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인민군의 남진이 한창인 1950년 7월 5일 국군 제17연대가 오산면 갈곶리[1]에서 미 제24보병사단 21연대 1대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 제 4사단을 상대로 벌인 지연전이다2. 전투전 상황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7연대는 평택 안성 선을 방어하라는 명령에 따라 7월 1일에서 2일 평택으로 이동했다.한편 이때 평택역에서는 17연대의 작전에 쓸 탄약을 하역하고 있었는데 미 공군의 오폭으로 인해 평택역이 날라가면서 17연대는 전투도 하기 전에 1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다수의 탄약을 손실했으며 연대장 백인엽이 부상을 입어 후송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국군 제17연대는 7월 4일에 서정리에서 도보로 8km 북쪽에 위치한 갈곶리로 이동해 그곳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3. 전투 전개
김호준 중령은 갈곶리와 청호리의 낮은 구릉지대에 1대대를 서쪽 갈곶리에 위치한 1번국도 옆에 42고지에 배치하였고 3대대를 동쪽 청호리와 66고지 사이에 있는 지역에 배치시킨다음 연대관측소를 그 뒤 66고지에 설치하였다.이때 스미스 대대가 오산 북쪽으로 이동하는것을 목격했기에 그는 1대대에서 강은덕 대위의 지휘하에 두개 중대를 차출시켜 오산 북쪽 은개 마을에 전진 배치시킨다.[2] 그는 1번국도를 방어하고 있는 1대대 3중대에게 81mm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대거 배치해 화력을 증강시켰고 연대의 공용화기도 대부분 1번국도를 방어할수있게 배치했다.
7월 5일 오전 10시경 은개마을에 배치되어 있던 전초진지에서는 스미스 대대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하던 인민군 전차행렬을 발견하고 기습공격을 가해 전차의 포탑을 열고 남진하던 북한군 전차병을 사살하는데 성공했지만 전차에는 전혀 타격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중대 대전차반의 실수[3]로 인해 중대의 위치가 발각되고 이로 인해 오산교에서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게 되었는데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강은덕 대위를 포함해서 중대 전체에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자 강은덕 대위는 진지를 포기하고 갈곶리로 퇴각한다.
7월 5일 오전 11시경 북한군 전차 4대가 갈곶리 진지 500m 전방에 도달하자 연대의 박격포반이 사격을 개시하였고 전차가 기관총을 난사하며 진지 300m 앞까지 계속 접근하자 3중대와 9중대가 2.36인치 로켓포를 발사하면서 총공격을 가했으나 연대 관측소에 포탄이 명중하고 소총수등 아군 7명이 전사하면서 혼란이 발생했지만 연대는 진지를 계속 사수했다.
북한군 전차들은 국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약 20대정도가 진지를 통과해 서정리 방향으로 계속 남진해 사라졌다.
이후 오후 4시경 스미스 대대를 격퇴한 북한군 4사단이 남하했는데 연대는 북한군 선두차량을 파괴했지만 북한군의 거센 저항과 탄약고갈로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해졌고 결국 오후 5시 김희준 중령의 철수지시로 연대는 천안으로 분산 철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