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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2d2f34><colcolor=#670000,#f9d537> 생애 및 활동 | <colbgcolor=#fff,#1f2023> 생애 | 제1차 요동정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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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상지은니묘법연화경 |
제1차 요동정벌 第一次 遼東征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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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357년 (공민왕 6년) 6월 계축일 ~ 1370년 (공민왕 19년) 11월 4일 | |
▲ 제1차 요동정벌 진행도 |
||
장소 |
북원 파사부 (現 중국 단둥 시 일대) |
|
북원 오녀산성 (現 중국 랴오닝성 환런자치구 오녀산성) |
||
북원 요동성 (現 중국 랴오양 시 일대) |
||
원인 |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책 추진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고려 (공세) 승
|
친원세력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이인임 (서북면도통사) |
지휘관 기사인테무르 (대장군) |
참가자 지용수 (상원수)[1] 이성계 양바얀 임견미 정원비 최혁성 김용진 이구 최공초 홍인계 배언 |
참가자 이원경[2] 김바얀 ◎[3] 송보리 ◎ 법독하 ◎ 아상개 ◎ 카라바투 ◎ 덕좌불화 ◎ 고다루가치 ◎ 처명 ← |
|
병력 | 15,000명 이상[4]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고려의 승리 | |
영향 |
*
이성계의 영향력 강화 * 고려 정부의 2차 요동 정벌 의지 발현 |
[clearfix]
1. 개요
공민왕 때 있었던 고려의 원정이자 한국사에서 한(韓)민족이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요동 땅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령까지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5]제1차 요동 정벌이라는 표현 외에도 동녕총관부 정벌이라는 표현도 쓰인다. 정확히 고려가 쳐부순 세력은 요동으로 이전된 동녕총관부에 웅거했던 평장사(平章事) 기사인테무르[6]와 동지(同知) 이원경 세력뿐이고 나하추, 에센부카, 유익 등 다른 요동 군벌들은 존속했기 때문에 요동 지역 전체를 점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 당시 정세
원나라는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1351년 홍건적이 봉기하는 등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해였던 원나라는 내부 반란 진압에 힘을 쏟기 위해 외부보다 내부에 신경을 더 쓰기 시작했다. 요동의 동녕총관부와 쌍성총관부는 예전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은 고려로서는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적기가 찾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한편 12살에 원나라로 끌려가 11년간 붙잡혀 있던 강릉대군은 당시 고려와 원나라 정세를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형 충혜왕은 온갖 병크를 저질러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원나라에 끌려가 독살당했고, 자신보다 어린 조카들인 충목왕,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곳곳에서의 내부 반란만으로 원나라가 붕괴될 수도 있는, 긴박하던 상황도 지켜보고 있던 강릉대군은 1351년, 22살의 나이로 볼모를 마치고 고려에 돌아와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중흥을 위해 "반원"을 기치로 내건 공민왕이다.
3. 파사부 정벌
令宰樞至吏胥 人備弓一 矢五十 劒一 戈一 閱于崇文館。
재추(宰樞)[7]로부터 이서(吏胥)[8]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원들에게 분부하여 활 1개, 화살 50개, 검(劒) 한 자루, 과(戈)[9] 한 자루를 갖추게 한 다음 숭문관(崇文館)[10]에서 사열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권38
공민왕 원년(1352년) 윤 3월}}}재추(宰樞)[7]로부터 이서(吏胥)[8]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원들에게 분부하여 활 1개, 화살 50개, 검(劒) 한 자루, 과(戈)[9] 한 자루를 갖추게 한 다음 숭문관(崇文館)[10]에서 사열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공민왕은 1351년, 즉위 직후 시행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군사 검열이었다. 친원 세력이 버티고 있던 요동을 정리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조상이자 전대의 왕인 고려 숙종과 마찬가지로 내부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공민왕 재위 초 고려의 영토와 주변 상황[11]
요동 정벌에 대해 재위 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압록강 건너 요동으로 가는 길목인 파사부 공략이었다. 1357년, 공민왕 6년 6월에 인당에게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고구려 부흥 세력의 고연무와 신라의 설오유의 연합작전 이후 최초로 한반도 안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 원정을 한 것이다.
癸丑。印璫引兵渡鴨綠江 攻婆娑府等三站 破之。
계축일. 인당(印璫)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세 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다.
원은 요동의 주요 도로마다 역참을 설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파사부였다. 파사부는 지금의
랴오닝성
단둥시 일대로
압록강의 하구로서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통로이다.
고구려
미천왕 때 점령한 서안평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그 후에 고구려에서는 구련성(九蓮成)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러일전쟁 당시에도 만주 진출을 노리던
양
국이 충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만주 진출시 가장 먼저 점령해야 될 요충지였다.계축일. 인당(印璫)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세 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다.
그 후 명나라가 건국한 직후인 1368년,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는 공민왕의 본심이 아니었다. 요동은 명나라와 원나라 모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내부 친원 세력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빴고, 원나라는 더 이상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2] 최영, 이성계, 이인임 등 고려의 정치적 주역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면 안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370년 1월 겨울. 고려는 파사부에 이어 요동성으로 가는 주요 요충지인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이 있었던 오녀산성을 공략한다.
4. 요동을 정벌하다
4.1. 오녀산성 공격
{{{#!wiki style="margin:24px 0 0 16px;float:right;width:40%;max-width:500px;font-size:.9em;"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우라산성).}}}
우리 태조가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13]을 넘어 6백여 리를 진군해 설한령(雪寒嶺)[14]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7백여 리를 행군해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저녁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 찼는데 그 빛줄기가 모두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서운관(書雲觀)[15]에서 그것을 두고 맹장(猛將)의 기운이라고 보고하자 왕이, "내가 이성계를 보내니 하늘에서 응답한 것이 틀림없다."라고 기뻐했다. 당시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이동해 들어간 다음 험한 지세에 의지해 저항하려 했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당도하자 이오로테무르가 와서 응전해 보다가 잠시 후 무장을 해제하고 큰 절을 올리며, "제 선조도 본디 고려인이니 저도 고려의 신하가 되겠습니다."고 하면서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이오로테무르는 뒤에 이원경(李原景)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한 채 계속 저항해오므로 아군은 성을 포위했다. 마침 태조가 활이 없는지라 종자의 활로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면상을 명중시켰다. 이에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기세가 꺾여버렸으며 고안위는 처자를 내버려둔 채 밤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도주해 버렸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성을 나와 투항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여러 성들도 모두 투항해 오니 1만을 넘는 민호가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노획한 소 2천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자 수많은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물결같이 귀순해 왔다. 이에 따라 동쪽으로 황성(皇城), 북쪽으로 동녕부, 서쪽으로 바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적이 일소되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고려사》 공민왕 19년 봄 정월}}}{{{#!wiki style="text-align:right"
이때 동원된 병력은 총 15,000명이었는데 서북과 동북의 병사는 각각 보병 9,000명, 기병 600기 / 보병 4,700명, 기병 200기에 불과했고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친위 병력은 1,6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 동원된 병력은 중앙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 → 함흥 → 강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오녀산성[16]을 쳤다. 훗날 용비어천가에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할 때 활약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을 공략할 때 이성계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이성계는 난전 속에서 본인 활도 아니고 종의 활을 빌려서 편전을 쐈는데 70발 모두를 적의 머리에 구멍을 내버렸다. 이러한 초인적인 포스를 풍긴 이성계의 활약으로 성을 함락시키고 10,000호가 넘는 사람들이 투항했고 그 결과 고려 정벌군은 파사부와 우리산성이라는 두 개의 주요 길목 점령에 성공하며 요동성 정벌에 한발 더 다가섰다.
[clearfix]
4.2. 기사인테무르의 거병
오녀산성 정벌이 있은 후 기사인테무르는 고려 출신 벼슬아치인 김바얀과 손을 잡고 요동 일대에 남아있던 원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기사인테무르는 공민왕에게 병신정변으로 살해당한 권신 기철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1290년(충렬왕 16년) 서경( 평양)에서 요동으로 이전된 동녕총관부를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켜 고려 북쪽을 침공했다. 고려는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 후, 곧바로 그들의 본거지인 요동성으로 칼끝을 돌렸다.[17]4.3. 요동성을 공격하다
1370년, 10월 공민왕은 요동성에 남아 있던 기사인테무르를 잡아족치기 위해서 원정군 총 책임자인 도통사 시중 이인임을 필두로 야전군 총 사령관인 서북면도원수 지용수, 서북면부원수 양바얀, 동북면원수 이성계, 안주상만호 임견미가 이끄는 군대가 요동으로 향했다.丁亥。我太祖與池龍壽等 至義州 造浮橋 渡鴨綠江。
11월 2일. 우리 태조가 지용수 등과 함께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10월 30일경 압록강에 만호 정원비, 최혁성, 김용진이 만든 부교는 말 세필이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고 전해지는데 전군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는 데만 3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때 빨리 건너려다가 죽은 군사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월 2일. 우리 태조가 지용수 등과 함께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11월 2일, 압록강 도하를 마치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번개가 내려치자 병마사 이구가 병사들에게 "용이 움직일 때면 반드시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는 법이다. 지금 상원수(上元帥)의 이름이 용(龍)인데[18] 그 분이 도강하는 날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니 이는 전투에서 승리할 조짐이 틀림없다."라며 병사들의 동요를 막았다.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까지의 거리가 이틀간의 노정(路程)이므로 치중(輜重, 군수품(軍需品))을 남겨 두고, 7일간의 양식만 가지고 출발하였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 최공철(崔公哲)[19] 등으로 하여금 경기(輕騎) 3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요성에 나아가 습격하니, 저들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더불어 싸웠는데, 대군(大軍)이 잇따라 이르자, 성안에서 바라보고는 낙담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동국통감》 권 49 고려기 공민왕 19년}}}{{{#!wiki style="text-align:right"
도강후 요동성 동쪽 200리(약 80km) 지점인 나장탑에 도착했는데 이를 계산하면 당시 고려군은 하루에 100리씩 행군을 한 셈이다.[20] 그리고 기적의 행군으로[21] 나장탑에 고려군 주둔지를 설치한 후 지용수는 비장 홍인계, 최공초 등에게 기병 3,000기를 주어 요동성을 공략하게 하고 본대는 뒤이어 따라가기로 했다.[22] 그리고 단순한 공격뿐 아니라 심리전을 펼쳤는데 "요동 땅은 원래 우리 땅이었고 요동 백성은 우리 백성인데 이제 되찾으러 왔다. 다만 투항하면 봐줌"이라는 방을 요동성 곳곳에 띄웠다.
요동성 복원도.
기사인테무르는 기병 3,000명을 상대하기 위해 공성을 하지 않고 병력들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왔으나 고려군 본대가 도착해 이들을 싹 쓸었다. 이때 이성계의 무용담이 《 용비어천가》와 《 고려사》지용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기사인테무르가 이끌고 나온 장수중에 처명(處明)이라는 자가 있는데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 싸우자 이성계가 몽골어를 할 줄 아는 이원경에게 항복 권유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자 이성계는 활을 들어 처명의 투구를 날려버렸고 두 번째 권유에도 거절하자 처명의 허벅다리를 맞춰버렸다. 이에 처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렸고 이성계는 놔줬다.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온 처명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걸었는데 이원경이 세 번째 설득을 했다. "이번에 말에서 안내려오면 머리를 맞추겠다" 결국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이성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야기.[23]
처명이 항복하자 어떤 자가 성 위에 올라와 "우리는 항복하려고 했는데 성주가 강제로 싸우라고 우릴 몰아붙이고 있다. (나를 비롯한 일반 백성들은 싸울 의도가 없으니) 공격하면 거저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소리쳤으며 이에 고려군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己丑。進襲遼城 急攻拔之。
11월 4일. 요성(遼城)까지 진격한 아군이 적을 급습해 함락시켰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고려사》 공민왕 19년 11월}}}11월 4일. 요성(遼城)까지 진격한 아군이 적을 급습해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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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또 나무와 돌도 섞이어 쏟아져 내렸으나, 우리 보병(步兵)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에 다가가 급히 공격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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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권 49 고려기 공민왕 19년}}}{{{#!wiki style="text-align:right"
반나절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1370년 11월 4일, 대조영이 세운 발해 멸망 후 444년만에 또한 고영창의 대발해가 멸망한 지 254년만에 고려는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다. 아쉽게 기사인테무르를 잡진 못했지만 그의 측근인 김바얀을 사로잡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 후 공민왕은 동녕총관부에 "우리가 요동을 친 건 기사인테무르가 감히 원나라 황제의 이름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요동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땅이었으니 따지지 말라"라는 내용을 요지로 한 공문을 보냈다.[24] 그 후 다음 달인 12월에 강계만호부에 지시해서 고려로 귀화할 시 요동에다 땅을 주고 고려의 백성과 똑같이 대하도록 했다.
정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동녕부(東寧府)에 자문(咨文)을 보내 말하기를,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는 자기 아버지가 반란을 모의하다가 처형당한 뒤부터 복수심과 깊은 원한을 가지고 항상 반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황제가 북쪽으로 옮겨갔는데도 호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동녕부와 요양(遼陽) 등지에 몸을 숨기고 분성(分省)과 분원(分院)의 관리들과 결탁하였는데, 그 뜻은 〈원의〉 위세를 빌리려는 데 있습니다. 〈원 황제가〉 돌아가셨는데도 통보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만족시켰으니, 공의(公義)를 옳게 여긴 것입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요심(遼瀋) 지역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국경 경계 지역인데, 사대를 한 이래로 인척관계를 맺고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되어 행성(行省)이 관할하도록 맡겼는데, 기새인첩목아가 차지하여 소굴로 삼고는 위로는 조정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아래로는 우리나라에 사단을 낳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지난해에 군대를 파견하여 쫓아가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교함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고, 도리어 그는 고치지 않으면서 다시 전과 같은 계획을 꾸몄습니다. 이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죄를 묻고자 하였는데, 그놈이 악(惡)에 빠져 있어 항거하며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그 형세가 중지하기 곤란하였기에 드디어 나아가 공격하여 파괴하였으며, 본인은 도주하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본인이 이미 이와 같이 근본을 잊고 싸움의 원인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니, 성(省)과 원(院)의 관리들이 뒷날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습니다.
악을 제거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근본에 힘써야 하므로 군대 파견은 불가피하며, 전날의 일은 오직 기새인첩목아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것일 뿐입니다. 몽고와 한인(漢人)들은 모두 관련이 없는 일이며, 그가 만약 혹시 몰래 도망쳐 그곳에 있다면 즉시 체포해서 보내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2일 동녕부에 기새인티무르를 압송해주길 요구하다}}}“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는 자기 아버지가 반란을 모의하다가 처형당한 뒤부터 복수심과 깊은 원한을 가지고 항상 반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황제가 북쪽으로 옮겨갔는데도 호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동녕부와 요양(遼陽) 등지에 몸을 숨기고 분성(分省)과 분원(分院)의 관리들과 결탁하였는데, 그 뜻은 〈원의〉 위세를 빌리려는 데 있습니다. 〈원 황제가〉 돌아가셨는데도 통보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만족시켰으니, 공의(公義)를 옳게 여긴 것입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요심(遼瀋) 지역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국경 경계 지역인데, 사대를 한 이래로 인척관계를 맺고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되어 행성(行省)이 관할하도록 맡겼는데, 기새인첩목아가 차지하여 소굴로 삼고는 위로는 조정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아래로는 우리나라에 사단을 낳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지난해에 군대를 파견하여 쫓아가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교함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고, 도리어 그는 고치지 않으면서 다시 전과 같은 계획을 꾸몄습니다. 이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죄를 묻고자 하였는데, 그놈이 악(惡)에 빠져 있어 항거하며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그 형세가 중지하기 곤란하였기에 드디어 나아가 공격하여 파괴하였으며, 본인은 도주하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본인이 이미 이와 같이 근본을 잊고 싸움의 원인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니, 성(省)과 원(院)의 관리들이 뒷날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습니다.
악을 제거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근본에 힘써야 하므로 군대 파견은 불가피하며, 전날의 일은 오직 기새인첩목아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것일 뿐입니다. 몽고와 한인(漢人)들은 모두 관련이 없는 일이며, 그가 만약 혹시 몰래 도망쳐 그곳에 있다면 즉시 체포해서 보내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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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에 명령하여 요심(遼瀋) 지역의 사람들에게 방을 붙여 타이르게 하였는데, 그 방에 이르기를, “
요양(遼陽)은 원래 우리나라의 국경이고, 대군이 또한 출동하였으니 선량한 사람들까지 피해가 갈까 두렵다.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여 각기 생업이 안정될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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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2일 요심 지역민의 귀부를 선무하다}}}{{{#!wiki style="text-align:right"
그 후 요동에 있는 원나라 세력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그 지역에 살던 고려인 세력의 귀부를 받아들여 고려측 세력으로 흡수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요동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5. 어처구니 없던 실수, 그리고 퇴각
성을 점령한 그날 저녁에 부대를 성의 동쪽으로 옮긴 후 나하추와 에센부카를 설득하는 방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5일. 밤에 붉은 기운이 군영에 들어와 불처럼 피어오르자 일관이었던 노을준이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닥쳤으니 진지를 옮겨야 무사할 것 같다고 건의했으며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석성[25]의 고가노를 공격하러 온 배언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철수했다.初城陷 我軍火倉廩殆盡 由是 軍中乏食。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군이 창고에 불을 놓아 거의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군영 내에 식량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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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지용수 열전}}}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군이 창고에 불을 놓아 거의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군영 내에 식량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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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성이 함락되자, 우리 군사가 창름(倉廩)을 거의 다 불질러 양식을 취할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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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권 49 고려기 공민왕 19년}}}{{{#!wiki style="text-align:right"
이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전투를 벌이다가 실수로 성 내의 군량고에 불이 붙어 군량이 죄다 타버렸다는 점이었다. 가져온 식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고려 본국에서도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퇴각하는 도중에 소와 말을 잡아 먹었으며 부대는 제대로 대오를 갖출 수가 없었고 그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거기다 지용수는 장수들이 일직선으로 이동하자는 말을 쌩까고 빙빙 돌아가는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는데 이런 것들이 더욱 부대 내 불만을 키웠다. 결국 지용수도 이를 인식했는지 해변을 따라 이동하던 것을 지름길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이때 추격을 대비해서 야영을 할 때는 반드시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어 놓게 했다. 그 덕에 나하추가 이틀간 추격을 해왔을때 "변소와 마굿간을 만든 것으로 보아 대오가 질서정연하니 습격하는 것은 무리"라며 퇴각했다.
11월 9일, 송참에 이르러서 나천서(羅天瑞)가 곡식 수백 석을 가져다 주어 군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전투 당시 전사자보다 복귀시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여진족들이 고려인은 성을 빼앗고 지키는 걸 아주 쉽게 한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 뒤로는 지금까지 한민족의 영향력이 요동에 미치는 일은 없었다.
6. 그 이후의 요동 정벌
1차 요동 정벌이 시행된 다음해 5개월후인 1371년 3월, 북원의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부하려 했으나 명나라가 요양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한 나머지, 요양이 본시 고려땅이니 고려조정에서 명나라에 요청하면 이주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우리 조정에 사자를 보내 의사를 타진해 왔으나 고려는 무응답이였다.공민왕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했는데 정몽주가 돌아간 후 홍무제는 "고려가 명나라에서 첩보 활동함. 정조사(正朝使)로 온 사신은 한 달이면 올 거리를 4개월에 걸쳐서 명나라를 활보한 후에 베이징에 도착했는데 이게 의심스러움.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길래 그놈을 손발 묶어 물속에 던져놓더니 살려달라며 한어(중국어)로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는데 그놈이 꼰지를 바로는 "올 때는 육로로 왔고 갈 때는 해로로 갈 겁니다"라고 했는데 이건 산동 일대를 정탐하기 위해서임."이라고 말을 하며 고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내비쳤다. 심지어는 " 고려가 우릴 치게 만들자, 그러면 우리가 배 8척 ~ 9척을 건조해서 고려를 3개월 만에 조질 수 있음"이라는 강경한 발언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공민왕은 이후 "동녕과 요양이 명나라에 귀화를 안 했으니 야만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방어해야한다"라며 결국 요동을 내어주고 그나마 있는 우리 땅을 잘 지키자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요동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게 된다.
이후 1371년( 명태조 4년) 4월에 명나라는 북원에 있던 요양행성을 점령하고 요동 서남부에 정요위와 요동 도사를 설치했다.
이에 1371년 9월 문하찬성사 서경도만호 안우경(安遇慶)이 안주상만호 이순(李珣)과 오로산성[26]을 다시 쳐서 10월에 함락시켜 왕카라부카를 생포하여 귀환한다.
본격적인 다음 요동 정벌은 고려 우왕 때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최영의 주도로 하려다가 이성계 지휘하의 공요군이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그리고 조선 건국 후 이성계가 즉위하고 명나라와 표전문 문제로 갈등을 빚자, 정도전의 주도 하에 제3차가 있을 뻔 했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무산되었다.[27]
7. 고려 요동영유의 실현성
이성계라는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무장과 함께 혼란했던 중국 대륙의 상황을 감안해 ' 요동성을 점령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하지만 들여다 보면 군량고를 불태우지 않았더라도 당시 고려가 요동을 점령하고 나서 유지할 역량이 있었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이유는 당시 고려의 꼴이 말이 아니었으며 요동에 군벌과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동 원정을 감행한 군대에 대한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는 데다가 요동을 노리고 있던 명나라도, 골칫거리였던 나하추도 건재했고 동북쪽(연해주, 함경도, 간도 일대)으로는 여진족 문제도 있으며 동남쪽에서는 왜구들이 등뒤를 노려대는 판이었다. 결국 장성을 쌓아야하는데, 산 정상에다가 장성을 쌓으면 확실히 방어는 쉬워지지만 문제는 국경도 훨씬 길어지기에 고구려의 천리장성처럼 긴 수비 인력이 많이 필요하고 덩달아 식량도 그만큼 더 있어야 하므로 국가 재정도 위험해진다.
거란이 발해를 20년 넘게 못 무너트리다가 장성이 없는 쪽으로 우회해 바로 수도를 함락시킨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제대로 하려면 고구려 영역 전체를 장성으로 세워야하는데 쉽지가 않다. 진시황 때부터 만리장성을 계속 쌓은 명나라도 망할때까지 완공을 못했고 현재까지도 중국 영토를 다 연결 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유목민족에게 계속 함락되어 제역할도 못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만 보더라도 요하강이 있는 곳에 쌓았다는 점. 송화강쪽에는 장성을 쌓지 않았다. 요하강과 송화강 사이에 강이 없는데 결정적으로 거란이 이쪽으로 우회해 쳐들어와 발해가 함락되었다. 4군 6진의 압록강과 두만강처럼 방어하기는 좋지만 국경이 넓어져 여러 문제가 생긴다. 이를 다 해결한다고 해도 후에 만주족(후금)이 청나라까지 세우게 되어 요동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대 지도부들도 무리하게 1차 요동정벌, 동북 9성의 실패를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이를 포기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서 한반도만 지키기로 결정했었다는 것.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건 아니었고 후세에 기회가 있을때 만주를 찾자고 후대에게 희망을 넘겼었다.
당시 여진족은 과거의 여진족이 아니었다. 여진족들이 부족간 전쟁으로 융합되어 가고 있어서 과거 한민족 국가의 피지배 계층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었다. 압록강 부근에 호바투라는 여진족의 경우 이성계조차 애먹을 정도로 세력이 컸고, 원의 잔여 세력들만 해도 유익이 귀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40,000명을 움직였다. 심지어 이때는 전력도 아니고 고려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정도였다. 위화도 회군 시절 고려가 50,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요동 지역에 병력은 못해도 100,000명이 넘는다는 뜻이었다.[28] 물론, 요동의 군벌들이나 세력들은 대부분이 고려에 친화적이었던 만큼 무조건 달려든다라고는 못하지만 고려에 항복을 할 정도인가 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당장에 위의 나가추가 고려가 요동에 군대를 보내자 군대를 끌고 추격해왔고 유익의 명 귀부 후 움직일 때도 고려를 경계하고 있었다. 즉, 명이라는 강적을 앞두고 자기 세력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치기 위해 친하게 지내려는 거지, 요동이란 땅을 고려가 가지는 걸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전선이 짧고 압록강, 두만강이라는 자연 국경이라도 있는 한반도와 달리 요동은 중원 방면으로는 그나마 요하나 대릉하 등이 자연 경계선 노릇을 해주지만 내륙 송눈 평원 방면으로는 부여강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자연 경계도 없이 휑한 벌판을 수비해야 했다. 여기까지 갈 정도면 후의 동북 6진 저리가라 할 정도의 대역사다. 아니면 요하에서 압록강까지 장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장성을 건설하거나 해야 할텐데 당장 원정군 보급도 못 받았었다.
특히 요동 정벌 후에도 남쪽의 왜구들은 굉장히 골칫덩어리였다. 고려 말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주요 병력들이 내려가는 상황도 벌어졌기에 요동성을 유지할 만한 병력을 파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6여 년 후엔 왜구들 때문에 서해 해안가에서 매우 가까운 개경에서 안쪽 내륙으로 천도를 하자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다. 실제 이성계도 2차 요동 정벌 당시 반대의 이유 중 하나로 왜구의 준동을 들었으며 이는 현실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 시점에서 남한 지역이 왜구에게 공격받고 있었을 정도로.
결정적인 문제는 요동의 영유가 후방으로부터의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을 요구한다는 데 있었다. 명색이 국가적으로 총력을 기울인 대외 원정이 현지 식량고 하나 날려먹었다고 허겁지겁 철수할 지경이면 이미 견적 다 나온 일이다.[29] 요동의 농업 생산력이 충분해서 초반 사민과 개척 이후에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도박을 해 볼 만 했겠지만, 당장 고려군이 철수한 뒤 선양을 근거지로 요동 평야를 점유했던 나하추도 고려와의 교역이 끊기자 버티지 못하고 명에 귀부했으며[30] 3세기 후 만주족도 요동의 농업 생산력이 부족하여 고생한 적이 있다. 그나마 동해 난류의 영향으로 온난하다는 함경도 해안 지방도 개척에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는데 시베리아 한파가 직접 몰아치는 요동이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31]
당장 요동 정벌 이전에 고려는 함경도 해안가를 점유하여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함경산맥과 동해를 끼고 9성을 쌓아 종심 방어 개념의 선형 방어진을 구축하였지만 함경산맥의 계곡과 샛길 등으로 침투해 들어와 게릴라전을 펼치는 여진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후방에서 안 그래도 부족했던 보급품마저 털리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의 사건 때문에 최전선에 있는 성들은 보급과 병력 충원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누적시키다 결국 철수시킨 사례가 있었다.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이의 땅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보급을 실시하고, 나아가 여진족(+몽골)이 포기할 때까지 방어하는 것은 고려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세의 학자 정약용도 "요동을 소유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우리 국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그거 방어하느라고 백성들의 삶은 몇 배나 더 고단해졌을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바로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강대국이 되고자 한다면 (나라가 부강하고 군사가 강성하다는 전제하에) 반드시 수복해야 한다"라며 덧붙였다. 해당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12권 요동론(與猶堂全書 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遙東論)
고구려 때는 강토를 멀리 개척하였다. 그 북부는 실위(室韋)에 접했고, 그 남부는 개모(蓋牟)(지금의 산해관 (山海關) 이동이 모두 그 땅이다)에 이르렀다.
고려 이래로부터 북부, 남부는 모두 거란이 차지하였고, 금, 원 이후 다시는 우리 것으로 되찾지 못하였고 압록강 일대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 세종, 세조 때에 이르러 마천(摩天) 이북으로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바둑돌처럼 설치하였으며, 밖으로는 창해에 닿았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되찾지 못하였다. (다른 여러)논자는 그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서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과 세조 때는 대명이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과 심양의 사람들이 기내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오히려 여러 오랑캐에 속했다 해도 이조(二祖)께서 이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째서인가? 척박한 황무지로 이득이 없는 땅을 얻고 천하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영명한 군주라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당 때에도 오히려 주, 진 때의 옛 일을 살펴 도읍을 관중에 정한 후에 위세를 얻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고로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바는 오로지 동서 이경(낙양과 장안)의 우열뿐이었다.
대명의 성조 문황제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 제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대명【부】(大名【府】) ( 북경(北京)을 의미)에 귀속시켰다. 이후 중국의 주인은 이를 바꾸지 않았고 대명부는 중국의 도읍이 되었다. 이러한 즉,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으로 두 강(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강역의 형태가 혼연히 천혜의 요새이니 요동을 얻는 것은 반대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어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나라가 부강하고 병사가 강성하여 하루 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한걸음이라도 중원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 요동을 얻고 동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경계를 넓혀 흑룡강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우측(서쪽)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32]
고구려 때는 강토를 멀리 개척하였다. 그 북부는 실위(室韋)에 접했고, 그 남부는 개모(蓋牟)(지금의 산해관 (山海關) 이동이 모두 그 땅이다)에 이르렀다.
고려 이래로부터 북부, 남부는 모두 거란이 차지하였고, 금, 원 이후 다시는 우리 것으로 되찾지 못하였고 압록강 일대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 세종, 세조 때에 이르러 마천(摩天) 이북으로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바둑돌처럼 설치하였으며, 밖으로는 창해에 닿았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되찾지 못하였다. (다른 여러)논자는 그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서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과 세조 때는 대명이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과 심양의 사람들이 기내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오히려 여러 오랑캐에 속했다 해도 이조(二祖)께서 이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째서인가? 척박한 황무지로 이득이 없는 땅을 얻고 천하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영명한 군주라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당 때에도 오히려 주, 진 때의 옛 일을 살펴 도읍을 관중에 정한 후에 위세를 얻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고로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바는 오로지 동서 이경(낙양과 장안)의 우열뿐이었다.
대명의 성조 문황제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 제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대명【부】(大名【府】) ( 북경(北京)을 의미)에 귀속시켰다. 이후 중국의 주인은 이를 바꾸지 않았고 대명부는 중국의 도읍이 되었다. 이러한 즉,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으로 두 강(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강역의 형태가 혼연히 천혜의 요새이니 요동을 얻는 것은 반대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어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나라가 부강하고 병사가 강성하여 하루 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한걸음이라도 중원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 요동을 얻고 동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경계를 넓혀 흑룡강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우측(서쪽)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32]
8. 대중매체에서
제2차 요동정벌(위화도 회군)과는 달리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9. 같이보기
[1]
야전의 활약으로는 이성계가 더 유명하지만 지용수는 상원수라 불렸던 점으로 볼 때 야전군의 최선임 장군이자 원정의 실질 책임자였던 걸로 보인다.
[2]
몽골식 이름은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 쉴레이만 메흐니라는 이름도 있는데
튀르크식 이름인 듯 하다. 동녕총관부에서 싸우다 고려에 투항했다. 아들 이인화(李仁和)는 세종, 문종 치세에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하였다. 손자는
이시애의 난을 일으킨
이시애이다.
#
[3]
원나라 승려가 통제원의 여종과 간통해서 낳은 인물. 장군의 위치에 올랐으나 전투 때 포로가 되었고 회군한 고려군이 안주(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에 도달했을 때 김바얀이 무례한 말을 해서 지용수가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
요동성 공략시 95,000명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오녀산성 공략시 15,000여 명, 파사부 공략시 병력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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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범위를 만주로 넓히고 '시도'까지 포함한다면
대한제국의
간도 관련 시도가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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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신
기철의 아들이다. 공민왕에 의해 기철 일가는 몰살당했지만 살아남은 기사인테무르는 요동을 근거지로 삼아 복수를 천명하고 거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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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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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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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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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왕의 직속기관이다. 초기에는 숭문관이라 불렸지만 성종 14년에 홍문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문신 중에 학식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로 임명했다. 충렬왕 24년에 숭문관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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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도에서는 압록강을 살짝 넘어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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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난 후 생긴 북원은 1388년 멸망한다. 명나라 건국 후인 1368년에 곧장 멸망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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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에서 장진으로 가는 교통로이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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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강계군 용림면과 함경남도 장진군 서한면 사이에 있는 고개
[15]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기상 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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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우라는
만주어로 강을 뜻한다.
아무르 강의 만주어 이름이 바로 사하리얀 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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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동녕총관부에 보낸 공문에서 "기사인테무르가 건방져서 우리가 손봐준거임."이라는 글이 씌여진 것으로 보아 기사인테무르는
좋은 핑계거리였을 뿐인 걸 알 수 있다. 다만
공민왕은 명나라와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인테무르를 핑계로 대고 요동 정벌에 나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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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수 지용수(池龍壽)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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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에는 최공초(崔公招)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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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지용수 열전, 《고려사절요》,《용비어천가》에서는 이틀 거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병감》에서는 3일 거리라고 한다.
[21]
하루에 40km씩 4일간 행군하는 거리를 이틀만에 주파했다는 소리다.
천리행군이 400km를 6일에 걸쳐서 진행한다는 것만 봐도 3일동안 200km를 걷는다는 소린데,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은 하루를 더 앞당긴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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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부 병력은 만호 배언(裴彦)에게 주어 석성에서 농성 중인 요동성평장 고가노를 저지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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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처명은
황산대첩 때 이성계가 고립되어 위기에 처하자 죽기 살기로 싸워 이성계를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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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알다시피 건국 초기 부터 대놓고
고구려의 후계국을 자처하던 나라여서
고구려 계승 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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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선양시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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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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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명태조가 조선이 요동을 침략하려는 술수를 부린다며, 조선 정벌을 거론하기도 했을 정도로 위협적인 군사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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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나가추가 명에 항복했을 때 200,000명을 거느렸다고 적힌 걸 보면 요동 세력만 해도 고려를 위협하기엔 매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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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이 보급을 받은 송참은 후대에 진동보라 개칭되었으며, 봉황성에서 서쪽으로 60리 거리에 있었다. 이 정도면 고려까지 거의 절반을 온 셈인데 중간에 지용수가 해안선 따라 빙빙 돈 것까지 감안하면 내륙을 가로질러 철수했을 때는 정말로 고려까지 다 가서야 보급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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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하추가 귀부한 이유는 금산 전투에서 명군에 대패하여 병력을 모두 잃어버렸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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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지역은 겨울이면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거기다 현대보다 평균 기온이 한참 낮은 것을 고려하면 당시엔 더 낮았을 듯. 더하여 고려 시대의 뒤를 이은 조선 시대는
소빙하기가 의심되는 현상을 100년 이상 겪었다. 다만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온난기 시절이라 현재보다는 좀 따뜻하였고 기온 하강 시기 이후에도 목축을 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땅이였다. 함경도야 해안지대를 제외하면 요동보다 험한 산지라 기온이 더 낮을 수 밖에 없는 것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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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확히 고구려의 전성기 판도다. 당대에는 고구려의 실제 판도를 잘 알지 못하고 단지 '요동과 함경도, 평안도를 지배한 나라' 수준으로 생각했으므로, 정약용이 고구려를 상정하고 말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판도가 한국사를 통틀어 중국과 대등 이상으로 경쟁했던 유일한 왕조인 고구려와 일치한다는 것은 정약용의 지정학적 안목을 보여주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