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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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劉波(? ~ 390)
후조 및 동진의 인물로 자는 도칙(道則). 서주 팽성국(彭城國) 팽성현(彭城縣) 출신으로 동진 원제 사마예의 총신이었던 유외의 손자이다.
2. 생애
영화 5년(349년), 후조의 관군장군 왕흡(王洽)의 참군을 지내던 중 황제 석호가 붕어하고 그 아들들이 제위를 다투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니, 상관인 왕흡과 함께 동진에 투항했다. 동진의 황제 목제 사마담은 그들의 투항을 받아주었고 유파는 양성태수에 임명되었다가 용양장군 환충의 중군자의참군으로 옮겨졌다.태화 5년(370년) 4월, 수양(壽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원진(袁真)이 사망하고 그 아들 원근(袁瑾)이 세력을 물려받아 반란을 이어갔다. 대사마 환온은 원근을 정벌하기 위해 광릉(廣陵)에서 20,000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에 표를 올려 유파를 회남내사, 건위장군으로 삼게 했다. 유파는 환온에게서 군사 5,000을 받고 8월에 건강 석두성(石頭城)으로 들어가 그곳을 지켰다. 환온은 5개월만에 수양을 평정하고 원근과 주보(朱保)를 건강으로 압송해 처형했다. 반란 평정 후, 유파는 상서좌승에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관군장군, 남군상으로 옮겼다.
태원 원년(376년) 3월, 전진의 황제 부견이 같은 한족 국가인 전량을 정벌하려 했다. 거기장군 환충은 전량을 응원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유파에게 명해 수군을 거느리고 사수(泗水)로 나아가 전진군의 측면을 교란하게 했다. 그러나 동진군의 방해 공작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전량의 군주 장천석이 부견에게 항복하면서 전진이 화북을 통일했다. 환충은 명을 내려 군대를 신속히 거두었다.
태원 2년(377년) 10월, 환충이 사망한 환활을 대신해 형주자사에 임명받았다. 환충은 전진의 강성함을 염려해 상명(上明)으로 이동하고 관군장군 유파는 강릉(江陵)을, 자의참군 양량(楊亮)은 강하(江河)를 지키게 했다.
태원 4년(379년) 정월, 부견의 아들 장락공 부비가 양양(襄陽)을 포위하고 맹공을 펼쳐 형세가 위태로웠다. 형주자사 환충은 관군장군 유파에게 명해 양양을 구원하게 하니, 유파는 8,000 군사를 거느리고 양양 인근에 도착했으나 강성한 전진군이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양양은 함락되고 농성하던 양주자사(梁州刺史) 주서는 적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끌려갔다. 양양을 구원하지 않은 유파는 나약한 겁쟁이라는 이유로 면직당했다가, 얼마 안가 다시 관군장군으로 복직되었고 이후 산기상시로 옮겨졌다.
태원 8년(383년) 5월, 형주자사 환충이 100,000 대군을 일으켜 양양을 치고, 유파를 보내 면수 북쪽의 여러 성들을 경략하게 했다. 하지만 전진의 명장 모용수의 계책에 놀란 환충이 퇴각하면서 유파를 비롯해 별동대를 이끌던 나머지 장수들도 모두 돌아갔다.
태원 8년(383년) 11월, 부견의 100만 대군이 비수대전에서 대패하자 태보 사안은 사현 등의 장수들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다. 이때 유파도 독회북제군(督淮北諸軍), 기주자사(冀州刺史)에 임명되어 출정할 예정이었으나 이내 병이 들어 행하지 못했다. 유파는 상소해 북벌에 참가할 수 없음을 밝히고 얼마 뒤 병사했다. 그는 전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아들 유담(劉淡)이 대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