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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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羊鑒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 자는 경기(景期). 연주 태산군(太山郡) 남성현(南城縣) 출신. 흉노중랑장 양제(羊濟)의 아들. 태복, 연서2주자사를 역임한 양휘(羊煒)의 동생.
2. 생애
양감은 초기에 동양태수에 임명되었다가 누차 승진하여 태자좌위솔에 올랐다. 태산태수 서감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감 왕도는 태산 출신의 유력 호족인 양감이라면 태산의 반란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양감을 천거했다. 그러자 양감은 스스로 장군이 될 수 없다 말하고 사양하려 했다. 연주자사 치감도 양감은 장군이 될 수 없으니, 함부로 그에게 군사 업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원황제 사마예는 왕도를 훨씬 신임했기에 강제로 양감을 정로장군, 정토도독으로 삼아, 서감을 토벌하게 했다.대흥 2년(319년) 6월, 황제의 명령을 차마 거역할 수는 없어서 일단 출병은 했으나, 영 군인 체질이 아니었던 양감은 반란군이 두려워 하비(下邳)에 눌러 앉고는 감히 진군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양감은 진군하자는 서주자사 채표의 요청도 모두 불허하고 반란군이 날뛰는 모습만 바라보며 허송세월하였다. 원제도 그에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양감은 끝까지 의심을 품고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상서령 조협이 여러 죄목을 들어 양감을 탄핵해 면직시켰다. 진노한 원제는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양감을 붙잡아 참형에 처하려다가, 황태비의 친척이라는 점을 고려해 특별히 사면하고, 제명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덮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임관하여 소부(少府)가 되었다.
태녕 2년(324년) 7월, 2차로 난을 일으킨 왕돈이 병에 걸려 쓰러졌다. 왕돈은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자신의 외삼촌인 양감을 불러, 자신이 사망하면 조카 왕응(王應)을 옹립하고 문무백관을 모두 세운 뒤에 비로소 장례를 치러달라 부탁했다. 양감은 왕응을 옹립하였으나, 워낙 방탕한 인물이었던 왕응은 왕돈의 시신을 돗자리에 말아서 밀랍칠한 뒤에 대충 내팽개치고 장례를 지내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명황제 사마소가 왕돈의 잔당을 모조리 평정하고, 반란의 주모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양감도 덕분에 죽지 않고 관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왕돈의 일파였다는 이유만으로 조정 내에서 상당한 미움을 받았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난 평정할 때 공을 세워 풍성현후(豐城縣侯)에 봉해지고, 광록훈으로 승진했다. 얼마 뒤,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