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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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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종교표지_도교_흰색.png
도교의 종파
후한말 태평도 오두미도(천사도)
위진남북조/수당 북천사도 남천사도 상청파 영보파
북송 신소파 청미파
남송/금 전진교 태일교 진대도교
정일도 정명도
무당파
용문파 오류파

1. 개요2. 역사
2.1. 삼국시대의 독립 세력2.2. 삼국시대 이후
3. 현대4. 관련 문서5. 관련 인물

1. 개요

五斗米道

철학이었던 도가 사상을 도교로서 종교화 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원류 종파. 후세에 장천사(張天師)라 불리는 장릉(張陵)(34년 ~ 156년)이 서천 지방의 영산인 학명산(鶴鳴山)에서 도를 닦고 경전을 정리하여 만든 도파로 장릉은 후일 청성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오두미도라 불린 이유는 입교하려면 쌀 다섯 두[1]를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앙정부에서는 미적(米賊)이라 불렀다. 도연명은 훨씬 후대의 인물이므로 그의 일화에서 오두미란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 오두미도는 삼국시대 초기에 일시적으로 쓰인 이름이고, 장로의 아들 장성이 강서성 용호산으로 옮기고 천사를 자칭한 후로 천사도(天師道)로 불리었다.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태평도와는 신[2] 앞에서 죄를 회개하여 병을 치유한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당시 사회에 교단이 어떻게 대응했는가 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크다. 태평도는 사회에 만연한 죄의 근원을 부패한 후한 정부로 간주하여 타도하고 태평도의 교리에 입각한 종교국가를 세움을 최종목표로 삼고 거사하였다. 반면 오두미도는 중앙정부와 직접 대립하기를 피하고 한중이라는 외곽지역에서 자신들의 이상에 입각한 독립적 사회를 형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이 태평도가 당대에 이미 사라진 반면 오두미도는 후대에까지 맥이 이어진 중요한 원인이다.

현대의 교단 종교로서 도교의 원류는 삼국시대의 태평도와 오두미도, 두 교단으로 여긴다. 태평도는 황건적의 난 탓에 자료가 거의 사라졌으므로, 초창기 도교 연구에서 비교적 기록이 많이 남은 오두미도는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장로가 항복하여 중원으로 이동한 뒤 그때까지 남았던 태평도의 신자들과 교리를 흡수했으므로 태평도 연구에서도 오두미도의 자료가 중요하다.

2. 역사

2.1. 삼국시대의 독립 세력

삼국시대에는 창교자의 손자 장로(張魯)(? ~ 216년) 후한 말의 혼란을 틈타 한중(漢中)[3]을 점거하고 제정일치의 독립 세력을 형성하였다.

전략에 이르길 희평 연간[4]에 요사한 도적들이 크게 일어났는데 삼보(三輔, 관중)에 낙요(駱曜)가 있었다. 광화[5] 연간에 동방에 장각이 있었고, 한중에는 장수가 있었다. 낙요는 백성들에게 면닉법(緬匿法)[6]을 가르치고 장각은 태평도를 만들고 장수가 오두미도를 만들었다. 배송지에 의하면 실질적으로 오두미도를 창시한 장수는 장로의 아버지 장형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장로가 죽인 별부사마 장수와는 별개의 인물로 보인다.

조용한 방을 만들어 하늘앞에서 죄를 회개한다는 교리에 따라 회개와 고백만 하는 '정실(靜室)'이란 건물을 짓고 그 방에 병자를 거처하게 하여 자신의 죄를 떠올리게 했다.[7] 신자 중에 간령(姦令), 좨주(祭酒), 귀리라는 간부급 지위를 두었는데, 좨주가 도덕경을 익히면 간령으로 승급되었다고 한다. 한편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주로 하는 귀리는 신자로 하여금 병든 사람의 이름을 적고 죄를 자백하는 의사를 설명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천지수(天地水) 삼신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삼관수서(三官手書)'라는 서약문 3통을 산꼭대기, 땅 속, 물 속에 두어 3신에게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다.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 즉 도덕경을 읽고 다리나 도로건설 등 공공사업 봉사를 하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더불어 의사(義舍)라는 무료 숙박 시설을 설치했는데 공짜로 가져갈 수 있는 음식인 의미(義米)와 의육(義肉) 등을 비치하여 나그네나 굶주린 자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식량은 신자들의 기부로 충당했고 이 역시 죄를 없애는 공공봉사로 봤다. 단,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탐하면 신령에게 벌을 받는다고 여겼다.

장로가 한중에 있을 때에 백성들이 장수의 사업을 믿고 따르므로 교세가 커졌다. 교사(教使)는 의사(義舍)를 만들어 쌀과 고기를 비치해서 행인들을 멈추게 하고 작은 잘못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은닉해주어 오두미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 죄를 면해주었다. 월령에 의거하여 봄과 여름에는 살생을 금지했고 술도 금지했다. 유민 중에 이 땅에 의지한 사람들은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종교 조직을 통해 한중을 풍족하고 평화롭게 다스렸기에 중앙 정부에서도 그를 인정하여 한녕태수를 맡겼다. 현대의 연구결과로는 오두미도가 추구한 제정일치의 이상 국가[8]에 당시 인근에 많이 거주한 저족(氐族) 등 이민족들도 다수 존재했다고 본다. 기록에도 "민과 오랑캐가 함께 즐긴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오두미도가 추구한 상부상조의 지역 공동체적 사회와 이민족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원시 공동체 사회가 어느 정도 비슷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단, 익주의 유장과는 선대부터 얽힌 치정관제 문제 때문에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215년 조조 한중으로 친정을 하자 장로는 곡물창고를 모두 불사르고 도망치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단지 열쇠만 걸어놓은 채 파중으로 피신하였다. 이를 본 조조는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으려고 하다니 과연 대단하다."라고 감탄한 뒤 투항을 권유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장로를 장군으로 삼고 다시 이 지방의 통치를 맡겼다. 이는 조조가 도가와 연관이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을 것이다.

2.2. 삼국시대 이후

조조가 오두미도의 전파를 용인했기 때문에 오두미도는 끊기지 않고 계속 전파될 수 있었고, 장로의 아들 장성이 본산을 용호산으로 옮긴 이래로 천사도(天師道)로 불렸다. 그때부터 대제주와 제주들이 독립하여 분파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

이후에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는 구겸지가 북천사도(北天師道)와 육수정이 남천사도(南天師道)로 세우면서 분파되고 천사도를 지식인들 계층까지 받아들였다. , 을 거치면서 이를 합치고 또한 도교의 상청파(上淸派), 영보파(靈寶派), 정명파(淨明派) 등을 합쳐서 정일교(正一敎)라 불리게 된다.

, , 시대까지 도교의 중대한 계파가 되어 지금도 천사도를 믿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3. 현대

현재는 64대 장천사 장원선이 2008년 우화(羽化)[9]한 뒤 후계자들 간 갈등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장천사 자리가 비어있었다. 2020년에 들어서야 65대 장천사인 장의장(張意將)이 선출되었지만 2000년대 까지와는 다르게 2010년대 이후로는 천사도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고 있어서 선출된 것에 대한 여부는 다들 아무 상관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파일:청성산1.jpg

오두미도의 대표적인 성지는 청성산(青城山) 으로 1대 천사(天師) 장릉(張陵)이 이곳 청성산에서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많은 도교 수행자들이 청성사를 찾았고, 청성산은 천사도계 도교 종파의 종산이 되어 현재까지도 참배가 이어진다고 한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보통 청두에서 도강언과 묶은 관광코스로 많이 찾는다.

4. 관련 문서

5. 관련 인물

  • 시조: 장도릉(張道陵) 장릉(張陵)
    • 제자: 왕장(王長), 조승(趙升)
  • 2대: 장형(張衡)
  • 3대: 장로(張魯)
  • 4대: 장성(張盛)
  • 36대: 장종연(張宗演)

[1] 현대의 도량형으로는 약 1리터 정도. [2] 당시의 표현으로는 하늘(天) [3] 지금의 섬서성 남부 [4] 영제 연호. 172년 5월에서 178년 3월 [5] 178년 3월부터 사용하여 184년 12월 황건적의 난이 비로소 진압하자 개원하였다. [6] 도교에서 사용하는 은신법의 일종. [7] 헌데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현명한 행위인데, 병사를 치료하지는 못하지만 병자를 격리해놓았기에 결과적으로 병이 전염되는 걸 막는다. 즉, 고대 버전의 격리 행위인 셈. 게다가 종교 시설 특성상 위생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므로 환자의 추가 감염을 최대한 방지하는 효과는 덤. [8] 이상적인 국가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보다 이상(여기에선 종교적 이상)을 추구한 국가라는 뜻. [9] 도교에서 사망을 높이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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