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계 친이회창계 | 친창계 |
|||
<colbgcolor=#0000a8> 형성 | <colbgcolor=#ffffff,#1f2023> 1996년 | ||
해체 | 2012년[1] | ||
수장 | 이회창 | ||
정치적 이념 |
신보수주의 반공주의 |
||
경제적 이념 |
경제적 자유주의 재정보수주의 |
||
주요 정치인[2] |
하순봉 황우여 고흥길 신경식 변정일 맹형규 주진우 김무성 권철현 임영호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계파의 정당 역사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신한국당 | ||
한나라당 | |||
한나라당 | 자유선진당 | ||
새누리당 | 자유선진당 | ||
선진통일당 | |||
새누리당 | |||
해체 | }}}}}}}}} |
[clearfix]
1. 개요
신한국당,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에서 이회창을 따랐던 정치세력을 일컫는다.2. 활동
1993년 문민정부 두번째 국무총리로 임명되고 1994년 자진 사퇴하면서 대외적 이미지가 좋아졌다. 그 후 정계에 입문하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한국당 소속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총선 승리하고[3], 본인도 전국구로 당선되면서 순탄대로를 걸었다. 이후 1997년 7월 21일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으로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에게 1.5% 차이로 접전패 했지만, 대선을 거치며 당내에서 이회창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회창은 한나라당의 총재가 되었다.이 후 이회창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나라당의 총재를 역임하며 완전히 당을 장악했고, 차기 대권 주자 1위를 놓치지 않으면서 이회창계는 한나라당의 주류가 되었다.[4]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승리했고[5] 대선 직전 치러진 8.8 재보선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이로써 이회창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 되는 줄 알았으나, 막상 치러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접전패를 하면서 이회창은 다시 대선에서 패배했다. 이회창은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이회창계는 정치적 구심점을 잃게 된다.
2000년대 중반 박근혜를 필두로 한 친박과 민정, 공화계로 당의 정치적 중심이 넘어가자 이회창계 중 김무성, 유승민, 전여옥 등은 박근혜 대표 진영으로 넘어가 친박계가 되었고 나머지는 이명박 서울시장 진영인 친이계로 모이게 되었다. 이회창은 정계은퇴 이후 일절 정치적인 활동을 하거나 메세지를 내지 않았지만, 2005년 자신의 측근이었던 유승민이 대구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자 직접 내려가 유세를 해주기도 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둔 2007년 11월, 이회창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충청도와 일부 보수 표심을 잡으며 여론조사 대부분에서 2위를 기록했고, 후에 3위로 떨어지고도 선거에서 15.1%를 득표하며 아직 정치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의 세력은 자유선진당을 창당했고, 그의 세력을 중심으로 국민중심당과 일부 충청권 무소속이 합류했다.
그리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8석을 획득하며 이회창계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자유민주연합 출신의 김종필을 따르던 원조 충청파인 심대평이나 이인제 등[6] 소수 케이스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순수 이회창계이거나, 조순형 같은 이회창이 영입한 인물이기에 자유선진당을 장악했다[7]. 선거에서 중박은 했던 이회창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패배를 했지만[8] 심대평이 국민중심연합을 만들고 나갔기에 당선인들은 이회창계로 분류되며 당과 충남권을 더욱 더 장악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세가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 이회창이 심대평과의 갈등이 생기면서, 공천에서 이회창계는 상당수 배제되었다. 당선인은 국민중심당 출신 이명수, 이회창과 숙적 관계인 이인제, 그리고 청구동계에 속하는 성완종이었다. 비례대표 역시 이회창계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회창계의 원내 인물은 전무했지만, 지방선거 때 당선된 지방의원이 남아있었기에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결국 이회창이 자유선진당을 탈당하면서 소수의 지방의원들도 탈당했다.[9][10] 그후, 이회창이 새누리당으로 복당하고, 자유선진당이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도 2012년 11월 16일 새누리당에 합당되면서 이회창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11]
자유선진당을 일부 이어받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영입 인재들이 큰 파이를 차지하며 창당한 바른정당과 바른미래당에 이회창과 그의 세력이 소수 합류하였으나, 그는 이미 정계은퇴를 했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12]
3. 구성
원내에서는 주로 대부분의 민정계[13][14]와 일부 상도동계[15], 통합민주당 출신이 이회창계에 속했다.[16] 그러나 15대 대선 이후에는 일부 세력이 자유민주연합과 새천년민주당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후단협으로 한나라당에 합류한 사람들과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 자유민주연합과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합류한 사람들도 나름 이회창계로 분류된다. 또한 이회창이 직접 영입 인재들 또한 이회창계에 속했다.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인사들은 자유민주연합 탈당 이후 다시 충청권 보수정당에 복귀하거나 한나라당에서 영입한 인사들이다. 자유선진당에 합류한 영입 인재는 민주당계 정당 출신이 많으나 정계에 직접 입문시킨 인물들이 많다.
4. 명단
- 민정계: 하순봉, 신경식, 김영일, 최돈웅, 양정규, 민관식, 김재순, 김종호, 권익현, 이상득, 박희태, 김형오, 김기춘, 최병렬, 이성호, 이자헌, 김영광, 서정화, 심정구, 조영장, 김정례, 김영구, 정창화, 박명환, 박주천, 이상재, 강재섭, 김중위, 조진형, 이승윤, 박우병, 정재철, 나오연, 유흥수, 이해구, 이웅희, 오세응, 박창달, 김태호, 이상희, 김용태, 정동성, 정영훈, 이택석, 서상목, 이국헌, 황성균, 이환의, 안상영, 박승국, 안택수, 김만제, 허태열, 정갑윤, 정형근, 김용갑, 김종열 등.
- 상도동계 출신 및 YS키즈: 황낙주, 백남치, 김동욱, 김명윤, 김수한, 김봉조, 김정수, 김덕룡, 허재홍, 노승우, 김무성, 강삼재, 정재문, 김찬우, 정병국, 이원복, 임인배, 손학규, 김혁규, 현승일, 윤영탁, 강인섭, 이성헌, 박진, 안경률, 이병석, 맹형규, 이윤성, 심재철, 김문수, 목요상, 권철현 등.
- 민주당 및 통합민주당 출신: 홍사덕, 강창성, 이중재, 이부영, 이규택, 홍성우, 황규선, 장경우, 정정훈, 김판술, 권기술, 권오을, 김성식, 김종완, 박동인, 양문희, 이승철, 정병원, 정태근, 고진화, 박계동, 홍문표, 장광근 등.
- 후단협 합류파(당시 여권 탈당파): 원유철, 이완구, 김용환, 이근진, 김원길, 김칠환, 황수관, 김홍만, 이원종, 강창희, 이재선, 정우택, 송광호, 전용학, 함석재, 송업교 등.
- 영입 인재: 대표적으로 황우여[사법부], 고흥길, 유승민, 오세훈, 원희룡, 남경필, 이혜훈, 김용태, 박준선, 이이재, 나경원
- 사법부 인사(원조 이회창계): 유태흥, 김용철, 이일규, 김덕주, 정기승, 오성환, 정태균, 전상석, 강우영, 신정철, 김형기, 김중서 등
- 자유선진당: 변웅전, 류근찬, 류승규, 박상돈, 김용구, 이진삼, 임영호, 이재선, 박선영, 이영애, 조순형[영입], 김창수[영입], 지상욱, 이명수, 성일종, 성완종, 곽성문, 이재선, 유한식, 김용필, 권선택, 염홍철, 정인봉, 이상민 등
- 기타 인사: 허대범, 황승민, 김숙현, 주진우, 김현규, 정남, 조철권, 박맹우, 김태원, 조해녕, 백승홍, 도종이, 김병호, 박원홍, 이경재, 엄호성, 이해봉, 박종근, 정문화, 최병국, 윤두환, 고흥길, 임태희, 박종희, 전재희, 박혁규, 최연희, 윤경식, 김인규, 황철곤, 이상익, 유상호, 박익주, 원장길, 류종수, 이수담, 김관용 등
[1]
이후 이회창계는
친박,
친이,
친유,
친무 등으로 찢어지며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2]
이회창이 본인 회고록에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한 의원들의 명단
[3]
이때 공천이 이회창계가 만들어지는데 공이 크다.
[4]
이 시기 이회창을 위시로 한 민주계와
민정계는 수시로 계파 갈등을 벌였지만, 이회창이 당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만 해도 민정계는 민주계에게 파워로 상대가 되지 못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
조순,
허화평 등 민정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이회창의 공천 룰 한번에 쓸려나갈 정도로 이회창의 파워가 막강했다.
[5]
본인의 위치가 위치라, 공천의 영향력을 줬을 가능성이 큰 만큼, 이회창은 지역조직마저 장악했던 것이다. 이회창은 대선후보로 선출되면서 총재직을 사임했는데, 집단지도체제가 도입되고
서청원 대표를 중심으로 최고위가 생겼지만 이들은 이회창 밑에서 철저히 2인자였다.
[6]
당장 이인제는
자유선진당에서 당선된 케이스가 아니다.
[7]
당의 장악력과 별계로, 이회창계는 국회에서 힘을 못 썻는데, 그 이유는 비교섭단체이기 때문이다.
[8]
물론 지지 세력인 대전 충남권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보이며 생명을 살아있었다.
[9]
이들이 사실상 이회창계 전직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계로 볼 수있는 마지막 인물들이다.
[10]
물론 지방의회 의원들인 만큼 크게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1]
그의 영입 인재들이 활동하고 있기는 하나, 모두 거물급이 되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하나의 단일 계파라고 보기는 어렵다.
[12]
사실 이들은 충청권에 별 기반이 없었다. 지역별 지지율 순위를 보면 대경권(출신 의원이 많아서) - 수도권 - 충청권 순이였다.
[13]
문민정부 시절
민주계는
김영삼, 그 이후에는
이명박을 지지하고 현재는 은퇴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14]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는
김종필과 함께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15]
일부는
김영삼의 후계자로 옹립하자 했지만, 일부는
한나라당에서
이회창이
김영삼을 사실상 쫓아내서 사이가 안 좋았다.
[16]
조순과의 사이가 좋아서 그런지 대다수는 이회창을 따랐다.
[사법부]
황우여는 이미 판사 시절부터 이회창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입]
[영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