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고지전투 6.25 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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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날짜 | 1951년 10월 10일 ~ 1953년 7월 18일 | |
장소 | 351고지, 강원고성 수동면/현내면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대한민국| ]]|
참전부대 | 대한민국 육군 수도ㆍ제11ㆍ제5ㆍ제15사단 | 조선인민군 육군 제19ㆍ제9ㆍ제7ㆍ제3사단 |
결과 |
동부전선 월비산 351고지 확보에 실패, 휴전선 최북단까지 진출, 설악산과 속초ㆍ거진ㆍ간성지역을 우리 영토로 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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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전투배경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 격퇴한 국군은 1951년 6월 24일에 임진강 하구 - 연천- 철원 - 금화 - 양구 - 간성을 연결하는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7월 10일에 시작된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측의 전략•전술적 측면에서 공격•방어작전의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굴곡진 지형을 일직선으로 바로잡으며,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이러한 군사적인 압력을 가함으로 공산군에 유엔군의 휴전 제의를 관철시키고 교착된 상황 속 전세 유지 및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시기였다.[1]
1.2. 월비산ㆍ351고지의 중요성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 (월비산)로 해발 459m이며, 7번 도로 (원산 ~ 강릉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남강 일대 관측이 가능하고 동해안과 접해있는 저지대 (침투로)를 감제• 관측할 수 있었고, 접근로 통제 및 공방 작전의 발판이 될 수 있기는 중요한 고지로서, 미군은 이를 보고 351고지 중심으로 주변의 고지가 마치 '배의 닻처럼 생겼다' 하여 "앵커 힐(Anchor Hill)이라 불렀다.[2]1.3. 작전지역 지형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지맥이 동서로 뻗어 있으며, 서쪽 내륙방면은 표고 700~1000m의 산악지역, 동쪽은 300~500m의 개활지가 있다. 남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강폭은 60~80m 수폭은 20m 내외이며, 유속은 초속 1.8%이다. 도로망으로는 7번 도로와 7002번 도로가 있으며, 주요 고지군으로 208-339고지가 있고, 지형지물로는 월비산, 351고지가 있다. '351고지'는 4개의 작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곧, 북동쪽 약 600m 지점에 있는 "가" 고지 (210m), 북서쪽 약 300m 지점에 "나"고지 (350m), 남서쪽 500m 지점에 "다" 고지 (290m), 그리고 남동쪽 300m 지점의 "라 고지 (300m)로 위 4개의 무명 고지들은 351고지 전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2. 전투 과정
미 제8군은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동부전선에 국군 제 1군단으로 작전지역으로 조정하였으며, 태백산맥 서쪽에 배치되며 지형상 긴밀한 협조를 유지할 수 없는 환경하 독자적인 작전으로 전개했다.국군 제1군단과 북한군 제6군단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2.1. 국군 수도사단 vs 북한군 제19사단 ('51.10.10.~'51.10.27.)
수도사단장 (준장 송요찬)은 '51년 10월 9일 제1기갑연대장(대령 이용)에게 월비산 탈취에 앞서 351고지와 148고지 탈취 명령을 하달, 작전개념으로 방어상태가 약한 261고지에 조공을 투입하고 점령 즉시 월비산 정면 공격하며, 350고지에 주공으로 하여금 확보하게 하여 북쪽에서 공격하는 개념으로 북한군이 조공과 주공을 오인하게 하여 기습효과 달성으로 승리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51.10.10. 수도사단의 제10포병대대(105mm)와 미 제196포병대대의 1개 포대(155mm) 그리고 동해안의 미 제7함대 제 5순양함대의 포격지원으로 제1기갑연대 1대대가 351고지를 2대대가 148고지를 탈취, 사단 예비대인 26현대 2대대를 고황봉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51.10.15. 3개 중대 병진대형으로 기동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강인한 투지로 월비산을 확보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적 19사단의 반돌격을 격퇴한 후 적의 호기를 포착, 수도사단장은 남강 강변까지 전과확대하도록 조치하였고 10월 19일 남강 이남 지역을 확보하고 '51.10.20. ~ 27. 수차례의 반돌격을 격퇴하며 전투는 일단락되며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후 11월 16일 국군 제11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백야전사령부 배속되어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2.2. 국군 제11사단 vs 북한군 제9사단 ('51.11.16.~'51.11.27.)
제11사단장 (준장 오덕준)은 '51,11.16.~17. 수도사단 방어지역을 인수인계하였으나 당시 국군 제11사단의 상황은 2개 사단 지역을 1개 사단이 담당하게 되어 방어 정면이 넓어지고 종심을 가질 수 없었으며, 대전차공격대대는 실전경험이 없는 신병 위주이고 사단에서 배속하지 않아 지휘체계 통일이 어려웠으며, 2개 중대는 파견, 편제대비 인원이 부족한 상황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3]'51.11.18. 병력 부족과 방어진지 보강으로 경계대책을 강구하지 않아 남강을 건너는 적 20명을 식별하였으나 귀순병으로 오인하여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전투정찰로 아군의 정보를 획득한 북한군은 5차례의 돌격으로 아군의 탄약을 소모, 월비산과 351고지에서 철수하게 하는데 이때 아군 (대전차공격대대 2중대)은 지휘통신이 마비되어 상급부대 화력지원을 못 하고 상급부대 보고도 5~6시간 지연되어 역습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51.11.20. 피탈당한 월비산과 351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주저항선의 보강이 시급하다고 판단, 배속된 국군 제5사단 36연대 2대대를 9연대 재배속함에 따라 방어 종심을 증가시켰으나 북한군의 직사포탄 지원으로 351고지 확보를 유지하는데 힘을 기울이며, 월비산을 빼앗기게 된다. '51.11.27. 국군 제5사단 36연대 1대대에 방어진지를 인수하게 되며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 작전기간 동안 노무자 46명, 군인 244명의 피해가 있었다.
2.3. 국군 제5사단 vs 북한군 제9사단 ('52.7.9.~'52.11.10.)
5사단은 미 제10군단 예하로 가칠봉 전투 ('51.9.4. ~ 10.14.)에서 격전을 치른 후 전투력 복원을 한 뒤 '52.1. 23. 부 351고지를 11사단으로부터 인수하였고, 351고지 주변 일대를 적 9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상황 속 1대대를 339고지, 2대대를 203고지, 3대대를 351고지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후 4차례의 국면으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다. 특히 1차전의 7번의 역습을 진행한 35연대의 고지 쟁탈전은 주도권 확보를 위한 불굴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투였다.[4]전초전('52.7.9.): 5사단장 (준장 장창국)은 27연대장 (대령 오창근)에게 351고지 서측 전초진지인 154고지 공격 임무 하달, 27연대 1대대를 공격 제대로 편성하여 154 감자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화력으로 돌격이 돈좌되고 설상가상으로 27연대 2중대는 진로를 잘 못 잡아 계획된 시간보다 1시간 늦게 도착, 때 늦은 공격, 통신두절과 기도가 탄로되어 공격이 실패하였다. 이에 대대장은 대대예비대를 투입, 초월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지속되는 소모전으로 탄약도 없는 와중 무리한 공격을 통해 작전 실패를 하였고 154• 감자고지를 피탈 당하게 되었다.
- 그 무렵 35연대가 방어 중인 351고지 동측에서는 2대 대장 (소령 정인순)이 방어지역 집중 답사, 야간전투에 중점을 두고 훈련 함으로서, 전초진지인 148 • 187고지에 대한 야간 위력수색을 감행한 결과, 적 진지 12개소 파괴, 적 13명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어 대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격은 북한군에게 심리적 압박으로 가해지고 견제를 하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었다.
- 1차전 ('52.7.10. ~ 13.): 5사단의 모든 집중이 154고지에 집중하고 있는 관계로 적정 파악에 다소 소홀하고 전선에 배치된지 1주일 밖에 안된 35년대 3대대 9중대는 '52.7.10. 22:00 적의 야간 공격을 뒤늦게 파악하고 화력지원을 받아 저항하였으나 좌• 우 양편으로 포위한 적 1개 대대의 공격과 적의 화력에 각종 진지, 장애물이 파괴되었고 이에 증원될 예비대가 없어 11중대의 정찰대를 투입, 10중대는 사격지원을 하였으나, '52. 7. 11. 01:00 351고지를 피탈 당했다.
1차 역습 ('52.7. 11. 01:30): 35연대 3대대장 (소령 안교명)은 북한군의 재편성이 완료되기 전 역습할 것을 결심하고, 재편성 중인 9중대와 11중대 정찰대를 통합 지휘하여 각종 화력지원을 받으며, 다시 전투에 투입함으로써 351고지 7부 능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2차 역습 ('52.7.11.10:25): 3대대 독단으로 351고지 탈환이 제한될 것으로 판단한 35연대장 (대령 고백규)은 사단에 건의하여 사단 수색중대와 예비대였던 27연대 2대대를 배속받아 역습을 강행하지만, 이때 사단에서 배속받은 부대가 아닌 목표와 가까이 있던 전투력이 저하된 35연대 9•11중대를 역습부대로 편성하여 역습을 실패하였다.
3차 역습 ('52.7. 11.21:30): 주간공격으로는 351고지 탈환이 어렵다고 판단한 35연대장은 야간 역습으로 유엔군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9ㆍ11중대가 정면, 6중대가 좌측을 맡아 공격을 개시, 351고지 8부 능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적의 집중된 포병 화력으로 돈좌되어 철수했다.
4차 역습 ('52.7. 12. 04:00): 35연대 3대대장은 기상 (안개)의 이점을 이용하여 351고지 8부 능선 돌격선까지 진출, 3차 역습과 동일한 부대인 6.9.11중대가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최전방에 있던 9중대장이 전사하고 잇달아 분대장급 이상의 지휘자들의 전상으로 지휘체계가 와해되며, 351고지 탈환에 실패하게 된다.
※ 35-3대대는 1~4차 역습 간 총 140명 (전사 28, 부상 74, 실종 38)의 손실 발생
5차 역습 ('52.7. 12.16:30): 5사단장 준장 장창국은 전술지휘소를 전방 저진리 일대에 설치하고 351고지 탈환 작전의 임무를 27연대장 대령 오창근에게 주어, 35연대 6.9•11중대를 배속하였고, 27연대장 중령 이남주에게 27연대 2대대를 역습부대로 하여 공격할 것을 지시, 27연대 대대장은 지형정찰을 할 겨를도 없이 351고지 탈환 작전을 실행하게 되는데, 유엔 해군함정 3척의 함포사격 지원을 받고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7부 능선에서 돈좌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중대장들의 부상으로 전투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27연대장은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지시를 받아 27연대 2대대는 오직 투지만으로 버텨내며 전선을 고착상태로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6차 역습 ('52. 7.12. 20:30): 1군단장 (중장 이형근)은 27연대 관측소로 나가서 351고지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특공대장 (대위 박태송)을 임명, 27연대 2대대 작전지역으로 이동, 유엔군의 항공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하여 351고지를 탈취하였으나, 지칠 대로 지쳐버린 27연대 3개 중대는 진지를 고수하지 못하고 철수하게 된다.
※ 당시 27연대 3개 중대 병력은 총 99명으로 장교 8명, 사병 91명이었다.
(★) 7차 역습 ('52.7.13. ~ 14.): 7.13. 351고지 탈환작전을 받은 35연대 2대대장 (소령 정인순)은 군단장이 있는 27연대 관측소로 이동하여 한 작전을 군단장에게 건의했다. 작전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지형에 익숙함을 근거로 하여 야간 작전을 시행하고 F-51의 항공폭격 지원, 2. 지원 포병 (26 . 99포병대대) 지휘관의 관측소 이동하여 직접 지휘하여 근접지원 실시, 3. 공격기동 간 유선 가설을 하며 이동할 수 있도록 통신가설소대 배속한다.
군단장은 해당 작전을 바로 승인하였다. 35연대 2대대장은 바로 작전에 돌입하며 우선 지휘소 위치를 208고지에서 234고지로 변경하였으며, 통신소대를 10 ~ 20m 간격으로 1개 조씩 편성하여 즉각 보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배속된 공병소대 화염방사기반을 공격 제대 뒤로 후속하게 하고 지원 포병은 목표확보 후에도 351고지 일대 능선을 지속 타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사단의 양동작전으로 차량 제대 (2 1/2T 10대)의 전조등을 통해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것으로 오인케 하는 등의 여건이 조성된 이후 공격개시선을 통과한 35년대 2대대는 7중대로 남동쪽, 5중대로 우일선으로서 동쪽에서 양의 포위를 실행하였고 충분한 여건조성과 지형의 익숙함으로 신속한 기동을 한 2대대는 결과 5중대가 351고지 우측 능선을 확보하고, 7중대가 351고지 정상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27연대 2대대와, 35연대 9중대, 사단 수색중대 1개 소대로 351고지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며, 지속되는 북한군의 반돌격을 격퇴하며 성공적인 작전으로 끝났다.
※ 적 86연대 1개 대대 격멸, 한국군 피해 632명 / 한국군 26,394발, 북한군 7,180발 포격 / 공군 3대 전승작전으로 기록
(★) 2차전 ('52.8.22. ~ 23.): '52.8.1. 부임한 5사단장 (준장 김종갑)은 북한군의 무선교신 방해, 도청, 허위통신문 발송 등 후방지역 교란과 군사시설 타격, 기밀 탐지 등의 활동하는 정황 속에 적정 수집과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한 위력수색작전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35연대장 (대령 고백규)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다.
이에 35연대장은 2대대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감자고지 일대위력수색 작전을 구상하는데 이번에는 전투의 경험이 많은 하사관을 소대장으로 임시 임명하고 야간 훈련으로 사전에 기관총 사수들에게 야간 예광탄 사격을 중점으로 예행연습하였고, 노무자 50명이 동원되며 연대 수용소 및 보급소에서 실탄 재보급 과 부상자 후송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유엔공군의 F-81과 그라만 전폭기 5개 편대가 출격하여 포격을 실시, 이후 35연대 7중대는 공격개시선을 통과,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와 동시에 27연대 2대대는 양공 작전으로 263고지 일대로 노출된 체 기만을 하여 적의 혼란을 야기했다. 호기를 포착한 35연대 7중대는 결국 고지를 점령하고, 공병소대 화염방사기반을 통해 감자고지 일대 적 진지를 파괴, 잔적소탕 등을 실시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5사단은 야간전투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 북한군 20명 사실, 아군 부상자 5명의 성과 달성
3차전 ('52.9.24.) 패배를 반복한 북한은 한 달 평화의 정적을 깨고 351 • 339고지를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당시 27연대 5중대가 339고지, 9중대가 351고지, 10중대가 '라' 고지에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351고지의 27연대 9중대장 (중위 고태문)은 진내 사격을 요청, 적 9사단 86연대를 철수시키고 방어 진지를 고수하였으나, 27연대 5중대장 (중위 김인규)은 해당 상황을 파악하고 339고지의 적이 조공이라 판단하여 측방 경계를 소홀히 하게 되고 적 8사단 82연대의 침투 및 강습으로 339고지는 결국 피탈되었다. 이에 즉시 2중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전개하였고 관측반의 활약으로 화력을 유효하게 지원하여 성공리에 역습을 마쳤다.
※ 북한군 70명 사살, 아군 전사자 27명, 부상 48명 피해
4차전 ('52.11.7.~ 10.) 또 다시 패배한 적 9사단은 포병부대를 전방으로 추진하고 사단 예비대를 투입하였으며, 공격 준비를 하고 3일간의 지휘 • 통신 교란, 시설 파괴를 위해 화력을 집중하여 여건이 조성된 후 351고지 좌• 우 양측 측방에서 공격하였고 339고지 또한 근접전이 전개되면 전투가 진행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불리하게 기울자 351고지를 고수하던 27연대 9중대장 (대위 설경호)은 철수를 하고 유인격멸작전을 시행하여 1차 역습을 강행, 실패하게 되나, 북한군을 진지 밖으로 끌어내어 진내 사격의 피해를 최대화하는 국군의 감투 정신을 보여준 부수적인 효과를 거둔 일전이었다.
이후 5사단장 (준장 김종갑)은 사단 예비대인 36연대 2대대를 투입하여 27연대에 배속,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27연대 7중대로 하여금 2차 역습을 진행, 적의 강력한 포탄으로 역습시간이 1시간 지연되었으나, 1차 역습 간 받은 피해가 큰 북한군은 아군의 전차포 지원으로 더욱 큰 피해를 받으며 아군은 351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 고지 쟁탈전에서 전차화력의 효율성이 높다는 전훈을 남김.
이렇게 끝난 5사단의 351고지 전투 중 이승만 대통령은 '52.8.8. 5사단을 방문하여 가칠봉 전투, 351고지 전투에 이은 승리로 "천하무적"이라는 휘호를 하사하였다.
2.4. 국군 제15사단 vs 북한군 제7사단 ('53.1.28.~'53.7.18.)
이정석 준장의 15사단은 '53년 1월 28일 1군단 작전명령에 따라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351고지를 중심으로 총 3차전의 치열한 전투가 벌였다.1차전('53.6. 2. ~ 6.): 38연대가 351고지에서 적 7사단의 공격에 대비 하여 진지 공사 및 2대의 무전기를 설치하여 지휘통신을 유지 하던 중 적 7사단은 351고지 일대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사단장은 이를 공격준비사격으로 파단하고 화력태세를 갖추었으며 적의 양공 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적 1개 대대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였고 적 2개 소대 규모가 침투하자 대대장 (소령 이영호)은 이에 38연대 예비대인 2중대 투입을 건의, 예비대의 수색결과 별다른 소득 없이 339고지 북단으로 배치되었다. 곧이어 적 1개 중대가 기습공격을 하여 351고지를 양쪽에서 포위하였고 9중대장(대위 박제선)은 진내 사격을 요청하여, 가용화기를 총 동원, 진내 사격이 개시되었다.
지속되는 북한군의 파상공격이 전개되면서 피탈 직전에 놓여 38연대장(대령 이동화)은 사단 예비대를 증원을 건의, 사단 예비대(50연대 3대대)를 주저항선으로 이동, 방어를 고수하자 북한의 포격이 중단되며 351고지를 지켜냈고, '53.6.3. 50연대 1대 대는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여 집중포화를 뚫고 공격했으나, 북한군의 세찬 반격에 압도되어 후퇴하게 되며, B-29편 및 사단 포병의 화력지원 후 동일 기동로로 역습을 강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미제 95기동부대 순양 • 구축함, 미 제 77기동부대 항공모함 4척을 통한 351고지 집중포격으로 여건조성 후 50연대 1대대는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화력으로 아군의 공격이 저지되며, 결국 실패한 뒤, '53. 6.4. 139명을 보충받은 50연대 1대대가 351고지 공격을 개시하며, 각 중대의 특공조를 통해 적 화기업체호를 파괴, 고지에 육박했으나 다시 한 번 집중되는 포화에 후퇴했다.
'53.6.5. 50연대 3대대가 야음을 틈타 공격을 실시, 적의 진내 사격과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되고 재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실패하고 15사단장은 거듭되는 격전으로 지쳐버린 부대로 351고지 공격작전을 계속한다는 것은 사상자만 증가시키는 것을 절감하고 군단장의 승인을 얻어 부대 배치를 재조정, 차후작전에 대비했으며, '53.6. 6. 38 연대장은 50연대가 확보 중인 351고지 남쪽을 인수하여 1차전이 종료되었다.
※ 전사 240명, 부상 560명, 실종 11명, 사살 294명, 포로 12명, 81,374발
2차전(53.6.15.): 미 제77 • 95기동부대의 함포사격과 제10전투비행단 F-51편대의 항공지원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 39연대 1대대는 351고지 탈환을 위해 공격작전을 시작하였으나,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적의 포병화력에 많은 병력 피해로 더이상 전진이 불가하다고 판단된 순간, 대대장이 직접 진두지휘로 8부능선까지 진출, 이후 사단 예비대를 건의하여 공격제대로 활용하였으며, 지속적인 정면공격을 감행했다.
※ 해당 시기 참모총장 대장 백선엽, 미 고문단장 로저스, 1군단장 방문 이에 39연대장은 사단장의 독전이 점점 혹독해지자, 연대 예비대를 투입, 다시금 공격을 개시하여 고지 정상을 확보하였으나, 기쁨도 잠시 적의 맹렬한 진내 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후퇴하게 되면서 2차전은 끝났다.
3차전(53.7.17): '53.6.25. 수차례의 공격의 실패로 불과 20일만에 이정석 • 백인엽 • 오덕준의 세명의 사단장이 경질되어 장병들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제 4대 15사단장 소장 최영희는 38연대를 351고지에 배치했다.
정전협정이 임박해지자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해 '53.7. 17. 적 7사단은 351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서남부 능선인 339고지 일대를 정면에 걸쳐 대대적인 포격을 실시하였고, 양공 작전을 강행하였으나 아군에 의한 공격 실패로 잠잠해지는 듯하였으나, 지속적인 소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339고지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아군은 고지를 피탈 당하였으며, 곧바고 역습을 강행, 38연대 1대대 및 사단 수색중대가 투입되었으나 좌절되며 실패했다.
이에 351 • 339고지를 피탈당한 15사단장 (소장 최영희)은 전선을 평가하며, 전술적 가치를 보아 월비산과 남강연안 확보에 선결된다고 판단하였으나, 조속한 휴전 성립을 위해 유엔군에서 대대급 이상의 작전을 통제하는 상황 속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군단장에게 건의하여 주저항선을 내려 351고지에서 철수하게 되며,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53.7. 29. 15사단은 캔자스 선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 교육훈련과 부대정비에 매진하며, 351고지 전투는 종료되었다.
3. 결과
1951년 10월 10일에서 1953년 7월 18일까지 646일간 벌어져 수도 • 제11 • 제5 • 제15사단이 투입되어 북한과 대한민국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충지인 351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수십 번의 주인이 뒤바뀌면서까지 치열했으나, 한민족의 명산 중 하나였던 금강산, 월비산, 351고지로 이어지는 산맥은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하지만, 38도선 북쪽인 설악산과 속초 지역 및 거진•간성지역이 한국의 영토로 확정되었기에, 이 점에선 의의가 있다.
4. 351고지 위령제
351고지 위령제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서 1971년부터 진행된 역사깊은 6.25 전쟁 기념 행사로, 2023년 기준 제 52회를 맞이한 월비산 351고지 전몰용사 위령제는 민통선 이북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과거 참전용사들을 모시고 진행하였으나, 현재는 모두 세상을 떠나 현내면번영회를 주축으로 행사가 주관되고 있다.또한, 2023년부터 제5보병사단에서는 6.25 전쟁 당시 참전했던 전투의 의미와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위령제에 참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