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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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郗超(336 ~ 377)
동진의 인물. 자는 경흥(景興). 아명은 가빈(嘉賓). 연주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출신. 치감의 손자, 치음의 동생.
2. 생애
어릴 적부터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재능이 두드러지게 뛰어나, 동진의 여러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출중한 담론 실력을 뽐냈다. 그리고 장성하여서는 정서대장군 환온의 연(掾)으로 임관하였다. 환온은 영웅의 기개와 고매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 남을 칭찬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지만, 치초와 대화를 마치고 그 재능을 헤아릴 수 없다 칭찬하며 예우하였다. 치초 역시 환온을 존경하여 진심으로 복종하였다고 한다.흥녕 원년(363년) 5월, 대사마 직위까지 겸하게 된 환온이 치초를 참군으로 삼았다. 환온이 매사를 처리할 때마다 항상 주부 왕순(王珣), 치초와 더불어 의논하니, 정서대장군부 내에서 "수염 덥수룩한 참군과 키 작은 주부만이 능히 영공(令公)을 기쁘게 할 수도 있고, 슬프게 할 수도 있다."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1]
흥녕 원년(369년) 3월, 전연의 명재상 모용각이 사망하자, 환온은 서연2주자사 치음, 강주자사 환충, 예주자사 원진(袁真)과 함께 조정에 전연 정벌을 청하였다. 당시 치음의 관할 아래에 있는 경구(京口)의 병력은 최정예라 할 수 있어, 환온은 항상 치음이 경구의 병력을 통솔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였다. 정세에 어두워 환온의 속마음도 모르던 치음이 서신을 보내 왕실을 도와 북벌을 돕겠다 전하니, 치초는 아버지의 서신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그것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그리고 노환으로 인해 경구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서신으로 새로 써서 이를 환온에게 전달하였다. 환온은 크게 기뻐하며 치음을 회계내사로 보내고, 스스로 평북장군, 서연2주자사까지 차지해 경구의 병력을 손에 넣었다.
흥녕 원년(369년) 4월, 환온이 전연을 정벌하기 위해 친히 보•기 50,000명을 거느리고 고숙(姑孰)에서 출병하였다. 치초는 변수(汴水)의 물이 얕아 조운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며 간언했으나 환온이 따르지 않았다.
흥녕 원년(369년) 6월, 환온군이 금향(金鄉)에 이르자, 가뭄까지 겹쳐 변수의 물이 완전히 마르고 말았다. 이에 환온은 황하로 조운할 계획을 세우고, 관군장군 모목지에게 명해 거야(巨野)에서부터 300리에 달하는 운하를 뚫어, 문수(汶水)의 물길이 청수(淸水)와 만나도록 하였다. 마침내 운하가 완성되자, 환온은 수군을 인솔하여 청수에서 황하로 들어갔고, 환온군의 배는 수백 리에 걸쳐 길게 뻗었다. 이를 본 치초가 황하의 운도(運道)는 복잡하고 어렵다며, 환온에게 2가지의 계책을 진언했으나, 환온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과연 환온군은 보급로 문제로 고생하다가 방두(枋頭)에서 전연의 명장 모용수에게 대패하니, 환온은 심히 창피해하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함안 원년(371년) 정월, 환온은 수춘(壽春)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후에 치초에게 물었다.
"이것으로 방두에서의 치욕을 씻기에 충분한가?"
치초가 답했다."이 정도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치초가 환온을 찾아와 말했다."명공께서도 걱정되시지 않으십니까?"
환온이 물었다."경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치초가 답했다."명공께서 중책을 맡으셨으니, 천하의 책임은 장차 공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만약
이윤과
곽광의 예에 의거해 황제를 폐위하지 못 한다면 사해를 제압하고 천하를 뒤흔들기에 부족해질 텐데,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환온도 본래 천하를 평정하려는 야망이 있었기에, 치초의 말을 깊이 새겨듣고, 그와 더불어 황제
사마혁의 폐립 계책을 모의하였다. 함안 원년(371년) 11월, 환온이 황제 사마혁과 그 황자들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 건강(建康)에 입성해 저 태후의 명령으로 사마혁을 폐위시켰다. 사마혁은 동해왕으로 강등당했고, 승상이던 회계왕 사마욱이 즉위하였으며, 폐제 사마혁의 아들 3명과 비 2명은 환온에 의해 살해당했다. 무려 황제까지 갈아치운 환온이 자신의 핵심 참모인 치초를 중앙으로 데려와 중서시랑에 앉히니, 치초의 권력은 조정 내에서도 대단하여 모든 대신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한번은 사안과 왕탄지가 치초를 방문하러 갔는데, 해가 저물 때까지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왕탄지가 떠나려하자, 사안이 그를 붙잡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잠시만 참으시오!"
라며 말렸다. 당시 치초의 권세가 위중함이 이러하였다.영강 원년(373년) 7월, 환온이 사망하자 치초는 사도좌장사로 옮겨지면서 그 권세가 이전만 못 하게 되었다. 이후 어머니가 사망하여 사직하고 모친상을 치렀다. 환온 사후 사인이 정권을 잡으니, 치초는 명공(名公)의 아들인 아버지 치음이 당연히 사안과 동등한 지위에 올라야 한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안이 조정의 기밀과 권세를 홀로 장악하여 치초는 매우 분개하였고, 그 감정을 숨기지 못 해 표정에 전부 드러났다. 사안 역시 치초의 마음을 알고 심히 한스러워하면서 두 가문은 서로 반목하였다.
모친상을 마치고 산기상시에 제수받았으나, 치초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 그를 임해태수에 임명하고, 선위장군을 겸하게 하였으나, 이번에도 응하지 않았다.
태원 2년(377년) 12월, 병에 걸린 치초는 죽을 것임을 감지하고, 임종 직전에 문하생에게 편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본래 태우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연배를 고려하면 분명 근심으로 상처를 입히는 폐를 저지를까 두렵구나. 내가 죽은 후에 아버지께서 수면이나 식습관에 지장이 올 정도로 슬퍼하신다면 이 상자를 드려라. 그러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냥 태워버리도록 하라."
오래지 않아 치초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2세. 과연 치음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병에 걸리고 마니, 치초의 문하생은 그 상자를 치음에게 건네주었다. 치음이 그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치초가 환온과 더불어 반역을 모의한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치초는 아버지가 동진 정권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알고 자신이 환온과 작당하는 것을 철저히 숨겨왔기에, 치음은 굉장히 분개하여"이 녀석이 너무 늦게 죽어 원망스럽도다!"
라 외치고는 바로 곡을 그만두었다.치초는 생전에 벗들을 예우하여 아름다운 우정을 유지하였고, 능력이 있다면 한미한 가문이라도 발탁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치초가 사망한 당일, 그를 애도하기 위해 글을 쓴 사람이 40명이나 되었다. 또, 부부 간의 금슬도 좋아서 아내 주씨(周氏)는 나중에 죽으면 치초와 함께 묻히겠다 고집하며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요청도 마다하였다. 다만 치초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사촌동생 치검지(郗儉之)의 아들 치승시가 후사를 이었다.
3. 기타
- 천사도 신자이던 아버지 치음과는 달리, 불교를 신봉하던 치초는 불교 경전을 전문가 수준으로 연구하여, 명승 축법태(竺法汰), 지도림(支道林) 등과도 항상 불교학의 반야 등에 대해 대등하게 토론할 정도였다. 치초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와 법신불을 특히 강조하면서, 유교와 불교의 융합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 치초는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치음은 본래 재물을 모으기 좋아하여 수만 전에 달하는 금전을 축재하였는데, 그 정을 잘 알고있던 치초는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면서 은근슬쩍 대화의 주제를 돈으로 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치음은 이를 눈치채고는 치초에게 딱 하루 동안만 창고의 돈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치음은 기껏해야 수백만 전 정도만 쓸 것이라 예상했지만, 치초는 창고에 있는 돈을 모두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그 많은 돈을 하루 만에 전부 탕진할 수 있었다.
-
치초가 환온의 참군을 지내던 시절, 환온이 반역의 마음을 품고 패왕의 기초를 세우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참모로서 적극적으로 계책을 내었다. 환온은
사안,
왕탄지를 만나 국정에 관해 의논할 때면 항상 치초를 장풍 뒤에 눕혀서 그 내용을 엿듣게 하였는데, 한번은 바람이 불어 장풍이 넘어지면서 치초의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때 사안이 웃으며 말했다.
"치생(郗超)은 가히 입막지빈(入幕之賓)이라 할만 하다."
오늘날 입막지빈은 "서로 기밀을 의논할 수 있는 상대"라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로 쓰인다.
[1]
치초는 수염이 많았고 왕순은 키가 작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