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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프 가문의 문장 |
Die Welfen |
1. 개요
프랑크 왕국 계통의 옛 가문. 영국 하노버 왕조의 조상이며, 독일의 유서 깊은 유력 제후 가문이었다. 중세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을 상징하는 구엘프(교황파)- 기벨린(황제파) 대립에 있어 구엘프가 바로 벨프 가문으로부터 유래했다[1].2. 초기
벨프 가문은 구 벨프 가문(Die älteren Welfen)과 그 유산을 이은 벨프-에스테 가문(Haus Welf-Este)으로 나뉘는데, 구 벨프 가문은 본래 대대로 슈바벤 지역에서 살아오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람은 샤를마뉴 대제의 후계자인 루도비쿠스 1세의 장인 알트도르프 백작 벨프 1세이다. 이후 아를 왕국을 차지한 부르군트계와, 벨프 1세의 손자로 보이는 알프가우 백작 벨프 1세를 시조로 하는 슈바벤계로 나뉘어 이어지다 각각 1032년과 1055년에 단절되었다.단절된 구 벨프 가문 슈바벤계의 유산을 외조카인 에스테 가문의 장남이 이어받아[2] 신 벨프 가문이 탄생했으며, 이후 바이에른 공작(1070-1139, 1156-1180), 작센 공작(1138-1139, 1142-1180), 독일 국왕(1198-1218),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등을 배출하고 18세기 영국 하노버 왕조로 이어졌다.
벨프 가문이라 하면 보통 후자 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벨프 가문의 수장(종가)는 하노버 왕조의 수장이기도 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다.
벨프에스테 가문의 본가지만 종가가 아닌 에스테 가문은 이탈리아 반도의 페라라 공국을 통치하다가 페라라를 교황령에게 빼앗기고 모데나 레조 공국을 통치했다. 1803년 에르콜레 3세 데스테가 사망하면서 완전히 단절되었고, 에르콜레 3세의 외손자인 합스부르크에스테 가문의 프란체스코 4세[3]를 통해 모계로 계승되었으나 모데나 레조 공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1859년 소멸되어 통치권을 상실했고, 프란체스코 5세가 딸만 남기고 사망하여 부계는 단절되었다.
3. 전성기
벨프 가문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2세기 하인리히 사자공 시절이었다. 사자공은 상속과 정복, 정치력을 두루 발휘하며 바이에른 공국과 작센 공국, 그리고 슈바벤의 일부 지역을 획득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서 최대의 영토를 지배하는 제후가 되었다. 그의 영지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영지보다 훨씬 넓었다.사자공은 바르바로사 황제와 지속적인 다툼을 벌였지만 결국 황제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180년 바르바로사 황제는 사자공에게 제국추방령[4]을 내려 그의 모든 작위를 박탈하고 영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들에게 재분배하면서 벨프 가문에게 거의 멸문 수준의 징벌을 내렸다. 이로써 벨프 가문은 사자공의 모친이 보유한 브라운슈바이크 일대의 사유지만을 보유하며, 역사 속에서 그대로 사라질 뻔 했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는 벨프 가문에 우호적인 세력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적대적인 세력이 많았다. 때문에 벨프 가문은 비교적 빠르게 재기하게 되었다.
바르바로사 황제가 익사로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는 강력한 정적인 사자공에게 다소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여 1194년 사자공에게 내려진 추방령을 해제하고 브라운슈바이크 일대의 작은 공국을 다스리게 했다. 사자공은 고향으로 돌아와 건축과 예술을 지원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년 후인 1195년 사망했다.
4. 벨프 왕조
2년 후인 1197년, 바르바로사 황제의 유업을 이어 위대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젊고 야심많은 황제 하인리히 6세는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3세에 불과했다. 이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주장하며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를 독일왕(황제)으로 지지했다. 반면 호엔슈타우펜 세력들은 어린 프리드리히 2세 대신 하인리히 6세의 동생 슈바벤의 필리프를 독일왕(황제)으로 지지했다. 이에 양 세력이 각각의 후보를 독일왕으로 선출하면서 두 명의 대립 독일왕이 탄생하였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필리프가 결국 단독 독일왕이 되었지만 곧 암살당했고 오토 4세가 단독 독일왕이 되었다. 이어 오토 4세가 교황으로부터 정식 대관을 받으면서 벨프 가문 최초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토 4세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교황과 호엔슈타우펜 가문 및 다른 제후 세력들과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 패배( 부빈 전투)를 기점으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압력을 받아 1215년 퇴위하고 말았다.오토 4세의 즉위로 벨프 가문이 다시 전성기를 맞는가 했으나 동맹 관계였던 잉글랜드의 존 왕을 지원하려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부빈 전투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패하였고 이를 기회로 신성 로마 내부의 패권을 되찾기로 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그 지지 세력들에게 다시 밀려 폐위당했다.
5. 후기
1215년 오토 4세가 퇴위한 후 벨프 가문은 다시 브라운슈바이크 일대의 사유지를 보유한 조그마한 가문이 되었지만[5], 여전히 벨프 가문의 명성과 영향력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무시할 수 없었다.결국 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벨프 가문에게 내려진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하여 벨프 가문이 보유하고 있었던 사유지에다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몰수한 구 작센 공국 영토 중 일부를 다시 환수하여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을 설치하고 벨프 가문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위를 잇도록 했다. 비록 사자공 시절에 광대했던 작센 공국 영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영토였지만 이미 작센 공국은 바르바로사 황제에 의해 여러 제후들에게 쪼개져 재분배되었고, 때문에 구 작센 공국 영토에는 여러 소규모 제후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런 구 작센 공국 영토에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규모는 상당한 편이었고, 벨프 가문은 곧 이 지역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이후 상속을 거치며 분할과 재결합을 반복하였고,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등장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가장 빠르게 루터교회로 개종하여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고 공작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30년 전쟁이 진행되던 1636년, 수도를 하노버로 옮기면서 하노버 공국이 되었다. 1692년에는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승격되었다.[6]
1714년 하노버 선제후인 게오르크 1세가 영국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벨프 가문은 영국 왕위를 겸하게 되었고, 영국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 사자공을 탄압하던 라이벌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콘라딘의 처형으로 사라진 것과 반대로, 아직까지 벨프 가문의 핏줄은 하노버를 거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윈저 왕조까지 유럽,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자리잡고 있다.[7] 어쩌면 역사가 돌고 돈다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런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친 후 1815년 빈 회의에서 벨프 가문 직계가 다스리는 지역은 하노버 왕국으로, 방계가 다스리는 지역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독립되었다.
이후 하노버 왕국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멸망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중간에 대가 끊어졌으나 멸망한 하노버 왕국의 왕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8]가 공작위를 이어받았으나 얼마 뒤 1918년에 독일 제국이 멸망하면서 같이 날아갔다.
현재 벨프 가문(하노버 왕조, 브라운슈바이크 공가)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의 4남 1녀 5자녀 중에서 장남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의 자손들로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6. 관련 인물
7. 함께 보기
[1]
벨프 가문이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과 같은 편에 섰기 때문. 구엘프는 벨프의 이탈리아식 표기에서 유래한 반면, 기벨린은 벨프가문과 대립하던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성인 바이블링겐 성(Waiblingen)에서 유래했다.
[2]
대신 에스테 가문은 이복동생이 이어받았다.
[3]
부친 페르디난트 카를은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4남이었고, 모친 마리아 베아트리체는 에르콜레 3세의 무남독녀였다.
[4]
신성 로마 제국 황제판
파문으로
법의 보호를 박탈당한 사람을 의미한다.
[5]
오토 4세는 비록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사자공이 거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실제로 그와 벨프 가문이 가진 영지와 작위는 매우 보잘 것 없었다. 그나마 오토를 아꼈던 외삼촌인
리처드 1세가 그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겨 오토에게 푸아투 백작 작위를 물려주어 체면치레를 하고 있었으나(이는 황제가 되기 이전의 일이다.), 오토가
독일왕으로 선출되고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푸아투 백작위는 다시 리처드 1세에게 반납 되돌아갔다.
[6]
당대의 하노버 공작이 창고 구석탱이에 있던 사자공 시절 문서를 발굴해서 선제후 승격을 요구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처한 여러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받아들여졌다. 이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였다.
[7]
물론 벨프 가문이 한때나마 차지했던 영국 왕위는
여계 계승을 거쳐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동군연합이 해체된 하노버 왕가도 가문 자체는 아직 이어지고 있다.
[8]
빌헬름 2세의 고명딸인
빅토리아 루이제의 남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