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역도산 力道山 | りきどうざん | Rikidōz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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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귀화 전 김신락 (金信洛) |
귀화 후 모모타 미츠히로 [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光浩, ruby=みつひ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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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4년(?)[1] 11월 14일 |
함경남도 홍원군 | |
사망 | 1963년 12월 15일 (향년 39세[2]) |
일본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6cm, 116kg, AB형 |
가족 관계 |
장녀 김영숙(1942년생) 차녀 모모타 치에코(1944년생)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義浩, ruby=よしひろ)])(1946 - 2000) 차남 모모타 미츠오([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光雄, ruby=みつ お)])(1948년생) 3녀 모모타 히로미(1964년생) 손자 모모타 치카라([ruby(百田, ruby=もも た)] [ruby(力, ruby=ちから)])(1981년생) |
링크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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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 일본 프로레슬링의 시조이자 최초의 스타이다. 오늘날 일본의 프로레슬링 계보도를 타고 올라가면 대부분은 역도산에 닿게 된다.[3] 당시 일본에서 " 천황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구가했지만, 1963년 한 나이트클럽에서 시비가 붙은 야쿠자를 두들겨패다 눈 먼 칼에 찔려 수술을 받았다가 수술 후유증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만다.
2. 생애
2.1. 출생
본명은 김신락(金信洛)[4]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現 함경남도 신포시) # 출신. 김신락은 씨름 대회에 나갔다 하면 이기고 돌아오는 괴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큰 형과 둘째 형도 씨름 장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김신락이 스모 수련을 받고 잠깐 돌아오기 전에는 김신락도 둘째 형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5] 일본으로 건너갈 때는 10대였지만 이미 결혼도 해서 아이도 하나 있었다.2.2. 스모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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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나 |
리키도잔 노부라쿠([ruby(力道山, ruby=りきどうざん)] [ruby(信洛, ruby=のぶらく)]) (1940.5 - 1941.1) 리키도잔 미쓰요시([ruby(力道山, ruby=りきどうざん)] [ruby(光吉, ruby=みつよし)]) (1942.5 - 1944.5) 리키도잔 미쓰히로([ruby(力道山, ruby=りきどうざん)] [ruby(光浩, ruby=みつひろ)]) (1944.11 - 1950.9) |
신장 | 176cm |
체중 | 116kg |
소속베야 | 니쇼노세키([ruby(二所, ruby=にしょ)]ノ[ruby(関, ruby=せき)])베야 |
통산성적 | 193승 149패 7휴장, 승률 62.2% |
최고성적 | 세키와케 (1950년 5월, 25세) |
데뷔 | 1940년 5월 (15세) |
은퇴 |
1950년 10월 (25세) 최종계급 (西) 세키와케 vs (東) 세키와케 가가미사토 기요지([ruby(鏡里, ruby=かがみ さと)] [ruby(喜代治, ruby=き よ じ)]) |
세상에서 가장 크게 웃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향에서는 참 많이 웃었는데, 일본으로 오니까 웃을 일이 없더라.
웃으면 가난한 조센징이 웃는다며 미쳤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고.
1940년에 그의 씨름 실력을 본 일본인 프로모터가 김신락을 일본으로 데려갔으며, 모모타 가문에 입양되어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란 이름을 얻고 스모계에 입문했다. 역도산이라는 이름은 그 때에 붙여진 시코나. 이 당시에 스모계에서는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모 동료들은 명부상의 이름에 관계없이 그를 '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6]
1949년 5월 스모 계급의 세번째인 세키와케(関脇) 자리까지 올랐지만 폐디스토마 감염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져[7] 1950년 9월에 자진 폐업하였다. 출신을 알게 된 스모협회 측이 그를 서군에 배치한 것이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역도산의 폐업은 스모 선수의 정규 절차를 무시하고, 부엌에서 스스로 부엌칼로 촌마게를 잘라버린 것이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평생동안 화려하고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이때부터 이미 그 끼가 보여서 스모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8] 자유분방한 패션을 자랑했다고 한다. 일본 패망 이전에는 상당히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패망 이후에 급격히 자유분방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도산은 이 무렵에 나가사키를 출생지로 하고 있는 일본 호적을 얻게 된다. 역도산의 호적이 어떻게 처리된 것인지는 의문이 많은데, 일본 패망 전에 일본에 살던 조선인이라도 호적은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역도산이 일본인 모모타 가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라고는 해도 '출생지'가 아예 다른 호적이 있는 것은 절차상 불가능하다. 전후 혼란기를 틈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편법적인 수단을 써서 호적을 바꾼 것이 아닌가 추정되는데, 전후 혼란기였으니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스모를 그만둔 후 친밀한 사이의 사업가였던 닛타 신사쿠(新田新作)[9]의 건설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역도산은 이때 생활이 무척 어려웠는데, 평생 다른 조선인과 거리를 두고 산 편이던 역도산도 이 때는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갈 정도로 의지했다고 한다.
닛타의 건설회사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던 중 술집에서 우연히 일본계 미국인 프로레슬러인 해롤드 사카타[10]와 시비가 붙어서 싸웠는데(…) 둘 다 서로의 힘에 감탄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레슬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역도산이 자기 입으로 말한 무용담이고, 실제로는 영화 역도산에서처럼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해롤드 사카타가 그만두라며 숄더 클로와 스탠딩 크로스페이스 락을 걸자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11] 해롤드 사카타는 체구는 역도산과 비슷하지만 1948년 역도 헤비급 은메달리스트 출신에 자기보다 덩치가 몇배는 더 큰 프로레슬러들도 메다꽂고 던져버리며, 유럽 선수들에게도 팔씨름 한번 져본 적이 없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선수에게 취객이 더구나 스모 선수로서는 처음 접해볼 관절기를 당해버렸으니 답이 없었을 것이다.
해롤드 사카타는 역도산의 투지와 근성에 크게 감탄했고, 역도산도 사카타와의 인연을 토대로 프로레슬링 세계에 뛰어든다. 역도산은 먼저 일본에서 몇 차례 경기를 하여 가능성을 본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본격적으로 프로레슬러로 활동하게 된다. 이전까지 스모 선수 특유의 펑퍼짐한 체격이었던 역도산은 하루에 1000번씩 복근 운동을 하는 맹렬한 훈련을 거쳐서 철저하게 프로레슬러다운 몸매로 자신의 신체를 바꾸게 된다.
하와이와 미국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가지면서 인맥을 쌓아 NWA 프로모터 자격을[12] 얻게 된다. 특히 NWA 챔피언이자 인기 절정의 프로레슬러 루 테즈를 데려올 수 있었다. 역도산의 단체가 다른 단체를 누르고[13] 일본 최고의 단체로 군림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이 NWA 프로모터 자격이었다.[14] 다른 단체는 이 자격이 없어서 외국 선수들을 들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
2.3. 프로레슬러 활동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1953년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日本プロレス協会)를 창설해 여러 차례 프로레슬링 흥행을 성공시켰다.[15]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활약할 때는 공식적으로는 규슈 나가사키시의 모모타 가문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이 설정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1953년(쇼와 28년) 12월 6일, 루 테즈를 상대하는 역도산. |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해 거구의 미국인 프로레슬러들을 초청하여 대결했다.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일단은) 일본인[16] 역도산이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서 2차 세계대전으로 패배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역도산의 마케팅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당시 막 꽃피기 시작한 TV방송과 맞물려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프로레슬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역도산은 당대 일본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역도산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편지나 엽서의 받는 사람 주소 공란에 그냥 "日本 力道山" 이라고 적어서 우체통에다 넣으면 그대로 역도산의 집 앞으로 배달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 "박치기왕"으로 유명한 김일의 에피소드로 보인다. 김일이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복역하던 도중에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 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역도산의 집 주소를 몰라서 "日本 力道山" 이라고 썼는데 무사히 편지가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이 석방된 뒤에[17] 연락이 되어 역도산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프로레슬링의 거물이 된 역도산의 제자들 역시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현 일본의 2대 메이저 단체인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한 자이언트 바바,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한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이자 독립한 두 제자 대신에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를 물려받은 김일까지. 이런 관계로 현재 한일 프로레슬러들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대부분이 역도산에 도달하게 된다.[18] 무협지로 치면 대사조(大師祖) 격. 북미 프로레슬링에 루 테즈가 있다면 한일 프로레슬링에는 역도산이 있는 것이다.
엄청난 돈을 동원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리키(力) 스포츠 팰리스라는 상설 프로레슬링 경기장 겸 복합 레포츠 빌딩을 건설했다.
2.4. 사망
1963년 12월 8일, 도쿄 소재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19] 화장실에서 야쿠자 조직원이던 무라타 가쓰시(村田勝志)와[20]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물론 일개 깡패가 격투를 본업으로 하던 역도산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기에, 무라타는 제대로 두들겨 맞다가 작은 주머니 칼로 역도산의 복부를 찌르고 도주했다. 그리고 복부에 칼이 찔리는 부상을 입은 역도산은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는 산노병원(山王病院)에서 수술을 받고 요양하다 복막염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사실 역도산은 더 큰 대학병원에 갈 수도 있었으나 본인이 산노병원을 고집했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이목을 끌기 쉬운 대학병원으로 갔다가 구설에 휘말리는 걸 두려워했다는 설과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했다는 설이 나뉘는데, 어찌 되었든 전문 외과의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약간 황당한 이야기인데, 칼에 찔린 부상 자체는 얕아서 간단한 수술 후 의사의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지시만 따르면 퇴원할 수 있었으나, 역도산이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자에게 몰래 사이다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마셨다가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여담으로 역도산이 입원한 병실은 몆 년 전 자신이 두드려 팬 바 있었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입원한 병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긴 한데, 성격과 행보 탓에 평소에도 적이 많았다. 사인도 직접적으로 칼에 찔린 것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수술 후에 마취를 풀다가 마취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한편, 그를 찌른 무라타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여 석방된 후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상당한 거물이 되었는데, 2013년 4월 13일에 지병으로 74세 일기로 죽을 때까지 당시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꺼렸다.
사족으로,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선 우연히 시비에 휘말려 애송이 무라타[21]의 칼에 찔렸으나, 별거 아니라면서 병원에 가자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무시한 채 술을 마시고 식사도 거하게 하면서 노래까지 부르던 중[22],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나온 바 있다.
사망 당시 일본에선 국장에 가까운 수준의 추모 인파와 함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부 역도산 팬들은 "역도산 사망 원인을 규명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도일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지역상 북한에 있다. 그 밖에도, 정치쪽으로의 입문을 계속 염두에 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북한의 김일성과 친분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자기와 딸과의 만남을 주선해줘 역도산이 감사의 의미로 김일성에게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W111 1대를 선물한 적도 있었는데 덕분에 김일성에게 귀여움(?)을 받아 북한 주민들도 알아서 영웅 대접을 해주었다. 덕분에 의외로 북한에서 전기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야쿠자에게 죽은 이면에는 정치계로 진출하려는 그를 우익쪽에서 안 좋게 봐서 수를 쓴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한편, 평상시에도 성격이 안하무인이던 면이 좀 있던 관계로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묘는 도쿄도 오타구 이케가미의 혼몬지에 있다.
2.5. 사후
역도산의 사망 직후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JWA)는 직속 후계자로 불렸던 토요노보리 때문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는 역도산의 수제자로 불린 김일이나 자이언트 바바보다도 수년이나 먼저 역도산의 제자로 입문하였고, 역도산과 마찬가지로 스모 리키시 출신이었기에 역도산 생전에도 상당한 푸쉬를 받았다. 역도산이 JWA에서 차지한 모든 태그팀 타이틀은 토요노보리와 팀을 맺었을 때 획득한 것으로, 수제자 3명도 역도산 생전에 이런 푸쉬를 받지 못했다.결국, 역도산 사후에 JWA의 회장에 취임하고, 역도산 소유의 세계 타이틀이었던 W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오르는 것[23]은 물론, 단체의 메인 토너먼트인 월드 빅 리그에서 2년 연속 우승을 하는 등 역도산의 후계자이자 JWA의 아이콘 자리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도박에 재산을 탕진하고, 공금 횡령까지 저지르며 사생활 문제로 단체운영을 막장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쫓겨나듯이 단체를 나오더니 도쿄 프로레슬링이란 단체를 만들어 이노키까지 JWA에서 빼내왔다. 당시 자이언트 바바에 비해 자신의 대우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노키는 단체의 간판으로 만들어주겠다는 토요노보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자이언트 바바는 토요노보리가 이탈한 JWA에서 간판으로 자리매김하고[24]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올랐으며, 월드 빅 리그 3연패[25]를 달성하는 등 단체의 아이콘으로 성실히 자리를 지켰다. 반면, 토요노보리는 자신의 단체를 창설한 이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도박을 하며 큰 빚더미에 앉았는데, 이노키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은 흥행을 기록했음에도 단체는 수익을 죄다 토요노보리의 도박빚만 갚다가 망해버렸다.
이후, 이노키가 단체의 막장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JWA로 복귀하며 토요노보리는 도쿄 프로레슬링을 접었는데, 이후 IWE[26]의 간판선수로 합류하여 JWA와 경쟁관계를 형성하는데 일조하였다. 물론 선수로서 본업에 충실한 것이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JWA는 IWE와의 경쟁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점차 하락세를 겪으면서, 후에 자이언트 바바와 이노키의 이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토요노보리는, 내부에선 경영 막장으로 JWA를 망치더니 외부에선 경쟁단체의 성장을 도와 JWA를 사실상 종결시켜 버렸고, 덕분에 역도산의 수제자 3인보다 더 강한 푸쉬와 정통성을 가졌음에도 지금은 잊혀진 레슬러, 금지어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자이언트 바바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안토니오 이노키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하며 역도산이 세운 일본 프로레슬링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다. 역도산이 사망한 지 9년이 지난 후였다.
3. 일화
3.1. 숨겨진 정체성
역도산은 일본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으며,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몇몇 자식들도 아버지가 조선 출신이라는 걸 말한 적이 없어 그냥 나가사키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한반도에 오면 자신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걸 딱히 숨기진 않았던 모양.김일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을 지도할 때나 사석에서나 한국어를 한 번도 쓰지 않는 독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한다. 유일한 예외로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잡담하던 중 역도산이 " 밥에 기쿄를 넣고 비벼먹고 싶네."라고 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몰라 "기쿄가 무엇입니까?"라고 머뭇거리며 질문하자 역도산이 " 긴타로, 기쿄가 뭔지 모르나? 도라지란 뜻이다."라며 도라지를 한국어로 했다고 한다. 그 '도라지'라는 말이 김일이 역도산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어였다고 한다.[27] 다만 역도산이 방한했을 당시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진짜 한국어를 잊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그도 입맛은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평소 불고기에 마늘을 듬뿍 얹어서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친구[28]가 운영하는 불고깃집에 새벽 또는 밤 늦게 찾아가 불고기에 마늘과 김치, 그리고 소주까지 양껏 먹고 마신 후 돌아갈 때엔 입냄새를 지우려고 껌을 한 움큼 씹으며 갔다고 한다.[29] 집 안에는 한국 노래 레코드를 쌓아둔 방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남몰래 고국인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낸 이야기들은 대다수가 역도산의 셋째 부인인 다나카 게이코의 자서전을 통해 밝혀졌다. ‘남편 역도산의 통곡’ 미망인 다나카 게이코 40년 만의 고백.
어쨌든 위와 같은 일화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난 조선인이 아니다'란 식으로 자기 뼛속까지 부정했다기보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으나 이미 일본 대중들에겐 자신이 일본인으로 알려진 데다가 일본에서 프로레슬러 활동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될 건 없으니 감춘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런 배경 덕분인지 1968~1971년 연재된 만화 타이거 마스크에서도 역도산 일대기를 다루면서 일본인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다보니 21세기에도 역도산이 조선 출신이란 걸 모르는 일본인도 꽤 있는 모양. 물론 일본 위키에도 한반도 출신이란 게 버젓이 적혀 있기에 검색해보면 모를 수가 없지만, 이미 시대적으로 과거 인물이다 보니 프로레슬링 역사에 관심 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역도산 자체를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2020년대에도 역도산 관련 유튜브 영상 조회수가 100만 이상이 나오는 영상도 있는거 보면, 일본에서도 인지도가 어느정도는 유지되고 있는 모양.
3.2. 무자비한 구타 전설
역도산은 성격이 급하고 거칠어서 자신의 체육관 제자들을 훈련시킬 땐 구타가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인간 말종 수준이라서 한국인들 중에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꽤 많다.제자들에게 체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거의 학대에 가까운 대접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이언트 바바의 경우 "사부님, 사부님은 왜 정수리에 챱을 쓰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갑자기 역도산이 바바를 마구 두들겨패고는 "바보 자식아. 그럼 상대가 죽잖냐!"[30] 하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나마 바바는 역도산이 특별관리한 케이스라서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부드러운 취급을 받았는데도 저 정도였다.[31]
특히 역도산에게 가장 많이 맞은 게 1위가 김일, 2위가 이노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너무 구타가 심해서 그냥 학대 수준으로 밖에 안 보였다고 한다. 김일의 경우 역도산이 박치기를 하려면 머리가 단단해야 된다면서[32] 갑자기 신고 있던 게다를 벗어다가 김일의 머리를 마구 내리친 적도 있었다.
그나마 김일은 그렇게 맞고도 죽기 전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계속 표했지만, 이노키는 심한 푸대접에 프로레슬링 포기까지 생각했을 정도였고 이후에도 역도산한테 악감정이 꽤 남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자이언트 바바같은 거인은 알아서 스타가 될 수 있지만 김일이나 이노키 같은 케이스는 오로지 근성으로만 스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다른 제자보다 더 혹독하게 대한 것이다'라는 역도산의 위로로 겨우 앙금을 풀 수 있었다고. 김일이 말년에 투병생활을 하던 시절 찾아온 한 일본인 프로레슬러 친구는 '넌 스승에게 엄청나게 미움받았거나 엄청나게 사랑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역도산의 이런 난폭한 성격은 영화 "역도산"에서도 묘사되는데, 높으신 분들이 가족을 데려와서 역도산과 그 제자들의 연습을 구경하는데 제자들이 시원찮아서 아이들이 시큰둥해하자 직접 링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기술을 건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좋아했으나 역도산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자 겁에 질려서 울어버린다. 역도산을 그나마 옹호하는 측에선 이런 난폭함이 자신이 조선계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울분과 억압 때문에 더 심해진 것 아닐까란 추측도 한다. 또 역도산은 말기에 경기력을 위해서 흥분제 등의 약물을 남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성격이 더 난폭해졌다고 보기도 한다. 허나 그 과정이 어찌됐든 결론적으로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건 사실로 보인다.
한편, 일본에선 대부분의 프로레슬러들이 역도산의 밑에서 연습을 했었던 탓에, 이것이 대물림되어 일본 프로레슬링 전반에 걸쳐서 구타 문화가 심각한 편이라는 주장도 있다.[33] 물론 이런 스포츠계 폭력 문화는 역도산이나 프로레슬링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남들도 다 그래란 식으로 잘했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또 이런 성격은 체육관 밖에서도 비슷했는지, "역도산이 사람을 팼다"는 식의 기사는 당시 스포츠 신문 단골로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역도산 본인의 해명으로는 자신이 유명하다 보니까 워낙 시비를 걸어오는 인간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런 성격 때문에 시비 거는 야쿠자를 두들겨패다 사망했다.
3.3.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
유도가 출신 프로레슬러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34]와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다가 둘 다 명성에 흠이 간 사건.사건 자체만 요약하자면, 당시 유도계에서 최강자 취급을 받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생활고 등으로 프로레슬링 무대에 뛰어들어 한동안 역도산과 한 팀으로 활동했으나[35], 유도계에선 최강자 취급을 받던 자기가 프로레슬링계에선 역도산 뒷바라지나 하는 신세다 보니 자괴감이 들었는지 이후 독립하여 자기 프로 레슬링 단체를 창설하고 역도산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다 역도산과 매치가 성사되고, 당연히 실전보단 대중의 관심을 받아 이익을 챙기는 엔터테인먼트 목적이 강한 프로레슬링계였던만큼 각본에 따라 처음 시합은 무승부, 이후로는 둘이 합의하에 1승 1패를 주고 받는 식으로 워크가 정해진다. 헌데 문제는 실제 시합 도중 기무라에게 로우 블로우를 당했다고 주장한 역도산이 격분하여 워크를 깨고 그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기무라는 이리저리 맞다가 허무하게 쓰러지고 만다. 이것을 쇼와의 간류지마(昭和の巌流島) 사건이라고 한다.[36] 이 사건으로 패자 기무라의 위상은 추락하고, 잔인한 승자가 된 역도산도 영웅 이미지가 많이 깎이게 된다.[37]
기타 자세한 내용은 쇼와의 간류지마 문서 참고.
4. 가족
역도산의 가족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이는 복잡한 인생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 편력이 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 김석태(金錫泰): 직업은 지관(地官)이었다고 한다.
- 어머니 전기(田器)
- 장녀 인녀(因女): 호적을 담당하는 동사무소의 일본인 직원이 잘못 알아들어서 호적에는 '기인녀'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 장남 항락(恒洛): 역도산 보다 16살 연상. 역도산과 마찬가지로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았다고 한다. 형제가 같은 씨름 대회에 나가서 항락은 1위, 신락은 3위를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차녀 구임(久任)
- 차남 공락(公洛): 서울로 고용살이를 하러 갔다. 마찬가지로 힘이 셌다고 한다.
- 삼녀 을복(乙福)
- 삼남 신락(信洛)
- 처 박신봉
- 장녀 영숙(英淑): 1942년생. 역도산이 17세에 낳은 딸이다. 평양체대를 졸업한 운동선수로, 북한의 전 체육상, 올림픽위원장 박명철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딸(역도산의 외손녀)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역도 감독으로 나왔다.
- 양부 모모타 미노스케(百田已之助)
- 양모 다쓰
- 양자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역도산): 1924년 11월 14일 나가사키 출생으로 되어 있다.
- 오자와 후미코: 박신봉에 이은 두 번째 아내. 게이샤 출신이다. 역도산의 아들 두 명을 낳았지만 이혼 전까지 친자식을 포함해서 역도산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혼하고 나서도 역도산을 증오했다.
- 차녀 모모타 지에코: 1944년생.
-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百田義浩): 1946년생. 프로레슬러 겸 링 아나운서로 활동했지만, 간부전으로 투병하다 2000년 사망했다.
- 차남 모모타 미쓰오(百田光雄): 1948년생. 프로레슬러로 2010년대에도 레슬링 무대를 뛰었을만큼 노익장을 발휘했다. 어머니와 달리 역도산을 매사에 엄격했지만 남자의 길을 제시했던 분이라며 존경심을 표했다. 2004년 영화 역도산이 개봉할 당시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모모타 지카라 역시 2013년 프로레슬러로 데뷔해 3대가 프로레슬러 길을 걷게 되었다. #
- 다나카 게이코: 세 번째 아내. 스튜어디스 출신이다. 1963년 6월 5일 결혼.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사별했다. 슬하에 히로미라는 딸을 두었는데, 역도산이 죽은 이듬해 태어났다.
- 3녀 모모타 히로미: 1964년생.
5. 여담
- 당대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남북한에서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상술되었지만 역도산은 북한 땅인 함경남도 홍원 출신에 김일성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면서도 남한과의 교섭에도 적극적이어서 1963년 1월에 서울을 방문하여 한일간의 스포츠 교류를 의논하기도 했다.[38] 역도산의 남한 입국은 표면적으로는 야마구치구미의 조장 다오카 가즈오의 권유로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뒷배경에 정계가 있단 소문도 있었던 모양. 어쨌든 그의 사망 당시에는 북한뿐만이 아닌 남한에서도 대한뉴스에서 주요 소식으로 방송하여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애도를 표할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남북한의 정치적인 의도였고, '일본에서 활약하여 전세계에 위엄을 떨첬고, 그러면서 언제나 조국을 생각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북한에서는 조선인) 역도산'이라는 프로파간다성 홍보로 잘 써먹기 위한 목적을 감안해야 한다.
- 일각에선 역도산이 북한 정권 찬양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39], 반론도 있어서 신빙성은 따져봐야 한다. 일단 일본인 유족[40]들도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자유사회의 이상을 사랑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국 CIA 암살설은 거짓이다.'라고 북한의 역도산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기도 했다. 다만 1950~60년대에는 공산주의의 한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한국도 말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일 뿐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하게 이승만, 박정희가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인 시대적 환경으로 볼 때, 역도산은 실향민 1세대로써 고향(함경도)을 그리워했고 체육인으로써 자신을 민족영웅으로 띄워주는 북한을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와 좋게 지내는 노선을 걸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애당초에 역도산이 북한만 좋아했다면 굳이 남한땅을 찾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 역도산의 스모 선수 시절 공식 프로필은 176cm, 116kg이다. # 참고로 프로레슬러 시절 공식 프로필 신장은 180cm이었는데, 관중들에게 크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4cm 뻥튀기 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세대의 다른 프로레슬러들도 역도산처럼 공식 프로필 신장을 뻥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 역도산의 세계 챔피언 경력은 WWA 세계 챔피언 등극으로 딱 한 번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계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프로 레슬링계에서는 역도산의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타이틀이 사실상 '세계 챔피언과 동등'했기 때문에 '역도산의 세계 챔피언 경력이 단 한 번 밖에 없다'는 주장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41] 그 외에도 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의 초대 주인이다.
- 그의 레슬링 스타일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팬들이 보기에는 다소 심심한 스타일일 수도 있다. 수십여년 전 프로레슬링은 바디슬램같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기본 기술들이 경기를 끝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기에는 경기 초반에 나올 법한 기술이 경기 내내 나오다가 경기가 끝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도산의 전매특허이자 루 테즈의 936연승(...)을 끊은 가라테 챱만큼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했다. 참고로 설경구가 출연한 2004년 영화에서는 현대 프로레슬링 팬들을 배려해서였는지 경량급 레슬러들이나 쓸법한 허리케인라나를 쓰는 등 시대와는 맞지 않는 액션이 나온다.
-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자민당의 거물 정치가이자 일본 프로레슬링 커미셔너를 지내기도 한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는 존경해서 오노가 술을 삼가라고 하면 군말없이 따랐다고 한다. 상기되어있듯 역도산의 부탁을 받고 김일을 석방시켜 준 것도 오노 반보쿠였다는 말이 있으니 역도산 입장에선 상당한 귀인이긴 했을듯.
- 아주 특이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리컵을 과자처럼 입으로 베어물고서 잘근잘근 잘게 씹어서 삼켜버리는 끔찍한 개인기(...)였다. 당연히 입이 피투성이가 되는지라 주위 사람들이 그 흉측한 모습에 기겁을 하고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고 한다. 당연히 자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술에 취했을 때나 가끔 보여주는 개인기였다고 하고, 지인들에 따르면 저 개인기를 선보일 때는 역도산이 기분이 매우 나쁘거나 아니면 기분이 매우 좋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나...
- 이삿짐 배달에도 프로레슬러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물받은 고급 술이 많았는데, 사후 제자 레슬러들이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의논하면서 그 술들을 진탕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일합작으로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어 2004년 역도산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송해성 감독이 연출했으며 주인공 역도산은 당시 영화계에서 두각을 보이던 설경구[42], 아내 역엔 링 시리즈, 전차남,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나카타니 미키, 그 외 감각의 제국에서 명연을 보여준 후지 타츠야, 성우 겸 배우 하기와라 마사토, 박철민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내 관객은 101만명 수준으로 그리 흥행하진 못했다.[43] 당시 한겨레21은 영화가 그를 민족주의 영웅으로 그리지 않아서 흥행에 실패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 영화 자체가 역도산의 명암을 두루 그리는데다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가 '나 역도산,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난 세계인이다'였으니 그럴만도...어찌보면 시대를 앞서간 영화였을지도. 다만 무토 케이지, 하시모토 신야, 아키야마 쥰 등 일본 프로 레슬러들도 엄청 나와서 일본 프로 레슬러 팬들 입장에선 볼만하다.
-
북한에서
역도산 만화가 그려졌는데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다. 내용은
음모론이 절정을 이뤄 황당하다. 참고로 이 만화는 한국에서도 나왔는데 감수를 맡은 전직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곳곳에 왜곡이 많다고 당시 실화 이야기를 썼다. 이 만화 마지막을 보면 역도산이 병원에서 죽는데 당당하게 나오며, 죽을 때도 아주 거룩한 분위기로 죽기까지 한다. 주변 사람들이 조용하게 슬퍼하고 무슨 성자가 죽는 분위기로 그렸다. 감수를 맡던 이가 "세상에 이런 왜곡을. 그가 죽을 당시에는 기자들에 지인들, 팬, 내연녀나 자기가 생모라고 주장하는 여성, VIP나 야쿠자들이 몰려와서 주변은 엉망이었다."는 글귀를 써 붙일 정도. 북한 찬양 부분은 삭제되었는데, 특히 한국 번역판에서 유언은 나는 위대한 조선사람이라지만 원본(과 그걸 직역한 일본판)에 의하면 김일성 찬양 유언이었다고 한다. 북한의
프로파간다식 내용도 그렇지만, 북한 찬양이 문제가 될까 봐 그런 부분은 삭제한 것도 좀...(억지스러운 내용 전개와 아스트랄한 프로파간다는 이 만화의 컬트성과 병맛을 더해준다. 그게 역으로 코미디로 작용하지만.)
줄거리는 역도산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 레슬러들을 이기고, 특히 미국의 강한 레슬러들을 거꾸러뜨린다. 그리고 걸핏하면 미국인들이나 미군들과 시비가 붙어서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준다는 것이다.북일 동시 대리만족북한 찬양과 김일성 찬양이 곳곳에서 나온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 역도산이 김일성에게 고급 승용차 준 건 미화가 철철 넘친다. 내용은 수묵화인데, 그린 이는 김태권(남한의 만화가와 동명이인)이다. 이 만화는 "영웅 역도산"이라는 한국 서적에도 수록되어 있다.
- 외국 프로 레슬링 선수들을 불러오면 개런티를 주어야 했는데, 이들은 개런티를 엔이 아닌 미국 달러로 지불받기를 바랐다. 허나 당시 달러 구하기 쉽지 않던 일본이라 역도산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을 사용했다. 미국 치하에 놓여 있던 오키나와에 가서 프로레슬링 미군 위문 공연을 열고 달러를 얻어오거나, 심지어 재일교포 인맥을 통해 한국에서 달러를 끌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 성우 겸 배우인 코야마 리키야의 이름의 어원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코야마 리키야의 아버지가 그의 팬으로, 역도산이 사망한 달에 코야마가 태어났는데[44] 역도산의 '역도'만 따서 지으려고 했다가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힘 력(力)만 따와서 지었다고.
- 한 잡지의 내용에 따르면 최영의(최배달)의 제자를 묵사발로 만들어 그와 대결 구도까지 갈 뻔했으나 주변의 만류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사실은 역도산이 그를 먼저 피했다고 한다. 사실 최영의는 기무라 마사히코와도 엮여 진짜 역도산을 쫓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반대로 훗날엔 제자 김일이 스승을 욕보였다며 최영의한테 결투 기자회견 소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나이도 있던 최영의가 머뭇하다 OK했는데, 김일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흐지부지되었다는 말도 있다.
- 2017년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어워드에 헌액되었다.
- 김갑환의 모티브가 되었던 컴퓨터게임산업협회 김갑환 회장이 젊었을 때 역도산의 수행원이었다. KOF 시리즈의 그 김갑환 맞다.
6. 대중매체
- 이타가키 케이스케의 만화에서는 영 좋지 않게 그려진다. 바키 본편에서는 역강산이란 이름으로 마운트 도바의 회상에 잠깐 등장하는데, 본편에서는 의외로 크게 비하당하진 않아 지하투기장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다만 지하격투 대회는 대중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다보니 죽은 후에는 깡패 따위에게 당하다니 역시 레슬러는 아무리 강해도 결국 광대일 뿐이라는 식의 비이냥은 피할 수 없었고, 이것이 마운트 도바가 레슬러는 실전에서도 강해야한다고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오로치 돗포가 주인공인 바키 외전 권인에서는 한마 유지로의 부친인 유도가 한마 유이치로를 상대로 승부 조작 경기를 벌였다가[45]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오로치 돗포에게 지하투기장으로 호출돼서 코까지 잘려가며 탈탈 털리고 언론에 반칙 경기를 시인한 것으로 나온다. 아랑전에서는 취급이 더욱 나쁘다. 극중 역왕산(力王山)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여 제자인 그레이트 타츠미( 안토니오 이노키가 모델)를 온갖 구타와 기합으로 괴롭히다 타츠미의 원한을 사게 된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틈을 타 타츠미에게 기습을 당하고 고환이 쥐어 터지며(…) 실신하게 된다. 깨어난 역왕산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할복하여 자결을 한다. 여러모로 역도산에 대한 이타가키의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듯.
- 고교철권전 터프에서는 아이언 키바라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오마주한 인물의 아버지로 나온다. 뭣같은 성깔에도 불구하고 그 강함에 매료되어 인생을 바쳤던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의 모습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
영화 역도산에서는
설경구가 연기했으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묘사한 입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설경구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어 대사 때문에 더빙을 제안받았으나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지 않는 배우는 연기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스스로 5개월간 독학해 극중 일본어 대사를 최대한 소화해 냈다고 한다. 영화를 위해 체중을 무려 30kg나 불리고 프로레슬링 기술까지 수련했다고. 역도산의 아내 역에는
나카타니 미키가 연기했다.
- 설경구 이전 역도산을 연기했던 한국인 배우가 있었는데, 2003년 KBS의 다큐멘터리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야인시대의 이석재로 유명한 손호균이 역도산 역을 맡았었다.
- 백병무자에선 중장갑의 갑옷을 입은 대신 맨손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술 백병술의 창시자로 리키도잔 대선사로 등장한다. 작중 시점에선 한참 과거의 인물이라 등장은 많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회상씬에서 등장할 때마다 자애로운 고승의 이미지로 나오는 압박이 있다(…). 작가 쵸노 마사히로부터 프로레슬러 출신이라 어쩔 수 없던 듯.
7. 둘러보기
7.1. 스모 커리어
리키도우잔 미츠히로 ([ruby(力道山, ruby=りきどうざん)] [ruby(光浩, ruby=みつひろ)]) | |||
연도 / 바쇼 | 하츠([ruby(初, ruby=はつ)],1월) | 나츠([ruby(夏, ruby=なつ)],5월) | 아키([ruby(秋, ruby=あき)],10월) |
1940년 (16세) ( 쇼와 15) |
X | 마에즈 | X |
1941년 (17세) (쇼와 16) |
(西) 죠노구치 20 5-3-0 |
(西) 죠니단 45 6-2-0 |
X |
1942년 (18세) (쇼와 17) |
(東) 산단메 51 우승 8-0-0 |
(東)
마쿠시타 34 5-3-0 |
X |
1943년 (19세) (쇼와 18) |
(西) 下 21 5-3-0 |
(西) 下 12 5-3-0 |
X |
1944년 (20세) (쇼와 19) |
(東) 下 13 3-5-0 |
(東) 下 13 우승 5-0-0 |
(西)
쥬료 10 7-3-0 |
1945년 (21세) (쇼와 20) |
X |
(東) 十 4 3-4-0 |
(東) 十 7 8-2-0 |
1946년 (22세) (쇼와 21) |
X |
료고쿠 국기관 보수 전체 휴장 |
(西)
마에가시라 17 9-4-0 |
1947년 (23세) (쇼와 22) |
X |
(東) 前 8 기수 9-1-0 |
(東) 前 3 6-5-0 |
1948년 (24세) (쇼와 23) |
X |
(東) 前 2 수, ★ 8-3-0 |
(東)
코무스비 6-5-0 |
1949년 (25세) (쇼와 24) |
(西) 小結 8-5-0 |
(西)
세키와케 3-12-0 |
(西) 마에가시라 2 ★ 8-7-0 |
1950년 (26세) (쇼와 25) |
(西) 코무스비 10-5-0 |
(西) 세키와케 최고위 8-7-0 |
(西) 세키와케 은퇴 0-0-15 |
* 계급 옆 숫자는 순위, 전적은 승-패-휴장 순 파란색 : 승급, 빨간색 : 강등, 회색배경 : 전체휴장 검은배경 : 은퇴 첫승급&최고성적 : 진한글씨 * 3상 - 감 : 감투상, 수 : 수훈상, 기 : 기능상 ★ : 킨보시[46] 口 - 죠노구치, 二 - 죠니단, 三 - 산단메, 下 - 마쿠시타 十 - 쥬료, 前 - 마에가시라 小結 - 코무스비 関脇 - 세키와케, 大関 - 오오제키, 横綱 - 요코즈나 |
7.2. 프로레슬링 커리어
2017년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어워드 헌액자 |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
2011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역도산은 출생연도와 나이를 속인 의혹이 있어서 생년월일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고향 친구인 진명근은 1923년생이었는데, 역도산의 나이를 자신보다 한살 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1922년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상기했듯 몇살 더 위일 수도 있다.
[3]
후술되어있듯 한국 프로레슬링 계보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4]
어째서인지 김광호로 잘못 기재된 문헌도 있다. 1984년에 첫 출간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에도 김광호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
최영의”가 한국에서 “최배달”로 알려진 것과 같은 것처럼 한국 성이 “김(金)”씨인 것과 일본 내의 공식 본명이 “미츠히로(光浩)”였던 것에서 유래한 듯.
[5]
둘이 꽤 티격태격하는 사이였는지, 어릴 적 둘째형과 싸우다 솥뚜껑을 집어던져(...) 목에 상처를 입힌 적도 있었다고 한다.
[6]
그 외 조선인 출신으로 알려진 리키시로는, 지이노야마 쇼이치로(智異ノ山正一郞, 통칭
지이노야마)라는 선수도 있었다. 1922년생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며 본명은 노하우(廬𤌤于). 1940년에 1월에 데뷔하여 주료 3번째(十両3枚目)까지 승급했지만, 1945년 11월에 자진 폐업했다. 일본 위키에서는 해방 후 귀국했다고 하며, 스모 지도자로 일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현재 살아있다면 세는 나이로 101세겠으나 아마도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7]
평소 민물게를 즐겨 먹었는데 덜 익은 게를 먹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한다.
[8]
현대 스모에서는 리키시들의
운전을 금지하고 있으며, 발각 시 실질적
해고 조치인 은퇴권고를 받는데, 운전 자체가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해고와는 달리 퇴직금은 그대로 나온다.
[9]
일본군 출신으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온정적으로 대했고 그 때문에 나중에
미군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으며, 그 인맥으로
GHQ에서 발주받고 GHQ의 뒷빽으로 자금을 빌려 건설회사를 경영해서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역도산의 스폰서였으며 일본 프로레슬링의 대주주였고, 역도산의 두번째 결혼에 중매를 서기도 했다. 사후에 자신의 지분을 모두 역도산에 넘긴다.
[10]
1948 런던 올림픽
역도 82kg급
은메달 리스트 출신으로
007 골드핑거에서
중절모를 던져 상대방을 해치는 오드잡 역을 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드잡은
한국인으로 설정된 캐릭터였다.
[11]
이 증언은 역도산이 행패를 부린 바의 지배인이 증언한 것으로 역도산은 술에 취해 손님 한 명과 이를 저지하러 온 바운서 둘을 무자비하게 때렸는데, 이가 부러질 정도로 때리자 지배인이 해롤드 사카타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참고로 영화 "역도산"에서는 해롤드 사카타의 역할을
무토 케이지가 맡았고, 여기서는 헤드락으로 제압당한다. 덕분에 이 장면은 영화 내 프로레슬링 장면 중 최고로 박진감이 넘친다. 실제로 무토 케이지는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갔을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고 친근하고 개그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줘 실감이 안나지만 레슬링 업계에서도 현피 최상위권이라고 한다.
[12]
NWA 소속 프로레슬러를 초청할 수 있는 자격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NWA 소속의 타 단체 선수를 불러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당시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는 지역 단체들이고 이들이 NWA라는 이름 아래 각 지역 단체를 순회하는 것이다.
[13]
역도산의 단체 외에도 당시 일본 내에 자생적인 프로레슬링 단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14]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김일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김일 역시 NWA 프로모터 자격증이 있었고 일본에 인맥이 많이 있었던 것. 특히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의 정점 안토니오 이노키를 부르는 게 가능한 사람은 김일 뿐이었다.
[15]
1920년대에 이미 '대일본 프로레슬링 보급회'라는 단체가 있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즉,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것은 역도산이 처음인 셈.
[16]
모모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일본 호적으로 옮겼으니 조선인 출신이기는 해도 국적은 일본인이 맞다.
[17]
역도산이 당시 자민당 부총재이면서 일본 프로레슬링의 커미셔너였던 오노 반보쿠에게 김일의 석방을 호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18]
다만 한국 프로레슬링은 김일 계보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토종계였던
천규덕 등 다른 계보도 있긴 하다.
[19]
화재 사고로 유명한
호텔 뉴재팬에 있었다.
[20]
무라타는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스미요시카이 소속이었다고 한다.
김형욱의 회고록에 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참고로 스미요시카이는 당시 재일교포 야쿠자이자 한국 정계와도 연줄이 있던
정건영의
토우세이카이와 경쟁 관계인 조직이기도 했다.
[21]
소설판에서는 쿠보타. 애송이 야쿠자 꼬붕 주제에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인사를 한다는 이유로 역도산이 쿠보타의 뺨을 때리고 그의 오야붕 욕을 하자 쿠보타가 칙쇼를 내뱉으며 역도산을 칼로 찌르는 것으로 나온다.
[22]
소설 판에서는 포도주와 스테이크를 포식하고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야와라를 부르던 중, 갑자기 마이크를 떨구며 쓰러진다.
[23]
다만, WWA에서는 비공인 기록으로 분류하였다.
[24]
일본에서 추방된 김일도 이 시기 복귀한다.
[25]
총 6회 우승.
[26]
국제프로레슬링흥행. 해당 단체는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일본 레슬링 무대에 처음 초청한 프로모션으로 유명하며, 신일본과 합동 흥행을 개최하는 등 1981년까지 유지된 인기 단체였다. 미국의 인기 레슬러였던 빌리 그라함이나 번 가니에 등도 단체의 메인 타이틀인 IWA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오른 바 있으며, 단체 해산 후 여러 선수들이 신일본과 전일본으로 이적할만큼 선수층이 두터웠다.
[27]
도라지의 한자어인 길경(桔梗)은 도라지를 한약재로 분류할 때 쓰는 단어이며 실생활에서도 간혹 쓰인다. 기쿄는 이 길경의
음독에 해당한다.
[28]
실명은 진명근이라고 알려졌으며 가게 이름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에서는 콘고엔으로, 노컷뉴스에서는 고탄다로 소개했다. 확실한 건 진명근의 아내는 일본인이었는데 역도산을 통해 들은 아리랑과 도라지의 가사를 노년이 되어서도 기억했다고 한다.
설경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역도산에서 역도산의 친구인 불고깃집 주인 역을
박철민이 맡은 바 있다.
[29]
이 일화는 설경구의 역도산 영화에서도 잘 재현되었다.
하정우 못지않게 불고기와 껌을 매우 맛있게 먹는 설경구의 혼신의 먹방 연기가 킬링포인트. 여담으로 '마늘 냄새'는 한국인(및 재일조선인)을 차별할 때 쓰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마늘은 실제로 굉장히 냄새가 강하다. 역도산은 일본 내에서 야키니쿠가 일상화 되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므로 마늘 냄새 역시 한국계로 의심받을만한 요소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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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은 찹으로
코코넛을 깬 적이 있을 정도로 찹의 파워가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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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자이언트 바바는 현역 시절 정수리에 챱을 먹이는 노텐(脳天)챱이라는 기술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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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은 역도산으로부터 "너는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수련해야지?"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수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역도산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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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예를 들자면,
마에다 아키라는 심지어 TV생방송 중에 선수들을 두들겨 패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도 자기 체육관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폭력을 가하는 게 촬영되어서 인터넷에 돈 적이 있는데, 군기 잡기나 체벌 레벨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 레벨. 게다가 트레이닝 지도 중에 그냥 아무나 보이는 대로 마구 때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북미 프로레슬링도 만만찮은 구타와 폭력이 만연했으므로 그저 스포츠계의 악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흔히 ’구식 마인드‘로 퉁치지만
미즈의 사례를 보면 저런 말로 퉁치고 지나갈 수준의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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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유도계에서 전설적인 인물. 또한, MMA쪽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 종합격투기에서 대표적인 서브미션 기술로 불리는 기무라 락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브라질에서 큰 인기를 끌던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서 MMA 역사에선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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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역도산은 미국 프로레슬러들과 1:1 매치로 인기를 끌었지만, 당대 북미권 트렌드가 1:1 매치보단 2:2 매치로 가는 추세였고 이에 역도산도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인력풀이 좁던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자신과 파트너를 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다 마침 관심을 가지던 기무라 마사히코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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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의 대검호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간류지마에서 벌인 결투를 연상시킨다고 붙여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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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승리한 역도산에겐 손해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강함을 대중에 다시 한 번 각인시켰고, 안티들의 욕은 먹을지언정 인기는 지속되었다. 반면 기무라는 업계에서 사실상 몰락하고 만다. 애시당초 역도산이 손해만 봤다면 기무라랑 친했던
최영의가 그렇게 격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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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입국한 역도산은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라고 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일본어로 하였다. 그래도 판문점에 방문하면서 북녘을 향해 한국어로 '형님'이라고 크게 외쳤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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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근거는 역도산이 선수에서 은퇴하면 북한으로 돌아가 여러가지 사회활동들(스포츠든 정치든)을 하고 싶어했다는 증언들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증언이 사실이고 실제로도 북한으로 갔다면, 그가 살아있었을 적 행보로 볼 때 북한 정치인으로 변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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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인 아내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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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래 어지간한 프로레슬링 단체는 타국인이나 타 단체 선수에게 매우 폐쇄적이다. 사실 당연한 게 함부로 벨트를 유출하면 그만큼 그 단체의 격이 낮아지기 때문. 원래 NWA에서 챔피언십을 벌여 루 테즈를 꺾었으나 벨트를 유출할 수는 없어서 NWA 챔피언 벨트를 주는 대신 NWA 인터내셔널 헤이웨이트 챔피언으로 퉁친 것이다. 그러니 위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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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력이야 이미 입증되었지만, 역도산 역을 위해 체중을 21kg 가까이 늘리고 레슬링 경기 장면을 직접 소화했으며, 개인교습을 통해 일본어 공부를 한 끝에 엄청난 양의 일본어 대사(이 영화의 주 언어는 일본어다)도 최대한 소화하며 열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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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성 감독은 역도산, 무적자같이 스케일이 크고 돈 많이 드는 영화는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역도산의 경우 작품성은 꽤 인정받았지만, 재미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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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이 사망한 날과 코야마 리키야가 태어난 날이 겨우 3일밖에 차이가 안 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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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과
기무라 마사히코가 프로레슬링 대결을 벌이다 각본과 달리
시멘트 매치로 가버린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의 오마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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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가시라 이하가 요코즈나에게 승리.
전설의 프로레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