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2:20:14

가평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 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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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1. 개요

가평 전투는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1년 4월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이 경기도 가평군에서 중공군 5차 공세(4월 공세)의 조공 임무를 맡은 중국 인민지원군 제40군 예하 제118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전투다.

2. 배경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한 후 주도권을 되찾은 유엔군은 곧장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코앞까지 밀어올렸다. 전황이 중공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미군 2개 사단의 일본 전개 첩보까지 들어오자 펑더화이를 비롯한 중공군 수뇌부는 유엔군이 진남포에 상륙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유사한 결정적인 역공세를 벌일 의도라고 판단하고 대응 방책을 모색했다.[1] 펑더화이가 내린 결론은 "상륙 전에 먼저 강력한 공세를 실시, 서부전선의 유엔군 주력을 섬멸하여 상륙작전을 예방하고 주도권을 탈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일:20230208_120012.jpg

이를 위해 증원부대 투입 스케줄을 급하게 당겨서까지 6개 군을 추가로 확보한 중공군은 4월 22일 야간부터 전면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 제19병단 및 북한군 제1군단, 도합 4개 군단 규모로 구성된 주공부대가 투입된 방향은 전선 서쪽 끝 파주의 한국군 제1보병사단과 영국군 제29보병여단 정면이었다. 이들은 조기에 의정부를 탈취하여 제3병단이 고착견제하는 미 육군 제1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분할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동시에 화천군 사창리 일대의 한국군 제6보병사단 역시 전면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을 맡은 중공군 제9병단은 미 1군단과 미 9군단 사이의 간격을 파고들어 무동리-가평 일대까지 진출한 다음 서쪽으로 선회, 미 24사단과 미 25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조공 임무를 맡은 부대였다.

수적으로 1:8 이상 열세한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저항하며 중공군 주공을 저지한 파평산 전투 설마리 전투의 1사단/영 29여단과 달리 사창리 전투의 6사단은 고작 2개 사단[2]에게 공격받았음에도 몇 시간만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6사단의 급격한 붕괴로 미 1군단과 미 9군단의 사이에는 가평천 계곡으로 향하는 수 킬로미터의 간격이 뻥 뚫려버렸다. 완전히 통제를 상실하고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6사단에게는 더이상 전투력 발휘를 기대할 수 없었다. 미 2개 군단의 측방이 노출되고 퇴로 차단 위협이 가시화되는 등 중서부전선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 9군단장 윌리엄 M. 호지(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4월 23일 아침 군단 예비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을 가평읍 북방의 고지군에 투입하여 중공군의 돌파를 막아내기로 결심했다.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은 호주 육군 왕립호주연대 3대대(3rd Battalion, Royal Austrailian Regiment; 이하 호주 대대), 캐나다 육군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 연대 2대대(2nd Battalion,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이하 캐나다 대대), 영국 육군 미들섹스 연대 1대대(1st Battalion, Middlesex Regiment; 이하 미들섹스 대대)의 3개 보병대대와 25파운더 야포 1개 대대 규모의 왕립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16 Field Regiment, Royal New Zealand Artillery)로 구성된 부대로, 각 보병대대는 약 700명 전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단에는 여기 더해 미 육군 제72전차대대 A중대의 M4A3E8 셔먼 전차가 배속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뉴질랜드 포병연대는 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진출했다 패주에 휘말린 상태였고, 미들섹스 대대 역시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철수 엄호차 연대와 동행중이었기 때문에 명령 수령 시점에서 여단에 가용한 대대는 호주 대대와 캐나다 대대 둘에 불과했다.

23일 오후 가평군 북면에 도착한 호주 대대와 캐나다 대대는 가평천을 사이에 둔 504고지와 677고지를 점령하고 방어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겨우 몇 시간 사이에 어렵사리 중대 단위의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한 양 대대는 저녁 2000시경 계곡을 따라 밀려내려오는 6사단의 대규모 패주 행렬을 목격했다. 캐나다 대대의 한 참전용사는 이 패주 행렬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후일 "자기 땅에서 적을 보고 도망치다니, 완전히 오합지졸들이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27여단에는 제대로 화를 낼 틈조차 없었다. 중공군 118사단이 달아나는 6사단을 바짝 뒤쫓아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전투 경과

파일:battleofkapyong.jpg

23일 밤 2130시경 드디어 27여단을 향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여단 북동쪽 화악계곡을 타고 내려온 중공군 제354연대가 처음으로 노린 목표는 504고지 일대의 호주 대대 방어진지 북단 도로변에 전초로 배치된 미 전차소대였다. 소대는 가볍게 첫 공격을 격퇴했지만 한 시간 뒤 이어진 두 번째 공격에서 소대장을 포함해 전차장 두 명을 잃었고, 호주 대대 B중대 방어진지 남쪽에 위치한 중대본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긴박한 순간 희소식이 도착했다. 2300시부터 뉴질랜드 포병연대와 미들섹스 대대가 여단에 합류해 화력지원과 예비대 임무 수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27여단은 전 전투력을 동원해 싸울 수 있었다.

거의 동시에 전차소대를 밀어낸 중공군이 기세를 타고 호주 대대의 전방 2개 중대, 즉 A, B중대로 밀어닥쳤다. 중대별 방어진지 간격으로 침투한 중공군은 타 중대와 떨어져 홀로 화악천 옆의 야트막한 고지를 방어하던 B중대를 포위한 뒤 23-24일 야간 동안 4차례의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모조리 실패했다. 유일하게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은 24일 새벽 0330시경 두 번째 돌격에서 일시적으로 6소대의 진지가 돌파당했을 때 뿐이었지만, 호주 대대의 4개 중대 중 유일하게 전차소대를 배속받은 B중대는 즉각 전차의 지원 아래 단호한 역습을 실시하여 원 진지를 회복했다. B중대의 손실은 극히 경미했다.

반면 504고지 북쪽 사면에 위치한 A중대는 혈투를 치렀다. 3면에서 집중공격을 받는 와중에 가장 낮은 지점에 배치된 1소대가 소대원의 절반을 잃고 중대본부로 후퇴했고, 방어진지 사이의 간격으로 침투한 중공군이 잘 엄폐된 위치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격을 퍼부어대면서 1소대와 3소대에 사상자가 속출했다. 설상가상으로 가평천 바로 건너편 호주 대대 본부와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진지로 침투하는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포착되자 24일 0300시경 뉴질랜드 포병연대가 6km 가량 남쪽 가평읍에 자리잡은 27여단 사령부 근처로 물러나면서 일시적으로 화력지원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A중대는 악전고투 끝에 0430시에 벌어진 중공군의 마지막 돌격을 저지해낸 뒤 날이 밝은 0700시에는 역습을 가해 1소대의 진지를 되찾았다. 중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A중대의 희생도 컸다. 중대원 가운데 절반 가까운 50여명이 사상자 목록에 올랐다.

철수하는 6사단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예하 중대와 떨어져 가평천 건너편에 배치된 호주 대대 대대본부와 본부중대 역시 24일 새벽 한국군 사이에 섞여 침투한 중공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대대본부를 방어하던 기관총반과 전투공병소대가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대로 밀려나자 대대장 브루스 퍼거슨(Bruce Ferguson) 중령은 여단에 증원을 요청했으나 명령을 받고 출동한 미들섹스 대대의 1개 중대는 중간에 멋대로 대대로 돌아가 버렸고, 결국 퍼거슨 중령은 대대본부의 철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통 부재로 인한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대본부는 0500시경 미들섹스 대대 진지로 이동을 시작해 0600시경 철수를 완료했지만 방어선을 고수하는 데 성공한 본부중대는 어느새 증발해버린 대대본부를 찾아 헤메다가 본부에서 달려온 지프 전령에게서 소식을 듣고서야 남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가평천 동쪽의 예하 중대들에는 아예 철수 사실이 전파가 되지 않아 A중대장 벤 오다우드(Ben O'Dowd) 소령은 날이 밝은 후 대대본부와 본부중대가 갑자기 사라진 걸 깨닫고 깜짝 놀라는 촌극이 벌어졌다.

24일 아침 날이 밝아오는 것과 함께 진지변환을 완료한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화력지원이 재개되고, 전차와 박격포, 중기관총 등 대대에 예배속된 화력 역시 훨씬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해지면서 상황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0715시경 화악천변에 따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어서 고립될 우려가 있던 B중대가 포병 및 전차의 엄호 아래 504고지로 이동, 호주 대대는 대대 일선 병력 모두가 집중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단과 대대가 손발이 안 맞는 장면이 연출된다. 오후 도착하기로 예정된 미 제5기병연대 병력을 활용한 역습에 화악천변의 도로를 감제하는 B중대의 이전 진지가 요긴하다고 생각한 27여단장 브라이언 아서 버크(Brian Arthur Burke) 준장이 이를 재탈취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기껏 504고지로 이동하자마자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삽질을 직접 벌여야 했던 B중대는 욕설을 삼키면서 명령을 이행했지만 이미 B중대의 진지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배속된 전차의 지원 아래서도 중대의 공격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상황을 재평가한 버크 준장이 5기병연대의 역습을 취소하자 B중대도 다시 504고지로 복귀한다.


[1] 사실 이는 중공군의 오판으로, 일본에 증원된 미 주방위군 2개 사단은 상륙작전이 아니라 한반도로 차출된 주일미육군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소련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전개됐다. [2] 제40군 예하 118사단 및 제20군 예하 제60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