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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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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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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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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
파일:알렉상드르 뒤마.jpg
본명 뒤마 다비 드라파유트리
(Dumas Davy de la Pailleterie)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출생 1802년 7월 24일
프랑스 공화국 빌레르 코트레
사망 1870년 12월 5일 (향년 68세)
프랑스 공화국 센마리팀
묘역 프랑스 파리 팡테옹
직업 소설가, 극작가
서명
파일:알렉상드르 뒤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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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묘역 <colbgcolor=#fff,#191919>빌레르 코트레 공동묘지 (1870-2002)
팡테옹
안장일
2002년 11월 30일
사조 낭만주의
역사소설
활동 기간 1829년 – 1869년
부모 아버지 토마알렉상드르 뒤마(1762-1806)
어머니 마리 루이 엘리자베스 라보레(1796-?)
배우자 아이다 페리에[1](1840년 결혼 / 1844년 별거)
자녀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1824-1895)
마리 알렉상드리엥 뒤마(1831-1878)
미카엘라 클레리 코디어(1860-?)
아들 헨리 바우어[2](1851-1915)
종교 가톨릭
상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극작가 활동2.3. 소설가 활동
2.3.1. 전업작가로 활동하다2.3.2. 자본가 폴2.3.3. 몽테크리스토 백작2.3.4. 결혼
2.4. 말년
3. 평가4. 팡테옹 안장5. 그에 대한 말들6. 국내 번역
6.1. 소설6.2. 에세이
7. 대중 매체에서8. 여담9. 관련 문서10.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보편적이라고 할 만큼 전세계적인 고전으로 읽히고 있으며 약 100개국의 나라에서 번역됐다.[3]

2. 생애

2.1. 어린 시절

1802년 7월 24일 북프랑스 엔현의 빌레르 코트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 토마알렉상드르 뒤마를 잃었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4]로 군인 연금도 제대로 못 받던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프랑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겨우 4살밖에 안 되었지만 3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를 회고하는 내용이 아버지가 죽고 난 뒤 하느님이 아버지를 데려가셨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는 아버지의 총을 들고선 천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내게서 데려간 하느님을 죽여버리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뒤마의 아버지가 죽자, 뒤마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린 뒤마는 제대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10세에 성경, 각종 신화, 로빈슨 크루소 아라비안 나이트,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5] 등을 읽었다. 뒤마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독서로써 문학을 공부하였다.

2.2. 극작가 활동

성인이 된 뒤마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파리로 간다. 1823년 그는 파리에 가서 오를레앙 공(公)의 사무실에 취직해 필경직(筆耕職)[6]을 지내면서 몇 편의 작품을 쓰는 동안[7] 사극 《앙리 3세와 그 궁정》(1829)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어, 새로 일어난 낭만주의파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8] 1829년 이 작품의 공연은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루었다. 뒤마를 후원한 오를레앙 공작(후에 루이필리프)은 매우 흡족해했으며 한때는 왕당파였던 빅토르 위고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뒤마의 출발은 성공적이었고, 곧 연극계로 뛰어들었다. 1820년대 말에서 1830년대 초는 패기 넘치는 젊은 뒤마에게 작가로서의 장래를 보장해 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후 20여 년 동안 뒤마는 위고, 비니Vigny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로 활약했다. 1830년 7월 혁명 때는 루이필리프를 지지하여 당대 유명인사로 크게 활약했으며[9], 그 후로는 로맨틱한 대상이 풍부한 정열적인 주제를 솜씨 있게 구사한 작극법(作劇法)으로, 《앙토니 Antony》(1831) 《La Tour de Nesle》(1832) 《킹》(1836) 등을 상연하여, 분방한 상상력과 교묘한 작극술을 보여 줌으로써, 파리 극단의 인기를 휩쓸었다. 뒤마는 혁명과 공화국에 대해 1848년 3월 1일, 일간지 <라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렇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름답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위대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눈에는 혁명만 보였다.” 

뒤마는 문학적 공적을 인정받아 1837년 3월 2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2.3. 소설가 활동

2.3.1. 전업작가로 활동하다

뒤마는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자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언론 매체인 신문에 연재 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1820년대에는 많은 잡지가 창간되면서 '문예란'에 연재소설이 등장하였다. [10]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소설을 신문과 잡지에서 읽고, 신문사들도 소설 때문에 신문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소설을 실을 정도로, 출판노동자들이 문학잡지도 펴낼 정도로 소설이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뒤마는 연재소설에 매력을 느껴 차츰 극작품보다는 소설, 특히 역사소설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만큼이나 삶의 자극에 탐닉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권태를 모면하기 위해 그는 연애, 음식, 잠, 쾌락, 여가, 운동 등 여러 방면의 자극을 원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뒤마는 여자, 오페라, 그리고 지중해에 대한 애정을 키웠고 그런 가운데 그의 대작들이 잉태된다.

2.3.2. 자본가 폴

1838년 발표된 그의 첫 소설 “자본가 폴”은 기존에 발표하였던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것이었다. 뒤마는 이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수많은 자신의 희곡을 소설로 각색하여 발표하였다. 1839년에서부터 1841년까지 뒤마는 유럽 역사에서 유명한 범죄 사건을 뽑아 8권짜리 ‘유명한 범죄자들“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베아트리체 첸치, 마르탱 게르,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카를 루드비그 상트, 앙투아네 프랑수아 데스루 등의 당대 인물들이 수록되었다. 한편 1840년 뒤마는 펜싱 마스터 오귀스탱 그리시에르와 함께 ‘펜싱마스터“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그리시에르가 러시아에서 겪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경험담을 담고 있다. 뒤마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리시에르로부터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11] 이후 리슐리외 시대의 통쾌한 검사(劍士) 이야기인 모험담《 삼총사》(1844)를 써서 대호평을 받았으며, 그 후편으로 《20년 후》(1845) 및 《브라질론 자작(철가면)》(1848)을 썼다.

2.3.3. 몽테크리스토 백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몽테크리스토 백작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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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수는 무려 250편이 넘었으며, 천변만화하는 장면전환과 등장인물들의 활기찬 성격묘사 등 작가로서의 수완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그 중 특히 1844년에 시작된 파란만장한 장편 모험소설 《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번역되고 차용되고 표절되는 등, 한마디로 그 시대 최고의 '인기 소설'이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불린다.

2.3.4. 결혼

결혼은 1840년에 이다 페리에라는 배우와 했지만, 1859년에 그녀가 사망했다. 그리고 결혼 이전부터 40명이 넘는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어머니가 각각 다른 혼외자도 최소 4명은 두었다. 그 중 정식 자식으로 그가 인정한 건 아들 '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小 뒤마)'와 딸 '마리알렉상드리엔 뒤마'이다. 뒤마 피스와는 소원했다가 가까워졌다 하는 관계였다.[12] 뒤마 피스는 혼외자였기 때문에 10살 때까지 거리에서 자랐고, 후일 성장한 아들이 마리 뒤플레시라는 고급 창부와 사랑에 빠지자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격분한 뒤마 피스는 아버지와 의절해 버린다. 뒤마 피스는 이 과정을 걸작 춘희에 그대로 그려냈고, 뒤마는 이 소설이 성공한 한참 후에야 뒤마 피스와 화해하게 되었다. 춘희 항목 참조.

2.4. 말년

가장 인기있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그의 사생활은 날로 황폐해 가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채권자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처럼 날마다 더 많은 글을 써내야 했고, 그 때문에 발자크처럼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 뒤마는 많은 작품을 출판하였고 그로 인한 수입도 컸지만, 그는 호화스런 생활과 여성 편력에 들인 비용 때문에 종종 빚더미에 몰려 파산하곤 하였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루이필리프가 폐위되고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할 즈음, 뒤마는 몰락하였다.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한, 뒤마는 다시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에 뒤마는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61년 3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자, 뒤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신문 “인디펜덴테”의 발간을 주도하며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3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낸 뒤마는 1864년 파리로 돌아왔다. 공장 시스템의 부작용으로 뒤마는 말년에 태작을 일삼았다. 그리고 미식을 일삼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여성 편력에 돈을 소비하며 사업에 손도 대봤지만 경제적으로 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뒤마는 시력이 저하되는 등 건강이 나빠져 말년을 아들 알렉상드르[13]의 별장에서 지냈다. 어느 날은 아들 뒤마가 뒤마의 소설들이 모두 고전이 되었다고 말하자 뒤마는 글을 쓰는데 바빠서 정작 자신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허탈해했다[14]. 이에 아들 뒤마는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가져다 주었다. 죽기 직전 뒤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진짜 명작이구나. 하지만 내가 결말을 읽을 때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진 않다라고 크게 아쉬워하며 말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시기에 아들의 대표작 '춘희' 원고를 읽어보고 이야기에 감동하여 "네가 나를 감동시켰구나!"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870년 12월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아이스네 과의 빌러스코테레츠 생가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가려졌고, 프랑스의 문학적인 사조도 바뀌면서 그의 인기는 떨어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레지날드 하멜과 클로드 쇼프 같은 비평가나 학자들은 그의 잃어버린 작품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에 대한 비평적인 재평가 운동과 새로운 감상을 야기했고 생전 못지않은 인기와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되찾았다.

3. 평가

파일:Monument_Alexandre_Dumas_Doré_Place_Catroux_Paris.jpg
프랑스 파리에 설치된 알렉상드르 뒤마 동상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중 하나였으며 현재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또 장르소설의 시초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다.

재미만 있으면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은 많은 고전 문학중에서 재미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서양권에서 '페이지 터너'[15]라고 불릴 정도로 작품이 술술 읽힌다. 삼총사의 경우 19세기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정도로 센스와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또 역사가 쥘 미슐레는 "뒤마는 다른 역사가들을 모두 합해 놓은 것보다 대중들에게 더 많은 역사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니라 오히려 뒤마의 소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는데, 실제 <삼총사>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둘러싼 17세기 유럽의 현실이 허구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역사를 분석하는 뒤마의 통찰력은 대중소설가 수준 이상이었고, 간결하고도 속도감 있는 그의 문체는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 유명한 역사 모험 소설'을 탄생시키는데 유감없이 발휘됐다.

또 뒤마의 소설은 흡입력이 굉장히 뛰어난데, (과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당대 파리의 어떤 외과 의사는 이런 말을 실제로 남겼다.[16]
"저는 수술 전에 뒤마의 신간 한 권을 환자에게 줍니다. 환부를 꿰매는 간단한 수술 정도라면 환자가 책을 다 읽을 즈음에는 마취할 필요도 없이 이미 수술은 끝나 있지요."

이런 흡입력이 두드러지는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걸작이자 복수극의 정석이자 시초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뒤마의 소설들은 당시부터 '재미있고, 잘 팔릴만한 줄거리'를 담아 집필됐고 특히, 모험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기에 웬만한 양판소 가공전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재밌다. 19세기 중반에 창작된 대중 소설이 현대에도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뒤마의 작품들이 걸작임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문학사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뒤마는 프랑스 문학의 대본소 작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뒤마는 무명 작가들이나 문예 지망생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편집하는 공장 시스템을 유지했다. 이에 관련해서 삼총사 연재시 걸린 소송이 유명한데, 삼총사가 밀라디와 리슐리외의 밀담을 엿듣는 장면을 당시 동업자인 다른 작가에게 표절 및 도용 혐의로 걸린 것이다. 당시는 도제 제도가 유행한 시기였는데도 소송이 걸릴 정도면 좀 흠좀무. 결국 뒤마는 원래 나온 설정에서 대사를 더 넣어서 밀라디의 비밀을 추가한뒤 리슐리외 추기경과 삼총사와의 만남 부분을 재창작하고 순서를 바꾸었다.

또 그가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흑인혼혈이었기 때문이다. 외모가 검었던 뒤마는 당시 프랑스 주류사회에 편입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인 현 시점에서는 그의 책들이 여전히 널리 읽히며 고전의 반열에 올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문학사에서 인정받고 있다.[17] 여러모로 문학사적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의 작가라고 볼 수 있다.[18]

주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지만 재미를 위해서 고증을 신경쓰지 않았으며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 호레이쇼 넬슨 전기는 원균 옹호설 정도의 왜곡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넬슨이 프랑스의 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또 그는 나폴레옹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투옥 동안 지병을 가지게 되고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군인 연금도 제대로 못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프랑스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한마디로 뒤마 입장에서 나폴레옹은 원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알렉상드르 뒤마의 모든 작품에서 나폴레옹은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된다.[19] 굳이 비교하자면 삼국지연의정도에 가깝지만 삼국지연의보다도 허구의 비중이 높다.[20]

또한, 당시에는 단어수에 비례하여 일정액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원고료가 산정되었기 때문에[21] 그의 소설은 무척 길다. 예를 들어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경우에는 괜히 루이지 밤파 이야기로 한 챕터를 때우기도 하고, 심지어 행수를 늘리기 위해 말없는 캐릭터를 넣기도 했다. 이밖에도 다른 표절 논란이 있자 뒤마는 '신 자신도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을 발명해낼 수 없었거나, 아니면 감히 그러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냈다'는 말로 반박한다.

4. 팡테옹 안장

파일:external/www.live2times.com/alexandre-dumas-au-pantheondumas-.jpg
파일:external/www.dumaspere.com/30soir10.jpg

사망 후, 뒤마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 빌레르 코트레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2002년,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그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꺼내 프랑스의 위인만 들어갈 수 있다는 팡테옹의 안장하도록 지시한다.

그의 유해는 뒤마가 소유했던 파리 근교의 ‘몽테 크리스토 성’을 거쳐 파리 시내 상원 의사당으로 옮겨졌고, 이장위원회는 상원에서 팡테옹까지 퍼레이드와 노상 공연을 벌였다. 삼총사의 등장인물들인 다르타냥,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로 분장한 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 프랑스 헌병대의 일부) 4명이 푸른색 비단[22]으로 덮은 뒤마의 새로운 관을 에워싸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국립묘지 파리 팡테옹으로 운구해 이장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2002년 3월 그의 이장 포고령을 내리면서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지만 프랑스 공화국 이념에 가장 헌신한 창조적인 천재에게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뒤마는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앙드레 말로에 이어 문필가로서는 6번째로 이곳에 묻혔으며, 당연히 유색인종 작가로는 최초이다.
파일:1200px-Tomb_of_Dumas_and_Hugo_and_Zola_in_Panthéon,_16_April_2010.jpg
빅토르 위고(왼쪽), 알렉상드르 뒤마(가운데), 에밀 졸라(오른쪽)
뒤마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사회참여 작가의 직분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인간의 본성이 통치자와 통치받는 자라는 영구적인 대립 관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익히 알았다. 나폴레옹군의 장군이었지만 나폴레옹에게 배신당한 아버지를 두었고, 군주였지만 공화정을 주창하던 오를레앙 가문의 친구였고, 보수주의자인 동시에 혁명주의자였던 뒤마는 내밀한 갈등을 잔뜩 품은 프랑스를 그대로 보여준다. 프랑스인이 뒤마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다. 오늘 드디어 뒤마는 빅토르 위고와 에밀 졸라 옆에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화국도 ‘삼총사’를 가지게 되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2002년 11월 뒤마 판테온 이장식에서)[23]

안치식은 TV로 생중계 됐으며 시라크 대통령은 과거 인종차별주의가 존재했지만 이제 뒤마가 빅토르 위고와 에밀 졸라의 곁에 안장됨으로써 잘못된 것이 바로잡혔으며, 비록 프랑스가 많은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하였지만, 뒤마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진 작가는 없다고 언급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장식에서 “뒤마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라면서 “그와 함께 우리 어린시절의 추억과 상상력이 팡테옹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의 관을 장식한 짙푸른 덮개에는 1845년작 ‘삼총사’에서 나왔던 “하나를 위한 전체, 전체를 위한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 구호가 장식됐다.

5. 그에 대한 말들

Dumas was . . . a summit of art. Nobody ever could, or did, or will improve upon Dumas's romances and plays.
뒤마는... 예술의 정상이었다. 아무도 뒤마의 소설과 연극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발전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24]

Dumas est un géant, il est universel.
뒤마는 거인이다, 그는 보편적이다.
알랭 드코 (프랑스 사학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25]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마음이 넓은 존재. 그는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자기 중심적인 존재였다. 그의 혀는 마치 풍차와 같았다. 일단 움직이면 언제 멈출지, 특히 주제가 자신이라면 더욱 그랬다.
the most generous, large-hearted being in the world. He also was the most delightfully amusing and egotistical creature on the face of the earth. His tongue was like a windmill – once set in motion, you never knew when he would stop, especially if the theme was himself.
워터 필립스 (영국 극작가)[26]

뒤마는 우리들에게 볼테르를 되돌려주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지옥이란 없고, 어디서나 광채가 빛나고 기지가 번쩍인다.
빅토르 위고[27]

인간의 특질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씨앗을 뿌려,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작품을 창조해내는 뒤마 덕분에 우리의 영혼, 마음, 지성은 풍요로워진다.
빅토르 위고[28]

이 세기의 그 어떠한 유명세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명세를 넘지 못했다. 그의 성공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고 열광적인 성공이었다. 뒤마의 이름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적이며 유럽을 넘어 세계적이다. 그는 '읽고자 하는 욕구'를 창조해 낸다. 사람의 영혼을 파고들어 거기에 씨를 뿌린다. 그곳에는 찬란한 빛과 정오의 태양 같은 밝음이 있다.
빅토르 위고[29]

화산의 분출이 재주 있는 관개(灌漑) 기술자의 절묘한 솜씨와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
샤를 보들레르[30]

뒤마는 작가일 뿐 아니라 자연의 위대한 힘의 하나.
쥘 미슐레 (역사가)[31]

뒤마,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말을 타고 프랑스의 길을 달리고 전쟁터를 순회하고 궁과 성을 방문하는 달타냥이거나 몬테크리스토이거나 발사모였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꿈을 꿉니다.
자크 시라크[32]

1870년 12월 4일 사망 전날, “내가 죽고 나면 남는 게 있을까”라며 알렉상드르 뒤마는 아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1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건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음을 몽테크리스토성의 정원에서 칼싸움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알 수 있다.
르파리지앵[33]

L’auteur est immense, l’homme admirable et le Français exemplaire.
위대한 작가, 존경할 만한 인물, 그리고 모범적인 프랑스인.
디디엥 드콩 (각본가,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34]

6. 국내 번역

뒤마의 작품은 방대한 분량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재창작한 스토리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렵고 적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보면 현재 시중에 구할수 있는 역본중 가장 유명한 민음사 판본은 역자인 1935년생 오증자 교수가 70년대에 번역한 판본을 여러 출판사가 그대로 물려내려 쓰고 있는 것으로 지금에와선 오역에 대한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또 이 역본은 번역중에 발생한 오탈자나 비문의 교정수준이 출판사마다 다른걸로도 유명한데 민음사판은 출판사측이 일 제대로 안했는지 제대로 교정 안된 부분이 꽤 있다. 오히려 중역으로 악명높은 동서문화사가 고려대 불문과 출신 번역가를 기용해 내놓은 역본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35]

달타냥 로망스는 우리가 흔히 삼총사라고 알고 있는 1부는 민음사와 시공사에서 번역본을 내놓았지만[36] 20년후는 세계문학이란 소규모 출판사에서 영어 중역본으로 90년대에 한번 발매했다 절판된게 끝이고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브로즐린 자작은 아예 번역본이 없다. 왕비 마고는 1994년에 홍원출판사에서 낸 절판본이 유일한 번역이었다가 2019년 레인보우퍼블릭북스에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이란 제목으로 재출간했는데 번역 작업이 필요 없는 재간임에도 2권 분량을 1권으로 압축한 축약본을 내놓았다. 이 사실을 보험사 약관처럼 작게 공지하고 있어 낚이기 쉽다.

6.1.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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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37] Les Trois Mousquetaires (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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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 달타냥 3부작 중 하나다. 완역본은 시공사, 민음사판 번역본이 있다. 삼총사 이후 작품으로 20년후, 브로즐린 자작[38]이 있다. 이 작품들은 번역이 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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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 백작[39] Le Comte de Monte-Cristo (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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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그의 최고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 완역본은 민음사, 동서문화사판 번역본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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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마고(카트린느 메디치의 딸)[40] La Reine Margot (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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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지성과 미모로 프랑스 왕실의 진주로 불린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나바르 왕이자 신교도의 수장인 앙리 드 나바르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것은 그녀의 모후 카트린느 메디치가 신교도를 몰살시키기 위한 미끼이자 음모이다. 결혼식 후에 카트린느가 앙리를 제거하려 하자 마르그리트는 동지애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정치적인 계산으로 형식적인 남편인 앙리의 편에 선다.
소설의 중심축에는 샤를르 9세의 섭정을 하는 카트린느 메디치가 점술의 예언처럼 왕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위인 앙리를 제거하기 위한 끝없는 음모와 계략이 있다. 하지만 전개가 흥미로운 것은 카트린느의 극악한 계략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앙리의 지략과 그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 때문이다. 94년 홍원출판사에서 왕비 마고라는 제목으로 나온 역본과 2019년 레인보우퍼블릭북스에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이란 제목으로 니온 역본이 있는데 후자는 새역본이 아니라 전자의 축약본이다. 처음에 이 사실을 제대로 공지하지 않아 낚인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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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튤립[41] La Tulipe Noire (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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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의 마지막 걸작이다. 튤립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부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가장 아름다운 튤립을 선발하는 대회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상금이 걸렸으며, 엄청난 투기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이러한 ' 튤립 파동'을 그린 소설로, '검은 튤립'을 놓고 벌어지는 탐욕과 음모, 그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검은 튤립을 창조하려는 인물의 고난과 역경, 사랑을 그린다.

6.2.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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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 Gaule et France (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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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가 쓴 역사서이다. 풍부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 희곡 등 뛰어난 작품을 남긴 뒤마는, 이번 책에서도 생생한 인물 묘사와 역사를 보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파란만장한 프랑스 역사를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점령하여 로마 문명을 전파한 고대에서 프랑스 혁명을 거쳐 루이 필리프가 '시민왕'으로 등극한 근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중은 어떻게 자유를 쟁취하며 성장하였는지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흥미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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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성의 뒤마 Histoire de mes bêtes (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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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의 자전적 픽션. 뒤마는 당시 19세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날렸다. 친구 빅토르 위고는 이 세기의 어떤 유명세도 뒤마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연이은 소설과 연극의 성공으로 부유해진 뒤마는 유명 건축가인 이폴리트 뒤랑에게 부탁해 집을 짓는다. 그 집은 사람들에 의해 '몽테크리스토성'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책은 뒤마가 몽테크리스토성에 살던 1847년 전후로 함께 지낸 동물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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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 요리사전 Grand Dictionnaire de cuisine (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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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의 마지막 작품. 이 책은 요리가 무엇인지 안내하는 길잡이다. 음식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교양서이기도 하다. 작가 뒤마는 미식가로서 폭넓은 경험을 이 책에 옮겨놓았다. 그는 친구를 위해 요리해서 함께 먹고 마시기를 좋아했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 등 그의 소설에서도 식사와 요리를 중시했다. 뒤마는 요리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으려고 했다. 그는 역사와 어원과 함께 재료부터 설명했다. 여기에 여행의 체험담을 덧붙였다. 실제와 허구를 가리지 않았다. 문학 작품도 인용했다. 그는 많은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요리를 맛보고, 메뉴를 수집했다. 가는 곳마다 그 지역 최고의 요리사를 만나 관습을 알아보고, 특별한 음식을 맛보았다. 이렇게 경험담을 이용하고, 근거를 밝혔다.

7. 대중 매체에서

  • 문명 5의 위대한 작가로 등장한다.
  •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지독한 인종주의자인 미국 남부의 농장주 캔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프랑스를 동경하고, 삼총사를 좋아해 노예의 이름까지 달타냥이라 지어줬지만, 정작 뒤마가 흑인[42]인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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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생크 탈출에서도 언급된다. 헤이우드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몽테크리스코' / 뒤마(Dumas)를 덤 애스(Dumb Ass)로 읽는 장면.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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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1832년
<nopad> 파일:알렉상드르 뒤마.jpg <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andre_Dumas.jpg
1855년 1865년
  • 검은 곱슬머리와 벽안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 아들도 똑같이 이름이 '알렉상드르'라서 부자(父子) 둘 다 이름이 똑같은 ‘알렉상드르 뒤마’ 이다. 그런데 뒤마 부자 둘 다 글쟁이, 그것도 그냥 문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타이틀이 붙는 문필가이다.(다만 아들 쪽은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대표작 '춘희' 때문에 극작가로서의 이미지가 짙다.) 이러다보니 여러 가지 혼선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일단 본국 프랑스에서는 아버지 뒤마를 ‘페르(Pere) 뒤마(아버지 뒤마)’로, ‘춘희’를 쓴 아들을 ‘피스(Fils) 뒤마(아들 뒤마)’로 표기하지만 동양인들은 그 ‘페르'나 ‘피스’를 본명의 일부로 착각해 또 혼선을 빚는다. 이러다보니 아예 일본에서는 ‘대(大) 뒤마’, ‘소(小) 뒤마’라는 식으로 표기하고 한국, 대만,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렇게 많이 쓴다. 한국에서도 대뒤마란 표현이 1980년대까지는 자주 찾아볼 수 있었으나, 인지도나 인기면에서 아버지 뒤마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는 아버지 뒤마를 그냥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많이 부르고 아들을 따로 구분하는 쪽이다.
  • 파리 외곽에 있는 그의 시골집인 샤토 드 몬테크리스토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 흑인 혼혈[44]이란 점 때문에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에 평생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엄청난 양의 독서와 무한한 상상력 덕에 겨우 작가로 성공했다.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는 일이 일상이었던 뒤마에게 혼혈은 평생의 짐이었다. 작품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에도 프랑스 작가협회는 그를 거부했고, 사인회 한 번 열지 않아 당시 뒤마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단편 소설 조르쥬에서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내 아버지는 물라토요, 조부는 깜둥이였으며, 증조부는 원숭이였소. 알겠소, 선생? 우리 집안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했단 말이오."
  • 취미는 동물기르기, 사냥, 여행, 요리 등이 있었다.
"시모니니는 임무를 띠고 시칠리아행 배를 탄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뒤마는 그에게 선원들을 소개해준다. 특히 요리사를 소개하는 태도가 아주 각별하다.  자시 뒤 선원들이 바다거북 한 마리를 잡으며 소동이 벌어진다. 바다거북 요리법을 자세히 설명하며 몹시 흥분하는 뒤마. 그 모습을 보며 시모니니는 생각한다. 산해진미를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니, 비록 혈통이 석연치 않을지언정 어찌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으리오."
*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소설 < 프라하의 묘지>에서 뒤마를 묘사한 부분이다. 뒤마는 굉장한 미식가였고 식탐이 엄청났다. 한 개인이 레스토랑과 식품, 포도주에 지불한 금액에서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뒤마는 평소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예술뿐 아니라 음식의 맛과 향기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만찬 때"라고 말하곤 했다. 생전 파리 식당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직접 요리하기도 즐겨 몬테크리스토 성 시절 수많은 예술가들을 초청해 시도 때도 없이 연회를 베풀고 직접 요리한 만찬을 대접하기도 했다. 또한 뒤마는 60세가 넘는 나이에도 열 접시 정도의 풀코스를 거뜬히 소화한 대식가였다. 장편을 쉴새 없이 발표하는 이유가 궁금해한 한 작가가 비결을 아들에게 물은 일이 있다. 그러자 뒤마의 아들은 농담 반 진담 반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밤중에 많이 먹고 소화불량증에 걸려 잠이 잘 안 오니까 밤마다 주무시지 않고 글을 쓰시는 겁니다."
  • 말년에 요리책 '요리 대사전'을 쓴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이 됐다. 무려 60만 단어에 1,001개의 레시피를 수록한 아주 방대한 분량이다. 그 책은 뒤마의 사후인 1873년에야 발간된다. 하지만 책이 균형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다. 코코아는 6장, 우유는 반장 쓰는 식이었다. 뒤마는 매주 수요일 밤 11시부터 당대의 예술가와 작가를 불러다 무려 15가지 코스 만찬을 베풀었다. 400명이 모이는 파티도 자주 열었다. 요리사 줄리엥이 준비를 했지만, 샐러드만은 반드시 뒤마가 만들었다고. 아프리카, 아제르바이잔 등 이국의 요리를 프랑스에 소개한 것도 뒤마였다. 오늘날 요리 사전에는 '뒤마 식의 오마르(바닷가재)' 등 그의 이름을 딴 요리명이 종종 발견되고, 그의 대표작이자 화려한 시절을 대변하는 몬테크리스토의 이름을 딴 케이크와 최고급 하바나산 시가 브랜드도 남아 그의 대단한 음식 사랑을 증언해준다.
  • 베르사유 궁 근처에 무려 150만프랑을 들여 '몽테크리스토 성'을 지을 정도로 호사스러운 생활도 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베스트셀러가 되자 뒤마는 Port Marly에 이 저택을 짓고 몽테 크리스토 성이라 이름지었다. 1844년에서 1847년 사이에 건조되었으며 건축가는 Hippolyte Durand이었다. 이 곳에서 조용히 집필생활에 전념하고자 했으나 재정 형편이 나빠져 1848년에 팔아야 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낡은 성으로 남아 있다가 1960년대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철거한다는 소문이 돌며 다시 세간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예술사학자며 문화재 전문가 조르주 푸아생의 노력으로  철거되지 않았으며 1975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모로코의 국왕 하산 2세가 일부 재정을 담당하여 1994년 성과 정원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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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마가 쓴 책 500권을 프랑스 남동부 도시, 카바이용(Cavaillon) 도서관에 기증하는 대가로 일년에 12개의 멜론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카바이용 멜론은 이름난 과일이었고 뒤마가 매우 사랑한 과일이다. 사망할때까지 7년간 이거에 빠져 살았다. 적응력 강한 멜론을 본인에 비유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 1843년 “마차를 타고”(Le Corricolo)라는 제목으로 나폴리 여행기를 출판하는데, 나폴리의 빈민층인 라짜로니(lazzaroni)의 생활상과 그들의 주식인 피자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 자료는 나폴리 피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뒤마는 이 글에서 “나폴리의 빈민층인 라짜로니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지만 “동전 두닢이면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 피자를 살 수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들의 생명줄인 나폴리 피자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다. “(나폴리) 피자는 겉보기에는 단순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며 “돼지고기(bacon), 라드(lard, 돼지기름에서 추출한 유지류), 토마토, 앤초비(anchovy, 지중해나 유럽 근해에서 나는 멸치류의 작은 물고기) 등이 들어간다”고 적었다. 뒤마는 나폴리의 뒷골목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얹어서 굽는 둥글납작한 빵을 보았다. 나폴리 여행을 다녀온 8년 후에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가 보았던 피자는 나폴리 골목상권에서 보석처럼 빛나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 2019년 그의 에세이 '몽테크리스토성의 뒤마'가 국내에 출판됐다. 이 책은 뒤마가 몽테크리스토성에 살던 1847년 전후로 함께 지낸 동물들의 이야기다. 시대 배경은 1830년 7월혁명에서 1848년 2월혁명까지 프랑스 사회가 군주정과 공화정을 넘나드는 대혼란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자리바꿈을 하지만 뒤마는 늘 그 중간에 있다. 누가 왕관을 쓰든 누가 목이 날아가든 전혀 관심 없는 천진난만한 사냥개 프리차드와 함께. 그 외에도 원숭이, 앵무새, 독수리 등 수많은 동물과 동고동락하며 뒤마는 동물의 행태를 통해 인간 사회를 바라본다.
  • 2017년 그가 쓴 프랑스사 역사서 '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도 국내에 번역됐다. 프랑스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근대사 이전까지 이야기식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뒤마는 프랑스를 통치했던 왕조들을 중심축에 두고 역사를 되돌아본다. 그렇다고 권력의 향배에 역사 서술의 초점을 맞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권력의 변천과 더불어 각 시대를 산 민중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살펴, 노예 신분에서 권력의 한 주역으로 성장해가는 민중세계의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 체사레 보르자의 얼굴이 예수의 초상화의 모델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근거없는 낭설로 평가받고 있다.
  • 2020년 8월 28일, 그를 기념하기 위한 구글 두들이 나왔다. # 다만, 그의 얼굴을 완전히 흑인처럼 묘사해서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비율로 따지자면 그는 25% 흑인, 75% 백인인 혼혈이었기 때문이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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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애호가였다. 세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다. 이름은 마이소프 1세, 마이소프 2세, 르 독튀르. 마이소프 1세는 뒤마가 언제 일을 마칠지 정확히 아는 재주가 있었고 뒤마와 함께 사무실을 드나드는 것을 좋아했다. 지각력이 있는 이 애완동물은 뒤마가 언제 늦게까지 일할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뒤마는 " 귀족인 고양이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반면, 개는 낮은 아첨꾼으로 지위를 얻은 괴짜 타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1] 1811년 출생, 1859년 사망 [2] 작가, 극작가 활동을 했다. [3] 프랑스 작가 중에서 쥘 베른 다음으로 전세계적으로 번역본이 많은 작가다. 관련 출처 [4] 나폴레옹은 그의 아버지를 싫어했다. 나폴레옹과 그가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전열의 맨 앞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알렉상드르 뒤마가 프랑스군 지휘자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그의 아버지는 당시 인기가 좋았다. 한 마디로 지보다 인기 많아서 샘 난 거다. [5] 진화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 [6] 쉽게 말하면 서기지만 이 당시 필경직은 현대의 컴퓨터 프린터로 보면 된다. 귀족의 필경직은 그야말로 인간 레이저 프린터로 수백장의 초대장,연하장 등을 달필로 써내야 했다. [7] 첫 작품은 쓰고 나서도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의 손으로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작품 전체를 문장 하나 글자 하나하나까지 달달 외우고 있었다고도 전한다. [8] 이 작품은 시간, 장소, 행동의 3일치라는 고전주의 규칙을 무시하고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씌어진 전형적인 낭만주의 작품이었다. [9] 그러나 루이필리프가 왕위에 오른 후 뒤마를 등용하지 않았다. [10]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도 1917년 춘원 이광수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이 자유연애사상 논란과 애독자들이 생기도록 한 이후에, 벽초 홍명희 임꺽정(< 조선일보>)등이 신문에 실렸고 1930년대에는 문학잡지인 조광 채만식이 쓴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구보 박태원이 쓴 천변풍경이 실렸다. [11] 이 때문인지 몬테크리스토 백작에도 그리시에르의 이름이 언급된다.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알베르 드 모르세르의 거처 이야기를 하며 '이 방에서 그리시에르를 초빙해 펜싱을 배우기도 했다' 같은 말이 나오는 정도. [12] 이름이 같은 건 뒤마 피스가 혼외자라 이름을 받지 못해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중, 근세의 혼외자들이 부모로부터 이름을 못받으면(=자식으로 인정 못받으면)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13] 아들 역시 세계적인 문필가였다. 아래 '여담' 항목 서술 참조. [14] 작가가 자기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후술된 것처럼 후기 뒤마의 작품들은 뒤마 자신이 직접 다 쓴 것이 아니라 대필작가들을 대규모로 고용하여 공장식으로 쓰였고, 뒤마 자신은 이 작업을 감독, 감수하고 편집하는 역할만 담당했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차근차근 읽어보지는 못했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포함한 뒤마의 전기 작품들은 뒤마가 절대 다수를 스스로 쓰고, 보조 작가 한 명이 붙어 있었을 뿐이라서, 이 경우에는 맞지 않는다. 또한 그 보조 작가는 이후 작품의 권리를 주장했으나, 프랑스 법원에서 작품에 미친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15] 페이지를 빨리빨리 넘기게 하는 재미있는 소설. [16] 출처는 산세이도에서 나온 뒤마 전기. [17] 애초에 그저 그런 당대의 인기 상업작가였다면 그가 프랑스의 위인들만 안장되는 팡테옹에 안장될 리가 없다. [18] 당대에는 인기 대중소설가였지만 시대가 지나도 잃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 소설 덕분에 대표 고전 작가 중의 하나에 반열에 올랐다는 점. [19] 그나마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는 주인공의 옛 고용주이자 은인이 나폴레옹 지지자이고 주인공도 나폴레옹을 '폐하'라고 부를 만큼 그럭저럭 우호적인 편이지만, 결국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14년간 감옥에서 개고생을 하게 된 것도 따져 보면 나폴레옹의 편지 탓이다. [20] 삼국지연의는 최주요 인물과 사건의 경우 절대다수가 엄연히 실제 역사를 토대로 저술되었다. 약간의 허구를 가미한 수준. [21] 프랑스에서만 이런 식의 원고료 책정을 했던 것은 아닌지라, 유럽의 대문호 칭호를 듣는 작가들이라면 으레 비슷한 일화가 한둘씩 붙어 있다. 도박중독으로 인한 생활고로 고생했던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은 이 이유 때문에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고(반면 부유한 귀족이라 돈 문제에 시달리지 않았던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확연히 짧다.), 어릴 적 겪었던 가난에 한이 맺혀 후일 성공해서도 편집증에 가깝게 돈을 모아댔던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걸작 두 도시 이야기 역시 정확히 똑같은 이유로 분량이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런 행수 늘리기로 제일 악명 높은 것은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워털루 전투 장면. 안그래도 무겁고 진지한 내용을 더럽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위고에 비하면, 원고료 더 타먹으려고 장황하게 옆길로 새긴 해도 보는 재미 자체에는 충실한 뒤마는 차라리 양반(...)이라는 평도 있다. 후대 사람들이 이런 일화들을 들면서 '거장에게는 돈이 즉 영감의 근원'이라는 농담도 할 정도. 물론 부유한 귀족으로 돈 문제에 자유로웠는데도 엄청 긴 작품들을 쓴 레프 톨스토이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22] 사진에 나오는 비단에 있는 문구는 Tous pour un, un pour tous(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삼총사를 상징하는 그 문구다. [23] # [24] 출처 [25] 출처 [26] 출처 [27] 출처 [28] 출처 [29] 출처 [30] 출처 [31] 출처 [32] 출처 [33] 출처 [34] 출처 [35] 참고로 동서문화사 월드북(양장본)에는 삽화가 없고, 세계문학전집(반양장)에만 삽화가 있다. [36] 민음사의 이규현 역은 딱딱한 직역, 시공사의 김석희 역은 부드러운 의역이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힌다. 삽화는 시공사판에만 있다. [37] 영어 제목은 The Three Musketeers [38] 여기서 파트 3만 따로 뗀 것이 철가면이다. [39] 영어 제목은 The Count of Monte Cristo. [40] 여왕 마고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마고는 왕비이지 여왕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왕위 계승과 관련된 법인 살리카 법에 의해 여성은 왕이 될 수 없었다. 프랑스어 Reine 이나 영어 Queen 을 '여성 군주(여왕)'으로만 해석해서 생긴 대표적 오역 사례. [41] 영어 제목은 The Black Tulip. [42] 1/4 혼혈이다. [43] 인도 대마초 [44] 뒤마의 부친인 토마알렉상드르의 모친이 흑인이었다. 그래서 뒤마는 콰트로(쿼터)이다. [45] 위 초상화도 그렇고, 똑같이 흑백 쿼터혼혈인 앤드류 테이트 라이언 긱스만 봐도 일반적인 백인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이목구비나 두상 등은 평범한 백인들과 다른 점이 많아 구분이 쉬워서 백인들끼리는 대번에 구분한다지만, 최소한 해당 이미지처럼은 아니다. [46] 프랑스 역사학자 알랭 드코가 1971년 '알렉산드레 뒤마 협회"를 설립했다. 현재 이 협회의 회장은 클로드 쇼프이다. 이 협회를 만든 목적은 이 협회가 뒤마가 건설한 성이자 현재 이들이 위치하고 있는 몽테크리스토 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회의 다른 목표는 뒤마의 팬들을 모으고, 몬테크리스토의 문화 활동을 발전시키고, 뒤마에 관한 책, 원고, 사인 및 기타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