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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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구마모토번주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 Katō Kiyoma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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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2년
7월 25일 (에이로쿠[1] 5년 음력 6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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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도카이도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 (現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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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1년
8월 2일 (향년 49세) (게이초[2] 16년 음력 6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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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히고국 구마모토번 구마모토성 (現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구마모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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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혼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구마모토번주 | |||
1587년 ~ 1611년 8월 2일 | ||||
신분 | 다이묘 | |||
최종관위 |
종4위하 (생전) 종3위 (1910년 추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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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 | 浄池院殿永運日乗大居士 | |||
씨족 | 가토씨 | |||
부모 |
아버지 가토 기요타다[3] 어머니 이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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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정실 야마자키 가타케무스메 계실 세이조인(清浄院)[4], 혼카쿠인(本覚院), 조코인(浄光院), 쇼오인(正応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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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도라쿠마(虎熊), 혼조인(本浄院), 다다마사(忠正), 다다히로(삼남), 케에린인(瑤林院), 기다 마사카쓰(貴田正勝), 햐쿠(百助) 등 | |||
신체 | 5척 3촌(약 161cm) | |||
종교 | 불교 ( 일련정종) | |||
경력 |
종5위하 주계두 임진왜란 제2군 사령관 종5위상 시종 종4위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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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5]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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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도라노스케(虎之助),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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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히고국(오늘날 규슈의 구마모토현)의 다이묘이다.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랑 함께 일본군의 선봉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장수이다. 대개 '가토 기요마사'라면 잘 모르는 중노년 한국 세대도 '가등청정'이라 하면 알아듣는다. 풍신수길, 이등박문처럼 예전에는 일본 인명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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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의 갑옷 |
1562년 대장장이였던 가토 기요타다와, 세이베에(清兵衛)[7]의 딸 이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요마사의 아명은 원래 야샤와카(夜叉若)였는데, 야샤와카가 어릴 적 아버지 기요타다가 일찍 죽고 만다.
어머니 이토는 어린 야샤와카를 데리고 일족인 카지야 고로스케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인연이 닿게 된다. 히데요시와 기요마사의 혈연 관계는 2중으로 얽혀 있는데, 본래 야샤와카의 어머니인 이토는 히데요시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의 사촌[8]이었고 이토와 야샤와카가 의탁한 가지야 고로스케의 부인은 가지야 세이베에의 양녀였기에 야샤와카에게는 이모가 되었고, 그녀와 히데요시의 정실부인 네네[9]는 자매 사이였다. 또래 중에서는 꽤나 명석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야샤와카가 밑바닥에서 시작했기에 가신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포착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야샤와카는 1575년 즈음에 겐푸쿠(성인식)를 마치기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겐푸쿠를 마치고 그 유명한 가토 도라노스케 기요마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와 함께 170석의 영지를 하사받으며 평생의 첫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시즈가타케의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3천 석을 받는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큰 공을 세웠던 시동 출신의 무장 7인을 '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부른다.[10] 평민 출신이라 후다이[11] 가신이 없는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버프를 받아 쑥쑥 석고가 증가했고, 규슈 정벌 이후에는 히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 석의 다이묘가 된다. 이 때까지의 경력을 살펴보면, 도요토미 직할지인 하리마, 이즈미의 대관(관리인)직, 사누키의 임시 총독직, 그리고 히고 다이묘직이다. 또한 전투에 있어서도 실제 그가 맡은 보직들은 대부분 후방 지원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근년 연구의 결과이다. 즉 기요마사의 초반 경력은 무장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행정관의 그것이었으며, 히데요시가 그에게 기대한 것은 도요토미의 무장이 아닌, 내정관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히데요시 세력의 최측근 호위가문이자 칠본창의 차석으로써 행동대장 역할을 많이하였으며 히데요시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이 시기에 이시다 미츠나리와 충돌이 잦아서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2.2. 임진왜란 초기, 선봉을 맡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조선으로 쳐들어왔는데, 사실 한성에 가장 처음 입성한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12]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문서를 교묘하게 꾸며서 누가 먼저 들어왔는가 하는 부분은 교묘히 빼놓고 자신의 사자를 잽싸게 보내서 공적을 위조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정을 탄핵하자, 예전부터 우등생처럼 히데요시 옆에 붙어서 정무를 도맡아하는 미츠나리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던 터라 이후 사이가 더욱 악화되어 원수지간이 되었다.개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고니시 군과 함께 하였고 그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여 국경인, 국세필 등의 순왜들과 내통하여 선조의 서자인 임해군과 순화군도 사로잡았으며[13] 가토는 이 공로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을 내린다.[14]
더불어 조선인 약 2천 명과[15] 함께 두만강을 넘어 현 중국의 용정시에 있었던 여진족 노토 부락(老土部落)[16]을 공격하여 성 하나를 점거한다. 이는 일본사에서 최초로 만주에 진출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진족이 기병을 보내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두만강을 넘어 다시 조선으로 철수했다. 이후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당시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와 벌인 북관 대첩에서 패전하고 함경도의 혹한으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천 명에 이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데다가 명군이 참전하면서 할 수 없이 철병하였다.
2.3. 임진왜란 후기, 축성의 달인이 되다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을 공격했으나,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와 벌인 전투에서 패전하여 현재의 울산광역시 학성에서 왜성을 쌓고 버텼다.이때 선조의 명령을 받고 출진한 이순신이 가토를 노리고 있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상륙을 완료하여 이순신이 발길을 돌렸고, 귀환 도중에 가덕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병사 5명이 납치되고 동행하던 아이 1명이 살해당하자 가덕도에 축성된 성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포로도 돌려받은 뒤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17]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자군의 시체를 뜯어먹고 말피를 마시는 처참한 농성을 벌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나는 여기에서 할 테니 귀공은 그 곳에서 하시오."라는 서신을 보냈을 정도로 할복하기 직전까지 몰렸으나 결국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데 성공하여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 때 가토 역시 도망 과정이 순탄치 않았는데 물자나 부상병들을 싸그리 다 버리고 걸을 수 있는 병력들만 데리고 몸만 도주했다. 이순신에게 잡히면 끝장이기 때문에 1초라도 빨리 도망가야만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축성술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구마모토 성을 지은 조선인 포로들이 바로 이들이다.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견성 구마모토 성은 임진왜란에서 귀환한 뒤인 1601년부터 개축하기 시작하여 1607년에 완공했는데 울산에서 농성하다가 겪은 굶주림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출타시 도시락을 항상 싸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고 성 내의 건물에 까는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하도록 토란 줄기를 넣고 짜도록 했으며 성벽에는 조롱박을 심어 도배를 해버리고 성 안의 우물은 무려 120개나 팠다고 한다. #[18] 이런 특이한 건축 때문인지 에도 후기에는 병학자들에게 '기요마사류'라는 이름까지 부여받으며 독자적 양식으로 평가받았다.[19]
그러나 정작 가토 가문이 구마모토 성의 다이묘 노릇을 한 건 본인과 아들까지 해서 2대 44년뿐이고 그 이후에는 에도 막부의 유력 다이묘 숙청 중 하나로 개역당해서 구마모토 성은 호소카와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구마모토 성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세이난 전쟁 중 벌어졌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군이 성에 주둔한 정부군을 포위하고 대포 수십여 문을 끌고와 천수각, 망루, 식량창고를 포함한 내부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함락에 실패하여 난공불락의 명성을 증명해주었다. 전투 이후 사이고는 "우리는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 공[20]에게 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징비록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철군 과정에서 고니시를 가토가 지원했는데,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우리 장수를 버리고 가는 것은 나라의 수치"라는 이유에서 고니시를 지원했고, 이에 고니시가 "이후로는 공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으나, 가토가 "공과 나는 가는 길이 달라 친해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2.4. 임진왜란 이후
가토가 철군하여 일본에 돌아왔을 때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죽은 후였다. 오대로가 사기를 고려해 비밀에 부치고 퇴각을 명령했던 것이다.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가 싫어하고 정말 융통성이라고 1도 없던 오봉행 중 하나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정권을 잡게 된다. 기요마사가 미츠나리를 싫어하게 된 건 다름 아니라 임진왜란에서 가토 자신이 고니시보다 먼저 한성을 점령한 것처럼 사기를 치려했다가, 미츠나리에게 이를 간파당하고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다.[21] 게다가 전쟁으로 영지 운영할 곳간마저 거의 비어있다보니 참전한 중소규모 다이묘들은 이를 채우기 위해 고쿠다카를 살짝 속였으나 미츠나리는 이는 엄연한 비리라며 다 찾아내며 때려잡으니 불만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분란을 중재하던 마에다 토시이에까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잡아 죽이려고 길길이 날뛰었고, 미츠나리의 자택에 쳐들어갔으나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서게 된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의 적장이라서 그를 비하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를 '배신자'로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본측 시각은 이와 다르다.
기요마사를 옹호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기요마사가 동군에 서게 된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를 끔찍히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것. 평소 마음에 안 들어했던 데다가 히데요시가 남기고 간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를 둘러싸고 앞으로 정치를 중앙집권화 및 오봉행이 주도하겠다는 선언으로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를 이용해 권력을 전횡하는 '간신 미츠나리'를 제거하려고 이에야스 편을 든 것이지, 딱히 도요토미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22]
실제로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비대해진 도쿠가와 가문을 지켜보면서 기요마사는 자신이 도쿠가와의 야심을 얕봤다는 생각과 함께 도요토미 가의 존속을 위해 진력했다. 또한 배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애당초 세키가하라 전투의 실상은 도요토미 가신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분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오대로의 한 명으로 도요토미 가문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고 정이대장군(쇼군)이 되고 에도 막부를 연 것은 3년 후의 일이다. 이시다 미츠나리 역시 오봉행의 선두로 도요토미의 측근 부하였다. 다만 가토를 중심으로 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랜 부하들로 구성된 무장들의 파벌과, 히데요시가 오우미에서 새로 획득한 인재들로 행정능력이 뛰어나서 중용되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파벌과는 견원지간의 사이라서, 가토가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3]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51만 석의 대 다이묘가 된다. 기존의 17만석에 고니시의 24만 석 및 기타 영지를 가증받은 것이다. 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규슈에서의 싸움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자, 이 소식은 규슈로 전해지고 서군 편을 들던 다이묘들이 동군 쪽으로 돌아서고 동군의 승리로 결착이 났다.
그는 새로운 영지 개발을 위해 하천공사에 주력했다. 현재의 구마모토 평야는 기요마사의 새 영지 개발 정책이 그 바탕이 되었다. 또 하천의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기요마사는 열렬한 일련정종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영내에 일련종 사원의 건립과 크리스트교 신자, 심지어 일련정종이 아닌 다른 불교조차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다.[24]
고니시라는 라이벌의 소멸이 뭔가 가슴에 와 닿는게 있었는지, 고니시 가의 가신들을 많이 흡수했다. 또한 고니시의 우토 성에서 탑 하나를 옮겨다가 자신의 구마모토 성 한켠에 세우고 "우토 탑(우토야구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요마사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일화로,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토 탑은 구마모토 성 건립 당시부터 있었으며, 옛 고니시 가 가신들이 이 구역에 모여서 그렇게 불린 것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가에 충성을 지키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자신의 영지였던 구마모토 성에 별실을 만들어서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히데요리를 이곳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고, 구마모토에서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까지 3일 만에 갈 수 있는 바닷길을 정비했다. 1611년 3월 28일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회견할 때는 품에 단도를 숨기고 히데요리를 보호하고 무사히 회견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것으로 주군이었던 히데요시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안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611년 6월 24일 병으로 사망했다.[25]
2.5. 오사카 전투 이후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움켜진 후에는, 서서히 몰락했다. 도쿠가와 막부에게 가토 기요마사는 여전히 전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이었고, 도쿠가와 가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도쿠가와 가문이 가토 가문을 몰락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1601~1653)는 1632년 막부 주도하의 2차 개역 작업에 휘말려 영지를 몰수당했다. 당장은 데와 마루오카 번 1만 석을 새로 부여받았으나 그것도 사실상 쇼나이 번의 간접지배를 받는 영지라 이름만 영주였으며, 21년 뒤 그가 사망하자 막부는 그 영지를 쇼나이 번에 정식 편입시켜 가토 가문의 개역을 완료하였다. 그래도 자손들은 더이상 숙청당하지 않은 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도 일본에 생존해 있다.[26]
3. 여담
-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중 조선의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917년 말에 한반도에서 호랑이 원정 사냥을 행한 일본 제국의 사업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사냥의 성과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진중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한 무장'이라며 가토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자신의 사냥을 기념하며 출간한 서적인 <정호기(征虎記)>의 표지로도 가토를 연상시키는 '편겸창(片鎌槍)을 든 무사' 그림을 사용하는가 하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 배가본드>에서도 호랑이의 가죽을 한 일화로 다루는 등 창작물에서도 가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확고하다. 가토가 호랑이의 고환을 특효약이라고 여겨 불임을 앓던 도요토미에게 바치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 가토가 임진왜란 당시 호랑이를 사냥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호랑이를 사냥한 가토 기요마사'라는 인식은 가토를 영웅화하는 후대의 창작물들로 공고해진 것으로 확인된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중 자신에게 호랑이를 사냥해 바친 장수들에게 자신이 서명한 주인장(朱印狀)을 하사했다. 실제로 주인장을 하사받은 것이 확인되는 장수들로 가메이 고레노리, 깃카와 히로이에, 시마즈 요시히로와 시마즈 타다츠네 부자,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존재하나 가토는 주인장을 받은 바 없어 가토가 호랑이를 사냥해 도요토미에게 바쳤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볼 수 있다.[27] 또한 검은 옻칠이 된 크고 작은 동물 두개골 2점이 가토가 사냥한 호랑이의 것으로 전해지며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나 큰 두개골은 코뼈 부분이 실제 호랑이의 두개골과 달리 앞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는 등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 정황이 있고, 작은 두개골은 전체적인 형태가 호랑이의 두개골보다 표범의 두개골에 가까운 형태이다. 도쿠가와 미술관 측은 해당 두개골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인 가토 다다히로가 데와국(出羽国)의 성으로 유배될 때까지도 휴대했던 것이었으나 다다히로의 딸이 하타모토(旗本)였던 아베(阿部) 가로 시집갈 때 지참하여 다른 가문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큰 두개골은 1934년 도쿠가와 가가 구입, 작은 쪽은 치바현 모 가문에 보관되다 1971년 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해당 두개골들이 가토가 호랑이를 사냥했음을 명확히 입증하지는 못한다.[28] 가토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140년이 지난 1739년에 집필된 일화집인 <상산기담(常山紀談)>으로, 자신의 시동(侍童)인 고즈키 시젠(上月左膳)이 호랑이에게 죽자 가토가 조총으로 호랑이를 쏘아 죽여 복수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1797~1802년 집필된 소설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에도 이에 영향을 받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으나 <회본태합기>의 내용에서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던 동물인 원숭이가 등장하고 있어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데다 <상산기담>에서도 호랑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살지 않았던 코끼리까지 조선에서 잡아 왔다는 신빙성 없는 일화가 실려 있어 <상산기담>에 함께 실린 가토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신빙성 또한 떨어지게 하고 있다.[29] 이후 에도 시대에는 우키요에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가토를 다룬 소설이 성행하는 등 예술 작품들을 통해 가토에 대한 '호랑이를 사냥한 무사'라는 인식이 보다 확고해졌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 <상산기담>과 <회본태합기>에 기록되었던 '총으로 호랑이를 쏘아 잡은' 일화는 '창과 칼로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변형되어 우키요에와 소설 삽화에 표현되었는데, 이는 무사로서의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30] 이러한 가토에 대한 영웅화가 진행된 과정을 유추할 시, 가토가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 가에 대적해 도요토미 가에 충성한 점과 더불어 가부키 등 예술 활동에 제약을 건 덴포 개혁으로 가토의 호랑이 사냥 설화는 검열을 피해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서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로 계속 전해져 오다가 에도 시대 중기에 융성한 국학(国学)으로 대표되는 국수주의적 사상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사상을 통해 조선을 침공한 장수라는 점이 기존에 쌓여 온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로서의 인식과 결합. 최종적으로 '이국의 강한 맹수를 사냥하여 일본인의 기개를 떨친 인물'로서 인기를 끌게 되며 영웅화된 것으로 여겨진다.[31]
- 일본 구마모토시에 있는 동상. 순절한 가토 기요마사의 애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동상이라고 한다. 이 동상을 울산에도 건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잔학한 침략자의 동상을 뭐하러 세우냐는 등 여러 사유로 무산되었다. 단 가토 동상 대신 울산왜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 가토 기요마사는 겸창을 즐겨 사용했는데, 한쪽 낫의 길이가 짧은 것이 호랑이에게 물려서 부러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의 겸창은 원래부터 편겸창으로, 한쪽 낫이 없다시피할 뿐이고 부러진 흔적은 없다.
- 키가 6척 3촌(약 191cm)에 달하고 덩치가 매우 컸다고 하나 그가 입었던 갑주를 통해 체구를 측정한 결과 실제로는 5척 3촌(약 161cm)의 왜소한 체구로[32] 사진에서 보듯이 키높이 뾰족투구를 썼다. 정도는 약하지만 결벽증이 있어서 화장실에는 굽이 매우 높은 게다를 구비해놓고 볼일을 보러 갈 때마다 갈아 신었다고 한다. 지금도 구마모토 성에 가면 그 게다가 재현되어 있다. 6척 3촌(약 191cm)의 키는 높이 치솟은 고깔 모양의 투구까지 합친 높이이다. 그러니까 맨 몸은 덩치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항상 쌀과 된장을 넣은 군량 주머니, 은전 3백 문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이를 본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왜 허리 무겁게 그러고 다니냐고 묻자 기요마사는 "내가 이렇게 모범을 보여야 부하들이 보고 배워 전투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며, 군량을 허리에 안 찬 부하를 면직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설화가 전해진다. 가토가 함경도까지 진군했다가 정문부 등의 의병대[33]에 의해 후방이 차단당할 위기에 처하자 보급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북방의 여진족[34]들의 위협도 있어서 퇴각하는데 보급이 되지 않아 계속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학을 뗀 가토가 그 뒤로는 허리띠에 항상 비상식량과 돈을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혹은 울산성 전투에서 겪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구마모토 성도 그렇고 이런 버릇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 한국에서는 '난폭하고 무식하며 욕심이 많은 자'라는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같은 왜장이지만 미묘하게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35]와 대비되어 대악당으로 여겨지는데, 일본에서도 은연중에 호랑이 같이 용맹무쌍한 장군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조총을 중시했고 "총알 앞에 갑옷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군의 경장화를 추진한 선진적인 장군이었다. 이는 상술한 가토의 일련종 신도라는 영향이 크다. 일련종은 후일 일본의 대표적인 애국불교집단으로 변질된 일련정종의 원류가 되는 분파로 조선의 유교 및 불교유적을 파괴하는데 앞장섰으며, 고니시는 원래는 조선 침략을 반대한, 당시 히데요시 세력의 온건파에 속했기 때문에 그 경쟁의식 때문에 가토가 조선에서의 전공에 집착한다는 영향이 크다. 또한, 아직까지 계급사회였던 일본에서 조총을 이용한 집단전술을 폐기한 원인인 '신분의 섞임'[36]을 기피하는 경향에 거리끼지 않는 일련종 불교도라는 것이 조총전술을 중시한 이유이기도 하다.
-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사명대사 유정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대의 나라에서 귀한 보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를 가리키며 "우리나라에서는 그대의 목을 귀한 보물로 친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사명대사 항목 참조.
- 말년에는 글을 익혔는지 논어를 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밑줄을 쳐가며 읽었다고 한다.[37] 하루는 기르는 원숭이가 자신의 논어에 붓으로 낙서를 하는 것을 보고는 "너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거냐"며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한국 입장에서야 그냥 적국의 장수에 불과한 인물이지만, 오늘날 일본 구마모토에서는 지역 스타다.[38] 그럴 만도 한 게,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의 영주가 되기 전까지는 유력 다이묘가 나타나지 않고 잡다한 지역 유력자들이 분쟁을 일삼다 보니 지역이 황폐화된 상태였지만,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다스린 이후 치수나 개간에서 성과를 올려 생산량이 늘어났고 이것이 지역 발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한국의 울산광역시와 관계가 많은데 그가 쌓고 주둔했던 울산왜성(학성)과 서생포왜성은 한반도의 왜성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나은 편이라 관광지로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 1960년대까지 구마모토시에 우루산마치(울산정)이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했을 정도로 1960년대 이후로는 울산마치역이라는 역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의외의 사실로 적국의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를 현의 역사인물로 홍보하고 있는 구마모토시와 가토가 몇 달을 굶주리며 한때는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로 고전하며 수성전을 펼친 전장인 울산광역시는 자매결연 관계다. 구마모토현에 의하면 울산광역시에서는 처음에 이 제의를 받자 당연히 "침략자의 고장과 자매결연을 맺기 싫다."며 거부했지만 구마모토현 측에서 '우루산마치'의 명칭, 일화, 사료 등을 인용해서 "가토가 비록 침략자이기는 했지만 조선을 깔보거나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어느 정도 조선의 문물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다."[39]며 열심히 설득하고 MBC의 김재철 사장이 중개를 서서 자매결연에 성공했다고 한다. 해당 홈페이지에서는 김재철 사장의 공로에 대해서 특별히 감사한다며 그 이름을 크게 명기했다.[40]
- 경상도 민요 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 나네의 칭칭이 바로 '가등청정'의 '청정'이라는 설이 있다. '쾌지나 칭칭 나네'는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만 이는 흔히 범하는 민간어원설의 오류란 시각이 많다. 실재로는 꽹과리 소리 시늉으로 많이 보며, 현재 풍물패에서도 지신밟기를 할 때 선창 후 꽹과리를 친다. 또한 사물놀이를 통해 가락보가 정형화된 이후임에도 꽹과리 음은 갱, 캥, 지갱, 갠지, 갱치 등으로 유사하게 불리며, 된소리 발음이 강한 영남권은 더욱 잘 매치가 된다.
- 의도치 않게 숭례문을 지킨 인물이다. 대한제국 시기 통감부에서 교통 편의상 숭례문을 헐려고 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숭례문을 통해 입성했기 때문에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를 승전기념물로 여겨 철거를 극렬 반대하여 결국 보존되었다고 한다. # 심지어 이 때문에 일제시기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흥인지문과 똑같은 케이스로 먼저 들어왔던 고니시와 가토가 실제로는 종교도 다른 경쟁관계라 가토의 흥인지문 통과를 거부했고 가토가 화가 나서 숭례문으로 방향을 튼 뒤 북진한 것이다.
- 임진록 시리즈도 그렇고 거상도 그렇고 가토 기요마사의 얼굴이 귀신 같이 생긴 터라 2000년대초 어린아이들은 가토 기요마사가 정말로 귀신같이 생긴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은 그게 얼굴이 아니라 가면이다. 투구와 더불어 병행하던 보호장비(면구).
- 쿠마모토시의 사찰 혼묘지(本妙寺)[42]에는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고온 13살 조선인 소년 여대남(余大男)의 사연이 있다. 이 소년은 납치될 당시 글재주가 있어 흥미를 느낀 기요마사가 끌고 와 혼묘지에 맡겨 승려가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탁월했는지, 선대 주지가 27세의 그를 지명해서 제3대 주지가 되었다.[43] 기요마사가 죽은 후, 조선에서 온 편지를 받았는데 뜻밖에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 그 후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백방 노력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한 채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는 본인도 귀국을 체념한 채 한 많은 삶을 일본에서 마치게 된다. 현재 혼묘지에는 그와 아버지가 주고 받은 편지 세 통(하나는 본인이 아버지에게 보내기 전에 쓴 초고)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혼묘지에서는 1년에 단 한 번 공개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윤승운의 '겨레의 인걸 100인'에도 실려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 1971년 개봉한 영화 <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최성호가 연기했다.
- 우에토 아야 주연의 영화 <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2003)에서는 배우 타케나카 나오토[44]가 연기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암살설을 채용한 것인지, 도쿠가와 쪽 암살자인 아즈미 일행의 목표로서 카게무샤까지 써가며 암살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아즈미에 의해 살해당하는 역이다.[45]
- 2014년 개봉한 영화 < 명량>에서는 권율이 '가등청정이 울산성 앞에 있다.'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나왔다.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등장하지 않고 언급으로만 나온다. 라이벌인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명량과 한산에서 언급만 되었지만 노량에서 본인이 직접 등장했다.
4.2. 드라마
- 1986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배우 김기일이 연기했다. 호랑이 수염의 저돌적인 무장으로 나오며 무장파 다이묘가 안 나오거나 비중이 적은 관계로 혼자서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상대하며 깐죽대는 모습이 일상사이다. 늘상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모습으로 나오다가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았을 때는 태도를 싹 바꿔 갑자기 공손한 척 연기하는 게 심히 압권이다.
- 2016년 KBS 드라마 < 임진왜란 1592>에서는 뮤지컬 배우 이우승이 연기했다. 3회 초반부에 조총이 보관된 상자를 열어보더니 "포르투갈 총하고 똑같이 만들라고 했더니 더 잘 만들었잖아!"라며 흡족한 웃음을 짓는다.
-
2016년 NHK 드라마 <
사나다마루>에서는
아라이 히로후미가 연기했다. 이시다 미츠나리 집에 꽐라가 되어 온 것으로 첫 등장하며 히데요시를 위해 더러운 일도 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시다 미츠나리와는 충돌은 있지만 그래도 서로 나중에 화해는 하는 사이였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독선적이고 계산적인 성향과 가토 기요마사의 사람을 감정으로 대하는 가치관이 결국 크게 충돌하였고 정유재란이 끝나고 철군해온 가토와 병사들에게 일 때문이라는 이유로 도중에 나가버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태도에 크게 분노한다. 이후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쿠가와를 죽이려는 모습을 보이자 히데요시의 유언과 네네의 조언에 따라 도쿠가와를 지키기 위해 나섰으며 충돌하기 직전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찾아와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제 와서 병사를 물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음을 알았기에 친구로서 마지막 하소연을 해보지만 미츠나리가 거절하면서 완전 갈라서게 된다.
미츠나리 처형 후에도 도요토미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데[스포일러],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회담 자리에서 자리를 비키지 않으며 히데요리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일로 이에야스의 반감을 산 끝에 3대 핫토리 한조에게 독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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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세력 | 배역명 / 배우 |
도요토미 |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후치카미 야스시 분) |
4.3. 게임
- < 충무공전2>에서는 사무라이 영웅이 아닌 닌자 영웅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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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록 2>에서는 후줄근한 모습의 덩치 큰 장수로 등장한다. 아무런 기술도 갖고 있지 않고 쓸데없이 특수무기로 철퇴를 끼고있어 몸빵만 할 뿐이다.[48]
시나리오 상에서도 자주 나오는 것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은데, 임진록 2 본편에서는 방심하다가 탄금대에서 조선군의 역습을 받은 후[49] 주로 의기소침한 모습들을 보인다. 조선의 반격에서는 도쿠가와의 충복 포지션으로 묘사되는데, 도쿠가와 본인이나 아사코[50]의 대화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아둔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실제 라이벌이었던 고니시와의 대립은 본편에서든 조선의 반격에서든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쌍검을 사용하는[51] 장수로 등장한다. 폭뢰격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자기 주위로 광범위한 폭발을 일으켜 근처의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기술이다. 레벨 90부터 도라노스케로 전직할 수 있는데 타격을 입을 때마다 영혼을 충전하여 공격 시 충전된 영혼으로 데미지를 주는 기술인 격노일갈과 그림자처럼 변하여 빠르게 이동하는 그림자 이동이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따로 조작을 안 해도 공격 시 자동으로 발동되지만 근접 공격이라 제대로 아이템을 갖추지 않으면 녹아내린다.[52] 게다가 인공지능이 영 좋지 않아 어택땅을 했다가는 적을 제대로 때리지 않고 주위를 맴돌기만 하므로 반드시 타겟을 지정해줘야 한다. 적의 공격이 잘 명중되지 않을 경우 아군의 공격을 맞고도 격노일갈을 발동할 수 있다. 이를 흔히 "시동을 건다"라고 하는데 휴전부와 같이 활용하여 휴전부로 적을 멈춤 - 아군 공격으로 시동 - 격노일갈로 공격 - 다시 휴전부를 반복하는 방법도 있으나 손이 많이 가고 귀찮다. 또 다른 기술로는 그림자 이동은 긴 거리를 이동할 수 있고 이동한 거리에 따라 체력을 회복하지만 체력 회복량이 꽤 적기 때문에 빠르게 적에게 다가가거나 급히 빠져나올 때 활용하는 정도다. 격노일갈 데미지는 체력비례이고 그림자 이동은 딱히 능력치에 영향이 없으므로 생존을 위해서든 딜을 위해서든 스텟은 올체력. 자세한 내용은 검술낭인 문서 참조.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
-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무용 80대 중후반을 찍는 도요토미가의 맹장이다. 다만, 무용만 준수하고 나머지는 폐급인 마사노리에 비해 지력이 60대 중반을 찍고 정치는 70대 정도 찍는 등 무력 특화의 준만능캐로 등장한다. 그래서 칠본창 중에서 총합이 제일 높다. 구마모토 성을 축성한 인물이라서 축성이 추가된 시리즈에서는 축성이 제일 높게 측정된다. 1588년 이후에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다이묘로 등장하지만 주변에 구로다, 다치바나 등이 있고 남쪽에 시마즈가 있어서 어려운 편이다. 그래도 숙적이자 바로 남쪽에 배치되는 고니시 유키나가보다는 강력하고 쉽다.
- 영걸전 시리즈인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에서는 히데요시의 부장으로 등장. 혼노지의 변으로 급히 화친을 맺고 철군하다 노부나가 사망을 안 모리 테루모토의 뒷치기에 당한 히데요시의 원군으로 등장하지만, 격퇴당한다. 퇴각 시 대사는 없지만 해당 전투를 클리어하면 사망 처리되는 히데요시를 보면 기요마사도 같이 사망 처리된 듯.
<
태합입지전 시리즈>에서도 전투 쪽에 주로 특화된 와중에 건축 4레벨, 광산 2레벨로 내정 쪽으로도 쓸모가 있다는 게
후쿠시마 마사노리와의 차별점이다. 지모는 낮은 편이지만 마사노리처럼 바닥까지는 또 아니다. 대신 전투 쪽 기능은 족경만 4레벨로 동일하고 마사노리에게 확실히 뒤쳐진다.
- <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전국무쌍) 참조.
- 전국 바사라 시리즈에서는 본가 시리즈의 경우 클론 무장으로만 등장했고 2020년 2월 11일 파생작 모바일 게임 전국 바사라 배틀 파티에서 신규 무장으로 참전이 예고되었다. 여기서는 잘 알려진 가문 출신이 아니라서 자신의 재능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믿으며 자신이 따르기에 합당한 주군을 찾아 전국 각지를 방황한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성우는 에구치 타쿠야.
-
파일:external/www.visco.co.jp/f_5mb3.jpg
자아! 어느 쪽이 강한지 승부해 보자고!
슈팅 게임 < 바사라 2>에서는 중간보스들 중 4번째로 등장한다. 이 때까지 적장들을 다 잡아 족쳤다면 가토 기요마사 대신에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등장한다. 컨티뉴를 사용하지 않고 격파하면 1UP 등장한다.
4.4. 소설
*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에서는 기골 장대한 용장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리는 지장의 풍모도 갖춘 장수로 나온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단을 묘사할 때, 영민하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대조되는 구도를 형성한다.* 소설 < 불꽃의 미라쥬>에서는 주인공이 기요마사에게 "네가 이 구마모토에서는 신으로 추앙받지만 바다 건너에서는 그저 도적 떼 두목이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다.
4.5. 만화
- 만화 < 효게모노>에서는 일본의 유명 복서인 구시켄 요코[53]의 모습과 그 특유의 말투를 고스란히 사용하는 일종의 패러디성 캐릭터가 되어 있다.[54] 매일같이 복싱 연습을 하거나 온화해 보이면서도 도요토미 가문에게 헌신적인 충성을 바치는 모범적인 무사 캐릭터다. 할복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이에야스를 설득해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사이의 공존을 도모하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의도치 않은 병력의 움직임 때문에 '할복 등 쇼를 벌여서 이에야스를 오사카로 꾀어내 기습하여 죽이려 했다'는 오해를 받아 격노한 이에야스에게 암살당하고 두 가문은 적대 관계로 치닫게 된다.
-
만화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2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는 원래 초상화보다 조금 더 비열한 인상로 그려진다. 치세엔 어땠건 난세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것을 빼앗고 탐하는 짐승의 본능을 보여준다며 난세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며, 조선을 침략하게 되자 '새로운 난세가 시작되는구나'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호전적이고 잔인한 면모가 드러나며,
김충선 외전에서는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겠다며 부하들에게 약탈과 학살을 지시하는 모습도 묘사된다. 소개 문구도 '오니 장군, 날뛰다.(鬼将軍、猛る)'이고, 임진왜란 당시 가토의 악명이 어찌나 등등했던지 후대의 조선인들에게마저 '나쁜 아이는 가토가 잡아간다'는 말이 전래되었다는 일화가 외전의 처음을 장식한다.
사이카슈 잔당 중 일부를
형벌 부대 형식으로 끌고 다니며 학살이나 약탈 등 더러운 임무에 투입하였으나, 원수의 부하가 되어 명분도 없는 학살을 이어가는 데에 지쳐버린
사야카를 비롯한 사이카슈 대원들이 항명한 후 가토군 병졸들과 지휘관을 쏴 죽이고 조선에 귀순하였다.
한편으로는 명과 휴전을 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침략과 약탈을 실컷 한 전쟁에서 마지막에 사이좋게 끝날리가 없잖아?"라고 까면서 핵심을 지적했다.
[1]
永禄, 제106대 천황
오기마치 덴노의 두번째 연호
[2]
慶長, 제107대 천황
고요제이 덴노의 마지막 연호. 참고로 해당 연호는 후임인
고미즈노오 덴노의 즉위 이후에도 개원하지 않고 4년동안 더 쓰였다.
[3]
1564년 사망
[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이다.
[5]
가토에게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란 별명이 있게 한 전투다.
[6]
가토 기요마사의 가몬은 가토씨의 정식으로 지정된 가몬은 아니며, 가토씨는 가토 미쓰야스 계의 검은색 바탕에 뱀 눈알 문양과 가토 요시아키 계의 늘어뜨린 등나무, 그리고 도라지 가몬을 사용한다.
[7]
성은 없음.
[8]
혹은 먼 친척
[9]
후의 기타노만도코로
[10]
이들은 모두 3천 석을 받았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공을 더 인정받아 5천 석을 받았다. 흔히 칠본창이라는 명칭 때문에 시즈카타케에서의 히데요시 시동 출신 출격 무장을 7명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이 시기 큰 공을 인정받았던 시동 출신 데뷔 멤버들은 총 9명이다. 그 중 둘은 창이 아닌 무기를 들어서라는 말도 있고 일단 전투 중에서 전사했으므로 칠본창이라 불리는 듯하다. 뭐 일단 이 7명 중에서 그나마 메이저급 반열까지 오른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뿐이니 아무래도 좋을 지도.
[11]
대대로 해당 주군을 모셔온 집안
[12]
전쟁 직후
동래성 함락 및
신립 격파 등 큰 전투는 모두 고니시가 했는데도 고니시가 먼저 한성에 들어왔다.
[13]
임해군과 순화군을 묶어서 가토에게 바친
조선인 반역자 국경인을 도리어 "자기 주군에게 어찌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는가!"하고 꾸짖고 포승을 푼 뒤 두 왕자와 그 일행을 잘 대접했다는 일화에서 볼 때 한국에서 으레 상상하는 '사악한 대마왕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과격한 돌격대장과는 거리가 있으며 '자신들이 잡은 조선의 왕자들을
전쟁에서 써먹을 데가 많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했을 걸로 보인다.
[14]
이는 임해군과 순화군이 현지에서 폭정을 저질러서 민심을 잃은 탓도 있다. 선조가
모병 활동을 하라고 보냈더니 그나마 선조 덕분에 더한 말썽은 일으키지 않았던 두 왕자가 선조의 통제에서 벗어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폭정을 일삼았다. 오죽하면 일본군이 등장해서 두 왕자를 생포하니 현지 백성들이 일본군을 격하게 환영했을 정도다.
[15]
여진족의 약탈에 분노한 함경도 조선인들도 참전했다.
[16]
청나라 건국자
누르하치가 있었던 부근이다.
[17]
당시
이순신이 단단히 화가 나 부산진에서도 자제했던 상륙전까지 벌였다. 물론 일본군의 본진이었던 부산진에 비하면 작은 성채에 불과했다. 안그래도 그 당시 고니시와 가토는 또다시 벌어진 전쟁에 염증을 느낀 상황이었는지 성을 쌓고 움직이지않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회의를 하던중이었는데 가덕도의 왜군이 이순신에게 공격받아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올리자 고니시는 '쓸데없이 조선군을 자극해서 일을 내냐며 역으로 나무라고 요시라를 직접보내 잡아간 포로 5명을 돌려주고 이순신을 달랬다.
[18]
물론 성 내의 우물을 여럿 확보한 것은 다른 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벽과 바닥재까지 유사시
식량으로 대체할 수 있게 지시한 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다.
[19]
기요마사류 건축 양식이란 어떤 건물에서 식량을 최대한 쥐어 짜먹을 수 있는 구조의 건물을 의미한다. 21세기 식으로 따지자면 방문에 서랍을 잔뜩 달아놓고 그 안을 통조림으로 채우는 예시가 해당된다.
[20]
기요마사(清正)의 한자 표기를 음독한 것이 세이쇼.
위인들을 일컬을 때 훈음이 아니라 독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이를 '
유식자 읽기'(有職読み)이라 한다.
[21]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런 식으로 공을 부풀리려던 도요토미군 장수들의 행위를 조사해서 히데요시에게 알리는 역할이었고 굉장히 깐깐하게 굴었기 때문에 이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굉장히 미움을 사게 된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을 때도 은폐된 석고를 잡아내는 일을 해서 인망이 굉장히 없었다.
[22]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던 몇몇 가문에만 해당되는 명분이지 실제로는 이미 이 시점에서
누가 천하인이 될 건지 감을 못 잡은 사람따윈 없었다. 다만 서군의 경우 이에야스와
원수지간이라 동군에 합류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든가 아니면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되는 것이 아니꼽다고 생각했던
몇몇
거물급
다이묘라든가 혹은
이들과
친분이
있어서 그 때문에 참전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애시당초 이런 말이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 오다 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기요스 회의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왔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가 대신 천하를 차지할 때 내세웠던 명분도 이 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가 그 몇 안 되는 도요토미 가문 충성파였던 건 확실한 사실이다.
가토가
히데요리를 자신에
성에 모시려 했다는
설도 있다.
[23]
또한 앙숙인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서군이었다. 이런상황에 가토가 서군에 참여를 했을 리가 없다.
[24]
그는 조선에 진군할 당시 사기 고양 목적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花經)라고 쓰인 니치렌 만다라를 깃발에 적어 병사들에게 들고 행군하게 했다.
[25]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통신사의 기행문에는 대놓고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독살했다'고 쓰여있기도 하다. 이에야스의 일생을 보면 죽어줬으면 하는 상대가 딱 좋은 타이밍에 의문사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야스를 둘러싼 암살 음모설이 많다.
[26]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영지를 몰수당한다고 해도 일족 자체가 끊긴 경우는 드물며, 평민으로 격하시키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는 무사 신분을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타다히로가 마루오카번에서 낳은 서자들도 5천석 규모의 역직을 계승하는 등 무사 신분은 유지했다.
[27]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58~59
[28]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2~63
[29]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4~67
[30]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7~72
[31]
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73~74
[32]
그래도 그 당시 일본인들에 비하면 평균보다는 큰 키이다. 약 155cm 정도가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이다.
[33]
정확히 정문부의
의병이라고 지칭하지는 않고
조선 의병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여진족이라고도 한다.
[34]
이에 관해서는
조선
의병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사납다고 생각한 가토가
여진족이라고 우겼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어차피 함경도에서는 그동안 여진족과 크고 작은 교전이 계속 있었고 피가 섞였을 가능성도 있어서 사실상 함경도의 조선 의병이나 여진족이나 무장이나 전투력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고 외국인인 가토는 구분을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에도 함경도의 의병이 아닌 여진에게 당한 것으로 적혀있어,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한다.
[35]
현대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 인물도 선조실록 등 조선시대 기록에는 '흉악하고 교활한 자', '주륙해야 한다'는 등의 적개심 가득한 표현으로 서술된다.
[36]
당시 조총의 기술력상, 조총부대는 철저하게 뭉쳐다녀야 했기 때문에 조총부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몸처럼 움직여야 했고 이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돌아갔던 일본의 군사제도를 정면으로 거슬렀던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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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말년에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고, 마침
임진왜란으로
조선에서 빼앗아 온 서적이나 납치해 온 학자 등을 통해 소양을 기르기 시작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권유하여서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도요토미 정권의 중신이자 사적으로도 도요토미 가와 친했던, 친한 삼촌 같은 존재 즉, 맹장형의 무인에게 권유 및 설득이 가능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기에 설득력은 있는 편이지만 자료가 워낙 적어서 진위는 불명이다.
[38]
다케다 신겐이
야마나시현의 스타가 된 것이나,
다테 마사무네가
미야기현의 스타가 된 것과 비슷한 예다. 일본에서는 각 지역을 다스렸던 무장을 다루어 스타로 내세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게,
이순신 장군의 외가가 있던
아산시가 이순신 기념사업을 추진했고,
경주시 역시
신라시대의 유물을 랜드마크로 내세우며,
공주시와
부여군은
백제시대의 유물을 랜드마크로 내세운다.
중국 또한
만주족 인구가 많은 북동부 지역(특히
베이징시[55]와
동북3성)은
청나라의 만주족 인물들을,
몽골족 인구가 많은
내몽골 자치구는
몽골 제국의 몽골족 인물들을 지역 스타로 내세운다.
[39]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종전 후 논어를 읽으면서 유학을 공부한 것 때문인 듯하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가토군은 조선의 여러 문화재들(특히
불국사)을 마구 파괴했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반만 맞는 말이다. 만약 구마모토시가 울산광역시가 아니라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으려 했다면 구마모토시는 가토군이 불국사를 파괴한 것에 따른 업보 탓에 일언지하에 퇴박맞았을 것이다.
[40]
비슷한 경우로
전라북도 또한 정유재란 당시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을 침공한 다이묘들 중 한 명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고시마현의 지역 위인으로 홍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고시마현이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 도공인 심당길을 선조로 하는 심수관 가문으로 유명한 것 때문에 가고시마현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41]
가토 기요마사는 영어로 Kato Kiyomasa이다. 가토급 잠수함은 Gato라고 표기한다.
[42]
기요마사가 아버지 기요타다(清忠)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절이다.
[43]
원래 주지가 될 예정이었던 선대 주지의 후계자가 급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작 20대의, 그것도 외국인 젊은이를 차기 주지로 지명했을 정도이니 그의 능력도 사뭇 뛰어났었을 것이다.
[44]
드라마 히데요시와
군사 칸베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았다.
[45]
원작 만화의 3권까지의 이야기를 영상화한 것이 영화 1작째이므로 아마도 원작에서도 등장할 듯하다.
[46]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
[스포일러]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와의 전쟁이 벌어져서 자신이 죽는다면 가토가 대신 도요토미가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48]
도검류를 쓰는 무장들은 고를 수 있는 무기가 많아 무기를 돌려가며 쓸 수도 있을 정도로 범용성이 좋지만 철퇴는 오로지 공격력만 좀 올려주는 '참철철퇴' 딱 하나 뿐이다. 그나마 공격력 향상 폭도 도검류보다 낮다. 도끼를 쓰는 우키다 히데이에도 구매할 수 있는 도끼는 딱 하나 뿐이지만 거기에 '만월 도끼춤'이라는 스킬이 달려서 유용한 편. 아사코도 비슷한 처지지만 고유 스킬이 제법 유용해 굳이 딜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49]
고니시가 가토를 구원하는 것으로 미션 초반부가 전개된다.
[50]
홍일점 포지션의 가상인물로 몇몇 기습 작전이나 암살 작전을 지휘한다.
[51]
겉으로만 쌍검일 뿐이지, 실제로는 도검으로 무장한다.(
천하제일상 거상에는 도검류와 쌍검류라는 2가지 다른 계통의 무기가 존재한다)
[52]
제대로 활용하려면 추가스텟을 주는 백의종군을 300까지 찍고 레벨 200이상에서 태황셋을 다 갖춘 후 오행기의 생사결까지 있어야 그나마 할 만하다.
[53]
하지만
구마모토 출신인 기요마사와 달리 구시켄 요코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54]
가토가 사로잡은 조선의 왕자는 욘사마의 얼굴로 나와서 장동건 CF의 유명한 대사를 하는 등 한류 패러디 캐릭터로 표현된다. 한류에 약한 일본인 아줌마 시녀를 꼬셔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가토에게 원투 펀치를 얻어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