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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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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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接
(268 ~ 306)
1. 개요
중국 서진의 학자로 자는 조유(祖游). 사례 하동군 의씨현 출신으로 전한의 경조윤을 지낸 왕존(王尊)의 10대손이다. 그의 아버지 왕울(王蔚)도 조위의 유학자로 《지기론》(至機論)을 저술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2. 생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자 같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중 마침 인재를 찾고 있던 하동태수 유원(劉原)이 왕접에게 관심이 생겨, 13살에 불과한 그를 다른 70여명의 인재들과 함께 관직에 천거해주려 했으나 왕접이 집에서 떠나길 거부했다. 이에 유원이 "그대는 세속을 피해 은거하는 즐거움을 추구하려 하는가?"라 묻자 왕접이 대답했다.이 접(接)은 복이 없어, 어려서부터 형제자매도 없이 외롭게 자란데다, 노모께서 병을 심하게 앓고 있으니 도저히 관직에 오를 마음이 안납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병사했고 왕접은 어머니의 묘지 곁을 지키며 여러 서적들을 읽었는데, 결코 다른 뜻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성정은 단순하고 솔직하여 속된 허례허식을 멀리 하였으니 명성은 자연스레 높아졌고, 평양태수 유담(柳澹), 산기시랑 배하(裴遐), 상서복야 등유(鄧攸)와 같은 이들이 왕접과 교류했다. 이후 하동군의 주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하동태수 온우(温宇)를 섬겼고, 온우는 왕접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공조로 승진시켜 주었다가 다시 수재로 중앙에 천거한 덕에 낭중이 되었다.[1]301년, 제왕 사마경이 황제를 참칭한 사마륜을 베고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을 때, 왕접은 황제가 아닌 사마경이 전권을 잡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탄하였다. 사마경은 그를 낭중에서 제외시키고 정로장군의 사마로 옮기게 했다.
304년, 탕음에서 혜소가 목숨을 바쳐 혜제를 지키는 일이 있었다. 왕접은 사마영에게 혜소만이 그 본분을 다했다며 그를 해친 병사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 강력히 주장하니 조정에서도 이를 따랐다. 몇 개월 뒤,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영의 관직을 삭탈하고 권력을 차지하자, 상서전중랑에 임명되었다. 왕접은 사마옹 토벌을 위해 진군해오던 동해왕 사마월과 내응하기로 했으나, 그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