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21:45

손학규/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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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투신 이전2. 정치인 경력
2.1.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2.2.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2.3. 2014년 재보선 낙선과 정계 은퇴2.4. 정계 복귀 관련 설왕설래2.5. 정계 복귀2.6. 바른미래당 대표2.7. 민생당2.8. 4번째 대선 출마 선언과 사퇴2.9. 윤석열 대통령 집권 이후

[clearfix]

1. 정치 투신 이전

1947년 11월 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1]에서 아버지 손병화(孫炳華)와 어머니 양현자(梁顯子)의 4남 3녀 중 막내[2]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다가 초등학생 때 서울 사대문 안으로 이사갔다.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에서 교편을 잡던 아버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렵게 자랐으나,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경기중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참고로 경기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시절에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던 이력도 있다.

이후 '65학번 삼총사'로 불리게 되는 대학 동기 친구들 김근태, 조영래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 및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정학을 당하기도 했고, 특히 사카린 밀수 사건을 극렬 비판하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아 정선 함백역 일대의 탄광촌에서 광산노동자로 숨어 지내기도 했다.

한편 4학년 재학 중인 1969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1972년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

졸업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3] 박정희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유신 정권하에서는 늘상 수배중이었던 상태여서 결국 1978년 어머니의 장례식에 몰래 참석하려다가 붙잡혀 또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진상 조사를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박정희 저격당하면서 가까스로 풀려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80년 그의 노동운동을 후원하던 NCCK의 도움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을 떠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7년 귀국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원장이 되어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했다.[4] 1988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90년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 최장집 교수 등의 진보적 소장학자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

보다시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학계를 모두 경험했다는 게 그의 정치적 강점이었다.

종교는 개신교( 장로회)이며, NCCK 계열의 운동에 투신한 전력을 미루어 보아 장로회 중에서도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출신으로 보인다.[5]

2. 정치인 경력

2.1.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1993년, 김영삼의 제안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99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명시 국회의원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명시 을 선거구에서 재선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1998년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임창열 후보에게 패배했다.[6] 손학규가 떠난 광명시 국회의원직은 재보궐선거를 통해 한나라당에서 전재희 시장이 후보로 나섰지만, 끝내 새천년민주당 조세형이 당선되며 결과적으로 여당에게 1석을 더 헌납한 모양새가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직이었던 조세형 후보를 꺾고 3선에 성공, 광명시 국회의원직을 탈환했다. 하지만 복귀 2년 만인 2002년에 국회의원직을 또 사퇴하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여, 이번에는 경기도지사로 당선되었다.[7]

참고로 이 노무현 정부 시절 당시, 한나라당의 3인방으로 불리던 인물이 이명박, 손학규, 박근혜이다. 이들에 이어 이명박, 손학규와 친한 이재오도 언급되기도 했다.

2006년 김문수에게 경기도지사 자리를 넘겨주고[8], 이명박, 박근혜와의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초기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100일 민생 대장정"을 진행했는데, 5년 뒤 2탄 격인 희망 대장정을 다시 선보일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표어가 "경제 대통령 이명박, 민생 총리 손학규, 책임 당대표 박근혜"였을 정도로 당내에서 대중적 지명도는 높은 상태였다. 그러나 상도동계 인사 대부분+한나라당 內 수도권/PK계 중도보수 인사들 및 소장파 인사들[9]이 이명박을 지지하면서, 손학규의 경선 승리는 일찌감치 물건너갔다. 실제 손학규의 탈당 시 동반 탈당자는 많지 않았다.[10][11]

도지사 출신 유력 정치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딜레마인데, 잘 수행하면 국정 운영 능력이 검증됐다고 평가받지만, 원내를 떠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원 장악력이 떨어지며 당내 기반은 약해진다. 때마침 김근태 등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손학규에게 함께 분열로 자멸해가던 여권을 재편하자고 요청했다. 김대중 역시 자신의 햇볕정책을 추종하는 행보를 보였던 손학규가 참여하는 여권 재편을 지지했다. 결국 손학규는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여권 재편에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에 이명박은 손학규에 대해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나가도 추운 데 나가는 것”이라면서 “정치판이 원래 시베리아 벌판이고 나도 바람을 많이 맞고 있지 않나”고 말했고, 손학규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간다, 나간다 하는 사람은 결국 나가지 않는다. 정말 나가려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 법”이라 답했다. 이에 손학규 측에서는 “우리는 '나간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남의 어려운 처지를 빗대서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았더라면 자연스레 현 시점의 대권 후보로 각광받지 않았을까 전망하는 시각이 있었는데, 사실 친이계한테 지지세에서 열세로 돌아섰고 친박계에게도 밀려난 '적대' 당한 손학규가 한나라당에서 버티는 선택을 했더라도 홍준표처럼 범친이계로 편입하지 않는 이상[12] 버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을 거란 추측이 더 합리적이다. 변절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꽤 보수화됐다고 평가받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새누리당 내 입지가 어떤가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전향한 케이스가 아니라도 원희룡 같은 경우 커리어상 한나라당 대선 후보군에 들만 했으나 당내에서 전혀 힘을 못 쓰고 있다. 손학규와 이명박, 이재오는 6.3 항쟁에서 같이 한 전력이 있다고 하나, 당시 손학규와 이명박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각 파벌의 영수였기 때문에 손학규가 친이계라는 이명박 밑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이명박의 시베리아 발언만 봐도 알수 있듯이 당시에 이명박 계파의 손학규에 대한 견제는 심했다.

다만 손학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끝까지 완주하여 이명박과 손학규,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었다면, 수도권에서 이명박이 얻었던 지지를 상당 부분 잠식하면서 TK보수층과 민정공화계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박근혜가 경선에서 승리하고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어쩌면 알려지지 않은 이명박 당선의 일등 공신일지도 모른다.

2.2.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결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13]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교감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4] 정계 입문도 원래 김대중의 민주당으로 하려고 했으나,[15]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3당합당의 주역이긴 하나 김대중과 함께 반독재 항쟁을 주도했던 김영삼의 당에서 정계에 데뷔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막상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당내 경쟁자들로부터 출신을 이유로 공격받았다. [16]

결국 대권 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배했다. 손학규는 정치 커리어 내내 지지기반이 될만한 지역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지지율을 10프로도 벗어나기 힘들어 했다. 그가 인기가 좋았던 건 오로지 인간적으로 잘 알던 이너서클에 한정되었다. 이와 같은 경력은 야권 정치인 손학규에게 굴레가 되어 내내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후 통합민주당의 초대 당대표가 되었으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출마했다가 종로에서만 3선에 성공한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게 패배하고, 당 또한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 강원도 춘천시의 모처에서 칩거했다. 손학규가 정계를 떠나 있던 기간은 민주당이 '뉴 민주당 플랜'을 위시해 상대적으로 우경화를 내세웠지만, 2008년 촛불집회 이후로 지지층의 흐름이 바뀌자 무상급식 전면화, 대학등록금 인하, 남북평화협정 전환, 생활형 밀착정책을 내새워 2010년 지방선거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만에 빠져 제대로 포지셔닝을 하지 못했고 2010년 7월28일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당한다.

이에 2년만에 칩거를 깨고 2010년 10월 인천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다시 당대표로 선출되어 보편적 복지,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17] 정계에 복귀한다.

정계 복귀 이전 100일간의 '희망 대장정'에 나서서 전국 방방곡곡의 민심을 둘러봤는데, 이때 손학규가 만들어낸 몇몇 재미있는 짤방들이 ' 손학규의 대모험'이라는 시리즈로 묶이며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손학규 대표 취임 이후 무상복지 3+1(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반값등록금)을 내세우는 등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고, 한국노총과 연대를 추진하였다. 오히려 민주자유당 출신이라는 과거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진보적인 정책을 밀어붙였다는 견해도 있다. 손학규 대표 당시 민주당이 모델로 삼은 건 영국의 노동당이었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해당 지역구는 '경기도의 강남'으로 불리는 보수정당의 강세 지역으로, 민주당에는 거의 사지로 분류되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분당대첩'으로 불리면서 화제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오세응 후보가 당선된 이후 20년간 한나라당계 정당이 의석을 독주하던 곳인데다가, 상대 후보도 유력 정치인이었던 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였다. 결국, 강재섭은 이 패배를 계기로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다.

거의 반강제로 출마했으나, 기적적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를 두고 손학규의 영향력 약화를 위해서 정동영계에서 사지로 밀었다가 당선되면서 영향력만 늘었다는 평가들이 많이 나왔다. 야권 차기 대선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등, 이 때까지가 민주당 대표 손학규의 리즈 시절이자 황금기였다.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무상급식 시행을 두고 실시했던 주민 투표가 개표되지 못하며 사임하면서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가 이뤄지게 되었다. 무소속의 안철수, 민주당의 박영선의 대결 구도로 보였던 야권 단일화 구도는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양보하며 요동쳤다. 이후 벌어진 단일화 투표에서 박영선이 패배,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간판이 보이지 않게 되자 대표인 손학규의 책임을 묻는 당내 여론이 제기되었다. 손학규는 열심히 박원순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선거 결과는 박원순의 승리로 끝났으나, 안철수라는 강력한 후보자가 야권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민주당은 문재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통합당과 합당하면서 민주통합당이 출범하였고, 손학규는 당대표직을 사임한다.

민주당 내 반대 인사들을 누르고 야권통합을 강경하게 밀어붙인 인물이 바로 손학규였다. 다만 통합하면서 통합 지분을 시민통합당 측에 거의 퍼주다시피 하면서 범친노세력이 매우 강성해졌고 이후 전당대회 등을 거치며 본인의 영향력은 쪼그라들다시피 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다시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에 도전장을 내었지만,[18] 손학규는 정책이나 슬로건이 좋다는 평만 들은 채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2위로 경선을 마무리했다. 자세한 사항은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 문서 참조. 이후 슬로건을 양보하기도 했지만 막상 쓰이지는 못했다.

2.3. 2014년 재보선 낙선과 정계 은퇴

대선 직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을 받아 독일로 건너갔다가 2013년 9월 귀국했다. 독일에서 온 손학규 대표의 편지. 이때 2013년 하반기 재보궐 선거 일정과 맞물렸기 때문에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2014년 7.30 재보선에 또다시 '지도부 책임론'의 일환으로 경기도 수원시 병 지역구(수원시 팔달구+ 권선구 서둔동)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이 지역은 무려 50여년 간 새누리당계 정당의 텃밭으로, 전임인 남평우 - 남경필 부자가 2대 24년에 걸쳐 뿌리내린 곳이었다. 분당 저리가라 해야 할 정도의 험지였던 셈이다. 더군다나, 당에서 너무 대놓고 전략공천을 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포로 출마했다는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19]

결국 45%의 득표율을 기록해 52.8%의 득표율을 기록한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2014년 7월 3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라남도 강진군 만덕산에 칩거했다.[20]

2.4. 정계 복귀 관련 설왕설래

"은퇴하신 게 아니라니까요! 정치를 은퇴했으면 저처럼 아파트에 살아요. 왜냐하면, 정치를 은퇴했기 때문에 이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야 된다든가 이런 거 할 필요가 없잖아.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편하게 살면 돼. 와이프한테 잘 해 주면서." - 유시민[21]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4.29 재보궐 선거에서 전패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지도력이 손상되자, 친노무현계에 대응하는 야권 리더로서 차기 대선 주자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안철수 의원 등 비노계의 여러 의원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야권 재편이 가시화되자, 야권 대선 주자로 평가받는 손학규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기자들이 강진에 찾아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선거가 다가오자 야권에서 손학규 행보만 쳐다보는 행태를 다시 보이자 김부겸 전 의원이 한 소리 했을 정도였다.[22]

20대 총선 기간 중인 2016년 3월 30일, 측근으로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이찬열 의원( 경기도 수원시 갑)과 김병욱 후보(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를 격려 방문했다. # 총선 후 정계 복귀의 신호탄이라고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방문 당시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보다 광범위한 지원 유세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사양하며 곧바로 강진으로 내려갔다.

비단 더불어민주당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의 여러 후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송태호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장을 대신 보내서 김성식 전 의원을 도운게 대표적인 예.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손학규 전 지사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뿌리인 호남에 칩거하면서 양쪽의 러브콜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것은 20대 총선에서 양당이 참패해 문재인 - 안철수 두 마리 용이 사라지고 나면 19대 대선에 출마할 마땅한 후보가 없게 되니[23] 그때 자신이 나서서 사실상 추대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행보라고 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설령 당내 세력 기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그 약점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종인 대표가 20대 총선 지원 유세에 힘을 보태달라고 도움을 청했을 때에도 손학규 전 지사는 끝내 동참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얻어 보란듯이 부활에 성공했고, 국민의당도 38석을 얻어 제3당으로서 견고한 위치를 점했다. 이에 따라 두 야당의 간판 대권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모두 입지가 더 튼튼해지는 반전이 일어났다.

특히 '나는 정계를 떠난 몸이다'라는 이유로, 중요하고 또 중요한 20대 총선에서 당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던 탓에, 나중의 명분 싸움에서도 ' 총선에서 좀 도와달라고 했을 때에도 정계 은퇴했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총선 이기고 대선 시즌 오니까 정계 복귀를 하냐'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게 됐다.

한 마디로 ' 최고의 타이밍을 노리다가 마지막 버스마저 놓쳐버린' 꼴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총선 후 한 달 여가 지난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36주기 기념식에서 "정치의 새 판을 짜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를 두고 언론과 정계는 '사실상의 정계 복귀 선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민주 최강의 대권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가 굳건한 당내 입지, 여론조사 선호도 1위에도 불구하고, 정작 야권의 심장부인 호남에서 지지세가 약화된 점을 파고들겠다는 계산인 걸로 보인다.

이를 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김홍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 교수는 "국민들께서 이미 20대 총선을 통해 새로운 판을 짜 주셨는데 무슨 새 판을 또 짠다는 것인가?"라며 손 전 지사에게 쓴소리를 했다. #

"손학규의 구차한 '셀프 복귀'"(주간동아 2016.6.1)

정계 복귀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본인의 평생 소망이었던 대권을 잡기엔 명분 싸움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처한 지라 이렇게 한 번 찔러보기만 하고 결국 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국민의당에서 그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친안계(친 안철수계)에게 눌려 있었던 호남계가 안철수라는 대권 주자가 구심점으로 서 있는 친안계와는 달리 자신들은 이렇다 할 대권 주자가 없다는 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손학규 전 지사를 데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호남계의 리더격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은 손학규 전 지사에게 ' 더민주에 계속 있으면 친노 & 친문에게 눌려만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손 전 지사를 데려오고 싶다는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간 호남계는 대권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당권도 안철수 측에게 거의 다 내준 상태였는데, 김수민& 박선숙 리베이트 사건이 터져 안철수& 천정배 체제가 붕괴되고 박지원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자 당권을 장악할 기회를 잡게 됐다. 당권을 잡았으니 이제 대권에서도 욕심을 내볼 만한 형편이 된 것이다.

하지만 호남계에는 경쟁력 있는 대권 주자가 한 명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한데, 민주당 쪽에 가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대표적으로 정세균이었다. 박지원 본인은 또 너무 고령일 뿐더러 구시대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전남 강진에서 칩거 생활을 하며 겉으로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본인 고향도 아닐 뿐더러 더민주 국민의당의 뿌리이기도 한 호남에서 칩거하며 '백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남긴 손학규 전 지사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여하튼 국민의당의 끈질긴 구애에도 손학규 전 지사는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는 정확한 상황판단을 내린 거였다. 국민의당 대선 주자는 사실상 안철수로 정해진 상황에서 손학규가 가봤자 또 민주당 때처럼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을 공산이 컸었다. 정치 관련 발언이라고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광주 세계 웹콘텐츠 페스티벌 개막식에서 손 전 지사와 만나 "서울로 올라오셔야죠"라고 인사하자 "이제 올라가야죠"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2016년 9월 20일, 전남 강진군 군민 초정 강좌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던지겠다며 정계 복귀성 발언을 하였다. #

2.5. 정계 복귀

2016년 10월 20일 드디어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며 공식적인 정계 복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탈당[24]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명운이 다한 6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제7공화국 시대를 여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밝혔다. 즉, 개헌론을 꺼내든 것이었다.

그런데 4일 후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꺼내며 관심을 가져가는가 했으나... 그날 저녁 JTBC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가 나가며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손학규가 정계 복귀와 함께 더민주를 탈당하자, 대표적인 손학규계 의원 중 하나인 이찬열 의원도 다음날인 21일, 더민주를 탈당하였다.[25] 하지만 다른 손학규계 의원들의 탈당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11월 1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파동으로 인해서 거국중립내각 국무총리로 하마평이 되자 손학규 "여야 합의된 거국내각이면 총리 수용" 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 국무총리로는 김병준이 내정되었다.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제 3차 담화에 대해 손학규 "野, 朴제안 무조건 거부하면 안돼" 라면서 거국내각부터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네티즌들한테 큰 비난을 받고 있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표로 가결되면서 자신과 가까운 김성식 의원이 있는 국민의당에 입당할지, 이재오를 중심으로 하는 늘푸른한국당 창당에 참여할지, 아니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개헌을 매개로 할 신당(제3지대)을 창당할지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는 민주당을 나온 뒤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이원집정부제 내각제로 바꿔서 대권을 잡자는 생각이었는지 '제7공화국론'을 펴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개헌론을 주창해 왔던 소위 '제3지대'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때마침 국민의당 호남계도 간선제 개헌을 주창해온 터라 이들의 러브콜을 받아서 국민의당으로 향하느냐 자신의 독립 세력을 구성하느냐가 관심을 모았다.
12월 12일 안철수와 연합할 수 있음을 밝혔다. 2017년 2월 초 '국민주권개혁회의'라는 조직을 창립하고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이것은 신당 창당에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던 안철수가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민주당과 합당하는 모양새로 민주당에 입당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기도 하다.

2017년 2월 7일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하였고, 17일 입당 기사가 떴지만 하필 당일에 이재용이 구속되었다. #

2017년 3월 1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안철수에게 밀려 2위로 탈락하였다. 경선 과정에서 제기한 이른바 독수리 5형제 프로젝트, 안철수 측 차떼기 의혹은 대선 본선에서 이른바 '조폭 차떼기 의혹'으로 불붙어 안철수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 바른미래당 지방선거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송파을 재선거 과정에서, 바른미래당 경선 결과 박종진이 1위를 차지하였으나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는 손학규의 전략공천을 계속 주장하였다. 손학규 본인은 불출마 입장이었다가 2018년 5월 24일 갑자기 마음을 바꿔 출마 의사를 피력하면서 당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다음날인 25일 불출마 기자회견을 열었고 박종진의 공천이 확정되었다.

2018년 8월 8일 정치제도, 선거제도 개혁을 내세우며 바른미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박주원 전 국민의당 최고의원에 따르면 안철수의 의중을 뜻하는 이른바 '안심'은 이미 손학규 후보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

2.6. 바른미래당 대표

2018년 9월 2일 치러진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대회에서 바른미래당의 2대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0년 민주당 당 대표 역임 이후 처음으로 당 지도부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2019년 보궐선거에서 창원시 성산구에 후보를 내고 손학규 본인도 현지로 내려가 선거운동에 나섰으나, 바른미래당 이재환 후보가 3.57%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로 낙선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 거기다 자유한국당의 강기윤 후보가 정의당과 민주당의 단일후보인 여영국 후보에게 겨우 0.54%p 차이로 패배하면서 보수정당 지지자들에게 창원시 성산구 보궐선거 패배의 한 이유로 꼽히게 되고 말았다.[26]

2019년 5월, 하태경, 이준석, 권은희(1974) 최고위원이 제안한 안건들의 최고위 상정을 거부했다. 이에 하태경은 "나이가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고 비난했고, 손학규는 "정치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며 반격했다. #

2019년 7월, 손학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전면 퇴진을 두고 내홍이 깊어지면서 주대환 혁신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혁신위가 구성되었다. 혁신위에서 '당 지도부 공개검증 안건'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고 표결을 통해 상정이 의결되었으나, 이에 반발한 주대환 혁신위원장과 혁신위원이던 김소연 시의원이 사퇴하면서 입지가 더욱 좁아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대환 혁신위원장은 손학규계와 가까운 인물이어서 당권파가 추천한 인물인데 무책임하게 사퇴하였고 표결에서도 오히려 손학규계가 추천한 혁신위원 쪽에서 공개검증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2019년 9월 유승민계 의원들이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회의'를 결성하자, '나갈 거면 빨리 나가라'고 비난했다. #

2020년 1월 3일 유승민계 의원 8명이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1월 27일에는 귀국한 안철수 전 대표가 손학규의 대표직 사퇴 및 자신을 위원장으로 한 비대위 체제 전환을 요구했다. # 물론 손학규는 안철수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오너가 CEO 자르듯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당했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 결국 안철수 또한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고 신당 창당을 선언하면서, 손학규와 결별하게 되었다.

2월 3일 주승용, 김동철, 김관영 의원 등이 손학규에게 "10일까지 퇴진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통보했다. # 설상가상으로 최측근이었던 이찬열 의원까지 2월 4일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으로 가게 되면서 바른미래당은 손학규만 남은 채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커졌다. #

결국 대안신당·민주평화당과의 합당을 결정하고, 2월 21일 바른미래당의 마지막 최고회의를 주재했다. ##

2.7. 민생당

2020년 2월 24일, 바른미래당과 대안신당, 민주평화당이 신설 합당하면서 민생당 소속이 되었다. 민생당 출범 후 한동안 잠행을 이어가던 중 민주당 이낙연 국무총리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가 맞붙는 21대 총선 종로구 출마설이 돌았으나, # 천정배 전 국민의당 대표 등 호남 지역구 의원들의 만류가 이어지자 뜻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3월 23일에는 난데없이 비례대표로 공천 신청을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 한편, 같은 날 정동영 전 민주평화당 대표가 "손학규가 배후에서 민생당의 더불어시민당 등 범진보 비례연합정당 참여 등을 저지하고 반 호남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3월 25일, 민생당의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고 그 다음날 비례대표 순번 2번을 받았다. 민생당이 봉쇄 조항을 돌파할 경우 당선 안정권에 해당하는 순위였으나 이틀 후인 3월 27일, 민생당 공관위가 비례대표 순번을 조정하여 14번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4.15 총선에서 민생당은 당선자 0을 기록하면서 의석을 한 자리도 건지지 못하면서 원내에서 처참하게 소멸하였다. 손학규는 4월 16일 선대위원장 임무를 마치면서 모든 책임을 질 것임을 시사하였다. 나이도 이제 어느덧 70을 훌쩍 넘긴 고령이 된지라,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났다는 의견이 대다수다.[27]

그러나 8월 7일, 본인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의 3대 이사장으로 취임[28]한 것이 확인되면서 정계은퇴의 뜻은 없는 걸로 밝혀졌다. 아마 대선에 출마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이사장 취임사

2.8. 4번째 대선 출마 선언과 사퇴

그런데 2021년 11월 28일, 리서치뷰에 따르면 29일 2시 30분에 손학규가 대선 출마 선언을 할 수 있다고도 한다. # 그리고 실제 출마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 네티즌들은 농담으로 내일 또 무슨 대형사고가 터질까 하고 있다.

11월 29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출마를 선언하며 "개헌으로 87년 체제를 청산하겠다"며 정치 개혁을 첫 번째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회 중심의 연합정치라는 새로운 길을 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대 양당제는 갈등과 분열, 대립과 투쟁만을 조장할 뿐"이라면서 "다당제 국회로 바꿔 싸우지 않는 국회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 또한 "제 출마에 대한 온갖 비난과 조롱을 안고 가겠다"라고도 밝혔다.

과거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후보로, 18대 대선에서는 민주통합당의 경선 후보로 나섰지만 모두 2위로 패배했고 19대 대선에서는 국민의당의 경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안철수 대표에게 또 다시 2위로 패배한 후 이번이 4번째 대권 도전이다. 4번째 만에 드디어 처음으로 본선에 출마하는 것이기는 하나 줄어든 정치적 영향력[29], 고령의 나이 등으로 봤을 때 유의미한 득표율을 얻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

지난 2016년에도 정계 복귀 선언과 함께 당시 소속 정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바 있는데, 이번에도 민생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민생당으로 출마했으면 TV토론 출연을 노리거나 민생당이 쌓아놓은 돈이라도 선거비용으로 펑펑 쓸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주요인사들이 다른 당의 후보를 지원하거나 탈당을 준비하는 등 거의 망해가는 민생당의 후보로 나오느니 무소속으로 나오는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한듯 하다.

하지만 2022년 1월 27일, 정체된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하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마저도 같은날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에 묻혀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2.9. 윤석열 대통령 집권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양측 후보의 지원 유세에 참여하는 등 그나마 중립적인 스탠스로 활동했다.

이후, 앙숙 중 하나인 이준석 6개월 당원권 정지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자 홍준표 대구시장이 손학규를 언급하며 이준석을 비꼬았으나, 정작 본인은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후 2023년 12월을 거치면서 염색을 하지 않은 백발의 모습이 되었고 이준석과 어찌저찌 서로 감정이 풀어졌고 이재명의 비례대표 정책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에도 나왔다.

22대 총선에서는 당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돕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양승조 후보를, # 국민의힘에서는 최재형 후보와 김병민 후보, 이정현 후보를 찾아가 찬조 연설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낙선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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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3년 서울시로 편입. 그러나 손학규 본인 서울 출신이라는 지역 정체성보다는 경기도(시흥) 출신이라는 지역 정체성이 강했기에 선거 홍보용 책자에서는 출생지로 줄곧 ' 경기도 시흥'으로 표기했다. 자신의 고향이 서울로 편입된 시기가 그의 유년기가 아닌 청소년기이기도 하고 경기도에서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지냈기에 경기도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정작 경기도 시흥시는 원래 시흥이었던 곳을 잃어버리고 확장된 곳만 남은 지역이다. 시흥시 문서 참조. [2]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손학규 일가 족보.png [3] 이때 같이 활동하던 사람이 소설가 황석영, 도시산업선교회의 박형규 목사. [4] 이 시기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5] 언론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인 서울제일교회 집사로 보도하고 있다. [6] 참고로 낙선 후에 잠시 미국 워싱턴 D.C.에 거주하였는데, 이 때 이명박, 홍준표를 만나며 사이가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붙은 별명이 워싱턴 오리알 3인방. [7] 여러가지 변수가 모두 작용했다. 국민의 정부의 레임덕, 대통령 세 아들의 비리연루, 월드컵으로 인한 젊은 층의 투표율 저조, 전임 도지사인 임창열의 구속과 도정마비(심지어 옥중결재까지 해서 비판여론이 컸다.) 등이 손학규에게 더 유리하게 해주었다. [8] 이 때 김문수 지사의 지역구를 이어받은 김문수 최측근이 바로 차명진(...). [9] 거기다가 계속 한나라당 내 소장파로 분류됐던 남경필 등의 인사들도 당시에는 이명박을 강력 지지선언하기까지 했었다. [10] 이찬열 의원의 경우, 2009년 재보궐선거까지 의원이 아니었다. 한편, 2007년 당시엔 의원은 아니었지만 18대 총선에서 당선 된 김성식 의원의 경우는 탈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손학규 보좌진들이 경기도 부지사를 지낸 손학규의 오른팔인 '성식이형'이 함께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의문을 표했을 정도. [11] 김성식 의원의 경우 이후 개혁보수를 추구하다가, 2012년 탈당 후 제3정당으로서의 안철수 신당에 2014년 합류해서 국민의당, 바른미래당을 거쳤으나 새정치민주연합이나 민생당으로 합류하진 않았다. '양당 정치 극복'이라는 자신의 대의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고, 그 점에서 아예 민주당으로 건너갔던 손학규의 비전과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2] 사실 홍준표도 2007년 경선 나간 것도 고대 직속선배이자 워싱턴 오리알 동지였던 이명박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이명박 네거티브 대응 일당백을 가장 앞장서서 담당했던 것으로 봐선 홍준표도 진성 친이계인사다. [13] 이때 전진코리아라는 정치조직이 그를 지지해서 주목을 받았다. 건국대 최배근 교수 ,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고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후 흡수되었다. [14] 애초에 경력 자체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두루 거치며 김근태에 버금가는 야권의 성골에 해당하기도 했고, 정견상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거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여정부로부터 상처를 꽤 많이 받았던 대북송금특검 당시, 손학규가 소속 정당이 달랐음에도 특검 철회를 주장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인 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15] 실제로 14대 대선 이전 91년 겨울 손학규는 자신의 서강대 강의에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를 특별 강사로 초빙해 강연을 연 적도 있었다. [16] 창당을 주도했으나 정작 민주당계 대선후보들은 그를 처음부터 별로 반기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 이는 지금까지도 손학규를 공격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17] 교수 시절 최장집과 교류했다는 기술을 보았을 텐데, 이 역시 최장집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최장집은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손학규를 지지한 바 있다. [18] 당시 박근혜 후보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를 각각 선거 구호로 내세웠다. [19] 그런데 훗날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후보가 53.9%의 득표율로 입성하고, 21대 총선에도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아마 재보궐에 김영진이 출마했다면 경합이 나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재미있는 건 김영진은 수원 병을 손학규에게 빼앗기고 난 뒤 자신의 모교인 중앙대가 있는 동작구 을 출마도 타진했으나 무위로 돌아간 적이 있다는 거다. [20] 후술하겠지만 차라리 칩거만 하고 은퇴 선언을 안했다면 분명 재기의 여지는 생겼을지 모른다. 정계 은퇴 후 번복으로 인해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1] 썰전 160회(2016년 3월 31일 방영)에서 손학규 은퇴와 관련해 한 발언으로 출연진 모두가 이 말을 듣자마자 수긍한다. [22] 사실 김부겸도 따지고 보면 한나라당 출신 딱지 떼려고 사지인 대구광역시에서 박박 기고 있는 상황이니 동병상련이 생길 만한 상황이다. 그나마 김부겸은 이제 꽤나 대접 받고 다니고, 문재인이 19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행정안전부 장관을 거처, 국무총리까지 오르는 거물이 된다. [23] 물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이 있지만, 모두 중요한 광역단체장 자리들을 맡고 있다. 대선 출마를 위해 직책을 희생할 경우 운이 나쁘면 경남도지사 사퇴 후 긴 침체기를 겪었던 김두관 의원 꼴이 날 수도 있다. [24] 탈당 자체는 뭔가 계산에 따른 행보라기보다는, 애초에 지원 유세를 거부했는데도 더민주가 승리한 시점에서 더민주에 손학규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25] 당초 한나라당 소속이었다가 손학규를 따라 옮겨온 사람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의 탈당 면담은 정치 사상 어느 탈당자 면담보다도 훈훈했다고 한다. 손학규의 행로가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찬열의 탈당이 오랜 손학규와의 인연을 고려한 '의리'의 행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추미애 대표는 '손학규 고문을 업고 다시 들어오라'라고 덕담을 건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탈당이었고 이찬열 의원은 결국 바른미래당을 거쳐 4년 뒤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으로까지 당적을 옮기게 된다. [26] 하지만 해당 선거에서의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 패배는 바른미래당 이재환 후보의 완주 탓으로 보기 애매하다. 이재환 당시 후보는 2020년 현재 미래통합당의 당원이지만, 2016년 총선 때만 해도 바른정당과의 합당 이전이어서 민주당계 정당이었던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던 인물이었다. 명확한 보수후보로 볼 수 있느냐부터 확실치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정치색에서 확고한(?) 보수인 대한애국당 진순정 후보가 여영국-강기윤 간 표차보다 0.35%가 높은 0.89%를 득표했다. 대한애국당 지지자들의 정치성향이 자유한국당보다 더 오른쪽이어서 사퇴한다고 창원 성산 재보선 당시 후보를 낸 다른 정당이었던 민중당, 정의당, 바른미래당으로 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하면, 강기윤 후보의 당선은 바른미래당 후보와 관계없이 대한애국당 후보만 사퇴했거나 단일화했어도 가능했던 것이다. [27] 이전의 일선 후퇴와는 상황이 다르다. 우선 민생당이 한 석도 못 건진 데다가 손학규는 현재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졌다. 계파도 와해되었으며, 과거 본인의 지지 기반이던 경기 광명도 이제 본인이 두 번이나 박차고 나온 민주당의 텃밭화가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광명시는 경기도에서 민생당이 3% 이상 득표한 단 3개 밖에 안되는 지역구 중 하나였다. [28] 그동안 상임고문을 맡아왔지만 이사장을 맡은 건 처음이다. [29] 손학규계 주요 인사로 분류되었던 정치인 대부분이 이재명계로 들어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