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군의 남진이 한창인 1950년 7월 5일 미 제24보병사단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가 경기 화성군 오산면 외삼미리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한 전투로, 고개 이름을 따서 '오산 죽미령 전투'로도 불린다.미합중국 육군이 처음으로 6.25 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전투이나 대참패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미국육군사관학교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기록되어 있다. 해당 스테인드 글라스는 역사적으로 미군에게 교훈을 주는 전투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전장의 교훈을 얻고 과거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서 적을 경시하지 말라는 교훈을 받으라고 설치한 것이다.
2.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는 지휘관인 찰스 B.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붙인 부대명이다.대대장 찰스 B. 스미스( Charles Bradford Smith , 1916~2004) 중령은 1916년 생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34세로, 주일미군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를 이끌고 투입되었다. 오산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는 자신의 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참전했으며, 최종계급은 준장으로 1965년에 퇴역했다. 이후 2004년에 88세를 일기로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작고했다. 한국전 첫 전투 美軍 스미스 특공대장 별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는 제24보병사단 예하 제21연대 1대대가 중심이 되어 편성된 부대로 보병부대 406명은 2개 소총중대(B중대, C중대), 75mm M20 무반동포 1개 소대, M2 107mm 중박격포 1개 소대, 대대 본부중대 및 통신소대로 구성되었으며 장교 17명에 병사 389명으로 이루어졌다. 좁은 의미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보병부대만 의미하며 특수임무부대답게 당시 주일미군에서 정예병 취급을 받는 인원을 선정해서 배치하였다.
포병부대 134명은 미 제52포병대대 A포대로 105mm 곡사포 6문과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4정과 60mm M9A1 바주카 4문 및 차량 73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탄약은 105mm 고폭탄 1,200발과 105mm 대전차고폭탄 6발을 휴대했다. 인원은 장교 9명과 병사 12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반적인 포대 1개 인원보다 많은 이유는 A포대 인원에 대대본부 인원 절반과 대대본부 직속포대 인원 절반을 추가로 편성해서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포병부대도 넓은 의미에서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 들어간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주요 지휘관과 장교들은 다음과 같았다.
- 대대본부 - 대대장 찰스 B. 스미스 중령(Lcl. Charles B. Smith), 부대대장 대위
- 대대 화기소대 - 소대장 소위
- 제B중대 - 중대장 찰스 토머스 중위(Lt. Charles Thomas)
- 제C중대 - 중대장 리처드 W. 다쉬머 대위(Cpt. Richard W. Thasimmer)
- 제52포병대대 제A포대 - 제52포병대대장 밀러 O. 페리 중령 (Lcl. Miller O. Perry)
정예병력을 차출했다지만 당시 미 육군은 군축의 칼날을 제대로 맞은 상태였고 특히 동아시아 방면에 배치된 주일미군의 상태는 말 그대로 참담한 수준이라서 정규 편성과 동떨어진 편제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 병력조차 대대를 3개 편성하면 각 대대는 2개 중대로만 만들어진다던지, 반대로 대대 내부의 중대가 3개면 대대 2개로만 연대를 편성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원래 편성의 66% 수준의 숫자만 보유하며 그나마 정원도 제대로 못채웠다. 그 외에도 M26 퍼싱이나 M4A3같은 중형전차로 구성되어야 하는 보병사단 소속의 전차대대도 사라지고 M24 채피같은 경전차로 구성된 전차소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런 식으로 사실상 정규 편성에 비해 전투력이 절반이면 용할 수준의 개판이 된 것이 당시의 주일미군이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스미스 대대는 인원이 완편대대와 비슷해도 편제가 소규모이므로 이 대대의 장교 총원이 15명 안팎에 불과했다. 원래 정상적인 대대는 3개의 보병중대와 1개의 화력지원중대에 1개의 (비전투) 지원중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대장이 5명이어야 하지만 스미스 대대는 보병중대가 단 둘 뿐이었고, 다른 중대들도 편제수에 미달이었으며 중대장부터 이미 2명밖에 되지 않았다. 중대본부와 통신소대도 원래 편성의 절반 수준으로 작았다.
게다가 영관급 장교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본인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위 이하의 초급 군인들뿐이었고 장교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1/3, 병사들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단지 1/6일 정도로 숙련도가 낮았다. 그나마 주일미군 중 가장 사기가 높고 상태가 좋은 부대라고 보낸 게 이렇다.
병력도 모자란데 장비 수준도 답이 없었다. 보병 1인당 탄약은 120발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75mm 무반동총과 4.2인치 박격포도 소대 정규편성인 4문씩이 아닌 절반인 2문씩만 휴대했다. 기본적인 근접지원장비도 60mm M9A1 바주카 6문과 60mm 박격포 4문으로 빈약했고 심지어 전투식량도 2일분의 C레이션 수준으로 적었다. 이는 수송기를 이용한 공중수송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줄인 것이다.
지원부대인 포병대도 원래는 병력만 수송기로 공중수송하고 화포와 트럭같은 중장비는 선박으로 운반해서 부산에서 합류하는 얼빠진 방식으로 한국에 투입하려고 했으나 7월 1일에 부산 비행장에 호우가 내리면서 미국 수송기가 부산 비행장에 착륙하면서 비로 인해 연약해진 활주로에 파손을 일으켜서 보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동 방법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포병대는 화포와 트럭과 탄약과 물자를 좀 더 많이 챙겨서 한국에 투입될 수 있었다.
포병대의 주력화기인 105mm 곡사포 6문은 부대의 규모를 생각하면 괜찮은 수준의 화력이었으나 1,200발이나 되는 보유 탄약 중 대부분의 탄약이 고폭탄이라서 북한군의 전차에게는 제대로 위력이 먹히지 않았다. 이를 해결해줄 대전차고폭탄은 6발 밖에 없어서 105mm 곡사포 1문을 임시로 대전차포 임무를 부여해서 보병부대 바로 뒤쪽에 배치하고 대전차고폭탄 6발을 모두 지급해주었다.
북한군이 전차를 운용하고 있는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이렇게 대전차고폭탄이 적은 이유는 여러가지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원래 105mm 곡사포용 대전차고폭탄인 HEAT M67은 일반적인 105mm 고폭탄용 분리장착식 M14 약협을 사용하지 않고 완전고정형인 M14 type II 약협을 사용하는데다가 직접사격용이므로 탄약도 일반 고폭탄처럼 탄두 14.97kg, 약협까지 합한 전체무게 19.08kg 의 포탄을 포구초속 472m/s로 발사해서 유효사정거리 11,160m를 가지는 것과 달리 탄두 13.25kg, 약협까지 합한 전체무게 16.71kg의 대전차고폭탄을 포구초속 381m/s로 발사해서 유효사정거리도 7,854m를 기록하는 등 전혀 특성이 다른 포탄을 간접사격이 아닌 직접사격으로 사격해야 하므로 제대로 105mm 대전차고폭탄을 운용하려면 평소에도 직접 사격이라는 별도의 훈련을 간접 사격을 위주로 하는 105mm 곡사포로 해야 한다.
따라서 105mm M67 대전차고폭탄은 사실상 적 전차가 포병부대 코앞까지 오는 위급상황에 대비한 비상용 탄약이며 많은 수량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길게 이어졌다면 강선이 있는 일반 화포로 발사해서 메탈제트가 흩어짐에 따라 위력이 격감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관통력이 최소 102mm 에서 최대 183mm에 도달하는 105mm M67 대전차고폭탄이 많이 양산될 수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마당이니 그럴 필요도 없었고 결국 소량만 생산된 채 군축의 칼날을 맞으면서 6.25 전쟁시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투입하려고 할 때 주일미군의 창고를 다 털어봐도 105mm M67 대전차고폭탄이 불과 18발 밖에 없었고 해당 탄약이 모두 한국에 투입되었으나 모든 대전차고폭탄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게 줄 수 없었기에 결국 6발만 지급되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T-34-85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105mm 야포로 사격하는 6발의 대전차고폭탄 이외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전차화기도 개판인데 대전차지뢰를 1발도 지참하지 않은 것도 상당한 문제였다. 일단 지뢰로 전차의 발을 묶어놓아야 대전차화기의 명중률이 높아지는데 아무도 그런 것을 고려햐지 않은 것이다. 전후의 회고록에서 스미스 중령은 긴급편성을 준비하느라고 지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빼먹은 것으로 생각했고 실전을 겪은 이후에나 대전차지뢰와 대인지뢰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 고위급 장성들이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원래 스미스 대대가 특수임무부대로 불리게 된 이유 자체가 핵전쟁 시대에 발을 맞추어서 분쟁지역에 신속하게 투입가능한 정예부대로서의 편성을 실전에서 실제로 적용해 본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윌리엄 F. 딘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진격하는 북한군에게 한 방 먹여주면 미군이 참전한 것을 알게 된 북한군이 소극적으로 변할 것이고 잘 하면 북한이 협상자세로 돌입하여 북한군이 침공을 중단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병대는 7월 1일 오전 8시 45분에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C-54에 탑승해서 이륙했고 수원 비행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A포대는 배로 부산까지 간 후, 철도를 이용해 수원에서 보병대대와 합류, 한국군을 붙잡고 한강에서 지연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 수원에서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수원으로 북한군이 들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보를 들은 연합군은 재빨리 수원 비행장을 포기했다. 뒤늦게 오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스미스 부대를 태운 수송기는 악천후를 뚫고 7월 1일 부산에 착륙, 7월 3일 대전에 도착해 4일 오산에서 포병들과 합류한다.
3. 전투 전 상황
한반도의 정세가 일촉즉발이 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월 30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에 일본에 주둔중인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북한군이 남진중인 경부국도로 북상하였다.스미스 중령은 7월 2일에 대전에 도착하여 처치 준장으로부터 전방에 대한 상황설명을 들은 후에 몇 명의 참모와 같이 지형정찰을 위해 지프차에 탑승하고 오산까지 136km 거리를 주행해서 오산 북쪽 4km 정도에 위치한 죽미령을 방어진지를 건설할 포인트로 잡고 진지건설을 위한 구두명령까지 하달한 후에 오후 늦게 대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스미스 중령의 건의를 받은 처치 준장은 안성과 평택을 연결하는 선을 방어선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림에 따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3일 아침에 철도로 이동하여 낮 12시경에 평택과 안성 부근의 각각 1개 중대를 보내서 방어선을 건립하고 지휘소는 평택을 통과하는 경부국도변에 만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과 미국간의 작전 협의도 있고 아직 미군 병력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은 상태라 일단 평택과 안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에 우선적으로 병력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미국 제34연대가 곧 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제52포병대대 제A포대가 도착해서 7월 4일 오전 8시경으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지휘 아래에 놓였기 때문에 미국 제34연대가 평택과 안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에 투입이 가능하게 보였다. 그래서 주 방어선 앞에 전초부대 방어선을 추가로 만들기 위해서 조지 바스(George B, Barth) 준장이 7월 4일 오후 3시에 평택에 도착해서 스미스 중령에게 앞서 처치 준장에게 보고한 오산 죽미령의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미 7월 4일부터 평택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던 스미스 중령도 즉시 명령을 이행하였다.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스미스 중령이 일단 반려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산 죽미령의 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병력을 평택과 안성에 분산했다가 다시 평택에 집결시켰다가 일부 병력을 오산 방면으로 이동시키는 상황이었으며 위에 언급한 명령은 사실상 일이 벌어진 후에 뒤늦게 날아온 명령이었다고 바스 준장이 나중의 조사에서 밝히게 된다.
따라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2일 오전 8시에 대전에 도착한 후 7월 3일에 평택과 안성에 분산배치된 후에 7월 4일에 평택에 재집결한 후 야간에 오산 죽미령으로 행군하는 정신없는 이동을 해야 했으며 제대로 된 방어진지 건설 및 휴식을 취해야 할 부대원들의 피로도를 올리고 방어진지도 제대로 건설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북한군은 7월 2일 영등포를 함락시킨후 7월 4일 수원을 점령하면서 쾌속 남진을 하고 있었는데 평택에 있던 스미스부대도 7월 4일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스미스 중령은 출발하기 전 오산 갈곶리에 있는 국군 제17연대에게 같이 북상을 제안했지만 처음에는 제17연대가 국군 수뇌부의 지시가 없어 거절하였는데 7월 3일에는 유엔군 공군 소속의 호주 공군의 P-51 머스탱 4기의 오폭으로 평택역에 도착한 한국군용 탄약수송화차 9량이 공습을 얻어맞고 대규모 유폭을 하는 바람에 평택역이 송두리채 날아갈 정도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고 경부선이 단절되었으며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제17연대의 백인엽 연대장이 파편상을 입는 등 큰 피해까지 입어 제안을 수락할 여건이 되지 못 하였다. 결국 제17연대는 오산 전투 이후에 갈곶리 전투를 따로 수행하게 된다.
7월 3일에는 무려 5차례나 오폭이 발생했는데 수원에서 오산에 이르는 도로에서 한국군을 공격했고, 수원역에서는 피난열차를 오폭하여 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도로에서 후퇴하던 한국군 트럭 대열을 공습하여 한국군 200명이 죽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의 대응사격으로 전투기 한 대가 수원 비행장에 비상착륙했다. KMAG와 한국군에게 '포로'가 된 미군 파일럿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처치 준장은 극동공군에게 항의하며 공군의 작전을 한강 이북으로 한정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동안 오폭사건이 계속 발생하게 되는데 금강을 한강으로 착각하고 폭격을 실시하는 조종사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에따라 하는 수 없이 스미스 대대는 단독으로 북상하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징발한 운전사들이 도망치게 되어 출발이 늦어지게 되었고 경부국도가 피난민들로 가득차는 바람에 7월 5일 새벽 2시 30분에서야 겨우 죽미령에 도달하게 된다. 20km 거리를 3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한 것이다.
4. 전투 준비
당시 상황을 보여준 작전도 |
7월 5일 새벽 2시 30분경 오산 북방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B중대와 C중대에게 경부국도 양옆 능선에 진지공사를 시킨후 75mm 무반동총 2문, 4.2인치 박격포 2문을 포함하여 모두 406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진지 왼쪽 측방, 즉 도로 서쪽에 B중대 소속 1개 소대를 배치했고, 나머지 B중대 소속 2개 소대는 도로 우측에 위치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동쪽인 경부선 철로 방향에는 C중대 소속 2개 소대를 배치했고, 나머지 1개 소대는 우측 측방 경계를 위해 철로 서쪽면의 능선을 따라 남쪽방향의 진지에 배치했다. 75mm 무반동총 2문은 도로 동쪽(B중대)과 철로 서쪽(C중대)에 각각 1문씩 배치했다. 4.2인치 박격포 1문은 B중대 진지 후방 365.7m (400야드) 지점에 배치했다. 보병 2개 중대가 맡은 전선 길이는 1.6km (1마일) 정도였는데, 철로 동쪽 측방에는 진지를 만들지 못했다.
죽미령에 야간에 도착했으나 7월 4일부터 내리는 비와 함께 어두운 밤이라는 악조건이 합해져서 참호를 건설하고 진지를 구체적으로 마련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본격적인 진지 건설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진지는 전투 개시 직전까지 대부분 완성되었으나 완공한 수준은 아니었고 보병들이 야전삽으로 급조한 수준이라서 튼튼하지도 못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지뢰를 대인지뢰건 대전차지뢰건 보유하지 못했으며 철조망도 없어서 참호에 돌입하는 북한군을 제대로 방해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작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죽미령 일대는 평야 지역 안에 있는 작은 구릉지대이며 특별하게 험준하다거나 방어가 쉽다거나 하는 위치가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북한군이 쉽게 우회해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협격하기 딱 좋았으며 특히 경부선 철로 우측에 진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철로를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보병부대를 우회해서 포병부대를 습격하기도 안성맞춤이었다.
제52포병대대 제A포대의 경우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구릉지대에 있는 보병부대와는 달리 그냥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지점에 조그마한 시골길로 연결되는 근방에 있는 마을과 민가에 자리잡았는지라 북한군에 도달해서 존재를 눈치채는 순간 바로 쓸려나가기 딱 좋았다. 그리고 견인 및 수송차량 관련 문제로 인해 105mm 1문을 후방인 평택에 놓고 오는 바람에 사용가능한 화포가 105mm 5문으로 줄었다. 이 중에서 1문은 앞서 말했듯이 포병진지 500m 앞인 90고지 하단에 전진배치해서 임시용 대전차포로 쓰고 대전차고폭탄 6발을 모두 지급하였으며 나머지 4문은 일반적인 포병부대로 운영하였다.
그 외에도 밀러 O. 페리 중령은 북한군의 전차를 많이 경계했으므로 앞서 말한 임시 대전차포 배치 이외에도 포병 본부 요원 중 지원자를 뽑아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4정과 60mm M9A1 바주카를 운영하는 4개 팀을 구성하여 스미스 중령의 보병에 합류시켰다. 포대에 자체적으로 장비한 근접용 호위병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수송수단과 탄약은 전선보다 후방에 위치하였다. 스미스 중대원들이 타고온 트럭과 지프들은 남쪽 도로를 따라 주차되어 있었다. 포병이 타고온 트럭과 지프들은 이들보다 더 남쪽 지역의 민가 뒤편 숲속에 숨겨두었다. 포대 바로 옆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주차된 2대의 트럭에는 105mm 탄약이 실려있었다. 1 ~ 2대분의 탄약은 후방 민가 뒤편에 숨겨둔 트럭들에 실려있었다.
그 외에도 통신소대도 원래 편성의 절반 수준으로 작았기 때문에 보병부대와 포병부대간 연락이나 보병부대간의 연락이 불충분했다. 이렇게 되면 실전에서 충분히 연락두절 사태가 발생하며 보병이 포병 지원을 못받고 북한군과 싸워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물론이거니와 미군 상층부도 북한군이 자신들을 보면 '미군이 참전했다' 며 물러설 것이라는 매우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그 동안의 한국군의 패배를 전차만 보면 콩 튀듯이 흩어져서 도망가는 것이라고 편견을 가진 결과 처치 준장이 스미스 중령에게 한 말이 안좋은 의미에서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이렇다할 전투를 치르지 못했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차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을 병사들이 필요하네! 중령의 부대는 한국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특히, 그들의 떨어진 사기를 높힐 수 있도록 도와주게!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차라리 오산천이라도 앞에 흐르는 오산시 구시가지에서 하천을 방패로 방어선을 구성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버틸 수 있으므로 더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문제가 더 발생했다. 오산과 평택 사이에는 북쪽으로부터 오산교를 비롯한 소규모 교량들이 존재했으며 특히 오산교, 진위교, 통복교는 폭파시 차량 통행이나 우회가 매우 힘들어지므로 전술적 가치가 높은 교량이었다. 따라서 당시 공병학교를 통합해서 지휘중인 한국군 제1공병단의 지휘관인 윤태일 중령은 수원에서 철수하기 직전에 당시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으로부터 수원에서 대전 사이의 모든 교량을 폭파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폭파 준비 작업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 중 상당수는 실제로 전장의 혼란 속에서 실시하지 못했지만 오산 남쪽에서 교량 폭파준비중인 한국군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및 동행한 바스 준장이 발견하고 해당 교량은 우리가 사용할 예정이니 폭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자 폭약 상자를 한국군에게서 빼앗아서 강물에 집어던지는 행동까지 한 끝에서야 작업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지 당시 참전자중 일부의 증언으로는 미군 부대가 오산 북쪽으로 올라간 날인 7월 4일 밤과 7월 5일 낮 사이에 오산교를 포함한 주변 교량을 폭파했다고 한다. 따라서 후퇴로와 보급로가 끊어진 사실상의 배수진을 친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으며 후퇴시에 분산철수라고 읽고 패주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였다.
5. 1차 전투
오전 7시경 쏟아지는 비 속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수원 방면 방향에서 북한군을 목격했다. 수원이 7월 4일에 함락됨에 따라서 북한군이 오산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오전 7시 30분경 북한군 4사단 보병들과 T-34-85로 구성된 북한군 107전차연대 전차들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북한군이 죽미령으로 밀려오자 오전 8시에 보병과 같이 전방에 배치된 관측장교가 포격 요청을 해 오전 8시 16분에서 18분 경 105mm 포탄 2발이 선두 전차를 향해 떨어졌다. 포격은 포병진지에서 3,657m (4천야드), 보병진지에서는 1,828m (2천야드) 떨어진 곳부터 전차부대의 중앙 지점에 집중되었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북한군의 T-34-85 전차들은 해치를 닫고 행군대열을 유지한 채 도로를 따라서 계속 남진했다. 한국군의 소규모 지연진지와 마주친 것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북한군의 전차가 포격을 뚫고 전진하자 불필요한 탄약낭비를 막고 확실한 전차 격파를 노리기 위해서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640m (700야드) 내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75mm 무반동총 2문과 60mm 바주카포를 집중적으로 사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북한군 전차는 85mm 전차포와 7.62mm 공축기관총과 차체기관총을 난사했다.
60mm 바주카포 소대를 지휘하는 코너 소위는 60mm 바주카포 포탄 22발을 북한군의 T-34-85 전차 후방에 모두 명중시켰지만 해당 전차가 멀쩡히 기동하는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리하여 북한군 전차가 보병진지를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계속 경부가도를 따라 남진했다.
선두에 선 북한군 전차 2대는 미군 포병들이 임시 대전차포 용도로 전진배치한 105mm 야포의 직접 포격으로 2대의 전차를 조준사격하고 나서야 모두 정지시킬 수 있었다. 60mm 바주카에 무한궤도가 손상되기도 했기에 2대의 전차는 모두 도로 측면으로 이동해서 멈추었는데 그 중에서 105mm 대전차고폭탄을 맞은 1대는 불길이 올랐고 다른 전차는 해치를 열고 튀어나온 3명의 전차 승무원들 중 2명이 항복하는 척하다가 마지막으로 나온 1명이 갑자기 PPSh-41 기관단총을 들고 뛰쳐나와서 난사하는 통에 미군 기관총 부사수 두명을 쏴죽였다. 이는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전사자다. 그리고 북한군 전차병도 미군 사격에 3명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는 4대가 1개 소대를 이루어서 전투하므로 3번째 전차와 4번째 전차가 바로 전진을 시작했다. 선두의 전차 2대가 길가로 물러선 것이 통로를 가로막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 때 임시 대전차포 역할을 수행중인 105mm 야포 1문은 이미 대전차고폭탄 6발을 모두 사격한 후였고 그 이후에 일반 고폭탄으로 직접 사격을 실시하다가 약협이 약실에 끼어버리는 사고까지 발생한 상태였다. 사격불능 상태에서 미군이 약실에서 약협을 빼내려고 시도하는 사이에 북한군 전차가 미군 진지를 공격해서 임시 대전차포인 105mm 야포 1문을 파괴했고 포병 1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동료들과 같이 급하게 몸을 피했다.
후속 전차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남진했으며, 이렇게 총 33대의 전차가 오전 9시까지 미군 방어선을 돌파해서 남진했다. 북한군 전차가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남진할 때까지 미군은 약 2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북한군 전차를 파괴가능한 105mm 대전차고폭탄 6발을 모두 소모한다. 105mm 야포도 1문 상실했다.
이 와중에 진지 내의 미군들은 여전히 "아마 저 친구들이 우리들을 못봤기에 지나갔지,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되돌아 갈 것이다." 는 희망 속에서 후방의 포병에게 적 전차가 우리 진지를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 희망도 후속 전투에서 북한군들이 미군임을 알고도 쏴제낌으로서 깨어진다.
T-34-85 전차 8대로 구성된 첫 번째 전차 대열이 이동하면서 도로를 따라 설치된 통신선을 끊어버렸다. 유선 연락이 먹통이 되자 SCR-610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그러나 고장도 잦고 비까지 맞은 무전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유일한 희망은 지프에 탑재된 무전기였다. 오전 9시를 넘어가자 보병과의 무선 통신은 연결과 끊김을 반복하며 지직거리다가 오전 11시부터는 완전히 두절되었다.
북한군 전차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경부가도를 따라 남진했다. 105mm 고폭탄으로는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포병진지에서 457.2m (500야드) 지점까지 접근한 북한군 전차들은 작은 언덕 뒤에 집결한 후 약간의 휴식 후에 T-34-85들은 도로에 올라와 해치를 모두 닫은채 전속력을 내면서 급속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부 전차는 제압사격의 목적으로 85mm 전차포 사격을 가했고 7.62mm 기관총 사격도 발사했는데 제대로 조준하지 않고 난사했다. 그 와중에 T-34-85 1대가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소로 부근에 위치한 A포대 지점에 잠시 멈췄다. 포대원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줄 았고 긴장했으나 잠시 후 오산 방향의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105mm 곡사포들은 137.1m (150야드)에서 274.3m (300야드) 라는 초근접 거리에서 직접 사격까지 실시했지만 북한군 전차에 결정적 타격을 주지 못했다. 105mm 포탄을 직격으로 맞은 T-34-85도 비틀거리면서 그냥 남쪽으로 진격했다.
105mm 야포 이외에도 포병들로 구성된 60mm 바주카팀이 도로 측면에 위치했고, 적 전차 대열이 방어선을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은 후에는 2개 팀을 더 배치시켰다. 한 팀은 페리 중령이 직접 이끌었고, 다른 한 팀에는 에드윈 에버솔(Edwin A. Eversole) 병장이 있었다. 이들은 곡사포 진지와 도로 사이 중간쯤의 논에 숨어서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두 전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에버솔 병장이 포탑을 겨냥해 60mm 바주카를 발사했다. 그러나 그대로 튕겨나갔다. 적 전차는 85mm 전차포를 발사했는데 공교롭게도 통신선이 연결된 전봇대를 맞췄고 에버솔 병장 쪽으로 쓰러졌다.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에버솔 병장은 논두렁으로 피했다. 105mm 고폭탄을 맞은 세 번째 전차는 무한궤도가 끊어져 기동불능에 빠졌다. 다른 북한군 전차들은 신경쓰지 않은 채 지나갔고 105mm 곡사포 진지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페리 중령은 무한궤도가 끊긴채 도로상에 멈춰있는 T-34-85에 병사들을 보내서 적들을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통역은 항복할 것을 소리쳤다. 안에서는 아무 반응 없이 조용했다. 페리 중령은 곡사포를 쏴서 파괴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3발을 맞은 후에야 해치가 열렸다. 두 명이 뛰어나와 도로 아래 도랑으로 숨었다. 페리 중령은 병사 몇 명을 보냈고 그들은 총을 들고 저항하는 적 2명을 사살했다. 작은 교전에서 페리 중령은 오른쪽 종아리를 다쳤다. 페리 중령은 옷가지를 찢어 종아리를 압박하는 임시 처치를 취하고 절뚝거리며 포대를 지휘했다.
10분 후 25대의 T-34-85 전차로 구성된 두번째 전차 대열이 나타났다. 첫 번째 대열보다 숫자가 많았다. 적 규모에 놀란 일부 병사들이 포를 이탈하려고 했다. 페리 중령과 드웨인 스코트(Dwain L. Scott) 소위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통제에 나섰다. 경험 많은 부사관들은 포를 지키고 적에게 사격을 가했고 장교들도 탄약을 준비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런 모습을 본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북한군 T-34-85 전차 대열은 이렇다할 공격 없이 포대를 그대로 지나쳤다. 105mm 곡사포의 고폭탄으로는 그들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고 단 1대의 무한궤도를 파손시키는데 그쳤다. 북한군 전차의 일부는 1명에서 2명 정도의 북한군 보병이 탱크 데산트 방식으로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곡사포탄의 폭발 충격에 튕겨나가서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A포대의 피해는 포대 근처 건물에 떨어진 포탄에 불이 나서 근처에 쌓아둔 105mm 탄약 300발의 유폭을 일으켰다.
이렇게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보병진지와 포병진지를 모두 돌파한 북한군 전차들은 계속 남진해 오산 시내를 통과한 후 갈곶리에서 국군 17연대를 공격해서 갈곶리 전투를 치른 후 한국군을 격퇴한다.
여기까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올린 전과는 임시 대전차포 역할로 전방에 추진 배치된 105mm 곡사포 1문과 보병부대의 60mm 바주카의 합동공격으로 T-34-85 전차 1대를 격파하고 다른 1대를 무한궤도 손상으로 정지시켰으며 A포대에 속한 105mm 곡사포 4문의 연속사격으로 T-34-85 2대를 무한궤도 손상으로 정지시켰으며 다른 3대를 살짝 손상입혔으나 해당 전차들은 그대로 전진을 계속했다는 수준의 미미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손해는 상당했다. 일단 임시 대전차포 역할로 전방에 추진 배치된 105mm 곡사포 1문이 완파되고 경부가도상에 주차되어 있던 스미스 부대원들이 타고 온 차량들이 전부 불타서 사라졌다. A포대 진지의 105mm 곡사포 4문 중 1문이 초근접 사격중에 85mm 전차포 포탄 파편에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인명피해는 보병 20여명 사상, 포병 3명 부상이었다. 그리고 병력들의 사기가 대폭으로 하락하였다.
북한군 전차 30여대가 지나간 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수원쪽에서는 별다른 적의 행동이 관측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미스 중령은 곧 북한군의 보병부대가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칠줄 모르고 비가 계속 내리는 오산 북쪽 능선에서 스미스 부대원들은 참호를 다시 파면서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6. 2차 전투
오전 11시경 북한군 제4사단의 주력이 전차 3대와 함께 죽미령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북한군 제16보병연대와 제18보병연대였다. 이미 미군 전선을 돌파한 전차부대와 전혀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북한군 제4사단은 아무런 눈치를 못채고 미군 진지 앞까지 진격했다. 북한군의 행군 대열은 9.7km의 길이를 가질 정도였으며 트럭들의 행렬로 이루어졌다.북한군을 발견할 때 대략 1시간 후에는 전장에 북한군이 도착하리라고 예상했기에 미군들은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11시 45분경에 북한군 제4사단이 미군 진지 910m (1천야드)까지 접근하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모든 화력을 총동원해서 사격하기 시작했고 특히 박격포와 기관총을 선두 트럭에 집중해 트럭 안의 보병들을 살상시켰다. 해당 공격으로 트럭이 불타고 북한군 보병이 일시적으로 흩어졌으며 북한군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뒤따라오던 북한군 전차 3대가 가세해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진지 코앞인 300m까지 근접해서 3시간 가량 교전을 벌였다. 그리고 1천여명의 북한군 보병이 도로 동쪽의 논에서 측면우회공격을 시도했으나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의 기본전술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말려든 뒤였다. 북한군은 도로 동쪽 능선을 따라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방어진지 전면에 견제공격을 가하면서 미군을 붙잡아두는 사이에 다른 북한군들은 방어진지 양 측면으로 이동하며 포위 기동을 시작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은 정면 공격을 막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들은 측면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끝장내려고 시도하지 않고 스미스 부대 진지 측면을 그냥 우회기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건 그물에 물고기가 더 많이 걸리도록 잠깐 뜸을 들이는 것에 불과했고 12시 30분경, B중대의 1개 소대가 지키고 있는 도로 서쪽 진지를 굽어보는 고지에 일단의 적들이 나타났다. 이를 확인한 스미스 중령은 소대에게 그곳을 빨리 벗어나 도로 동쪽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진지를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대대 지휘소(CP)의 플로이드 마틴 소령은 4.2인치 박격포와 탄약을 진지 가까운 곳으로 이동 배치했고 그밖의 인원은 도로 동쪽 고지로 이동해 조금 더 좁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 이후에 박격포를 비롯하여 보병이 보유한 모든 화포의 사격을 시작했다. 동쪽 측방 고지의 적 기관총 진지에서도 사격을 시작했다.
한편, 페리 중령의 A포대는 관측장교(FO)와의 통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 있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통신반을 두 번씩이나 보내 연결을 시도했으나 북한군 편의대의 사격으로 방해를 받아서 실패했다. 북한군 편의대는 군복 대신 사복으로 갈아입고 전투하는 정규군 소속 게릴라라서 미군 입장에서는 피난민과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오후 1시경, 페리 중령은 작전장교(S3) 에게 적의 방해가 있었던 곳을 피해 동쪽 논을 가로지르는 곳으로 통신선을 연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 후퇴
오후 2시 30분에 스미스 중령은 후퇴를 결심한다. 이미 후방의 포병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고, 휴대한 탄약까지 고갈되고 비가 내려서 공중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이 방어선 측면의 92고지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동측방 능선을 타고 기어 올라 대대를 사실상 포위하자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이리하여 후퇴로가 막히기 전에 C중대부터 황급히 철수시켰다. 철수순서는 C중대, 의무대, 대대 본부, B중대순이었으며 부대별로 서로를 엄호하면서 교대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철수 루트는 철도 서쪽 능선을 따라가면서 오산까지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철수가 워낙 다급하게 진행된 탓에 B중대 2소대는 철수 명령을 듣지 못했다. 2소대장 칼 버나드(Carl F. Bernard) 소위는 중대 CP에 아무도 없다는 연락병의 보고를 받았다. 중대 전체가 후퇴했다는 것을 확인한 버나드 소대장은 즉시 소대원들에게 후퇴를 지시했다. 후퇴하는 병사들은 중화기를 포기하고 개인화기만 휴대했다.
그나마 2소대는 운좋게 후퇴했지만 전장에 남겨진 낙오자와 부상병들은 그대로 북한군의 공격에 전사했다. 약간의 의무병과 군의관이 들것에 실린 부상자들과 함께 전장에 남겨졌지만 나중에 부상병들은 들것에 실린 채로 총알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의료진들은 실종되었다.
특히 후퇴로에 설치된 북한군의 기관총이 많은 사상자를 가져왔는데 21연대 야구팀에서 투수를 맡은 레이몬드 아담스(Raymond Adams) 소위가 36m (40야드) 떨어진 적 기관총 진지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먼 거리를 날아간 수류탄은 스미스 부대원들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준 적 기관총 진지 중앙에 정확히 떨어져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이런 업적을 통해 그나마 사상자 발생을 줄일 수 있었다.
후퇴하는 선두를 엄호했던 B중대가 후퇴할 시점에 대대장인 스미스 중령은 경부선 선로 측방으로 기울어진 능선을 떠나 A포대 진지 반대편 방향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스미스 중령은 서쪽 방향의 논을 가로질러 페리 중령의 A포대로 향했다. 통신이 먹통이 된 상태에서 직접 후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그는 논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에 페리 중령이 보낸 통신반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페리 중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차부대가 돌파했기에 이미 A포대 전체가 적 전차들에 의해 모두 파괴된 것으로 생각했던 스미스 중령은 A포대가 건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페리 중령은 포대원들에게 즉시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 105mm 4문은 모두 포기하고 북한군이 노획해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준경과 폐쇄기의 공이 같이 병사 1명이 쉽게 휴대하기 쉬운 중요부품을 분리해서 가져가기로 했다. 스미스 중령, 페리 중령은 포대원들과 함께 오산 근처 숲속에 숨겨둔 차량들까지 도보로 이동했다. 다행히 적들이 눈치채지 못한 곳에 위치한 차량들 대부분은 상태가 좋았다. 페리 중령은 적 전차들이 이미 포진한 남쪽 평택 방향의 도로를 포기하고 안성 방향을 선택했다.
안성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 도로를 이용하기 위해 마을 남쪽 끝단 근처 굽은 도로를 돌다가 정차한 북한군 T-34-85 3대를 목격했다. 북한군 전차병들은 전차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었다. 페리 중령 일행이 탄 차량들은 재빨리 유턴하여 피했다. 북한군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페리 중령 일행은 동쪽으로 난 작은 소로에 들어서면서 제발 안성으로 향한 길임을 기원했다.
이렇게 적이 점령한 것으로 보이는 오산을 우회해서 안성으로 가다가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방황하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부대원 중 100여명과 합류해서 새벽 무렵 안성에 도착했다. 7월 6일 아침, 스미스 중령과 페리 중령 일행은 34연대가 있는 천안으로 향했다. 천안에 무사히 도착한 스미스 중령은 남은 부대원 숫자를 셌는데 185명만 보였다. 잠시 후, C중대장 리처드 대쉬머(Richard Dashmer) 대위가 65명과 같이 나타나서 250명이 되었다. 그 때까지 약 150여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후퇴중에 분산되었기에 생존자들은 조금씩 아군 전선으로 복귀하게 된다. 가장 큰 손실을 입은 B중대의 경우 생존자 55명은 며칠 동안에 결쳐 평택, 천안, 대전 등지에서 발견된다. B중대장 버나드 중위와 12명은 오산 전투 후 이틀 후 천안에 도착했다. 이들이 다섯 차례나 북한군 차단 지점을 넘어 도착한 때는 북한군 선두가 천안에 진입하기 30분 전이었다. 그 외에도 행방불명자 중 몇 명이 무작정 걸어간 곳은 서해였고, 일부는 동해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했다.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병사도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 행방불명자가 귀환할 수 있던 것은 북한군이 오산 전투 현장에서 전리품을 챙기고 노획을 하느라고 미군을 잠시동안 추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방불명자 중에서 장교 5명과 부사관 10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7월 7일까지 A포대 소속 장교 5명과 부사관 26명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보병 540명 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그리고 개인화기와 개인물품 일부를 제외한 모든 화기와 장비, 물자를 상실하였다.
또한 남쪽의 미 34연대와 상급부대인 미 24사단은 이들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자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 다음날 6일에 분산철수해서 아군과 합류한 잔존병들에게서 오산 전투의 소식을 전해듣고서야 상황을 알게 되었으며, 곧바로 평택-안성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북한군의 피해는 전투에 참가한 5,000여명 중 105전차사단 문화담당 부사단장인 안동수 대좌를 포함한 전사 42명과 부상 85명으로 대략적으로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북한군 전차 4대가 완파 또는 반파되고 3대가 손상되었으며 진격이 약 7시간 지연되었다. 격파된 전차는 1대를 제외하면 무한궤도같은 구동계 손상으로 야전수리가 가능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105mm 대전차고폭탄에 명중당해 완파된 1대만 완전격파되었고 나머지 3대는 전장에 복귀하였다.
7월 11일, 서울의 북한군 심리전 라디오는 52포병대대 소속 앰브로제 누젠트(Ambrose H. Nugent) 대위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오산 전투에서 72명의 미군 포로를 잡았다는 말도 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된 후 최종적으로 결산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인명피해는 사망자 60명, 부상자 21명, 포로 82명이며 그 중에서 포로상태에서 32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8. 결과
오산 전투의 패배로 인해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진격을 멈출 것으로 예상한 맥아더와 미 24사단장 딘 소장의 기대가 완전히 깨졌다. 그리고 나름대로 엄선한 정예병력이 순식간에 패퇴하는 것을 보고 미국도 북한군의 실력을 점점 제대로 평가하게 된다.전투 자체는 대참패라는 것은 모두들 인정하지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국 지상군 참전을 예상하지 못한 조선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지연작전에서 소중한 10일을 벌었다고 해서 패배했으나 결과는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을 지휘한 매튜 B. 리지웨이는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 정예 10개 사단을 막기 위해 1개 대대를 투입한 것 자체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북한군의 경우에는 제2차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미군이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파병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후 노획을 하고 전리품을 줏으면서 상당수의 미군 전사자와 부상병을 본 후에나 미군이 지상군을 파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의외로 미군의 전투력이 안좋았으며 일부 미군 병력은 전투할 의지가 없어보였다고도 판단했다.
북한군 수뇌부도 매우 빠르게 미군 지상병력이 파병된 것 자체는 놀라워했다. 하지만 전투결과가 나쁘지 않고 아직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보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진격속도를 늘려서 미군 대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한반도를 완전석권하기로 결정한다.
이 전투에서 60mm M9A1 바주카와 75mm M20 무반동포의 위력 부족이 확실히 드러났다. 물론 이렇게 형편없는 대전차무기 지원 사실을 안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한국군이 대포쏘는 법 몰라서 이렇게 밀린 건 줄 아냐"며 당장 대전차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대공포인 90mm 대공포와 120mm M1 대공포의 공수를 요청했지만 미 국방부는 쿨하게 씹었다. 그 당시 미 국방부는 극동지역에서 대규모 대전차 화력은 필요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데다가 120mm의 경우에는 미국 내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6월 30일에 주일미군의 M15 대전차지뢰 800발을 긴급공수하여 도착했는데 오산 전투의 패배 및 스미스 중령의 경험을 듣고 나서 황급하게 천안 북방의 경부가도와 동북쪽의 안성방면 도로에 대전차지뢰 매설을 시작했다. 그 외에도 대전차지뢰 수송이 계속되었다.
60mm M9A1 바주카의 경우에는 위력부족을 직접 경험한 것도 있고 스미스 중령의 의견으로는 탄약이 습기가 많은 일본에서 부적절한 방법으로 오래 보관되어 열화된 것 아닌가하는 의문도 전달되었다. 그래서 미국 본토에서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탄약수송이 실시되기 시작했고 3.5인치(약 89mm)구경의 신형 탄두인 M28A2 HEAT탄을 사용하여 관통력이 균질압연장갑 기준 280mm를 자랑하는 M20 슈퍼 바주카도 본체와 탄약이 긴급 생산 개시 및 긴급 수송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부터 이어지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 및 비가 내리면 소나기급이라서 강력한 호우가 동반되는 바람에 전투에 지장이 오고 병력들이 쉽게 지치며 통신이 자꾸만 끊어지는 문제도 제시되었으며 해당 문제들은 빠르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낙동강 방어선 전투쯤 가면 방어진지 건설, 식수 보급, 후송체제 확립, 무전기 대량 지급, 무전 중계소 다수 설치등의 방법으로 조금씩 대처해나가게 된다.
9. 평가
총체적 난국 그 자체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시기까지 미 육군이 보여주는 방어전 실책이 한번에 모두 나타난 전투다.전략적으로는 지형지물의 제대로 된 파악 없이 북한군을 빠르게 막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소규모의 부대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북상시켜서 얇은 방어선을 만들게 하는 식으로 축차투입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고 이는 대전 전투까지 미 육군 제24사단이 축차투입으로 인한 손실끝에 괴멸당하는 비극을 겪게 만드는 결정적인 타격으로 작용한다.
전술적으로는 교통로에 소규모 차단막식 짧은 방어선을 건설함으로서 북한군의 정면 견제 및 우회기동에 쉽게 포위섬멸당하는 약점을 그대로 드러냈고 통신선이 쉽게 절단당하고 무전기가 한국의 가혹한 환경에 망가져서 무용지물화하는 바람에 보병과 지원화력이 연락을 통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구조가 붕괴되므로 보병이 혼자서 싸워야 하고 지원화력은 우회하는 북한군에게 도륙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산 전투에서는 그나마 북한군이 노획과 전리품 습득에 정신이 팔려서 추격타를 넣지 못해서 피해가 적었던 것 뿐이며 천안 전투쯤 가면 본격적으로 미군에 대타격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미군이 당도하면 알아서 협상모드로 나가겠지 같은 만용이나 60mm M9A1 바주카와 75mm M20 무반동포 정도 있으면 대전차전은 안심 같은 답없는 판단이 사라졌고 한국군이 저열해서 전차만 보면 도망친다는 편견도 많이 해소되었다는 점이다. 당장 미군, 그것도 주일미군에서 정예를 뽑아서 만든 특수임무부대가 한방에 박살났으며 흩어져서 분산철수하는 꼬라지가 한국군과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0. 여담
- 이 당시 미 24사단은 2차 세계대전 후 군축의 영향으로 우리의 향토/동원사단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태였고, 그 밑에 있던 스미스 대대 역시 완편 상태가 아닌 B, C중대 두 개 중대만 있었다.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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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들은 개전 초기 국군 내 미 고문단과 마찬가지로
대전차 로켓을 너무 과신했고, 이는 이 전투의 패배에 한 몫을 했다.
#3
해당 실험에서 60mm M9A1 바주카는 노획한 T-34-85 전차를 대상으로 사격할 때 최대한 90도 정타를 때리도록 후방에서 사격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차보다 4.5m (15피트)나 높은 곳에서 사격하는 비실전적인 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탑은 90도 정타로 명중한 것이 아니면 포탄이 다 튕기며 90도 정타의 경우에도 포탑에 관통구멍만 뚫고 끝났고 차체 전면장갑은 아예 관통불가 판정이 났으며 차체 후부를 정타로 명중시키거나 보기륜 사이의 차체 측면 하단을 노려야 격파가 가능했는데 그나마 후방 공격은 변속기 파손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며 측면 하단도 보기륜이나 크리스티 현가장치에 명중하면 관통불가 상태가 된다는 참담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 유엔군이 최초로 참전한 전투였던 오산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오산 전투 터인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1]에 2013년 4월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유엔군 초전기념비, 스미스평화관 등이 함께 있다.
- 이 전투는 6.25 전쟁에서 미군이 첫번째로 참전한 전투이자 처음으로 패배한 전투로 기록되었는데 패인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악이 많은 생소한 지형, 둘째는 7월 남한의 무더운 날씨,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과거 일본군처럼 생보병으로 반자이 돌격이나 하고 소총탄에도 뚫리는 고물전차나 운용하는 수준으로 봤지만 소련제 T-34-85를 몰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