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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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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1.1. 모계의 의문1.2. 태자가 되다
2. 치세와 백제 중흥
2.1. 즉위2.2. 신라 공격과 대야성 함락2.3. 당항성 공격2.4. 신라와의 혈전2.5. 당과 단교2.6. 백제 중흥
3. 말년의 실책
3.1. 사치3.2. 왕후의 전횡3.3. 지나친 왕권 강화와 충신 숙청3.4. 말년의 실책들에 대한 반론
4. 백제의 멸망
4.1. 멸망의 조짐4.2. 나당연합군과의 전쟁4.3. 황산벌 전투와 백강의 싸움4.4. 웅진성으로의 피난과 예상치 못한 배신4.5. 사비성 함락4.6. 삼천 궁녀 설화4.7. 예식진의 배반, 의자왕의 체포와 백제 멸망
5. 죽음과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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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품이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냈으므로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였던 증자에 빗대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1] 국내 기록뿐 아니라 중국 측 기록인 《 구당서》나 < 부여융 묘지명>에도 의자왕을 효행이 깊고, 과단성이 있으며, 성품이 고고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자왕의 유교적 성향은 당나라의 국학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무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태어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의자왕의 맏아들로 알려진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났음은 부여융 묘지명에서 확인된 바 있다. 아무리 조혼을 해도 15살 이전에 낳아서 부모가 되기는 어려우므로 600년 아버지 무왕 즉위 시점보다는 더 전에 태어났다고 보는 쪽이 옳다.

1.1. 모계의 의문

의자왕은 모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의자왕의 출생은 베일에 싸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출생의 미스터리를 지니고 왕위에 오른 무왕과 흡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를 들어 의자왕의 어머니가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더욱이 미륵사 보수 공사 중에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봉안기>에 따르면 무왕 때 '나는 백제의 왕후이며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무왕이 선화공주와 실제로 혼인했다는 것에 대해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2]

또한 의자왕의 생모가 선화공주라면 의자왕은 본인의 이모인 선덕여왕이 다스리던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이종사촌동생인 태종 무열왕과 격렬하게 싸운 것이 된다. 즉 백제-신라간의 삼국통일 항쟁은 사실상 가족 싸움이 되는 것이다.[3]

정황상 의자왕은 사택왕후가 아닌 다른 왕후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40세에 이른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태자에 책봉되었다. 의자왕의 생모가 무왕의 정비인 사택왕후라면 태자 책봉을 늦게 받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의자왕의 모계 세력이 미약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이 의자왕이 무왕이 즉위한 600년 이전에 태어났을 공산이 매우 높은데, 당시 무왕은 기반이 없어 왕위 계승권이 없는 상당한 방계 왕족에 불과했다. 이로 추측하면 의자왕은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한, 상대적으로 미천한 신분의 아내로부터 태어났으나 이후 무왕이 즉위하면서 고위 귀족의 딸인 사택왕후를 새로 왕비로 맞은 탓에 기반이 취약해졌다고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을 더하자면, 의자왕은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선화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지만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왕후가 새 왕비가 되면서 적국 신라의 피를 이어받은 의자왕의 입지가 좁아졌을 것이다. 때문에 40세가 되어서야 태자 책봉이 된 것이며, 왕실 내에서 자신을 신라의 후손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시선을 타개하기 위해 본인의 사촌이 다스리는 신라를 맹공격했을 것이다.

1.2. 태자가 되다

의자왕은 무왕 재위 33년인 632년 40세의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앞서 말한 약한 모계 혈통과 그로 인한 부족했던 뒷배경을 의자왕은 인내력과 노련한 처신으로 극복하여 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부모를 효로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로 불렸음은 그의 유교적 사상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의 처세술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지 기반이 허약했던 의자왕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품행을 단정히 하여 귀족 사회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지지를 얻고 몸가짐을 조심히하여 함부로 주위에 정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4][5]

한편 의자왕이 늦게 태자가 된 것을 무왕의 왕권 강화책 때문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왕이 일부러 태자 책봉 시기를 늦추면서 귀족 세력 간의 분쟁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더욱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6]

2. 치세와 백제 중흥

2.1. 즉위

641년 3월 무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에 당태종은 사육낭중 정문표를 백제로 보내 의자왕을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柱國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했는데 이로써 의자왕은 정통성을 확보했다. 641년 8월 의자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사의를 표하고 방물을 바침으로써 자신이 백제의 왕이 되었음을 사방에 알렸다.

642년 정월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해동증자'라는 평에 걸맞게 유교적 정치 사상을 강조하며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썼다. 642년 2월 의자왕은 궁성에서 나와 여러 주(州)와 군(郡)을 순무하고 죄수를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하는 등 민심 수습에 나섰는데 유교적 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즉위한 뒤에는 관산성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에 개혁을 단행했는데 642년(의자왕 2년) 제왕자(弟王子: 손 아래의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모매여자(母妹女子 :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의 딸)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 명을 외딴 으로 추방해버린 사건이 그것이다. 다만 이 사건이 642년이 아니라 655년(의자왕 15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아래의 항목에서 자세히 후술하였다.

위와 같은 조치로 인해 귀족 세력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보다 강화되었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나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도 이때의 정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유력하게 점쳐지는 부분이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 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국에 소홀해진 외교 태도가 660년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2.2. 신라 공격과 대야성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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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무왕 대에 걸쳐 백제가 확장한 영토[7][8]

민심 수습에 나서 나라의 형편을 살핀 의자왕은 마침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 정벌에 나섰다. 당시 왕의 자질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 중 하나가 외부의 적과 싸워 이기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의자왕은 신라 정벌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드높이려 했던 듯하다. 무왕만 해도 수차례 신라와 싸워 이겨서 영토를 넓힘으로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642년 7월 의자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를 쳐서 낙동강 서편에 위치한 미후성 등의 40여 성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왕이 직접 지휘하였던만큼 그 군세가 크며 대대적인 정벌전이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가 점령한 옛 가야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 때부터 크게 보면 오래 전 근초고왕 때부터 꾸준히 시도해왔던 가야에 대한 영향력 회복의 숙원을 이룬 것이다.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대야성 공격하게 했다. 오늘날의 경상남도 합천군에 위치한 대야성은 신라가 옛 가야 지역을 통치하던 거점이자 신라의 내륙 지방으로 통하는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당시 대야성의 중요성은 성주가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 사위 김품석이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윤충은 대야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겨 불만이 크던 막객 검일과 내통하여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김품석, 그의 아내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 및 자식들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시신은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으로 보냈다.[9] 이에 의자왕은 공로를 치하하여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물 1천 석을 상으로 내렸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임을 당하자 신라가 머리를 관청 계단에 묻고 위를 밟고 다니게 하여 백제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고 했는데 의자왕이 성왕 위덕왕의 원수를 갚은 셈이다. 다만 90여 년 전의 복수를 하고자 김품석과 고타소의 목을 베었는지 다른 정치적 이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처럼 재위 초기의 의자왕은 내부적으로는 온화한 정치로 민심을 얻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백제의 숙적이었던 신라를 정벌하여 막대한 전승을 거두고 영토를 확장하며 정치적 위상을 드높임으로써 왕권 강화에 부단히 힘을 썼다.

2.3. 당항성 공격

그 이듬해인 643년 정월에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한편, 11월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체결하였다. 당시 영류왕을 시해하고 고구려의 실권자로 행세하던 연개소문은 대야성 함락 후에 찾아온 김춘추를 내치고 그 대신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로 백제와 전면 화친을 맺었다.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의자왕은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 당항성(黨項城)을 집중 공격하였다. 당항성은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위치한 곳으로, 의자왕은 이곳을 점령하여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신라의 선덕여왕은 급히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의자왕은 이를 알고는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결국 당항성 공격은 당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이는 신라가 당나라에 의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때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말갈에 의해 멸망 직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 말갈의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2.4. 신라와의 혈전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갔던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의 당에서 백제에 보낸 서신 중에서[10]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후로도 수차례 군사를 보내 신라와 전쟁을 벌였다. 싸움은 거의 해마다 일어나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피비린내나는 다툼이 그칠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644년 9월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쳐서 7개 성을 탈취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645년 9월, 의자왕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원군 30,000명을 징발하자 그 서쪽 방어선이 취약해진 틈을 타서 반격에 나섰다. 백제군은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또 빼앗았다.[11]

647년 10월에 의자왕은 장군 의직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신라의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 등 3개 성을 포위 공격했다. 이때 김유신이 병력 10,000명을 이끌고 백제군과 싸웠다. 백제군은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을 몰아붙였으나, 김유신의 수하에 있던 비녕자와 그 아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며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12] 이에 의직은 크게 패하여 단기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648년 3월에 의직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변경의 요거성[13] 등을 쳐서 1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백제군은 승세를 몰아 4월에 옥문곡까지 진격했으니 그곳에서 또다시 김유신의 역습에 당해 패하고 돌아왔다. 김유신은 기세를 몰아 백제의 성 20여개를 함락시켰다.

649년 8월, 의자왕은 좌장 은상을 보내 정병 7천 명으로 신라를 쳐서 석토성 등 7개 성을 빼앗았다. 이에 신라에서는 김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의 장수들로 하여금 역습해왔다. 백제군은 잠시 물러나 도살성[14] 밑에서 다시 싸웠으나 이번에는 백제군이 패하고 은상이 전사했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백제가 수차례 신라를 침공할 때마다 김유신이 이를 모두 막아냈다고 되어 있다.[15][16]

이러한 백제 - 신라의 혈전이 양적으로 백제에 대체로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백제도 신라의 급소를 치지는 못하는 소모전의 양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2.5. 당과 단교

백제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중국과 친교를 맺어 고구려를 치는 것이었다. 백제의 개로왕, 위덕왕, 무왕 등 여러 왕들이 중국(북위ㆍ수)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무왕은 약조와 달리 수나라를 지원하지 않았고, 이에 수나라가 분개하기도 했다.[17]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무왕은 당과 새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의자왕이 즉위한 후에도 당과의 외교 관계는 유효했다. 한편 당나라는 신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당태종이 신라의 왕이 여자라고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여 신라와의 외교 관계가 경색되기도 했다.

645년 당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당태종은 당시 동맹을 맺고 있던 백제와 신라에게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이에 응해 고구려를 공격한 반면 의자왕은 당의 요구를 무시하고 신라가 원정을 간 사이 병력의 공백을 틈타 신라의 측면을 침공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백제는 당의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뒷통수를 쳐서 당의 또다른 파트너인 신라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은 백제와 절교하고,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 위해 651년에 당에 1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당 조정에서는 백제 사신에게 국서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과 빼앗아 간 신라의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때 백제는 지금의 경상도 서부를 상당히 점령한 상태였고 신라에 이를 순순히 돌려주는 것은 백제 입장에서는 무리한 주장이었으므로 곧이 곧대로 따를 수 없었다. 이후 백제는 당의 관계를 거의 단절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으며 652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의자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남북조시대부터 수백년간 백제는 중국과의 외교를 중요시했는데 의자왕대에 이르어 대당 외교 포기라는 강수를 두었고, 대신 당과 적대적인 고구려ㆍ말갈에 가까워졌는데 당과 고구려는 전면 전쟁을 여러번 벌인 적대 관계였다. 백제가 고구려를 가까이 하면서 당과는 완전하게 갈라선 형세가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비록 당의 견제가 있더라도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이 번번히 고구려에게 패하는 것을 보고는 당이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돌발 행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의자왕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덕왕 때 수에게 길까지 터주겠다는 등 고구려에 대한 군사 행동을 적극 요청했지만 정작 고구려-수 전쟁에서 백제는 수의 군사적 움직임에 호응해준 적이 한번도 없었던 사례가 있다. 말로만 돕겠다 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수의 신용을 잃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사실 이는 당이 당시 백제를 호의적으로 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한데 문제는 의자왕이 한술 더 떴다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말갈의 협공에 가로막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놓인 신라는 이후 당과 동맹을 체결하여 이를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648년 겨울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태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649년 당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터무니없는 아부로 가득한 '<치당태평송>'[18]을 직접 비단에 수를 놓아 써서 보내는 등 당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위와 같은 나당동맹이 유명해 간과하기 쉽지만 사실 백제도 의자왕 이전까지는 당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27대 위덕왕과 30대 무왕이 수차례 수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위덕왕과 무왕은 수양제, 당고조와 뒤를 이은 당태종에게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할 것을 수차례 청하기도 했다.[19] 의자왕이 즉위 직후에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당에 조공사를 파견하고 작위를 책봉받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친당 기조를 유지했다. 의자왕 초기까지 삼국시대의 외교 구도는 백제와 신라가 적대하고 양국은 서로 수ㆍ 당을 자기 편으로 먼저 끌어들이려는 형태였으나 당이 백제의 원수인 신라와 더욱 친밀해지면서 백제와 당의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당시 당의 요청에 따라 신라가 고구려로 군대를 움직인 사이 의자왕은 신라를 기습 공격했고 이것이 제당 관계의 치명타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는 이미 대야성 함락의 사례도 있고 이후로도 백제가 계속 신라를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고구려에 군대를 보낸 것이라 무리를 하여 당의 요청을 들어준 셈이었다.[20]

반면 백제는 자신들의 요구를 무리하면서까지 들어준 신라를 공격하였으니 고구려의 후방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던 당의 입장에서는 신라 쪽으로 눈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645년 이전까지는 당이 보기에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 공략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후보였다면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백제는 고구려를 치는데 방해되는 존재로 시각을 바꿨을 가능성까지 존재한다. 651년부터 보이는 당의 친신라적 태도는 여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의자왕은 아예 당과 관계를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는 오히려 당나라가 백제를 고구려에 앞서 먼저 없애야 할 존재로 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내고 만다. 본래 의자왕은 부왕인 무왕과 마찬가지로 당과 고구려가 싸우는 가운데 중립을 지켜서 북변의 침공 위협을 최소화하고, 남아도는 힘으로 신라를 지속적으로 침공하여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는 기회주의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당과 신라가 대놓고 동맹을 맺자 고구려와 당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 노선을 과감히 버리고 고구려와의 동맹 체결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21]

의자왕은 653년 8월 왜에 사신을 보내 수호를 통하는 등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자세한 기록이 남은 《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의자왕이 650-656년까지 해마다 사절단을 파견했다고 했으니 의자왕 또한 아신왕ㆍ근초고왕ㆍ성왕 등 백제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왜와의 관계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특히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동해 너머 왜와의 연계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다이카 개신 이후 신라도 김춘추가 직접 왜로 건너가는 등 관계 개선 시도를 하는 정황이 보이지만[22] 결국 왜는 백제와 계속 손을 잡는 길을 선택했다. 이처럼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왜와의 관계도 강화한 의자왕은 돌궐ㆍ말갈- 고구려 -백제 -왜로 이어지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당의 개입을 차단하는 한편 신라를 계속해서 침략했다. 655년 7월에 이르러서 의자왕은 마천성을 수리하여 당과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8월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서 신라 북쪽 변경의 성 30여 곳을 빼앗는 대전과를 올렸다. 656년 4월 다시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재차 공격하는 등 신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였다.

2.6. 백제 중흥

이처럼 당시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현재의 강원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지속적으로 수복하였고, 현재의 충북과 경북 지방까지 치고 들어왔다. 신라의 서남쪽 지방도 백제가 밀어붙이면서 40여 성을 빼앗았다.

10여 년 동안 수백 명이 넘는 군사가 동원된 전투가 수십 번 벌어지는 등 제일 치열했던 전투 지역이 바로 그 당시의 경상남도 - 전라남도 지역이었다. 진흥왕 때의 영토만 보고 백제 국경선이 천안 - 경남 라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수도권 - 충주 - 광양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더 가까웠다. 신라는 간신히 한강 라인만 지킬 정도였다.

잇단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신라는 왕조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특히 당시 재위하고 있었던 선덕여왕의 무능함으로 신라 내에서도 위기감이 확산되어 비담 등의 반란까지 일어날 정도였다.[23]

물론 전쟁 과정에서 신라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 경우도 많았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군이 김제 평야까지 급습한 적도 있었으며 김유신의 활약으로 잃어버린 성 40여 곳 중 상당수를 회복하기도 했다.[24] 하지만 신라의 승리는 대개 방어전에 국한되어 있었던데다 655년 백제 - 고구려 - 말갈 연합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이후부터는 서서히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이러한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고, 나제 전쟁에서 백제가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음이 사실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백제는 의자왕 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중흥기를 맞았고, 신라는 백제에게 공세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수세에 몰려 국가적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인 무왕이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 세번째 전성기를 열고, 이는 의자왕 때 절정을 맞이했다. 세 번째 리즈 시절을 맞은 백제는 다시 고대의 영광을 되찾는 듯했으며, 신라를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3. 말년의 실책

3.1. 사치

15년(서기 655)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였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궁궐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655년 2월에 의자왕은 태자궁을 극히 사치스럽게 수리한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으며 주색에 빠지게 된다. 의자왕은 부여융의 나이를 역산하면 무왕이 즉위한 600년 이전에 태어났다.[25] 이 당시 의자왕은 60세 전후는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의자왕은 무왕이 듣보잡 왕족이었던 시절에 태어났으며, 무왕의 정비로 기록되어 있는 사택왕후의 아들이 아니라서 40세가 다 되어서야 겨우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사택왕후가 죽을 때까지 해동증자 연기를 지속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살벌한 환경 속에서 심하게 자신을 억제하고 연기하며 살다가[26] 당시로서는 이미 늙을 대로 늙은 나이에 한 번 풀어지자 주체 못하고 망가져버린 것 같다.

3.2. 왕후의 전횡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정림사지 5층 석탑 <대당평백제비명>』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 일본세기(日本世記)》[27]에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28]가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본서기》권 제26 < 제명기>

백제왕 의자(義慈), 그의 처 은고(恩古), 그 아들 융(隆) 등, 그 신하 좌평 천복(千福), 국변성(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장군(蘇將軍,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일본서기》 권 26 <제명기>

물론 왕의 부인이 여러 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은고, 대부인(大夫人), 왕후, 당고종의 질책을 들은 여인이 모두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后。太子爲虜而去
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덴노 6년, 660』
4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양국에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임금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또한 '《 한서》 <왕망전>'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은 정실 부인이면서 세자를 둔 부인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태자는 어디까지나 부여융이고 부여효는 잘못되었다고 부정하지만 신라인과 당나라 사람들은 부여효를 태자라고 여겼다.

또한 《일본서기》에 은고를 의자왕, 부여융, 그 외 좌평들이 당나라로 잡혀간 원인이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정적 숙청에 은고와 부여효가 깊게 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44년에 부여융을 태자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백제 멸망 당시 기록에는 부여융은 그냥 왕자고 부여효가 태자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이 기록 차이를 해석해 의자왕이 태자를 교체했단 설이 있다. 만약 은고가 부여효의 어머니라서 부여효로 태자를 바꾸고 대부인이 된 거라면 '왕비의 전횡'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만약 태자를 교체했다면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몄다는 기록이 있는 655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3.3. 지나친 왕권 강화와 충신 숙청

十七年 春正月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 各賜食邑
17년(서기 657) 봄 정월, 임금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백제 조문사의 종자(從者) 등이 “지난 해(654)[29] 11월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崑崙 ,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고교쿠 덴노 원년조
영휘 6년(서기 655) 을묘 가을 9월, (중략) 이에 앞서 급찬 조미압(租未押)이 부산(夫山)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에 잡혀가서 좌평 임자(任子)의 종이 되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일을 보살펴 태만한 적이 없었다. 임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도망하여 신라로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보고하였다. 유신은 조미압이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쓸 만한 인물임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나는 임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들었다. 내가 그와 의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아직 못하고 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임자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라.”(중략)
임자는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압은 두려워하며 물러나왔다. 대죄(待罪)한 지 수개월이 지나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전에 이야기한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지난번에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알려라.”
조미압이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 임자의 말을 전하고 더불어 백제의 안팎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유신은 백제를 병탄(幷呑)할 계획을 더욱 더 급히 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고금을 통틀어 변방에 나가 싸우는 군의 우두머리는 사회 지도층이었므로 전란통에 무리한 왕권 강화는 필연적으로 유능한 지휘관들을 잃을 위험성이 매우 컸다. 실제로 의자왕에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왕이 왕권 강화의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30]

의자왕이 딱히 유능한 신하를 죽인 기록은 없으나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신하를 제거한 정황이 있으니 바로 성충 투옥이다. 성충 김춘추 고구려를 들린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고구려와 신라의 밀월을 견제[31]했고 당시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을 보면 성충 연개소문, 김유신, 위징 등과 동급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성충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를 투옥한 것은 단순히 간언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권신 견제의 측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흥수 역시 좌평이었다는 기록과 백제 멸망 당시 귀양 중이었다는 기록을 봐서 이 경우에 해당할 여지가 충분하다. 흥수의 귀양 사유가 정확히 나와 있지 않고 그저 '죄를 지어'라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거니와 앞서 성충이 의자왕에게 올린 상소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 흥미로운 내용을 볼 때 의자왕 정권 초중기 왕권 강화를 위해 의자왕을 열심히 도운[32] 두 중신이 같은 시기 를 물어 벌을 받고 심지어 똑같은 주장을 의자왕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이 두 사람이 정치적 동지였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숙청당했음을 시사한다.

설령 목숨을 빼앗지 않는 비교적 온건한 왕권 강화라 하더라도 귀족들을 견제하면 불만을 품고 전란통에 충성심과 사기가 저하됨은 자명한 일이다. 국가의 토지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들에게 식읍을 내렸다면 백성들 또는 기존 귀족들의 것을 몰수하여 주었을 것이다. 전자였다면 민심 이반, 후자였다면 귀족 세력의 큰 반발을 샀을 것이다. 딱히 백제에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없고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 목숨걸고 싸운 백제 지도층의 이름이 계백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후자가 사실에 가깝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백제 귀족들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이적 행위가 발발했다. 단, 백제 멸망 당시의 대좌평 사택천복이나 사타상여를 보면 오히려 의자왕을 도운 대귀족도 있었던 모양이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 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16년(서기 656) 봄 3월,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33]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어졌다.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656년 3월에 좌평 성충이 이를 그만 둘 것을 간언했으나 이미 절대 권력에 취해 듣는 귀가 막힌 의자왕은 성충을 옥에 가두어버렸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흥수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성충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에 적힌 방어책도 역시 의자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나당연합군의 침공이 현실화되자 흥수가 성충과 같은 의견을 재차 올렸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기벌포(伎伐浦)와 침현(沈縣)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1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권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그러나 신하들은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 흥수의 계책을 써서는 안 된다."라는 의견을 냈고 이에 동조한 의자왕은 기어이 성충과 흥수의 전략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는 백제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3.4. 말년의 실책들에 대한 반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의자왕은 망국의 군주이다. 따라서 역사학의 기본인 사서의 내용들을 아주 무시하지 않으면서 승자의 입맛에 맞는 내용들을 감안하는 것이 의자왕의 진실에 대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일단 위에 나오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뜻을 풀어보면 알 수 있듯이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한 뒤 소정방이 지시하여 정벌 과정을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긴 것이다. 즉, 당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나열하기 보단 당나라의 입장에서 백제를 공격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자왕을 깎아내렸을 확률이 높다.

《일본서기》의 내용 역시 잘 살펴보면 일본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도현(道顯)이라는 인물이 쓴 《 일본세기》(日本世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도현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인이라는 언급만 몇번 있을 뿐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만 기록을 종합해볼 때 도현은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일본세기》를 작성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삼국에 대한 정보는 직접 관찰이 아니라 고구려의 사신을 통해 전해 들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대당평백제비명>과 《일본서기》 양쪽 모두에서,《일본서기》에서 '은고'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여인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요사스러운 부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뿐 아니라, 중국 쪽 사서를 많이 참고한 《삼국사기》에는 해당 인물의 언급이 전혀 없으며, 후술하겠지만 도현이나 당나라 장수들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의자왕을 봤을 성충이 옥중에서 올린 마지막 상소에서조차 방어책에 대한 얘기만 했지, 부인이나 간신들을 멀리 하라는 충고가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현이라는 인물이 전해들은 이야기가 당나라나 신라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창작 또는 왜곡시킨 정보일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의자왕의 쇠락을 알리는 첫 내용은 655년 궁궐 공사 시작이다. 이 때는 직전에 의자왕이 자신의 오랜 정적들을 크게 숙청한 정황이 보인다. 이들은 오랜 기간 백제 조정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었을 테니 백제의 내부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해졌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분위기를 전환하고 왕실의 권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화려한 건축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주인의 권위와 번성을 과시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또한 그로부터 반 년도 안 되어 마천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와 더불어 신라 공격에 나서 30여 개의 성을 함락하는 혁혁한 외교적, 군사적 성과를 거둔다. 이는 의자왕 체제가 정상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궁궐 수리가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수양제는 토목 공사와 고구려 전쟁을 병행하다 당시 초강대국의 국력을 말아먹었고, 광해군 역시 후금과의 긴장 관계에서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궁궐 공사를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민심 이반과 폐위의 이유가 되었으며, 흥선대원군 역시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재정 확보가 민심 이반과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청나라의 서태후는 이화원과 식사 등 개인 사치에 돈을 낭비하다가 정작 북양함대를 강화하지 못해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를 자초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의 궁궐 건축은 군사력 증강과 더불어 국가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어 민심 이반을 불러 일으키지도, 당나라의 침공 이전까지 군사력 약화와 신라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를 불러 일으키지도 않았다. 따라서 궁궐 증축을 의자왕의 실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왕이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칠 것을 간하던 성충을 옥사하게 만든 기록이 결정적으로 의자왕의 '말년 암군' 이미지를 심어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성충이 올린 마지막 상소의 내용을 볼 때 이상한 점이 있다. 성충 자신이 상소에 썼듯이, 그는 직언을 하다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목숨이 다하기 직전 마지막 충성심으로 왕에게 또 직언을 하고자 했다. 더구나 참수당해 죽나 옥중에서 굶어 죽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이므로 한 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상소문에 '사치', '향락', '음란'과 같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성충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임을 알 수 있다. 흥수의 경우라면 당장 나당 연합군이 침공한 상황이니 군사적인 부분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성충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의자왕의 사치와 후술할 '요사스런 부인'의 전횡이 당시 백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이었다면 마땅히 그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상소문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 그렇다면 성충이 걱정한 의자왕의 모습은 주지육림을 즐기는 폭군의 모습이 아닌, 얼추 유리하게 전개되는 신라 전선의 상황만 믿고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지는 않으리라 방심하는 의자왕의 모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34]
19년(서기659년)...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과 동잠(桐岑)두 성을 침공하였다.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659년, 즉 백제 멸망 1년 전까지도 오늘날 충청남도 예산군, 경상북도 김천시에 해당하는 성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기록이 남아있음을 보면 신라 공격이라는 대외 정책을 정상적으로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설령 의자왕이 사치함이 사실이더라도 신라와 백제의 국력이 뒤집어질 만큼은 아니었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또한 은고와 태자 효를 위시한 친위 세력을 기르고, 정적들을 견제하는 것은 고대 국가인 백제의 왕이었던 의자왕으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고대 국가에서 왕과 왕실의 친위 세력이라는 것은 왕권 강화를 넘어 생존 차원에서 언제나 존재했고 존재해야만 했다. 초기 국가란 여러 힘을 가진 세력들이 서로의 생존을 위해 연합해 세운 조직이므로, 설령 정통성과 군공 등으로 왕권이 다소 강한 왕이더라도 귀족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에서 대대로를 선출할 때, 귀족들끼리 전투를 벌였고, 왕은 궁궐 문을 닫아 건후, 사후에 추인을 했을 뿐이라는 중국 측 기록이 있고,[35] 신라는 화백회의라는 귀족 회의를 통해 진지왕을 폐위하는 등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왕을 갈아치울 영향력이 있었다. 백제 역시 의자왕 시절에 존재했는지 모르지만 '정사암회의'라는 귀족회의가 있었고, 무왕 이후 의자왕 본인의 노력으로 왕권이 많이 강화되었으나, 뿌리 깊은 대성팔족이 존재했다. 백제 왕사 역시 22대 문주왕, 24대 동성왕 등이 신하의 손에 살해당했고, 26대 성왕 사후 왕권이 크게 약해졌었던 전적이 있다. 그로부터 수백년 후의 고려만 하더라도 통일 왕조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호족 연합 정권 정도에 불과해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은 자기 침실에 자객이 들어도 대대적으로 조사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개국한 지 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정방의의 난으로 수천 명이 죽는 유혈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사건도 있었다.[36]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이 전국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며 정치 세력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상황은 조선이 중앙 집권을 완전히 이룬 뒤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의자왕이 물론 김유신에게 막힌 적이 여러 번 있지만 대체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했으므로 의자왕 친위세력이 아주 무능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좌평이 비록 백제의 최고위 관등이며, 자신의 아들들을 41명이나 그 좌평에 임명했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긴 하나, 이전까지 백제에 좌평직은 6명으로 한정되었음을 고려하면, 서자 41명에게 준 좌평 직은 중국의 친왕들과 같이 실권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백제는 말기가 되면서 직접적인 행정 업무는 더 이상 좌평이 아닌 22부사가 관장했기 때문에 왕자들을 좌평에 임명한다고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성충과 흥수의 실각은 약간의 추측을 더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존재와 당과는 큰 원한을 진 적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당과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신라와의 전쟁에만 박차를 가하고자 하는 의자왕과, 언젠간 당나라가 공격할 것으로 내다보고 외교 정책을 바꾸거나 신라 공격의 고삐를 늦추자는 성충, 흥수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수 있다. 친위 쿠데타 이후에 성충이 하옥된 것이므로 성충은 의자왕과 초•중기에는 뜻을 함께 하다가 전술한 이유들로 갈라졌을 가능성이 있다.[37] 언제나 정치에서는 한 갈등이 해결되면 또 다른 갈등이 생겨나고 이것이 되풀이되며 이것은 의자왕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다.

나당 연합군의 침공이 현실화되자 의자왕은 독단을 내리거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좌평 의직(義直), 달솔 상영(常永) 등 조정 신하들과[38] 심지어 귀양을 가 있던 흥수에게조차 사람을 보내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는 대다수 백제 신료들이 제 살기에 바쁘고 의자왕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막는 암군의 모습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국가 체계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제 조정에서 방어책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던 모습을 지도층의 분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전쟁에서 여러 가지 전략들이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각각의 전략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나당 연합군의 심리나 지형적인 이점을 이유로 드는 등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전략들이었다.

비록 전력의 차이로 실패했으나, 흥수의 전략과 정확히 반대되었던 '연합군을 지형이 좁아 대군의 운영이 어려운 탄현과 기벌포로 끌어들인 후 격멸' 작전 역시 터무니없는 전략이라 볼 수 없다. 강유 항목을 참고하면 좋은데, 강유는 조위가 촉한에 비해 월등해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고, 험요지를 통한 저지는 방어만 가능하지 적의 격멸은 불가능하므로 한중의 험요지들을 열어주고, 각 요충지들을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하면 사방에서 공격하여 섬멸하는 전략을 세운 바가 있다. 비록 후주 유선의 무능과 등애의 활약으로 실패했으나, 강유의 전략은 군량의 소진과 조위군이 지나쳐 온 한중의 험요지들을 다시 거쳐 퇴각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으로 조위군을 큰 위기로 몰아넣었다. 다시 말해, 적이 월등히 많은 군사와 물자들을 가지고 있다면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방어도 물론 훌륭한 전략이지만, 지형적 이점으로도 숫적 불리를 상쇄할 수 없거나, 설령 일시적으로 저지가 가능해도 적군이 많은 군수 물자를 가지고 있어 장기전으로도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 나면 다소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적이 대군을 통한 숫적 우위를 살릴 수 없는 지형으로 몰아 넣고, 후퇴도 어렵게 한 후 격멸하는 것이 옳다. 더군다나 당시 백제의 상황은 촉한보다 심각했는데 내부적 측면에서 보면 촉한이 비록 환관 황호의 농간은 있었으나 삼국 중 가장 중앙집권이 잘 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백제는 전술했듯이 의자왕의 왕권 강화로 귀족과 부여씨 왕실의 단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군사적 측면으로 보면 신라만 해도 계백 부대보다 10배가 많은 5만 대군을 동원한 상황이었고, 반대쪽에서 오는 적군은 숫자에서도 군수 물자에서도 백제를 압도하는 통일 중화제국 당나라의 13만 군대였다.

더군다나 나당연합군의 전쟁 목적은 백제의 영토 일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의자왕을 위시한 백제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해 오는 상황이었으므로 탄현과 기벌포에 주력군을 배치해 일시적으로 나당 연합군을 저지할 수는 있지만, 연합군이 숫적 우위를 이용하여 탄현과 기벌포의 백제군 주력을 묶고,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우회시켜[39]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는 전략을 쓴다면 이 역시 백제에게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역사에서 이러한 예가 자주 있는데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 정확한 사서 기록은 없으나, 거란이 발해군의 주력을 우회하여 수도 상경용천부를 함락해 발해가 어이없이 단시간에 멸망했다는 주장이 학계의 주류이며,[40] 거란의 고려 2차 침입 때도 거란군이 이 같은 전략을 사용하여 비록 양규의 대활약과 하공진의 기지로 간신히 넘길 수 있었으나 고려 현종이 거의 잡힐 뻔한 한국사 내에서도 손꼽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나왔다. 병자호란 때도 조선은 산성 방어를 굳건히 하며 시간을 끄는 계책을 세웠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한양으로 곧장 진격하여 함락하고 멀리까지 가지 못한 인조 남한산성에서 포위해 항복을 받아내었다. 병자호란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청군이 조선군을 숫자에서 압도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왕인 인조의 고립과 도원수 김자점의 무능으로 그나마 청군보다 약했던 군세를 일괄적으로 지휘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41]

따라서 다양한 관점에서 고려해 보면 결과적으로 백제는 패망하였고, 성충과 흥수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이 의자왕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고 평가되나, 그들의 계책을 채택했다고 하여 백제가 반드시 승전했을 것이라고 볼 수도, 그 계책을 반대하였던 신하들과 의자왕이 무조건 무능했었다고 폄하할 수도 없는 것이다.

후삼국시대 견훤의 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며 '의자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단순히 백제의 마지막 군주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러나 말년에 암군 또는 폭군의 면모로 나라를 망국으로 몰았다면 당시 대중의 인식이 좋을 리가 없을 텐데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역시 의자왕이 말년에 폭정을 휘두른 암군이라는 평가에 의문을 표할 만한 대목이다.[42]

의자왕의 생전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으므로 의자왕의 사치와 왕권 강화를 통한 귀족 세력의 반발이 어느 정도였는지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는 없다. 후술하겠지만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 성충의 말이 사치를 줄이라는 것, 당나라의 침공 상황에 외교적, 군사적 수단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것, 탄현과 기벌포를 지키라는 것 중 정확히 무엇인지는 의자왕과 당대 백제 신료들만이 알 것이다. 이 기록 역시 성충만 언급하고 흥수는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볼 때 탄현과 기벌포를 지키지 않은 점이 아니라 전쟁 전에 사치를 줄이거나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성충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단순히 의자왕이 탄현과 기벌포 방어 계책을 처음 제시한 것이 성충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참으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지만, 어떻게 봐도 위 사실들을 종합하자면 실제로 의자왕의 모습은 '말년 암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거나 승자인 당나라와 신라의 입장에서[43] 과장과 부당한 폄하가 다수 관련 기록들에 포함되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들은 결국 탄현, 기벌포에서 지연전을 펼쳤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비판에 대한 합리적 비판이라고 보기 어렵다. 백제가 압도적인 전력의 당군을 상대로 승부를 벌여 이길만한 전술, 전략을 면밀히 고민했는지, 애초에 그런 전력상 압도적 우위인 적군을 격파할 구체적 방법론이 존재했는지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통일 중화제국 당군과 신라군의 연합군이 무려 18만 명이나 달하는 반면, 백제가 백제멸망전 당시 실제로 동원한 전력은 2~3만을 넘기 어렵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이들과 정면승부해서 이길 확률보다는 지연전을 펼쳐서 밀어내는 것이 그나마 쉽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군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당군을 끌어들여 섬멸한다는 작계를 수립한게 아니라, 여러 전략안을 두고 우왕좌왕 하다가 당군과 신라군이 요충지를 돌파한 뒤 어중간하게 당군과 신라군을 둘 다 요격한다는 방안을 선택했으므로, 백제가 당군과 신라군을 야전에서 섬멸할만한 전술을 가지고 전투에 나아갔는지 의문이다.

설령 의자왕이 좁은 지형을 이용할 복안이 있었다 하더라도 좁은 지형은 어디까지나 대군이 숫적 우위를 활용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일 뿐 그 자체로 소수자에게 유리한 요소는 아니다.[44] 소정방은 북방 유목민족과의 전쟁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장군이고, 당군도 내전 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 고구려와 같은 강적들을 상대로 숱한 전쟁을 거쳐 그 전훈을 바탕으로 단련되고 육화진법 등 이를 전술적으로 구체화한 강군이었으며, 흥수의 제안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45] 따라서 단순히 좁은 지형에서 승부에 나선다고 백제가 이들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백제가 유리한 지형을 차지했다면 모르나, 삼국사기나 당서, 자치통감 등에서도 백제군이 험요지에 진을 쳤다는 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군은 험요지에서 당군의 공세를 저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백강에서 당군의 배가 전열을 갖추지 못한 시점에서 공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46].

그런데 소정방은 단순히 배를 타고 백강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백강 어귀에서 일부 군사를 나누어 상륙시킨 뒤 수륙병진 작전을 펼쳤다. 상륙한 당군은 너무나 쉽게 백제군을 격파하여 방어진을 돌파해버렸으며, 그 과정에서 백제군 수 천이 전사했다.[47]그 후 당군이 수륙병진으로 나아가자 백제는 사비성에 이르기까지 방어에 유리한 지형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신라군도 탄현을 돌파한 뒤 금산까지 이어지는 좁은 지형이 아니라 황산벌에 이르러서야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의 요격을 받았다.[48]. 결국 도박적으로 승부를 건 것 치고는 처음부터 백제의 전략, 전술 자체가 허술했던 것이다.

백제보다 훨씬 강력하고, 요동부터 평양에 이르기까지 백제보다 훨씬 깊고 험한 종심을 확보했던 고구려군조차도 수, 당 같은 통일 중화제국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으면 펼쳤지, 초전부터 적군을 내부로 유인해서 섬멸한다는 전략은 단 한번도 짠 적이 없다.[49] 의자왕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강유의 예시를 들지만 촉한멸망전이나 강유 항목을 보면 나와있듯 강유의 전략은 당대에서부터 숱한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촉한멸망전이 강유의 작계대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의자왕과 백제 수뇌부가 고구려와 통일 중화제국의 전훈을 고려하지 않고 압도적인 전력의 당군을 과소평가한채 도박적인 작계를 수립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당군이나 신라군이 우회하면 된다는 의견도 유효한 비판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군, 신라군은 거란과 같이 압도적 기동력을 자랑하는 군대가 아니다. 당군과 신라군이 우회하는 것 그 자체로 시간이 소요되므로 지연전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이뤄진다. 또한 당군은 (설령 동행하는 신라군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치더라도) 서해안 일대의 지리에 밝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쉽게 유효한 우회로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신라군과 백제군은 애초에 수 백년간 여러 전선에서 싸워왔으므로 신라군이 우회할 루트는 백제군도 당연히 알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신라와 당군이 요충지에 막혀 전력을 분산했을 경우 백제가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백강과 탄현을 거치지 않고 사비로 가려면 김제나 금마저, 웅진 일대의 중요 거점을 지나쳐야 하므로 이들이 방어막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물론 기벌포에서 당군의 상륙을 막고, 탄현에서 신라군의 진군을 저지한다고 하더라도 백제가 살아 남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불확실한 단기 결전에 국운을 거느니 시간을 끌면서 피해를 누적시켜 당군과 협상에 나서든, 또는 훗날 백제 부흥군이 되는 지방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50]은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며, 실제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력차에 비춰 볼 때 그나마 백제의 생존에 이르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4. 백제의 멸망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후회한다.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무너뜨리자 내뱉은 한탄. 《삼국사기》에서 발췌.

4.1. 멸망의 조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따르면 의자왕 말년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변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 측에서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거나 신라의 백제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대인이 지어낸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다수다.[51]

그러나 한국 측 기록인 《 삼국사기》뿐 아니라 일본 측 기록인 《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멸망할 조짐으로 비현실적인 변고들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이들 역시 상징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들이지만 당시 일본은 신라의 적대국이자 백제의 우호국가로, 신라 측의 유언비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으며, 훗날 백제 유민들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것이 백제인들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헛소문이라면 정정할 기회도 있었다. 즉 부정적인 소문은 백제 내부에서도 돌아다녔거나 백제계 유민들도 저런 소문을 만들거나 믿었다는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변고가 백제 내부의 권력 다툼과 그로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제에서 내전이나 격심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면 《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데, 이에 대해서 《 삼국사기》에 기재된 의자왕 대의 변고들이 바로 권력 투쟁이나 대숙청 혹은 내전을 암시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실제로 변고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면 명백하게 변란이나 내전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아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멸망 직전의 불길한 징조들이다.
19년(659)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20년(660년)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천(백마강 / 금강)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수도의 시민들이 이유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 사슴 같은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 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52]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보름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됩니다[53]."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자[54]가 말하기를 "보름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다만 몇 개는 비현실적인 유언비어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우선 서기 659년 5월에 사비하에 떠밀려 온 길이 3길이나 되는 큰 물고기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1길은 10자인데 이 당시 1자는 당소척이었으므로 24.5 cm였다. 고로 3길이면 7.35 m나 된다. 이만한 길이의 물고기이면서 물 밖으로 떠밀려 나와 죽는 개체는 지금도 종종 존재한다. 바로 고래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래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 물고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고래 또한 큰 물고기라고 여겼다. 한자로 고래 경(鯨) 자에도 魚가 부수로 들어갔다. 즉, 옛날엔 고래도 물고기의 일종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당시 백제인들이 고래를 제대로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큰 물고기'라고 인식해서 그렇게 기록했고 그걸 본 현대인들 입장에선 '비현실적인 일'로 인식된 것이다. 신라 소성왕 때 신라에 코끼리가 출현한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코끼리를 무슨 괴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 역시 당시 신라인들이 코끼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비슷한 시기의 신라에서도 일어났는데 태종무열왕 6년(서기 659년) 9월에 있었던 일이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으며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길이 100자면 현대 미터법으로 24.5 m나 되는 어마어마한 물고기이다. 얼핏 봐서는 괴상하게 생긴 어류라고 생각될 지 모르지만 이 역시 고래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종종 고래들이 물 밖으로 나왔다가 죽는 사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다만 위와 마찬가지로 당시 신라인들이 고래를 제대로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괴생명체 비슷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 삼국유사》에는 659년 5월에 사비하에 떠오른 그 3자나 되는 물고기를 굳이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야기도 전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폐사한 동물의 고기를 먹었으니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지금도 개발도상국에선 고기가 귀하다 보니 종종 폐사한 동물의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하다 못해 바로 위의 북한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폐사한 동물은 왜 죽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먹으면 당연히 굉장히 위험하다. 특히 고래와 같은 해양생물들은 부패 속도도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사람은 하이에나 독수리 같은 스캐빈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썩은 고기를 먹어서는 절대 안된다.

그리고 660년 2월의 일도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핏빛처럼 붉어지고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하는 건 천년도 훨씬 넘은 지금도 나타나는 일인데 이게 바로 적조 현상의 기록이다. 적조 현상이 발생하면 플랑크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빼곡히 채워버리기 때문에 산소와 햇빛이 물 속으로 투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물 속에 녹아있던 산소를 모조리 써버리게 되며, 심지어 증식한 플랑크톤이 독성 물질까지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조 현상을 매년 연례행사처럼 겪는 현대인과 달리 고대에선 적조 현상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우 특이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기록했고 이 기록을 본 현대인들은 비현실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은 백제 멸망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겠지만 위 2가지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다만 단순한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을 조금 과장스럽게 기록해서 백제 멸망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명분으로 악용한 것이다.

그리고 659년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단 것은 그 태자궁의 주인인 백제 말기의 태자 즉 부여효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것을 돌려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 멸망 직전의 불길한 징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가 《 백제삼서》 등 백제 계통 기록을 다수 인용했음을 감안하면 《삼국사기》보다 더욱 백제인의 입장이 반영된 기록일 수 있다.
( 사이메이 덴노) 4년(658), “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왔는데, 그 때 말이 혼자 절의 금당을 돌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오직 풀을 먹을 때만 멈추었다어떤 책에는 ‘경신년에 이르러 적에게 멸망할 조짐이었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6년(660년) 5월, 이 달 …… 또 온 나라 백성들이 까닭없이 무기를 들고 길을 왔다갔다 했다나라 안의 노인이 “백제국이 땅을 잃을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변고에 대한 기록이나 대부인에 대한 언급과 연관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신들인 좌평들을 자신의 아들들로 모두 교체해버렸고, 이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자신감의 발로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좌평 성충이 옥에 갇혀 옥사했다는 것과 흥수가 유배되었다는 기록은 이런 분열상을 암시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거기다 현재의 장관급인 좌평 중 임자라는 인물은 조미압이라는 세객을 통해 김유신과 내통하기까지 했다.

백제에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이러한 분열이 분명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당 연합군 파병시 실질적으로 군세를 보유한 기존 귀족들은 거의 오지 않고 단 한명 계백만이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도 이를 반영한 장면이 나온다. 의자왕이 귀족들과 병력 차출 문제로 다투자 계백이 칼을 빼들어 귀족들에게 겨누는 장면이 그것이다. 하지만 수도만을 노린 작전에 백제가 당한 것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4.2. 나당연합군과의 전쟁

나라가 어지러워진 와중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군을 이루어 백제 공격에 나섰다. 백제 침공 작전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당나라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왜국 사신을 장안에 억류할 정도로 철저히 준비된 기습 작전을 실행하여 660년 7월 9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0,000명이 기벌포에 상륙했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0,000명이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 백제 동쪽에서 출발해 사비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常永)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唐軍)은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군사들이 진격하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백제 조정에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크게 당황하여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특히 당군이 육지에 상륙할 때를 노려 이를 먼저 공격하자는 좌평 의직의 의견과 약한 신라군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달솔 상영의 의견이 충돌했다. 한편 이전에 죽은 좌평 성충과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있었던 좌평 흥수가 주장했듯이 백강(금강) 입구를 막아 적의 해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육로로는 탄현을 봉쇄하자는 등 적군의 요충지 진입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장기전을 유도하여 적을 지치게 만들자는 흥수의 주장에 반대하며 아래처럼 주장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오게 하여 소로(小路)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역으로 적을 요충지로 끌어들인 뒤, 좁은 길목을 지나는 당군과 신라군을 기습해서 격퇴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전술했듯이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말만 들어 보면 모두 일리가 있는 작전이다. 만약 어느 지역을 빼앗기 위한 일시적인 국지전이라면 요충지를 선점하여 격퇴하는 것이 당연한 전략이지만, 당시 나당 연합군의 목표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잡아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탄현과 기벌포를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사비성으로 진군할 수 없다면 모르겠지만, 점령이 여의치 않으면 일부 병력만 남겨 대치하고 우회해서 사비성으로 진격해버리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백제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과 물자를 가지고 있어 성충과 흥수의 전략대로 탄현과 기벌포 방어에 성공하여 상대에게 장기전을 요구하더라도 상대가 보급품을 넉넉히 준비했거나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지면 효과를 볼 수 없었다. 험준하고 먼 육로를 이용해야 해서 보급이 어려운 고구려의 요동과는 달리 당시 당군은 비교적 물자 운반이 용이한 수로를 이용해 침공했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요충지 방어로 적을 막아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도, 그 출혈은 엄청났을 것이다. 당시 백제의 기존 귀족 세력과 의자왕이 이끄는 근왕 세력은 내분이 심해서 전쟁에 주로 투입된 전력은 부여씨 왕실과 그 친위 세력의 군대였을 텐데 그들이 약화되면 설사 승전했다 하더라도 의자왕과 왕실이 유지되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의자왕은 백제의 국력 측면에서도, 개인의 권력유지 측면에서도 장기전을 택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단기결전이라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의자왕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는 기존 귀족 세력과 지방 세력, 왕실 세력이 일치단결하여 백제의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총력전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 경우 일단 성충과 흥수가 말 한대로 탄현과 기벌포 방어를 통하여 상대의 날카로운 예기를 꺾은 뒤 이후 전황에 따라 나당 연합군이 계속 두들기는 걸 막는 장기전으로 가든, 상대가 우회하면 그에 맞춰 병력을 이동시켜 대치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쓸 수 있었을 것이며, 적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쓰더라도 신라군 50,000명을 상대로 5,000명, 많아야 15,000명인 병력만으로 야전에서 맞서는 답 없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백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나리오였으며[55] 설사 탄현, 기벌포 방어전을 생각했더라도 의자왕이 다룰 수 있는 백제의 전력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나당연합군이 기습적으로 쳐들어 오는데 백제의 전력마저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이미 백제의 운명은 절반 이상 결정난 셈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의자왕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고,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쟁이 시작된다.

4.3. 황산벌 전투와 백강의 싸움

이처럼 백제 조정에서 격론을 벌이는 와중에 나당 연합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백제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미 신라군 5만 명이 탄현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제 조정은 급한 대로 달솔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도록 하니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였다.

계백은 싸움에 임하기에 앞서 처 자식을 손수 죽여 결사 의지를 표명하고는[56]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황산벌로 진격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3개 진영을 설치하고는 쳐들어오는 신라군과 싸웠다. 계백의 분전에 힘입어 백제군 5천 명은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 5만 명과 싸워 4번이나 이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것은 백제의 멸망을 하루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했으며, 결국 압도적인 병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음날 벌어진 5번째 싸움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했고, 계백은 장렬히 전사했다.
왕은 또한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권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삼국사기》권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한편 백강에서는 백제군이 당나라 해군을 맞아 강의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하여 길목을 막고 있었는데, 이에 당군은 강의 왼편 기슭으로 상륙하여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어 양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마침 만조 때가 되자 당나라 해군은 일제히 강을 거슬러 진격하여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 부근으로 나아갔다. 거침없이 진격해들어온 신라군과 당군은 7월 11일, 사비성 부근에 집결하여 합류했다.[57] 의자왕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군대를 철수시켜 달라고 애걸하는 글을 전하고, 나당연합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또 상좌평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은 이것도 거절했다. 그리고 의자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런 행동은 혹시나 교섭이 될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이면서, 웅진성으로 피난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조치로 추정하기도 한다.

4.4. 웅진성으로의 피난과 예상치 못한 배신

7월 12일에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 들판에 진을 치자 다음날인 13일에 의자왕은 곡식 등 적이 사용할 만한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들에 방화하고 태자 부여효와 함께 서북쪽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은 과거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에 대한 방어의 목적이 컸던 곳으로 산 위에 있어서 개활지에 있는 사비성보다는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이 내부의 배신으로 무너져 버렸다.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농성하며,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미 황산벌 전투로 백제 중앙군이 완전히 괴멸된 상황에서 장기전을 위해서는 지방 세력들과의 연대가 필수적인데, 위에서 살펴보듯 당시 의자왕이 지방의 귀족 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의자왕은 당나라의 침략 직전까지만 해도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귀족 세력과 분쟁을 일으켰고, 멸망 직전까지 이들과 화해하지 않았다. 이미 황산벌 전투 전에 의자왕이 지방 귀족들에게 군대 차출을 요구했을 때 계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또한 당과 신라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성충의 경고도 무시했고, 심지어 당의 공세가 고구려를 향한 것인지, 백제를 향한 것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의자왕의 웅진 도피는 중앙군이 괴멸한 이후에나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능동적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피난 과정도 부여융, 부여태, 부여문사[58] 등 왕족들이나 대좌평[59] 사택천복도 사비에 남겨둔채 태자인 부여효만 데리고 피신에 성공했다. 의자왕은 말 그대로 주요 왕족이나 관료들을 사비성에 내버려둔 채 겨우 자신과 태자(그리고 일부 소수 친위세력)만 데리고 몸만 빼낸 것인데, 웅진으로의 피난 과정이 매우 급박하게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백제 부흥군이 되는 지방 세력은 의자왕의 항복 당시에도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으며 한참 뒤에야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60] 결국 의자왕은 지방 세력과 연대하여 장기전으로 끌고갈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계획이 있었다고 볼만한 상황적 근거도 부족하다. 설령 그럴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전쟁 초기부터 계획된 플랜이었다기보다는 위기 상황이 닥치니 급박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의자왕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웅진성으로 다급히 피난을 간 것이라고 해도 의미없는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웅진성은 천혜의 요새로 평가받는 곳이었으며, 한때 백제의 수도였고, 사비성 천도 이후로도 주요 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기에 병력, 시설, 물자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백제 지방군은 건재한 상태였으며, 고구려도 백제가 무너지면 그 다음은 자신들 차례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 상황이라 시간을 끌면 백제의 사직은 보존하거나 멸망을 늦출 가능성이 있었다. 예식진이 배반함으로써 의자왕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이 모든 가능성이 어이없이 날아갔을 뿐이다.

그러나 현종(고려)/생애 및 업적 항목에 있는 임용한의 평가[61]나, 해당 항목에 있는 몽진 당시 현종의 고난과 비교해보면, 의자왕이 자신의 명령을 받는 중앙군 대부분을 상실한 뒤 대다수의 왕족과 관료들조차 내버려 두고 웅진으로 피난을 간 시점에서 의자왕은 사실상 예식진의 불확실한 호의에 기대는 것 외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 받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예식진의 가문이 예식진의 증조부부터 좌평을 역임해 왔고, 예식진 묘비명은 출신지로 공주로 추정되는 웅천으로 기재하고 있으며, 백제 멸망 이후 웅진도독부에서 웅진을 관할하는 동명주자사에 임명된 점에 비추어 보면, 예씨 가문은 대대로 웅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을 것으로 보이므로, 웅진의 병사들은 예식진의 명령만 있다면 얼마든지 의자왕을 배신할 수 있었다. 즉 예식진의 배신은 의자왕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62]에 비추어보면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예식진의 묘지명이 발굴된 이후에도 의자왕이 불가항력적이라는 판단 하에 항복하였을 것이라는 연구도 이루어진 바 있다[63][64].

4.5. 사비성 함락

의자왕의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수도 사비성을 지키고 있었던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는 끝까지 적과 대항하려고 했던 것 같으나, 의자왕의 장자인 부여융과 대좌평 사택천복 등은 상황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을 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고 하는데, 좀 의심스럽다. 《삼국사기》에도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어쩌냐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백제 고위층이 백제가 이번 싸움으로 몰락하여 망국이 되는 것이 아닌, 이 전쟁 이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탈출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전쟁으로 백제가 멸망하지 않고, 의자왕이 다시 돌아오면 자기들은 빼도박도 못하는 반역자가 되고, 부여태를 막아서면 내분이 되니, 이도저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성밖을 탈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비성에 남아있던 부여태는 떠난 의자왕 대신 스스로 왕을 자칭했으나, 같이 남아있던 조카 부여문사는 숙부의 왕 행세를 보고 불안을 느껴 아버지 혹은 삼촌[65] 부여융과 논의 끝에 밧줄을 타고 탈출, 이후 탈주가 이어졌고, 이윽고 당군이 성안으로 들이닥쳐 사비성벽 위에는 당군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 결국 더 버티기 힘들어진 부여태 또한 항복함으로서 7월 13일에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4.6. 삼천 궁녀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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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궁녀가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낙화암[66], 부여 고란사 벽화

흔히 의자왕하면 '삼천 궁녀'를 떠올리지만, 삼천 궁녀는 진짜 정확히 궁녀 3천 명이 아니라 궁녀를 많이 거느렸다는 문학적인 수사[67]에 불과하다.

삼천 궁녀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도 조선 초기에 와서이다. 《 삼국사기》에는 낙화암[68]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고 《 삼국유사》에서도 단지 '의자왕과 후궁들이 바위에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의자왕은 중국에서 죽었으므로 이 이야기는 잘못됐다.'고 일연이 언급한 데서 등장할 뿐이다. 조선 시대의 문인들이 낙화암과 백제를 소재로 한 글을 쓰면서 '백제가 멸망하면서 삼천 궁녀들이 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구나'와 같은 표현을 남기곤 했다.

정리하자면 '삼천'은 그냥 불교식 표현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숫자' 를 나타내는 표현이다.[69] 비슷한 사례로 측천무후를 까는 기록에서도 측천무후가 남자를 밝혀서 남첩이 '삼천'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실제로 남첩 3천 명을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남첩이 매우 많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측천무후를 까는 용도라 신빙성은 별로 없는 기록이다. 후대의 사관들이 '나라가 망하니 많은 왕실의 여인들이 아마도 여기서 죽었겠지.'라고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문학적 수사를 진짜 수치로 오해한 결과로 의자왕은 오늘날까지 색욕의 화신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언어의 관습이 변하면서 만들어진 의도치 않은 역사왜곡이 된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 삼국사기》에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기사가 있다. 좌평으로 임명할 만큼 장성한 아들이 41명이나 있었다면 실제로 색욕 쪽으로 충분히 발달했을 수도? 다만, 이 경우엔 양자나 친족 등 부여씨 왕족을 비롯해 군주의 친위 세력의 인사들을 중용한 것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진짜였다면, 아들과 딸이 비슷한 비율로 태어난다고 볼 때 자식 숫자는 거의 80명에 달하고, 모든 아들을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보장도 없는 만큼 100명도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중산정왕 유승[70]처럼 자식이 120명이 넘어가는 사람들도 역사 속에는 있으니 의자왕이 자식을 80-100명쯤 두었다고 해도 불가능하지야 않지만... 참고로 궁녀 1만을 두었기로 유명한 서진 무제 사마염의 자녀는 고작(?) 25명이었다.

백제 말기의 수도 사비성의 인구가 대략 5만 명 내외[71]로 추정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의 고대 국가에서 한 도시에 비노동 인구 3천 명을 먹어살릴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5만 명 중 여자는 절반 정도였을 테니, 어린이와 노인 등을 제외하고 궁녀로 재직할 수 있는 나이가 적당하고 건강한 여자는 1만 5천 명 정도였으리라 추정한다. 삼천궁녀설이 사실이라면, 한 도시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나이 여자 중 20%가 궁녀인데 그렇게 해서 인구가 유지되거나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고려 왕조의 막장 임금 충혜왕이 전국의 미녀란 미녀를 다 긁어 모아서 100명이 넘는 궁녀를 채웠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조에서도 연산군이 미녀를 긁어 모아서 궁녀가 1천 명을 살짝 넘는 수준이었다. 그 이외에도 조선 왕조는 궁녀의 숫자를 600명 정도로 유지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보다도 인구가 더 적었던 백제가 이렇게 많은 궁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그보다 알려진 지식으로는 백제 궁터가 궁녀를 3천 명 이상 수용하고 남을만큼 공간이 넓지도 않다. 애시당초 백제 규모의 고대 국가에서 왕이 독점하는 궁녀를 무려 삼천 명이나 넘게 데리고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사치를 해야 되는 유지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백성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멸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일제의 식민사관[72] 이 영향이 크게 줬다는 경향도 있다.[73] 다만 백제의 멸망 원인을 군주 개인의 부도덕에 귀속시키는 점은 당대의 《 일본서기》부터 조선 시대 각종 문인(황엄, 김흔, 조위 등)들의 평가까지 거의 일관된다. 보통 식민사관으로 지목되는 각종 학설[74]을 보면 개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 내부에 근본적인 모순점이 있어 애당초 극복할 수 없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인의 평가 중에는 '백제의 기운은 이미 쇠했으며 그 결정체가 의자왕이라는 암군'이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 정도로 묘사한다. 이런 견해는 백제의 운명이 이미 빼도박도 못하게 멸망할 예정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의자왕의 책임은 덜어지겠지만 백제는 구제불능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그럼에도 일반 대중의 머릿속에 '삼천 궁녀는 사실'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일제강점기때 대중가요로 널리 퍼지고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국정 교과서와 대중매체에서 궁녀를 그렇게 많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중의 역사 상식과 실제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유일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각종 드라마, 소설, 상식(?) 등을 통해서 당태종의 공격을 방어한 고구려의 장수는 양만춘이라고 많이들 알지만 정사에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며 그냥 안시성주라고만 언급될 뿐이다. 또다른 예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철쇄를 사용하여 왜군을 격퇴했다는 대중의 상식(?)에 비해 그 역사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며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나...

중국어에서도 삼천궁녀 비슷한 표현이 관용수사로 나온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서 '후궁가려삼천인'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역시도 과장된 문학적 수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다만, 중국 서진의 무제 사마염의 궁녀 1만 명은 실제 《 진서》에 기록되었다. 이 쪽은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고, 서진은 중국 대륙 북방을 통일한 위나라를 바로 이은 나라이기에 충분히 가능하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도 궁녀 1만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였기 때문에 사치스럽에 왕권을 유지한 결과 서진은 오래 못 가서 멸망해버렸고, 중원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맞는다.

애초부터 삼천궁녀 일화가 말도 안되는 묘사인 만큼,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는 창작물에서는 이 삼천궁녀 자체를 묘사하지 않거나 아예 다른 방식으로 각색하곤 한다.

김정산의 역사소설 《 삼한지》에서는 의자왕의 삼천궁녀설이 김유신의 책략이라는 내용으로 서술된다. 무왕이 <서동요>를 통하여 선화공주를 데려간 것을 차용하여, 의자왕이 궁녀 1,000 명을 거느린다는 소문을 퍼뜨려 백제의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계획이다. 작품 내에서 이 계획은 실로 훌륭히 성공하여 1,000 명으로 시작된 소문이 종국에는 3,000 궁녀를 거느린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졌고, 백제 내 민심에 큰 혼란이 생겨 백제의 국력에 타격을 입혔다.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도 '삼천궁녀 의자왕'이라는 가사가 있다.

합판소문으로 악명높은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최후반부인 백제멸망파트에 발 CG로 구현되었다. 그런데 그 연출 수준이 처참하기 그지 없어서, 발 CG와 병맛 연출이 넘치는 드라마 상에서도 네타장면으로 손꼽힌다. 사실 삼천궁녀는 단순히 CG만 구린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문제가 많은 장면이다. 일단 연출 의도 자체가 특정 역사(백제, 의자왕, 그리고 신라)를 비하하고 비난하기 위함이다. 작중 백제는 의자왕이 암군으로 전락하면서[75] 구제 불능 수준으로 망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신라는 그런 한심한 파탄 국가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더욱 한심한 수준이었기에, 결국 외세의 힘을 빌려 백제를 공격한다. 이런 역사 인식은 소정방이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비난하는 장면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또한 서사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많은데, 이 장면은 의자왕이 다급히 웅진으로 피난가기로 결정한 직후에 등장한다. 그 많은 궁녀들이 현실에 절망한 끝에 집단 자결을 결심하는 묘사 같은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고, 그냥 아무 맥락도 없이 궁녀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식으로 묘사된다.

봉숭아 학당에서 맹구가 삼천궁녀 이야기를 하는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 번째 궁녀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풍덩!', '두 번째 궁녀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풍덩!' 이렇게 연속된 발언으로 개그를 하다가 다섯 번째쯤 되니깐 선생님이 화를 내면서 그만하라고 말렸었다.

일부 민족주의 논단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식민사관을 의도적으로 주입하기 위해 삼천궁녀 설화를 기정사실화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 주장은 역사채널e 등을 통해 일제풍수모략설, 쇠말뚝,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처럼 근거 없이 재생산되었다. 사실 삼천궁녀에 관한 역사적 접근은 조선시대에도 시도되었고, 20세기 초반에도 민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25년 동아일보에도 이미 삼천궁녀와 낙화암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5년 가수 노벽화의 노래 《낙화삼천(落花三千》이 발표되면서부터이다. 다만, 이 노래는 유명한 노래는 아니었다. 또, 1943년 윤승한의 역사 소설 《김유신》이 삼천궁녀 설화를 소설로서는 최초로 사용했다. 여기에 조선총독부의 의중이 숨어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삼천궁녀 설화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것은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매우 유명한 원로가수 김정구가 1941년 발표한 《낙화삼천》이란 노래가 유명해지면서 부터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반월성 넘어 사자수 보니
흐르는 붉은 돛대 낙화암을 감도네
옛꿈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저문 날에 물새만 운다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 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백화정 아래 두견새 울고
떠나간 옛사랑의 천년 꿈이 새롭다
왕흥사 옛터전에 저녁 연기는
무심한 강바람에 퍼져 오른다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 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그런데 이 노래는 조선총독부가 제작 지원하고, 내선일체와 조선인의 전쟁 지원을 장려하는 명백한 친일국책영화 <그대와 나(君と僕)>의 삽입곡이었다. 게다가 이 노래의 작곡가인 김해송과 작사가인 조명암이 모두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들이었으니 일제가 삼천궁녀 설화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노래가 인기를 얻자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멸망한 백제를 소재로 망국의 한을 부른 노래라 일제가 항일노래로 여기고 금지시킨 것. 비록 작사, 작곡가는 친일 행적이 있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서는 전혀 친일의 의도를 찾을 수 없다. 또한 김정구는 영친왕(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를 위해 도쿄 아카사카 저택에서 이 노래를 불러 영친왕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알려져 있다. 결국 이 노래 관련자들은 경찰서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김정구 본인도 1주일간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따라서, 단지 일제강점기에 문학이나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였다고 해서 삼천궁녀 설화가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4.7. 예식진의 배반, 의자왕의 체포와 백제 멸망

의 수도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문무왕릉비
(나의 조부가) 의자왕을 끌고 가 당 고종께 바쳤다
예식진의 손자 예인수의 묘지명』
사비성이 함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월 18일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또한 항복했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 지 677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로부터 고작 10일만이었다. 그런데, 《구당서》의 기록에는 당시 '대장 예식(禰植)'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고 나와 있다.

오늘날 사학계에는 웅진 방령이었던 예식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놓고 당군에 항복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더욱이 최근에 예식과 동일 인물로 추측되는 예식진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는데, 그 내용을 통해 예식이 왕을 붙잡아 항복했다는 주장이 더욱 탄력을 받았다. 이후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 손자 예인수의 묘지명에서 조부(예식진)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쳤음을 대놓고 적어서 그가 의자왕을 배신했음이 명확해졌다(111차 신라사학회 참고). 의자왕은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에서 결사항전하여 반전을 만들어 내고자 했으나 예식진이 배반하여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신채호의 《 조선상고사》에서는 당시 웅진성의 수비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의자왕이 자살하려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서 죽지 못하고 소정방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웅진성 수비대장 또한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자체가 논란이 많기 때문에 그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가, 예식진의 묘비명과 그의 가족묘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이어 8월 2일에 나당 연합군은 전승을 기념하는 대연회를 열었다. 이때 신라의 무열왕과 소정방 등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부여융 등은 당하에 앉았다. 이윽고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이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던 백제의 군신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5. 죽음과 사후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왕후인 은고부인과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이하 신하 및 장수 93명과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수도인 장안에 이르렀다. 660년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당고종 측천무후를 만났다. 당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하였다. 그 뒤 그는 나라를 잃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사실 아들 부여융이나 고구려의 동병상련 보장왕이 나라가 망한 뒤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의자왕이 오래 살았다면 당나라가 부리는 괴뢰정권의 얼굴마담으로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일찍 죽어버려서 더한 모욕을 피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죽은 의자왕과 그의 후손들은 낙양 북쪽의 북망산에 묻혔다.[76] 당고종은 의자왕이 죽자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추증하고 의자왕의 옛 신하들로 하여금 조상하게 했다. 《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 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와 함께 묻혔는데 이 묘역에는 망국의 군주들만 모아서 매장했다.

이후 부여융이나 부여풍을 비롯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의자왕의 후손들은 모두 영영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77] 부여융은 웅진도독부 도독이 되어 사실상 당나라의 꼭두각시로 동생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을 토벌하는 등 형제끼리 싸우는 씁쓸한 결과를 맞는다. 일본 승려의 여행기인 《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셋째 왕자가 흑산도 피난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 삼국사기》보다 좀 더 당대에 가까운 전승인만큼 실제 백제판 마의태자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백제 멸망 후 약 200년이 지난 뒤 기록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에서 떠돌던 옛 전설일 수도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 왕릉원[78]에는 선조들의 무덤과 함께 의자왕과 그의 태자 부여융의 가묘도 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서쪽 능산리 절터 쪽으로 가다 보면 도중에 있는데 다른 정식 왕릉보다 봉분 크기는 작고 비석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라고 써 있다. 이것은 원래 여기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 새로 만든 무덤인데 부여군에서는 중국 뤄양시와 함께 1995년부터 북망산에 묻힌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수습해 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북망산 일대는 의자왕릉뿐 아니라 지역 전체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도굴로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딱히 의자왕릉이라서 타겟이 되었다기보다는 중국은 동릉 도굴 사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당장 관리 인력이 상주하던 청나라 황릉도 군벌 폭탄을 동원해 도굴할 정도로 근대에 혼란이 극심했다.[79] 을 더 파면 찾을지도 몰랐지만 시간, 인력,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2000년 4월 영토 반혼제 의식을 올리고 그 곳의 을 퍼와 일단 부여군 부소산성에 있는 고란사에 봉안했다가 2000년 9월 이 곳에 가묘를 세웠다. 의자왕이 백제를 떠난 지 1340년 만에 선대 왕들과 나란히 같은 장소에 묻힌 것이다. 7세기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무령왕릉 지석을 참고해 백제의 장례 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을 관과 함께 매설하였다.

2008년 의자왕의 증손녀 ' 부여태비'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

2017년 중국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능묘로 추정되는 능묘 1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 다만 과거 의자왕의 유해 귀국을 추진하다가 막대한 비용을 치른 일이 있어서 유해 귀국은 추진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1] 의자왕을 증자에 빗대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해동증자'뿐 아니라 《구당서》 <백제전>에서도 나타난다. [2] 그러나 같은 백제의 왕인 25대 무령왕의 경우를 보면, 그의 왕후는 성씨를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무왕만 굳이 성씨를 표기한 것으로 보아 무왕은 왕후가 여러 명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만 해도 정실 왕후가 6명이나 있었고 결국 성씨를 붙여 이들을 구분했다. 이렇게 정실 왕비를 여럿 두는 기조는 조선 3대 태종 때에 와서야 사라지게 된다. [3] 다만 이러한 가족 싸움은 역사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빌헬름 2세와 영국의 조지 5세, 그리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전부 사촌 사이였으며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 또한 사촌 사이였다. 그렇기에 1차 세계 대전을 '가족 간의 전투'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4] 이와 비슷한 케이스의 인물이 《 삼국지》의 원소다. [5] 사학계에서는 후술한 친위 쿠데타를 살펴볼 때 실제로 의자왕의 출생 성분이 미약했기 때문에 사택왕후 생전에 이러한 성품을 연기했다고 추측한다. [6] 비록 시기와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튼튼히 한 조선 시대 선조 숙종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7] 전투가 있었던 지역으로 표시되는 곳들 중 일부는 결국 의자왕 때에 잠시나마 백제 영토가 된다. 게다가, 당항성, 가잠성, 대야성 같은 중요 거점 지역에 있는 성들 외에도 죽령 이남의 신라 북방 영토에 해당되는 크고 작은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 대의 백제의 최대 영토는 지도에 나와 있는 것보다 더 컸단 얘기다. 당나라로 갈 수 있는 한강길(당항성 - 가잠성 라인) 외교 라인이 완전히 끊길 위험에 처하자 신라는 더욱 필사적으로 당에 매달리게 된다. 고구려도 마찬가지. 강원도를 수복하는 걸 넘어서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진출하였다. 김유신이 무명을 떨치게 된 계기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해서 탈환한 낭비성 전투인데 학계에선 낭비성의 위치를 충북 청주로 비정하는 견해와 파주, 포천과 같은 경기도 북부로 비정하는 견해가 대립 중이다. [8] 다만 지도에서 의자왕때 함락시킨 대야성도 나오는걸 보면 순수 무왕이 넓힌 면적으로 볼 수는 없다. [9] 이 일로 사위와 딸을 잃은 김춘추는 의자왕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10] 651년 당에서 백제로 보낸 서신의 일부다. [11] 이때 신라는 김유신을 보내 백제군이 내륙으로 파고드는 것을 견제하였다. [12] 김유신은 귀족과 그 자제들이 위험한 작전에 앞장서고 희생해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는 심리전을 애용한 듯하다. 본인도 데뷔전 때 그렇게 투입됐다가 겨우 살아돌아온 적이 있고, 비슷한 기록이 황산벌에서 또 나온다. 어찌 보면 김유신이 이런 전략을 자주 애용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시대상 이렇게 귀족 자제들이 전쟁에서 앞장서 싸우다 전사하는 것이 분위기상 당연할 수도 있다. 이 시기 백제와 신라의 싸움을 보면 인외마경이란 말이 따로 없을 정도로 데스매치를 벌이고 있었고 후대에 문무왕이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을 정도로 서로 간의 적개심도 엄청난 상황이었다.[80] 지도층도 이런 판인데 자주 전쟁터에 불려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어야 했을 신라 중간 지도층과 백성들이 백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신라의 백성들이 전쟁으로 다져진 프로 전사들인 상태였고, 백제에 대한 나라의 분위기가 이럴 때 백제를 상대로 한 전쟁에 나가 고위 귀족들이 물러선다는 것은 심각한 지도력 결핍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자칫하면 반란의 구실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는 카르타고와 100년 가까운 전쟁을 하면서 귀족부터 지도력을 보이기 위해 앞장서 싸웠고 실제로도 많은 귀족들이 죽기도 한 로마 공화정의 사례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13] 오늘날의 상주 부근. [14] 오늘날의 천안 부근 [15] 이전 문서에는 이후에 신라가 당나라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당시 신라가 백제의 맹공에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 여과없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적혀 있었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그런 내용의 서신을 보냈던건 648년의 전투 이전이다. [16] 공세를 신라가 막아냈다는 사료의 이야기를 신뢰한다면, 김유신의 지휘 아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말갈 등의 외부 세력의 파상 공세를 막기는 했지만, 전쟁이란 사람뿐 아니라 많은 물자를 낭비하는 짓이기에 신라는 전쟁을 거듭할수록 버티기가 힘들어졌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커버하는 양면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침략을 못하도록 협박이라도 해서 전쟁을 못 걸게 하고자 외교전을 꾸준히 했다. [17] 수서 열전 백제조 [18] <치당태평송> -진덕여왕-
위대한 당 왕업을 개창하니 높고 높은 황제의 포부 장하여라.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이 나여라.
지극한 어짊은 해와 달과 비기겠고 시운을 어루만져 요순보다 앞서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다지도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의 오랑캐여! 칼날 아래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도다.
사철이 옥촉처럼 고르고 해와 달은 만방에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는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충량한 신하를 등용하도다.
삼황오제의 덕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해주리.
[19] 위덕왕과는 달리 무왕은 수나라에 고구려 침공을 요구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을 돕지 않는 유연한 외교술을 전개하였다. [20] 이후 5개월만에 이찬 비담이 신라 최고 관등인 상대등에 오르는데 비담은 2년 후 여왕은 나라를 잘 못 다스린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이를 보면 그는 선덕여왕 김춘추 입장에서는 반대파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가 상대등까지 올랐다는 자체가 이 군사 행동이 김춘추파에게 있어 얼마나 큰 정치적 타격을 입혔는지 짐작 가능하게 한다. [21] 이에 앞서 김춘추와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회담 때 성충이 고구려에 편지를 보냈다. 내용인즉 신라와 연합하는 것보다 백제와 연합하는 것이 고구려 측에도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 결국 연개소문도 신라보다 백제와 동맹함이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고 김춘추의 제의를 무리한 요구로 거절했다. 다만 이 기록은 《 삼국사기》보다 후대의 역사서인 《 조선상고사》에서 나왔으므로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22]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다이카 개신에서 소가씨를 몰락시키는 데 큰 활약을 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가 상대적으로 왜 조정의 친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의자왕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는지 화려한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을 선물하기도 했으며 그 목화자단기국은 현재는 도다이지가 소장하고 있다. 다만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라는 인물에 대해 이러한 가설도 있는지라 확실하지는 않다. [23] 《삼국유사》 등 민간 설화에서는 선덕여왕이 능력자고 통일을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했다는 둥 사실보단 신화에 가깝게 기록했는데, 이 부분이 신라의 위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다. 선덕여왕은 능력자이고, 김유신은 다 이겼다고 나오고, 진덕여왕은 이미지가 흐릿하고 무열왕 대에는 백제가 망한다. 완벽한 연결 고리. 신라가 승자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열전>에서 선덕여왕과 신라의 실책을 감추고 축소하기 위해 장편 판타지 소설을 집필한 김유신의 영향도 크다. [24] 그러나 이 부분은 <백제본기>가 아닌 <김유신 열전>에서 주로 나오는 부분이다.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는 편. [25] 당시에는 10대에 결혼했고, 의자왕이 20살 즈음에 부여융이 태어났다 가정해도 599년 출생이다. [26] 백제 왕들이 자주 암살되어 부여씨 왕족들이 왜국으로 도주했음을 생각해보면 의자왕의 해동증자 연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 있다. [27] 《일본서기》가 아니다. 즉 해당 기록은 《일본서기》가 이 《일본세기》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8] 고대 일본어가 아니라 고대 한국어(백제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29] 원문에는 641년의 일이라 했으나 아까 앞에서 이 기록이 실은 655년 일임을 밝혔으므로 이렇게 표기한다. [30] 예를 들자면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이며 이오시프 스탈린 대숙청 독소전쟁 초기 엄청난 손실을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고 고려 공민왕 홍건적 왜구의 도발이 계속되는 와중에 김용, 신돈 등 자신의 최측근들에게 지나치게 힘을 실어주다가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세운 등 아까운 무장들을 잃었다. 최영마저도 수 년간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31] 이 기록은 《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신채호의 《 조선상고사》에서만 나온다. [32] 김수태, <백제 의자왕 대의 정치 활동>, 《한국 고대사 연구》 5, 1992년, 66쪽 [33] 혹은 정충(淨忠)이라고 한다. [34]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항락으로 기록된 의자왕의 잔치가 사실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군사들을 위한 위문잔치 내지는 승전 축하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라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것이 자존심 상하니 그냥 의자왕의 사치로 왜곡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5] 학계에서는 안원왕 시절 수천 명이 죽었다고 하는 고구려의 내전을 돌궐의 침공과 더불어 고구려 전성기 종료의 이유로 보고 있다. [36] 물론 이것은 당시 실권자 최충헌이 토호 세력들이 자멸하고 그 땅을 자기가 차지하려는 생각을 한 것도 크게 작용한 경우이다. [37] 이도학, 「백제 집권 국가 형성 과정 연구」, 한양대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91년, 449쪽 [38] 의직은 당군을, 상영은 신라군을 먼저 격퇴할 것을 주장했다. [39]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이 상황을 묘사하였다. 황산벌 전투 이전 계백은 탄현에 매복을 치지 않느냐고 묻는 부하에게 '김유신은 매복 따위에나 걸려 패퇴할 장수가 아니다.'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일축했다. [40]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정안국 등 약 200여 년 동안 발해부흥운동이 이어진 것이다. 중앙 정부만 제압했지, 발해 세력을 모두 제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41] 여담으로 이 사례들에 대한 훌륭한 반례가 바로 귀주 대첩이다. 전쟁에 대비하여 개경의 성벽을 보강하고, 적보다 많은 군대를 확보했으며, 강감찬, 강민첨, 조원, 김종현 등 훌륭한 장수들의 뛰어난 활약, 국왕 현종의 개경 사수 의지로 속전속결로 개경을 함락해 왕의 항복을 받아내려던 소배압과 거란군은 아주 처참하게 박살나버렸다. [42] 오늘날의 대한민국만 봐도,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과 그의 부인인 민비에 대한 평가는 거의 바닥을 기고 있다. 의자왕이 정말 무능한 군주였다면 견훤의 저런 말에 백제 출신 인물들이 호응할 리가 없다. [43] 특히 신라 입장에서 의자왕은 자신들을 망국의 위기로 몰아넣고 왕의 딸과 사위를 죽인 철천지 원수이다. [44] 전국시대의 장군 조사(전국시대)는 "길이 좁고 험한 지형이지만 그 형세가 좁은 쥐구멍에서 두 마리의 쥐가 서로 싸우는 꼴이니 용맹하고 재능있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험요지를 미리 선점한 것이 아닌 이상 길이 좁고 험한 지형은 질적 우위인 쪽이 유리할 뿐이다. [45]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고 군사의 규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46] 당나라 군사를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물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를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 때문에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럴 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닭장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47] 백제가 웅진강 어귀에 근거지를 두고 막았으나 소정방이 진격하여 깨뜨리니 백제의 죽은 자가 수천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지러이 도망갔다 - 자치통감 [48] 황산벌 전투가 펼쳐진 장소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백제군이 작계를 짤 때 논의했던 "좁은 길 때문에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장소가 아님은 분명하다 [49] 살수대첩이 그런 형식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나, 고구려는 일단 요동에서 1차적으로 지연전을 수행했고, 살수대첩에 이르기까지 을지문덕이 직접 평화협상에 나선 것도 지연전의 수단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고구려군이 유인작전을 짰다고 하더라도, 이는 최소한 보급과 조공을 맡은 내호아의 수군을 격멸한 이후부터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내호아와 유사한 역할을 맡은 김유신의 신라군은 섬멸은 커녕 전력을 유지하며 백제 멸망에 크게 기여했다. [50] 그 과정에서 의자왕은 그동안 펼쳐왔던 왕권강화책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지만, 의자왕 입장에서도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 [51] 시기는 다르지만 훗날 후삼국시대 들어 신라가 쓰러져갈 때도 경주에서 비현실적인 변고가 연달아 일어나 '멸망의 조짐'을 암시한다. [52] 판본에 따라 점쟁이. [53] 해석하자면,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는 뜻이다. [54] 판본에 따라 다른 무당 혹은 다른 점쟁이. [55] 이런 탓에 창작물에서는 처음에는 의자왕이 탄현, 기벌포 방어전을 계획했지만, 그에 필요한 전력을 규합하는 데 실패하여 결국 단기전으로 전략을 바꾸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영화 황산벌, 드라마 계백 등이 이 가설에 따랐다. [56] 하지만 적군을 저지해 나라를 지킬 장수가 제 가족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곧 멸망(자신의 패전)을 예감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시체를 밟고 넘어올 적병에게 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죽였다는 것이니까. [57] 본래 양군은 7월 10일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계백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수차례 무찌르는 바람에 길이 막혀 일자가 하루 늦어졌다. [58] 심지어 삼국사기는 부여문사를 적손이자 부여효의 아들, 즉 차차기 왕위계승자로 기록하고 있다 [59] 상좌평과 동일한 관직으로 추정된다. 즉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다 [60] 물론 이 부분은 좀 애매하다. 당군을 요격하려다 실패했다던 군사들도 아무리 봐도 지방군이었고, 백제부흥운동 당시에도 풍왕을 중심으로 한 부흥군 지도부는 자기들끼리 치고 받은 반면 지방 세력들은 이들을 잘 따랐던 것으로 미루어 적극적인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안 보였다기보다는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백제가 속전속결로 무너진 것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1]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62] 뛰어난 지휘관인 소정방, 김유신이 이끄는 18만의 나당연합군, 그에 반해 괴멸된 백제의 중앙군, 백제 왕실 내부의 분열과 항복 등 [63] 양종국, 2018,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재검토의 필요성-」. 양종국은 1.웅진성에서 내분이 발생했다고 볼 사료적 근거가 전무한 점, 2. 흔히 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았다는 근거로 사용되는 구당서나 예인수 묘지명에서는 예식진의 행동을 將, 引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의자왕을) 앞에서 인솔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게 자연스러운 글자인 점, 3. 삼국사기 신라본기도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예식진)을 거느리고(率) 왔다고 기록한 점, 4. 예식진이 의자왕을 억지로 끌고와서 항복했다면 흑치상지를 비롯한 성주들이 의자왕을 따라 항복할리가 없는 점(특히 흑치상지는 소정방이 의자왕을 핍박하자 즉시 달아나 저항했다), 5. 의자왕도 끝까지 저항하다 멸망하는 것보다는 당의 꼭두각시로나마 제사와 영토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한 점, 6.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은 당나라에서 비교적 우대를 받았고, 당나라도 백제를 지도에서 아예 지우려고 한게 아니라, 부여융을 괴뢰정부인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하고 명목상이나마 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맺도록 한 점을 들어 의자왕의 항복은 자의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64] 이에 대해서 예식진 가문이 당시 친왕당파 귀족 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가하는 추측도 있다. 의자왕이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피난지를 아무 성이나 대충 골랐을리도 없으니,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적에 맞서 농성하고자 한다면 이전부터 우호적인 교류가 있었던 곳을 골랐을 것이라는 주장. 이것이 사실이라면 의자왕 입장에서는 정말로 예식진의 배신을 예상 못했을 수도 있다. [65] 660년 시점에서 부여효를 태자, 부여융은 왕자로 기록했고 문사는 '태자의 아들'이므로 효의 아들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효를 따라 웅진성으로 떠나지 않고 사비성에 잠시 남았다가 부여융과 상의하고 함께 뒤늦게 밧줄을 타고 탈출한다는 것이다. 원래 융이 백제 태자였다가 효가 태자 자리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융과 효의 사이가 좋았을 이유가 없으므로 의아한 대목인데 이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부여문사가 부여융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부여효의 아들이라고 보면 그만큼 백제멸망전 당시 상황이 예전의 악연 같은 건 신경쓰기 힘들 정도로 긴박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66] 이름부터가 떨어질 낙(落), 화(花), 바위 암(岩). "꽃이 떨어진 바위"다. [67] 고전 한문학의 '삼천'은 불교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서 나온 개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은 3천이 아니라 1천의 3제곱, 즉 10억을 뜻한다. 원전 의미를 곧이곧대로 대입하면 3천 명이 아니라 10억 명이 죽었다는 소리가 된다. [68] '낙화암'이란 이름도 이 전승이 얽혀서 덩달아 유명해졌다. 전국의 물가 절벽을 가진 지역 명승지 중에 이 이름을 가진 곳이 몇 군데 있다. [69] 이런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는 중국이 타 국을 위협할 때 말하는 백만대군이 있으며 원시 부족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으면 많다가 되기도 했고,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로 수천, 수백만이란 표현은 실제로 천에서 만, 백만에서 천만 사이의 어떤 구체적인 수가 아니라 많다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70] 삼국지》의 주인공격으로 유명한 촉한 소열제 유비의 조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다. [71] 주서》 <백제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비에 약 1만 호가 있었다. 한 호에 5명이라 치면 5만 명 남짓이고, 고대는 대가족이라 평균 10명이라 가정하면 10만 명쯤 된다. [72]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국제적인 정세에서 보지 않고 군주 개인의 타락에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73] 당장 위에 '의자왕'이라는 왕호를 두고 의롭고 자애로운 운운했던 EBS의 역사채널e에서도 의자왕이 폄하된 것은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내보냈다. [74] 조선시대 붕당 망국론, 반도의 지정학적 약점, 유교 망국론 등. [75] 의자왕의 암군적인 면모 역시 작중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76] 그의 증손녀는 당나라 황족 결혼했다. [77] 그의 아들 중 부여용이 있는데 664년 일본 난파(현 오사카)로 건너가 살았다고 한다. # [78] 백제 후기 군주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인근 정림사 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1993년에 발견되었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왕릉군이 분명하다. 그러나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 군대에게 도굴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도굴당해 현재는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기 때문에 묘들의 주인들을 알 수 없다. 제26대 성왕부터 제29대 법왕 때까지 , 왕비,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성왕은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백제 중기 왕들의 무덤인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은 제22대 문주왕부터 제25대 무령왕 때까지 무덤으로 보이는데 무령왕릉이 여기 있다. [79] 의자왕 바로 옆에 묻혔다던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의 무덤에 도굴갱이 훤히 뚫렸으니 의자왕릉은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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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당연히 태종 무열왕 문무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딸, 그리고 여동생 고타소가 죽게 되었거니와 그로 인해 정치적 위기를 겪었던 만큼 백제에 원한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