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강릉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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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시기 | 1950년 6월 25일 ~ 6월 27일 | |
장소 | 강원도 강릉 일대 | |
교전국 | 대한민국 | 북한 |
지휘관 |
이성가 제8사단장 대령 고근홍 제10연대장 중령 박치옥 제1대대장 소령 조원영 제2대대장 소령 이도헌 제2대대장 소령 하병래 제3대대장 소령 김찬호 57mm 대전차포중대장 대위 최면호 57mm 대전차포중대장 중위 김용배 제21연대장 중령 박서권 제1대대장 소령 조규영 제2대대장 소령 최취성 제2대대장 대위 이창률 제3대대장 소령 서봉교 57mm 대전차포중대장 중위 이남구 제18포병대대장 대위 장경식 제18보병대대장 소령 정원하 야전공병대대장 대위 김묵 야전공병대대장 대위 |
김광협 제2군단장 소장 마상철 제5사단장 소장 오진우 제766부대장 총좌 |
병력 | ||
피해규모 | ||
결과 |
북한군의 강릉 점령 국군 8사단의 후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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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릉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강원도 강릉시에서 국군 제8사단이 38선을 넘어 남침해온 북한군 제5사단 등과 벌인 전투이다. 우세한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양면에서 압박해온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국군이 제천으로 철수하면서 강릉이 북한군에 점령되었다.2. 배경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강원도의 인제군과 양양군은 38선 이북 지역과 이남 지역으로 나뉘었다. 미군정은 38선 남쪽에 있는 인제군 지역을 홍천군으로, 양양군 지역은 강릉군으로 통합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군이 미군에게서 38선 경비 업무를 넘겨받았는데, 강릉 일대 동해안 지역의 경비는 1949년에 창설된 국군 제8사단이 담당했다. 제8사단의 제10연대는 춘천·홍천 지역의 경비를 담당한 제6사단의 동쪽으로부터 동해안까지 26㎞에 이르는 구간의 38선 경비를 맡았고, 제21연대는 삼척 일대에 주둔하며 해안선 경비와 후방지역의 작전을 담당했다.한편, 북한은 1948년 2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뒤 38선 인근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하면서 꾸준히 남침을 준비해왔다. 동해안 지역에도 38선 경비를 담당하는 제1경비여단만이 아니라 북한군 제5사단이 양양에 추가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고성군 간성에는 상륙작전이나 오지전투를 담당하는 제766유격대와 제945육전대 병력을 배치해 침투 작전을 준비했다.
6월 15일, 북한군은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유격대 60명을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의 분산을 유도하고 후방지역 교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들 유격대는 아군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작전 개시 5일 만인 6월 20일에 55명이 사살되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아군의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는 목표는 달성하였다.
6월 19일에는 38도 분계선 우단의 기사문리 해변을 따라 북한군 5사단의 군사 1명이 귀순해 왔다. 18세 정도의 홍안 소년인 그 군사는 “지금 양양 일대에서 많은 인민군이 집결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진술하였다.
같은 날 서림리에서도 북한군의 군사 1명이 투항하여 똑같은 내용의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국군 장병들을 긴장시켰으나, 상급부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3. 전투
3.1. 6월 25일
영동 일대에서는 6월 24일 낮부터 단비가 내리다가 밤에는 부슬비로 변해 온누리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었다. 강릉에서는 6월 25일 04:00부터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 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강릉군 강동면 정동진리 등 명동 해안으로 상륙한 적 육전대의 선발대가 해두보를 확보하고 후속부대가 속속 상륙하고 있었다.북한군 제5사단은 주공을 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조공은 양양~서림리, 남양리~원일전리의 계곡 접근로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소대 및 분대 단위로 경계 진지를 구축하여 38도 분계선을 경계하던 국군 전방부대 5개 중대는 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적의 포병화력에 압도당하여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으며,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분계선 남쪽에 준비된 저지진지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방대대의 예비 중대가 저지진지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북한군의 포화가 국군 진지에 집중되었고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린 국군은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7번 도로 축선 일대에 배치되었던 조원영 소령이 이끄는 제10연대 2대대는 화상천의 방어진지 마저 포기하고 주문진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좌전방 서림리 일대의 박치옥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는 구룡령 일대에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광원리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3.1.1. 북한군의 상륙작전
6월 25일 해가 뜨기 약 1시간 전인 이른 새벽 강릉 남쪽 정동진리의 해변마을인 등명동에 갑자기 수많은 북한군이 나타나 마을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마을 옆 해안에 접안한 수송선에서 하역한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운반시켰다. 그런데 뒷산 중턱에는 북한군이 이미 개인호를 파놓고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때가 6월 25일 04:00를 전후한 시간이었고 따라서 북한군의 선발대가 상륙한 시간은 그보다 1시간 전이었을 것으로 짐작 되었다.그렇게 하여 해두보를 확보한 적의 육전대는 발동선과 범선으로 주력부대를 상륙시켰고 등명동 남쪽 10킬로미터 지점인 옥계면 도직리에 일단의 선박이 접안을 시도하였으나 수심관계로 실패하고 겨우 3명만 상륙시킨 후 등명동으로 북상하여 본대 선단과 합류하였다.
또한 이날 07:00경에는 북한군의 제766부대가 삼척 남쪽의 임원진리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으로 침투하였다. 등명동 해안에 상륙을 완료한 적의 1개 연대 규모는 산성우리에 있던 대한 흑연무연탄 주식회사 강릉광업소를 급습하여 숙직중이던 경리과장이자 대한청년단 강릉군단 총무부장이던 심경섭 이하 4명의 직원을 납치하고 밤재에 1개 대대를 배치한 후 주력은 강릉을 향하여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밤재에 배치되어 7번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북한군의 1개 대대는 옥계를 향해 남하하던 중, 때 마침 그 부근까지 진출한 국군 제21연대 1중대와 경찰 및 옥계면 대한청년단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격퇴되었다.
이때 북한군의 대대장은 패전의 분풀이로 정동진리 해안초소에 포박한 경찰관 1명을 사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심경섭 경리과장을 반동분자라 하여 현장에서 학살한 후 국군 제21연대가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동할 것으로 판단한 듯 차단진지 구축에 착수하였다.
3.1.2. 제8사단장의 지휘조치
강릉에 사령부를 둔 국군 제8사단이 비상을 발령한 시간은 05:30였다. 그 얼마 후부터 38도 분계선의 전황이 보다 소상하게 보고되었으며 곧이어 강릉 경찰서장의 북한군의 상륙상황과 그들의 주력이 강릉을 목표로 북상중이라는 상황 보고가 있었다.제8사단은 지체없이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제 21연대의 강릉 이동과 연곡천~사천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여 강릉을 사수할 것이며, 사단 공병대로 예비대를 편성하는 동시에 육군 본부에 1개 연대의 증원을 긴급요청토록 조치하였다.
전면전에 대비한 제8사단의 작전개념은 38도 분계선을 경계 진지로 하고 화상천 일대의 횡격실능선을 전진진지로, 연곡천~광원리를 주저항선으로 하며 사천과 운두령을 예비 진지로 하여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다가 주저항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고 공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육군 본부로부터 “적의 전면 남침이 개시되었으니 사단장의 재량권에 따라 최선을 다할 것이며 1개 연대의 증원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사단장은 이때서야 비로소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필시 이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하여 즉시 실천에 옮기도록 엄명하였다.
제8사단의 지휘조치
- 1. 모든 군수품은 대관령 너머 진부리(珍富里)로 소산시킨다.
- 2. 6월 25일 10시를 기하여 작전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 3. 군경가족과 공공기관을 후방으로 피난 및 소개 시킨다.
- 4. 민간 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한다.
- 제8사단장 대령 이정일 --> 제8사단장 대령 이성가
이에 따라 제8사단은 장병가족에게 6개월분의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고 계엄업무를 담당할 민사부장을 임명하는 동시에 강릉 일대의 주민을 피난시킬 계획까지 준비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강릉 학도호국단 산하 1400여 명의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탄약 및 보급품의 운반과 환자 구호와 연락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것이 학도병 참전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6월 25일 오후에는 장기전에 대비한 군수품의 차량 적재작업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한편 고근홍 중령이 이끄는 제10연대는 북한군이 등명동에 상륙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57mm 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안목~안인진 일대로 급파하였다.
그 무렵에는 적의 상륙선단의 일부가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으며, 그 일부는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안인진에 도착한 대전차포중대가 적의 선단에 맹렬한 포격을 집중하여 격퇴시켰다.
또한 제4중대는 등명동~강릉간의 방어에 유리한 대포동에 방어진지를 급편하여 때마침 북상 중이던 북한군의 1개 중대 규모의 군사들을 격멸함으로써 위급한 국면을 타개하였다.
3.1.3. 군선강 방어선
안인진, 대포동의 교전상황을 보고받은 제8사단장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북한군에 대비하는 것이 선결문제라는 결론을 짓고 강릉 남쪽 12km 지점의 군선강에 방어진지를 급편하기로 결심하였다.그러나 그 시점에 있어서는 38도 분계선이 붕괴되어 전방부대들이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10연대의 예비인 제 3대대의 전방증원이 시급한 형편이어서, 어느 부대를 군선강에 투입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무장공비토벌을 위 해 계방산, 오대산, 대관령 일대에 투입한 부대와 삼척에 있던 제21연대가 강릉까지 이동할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사단장이 가용한 부대는 사단 공병대대밖에 없었고 이처럼 어려운 고비에서 사단장은 제10연대장에게 제21연대가 증원될 때까지 군선강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하고 제18야전포병대대 3중대를 동 연대에 배속하는 한편, 공병대대를 연곡천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사단 전술 지휘소를 사천국민학교에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제10연대장은 하병래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군선강에 투입하여 방어진지를 급편하였다.
삼척의 김용배 중령이 이끄는 제21연대장은 강릉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지역 내의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하고 북평에 주둔하고 있던 제1대대로 하여금 옥계 일대의 적정을 수집하게 한 결과, 적이 밤재에 차단진지를 구축한 상황을 확인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강릉 일대의 상황이 위급함을 감안하여 최단거리이며 차량 및 도보이동이 용인한 7번 도로를 따라 이동할 것인지 아니면 부평~백봉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한 끝에 우회이동 한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리하여 제 21연대는 2개 행군제대를 편성하고, 연대의 주력은 6월 25일 19:00에 삼척을 떠나 6월 26일 10:30경 강릉에 도착하자 곧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창률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장성과 임계리에 배치한 2개 중대를 삼척으로 집결시킨 후에 행군하게 되었다.
3.2. 6월 26일
김묵 소령이 이끄는 사단 공병대대는 예하 3개 중대로 전투편성을 마치고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공병이 보병전투를 수행하는 첫 번째 기록을 세웠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18야전포병대대 1중대는 주저항선 후방의 석교리에, 2중대는 사천국민학교에 포진하였다.주저항선을 사전에 확보한 국군은 전방대대인 제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으며, 6월 26일 오전에는 제21연대가 증원됨에 따라 연곡천의 방어배치를 재조정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연곡천 방어선의 부대배치 상황 (6월 26일)
- 좌전방부대: 공병대대(3개 중대)
- 중앙전방부대: 제10연대 제3대대
- ※제3대대장 지휘 하에 4개 중대(제1중대, 제2중대, 제4중대, 제12중대)를 7번 도로 좌우측에 배치
- 우전방부대: 제10연대 제2대대
- 화력지원부대: 제18야전포병대대(2개 중대), 57mm 대전차포 2개 중대(제 21연대 대전차포 1개 중대 배속)
제10연대가 주저항선에서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고 있을 때 사천면 대한청년단은 사명감이 투철한 대원 40명을 선발하여 적정수집을 자원하고 나섰으며, 면 부인회와 청년단은 야전 취사장을 설치하여 군경에게 주먹밥을 공급함으로써 군작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3.2.1. 주문진 전투
제8사단의 주방어지대는 연곡천~송림리간 4km의 방어 정면과 그 남쪽으로 사천까지 3킬로미터 정도의 방어종심을 가진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연곡천은 강폭이 200 ~ 250m 정도이지만 수심이 깊어 교동과 송림리의 여울 외에는 도섭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7번 도로와 연곡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으나 자주포를 포함한 중장비는 통과할 수 없었다. 국군은 이 목교를 파괴하지 않고 그 부근에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려고 하였다.
북한군은 6월 26일 이른 새벽 공병 대대 제3중대 정면에서 강습 도하를 시도한 것을 계기로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대대적인 공격은 없었다.
제10연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제2대대로 하여금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을 공격 탈취하게 하여 주문진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확보하고 곧이어 사단에서는 주문진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북한군 또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공격개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국군은 그와 같은 적정을 전혀 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6월 27일 새벽 04:00, 즉 국군의 공격 개시 시간보다 1시간 전에 북한군의 공격 준비 사격이 개시되어 천마봉과 주저항선을 강타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화력의 강도는 국군 장병들의 상상을 초월한 맹렬한 포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천마봉의 제2대대는 북한군이 공격을 개시한 후 얼마 후에 저항을 포기하고 연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임의로 철수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천마봉에 국군이 배치되어 있다고 믿고 있던 주저항선의 부대들은 어둠 속에서 측방으로 접근하는 북한군을 제2대대 병력으로 오인하였으며, 마침내 방어진지의 일각이 무너지고 연쇄적으로 방어진지가 붕괴되어 혼전이 벌어졌다.
이 급박한 때에 제21연대의 후발대인 제3대대가 군가를 부르면서 강릉에 도착하자 타개책 모색에 골몰하던 국군은 즉시 제3대대를 사천선에 투입하여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북한군을 사천선에서 저지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듯이 제21연대 제3대대의 적시적인 증원과 전선투입은 절망의 늪에 빠진 제8사단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는 활력소가 되었다.
3.3. 6월 27일
3일간 전투를 치르면서 북한군 제1경비여단과 제5사단은 38선을 넘어 주문진 방면으로 남하했으며, 북한군 제945육전대의 병력은 강릉에 주둔하던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강릉과 삼척 사이에 있는 정동진 등명리 해안에 상륙해 강릉 방면으로 북진했다. 한편 북한군 제766 유격대도 삼척 남쪽의 임원진리에 상륙해 태백산맥의 산지와 옥계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북한군은 전후방에서 협공해 신속히 강릉의 8사단을 무너뜨리고 동해안을 따라 6월 29일까지 포항까지 남하해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6월 27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자 병력이나 무기 등에서 모두 열세였던 국군은 수세에 몰렸고, 결국 이성가 사단장은 병력 피해를 줄이기 위해 6월 27일 오후 2시 대관령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강릉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대관령으로 철수한 제21연대 병력은 횡계리에 집결했으며, 제10연대는 유천리에 주둔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제8사단은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제1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병력 피해를 최소화하여 퇴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열을 정비한 뒤에 곧바로 반격에 나서 6월 28일에는 강릉 탈환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육군본부에게서 원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자 강릉을 공격하던 제21연대의 병력을 다시 대관령으로 철수시켰다.
그 후 원주로 퇴각하려 했으나 그곳에 있던 제6사단도 퇴각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천으로 이동했다.
4. 결과
38선 방어가 주임무인 제8사단은 26km의 정면을 겨우 1개 연대로 전담시킨데다 연대 일부가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실제 38선 경계임무는 2개 대대가 담당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그나마 탄광지대의 트럭들을 징발해 비교적 빠른 철수가 가능했다.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강릉 전투로 제8사단은 강릉에서 철수하여 원주를 목표로 철수하였으나, 원주를 빼앗기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판단에 제천을 목표로 하여 평창으로 철수로를 변경하였다.
평창을 거쳐 제천에 집결한 8사단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열차편으로 대구로 이동,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혼란을 겪으면서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