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2:57:59

조조 vs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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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두 영웅의 대립2.2. 왕조의 대립
3. 평가
3.1. 지휘관으로서 비교할 때3.2. 정치인으로서 비교할 때3.3. 리더십으로 비교할 때3.4. 초한전쟁과 비교할 때3.5. 총평
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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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논영회에서) 이 무렵 조공(曺公)이 선주(先主)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3]과 이 조(操)뿐이오. 본초(本初)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이다."[4][5]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匕箸)를 떨어뜨렸다.
삼국지》 「촉서」 - 선주전
나와 조조는 의 관계다. 조조가 엄격하면 나는 관대하게 대한다.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인덕에 의지한다. 조조가 책략으로 행동하면 나는 성실하게 행동한다. 언제나 조조와 반대로 행동을 취해야만 비로소 일이 성취된다.[6]
유비
중국사, 더 나아가 동아시아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관계로,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나뉘었던 다른 패권 경쟁들[7]과 다르게 조조와 유비는 모두 자신의 목표가 좌절된 채 최후를 맞이했으며, 둘이 죽은 뒤로도 동아시아에서 1,80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조위정통론 vs 촉한정통론의 싸움으로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사실상 삼국지 인기의 근간이나 다름없다.

삼국지라는 동아시아의 초대형 문화 미디어 믹스의 양대 주축을 이루는 두 주인공, 위빠들의 영원한 우상 조조 촉빠들의 정신적 지주 유비 중 누가 더 위대한 영웅인가, 그리고 조위 촉한 중 어느 국가가 진정한 삼국시대의 주역이자 한나라의 계승국인가의 떡밥은 삼국지 팬덤의 가장 거대한 논쟁거리이며, 그만큼 연구도 굉장히 깊게 이뤄져 왔다.

실제 역사에서도 두 사람은 매우 각별한 관계였는데, 둘 다 후한말 난세에 수많은 군웅 사이에 묻혀있던 초창기 시절부터 함께 한 일종의 거병 동지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사형인 공손찬을 따라 18로 제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공손찬은 참전하지도 않았으며[8], 유비는 조조군과 함께 참전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인연은 오히려 정사 쪽이 연의보다 더 깊은 것이며, 처음에는 거병 동지였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일생일대의 라이벌 관계가 되어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는 참 극적인 이야기가 된다.

2. 역사

천하통일 이후 15년만에 망한 진나라와 달리 한나라는 장장 426년간 중국의 문명을 창조하고 기반을 다진, 실질적인 첫 번째 통일 왕조이자 민족의 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왕조로, 중국인들이 스스로 아직도 한인, 즉 한족이라고, 언어 한어로, 글자 한자로 칭할 만큼 어마어마한 위세와 영향력을 떨쳤던 중국의 근간이나 다름없는 왕조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나라 시대 바로 다음에 등장했던 위, 촉, 오의 삼국시대는 필연적으로 어떤 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할 것인지 명확한 답을 요구받았다.

그 가운데 시대의 필두가 되었던 두 영웅인 조조와 유비에 대한 비교논쟁이 만연했으며, 조조가 이끌어낸 조위정통론과 유비가 이끌어낸 촉한정통론의 유구한 대립은 명분과 정통성이라는 부분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상이었다.

2.1. 두 영웅의 대립

처음 주도권은 조조가 쥐고 있었다. 조조는 서주 대학살에 따른 민심 격동과 진궁의 반란 위기를 극복하고 협천자라는 명분을 통해 국가를 좌지우지하며 유비가 세력을 형성하는 족족 패퇴시켜 그를 반평생 난세를 방랑하는 객장 신세로 만들었다.[9] 유비는 서주 대학살이 벌어지던 당시 조조를 직접 막아서는 간 큰 도박을 시전하고 헌제의 밀명을 받들어 조조를 죽일 것을 공모하며 자신을 반 조조의 상징으로 선전하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끝내 조조에게 연달아 패퇴당하며 계속해서 여러 제후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이때는 개인으로서도, 세력으로서도 모두 명백하게 조조의 압승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최대 강적이던 원소마저 무너뜨리고 북중국 전체를 통일한 조조는 창끝을 남쪽으로 돌려 형주로 남벌을 진행했고, 이는 천하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진격이었기에 이대로 조조의 승리로 끝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끝내 살아남아 강동 손권과 동맹을 맺은 유비가 그의 도독인 주유와 함께 적벽에서 대승을 거두는 이변을 일으킨다. 이 때의 대참패로 인해 조조는 천하통일의 꿈을 저지당했으며, 이 결과는 천하가 삼분되는 기점이 되었다.

곧이어 형남 파촉을 평정한 유비는 비로소 세력 대 세력으로서 한중에서 조조와 진정한 라이벌 매치를 치렀고, 마침내 적벽에 이어 한중에서 조조에게 연승을 거두며 조조의 은퇴식을 자신의 승리로 장식한다. 유비는 이 연승의 기세를 몰아 본인의 직계 조상인 한고조 유방 오마주해 스스로 한중왕에 등극하는 대형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천하 사람들을 전율시켰다. 이로 인해 온 백성들 사이에서 정말로 유방 항우를 이기는 것이 되풀이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었고, 위나라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터졌다. 이에 조조는 말년에 관우의 북진을 두려워하며 천도를 논의할 정도로 소침해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비 역시 이대로 승기를 굳히지는 못하고 기어이 발목을 잡혔다. 조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마의의 헌책을 받아들여 손권과 손을 잡아 협공으로 관우를 죽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비는 의형제였던 관우의 복수전에 나섰지만 옛날 조조가 적벽에서 당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이릉에서 화공으로 참패를 당하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결국 조조와 유비의 패권 대결은 어느 한 쪽이 확실한 승리를 차지하지 못한 상태로 끝났고, 두 영웅의 후예들인 조씨 일가와 유씨 일가 역시 중국 통일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2.2. 왕조의 대립

2.2.1. 삼국 시기

조조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의 제위를 선양받아 위 왕조, 즉 조위를 건국한다. 이는 사실상 찬탈이었지만 천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위세가 있었고 헌제 본인은 그래도 살려 주었던,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선양을 통해 창건했기에 한나라의 실질적인 계승국으로서 위진남북조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대를 대표하는 왕조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촉은 영토가 협소해 지방정권에 불과했고, 오는 중앙 집권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호족연맹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위나라가 더더욱 한의 계승국으로 돋보이게 해주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 시대의 흐름은 촉한정통론을 부각하게 되었고, 남송 시기부터 종래에는 조위정통론과 쌍벽을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그렇다면 한낱 지방 정권에 불과하였던 촉이 중원을 차지한 조위와 대등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시작은 유비가 촉한을 세우면서 그 명분으로 한실부흥의 대의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헌제를 핍박하며 한실 따위는 자신의 야망을 위한 도구로 본다는 것을 온 천하에 널리 알렸는데, 전한 214년과 후한 212년을 합쳐 426년을 내려오면서 쌓아온 한 왕조의 위업과 유산은 조조 하나가 그렇게 깔아뭉갤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식자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전한-후한의 뒤를 이은 새로운 한의 등장을 열망하는 자들이 있었고, 유비는 이에 황실의 종친으로서 한실부흥이라는 기치를 내걸어 그들의 열망에 보답하였다. 비록 조비가 선양이라는 방식으로 한을 대체하긴 하였으나 선대의 업보를 모두 해결하진 못하였으니, 그에 반해 유비가 내세운 한실부흥이란 명분은 촉한을 한의 진정한 계승자로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다.

2.2.2. 서진· 동진 시기

천하통일 이후에는 당연히 조위정통론이 우세였다. 이는 서진의 역사가였던 진수가 한의 계승자를 조위로 내세우고 촉한은 단지 유비 유선을 선주-후주로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거쳐 서진은 화북을 상실하였고,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 동진을 건국해 간신히 존속하고 있었다. 이때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 환현 부자는 국정을 농단하며 선양을 노리고 있었고, 이런 선양의 논리를 부정하기 위해 동진의 몇몇 학자들은 촉한정통론을 꺼내들어 " 사마염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조위를 계승해서가 아닌 진정한 한나라의 후계인 촉한을 사마소가 멸해서이다." 라고 주장하며 촉한을 높였다.

그 대표격이 습착치의 《한진춘추》로, 그는 한의 계승자를 촉한으로 보았고 이 촉한을 복속시켰기에 서진이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습착치의 이와 같은 주장과 달리 조정에서는 여전히 조위를 정통으로 보고 있었다. 조조의 후손이 '진류왕' 작위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 그 증거다. 이렇듯 동진은 여전히 조위를 정통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오호가 활개치던 화북에서는 어땠을까?

흉노 출신의 유연은 모계로 유씨의 혈통을 이어받아 국호를 한이라 칭하고 유비 유선에게 제사를 올리는 등 자신을 촉한의 계승자라 주장했으나, 유요가 황제가 된 뒤 국호를 '조(趙)'로 바꾸면서 모두 폐지해버렸다. 그리고 전조가 후조한테 망하며 그 이후로 전조의 뒤를 이었다고 칭한 나라들은 없었으므로 유연의 촉한정통론은 단절되었다.

석륵 조조 사마의는 고아와 과부를 압박해서 천하를 찬탈했다고 비난하긴 하였으나, 석륵의 후조는 진나라의 금덕을 이은 수덕을 표방했다. 애초에 조조, 사마의를 비판할 때 비교 대상은 망탁조의로 유명한 역적 4인방이 아니라 정통 황제들인 유방, 유수 이 2명이었다. 후한의 광무제가 화덕을 칭했으니, 화덕 후한-토덕 조위-금덕 서진-수덕 후조 이렇게를 정통으로 본 것이다.
晉承魏為金,趙承晉為水
은 금덕으로서 를 이었고, 는 수덕으로서 을 이었다.
자치통감 137권
雋僭位,將定五行次,眾論紛紜。時疾在龍城,雋召以決之。未至而群臣議以燕宜承晉為水德。既而至,言於雋曰:「趙有中原,非唯人事,天所命也。天實與之,而人奪之,臣竊謂不可。且大燕王跡始自於震,於易,震為青龍。受命之初,有龍見於都邑城,龍為木德,幽契之符也。」雋初雖難改,後終從議。

모용준이 참람되이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 장차 오행(五行)의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연나라가 오행설의 木火土金水 중 어떤 德을 취할지) 뭇 의논들이 분분하였다. 한항은 당시 병에 걸려 용성(龍城)에 있었는데 모용준이 한항을 불러 결정하도록 하였다. 한항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뭇 신하들이 연(燕)은 의당 진(晉)을 뒤이어 수덕(水德)으로 해야 한다고 의논하였다. 그 얼마뒤 한항이 도착하여 모용준에게 말했다,

“조(趙)가 중원을 차지한 것은 오로지 인사(人事)만은 아니고 천명(天命)입니다. 하늘이 준 것을 사람이 빼앗는 것은 신의 소견으로는 불가한 일입니다. 게다가 대연(大燕)의 왕적(王迹,왕업)이 (팔괘八卦의) 진(震) 방위에서 시작하였고「역易」(→주역)에서는 진(震)을 청룡(靑龍)이라 하였습니다. 천명을 처음 받을 때에 도읍성(都邑城)에서 용(龍)이 보였으며 용이 바로 목덕(木德)이니 서로 잘 부합하는 징조인 것입니다.”
진서』「 모용준재기」 출처

전연도 역시 토덕 조위-금덕 진을 곧바로 이어 본인을 수덕이라 칭할지, 후조가 수덕으로서 진을 이은 것을 인정하고 본인들은 목덕으로서 후조를 이을지 논란은 있었으나, 모두 조위를 정통으로 하였지 촉한은 언급도 없었다.

2.2.3. 남북조 시기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조위정통론이 주류였다.

유송의 무제 유유는 본인이 한 고제 유방의 동생인 초 원왕 유교의 후손이었으나, 여전히 조위정통론을 내세웠다. 단적으로 조위 마지막 황제 조환의 후손들이 진나라로부터 봉해진 진류국(陳留國)이 유송 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온 것을 들 수 있다. 진류국은 남제의 소도성이 선양받은 그 해에 바로 폐지되었는데, 남제가 선양받으면서 이전 두 왕조는 사마진, 유송이 되어 조위는 이왕삼각의 적용 대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유유가 유씨였으므로 촉한을 높였다는 소리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昔土德告沴,傳祚于我有晉;今曆運改卜,永終于茲,亦以金德而傳于宋。
옛날에 토덕이 흐트러지니, 제위를 우리 진晉에게 전했고, 이제 역운이 복을 바꾸니, 긴 것이 여기서 끝나고, 또한 금덕(진)이 송에게 전해진다.
『송서』「무제기」

토덕을 칭한 것은 조위이므로, 유유도 조위-사마진을 정통으로 보았던 것이다. 남제 소도성도 수덕인 유송으로부터 선양받았다 하였는데, 유송이 수덕이라면 당연히 사마진은 금덕이고, 후한은 화덕이므로 토덕인 조위를 정통으로 본 것이 된다.

북조의 경우, 북위에서는 진의 뒤를 이은 수덕을 표방했다. 즉 북위 역시 토덕 조위-금덕 진-수덕 북위 이렇게를 정통으로 본 것이 된다.
壬戌,詔承晉為水德
임술일, 조서를 내려 수덕으로서 진을 잇게 했다.
자치통감 137권

2.2.4. · 시기

수나라, 당나라 시기 역시 조위정통론이 정설이었다. 우선 당나라는 북위(서위)-북주-수-당을 정통으로 보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한-조위-서진-북위를 정통으로 보았다.

당 현종 천보 연간, '최창'이라는 사람이 존속 기간이 짧은 조위, 서진, 북위, 북주, 수를 모두 비정통으로 치부하고 당나라는 한나라의 뒤를 곧바로 이어 토덕이 되어야 한다 주장했고, 당시 권신이었던 이림보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림보가 죽은 이후 다시 북위, 북주 등을 정통으로 하고 최창은 정통 역사관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이 사건은 북송에서 존속기간이 짧은 오대를 정통으로 볼 것이냐, 보지 않을 것이냐 논쟁이 열렸을 때 정통으로 봐야한다는 근거로 사용되었고, 북송의 황제는 오대 또한 정통으로 봐야 한다고 결정지었다.
及漢高受命,無始封祖,以高皇帝為太祖,太上皇高帝之父,立廟享祀,不在昭穆合食之例,為尊於太祖故也。魏武創業,文帝受命,亦即以武帝為太祖,其高皇、太皇、處士君等,並為屬尊,不在昭穆合食之列。晉宣創業,武帝受命,亦即以宣帝為太祖,其徵西、潁川等四府君,亦為屬尊,不在昭穆之列。
「禘祫配祭及昭穆位次議」

묘호 태조에 대해 논하며 한고제, 위무제(조조), 진선제(사마의)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만 보아도 위-진을 정통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화권에서는 그 누구도 정통성을 부정하지 못하는 한고제와 조조ㆍ사마의를 동렬에 놓고 논했기 때문이다.
昔唐堯至聖,失之於四凶;漢祖深仁,失之於陳豨;光武聰明寬恕,失之於龐萌;魏武勇略英雄,失之於張邈。此並英傑之主,莫不失之於前,得之於後。
과거 당요가 성인이었으나 사흉에게 失하였고, 한조가 深仁하였으나 진희에게 失했으며, 광무는 聰明하고 寬恕하였으나 방맹에게 失했으며, 위무제의 용략이 영웅이었으나, 장막에게 失했다. 이들(당요=제요 도당씨, 한조=한고제 유방, 광무=후한 세조 광무제, 위무제=조조)은 모두 영걸지주로, 앞에서 失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뒤에 得한 것이다.
통전 24권

이번에는 아예 제요 도당씨, 한고조, 광무제와 조조를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軒轅氏征蚩尤而廓清四海,帝舜黜有苗而定萬邦,逮乎三王則吊人伐罪,暴秦則並吞天下,漢高祖夷凶靜難,光武討叛懲奸,魏武破袁紹,晉武滅苻堅,宇文氏破高歡,普六茹氏平陳國,太宗擒王竇,肅宗定安史。

(전략) 난폭한 秦이 천하를 병탄하자, 한고조가 흉악한 자를 주멸하고 난리를 멈췄다. 광무제는 반란한 자를 토벌하고 간사한 자를 징벌했으며, 위무제는 원소를 격파하였다. 진무제(효무제)는 부견을 멸하였고 우문씨(북주)는 고환을 격파했으며, 보륙여씨(수)는 진국(陳國)을 평정했다. 태종(당태종)은 왕(왕세충), 두(두건덕)을 사로잡았고, 숙종은 안(안록산), 사(사사명)을 평정했다.
趙元一,「奉天錄序」

과거의 황제 헌원씨, 제순 유우씨, 삼왕(우, 탕, 무왕), 한고조, 광무제, 그리고 당시 왕조의 태종, 숙종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되었다. 당나라 시절까지만 해도 조조는 비록 단점이 있긴 했으나 영웅 중의 영웅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최초로 조조, 사마의가 왕망, 동탁과 함께 망탁조의라 불린 것 역시 당나라 시절이나, 여전히 왕조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며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웅이라 평가하는 인물들은 여전히 많았다. 유비 또한 아직 촉한정통론이 주류는 아니었으나 조조와 더불어 영웅이라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나라 후기에 한반도에 세워진 고려 역시 조위정통론적 사관을 수용하여, 고려 태조 20년에 세워진 '서운사 요오화상비'의 비문 #에선 왕건이 견훤을 물리친 것을 위나라가 촉을 물리친 것에 비유하였다.[10]

2.2.5. 북송· 남송 시기

북송 초기에도 조위정통론이 여전히 우세였다. 이는 전통적인 선양 방식의 승계가 조명되어, 평화적인 선양으로 나라를 세웠던 송나라의 명분을 위해 선양으로 한나라를 대체한 조위가 진정한 한의 후계국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11]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구양수가 대표적으로 조위정통론을 주장하였으며, 그는 선양이라는 아름다운 방식으로 평화롭게 나라를 승계하여 건국의 정당성을 물려받은 조위야말로 한의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다만 중립을 지키거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상당하였다. 대표적으로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모두 정통성이 없다는 무통설을 주장한 바 있다.[12] 이렇게 학자들 사이에서 한나라의 진정한 계승국은 누구인가 의견이 엇갈릴 때, 민간에서 당연히 조조는 죽일 놈이었다. 소동파의 도항소아청설삼국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민간에서는 뿌리 깊게 내려온 조위에 대한 적대감이 갈수록 배가 되어 이쯤 오면 유비는 진리이고 생명이며, 조조를 비롯한 조씨와 사마씨 사탄 수준으로 혐오받고 있었다. 이때 저술된 각종 민담과 구전문학, 민간 신앙에서도 촉한과 촉한의 인물들은 완전무결한 선역으로, 조위와 서진의 인물들은 그야말로 쳐죽일 놈들로 묘사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이후 남송 시대에 들어서 촉한정통론이 떠올랐다. 이는 북송이 금나라에게 정강의 변을 당하고 화북에서 쫒겨나 장강 이남으로 넘어가 남송이 되었기에, 자신들을 촉한과 동진에 비유하고 금나라를 조위와 북조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교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익주 지방에 자리잡은 대리국과 맺은 관계 때문이었다. 이쪽 백성들은 당나라의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유비 제갈량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강유 촉한 구원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슬퍼했다. 백성들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대리국은 촉한에게 우호적이었는데,[13] 이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려 했던 남송은 촉한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14]

2.2.6. ·· 시기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와 그 후에 세워진 명나라도 여전히 촉한정통론이 대세였다. 원나라의 대학자인 학경은 <속후한서>를 지으며 촉한을 정통이라 기술하였으며, 민간 신앙에서 관우는 군신이 되어 충의의 화신이 되었고 촉한은 민간에서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바로 나관중 삼국지연의였으며,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과 염원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작품은 천하 사람들을 전율케 했고 사상 유례가 없는 대흥행을 일으켜 촉한정통론을 민간층과 식자층 가릴 것 없이 확고한 진리로 완벽하게 자리잡게 하였다. 이런 인식은 명나라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조위 측에서도 뜻밖의 반등이 하나 일어나는데, 바로 오랜 세월 쳐죽일 역적에 중국의 히틀러 같은 학살자로만 인식됐던 조조가 삼국지연의에서 쿨한 카리스마, 도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자의 풍모, 영웅이면서도 악당이기도 한 이중적인 매력이 부각되어 민간층 사이에서 유비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던 다크 히어로로서 불멸의 인기를 얻게 된 것이었다. 이 덕에 조조는 간웅이라는 칭호의 대명사격인 존재로 각광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조조의 긍정적 재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내려와 삼국지를 단순히 영웅 유비와 절대악 조조라는 단편적인 해석으로 볼 수 없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15]

이후 청나라 때는 정통성의 진위보다 정통성 자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며 촉한정통론과 조위정통론 모두 기세가 수그러들었다.[16] 다만 공식적으로는 촉한을 정통으로 보았는지 강희제 역대제왕묘에 위패를 추가하면서 유비의 위패를 추가했다.

근현대 시기로 접어든 뒤에는 조위정통론 vs 촉한정통론의 싸움이 아니라, 위빠 vs 촉빠의 싸움이 그 자리를 승계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3. 평가

두 인물의 진가는 이례적일 정도로 그들 왕조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으로 장기 존속됐다는 부분에 있다.[17] 또한 각자의 기량과 업적도 당대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이며, 이는 역사적인 관점의 정통론 싸움과 문화적인 관점의 영웅쟁패 모두 삼국지 팬덤에게 최고의 논쟁거리임을 시사한다.

물론 둘은 서로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다. 유비는 조조처럼 대륙의 반 이상을 통합하며 시대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조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실리만 중시하는 행보를 보여 명분과 민심을 잃고 수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이는 두 사람의 성향과 강점이 음과 양 수준으로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으니, 마냥 서로 깎아내리기 보다 상대의 업적과 능력을 인정하고, 또한 이들의 실책을 적절히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1. 지휘관으로서 비교할 때

조조는 40여년 동안 전쟁터에서 살았으며, 당대의 거의 모든 제후들과 싸워서 전부 이겼다. 원소, 여포, 원술, 마초, 장로 등등 수많은 제후들이 그에게 쓸려나갔고, 유비 역시 조조에게 여러 번 패퇴당해 오랜 세월 떠돌이 신세로 살아야 했다. 사실상 적벽과 한중의 패배만 아니었더라면 천하를 가뿐히 통일하고 한 시대의 통일왕조의 창건자로서 당당히 역사에 기록되었을 인물인데다, 위진남북조시대 전체를 통틀어도 유유, 진경지, 환온 등과 함께 한족 출신으로는 최고의 군 지휘관으로 평가받으니 그 군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아 지금 전해져 내려오는 판본인 《위무주손자》를 완성하였고, 북방 이민족들을 갈아버림으로써 오호십육국시대 도래를 1세기 늦추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탁월한 성과를 냈던 바 있다. 조조는 보급의 중요성을 명백히 꿰고 있었고 보병을 운용하여 기병을 격파하는 대기병전술로는 당대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마초를 격파할 때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연상시키는 탁월한 용병술까지 선보였다. 전략가로서는 물론 전술가로서도 당대 초일류 수준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적벽과 한중에서 패배하여 천하통일에는 실패했기에 한고제, 광무제보다는 아래로 평가받고, 전통적으로는 당태종보다도 더 평가 절하받았다.

유비 역시 나름대로 군재는 갖추었으나, 조조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박망파 전투와 적벽대전[18]에서 지휘관으로 나서 승리를 이끌었고 적벽 이후에는 주유와 함께 강릉을 점령하고 단독으로 형남 4군을 평정하는 등의 군사적 능력을 직접 증명하였으며, 한중 공방전에서는 총사령관으로서 조조가 직접 나섰음에도 한중을 버리도록 하였던 적도 있으나 종합적으로 보자면 조조에 비해 손색이 있다. 야전으로 붙은 적이 없는 것은 둘째쳐도[19] 무엇보다 오나라와 벌인 전쟁 가운데 이릉대전이라는 역대급 대형 삽질 하나로 그간 쌓아온 업적을 많이 날려먹었다.[20]

3.2. 정치인으로서 비교할 때

군재가 조조보다 못하던 유비가 조조와 대적할 수 있었던 진정한 무기가 바로 정치였으며, 정략적인 측면은 조조를 여러 차례 물먹였을 정도로 걸출했다.

조조의 경우 협천자와 중원을 기반으로 막대한 세력을 일궜으나, 정치인임에도 이성보다 감정을 우선시한 광폭한 성미가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장 조조의 인생과 행적을 봐도 수많은 명사 숙청과 한나라 황실 능욕, 서주 대학살, 적벽대전 참패 등 수많은 오판을 저질러 이 때문에 조조는 수많은 이점을 거머쥐고도 생전에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으며, 심지어 손자 시기까지도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도록 길이길이 발목을 잡았다. 당장 원소와 사실상 갈라진 뒤 협천자의 어명이라는 명분으로 원소와 전쟁을 벌인 끝에 원씨 세력을 완전히 토벌했는데, 정작 원소의 묘소에 가서 그의 죽음에 대해 통곡하는 등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행정적인 측면에서 환령의 문제점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둔전제, 원호법, 호조법, 구현령처럼 다양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는 등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여 오랜 폐단으로 내정이 붕괴한 한 황실을 다시 살리는데 성공했고, 종요, 화흠, 왕랑, 가후, 두기, 조엄, 양부, 장기, 순유, 정욱, 동소, 장제 등 쟁쟁한 인재들이 있었으며, 무장들 가운데서도 우금 악진을 발굴했고 서황, 장료, 장합 등 항장들을 중용했고, 본인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싫어했던 주령의 병권을 빼앗고 우금 휘하로 배치할지언정 죽이지는 않는 등, 인재를 고용할 때 감정을 넣는 경우가 드물었다. 다만, 아예 없지는 않아 협천자를 헌책한 순욱[21]이나 공융, 모개 등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자신의 야망에 반대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전의 공을 따지지 않고 거리낌 없이 죽이거나 정신적으로 몰고가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면이 있었으며, 둔전제를 포함해 일부 제도는 백성들을 위하기보다는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만 개편된지라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실제로 개편된 제도의 효용성에 대해서도 지적받는 경우가 많으며 여러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했다.[22]

반면 유비는 헌제 명의로 실제로는 조조가 내려준 좌장군 직을 아주 적절히 이용하여 그 관직이 갖는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고, 헌제가 내려준 조조 암살 밀명을 끝까지 간직해 이를 한실부흥이라는 촉한의 건국 이념으로 치환시켰다. 최후에는 유방을 오마주한 한중왕 선포로 한나라 안에 다른 나라를 세웠던 조조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한 방을 날렸으며, 이 파동으로 인해 위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고 이후 제갈량의 북벌이 벌어질 때도 위에서 자발적으로 촉에 귀순하는 지역이 있었을 정도로 탁월한 효과를 과시했다. 그리고 서주 대학살을 일으킨 조조의 대항마로 선전하며 성장했다는 말이 자주 나오긴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서주를 먹은 뒤 유비는 곧바로 공손찬에서 원소로 갈아탔으며, 여포 탓에 서주를 상실한 뒤에는 곧바로 조조에게서 달아났다. 연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조한테 달아난 것마냥 묘사되지만, 실상은 같은 원소 라인이었던 조조에게 의탁한 것일 뿐이다.

비록 백성들에게 상당한 부작용이 뒤따르기는 했으나 많은 제도 개혁을 통해 무너진 한나라의 체계를 기둥이나마 일으켜 세운 조조와 이렇다 할 제도상 치적은 없으나 안정적인 통치에 주력한 유비 사이의 우열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23]

3.3. 리더십으로 비교할 때

조조의 곁에는 용병술은 특출나지 않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하며 다양한 개성의 장수들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력을 지녔던 하후돈, 용장 조인, 신속한 기동전이 주특기였던 하후연 같은 믿을 수 있는 친족들과 오자양장들을 위시한 많고도 쟁쟁한 명장들이 있었다. 조조는 그 실력을 알아보고 기용하는 것에 뛰어났음은 물론, 상대편에 방덕과 같이 탐나는 인재가 있다면 후하게 대하여 인재를 자신의 사람으로 삼을 수 있는 리더로서 그 역량을 과시했다. 이렇게 조조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고 충성을 공고히 하며 세력을 유지 및 확장했고, 게다가 하급 병졸 출신이었던 우금의 능력을 단박에 알아보고 크게 등용한 것을 보면 용인술로 보자면 그야말로 당대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단점이라면 친족을 중시하여 군의 수뇌부는 모두 친족으로만 구성돼 오자양장같은 뛰어난 인재들이라도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24], 비위를 거스르거나 정치적으로 쓸모가 없어지면 아무리 공을 세웠어도 토사구팽해버렸다는 점[25], 조조가 죽기 1년 전까지도 귀족 자제들이 조위를 뒤엎으려는 사례가 있었을 만큼 반란에 시달렸다는 점이 있다.

유비의 용인술 역시 절대 조조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유비가 인재를 알아보고 평가하는 눈은 대표적으로 전예 마속을 평가했던 것이나,[26] 위연 왕평처럼 직접 육성한 유망주들의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완전 예언에 가까운 수준이다. 유비의 부하들은 관우 장비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과 같은 일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유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으며, 모든 권력을 물려받은 채 탁고를 받은 제갈량도 '만약 내 아들이 그대가 보기에 나라를 이끌어 갈 재목이 아니라면, 그대가 대신 나라를 통치해달라'는, 사실상 언제든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어도 좋다는 유명을 받았음에도 죽을 때까지 촉한의 승상으로 남아 유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노력하다 죽었다. 게다가 본질적으로 사병 집단이었던 유비군은 와해될 만한 위기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반드시 유비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으며, 그렇게 뭉쳤을 땐 전보다 더욱 강점을 추가하며 적들을 다시 맞이했다. 이는 유비가 부하들을 관리하고 이끄는 능력이 초월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유비도 사람이라 장완같은 사람을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기는 하나, 이건 전적으로 장완의 잘못이며 이것도 결국 제갈량이 간언하여 마음을 바꿨고 먼 훗날에는 장완이 촉한의 재상직까지 꿰찼으니 실수라고 하기에 애매하다.[27]

3.4. 초한전쟁과 비교할 때

사실 중국사에서 조조 vs 유비 이상으로 유명세를 떨친 숙적(rivalry) 관계는 바로 그보다 앞선 항우 vs 유방의 맞수간 경쟁, 대결을 다룬 초한지라 할 수 있다. 초한쟁패기를 다룬 사서인 사마천 사기는 다른 사서들보다도 한끗 위의 평가를 받아 거의 경전에 다음가는 수준으로 존숭된 필독서였으며, 고조본기나 항우본기를 보면 사마천 스스로 두 사람의 대립 구도를 의식한 장면이 적잖게 보인다.[28] 게다가 '삼국'시대니만큼 제3세력인 손권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는 조조-유비와 달리 이쪽은 완전한 양자격돌의 사례인지라, 고전 산문이나 한시에서 '맞수'의 위치를 표현할 때는 오히려 고조와 패왕에 비유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애초에 장기가 고조와 패왕의 대결구도를 그대로 따왔다.

문화 및 정치적으로 봤을 때 식자층에게 더 중대하게 받아들여진 것 역시 초한의 대립이었다. 촉한과 조위는 결국 어느 쪽도 대륙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사마씨에 역사의 주인공 자리를 넘겨야 했으나, 초한쟁패는 하나의 통일왕조, 그것도 그냥 통일왕조가 아니라 중국의 정체성 자체를 만들어낸 한(漢) 왕조의 창건기였다.[29] 따라서 한고조의 일대기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실질적인 건국신화나 영웅서사시급의 위상을 지녀 한왕조는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사 내내 일종의 지표로써 위력을 발휘했다. 당장 조조와 유비 역시 그 라이벌 스토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산 사람들이며, 상술했다시피 두 사람의 라이벌리는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비 쪽에서 의식적으로 한고조와 초패왕의 대립 구도를 자신과 조조에게 덧씌우려는 정치적 계산이기도 했다. 즉 조조 vs 유비라는 라이벌리는 이미 당대 사람들, 그리고 라이벌리의 당사자들부터 '유방-항우' 라이벌리의 재현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30]

그러나 특히 현대에 와서 고조 vs 패왕의 대립구도가 소열 vs 위무의 대립구도만큼 다양하게 재해석 내지 화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논쟁성에 있을 것이다. 즉 역사의 승자와 패자가 철저하게 뚜렷이 갈리기 때문에, 이 개인의 능력이나 장단에 대해서 현대인들이 갑론을박을 나눌 여지가 거의 없다. 유비는 열세라고는 하지만 조조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꺾지 못했기에 패배했다고 하긴 애매하고, 시작 지점이 조조보다 훨씬 밑이었기에 "조조를 꺾지 못했다고 유비가 조조만 못한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항우의 경우는 모든 게 유방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출발해 놓고도 신속하고 비참하게 모든 것을 말아먹었다. 심지어 당시의 유방은 후손 유비처럼 황실의 후예니 하는 혈통 명분도 없는 시골 서민 출신에 기껏해야 말단 공무원을 지낸 것이 고작이었고,[31] 항우는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직계손자라는 엄청난 혈통조건에 더불어 초 의제를 옹립하고 있다는 이점[32]까지 달고 있었음에도 완패했으니 도무지 변명이나 재해석이 불가능한, '질만해서 진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패자로서의 비극적 영웅의 면모에 집중할 수는 있어도[33] '결국 한참 뒤지던 유방에게 패배해 몰락한 원인'을 그 자신의 역량 이외의 어디로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양쪽 모두 각 분야에서의 우열이 워낙 선명하고 극단적이어서,[34] 유비-조조처럼 개인 대 개인으로 놓고 소소한 vs놀이를 즐기기도 워낙 어렵다. 예컨대 "유비/조조 중 누가 더 명군(명장)이냐?" 라고 물으면 관점에 따라서 치열한 갑론을박이 펼쳐지겠지만, "유방/항우 중 누가 더 명군(명장)이냐?"는 질문은 대답이 뻔하다. 항우를 명군이라고 평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유방을 항우보다 탁월한 군재로 평가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35]

3.5. 총평

종합적인 세간의 평가는 근현대에 이르러 조조의 평가가 좀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단순히 권력가로서 결과만 놓고 보면 조조가 북중국 전체를 통일하고 중국 대륙의 반 이상을 평정하여 천하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반면, 유비가 평정한 영토는 남중국의 절반 정도인 형남과 파촉 정도가 전부였던데다, 그마저도 형남은 나중에 상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비는 형주라는 활동 기반을 얻은 뒤 촉나라를 얻고 한중까지 차지하는 후반기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조조에게 족족 패퇴당해 반평생 떠돌이 신세로 살아야 했기에 상대적인 전적에서도 유비가 다소 밀리는 편이다.

비록 조조는 통일 군주가 아니라는 결점 때문에 한고제, 광무제, 수문제, 당태종, 송태조, 원세조, 홍무제, 강희제 등 통일 왕조를 건설했거나 그에 맞먹는 위업을 세운 군주들에 비하면 평가가 다소 깎이는 편이지만, 삼국의 군웅들 중 가장 천하통일에 가까웠고 위진남북조시대의 초석을 세움으로써 어쨌거나 자신의 왕조가 한 시대의 간판이 되었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떨쳤다. 그래서 통일 군주와 유력 군벌의 경계선에 서 있었던 인물로 평가받으며, 이는 열세일지언정 위에 열거된 통일 군주들과 비교 가능함을 시사한다.[36]

하지만, 반대로 유비는 동등한 세력 대 세력의 조건으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이자 둘의 마지막 대결이었던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강점이 있다. 하필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에서 패하여 그것이 자신의 은퇴식이 되었다는 점은 '라이벌리'라는 측면에서는 조조에게 상당히 뼈아픈 부분이 될 수 있다. 유비는 후기 시점에 기반을 탄탄하게 갖추고 상승 곡선을 그렸지만, 조조는 후기 시점에 초창기의 과감한 결단력을 잃어버리고 하향 곡선을 그렸다는 안티테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동안 쌓아온 세력비 차이가 심해 전세 구도가 역전되지는 못했지만,[37] 한 거대한 세력의 장이라는 대등한 관점에서 조조를 정면으로 격파한 것은 조조 VS 유비에서 유비를 더욱 고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된다.

이렇듯 조조와 유비는 최후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의 목적을 방해했으며 그 과정 또한 매우 극적으로 전개됐다. 초반엔 조조가 압도적으로 우세한가 싶더니 어느 순간 유비가 조조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최후를 앞두고는 두 영웅 모두 원하던 바[38]를 이루지 못함과 동시에 명성에 흠이 가는 허망한 마무리를 맞이했지만 그 마무리에 서로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으니 정말 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으며 둘 모두 마지막까지 서로 실패시키고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죽었기에, 어느 쪽도 시대의 승리자로서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그 대립을 두고 떡밥이 생생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조조와 유비의 라이벌리를 다른 라이벌리보다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유비는 지나치게 밑바닥부터 시작해 조등이라는 거물의 손자인 조조보다 기반이 너무나 약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며[39] 따라서 그간 유비가 조조에게 패했던 전적은 대부분 세력의 규모가 조조보다 압도적으로 밀리는 시기에 일어났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즉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반이 조조보다 적었던 유비의 성취가 조조보다 못하다 하여 개인의 능력이 아래라고 확답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영토와 전적 등 절대적인 지표에서는 명백하게 조조가 우위이나, 최종전에서 승리했다는 강점과 태생적인 기반이 너무나도 미약했다는 점 때문에 둘의 라이벌리는 마냥 표면적인 지표로만 판단할 수 없고, 더욱 다각적이고 세밀하게 통찰해야 하는 변수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유비가 마냥 사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조조로선 꿈도 꿀 수 없는 혈통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비가 거의 명목상으로나 황족으로 쳐주는 수준으로 서열이 낮았다곤 하지만, 어쨌든 유씨 성을 가진 황족 종친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유표에게 의탁하거나 유장에게 소개되는 등 유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40] 또한 한중왕이나 촉한의 황제 자리에 오를 때도 큰 갈등이 없었다. 라이벌이었던 조조가 공, 왕에 오를 때마다 숱한 갈등을 빚었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유비가 비교적 수월하게 왕과 황제에 올랐던 까닭은 유비가 명분을 굉장히 잘 활용한 부분이 컸으며, 조조와 조비가 각각 왕과 황제에 올라 유비에게도 그럴 명분을 준 것도 컸다.[41] 유비가 한중왕이 된 건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과거 한고제가 한중에서 재기해 항우를 쓰러뜨렸던 걸 재현한다는 의미였기에 그야말로 천하를 들끓게 할 수 있었다. 또한 후한이 망하고 조비가 황제가 된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한나라 멸망과 위나라 건국, 그리고 조비가 천하의 새로운 황제라는 사실을 순응하고 복종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유비로서는 황제가 되어야만 했다.

정리하자면 실리는 조조에게, 명분은 유비에게 큰 비교우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조조는 빠르게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후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할 때마다 명분이 모자라 반발에 부딪혔고, 반대로 유비는 세력 구축은 한참 늦었으나 대신 명분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또한 조조와 유비 모두 운이 좋았으며[42] 단순히 그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온 기회를 잘 잡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추가적으로 예술가의 면모를 비롯한 조조의 다재다능한 능력 스펙트럼까지 포괄한다면 전체적인 능력치는 조조가 월등히 높지만, 유비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인격 부분에서 압승을 거둔다는 강점이 또 있다.[43] 유비 역시 유장을 배신했다는 오점이 있기는 하나, 서주 대학살을 필두로 수많은 패악을 일삼은 조조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며, 이것마저도 유장의 실정으로 그 수하의 선비들이 등을 돌렸다는 명분도 있다.[44][45]

결론적으로 천하통일에 가장 가까웠던 조조, 그리고 그런 조조의 천하통일을 저지한 유비, 이 두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또 어떤 역량을 중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4. 기타

  • 이 둘의 대결이 너무 부각되는 바람에 또 다른 삼국의 일원인 손권이 상대적으로 묻혔다. 다만 결코 손권의 기량이나 업적이 이 둘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46]
  • 둘을 모두 연기한 배우로 위허웨이가 유명하다. 신삼국에서는 유비를,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조조를 연기했는데, 짧은 시기에 두 인물을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연기해내 수많은 삼국지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유비 역을 맡았을 땐 인덕이 넘치고 아랫사람들을 아끼며 강단을 갖춘 성군의 모습을 연기했다면, 조조 역을 맡았을 땐 냉정하고 교활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패왕의 모습을 연기했다.
  • 일본TV 삼국지는 조조와 유비가 일 대 일로 뜨는 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만화가 끝난다.
  • 조조는 적벽대전, 유비는 이릉대전에서 대패함으로써 화공에 호되게 당했다는 묘한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화약 따위가 없던 당대에 '대군을 단번에 와해할 정도로' 넓은 범위에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수단은 이외에 딱히 없었다. 달리 말하면, 조조나 유비쯤 되는 노련한 군사 지휘관이 단순히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군이 붕괴되어 허둥지둥 도망쳐야 할 정도로 호된 타격을 입는 경우가 그리 흔할 리 없는데, 화공 대성공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드문 수단 중 하나였다.
  • 조조할인과 유비할인(?)이라는 개드립도 있다(...).[47] 구글 자동검색어에도 나온다. 이것만 보아도 조조의 아치에너미는 바로 유비라는 인식은 한국 사회에서 확고하다.

5. 관련 문서



[1] 조조 유비 함께한 술자리에서 "천하의 영웅은 나와 그대(= 유비) 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2] 왼쪽이 조조, 오른쪽이 유비이다. [3] 사군(使君)은 사(使)가 붙은 고관을 높여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자사의 경칭이다. 이때 유비는 실질적으로 조조에게 얹혀사는 처지였으나 공식적으로 조정이 인정한 예주자사랍시고 사군이라 부른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지사님' 정도의 표현이다. [4] 여기서 당시 협천자를 개시한 사공 겸 거기장군이었던 조조가 유비를 '사군' 나으리로 높여 부르는 한편 반대로 자신은 이름을 불러 스스로를 극히 낮추고 있다. 지금도 한자 문화권의 예법으로는 본명을 성씨도 없이 부른다는 것은 완전히 연하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하대이다. 당대 중국의 예법으로 유비는 황족 후손은 맞지만 황족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조가 유비에게 '유황숙 감사 나으리와 소생'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유비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법하다. 비슷한 예로 유비가 여포 처형 당시 여포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하대하고 여포가 죽인 동탁 정원은 동 태사와 정건양(건양은 정원의 자)으로 예의를 갖춰서 불렀다. [5] 한국에서도 같은 전주 이씨라고 다 왕족은 아니고 조상으로부터 몇 대 내려가면 자동적으로 왕족에서 이탈되게끔 되어 있었다. 그래도 왕족 혈통인 만큼 대가 끊어진 왕자의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고 어쨌든 같은 혈통이기에 계승권 정도는 있었다. 그게 까마득하게 멀어서 의미가 없었을 뿐이다. [6] 그런데 조조의 행적을 보면 의외로 유비만이 아니고 다른 이들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맞는 말이다. 워낙 조조가 서주대학살 등 폭압적인 통치와 악행을 저지른 전과가 있어 그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조조는 강북 사람들을 자꾸 회유하는 손권이 신경쓰여 장강 지역의 백성 10만호를 이주시키려다 되려 그들이 조조가 우려했던대로 손권에게 귀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나라 멸망 당시 호구 수가 53만여 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손권은 딱히 특별한 일도 안 했는데 호박을 넝쿨째로 받은 셈이다. 손권 얼마나 인구 증가에 혈안이 되어있었는지 감안하면 그냥 복권이 터진거다. [7] 예: 항우 vs 유방 초한전쟁 [8] 애당초 공손찬은 중앙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군주가 아닌 일개 군벌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명성 높은 황족 유우를 죽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9] 유비가 서주에서 쫓겨난 것도 조조와 싸우고 패배하여 연주에서 쫓겨난 여포가 유비에게 의탁한 뒤 뒤통수를 쳐 벌어진 일로, 조조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10] 神用先銷元惡似魏皇滅蜀之時一 : 먼저 악의 근원을 없애니 마치 위나라 황제가 촉(蜀)을 멸한 때와 같이 한 번에 [11] 조위가 마냥 평화적이지는 않았지만 선양 자체는 평화적이었고 한헌제를 산양공에 봉하였으며, 산양공 작위는 유추 대에 없어지지만 그것도 서진 시기인데다 영가의 난에 휘말려 피살되었기에 그랬던 것이지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12] 사마광은 구주(천하)를 모두 아우르지 못했으니 세 나라 모두 정통이 아니라고 보았다. [13] 비단 대리국 뿐 아니라 촉한이 있던 지역에 기반한 나라 상당수가 촉한에게 우호적이었다. 물론 촉한정통론 자체의 문제도 있고 또 촉한이 마냥 긍정적인 면만 있는 나라도 아니지만(대표적인 서양 삼국시대 전문가인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촉한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도 내부적으로 호족이나 이민족과 마찰이 잦았던 위, 오에 비해 정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특히 이민족과 그럭저럭 잘 지냈다는 정황이 보이는데 아마도 그랬기에 성한이나 대리국 같은 이민족 국가들도(현지 민심도 있었겠지만) 촉한을 우호적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촉한이 멸망한 지 고작 30~40년밖에 지나지 않아 건국된 성한은 나중에 국호를 한나라로 고쳤고 성한의 승상인 범장생은 촉한 시절의 관리였다. [14] 물론 대리국이 있던 현 운남성 지역은 촉한의 수도인 성도가 있는 사천성과 조금 다르긴 하다. 바로 아래에 붙어있다고는 하나 성도와 운남성 성도인 곤명은 서로 650km 정도 떨어져있다. [15] 세간에서 촉한정통론, 촉빠 등이 다 연의에 근거한다 말하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촉한정통론은 삼국지연의 이전부터 대세였고, 삼국지연의가 나오기 전에 나온 삼국지평화 등 다른 작품들은 삼국지연의 보다 더 심각하게 편향된 위까, 촉빠 성향이었다. 그렇기에 삼국지연의는 오히려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조조라는 인물을 재해석하여 위나라를 기존보다 더욱 치켜세워준 편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능력이 절하되고 인덕만 강조된 유비가 피해자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16] 청나라는 유교를 연구할 때도 고증학이라 하여 주관적인 판단보다 객관적인 실증 연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학문 경향성이 정통론 연구에도 영향을 끼쳐 정통성에 대한 가치관이 개입된 주관적 판단이 아닌, 두 정통성을 객관적, 실증적으로 재연구하는 경향이 컸다. 이는 청나라 조정에서 체제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연구에 대해 가차없이 문자의 옥으로 숙청하는 태도를 보여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연구하기 위한 도피성 목적이 컸다. 물론 이는 향후 청나라 정치가 퇴보하고 쇠락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7] 사실상 삼국지 이후의 중국사가 이 둘의 정통성 대결 확장판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18] 범엽의 후한서, 원굉의 후한기 모두 유비의 이름 없이 주유가 조조를 격파했다고 저술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무제기, 선주전, 오주전 모두 유비가 조조를 격파했다고 저술되어 있다. 무제기에서는 대놓고 '공이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라고 하여 상대의 대장을 유비로 기록하고 있으며 산양공재기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의 군선을 불태운 것을 유비라고 기록하고 있어 유비 역시 유기와 관우의 수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전에 함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19] 병력의 양과 질 양쪽 모두에서 압도당하는 처지이다보니 개인의 무력이나 책략보다 병사들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에서 야전 자체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20] 이때는 관우, 장비, 황충 등 군을 맡길만한 지휘관들이 다 죽어 군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긴 하였으나, 주변 기후나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을 속행하려는 의도로 주둔지를 골랐단 점에서 명실공히 유비의 실책이었다. [21] 사실상 조조가 세력을 일굴 수 있는 제일 큰 명분이 협천자였던 만큼 이를 헌책한 순욱은 적어도 적법한 과정하에 파면시켰으면 시켰지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22] 일본의 동양 사학계 거장인 미야자키 이치사다 도조 히데키와 더불어 조조를 두고 민중을 수탈했다고 비판하였다. [23] 노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묘사되는 조조와 유비의 차이점도 이 정치적 측면에서 갈린다. 진삼국무쌍에서 조조는 '어지러운 천하를 강력한 누군가가 내세우는 법과 도리로 잠재우려는 야심가'로 묘사되지만 유비는 '인간은 도리에 얽매임 없이 자연스럽게 천하를 선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은 이상론자'로 묘사된다. 다만 유비는 촉을 얻은 뒤 제갈량의 간언대로 법가 쪽으로 노선을 잡은 만큼 대중적인 이미지와 별개로 무작정 이상론만 따진 인물도 아니다. [24] 단, 친족들인 하후돈, 하후연, 조인 등이 마냥 낙하산인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그 능력을 입증하긴 했다. 그 대신 이러한 친족 위주의 인사 등용은 훗날 하후무와 같은 무능력한 낙하산 인사를 낳기도 했다. [25] 순욱, 최염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26] 전예는 유비와 함께한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유비가 전예의 하야를 두고 매우 아까워했고, 이와 반대로 마속은 그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고 큰 자리에 오르면 안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7] 삼국지연의에서 방통의 일화로 소개된 태업은 정사에서 장완이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유비로서는 신참이 자기 관직이 마음에 안 든다며 제대로 일도 안 하고 태업을 부리는 걸 직접 봤는데 좋게 볼 리도 없을 뿐더러, 하필 장완은 오나라에 항복하여 그쪽의 관리가 된 반준과 인척이었기에 더욱 탐탁지 않은 면도 있었다. [28] 대표적으로 시황제의 천하 순행을 멀리서 지켜보며 항우는 "장차 내가 저놈을 대신하리라" 라고, 유방은 "사내대장부라면 저와 같이는 해야지!" 라고 말했다는 일화. [29] 냉정하게 역사적 사건으로써 인물들의 업적이 갖는 의의만 따지자면 조조, 유비 둘 모두 흘러간 시대의 무수히 많았던 군벌 중 특히 두각을 드러냈던 사람들 중 하나 정도의 위치로 인물의 인지도와 별개로 중국사 전체에서 이 둘이 갖는 비중은 크지 않다. [30]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던 때가 바로 한중 공방전 직후였다.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한중왕에 올랐을 때는 고제가 항우를 무찌른 게 재현되는 것 아니냐며 후한 전역이 들썩였다. [31] 다만 집안이 유비처럼 가난하지는 않았고 지역 유지 정도는 됐다. [32] 이 이점마저도 조조 vs 유비 구도에서의 협천자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유비의 경우 조조의 협천자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지만, 유방은 항우의 협천자를 대외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 [33] 이와 같은 관점에서 초한지를 바라본 작품이 경극 패왕별희다. [34] 조조라고 정치력이 떨어지고 유비라고 전투에서 젬병인건 아니었지만 유방은 전투는 잘 하는데 항우가 너무 뛰어났고 유방은 정치를 너무 잘 하는데 항우는 너무 못했다. [35] 물론 '항우와 비교해서'의 얘기로, 유방 역시 당대 중국에서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단지 항우가 장수로서는 당대에 누구도 따르지 못할 초인이었을 뿐. [36] 다만 근현대 조조 재평가 열풍과 함께 조조가 중국사 불세출의 영웅 수준으로 과대평가 받으며 정사 조조와 연의 유비를 비교하며 조조가 낫다 평하는 이상한 경우가 늘어났기에, 이 역시 또 다른 중요한 관점으로 적용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창천항로다. [37] 두 영걸의 마지막 결전에서 유비가 이겼기에 최종적인 승자라는 관점 역시 존재하지만, 조조 세력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왔어도 세력비를 역전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기에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간 조조가 본인의 능력으로 쌓아온 업적을 깡그리 무시하는 의견이 될 수도 있기 때문. [38] 조조는 천하통일을 손권과 유비때문에 이루지 못 했고 유비는 의형제 관우의 죽음에 얽매여 조조를 치는게 아니라 오나라를 치다가 이릉대전에서 대패하면서 유능한 유망주들을 많이 잃었고 북벌의 동력을 일부 상실하고 말았다. [39] 조조는 할아버지 덕분에 탁류파와 일부 청류파에게 지지받았고, 그 인맥과 순욱이 추천한 연주와 예주 출신 청류파 귀족들을 휘하로 모아 뛰어난 참모진을 젊은 나이부터 꾸릴 수 있었다. [40] 다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에게 큰 힘을 실어준 헌제의 지지와 황숙이라는 칭호는 정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41] 즉 혈통을 타고난 건 행운이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명분을 확보하고 이미지를 구축한 뒤 딱 맞는 때에 제위 시기를 잡은 건 유비의 뛰어난 정치 감각 덕분이다. 실제로 유비보다 훨씬 황제 혈통에 가깝고(이 쪽도 황제 집안과 100년 전에 갈라져 나왔지만 어쨌건 전한까지 올라가는 유비와 달리 후한 황실 혈통과 직접 닿아있었다) 뛰어난 인품으로 존경을 받았던 유우는 혈통으로 실리를 챙기지 못한 채 죽었다. [42] 조조가 타고난 기반이나 유비가 타고난 혈통은 모두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능력 밖의 부분이다. [43] 사실 위빠들도 조조의 인성만은 변호하지 못한다. 유비도 사실은 통수를 거듭한 음험한 인물이 아니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게 유비를 평가할 때 사용한 잣대를 그대로 조조에게 적용하면 조조는 간웅을 넘어서 인간 취급도 못하게 된다. 유비가 유장을 배신하고 여포를 손절한 표리부동의 배신자라 치면, 조조는 여백사, 공융, 예형, 양수, 허유, 순욱, 화타 등등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해먹고는 이용가치가 떨어지거나 그냥 맘에 안 든다고 죽여버린 요괴가 될 것이다. [44] 유장은 법정 등 자기 수하에 있으면서 능력치 만점인 인재들이 자기를 배신하게 한 군주이므로, 군주로서 그 자질은 분명 낙제점이다. [45] 거기다 여포건 유장이건 사정이 있다 해도 어쨌든 먼저 유비를 배신했다. 특히 여포는 떠돌이 신세였던 것을 유비가 받아주었는데도 뒤통수를 쳤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고 그래놓고서는 유비가 여포의 주살을 조조에게 권하자 유비를 믿지 못할 놈이라고 욕한 것이다. 사실 여포가 유비를 배신했다는 점은 명약관화한데도 연의에서 기술을 이상하게 하는 바람에 음험한 유비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지 정사에서는 명백한 사실이다. [46] 손권의 경우 조조, 유비보다 한 세대 아래다. 한 세대 아래인데 삼국의 한 축을 세운 것. [47] 이거 관련 개그 중에 유비 삼형제가 아침에 영화관에 가면 할인해준다고 해서 장비를 보내 표를 사게 했더니 장비가 잔뜩 화가 나서 돌아와 왜 그러냐 묻자 조조만 할인해줘서 그랬다고 대답하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