29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강동우 김창희
강봉규

2005 시즌에 최악의 성적을 거두면서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민폐였던 강동우로 골머리를 앓던 삼성은 과감하게 강동우를 두산으로 트레이드하고 백업이나 2군 선수로 전락해 있던 김창희, 강봉규를 트레이드 해 온다.

김창희는 외야 수비에 대한 보강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강봉규는 거기에 딸려간 형세였다. 두산은 주전 중견수였던 그 녀석이 이미 2년 전에 사라진 데다가 장원진이 2005년을 끝으로 사실상 경기에 거의 출장하지 못하게 되고 전 시즌 3할 타자였던 임재철도 불의의 사건으로 팀을 잠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야말로 외야 두 자리가 사라진 시점에 강동우에게 1번 타자를 맡기려 할 정도로 기대를 크게 품었다.

그러나, 오히려 전 해 현대에서 방출당하고 겨우 12월 말에야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한 모 국가대표 1번타자가 갑툭튀하면서 엄청난 내야안타를 바탕으로 도루왕[30]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대로 강동우는 안 그래도 시원치 않았던 성적이 부각되어 그 시즌을 망치고 2007 시즌 후 트레이드를 통해 KIA로 다시 쫓겨나게 된다.[31]

반면 삼성은 김창희가 오면서 2006~2007년의 외야 수비는 대체적으로 안정적이었고 심정수의 공백으로 생긴 우타 외야수 공백을 일단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강봉규 역시 2007년부터 출장 빈도를 크게 늘려가서 2009년 20-20을 올리며 포텐을 터뜨리고 무엇보다 2011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이 직접 결정적인 한방을 날렸다. 반박할 수 없는 삼성의 완승.

8.3. 최경환 최준석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2006.05.17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최경환
이승준
최준석
김진수

두산 화수분야구의 일원이었던 최경환은 롯데에서는 두산 시절의 명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승준도 별 활약 없었다. 반면 두산은 최준석이 2009년부터 대활약을 하면서 김현수, 김동주와 함께 두산의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었고, 김진수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4포수까지 밀렸지만 일찌감치 코치 수업을 받고 나름 괜찮은 평을 들으며 두산에서 꽤 오래 코치로 재직중이다. 두산의 완승.

이후 최준석은 2013 시즌 후 FA를 통해 친정팀 롯데로 돌아왔다.

8.4. 조현근 김덕윤

트레이드 일자 2006.07.12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조현근 김덕윤

이 트레이드로 조원수박차가 탄생되었다. 아직은 유망주였던 둘을 트레이드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둘 다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김덕윤이 1군에서 별다른 임팩트를 남기지 못한 것에 비하면 1군에서 더 오래 갔던 조현근을 데려간 삼성이 더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을듯.

8.5. 강영식 신명철

트레이드 일자 2006.11.21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강영식 신명철

만년 유망주 간의 트레이드이다.

신명철 2009년 20-20 클럽에 가입하는등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고 강영식 또한 이적 후 오랫동안 셋업맨으로 활동하며 100홀드 이상을 달성하게 되는 윈윈 트레이드.

9. 2007년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화이트).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 - 채종국 이윤학
- - 조중근 강동우
- - 1 / 1 1 / 1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나주환
강동우
이대수
조중근
박석진
손인호
최길성
최만호
이대수
이윤학
나주환
채종국
최길성
최만호
박석진
손인호
2 / 2 2 / 2 2 / 2 2 / 2
Out In

9.1. 이대수 나주환

트레이드 일자 2007.04.29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이대수 나주환

손시헌의 입대로 유격수 공백이 생긴 두산 베어스에서 나주환으로 그 공백을 메워보려 시도했지만 나주환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SK의 이대수와 트레이드했다.[32] 이대수는 손시헌이 군대에 가 있는 2년 동안 그 공백을 잘 메워주며 쏠쏠한 활약을 보였고 나주환은 SK 이적 후 포텐을 터뜨리며 SK의 주전 유격수가 되었다. 양 팀 입장에서는 윈-윈 트레이드이다.

이후 손시헌이 제대한 뒤 이대수는 길 터주기 트레이드로 한화로 갔다가 트레이드로 다시 SK로 가서 나주환을 만났다.

9.2. 조중근 채종국

트레이드 일자 2007.05.20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조중근 채종국

현대의 베테랑 내야수 채종국과 SK의 20대 중반 1.5군 유망주 조중근을 교환한 트레이드.

채종국이 부진한 활약으로 1년만에 방출당했으나 조중근도 오래 남아있었을 뿐 눈에 띄는 성적은 기록하지 못하면서 잊혀진 트레이드.

참고로 이 둘은 14년 뒤 kt에서 코치로 만나게 된다.

9.3. 최길성 박석진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2007.07.29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최길성
최만호
박석진
손인호
당초 이성열을 요구했다.

LG의 백업 외야수였던 최길성최만호는 롯데로 넘어가고서 3년을 넘지 못하고 방출당했다.

롯데의 베테랑 투수 박석진은 LG로 넘어간 후 별다른 활약 없이 다음 해 은퇴했다. 그나마 이 트레이드에서 오래 뛴 선수가 LG에서 백업 외야수로 2012년까지 뛴 손인호일 정도로 언급할 여지가 적은 트레이드.

9.4. 강동우 ↔ 이윤학

트레이드 일자 2007.11.0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강동우 이윤학

강동우는 KIA에서 망하고 1년만에 재트레이드되었고 이윤학도 두산에서 망해버리며 루즈-루즈 트레이드가 되었다.

10. 2008년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채종범
이성우
김형철
이재영
김용의
신종길
심광호
유용목
이여상
전병두
김연훈
이성열
최승환
강동우
이여상
손지환
심광호
3 / 2 2 / 2 2 / 2 2 / 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서울 히어로즈 엠블럼.svg
이성열
최승환
- 손지환
전병두
김연훈
강동우
-
이재영
김용의
- 유용목
채종범
이성우
김형철
신종길
-
2 / 2 - 4 / 5 -
Out In

10.1. 손지환 유용목

트레이드 일자 2008.01.17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손지환 유용목

손지환은 그닥인 성적으로 1년만에 방출되고 유용목은 2군 붙박이로 전락하며 승자가 없는 트레이드.

10.2. 이여상 심광호

트레이드 일자 2008.04.04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이여상 심광호

이여상은 한화에서 시원찮은 성적이었지만 나름 주전 자리를 차지한 시즌도 있었다. 반면 심광호는 끔찍한 수비 능력으로 현재윤이 복귀하자마자 2군으로 내려갔고 다음 해 방출되었다.

10.3. 전병두 채종범 등 2대3

트레이드 일자 2008.05.04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전병두
김연훈
채종범
이성우
김형철

김성근 감독의 트레이드 중 드물게 성공한 트레이드이자 조범현 감독이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팬들에게 까이는 이유 중 하나. 그리고 이 트레이드 후 감독을 잘못 만난 전병두의 선수인생에 대해서는...

SK로 간 전병두는 이미 심각한 혹사로 망가진 상태로 왔고 두 개의 근육으로 제구력을 장착 후 반짝 잘 던지다가 또 망가져서 재기에 실패했지만, 짧게나마 엄청난 임팩트를 선보이며 본인이 가진 잠재력을 확연히 드러냈다. 같이 넘어간 김연훈은 미미하게 백업으로 활동하다 kt wiz로 넘어갔지만, 전병두 한 명만으로 SK는 확실한 이득을 봤다.

반면 기아로 간 멤버들 중 김형철은 백업으로 조금 나오다가 박기남 영입 후 완전히 밀려나고 조용히 방출되었고, 이성우는 백업으로 가늘고 길게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SK로 돌아갔다. SK로 돌아간 후 백업 포수 역할로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익을 담당한건 덤. 그리고 메인 칩이라고 볼 수 있는 채종범은 공익근무 후 생긴 공백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그럼에도 조범현 감독이 꾸준히 기회를 주면서 60경기에 출전했고, 이로 인해 당시 기아 팬들에게 조범현의 양아들 소리를 들으며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이후 2009년에는 시범경기에서 수비 도중에 무릎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고, 2010년에도 재기에 실패하며 결국 2011년을 끝으로 방출, 은퇴했다. 명확한 SK의 승리.

물론 이러한 비판도 결과론적 관점이고 당시 관점에서는 어느정도 할만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전병두는 KIA 타이거즈에서 계속 기회를 줬지만 어깨 부상과 새가슴, 그리고 고질적인 제구 문제가 전혀 나아지지 않아 참 애매한 선수였다. 그리고 김연훈은 KIA에 있을 당시 타격에서는 자동 아웃카운트 판매기였고 수비 면에서는 내야 전 포지션 소화가 가능했지만 말 그대로 소화만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더군다나 당시 기아에는 김종국, 김선빈, 이현곤, 홍세완, 안재만, 최용규, 발데스 같은 내야수들이 있었던터라 내야수의 숫자가 넉넉한 편이었고, 김연훈은 루키 시즌 이후 군대를 가려다가 미룬 상태. 또한 당시 KIA는 주전 포수였던 김상훈이 부상을 당해 전반기 시즌 아웃을 당한 상황에서 송산도 영 못미더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스크를 쓸 만한 1군급 포수가 차일목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절대적으로 부족한 포수 자원 문제로 트레이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트레이드는 결과로 말하는 것인 만큼, 전병두가 SK에서 포텐을 터뜨리고 채종범이 골골대다가 망한 상황에서 기아가 이 트레이드로 비판받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한 내야진도 양적으로는 풍부했지만, 발데스는 타격 부진으로 퇴출, 김종국은 노쇠화, 이현곤은 2007년의 플루크가 끝나고 원상복귀 등 기존 1군 주전급 선수들조차 하나씩 약점이 있었으며, 홍세완은 무릎 부상으로 아예 전력 외였고 안재만도 더 이상 1군에서 쓸 기량은 아니었으며, 최용규는 루키라서 다듬을 곳이 많았다. 오죽하면 고졸신인 김선빈이 그나마 괜찮아서 OPS 0.6 넘기고도 주전을 꿰찼을 정도인데, 그런 상황에서 김연훈을 내보낸 선택은 지금같으면 안그래도 괜찮은 내야수 없는데 유망주를 또 내보내냐고 욕먹기 딱 좋았다. 물론 반대급부로 김형철을 받아왔다지만, 이미 20대 후반에 접어드는 노망주라서 기대치는 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애매했다 하더라도 WBC 대표팀까지 다녀오고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는 만 24세의 좌완 파이어볼러를 주면서, 받아온 선수가 만 30세를 넘어서고 공익근무 여파로 기량도 영 신통치 않았던 선수라는 점에서 이건 애초부터 기아가 트레이드를 잘못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전병두 정도 실링의 선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썼다면 적어도 메인 칩으로 채종범보다는 더 좋은 선수를 받던지, 아니면 포수를 원한다면 채종범을 포기하고 이성우보다 더 좋은 포수를 어떻게든 찔러봤어야 한다. 결국 SK의 잉여 자원 세 명만 떠안으면서 전병두를 헌납하는 최악의 선택을 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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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이성열 이재영 등 2대2

트레이드 일자 2008.06.03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이성열
최승환
이재영
김용의

두산이 그런대로 쏠쏠했던 트레이드. 이성열은 2010년 토종 타자 20홈런 5인방으로 맹활약 했으나 2012년에 넥센으로 트레이드 되었고 2016년에는 한화로 또 트레이드된다. 최승환은 2009년까진 괜찮은 활약을 했다. 다만 LG도 실패한 건 아닌 게 김용의가 대주자로 잘 쓰인데다가 2016년에는 1번 타자로 괜찮은 활약을 했다.

10.5. 강동우 신종길

트레이드 일자 2008.10.20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강동우 신종길

강동우의 지난 몇 년간 성적이 나빴던데다 20대 중반의 유망주와 30대 중반의 노장 간 트레이드였다 보니 발표 당시까지만 해도 또 유망주를 내주고 노장을 데려오냐며 한화 팬들은 김인식 감독과 구단을 깠다.

하지만 강동우는 2009년 한화에서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하고 맹활약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2013년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한화가 더 이득을 본 트레이드라 볼 수 있으나, 반대로 KIA로 넘어간 신종길 역시 주전 시즌도 있는 등 가늘고 길게 KIA 외야진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양팀 모두 윈-윈이라고 볼 수 있는 트레이드.

11. 2009년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파일:두산 베어스 심볼(1999~2009).sv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9~2017).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 채상병
이대수
금민철
- 지승민
김상수
박성훈
- 지승민
조규수
김창훈
이현승
- 채상병
장원삼
- 3 / 4 - 3 / 2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파일:서울 히어로즈 엠블럼.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조규수
김창훈
강철민 이택근
이현승
장원삼
김상현
박기남
박영복
강병우
이대수 김상현
박기남
박영복
강병우
금민철
김상수
박성훈
강철민
이택근
2 / 1 1 / 2 3 / 5 4 / 2
Out In

2009년의 히어로즈 구단은 2008년 7월 메인 스폰서였던 우리담배가 스폰서 계약을 해지하는 등 여러 문제로 운영 자금이 궁한 상태였다. 결국 구단 운영비를 모으기 위해 '주축선수 ↔ 유망주, 현금' 트레이드들을 여러 차례 단행했고, KBO 가입금을 완납한 2009년 12월 이후 승인이 되었다. 그런데 훗날 대부분 뒷돈이 오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1.1. 강철민 ↔ 김상현, 박기남

트레이드 일자 2009.04.19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김상현
박기남
강철민

LG는 투수가 필요했고[33] KIA는 강타자와 내야유틸이 필요해서 이뤄진 트레이드.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역사에 남을 희대의 트레이드가 되는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상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1.2. 채상병 지승민

트레이드 일자 2009.07.1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채상병 지승민

당장은 두산의 이득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아니 11시즌만 봐도 삼성이 이득을 본 트레이드. 이유는 지승민 문서 참조.

11.3. 이대수 조규수, 김창훈

트레이드 일자 2009.11.16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이대수 조규수
김창훈

이대수 길 터주기 트레이드의 성격이 강하다.[34] 당시 주전급 유격수가 넷[35]이었던 두산은 팀에 공헌도가 높았던 이대수를 한화로 보낸다. 반대급부로 받아온 선수들이 한 때는 포텐셜이 고평가 받았지만 저 당시에는 이미 망한지 한참이던 조규수와 부상으로 인해 몇년간 1군에서 모습을 보이지조차 못한 김창훈. 애초에 트레이드 목적 자체가 길 터주기인지라 두산도 그냥 로또 긁는 심정으로 실링이 낮은 지나간 유망주들만 데려왔다.

결과적으로 한화로 이적해 주전으로 자리매김한 이대수는 2011년 맹활약으로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또 한 편의 신고선수 드라마를 작성했고, 두산으로 이적한 조규수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고 김창훈은 좌완 사이드암으로 폼을 바꿔 몇 년정도 1군에서 간간이 나왔지만 뚜렷한 임팩트는 남기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당연히 한화의 승리지만 앞서 말했듯 목적 자체가 길 터주는 용도고 두산도 애초에 좋은 선수들을 받아온 것도 아니라서 트레이드 이후의 득실이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11.4. 이택근 박영복, 강병우, 38억

트레이드 일자 2009.12.30
파일:서울 히어로즈 엠블럼.sv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이택근 박영복
강병우
38억원
히어로즈의 선수 팔이 트레이드 중 하나. 트레이드 후 활약상을 단순 수치만 놓고 비교하면 어쨌건 LG가 나아보이지만, 실상은 LG 입장에서 손해만 보고 실리는 히어로즈가 챙긴 트레이드다.

이때 LG로 간 이택근은 1루수로의 포지션 변경과 잦은 부상으로 2년간 큰 임팩트를 남기지 못하더니, 2011시즌 후 FA 자격을 획득해 히어로즈로 돌아가 LG 팬들에게 비수를 꽂아 넣었다. 애초에 당시 LG 외야는 포화 상태였는데 내야수나 투수를 보강할게 아니라 굳이 이택근을 좋다고 데려갔으니 처음부터 타겟 설정을 잘못 한 셈. 여기에 훗날 13억원의 뒷돈이 끼어있었음이 확인되면서 LG는 2년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선수를 위해 38억을 투자한 꼴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만년 2군 본즈가 이택근이 합류해 1루로 들어가면서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고, 2년 후 넥센으로 트레이드돼 잠재력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11.5. 이현승 금민철, 30억

트레이드 일자 2009.12.30
파일:서울 히어로즈 엠블럼.svg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1999~2009).svg
이현승 금민철
30억원

히어로즈의 선수팔기 시리즈 두번째. 수많은 두산 팬들의 기대 속에 잠실에 입성한 이현승은 트레이드 이후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군대로 가며 '10억 군인'[36]이라고 까였다. 같은 시기 반대급부로 히어로즈로 간 금민철이 첫 시즌 반짝 활약을 하면서 히어로즈가 의외로 웃나 싶었으나, 이후 원래 모습으로 롤백되며 2017년까지 변변찮은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현승은 제대 이후 마무리와 불펜으로 성공적으로 자리잡고, 끝내 2015년, 2016년 두산의 우승 주역이 되었으며 2021년까지 두산에 빛과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며 두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금민철은 2018년 2차 드래프트에서 kt wiz의 지명을 받아 이적한 뒤, 개인 최다 이닝 투구와 최다승을 기록하였으나 그게 끝이고 얼마 안가 방출되었다.

11.6. 장원삼 김상수, 35억 등 1대2

트레이드 일자 2009.12.30
파일:서울 히어로즈 엠블럼.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장원삼 김상수
박성훈
35억원

1년 전 KBO한테 거절당했던 트레이드를 현금 10억을 낮춰서 20억원을 보내고 선수도 김상수를 추가하는 트레이드 조건으로 다시 단행했다. 물론 실제 삼성이 이장석에게 준 금액은 35억으로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결과적으로는 윈-윈 트레이드의 사례로 꼽을만한 트레이드. 삼성은 장원삼 영입으로 무너진 선발진을 재건, 2010년부터 2010 시즌 준우승 및 이후 2011년부터 통합 4연패를 달성했으며, 장원삼도 왕조의 주축 투수로 돈 아깝지 않은 활약을 했다. 비록 노쇠화로 인한 구속 저하로 2014년부터 부진의 조짐을 보이고 그 다음해부터 5점대 이상의 ERA를 기록하며 먹튀가 되긴 했지만 2010년대 삼성 왕조를 논할때 절대 빠질 수 없는 핵심 선수인 건 부정할 수 없다. 넥센은 박성훈을 2012년 단 한해 뿐이었지만 필승조로 잘 써먹었고, 김상수는 군대를 갔다온 이후 2016년부터 필승조로 자리잡으며 팀 불펜의 필수불가결한 선수가 되었다. 당시 궁했던 팀 예산 확보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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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연감에서는 이들 모두 트레이드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2] 송유석은 소속팀 LG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고 연봉 문제는 구단에 일임한 채 FA를 선언했다고 밝혔으나 LG 관계자는 FA 신청했으면 팀 떠나겠다는 거 아니냐고 주장하며 송유석에게 다른 팀 알아보라고 전했다. [3] 당시 해태에는 지난해 100이닝 이상 던진 투수만 7명이 있었을 정도로 나름 풍족했고 좌완 투수로는 오철민이 상당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기대주 강영식도 입단했던 시기였다. [4] 이강철의 삼성 이적에 따른 반대급부 박충식은 재활중이었다. [5] 이 트레이드 11년 후에는 LG가 투수력 보강에 눈이 어두워 이호준을 뛰어넘어 이승엽의 오른손 버전이라 할 수 있는 KBO 역사상 최고의 오른손 거포를 트레이드하는 대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심지어 이 최악의 트레이드는 뒷돈으로 15억원까지 준 트레이드였다. [6] 2001년 6월 13일 잠실 두산전에서 연장 10회초 당대 최고의 마무리 진필중을 두들겨 4점을 뽑아내고도 10회말 수비에서 아웃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하고 5점을 내주는 대역전패를 당한 사건. 이 1패에 발목을 잡혀 이 해 타이거즈는 단 반게임 차로 한화 이글스에게 포스트시즌 티켓을 내주었다. [7] 호세 페르난데스, 이호준, 박경완, 최정, 제이미 로맥, 한동민 [8] 더군다나 30홈런을 2년 연속으로 달성한 선수는 이호준, 최정, 로맥 등 3명밖에 없다. [9] 그나마 김상현은 원래 해태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2002 시즌 중반 LG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009 시즌 초 KIA로 재트레이드되었고, 1998년 해태의 1차지명 선수였던 최희섭은 해태 입단을 거부하고 대학진학 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가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KIA에 입단했다. [10] 그러나 2009 시즌의 김상현과 최희섭 이후 KIA 타자들 중에서 시즌 3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이범호(2016년)와 프레스턴 터커(2020년)가 유이하고, 그나마 각각 타팀에서 FA 영입한 선수와 외국인 선수이다. 다시 말하면 21세기 들어 KIA가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뽑은 타자들 중에서 시즌 30홈런 이상 타자는 전무하고, 20홈런 이상 타자도 나지완 안치홍 정도이다. [11] 1999년 이승엽에게 KBO 사상 첫 시즌 50홈런의 허용투수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고교시절 초고교급 투수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미 프로에 올당시 어깨가 완전히 간 상태였다. 이런 투수를 김성근이 굴리고서는 폐품 취급하며 KIA로 넘긴 것이다. [12] 처음에는 1루수, 그 이후에 유격수, 3루수, 그리고 외야수를 왔다갔다했다. 외야수로 포지션이 고정된 때는 공익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007년부터다. 그러나 여전히 팀 사정상 1루수 포지션을 병행하면서 뛰었고, 내외야를 오가면서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행동(도루 등)을 많이 했기 때문에 부상도 잦았다. [13] 사실 정현택은 선크림 사건 등 온갖 기행으로 구단에 단단히 찍힌 상태였다. [14] 단, 김동수는 2002 시즌 후 방출되었으며, 김태한 김상진은 2003 시즌 후 방출되었다. 이용훈은 2003 시즌 중 김영수를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15] 김상현은 이 시리즈 직전인 28일 LG와의 잠실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이상훈을 상대로 동점 홈런을 쳤다. [16] 7월 트레이드 [17] 12월 트레이드 [18] 7월 트레이드 [19] 12월 트레이드 [20] 연감에서 무상트레이드일 경우에는 *조건없음이라고 따로 표시한다. 참고로, 웨이버 공시 후 트레이드일 경우, 웨이버라 따로 표시하며, 현금 트레이드일 경우에는 구체적인 액수나 현금이라 따로 적지 않고 선수가 이적한 것만 기록한다. [21] 당시 구단이 해태 산하에서 기아자동차로 인수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신인 김진우에게 계약금으로만 7억을 안겨주고,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박재홍과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해태 시절에 비해 모기업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자 해태 때부터 응원해 왔던 타이거즈 팬들의 기대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22] 이 당시 삼성은 타자 친화적인 홈구장의 이점을 적극 활용해 부족한 투수진의 공백을 장타력을 앞세워 공격으로 메꾸는 적극적인 공격야구를 했었다. 클린업 트리오에는 이마양이 버티고 있었고, 실제로 공격야구를 앞세워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2002년에는 주전 라인업 중 강동우, 박정환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모두 두 자릿 수 홈런을 치는 등 공격력은 타 팀에 비해 상당히 월등한 팀이었다. [23] 여기서 그 유명한 롯데보다 더 X같은 팀은 처음 본다는 말을 남겼다. [24] 그나마 최진행이 있지만, 이마저도 약쟁이였다. [25] 그나마 황윤성은 2005년 대타 요원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긴 했다. [26] 5월부터 나왔음에도 순수 불펜으로 85이닝을 던졌다. [27] 그러나 정작 개막전에 LG를 상대로 세이브를 거뒀다. [28] 이 당시 한화는 2군 구장도 없어서 대전고나 계룡대에서 경기를 해야했을 정도로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29] 사실 박재홍은 타이거즈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 출신임에도 연세대 졸업 후 해태 입단을 거부하고 지명권 트레이드를 통해 현대에 입단하는 과정이 영 매끄럽지 못했고, 고향팀을 등졌다는 이유로 광주 원정을 갈 때마다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 거기에 해태 시절부터 내려오던 김성한 구타 사건으로 대표되는 당시 KIA의 센 군기와 권위적인 분위기 등도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박재홍과 완전히 상극이라 KIA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30] 이종욱의 도루왕 시즌은 1번으로, 이 때가 유일하다. 그 이후는 알다시피 옆 동네에서 탕수육 쿠폰 수집가가 튀어나오면서... 다만 도루를 제외한 타격이나 수비 성적은 2006년 이후가 더 좋았다. [31] 강동우는 KIA에서 역시나 폭망하면서 2008년 시즌 종료 후 신종길과 트레이드되어 한화로 이적했고, 한화에서 부활하여 2013년까지 생각보다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32] 일각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자신의 송구 지도에 불응한 이대수를 탐탁치 않게 여겨서 트레이드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대수 본인이 이를 부인했다. [33] LG가 3루수 정성훈을 영입하면서 자리가 없어진 김상현의 처리 혹은 길터주기 차원도 있었다. [34] OB 베어스 시절 선배였던 김경문이 후배 한대화의 감독 취임을 기념해 보낸 일종의 선물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물론 주 목적이 이대수의 앞길을 터주기 위했음임은 변함이 없다. [35] 주전이었던 손시헌, 백업에 1차지명 선수인 김재호, 보상선수로 온 이원석. 이 중 이원석이 3루로 전향했다지만 손시헌과 김재호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이대수는 결국 09시즌 대타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36] 당시에는 두산이 히어로즈로 보낸 현금이 30억이 아닌 10억으로 축소발표 되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