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3:16:12

주서(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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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양평자(襄平子)
朱序 | 주서
시호 없음
작위 양평자(襄平子)
(朱)
(序)
차륜(次倫)
생몰 ? ~ 393년
출신 의양군(義陽郡) 평씨현(平氏縣)
부모 부친 - 주도(朱燾)
모친 - 한씨(韓氏)
아들 주략(朱略), 주심(朱諶)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명장. 익주자사를 지냈던 주도의 아들.

2. 생애

영흥 3년(365년) 10월, 양주자사(梁州) 사마훈이 성도왕을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고, 검각(劍閣)과 부성(涪城)을 거쳐 성도를 포위했다. 이에 대사마 환온은 조정에 상표하여 당시 응양장군, 강하상을 지내던 주서를 정토도호(征討都護)로 삼아, 성도에서 사마훈의 공세를 버티고 있던 익주자사 주초(周楚)를 구원케 했다.

태화 원년(366년) 5월, 주서는 사마훈을 격파하고, 사마훈과 그 무리를 무조리 생포해 환온에게 넘겨주었다. 주서는 사마훈의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정로장군에 임명되고 양평자(襄平子)에 봉해졌다.

태화 4년(369년) 6월, 환온이 전연을 정벌하러 갈 때 종군하여 등하와 함께 선봉이 되고, 임저(林渚)에서 전연의 장수 부안(傅顏)을 격파했다. 그러나 방두(枋頭)에서 환온이 이끌던 주력군이 격파당하면서 동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강 2년(374년), 주서가 연주자사에 임명되었을 무렵, 장성현(長城縣) 사람 전홍(錢弘)이 무리 100여 명을 모아 원향산(原鄉山)을 점거하고 관군에게 저항했다. 주서는 오흥태수, 중군사마가 더해지고, 조정의 명에 따라 전홍 무리를 모두 토벌한 뒤 귀환했다.

태원 원년(376년) 3월, 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같은 한족 국가인 전량을 정벌하자, 거기장군 환충은 연주자사 주서와 강주자사 환석수, 형주독호 환비(桓羆)를 보내 전진의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전량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5개월만에 전량의 군주 장천석은 전진에게 패하면서 항복했고, 동진은 모든 구원군을 물렸다.

태원 2년(377년) 봄, 서정대장군, 형주자사 환활이 조정에 상표하여 주서를 사지절, 감면중제군사(監沔中諸軍事), 남중랑장, 양주자사(梁州)로 삼고 양양(襄陽)을 진수하도록 했다.

태원 3년(378년) 2월, 부견이 장락공 부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여러 갈래로 군대를 보내 대대적인 남침을 감행해왔다. 형주자사 양안은 번(樊), 등(鄧)에서 군사를 발동해 선봉이 되었고, 정로장군 석월은 10,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노양(魯陽)을 통해 내려왔다. 또, 양무장군 요장과 경조윤 모용수는 남향(南鄉)을 함락시켰고, 전진의 양주자사 위종(韋鐘)은 위흥(魏興)을 포위했다. 부비는 본대를 거느리고 내려와 석월, 요장, 모용수 등의 부대와 합류해 양양을 목표로 진격해왔다.

태원 3년(378년) 4월, 전진군이 면수(沔水) 북쪽에 이르렀으나, 양양성을 지키던 주서는 전진군에게 배와 노가 없으리라 여기고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의 정로장군 석월이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에 부교를 띄워 건너니, 주서는 크게 놀라 양양의 중성(中城)으로 대피하고 굳게 지켰다. 이윽고 강을 모두 건넌 석월의 군대는 곧바로 양양성으로 돌진하여 그 외성을 공략하고, 배 100여 척을 탈취해 면수 건너편에 있던 나머지 전진군을 전부 건너오게 했다. 마침내 면수를 건넌 부비는 전군을 독려해 양양의 중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주서의 어머니 한씨(韓氏)는 곧 전진군의 공격이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성벽 위로 올라가 그 상태를 점검했다. 한씨가 성벽의 서북쪽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그곳이 제법 허술한 것을 발견하고는 100여 명의 여종과 성안의 여자들을 동원해, 중성 안에 20여 장에 이르는 작은 성을 쌓았다. 이후 전진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가장 약하던 서북쪽 성벽부터 뚫리니, 주서와 동진군은 모두 한씨가 축조한 작은 성 안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항전을 이어갔다. 이때 양양 사람들은 그 성을 가리켜 "부인성(夫人城)"이라 불렀다.

태원 4년(379년) 2월, 환충은 비록 상명에 70,000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강대한 전진의 군사를 꺼려 감히 양양을 구원할 생각을 못했다. 이에 강릉의 관군장군 유파에게 명을 내려 양양을 구원하라 했으나, 막상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진한 유파도 두려워 지켜보기만 할 뿐 구원해주지 않았다. 비록 의지할 만한 구원군은 없었지만, 주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성 밖으로 출격해 전진군과 여러 번 이기니, 부비는 그 기세를 버티지 못 하고 군대를 뒤로 조금 물렸다. 그리하여 한바탕 위기를 넘긴 주서는 안심하고 방비를 이전보다 느슨히 했다.

주서가 방심한 틈을 타, 양양독호 이백호(李伯護)는 자신의 아들을 전진군의 진영으로 보내 투항하고 내응을 약속했다. 이후 부비가 다시 전군을 들어 양양을 공격해오자, 이백호는 양양성 내부에서 들고 일어나 적에게 호응했다. 결국, 내외로 공격받게 된 주서는 패배하여 부비에게 사로잡히고 전진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부견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 10개월이나 버틴 주서의 절개를 칭찬하는 동시에, 주서를 배신한 이백호는 불충을 이유로 참수하였다. 전진의 포로가 된 주서는 장차 동진으로 도망치고자, 감옥을 빠져나와 의양(宜陽)에 잠입해 하규(夏揆)라는 자의 집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하규가 이내 부견의 의심을 사 체포당하니, 주서는 하는 수 없이 낙양(洛陽)으로 가서 평원공 부휘에게 자수했다. 부견은 그의 항복을 기꺼이 받으면서 탈출죄를 불문에 부치고 탁지상서로 삼았다.

태원 8년(383년) 8월,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키고 친히 동진을 정벌해, 부융(苻融)이 이끄는 선봉 300,000만 대군이 영구(潁口)에 도착하고, 부견의 본대는 항성(項城)에 이르렀다. 이에 동진 조정에서는 정로장군 사석을 필두로, 관군장군 사현, 보국장군 사염, 서중랑장 환이, 용양장군 단현(檀玄), 건위장군 대희(戴熙), 양무장군 도은(陶隱) 등을 보내 전진군의 남하를 방어케 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부융은 수춘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동진의 평로장군 서원희를 붙잡았다. " 수춘이 함락되고 적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부융의 보고를 받은 부견은 나머지 군사를 항성에 남겨둔 채, 8,000여 경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수춘으로 들어갔다.

수춘에 도착한 부견은 동진에 항복을 종용하고자, 과거 동진 소속이었던 주서를 사석의 진영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사석을 만난 주서는 항복을 권유하기는 커녕 다른 소리를 했다.
"만약 부견의 100만 대군이 모두 모이게 된다면 그대들은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따라서 아직 전군이 모이지 않은 지금, 나아가 공격해야만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소."
부견이 수춘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전진의 전군이 모인 줄 알고 방어에 몰두하려던 사석은 조카 사염 사현의 설득과 주서의 말에 마음을 바꿔 싸우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사현이 북부군의 장수 유뢰지를 보내 낙간(洛澗)에서 양성의 50,000 군대를 격파하면서 전진군은 기세가 한풀 꺾여 진군을 멈추고 비수(肥水)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전진의 병력이 워낙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동진군은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 하고 비수를 사이에 둔 채 전진군과 대치했다.

사현은 부견에게 사자를 보내, 군대를 조금만 뒤로 물려주면 자신들이 강을 건널 테니 그때 결판을 낼 것을 청했다. 부견은 동진군이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습격할 생각으로 이를 짐짓 승낙하면서 비수에 주둔해 있는 모든 군대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해당 작전의 내용은 부견과 부융만이 알고 있었기에, 전진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퇴각 명령에 의아해 하고 있을 무렵, 후방에서 때를 살피던 주서가 크게 외쳤다.
"진군(秦軍)이 패했다!"
그러자 전진군은 자신들이 패해서 퇴각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진의 장수들은 혼란을 막기 위해 도망치는 자들을 베었으나 그럴수록 오히려 병사들은 더욱 동요할 뿐이었다. 결국 사현, 환이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강을 도하할 때까지 전진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 했고, 오히려 무방비하게 뒤를 내어주는 바람에 진짜로 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전진군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주서는 사현의 군대로 도망쳤고, 비수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동진으로 돌아가 용양장군, 낭야내사에 임명되었다.

태원 9년(384년), 비수에서 대승을 거둔 동진은 사안의 건의에 따라 곧바로 북벌을 시행했다. 명재상 사안과 비수대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사현의 지휘 아래, 동진은 순식간에 양양을 탈환하고, 전진에게 빼앗겼던 익주도 대부분 수복했으며, 나아가 낙양까지 다시 점령했다. 주서는 양주예주5군군사(揚州豫州五郡軍事), 예주자사로 옮겨져 낙양에 주둔했다.

태원 11년(386년) 3월, 주서는 장수 진응(秦膺), 동빈(童斌)을 파견해, 여양태수 등념지(滕恬之)를 사로잡고 여양(黎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정령족의 적요(翟遼)를 토벌했다. 패배한 적요는 다시 무리를 모아 초군(譙郡)을 침공했다가 주서에게 또 격파되고 도망쳤다.

태원 12년(387년) 정월, 사현이 병에 걸려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주서는 연청2주제군사(監兗青二州諸軍事),연청2주자사(兗青二州刺史)에 임명되어 팽성(彭城)을 진수했다. 이후 상표해 주둔지를 회음(淮陰)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효무제 사마요가 이를 허하였다. 그때 적요가 아들 적쇠(翟釗)를 보내 또다시 진군(陳郡)과 영천군(潁川郡)을 침구했는데, 주서는 이번에도 진응을 보내 적쇠를 쫓아냈다. 그 공으로 주서는 정로장군에 임명되었다. 주서가 다시 상표하여 강주(江州)의 쌀 10만 석과 베 5,000필을 군비로 충당할 것을 구하자 조정에서 이를 허락했다.

태원 13년(388년) 4월, 도독사옹양진4주제군사(都督司雍梁秦四州諸軍事), 옹주자사에 임명되어 다시 낙양을 지켰다. 효무제 사마요는 광위장군, 하남태수 양전기, 남양태수 조목(趙睦)에게 각각 1,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그들을 주서의 휘하로 배속시켰다. 주서는 또 상표하여 형주자사 환석생의 관리 아래에 있는 논과 밭 100경과 곡식 80,000석을 지급받기를 구하니, 조정에서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태원 15년(390년) 정월, 서연의 군주 모용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을 침구해왔다. 이에 주서는 하음(河陰)에서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심수(沁水)에서 서연의 진동장군 왕차다(王次多) 등과 교전해 서연군을 격파하고 서연의 장수 물지(勿支)를 참수했다. 이를 본 모용영이 왕차다와 함께 도망치자, 주서는 참군 조목, 강하상 환불재(桓不才)에게 명해 서연군을 추격하게 했다. 조목과 환불재는 태행(太行)에 이르러 서연군을 다시 한 번 더 격파했고, 모용영은 패잔병을 데리고 상당(上黨)으로 도주했다. 당시 무리 수천을 모으고 호섬(湖陜)에서 할거하던 양해(楊楷)는 모용영의 패주 소식을 듣고, 주서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면서 귀순해왔다.

주서가 상당으로 도망친 모용영을 쫓아 상당군 고도(高都)의 백수(白水)에 이르렀을 때, 모용영은 도망치기를 멈추고 주서의 군대와 20여일간 대치했다. 그러나 정령족의 적요가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을 노린다는 급보를 전달받은 주서는 하는 수 없이 낙양으로 회군했다. 낙양에 돌아온 주서는 석문(石門)에서 적쇠를 공격해 무찌르고, 뒤이어 참군 조번(趙蕃)을 파견해 회현(懷縣)에서 적요까지 격파하니, 적요는 대패해 야반도주하였다. 주서는 응양장군 주당(朱黨)을 남겨 석문을 지키게 하고, 아들 주략(朱略)을 독호로 삼아 전반적인 낙양의 수비를 맡긴 뒤, 자신은 양양으로 돌아갔다. 회계왕 사마도자는 주서의 승패가 서로 맞먹는다 보고, 그에게 어떠한 포상도 질책도 내리지 않았다.

전진의 좌장군 두충이 한천(漢川) 일대로 세력 확장을 꾀하자, 안정(安定) 사람 황보쇠(皇甫釗)와 경조(京兆) 사람 주훈(周勳) 등이 두충을 영접하려 했다. 이로 인해 양주자사 주경(周瓊)은 파서(巴西)의 3군을 잃었고, 군대마저 약소해 의지할 데가 없어 주서에게 구원을 청했다. 주서가 장수 황보정(皇甫貞)을 보내 주경을 구원하니, 황보쇠와 주훈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고, 얼마 뒤 두충이 장안 동쪽에 주둔했음에도 호응하는 이가 없었다.

주서는 여러 차례 늙고 병듦을 이유로 사직을 구했으나, 조정에서 그의 요청을 전부 불허하고 조서를 내려 더이상 상표하지 말 것을 명했다. 그러자 주서는 수십 일 뒤에 파면을 노리고 죄를 지었다면서 스스로 정위에 출두했지만,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추궁도 하지 않았다.

태원 17년(392년) 10월, 주서가 다시 조정에 노환을 이유로 해직을 청했다. 조정은 마침내 그의 해직을 들어주고, 태자우위솔 치회를 옹주자사로 삼아 주서를 대신케 했다.

태원 18년(393년),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그를 좌장군, 산기상시로 추증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