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19:12:11

양만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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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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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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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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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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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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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팔달(江左八達)
사곤 필탁 광일 완방 양만 환이 완부 호무보지

羊曼
(274 ~ 328)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 동진 시대 인물로 자는 조연(祖延). 연주 태산군 남성현 출신의 명사였으며, 양호의 종손자다.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명성이 높아 주와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길 거부했다.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장강을 넘어 강동으로 피신했고, 동진 사마예는 그를 진동참군으로 삼았다가 승상주부로 옮겨 국가의 기밀을 관리하게 했다. 그 후로도 황문시랑, 상서이부랑, 진릉태수를 역임하던 중 착오로 공무를 망쳐 면직되었다. 양만은 광일, 호무보지 등 자신처럼 영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내려온 명사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어울리니, 동진의 사람들은 이들 모임을 가리켜 '팔달(八達)'이라 칭했다.

왕돈은 양만을 등용하여 자신의 우장사로 삼았지만 왕돈의 역심을 눈치채고 있던 양만은 매일 일부러 술만 들이부었다. 왕돈은 양만의 명성을 존중했으나 인사불성 상태인 그에게 중요 업무를 맡기지 않아 훗날 왕돈 사후 그 세력이 망했을 때 연루되지 않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26년, 성제가 양만을 단양윤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소준이 반란을 일으켜 황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조정에서는 양만에게 전장군을 더해 문무관원들을 이끌고 운룡문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양만의 부대만으로는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반란군에게 대패당해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가 도망치면서 양만에게도 소준을 피해 도망치라 권했지만, 양만은 "조정이 무너졌건만 내 어찌 살길 바라겠는가?"라며 도망치길 거부해 소준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소준이 토벌된 이후 성제에 의해 태상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