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01:59:06

미얀마/역사

버간 왕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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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2. 선사시대3. 고대4. 중세
4.1. 버간(파간) 왕조 (1044~1287)4.2. 분열 시대 (1287~1531)4.3. 아라칸 왕국 (1429~1784)
5. 근세6. 근대
6.1. 영국령 시기 (인도 제국, 영국령 버마, 1885~1942/1945~1948)6.2. 일본 제국령 (버마 군정부, 버마국, 1942~1945)
7. 현대
7.1. 버마 연방 (1948~1962)7.2.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62~1989)7.3. 미얀마 연방 (1989~2010)7.4. 미얀마 연방 공화국 (2010~)
7.4.1. 민주화 (2015~2021)7.4.2. 군부 쿠데타
8.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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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미얀마의 역사.

미얀마(버마)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이 지역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인도 문화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고, 특히 스리랑카와 많은 교류를 했다. 그 덕분에 동남아에 흔히 소승불교라 불리는 상좌부 불교를 전하는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스리랑카에 역으로 상좌부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한 한 나라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령신앙인 낫 숭배도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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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구성에서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주민족인 버마족이 주도적이긴 하나 압도하지는 못했다. 소수민족 동부 샨 고원 타이계 민족인 샨족과 남부의 수준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몬족, 서남부에 아라칸 산맥으로 고립된 아라칸족이 역사적으로 각기 상당한 비중을 보였다.[1] 특히 아라칸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미얀마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위의 지도는 현재 미얀마의 종족분포이고, 역사적으로 하면 남부 전체가 몬족이었지만 지금 몬족의 분포는 크게 줄었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18세기 말 몬족이 태국으로 엑소더스를 했기 때문. 그리고 태국으로 이주해온 몬족들은 대부분이 태국인에게 동화되었다.

2. 선사시대

75만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미얀마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 미얀마 국토를 동서로 나누는 이라와디강 유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살았다. 1만년 전 신석기로 넘어오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했고 곡식 재배가 이루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 청동기 시대가 시작했고,[2] 기원전 500년경 철기 시대가 시작했다.

3. 고대

철기 시대가 시작한 후에 도시국가들이 성립했다. 당시 도시국가들로는 중북부의 쀼족, 남부의 몬족, 서부의 아라칸족(라카인족) 왕국들이 있었다.

몬족은 현재의 태국과 버마에 살던 동남아의 토착 종족이었고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지닌 민족이었다. 인도의 불교 문화도 이 몬족을 통해 동남아 각지로 전해질 수 있었다. 아라칸족은 중국 윈난성 일대[3]에서 발원한 것으로 추정되며 아라칸 산맥 서부의 벵골 만 해안가에 정착했으며 초기 국가인 단야와디 왕국을 건설했다.[4]

한편 미얀마 중북부에 도착한 쀼족은 약 200여 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설일체유부(Sarvastivada)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평화주의적인 삶을 살던 종족이었다. 남녀불문하고 7세부터 20세까지 절에 들어가 승려와 같은 생활을 했고, 잔인한 형벌도구나 처벌도 없었으며, 누에의 목숨을 해친다고 비단조차도 경멸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불교의 이상향과 같은 민족이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런 기록이 진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쀼족은 남조의 확장으로 크게 쇠퇴하고 언어적으로 유사한 버마족으로 대체된다. 쀼족은 버마족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초기 버간의 조각·회화·건축·문자에서 쀼족의 것과 차이를 거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쀼족의 유적들은 유네스코에도 '퓨 고대도시'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등록 연도는 2014년으로, 2019년에 등록된 버간보다 더 일찍 등록되었다.

9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은 윈난의 남조는 각지로 영역을 확장했는데, 태국과 미얀마 일대도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태국에 살던 몬족과, 미얀마 중북부에 살던 쀼족은 큰 타격을 입은 듯 했고, 그 과정에서 윈난에 살던 버마족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듯하다. 타이족은 미얀마 동부 샨 고원에 정착하기 시작해 미얀마의 타이족인 샨족이 되었고, 버마족은 미얀마 중북부에 정착해 쀼족을 대체하여 미얀마의 첫 번째 왕조인 버간 왕조를 세운다. 한편 아라칸족들은 아라칸 산맥이 자연방벽 역할을 해주어서 자신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버마의 시작은 여타 동남아 국가들처럼 연대기로 뒤섞인지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미얀마의 주종족인 버마족이 도래한 때는 8~9세기경으로 본다. 그러나 버마족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전에도 일부 버마족이 이라와디강 유역에 정착했고 그들은 선주민인 쀼족 왕국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쀼족 왕국이 멸망하고 버마족이 대대적으로 유입되면서 버마족 중심의 버간 왕조가 기틀을 잡았다.

4. 중세

4.1. 버간(파간) 왕조 (1044~1287)

버간 왕조는 보통 파간(Pagan) 왕조로 알려져 있다. 버마어의 알파벳 표기법의 혼선이 심해서 버마어 발음과 표기가 상이한 기존 표기법과, 현지 발음과 비슷한 새로운 표기법의 차이가 심하다. 아직까지 혼선이 심하지만 새로운 표기법이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5]

버간 왕조는 849년에 성립되었다고 하나 전설과 뒤얽혀서 정확히는 알 수 없고, 그나마 역사적으로 뚜렷해지는 것은 11세기 아노야타 왕(제위 1044~1077) 때이다. 아노야타는 아노라타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노야타 왕은 버마족을 통합하고 버마족의 전통 정령 애니미즘인 낫 신앙을 정리했고 몬족의 승려 신 아라한을 통해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아노야타 왕은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남쪽의 몬족 도시인 타톤에 불경을 요청했다. 거기에 타톤이 거부하자 타톤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불경을 약탈했다고 한다(…). 다만 실제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전성기를 맞고 있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조가 테나세림 일대로까지 확장을 하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gan-kingdom.jpg

이렇게 미얀마 남부 몬족의 도시들을 병합할 수 있었지만, 몬족은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버마족에 저항했다.[6]

이후 동남아 전역을 막론한 무역망의 쇠퇴로 버간 역시 침체기에 접어든다. 나다웅먀 왕(재위 1210~1234) 때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그에 따라 왕권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다웅먀의 뒤를 이은 차스와 왕(재위 1234~1250)은 부패한 아리(Ari) 승가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민중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하고 국정 운영을 세자 우즈나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우즈나 역시 사냥 다니기에 바빠 국정을 다시 신하들에게 위임했고(…) 이는 권신 야자틴잔을 필두로 한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강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즈나 왕(재위 1250~1254) 사후 야자틴잔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태자 띠하뚜 대신 소생의 나라띠하파티(재위 1254~1287)[7]를 옹립했다. 그러나 왕권을 되찾고 싶어하는 나라띠하파티와 야자틴잔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마침내 나라띠하파티는 대화 몇 마디[8]로 야자틴잔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나라띠하파티는 자신이 건립한 밍글라제디 파고다의 비문에 "3,600만 병력을 지휘하고 3,000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300그릇의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는 글을 새겨 넣는 등 왕의 권위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탕진한 국고를 권위만으로 채워넣을순 없었고 과도한 노역을 지워 오히려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게 바로 원나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나라띠하파티는 원의 신종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자를 처형하고 숫적으로 우세한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윈난을 선제 공격했지만 원의 기병 전술에 대패한다.

1287년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띠하파티가 왕자 띠하뚜에게 살해당하며[9] 버간은 사실상 멸망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부친을 죽이고 난을 일으킨 띠하뚜는 발빠르게 부친을 죽이고 첫째 우즈나가 있는 바쎄인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첫째 형을 참살했다. 곧이어 둘째 초스와가 있던 달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하지만 이미 초스와는 첫째가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요새를 정비해놓고 공성전을 준비했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던 끝에 띠하뚜는 어이없게 자기가 쏜 화살이 역풍을 맞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그대로 화살을 맞고 공성전 와중에 사망했고 둘째 초스와가 어부지리로 나라티하파티의 뒤를 이어 버간 왕조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이미 버간 왕조는 남부지방의 몬족의 반란과 북부 샨족반란과 몽골의 침공으로 지방의 통치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타가웅을 위시한 북부 지방은 원의 행정구역인 면중행성(緬中行省)에 편입되었다. 남부의 몬족은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수도를 따서 버고 왕조라고도 하지만,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 중북부는 샨족 저항군이 원을 몰아내고 잉와를 수도로 잉와 왕국을 건설한다.[10] 이로써 250여년 간 미얀마는 사실상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한편 초스와가 뒤를 이어 버간, 달라, 바쎄인 등 중부지역에서 사실상 도시국가로써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버간 왕조는 오히려 강대국인 원나라(몽골)를 이용하기로 하는데 국왕 초스와는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던 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해 몽골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아들 싱가파티를 원나라에게 보내는 등 버간왕조는 이전과 다르게 더욱 원나라와 친밀하게 관계를 유지해 갔다.[11] 그러나 버마족 사이에선 이러한 버간 왕조의 친원 관계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존재했는데 바로 아띤카야, 야자띤잔(이전 권신 아자띤잔과 동명이인), 띠하뚜(왕자인 띠하뚜와 동명이인) 삼형제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본래 버간 왕조에 복속되어 있던 지방세력가들이었으나 버간 왕조가 무너지고 제위를 이어 받은 초스와 왕이 친원적인 정책을 펼치자 반원 세력가들이었던 이들 삼형제는 버간 통치구역 인근 민사잉 지역에서 1297년 반란을 일으켜 민사잉 왕국(1297~1315)을 세운다.[12] 민사잉 왕국은 사실상 원나라의 꼭두각시 정부로 전락한 버간 왕조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국왕이었던 초스와를 사로잡아 1299년 사형시킨다. 이로써 200여년을 이어가던 버간 왕조는 초스와 왕을 끝으로 완전히 멸망한다.

4.2. 분열 시대 (1287~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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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남부의 몬족은 13세기 말부터 약탈을 한 현재 태국의 수고타이와 아유타야에 동남부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테나세림을 빼앗겼으나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고, 수도인 버고(페구, Pegu)를 중심으로 해외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5세기 한타와디 왕국 신 소부 여왕은 주변국과 전쟁 대신 평화와 공존을 추구했다. 그녀는 버고를 무역의 중심지로 키우고 또한 버간의 뒤를 잇는 불교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신 소부는 자신의 몸무게와 동일한 양인 약 40킬로그램의 금을 107미터 높이의 슈웨다곤 파고다에 입혔다. 그 뒤를 이은 승려 출신의 담마제디(Dhammazedi)는 신 소부와 자신의 몸무게의 4배의 달하는 금을 또 떡칠했다고 하여 신 소부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와 불교 교류를 하였다.

중부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버간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킨 민사잉 왕국은 건국자 삼형제들의 후손들끼리 난을 일으켜 1315년 이후를 기점으로 민사잉 왕국이 사라지고 사가잉 왕국과 삔야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30년 가까이 두 왕국은 산발적인 내전을 벌이다가 1365년 북부 잉와 왕국의 침공을 받고 차례대로 사이좋게 멸망당한다.[13]

한편 북부의 샨족-버마족 왕국인 잉와(Ava)는 1360년대 중부지방을 침공하여 이라와디강 일대로 쳐들어가 내전으로 힘이 급속도로 약화 된 사가잉 왕국과 삔야 왕국을 침공하여 멸망 시키고 버마화가 덜한 북부의 샨족과 수도 없이 싸웠다가, 이 샨족이 윈난을 공격해 버린 결과 분노한 명나라가 1444년과 1446년에 연속으로 역공을 가해 그들은 물론 잉와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으로 삼은 후에야 물러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잉와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간덩이가 부은 짓을 한 북부의 샨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남아 1527년에 잉와를 멸망시켰고, 잉와의 속국이었던 버마족의 따웅우(Toungoo)가 독립해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남부의 몬족은 번영을 했다고 하지만 새로운 변수들의 등장으로 골아픈 상황이었다. 북부에는 15세기 후반부터 힘을 키우기 시작한 버마족의 도시 따웅우와 삐의 확장으로 골치를, 남부에는 1498년부터 인도양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고, 1511년에는 말라카까지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의 확장으로 골이 아프게 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자구책으로 해적질과 용병짓을 하면서 주변을 어지럽혔고, 이들은 미얀마의 각 세력에게 고용되면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삼국지 때 따웅우의 왕으로 즉위한 사람이 따빈슈웨티이다.

4.3. 아라칸 왕국 (1429~1784)

한편 아라칸 산맥 서부의 아라칸족은 1406년 한따와디 왕국의 침략을 받자 민 사우 몬 왕이 벵골 술탄국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되찾은 후 므락우를 중심으로 아라칸 왕국을 세우고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인다.[14][15]

이후 아라칸 왕국 벵골 술탄국이 약해지자 포르투갈 해적, 콩키스타도르와 연합해 치타공, 콕스 바자르, 라무, 치타공 구릉지대, 다카 서반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후 많은 농토와 어장을 확보한 뒤 벵골인들을 포로삼아 노동력으로 이용했다.
이어서 16~17세기에는 민 티카 왕과 민 바지 왕이 왕국의 전성기를 이끄는데 특히 경제 수도 치타공과 정치 수도 므락우 유럽 아랍, 페르시아, 명나라 상인들은 물론 일본에서도 상인들은 물론이고 센고쿠 시대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등 전란에 휩쓸려 모시던 다이묘를 잃은 사무라이 로닌들 일부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벵골인 용병과 더불어 왕의 근위병으로 취직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5. 근세

5.1. 따웅우 왕조 (1531~1752)

1531년 따웅우 왕조의 왕으로 즉위한 따빈슈웨티는 본격적인 통일전쟁을 시작했다. 북부는 모가웅 지역의 샨족의 깽판으로 주요한 세력도 없었던 상황이라 남부의 몬족세력을 먼저 노렸고, 이를 통해 버마 남부에 포르투갈 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확장은 주변의 경계를 불러와 삐, 버고, 아라칸이 동맹을 맺어 따웅우에 맞섰으나, 따빈슈웨티는 이들을 모두 무찌르고, 삐와 버고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진해서 분열되어있던 잉와 주변과 동부의 샨족을 복속시키고 아라칸을 공격하던 중 몬족의 문제 등으로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 따웅우의 힘이 커지니 아유타야는 아유타야 나름대로 몬족들을 지원했고, 몬족들이 아유타야로 도주하자 버마군이 국경을 넘어서 이들을 추적하고, 이 때문에 열받은 아유타야가 선빵을 때리고, 버마도 나름대로 열받는다고 공격한 것이다. 실제 태국과 미얀마의 전쟁은 상당수가 이런 형식으로 일어났다.

1547년 아유타야를 공격한 따빈슈웨티는 비록 아유타야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아유타야 군을 철저하게 격파했고 사령관이었던 아유타야의 왕비 수리요타이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버마로 돌아온 후, 포르투갈인 근위장교와 사냥을 하면서 노닥거리다가 사냥을 하던 도중 암살을 당한다. 다시 미얀마는 분열되는 듯 했으나, 따빈슈웨티의 이복형 버인나웅(Bayinnaung)에 의해 따웅우 왕조 치하의 미얀마는 빠른 시일 안에 안정을 되찾고 재통합되어 동남아의 최강제국으로 발돋움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Toungoo_Kingdom_1572.jpg
버인나웅 제국

특히 버인나웅은 뛰어난 정복군주로 서로는 인도의 마니푸르, 서남은 아라칸, 북부는 중국 경계지역의 샨족까지, 동북으로는 현 태국 북부의 란나 왕국를 점령하고 아유타야 왕조를 공격했다. 이 전쟁은 백상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버인나웅이 아유타야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흰 코끼리 2마리를 내주면 전쟁 안하겠다고 하고, 아유타야에서 거부하자 공격한 것이다. 사실 버인나웅은 처음부터 아유타야를 공격할 생각인 터라 설령 코끼리를 받아도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서 이를 알고 있던 아유타야가 거절한 것이다. 버인나웅은 아유타야군을 격파하고 아야타야 국왕을 항복시킨 다음 많은 보물과 흰 코끼리 4마리를 약탈해갔다. 1563년 란나에서 진격해 온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포위했고 아유타야는 치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6] 그리고 다시 저항하는 아유타야를 1569년 재공격해 함락했고, 1570년에는 아유타야와 동맹을 맺어 버마에 맞선 란쌍 왕국의 위앙짠을 공격했다. 비록 보급 문제와 게릴라전으로 철수했으나, 란쌍의 왕 세타티랏이 사망하자 다시 공격해 1574년 란쌍마저도 정복하여 동남아 최강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버인나웅이 1581년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버인나웅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높은 세금이 부과된데다 버인나웅이 철권통치를 한터라 귀족들과 백성들의 불만이 매우 컸다. 특히 아유타야의 흑태자 나레수안의 등장은 치명타였다. 버마엑게 정복된 후아유타야 아유타야조를 중흥시켜 버마의 연이은 공격을 모두 물리치고 버마 본토까지 진격해 싸운 나레수안의 활약으로 버마는 북부의 잉와, 중부의 삐와 따웅우, 그리고 포르투갈 용병 출신 필리페 데 브리투가 점령한 남부로 나뉘었다.[17] 이 중 가장 강한 세력은 북부의 잉와로서 1605년 나레수안이 잉와를 공격하려다가 도중에 사망하자 위기를 넘기고 확장할 수 있었다.

5.2. 부흥 따웅우 왕조 (1611~1752)

잉와의 왕 아나욱페룬은 삐, 따웅우를 점령하고 1613년 마지막으로 남은 필리페 데 브리투의 세력까지 공략에 성공한다. 이 때 몇. 개월 간 아나욱페룬의 버마군은 포르투갈인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경계하여 공격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땅굴로 공격했는데,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게 점령이 가능했다. 이유는 그 날 미사중이어서.(...) 이로써 아나욱페룬은 미얀마를 재통합할 수 있었다.

이 때 미얀마의 왕조를 후따웅우 부흥 따웅우 왕조라고 하는데, 비록 수도는 따웅우가 아니었지만 왕족의 핏줄은 이전 따웅우 왕조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후 버마는 한세기 이상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된 충돌이라 해봤자 1631년 태국 북부의 란나왕국 재정복과 그 이후 란나를 정복하려던 아유타야와의 충돌 정도였다.[18] 하지만 미얀마 역사의 전통으로 몬족은 다시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동남아에 기반을 다지려는 프랑스인들의 협조로 1740년 버마에게서 독립을 하여 후한타와디 부흥 한타와디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1750년 몬족은 북부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1752년 잉와를 함락시킴으로써 부흥 따웅우 왕조는 멸망했다.

5.3. 꼰바웅(알라웅파야) 왕조 (1752~1885)

하지만 꼰바웅 왕조를 세운 슈웨보의 영주 알라웅파야의 등장으로 몬족은 곧바로 밀리기 시작했고, 보급도 끊기고 버마족의 집중적인 게릴라전으로 인해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몬족의 군대는 대열이 무너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라웅파야의 군대는 지속적인 남진을 거듭한 끝에 1757년에는 한타와디의 수도인 버고가 함락당함으로써 다시 멸망하고 버마의 지배하에 놓였다.[19] 그리고 200년 전처럼 몬족은 다시 몬족을 지원했던 아유타야로 엑소더스를 시작하고, 이들을 쫓던 버마군이 국경을 넘으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 200년 전과 패턴은 동일하나, 이 때의 엑소더스로 남부 버마의 몬족 인구는 크게 줄어서 현재처럼 버마족의 비중이 훨신 높아졌다. 알라웅파야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유타야를 포위공격했으나 포탄의 오발로 부상을 입어 1760년 사망한다.

이후 꼰바웅 왕조의 3대 왕 신뷰신은 1765년 서와 북의 양방향으로 아유타야를 침공해서 2년간의 전쟁 끝에 1767년 아유타야를 함락해서 멸망시킨다.[20] 그리고 곧바로 일어난 청나라 건륭제의 침공도 무찔러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청의 침공 때문에 바인나웅 때와 달리 아유타야를 합병하지 못했고, 다수의 정예병력을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윈난성 지역 국경으로 보냈기에 소수의 주둔군으로 아유타야 전지역을 통제할수는 없었다. 구-아유타야는 딱신 대왕에 의해 빠른 속도로 통합되고 강력하게 부활한다. 톤부리 왕조- 라타나코신 왕조 시암은 버마에 복속된 란쌍과 란나를 종복했고, 테나세림 일대에서 버마와 대립했다. 대신에 서쪽으로의 확장도 계속하여 인도국경의 마니푸르를 합병하고, 아라칸 왕국[21]을 압박할 수 있었다.



꼰바웅 왕조 6대 국왕인 보도파야의 치세에 최전성기에 달해 1784년에 아라칸 왕국을 병합했고[22][23], 144000명의 대군으로 시암을 침공했는데 전근대 버마군의 총동원 병력이 7만인것을 감안하면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암으로 침공한 14만의 대군은 유럽식 신식무기를 앞세운 라마 1세 짜끄리 왕조 군대에게 개박살난다.

설상가상으로 아라칸의 통치에 실패함으로써 아라칸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웃한 영국령 인도로 도주했으며, 그 와중에 또(…) 국경을 넘어 아라칸 반란군을 공격하다 영국군과 충돌해서 긴장이 증폭되었다. 영국은 국경을 침범하지 말라고 버마에 경고를 했는데, 버마는 국경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토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동남아에서는 지배는 땅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여러번 일어나긴 했지만, 버마는 좀 심한 편이었다. 국경의 개념은 중동, 유럽 동북아에서 형성되어 관료제가 발달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개념이다,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유목민족들이나, 기후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정글이나 늪지대 등이 펼쳐져 있어 국경선 파악이 힘든 동남아 중남미의 국가들에겐 이러한 종류의 영토개념이 익숙하지 않았다. 다만 시암(태국)같은 경우 1840년대 개화정책을 펼치면서 서양으로부터 국경개념을 도입했고 베트남은 원래부터 중국의 관료제를 도입한터라 크메르나 란쌍을 정복하면서 곳곳에 성이나 식민지와같은 기미주를 설치하면서 국경의 개념을 확고히 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미얀마의 귀족층이 쇄국을 고집했던 터라 주변에서 물결치던 서구 문물의 영향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왕실자체적으로 서구식 공장도 짓고 시암이 근대화 개혁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기도 서구식 체계로 바꾸려고 생산 시도를 했으나 오히려 귀족들이 개혁의 발판이 아닌 돈줄로 보고 공장을 짓는데 도움을 준 서구인들과 유착이 발생하면서 원활한 개혁엔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 왕인 버기도가 즉위한 이후에도 이러한 사태는 계속되고, 버마가 아쌈의 타이계 왕국인 아홈 왕국까지 복속시키자 긴장은 극에 달해 결국 1824년 1차 영국-버마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버마군은 벵골로 선공을 가해 벵골의 영국군을 고전시켰지만, 버마 남부에 상륙한 영국군에게 빈집털이 당하자 1826년 항복하고 아라칸[24]과 테나세림을 영국에게 할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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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속 일어나던 버마인과 영국인의 충돌은 2차, 3차 전쟁까지 이어졌고, 1852년에 일어난 2차 전쟁에서는 버마 남부를, 1885년의 3차 전쟁에서는 전토를 병합당하고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 병합되어서 멸망했다. 식민지의 중심도시는 영국에 의해, 원래 수도였던 만달레이에서 바다에 가까운 양곤으로 옮겨졌다. 꼰바웅 왕조 최후의 임금인 티바 왕은 인도 서해안의 작은 어촌인 라트나기리로 끌려가서 31년간 유폐당한 채 그 곳에서 숨을 거둔다.[25]

6. 근대

6.1. 영국령 시기 (인도 제국, 영국령 버마, 1885~1942/1945~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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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일본 제국령 (버마 군정부, 버마국, 1942~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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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태평양 전쟁 일본군 태국군의 침공으로 일본 군정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남부 일부 영토는 태국에게 병합당한다. 1943년에는 일본이 버마를 버마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 하지만 버마국은 일본군이 주둔하며 일본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는 괴뢰 국가였다. 버마국의 국가원수 바 마우는 독립국가의 국가원수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해보지만 버마인들 눈에는 친일파로서 일본에 붙어먹은 인물일 뿐이었다. 바 마우는 버마 왕령식민지의 총리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2차대전 이후 반영적인 행동을 보여 투옥된 인물이다. 일본군이 버마에 입성한 후에 일본군이 그를 석방했다. 전후 다시 투옥되고 석방되기를 반복하다가 1977년 사망했다. 점령 초기 버마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구세주'라며 환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의 잔학 행위가 이어지자 반일로 돌아섰으며, 이에 아웅 산 등 '30인의 동지'들이 '반 파시스트 인민 자유 동맹(AFPFL)'을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협력했으나 전쟁 말기, 영국군이 버마를 재탈환하고 만달레이 인근까지 진격해오는 과정에서 바로 편을 바꿔 영국군에 붙어 일본군을 몰아냈다.

7. 현대

7.1. 버마 연방 (1948~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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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62~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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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미얀마 연방 (1989~2010)

하지만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 등에 따른 국민적 불만이 일었다. 1970년대 들어 학생들 주도로 민주화 시위가 있었으나 군부는 폭력으로 진압해왔다. 1988년 3월부터 수개월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유발했고, 군인과 민간인의 충돌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 또 약화된 민심에 의해 일어난 8888 항쟁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1988년 소 마웅 장군이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조직해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 정권이 무너지고 네윈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소 마웅 장군이 정권을 잡고 1989년부터 국호가 미얀마로 개정되었다. 랑군이 양곤이 된 것도 이때였다.

한편 SLORC가 주도한 군사정부는 가까운 시일내에 권력을 민간에게 되돌려주겠다며 총선 실시를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1990년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이끌던 국민민주연합(NLD)이 무려 80%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과도 군사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국민통합당을 누르고 압승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 군부 세력들은 선거 무효화를 선언하고 아웅 산 수 치 여사를 가택 연금시켰고 강압적인 군사독재 정치를 시도했다.

이러한 미얀마 군사정권은 소 마웅 장군에 이어 탄 쉐가 뒤이어 집권하면서 더욱 억압적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김정일처럼 은둔정치를 펴며 여러 반정부 세력들을 강력하게 투옥, 탄압해왔다. 1992년에는 우 누 전 총리에게 가택연금 해제, 아웅 산 수 치에겐 가족방문을 각각 허용하는 등 유화책을 폈고, 1995년 수 치 여사를 연금에서 해제시켰으나 양곤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1996년에는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골든 트라이앵글 군벌 쿤사를 항복시키고 샨족 독립 운동을 막는데 성공한다.

1997년 11월에는 기존의 SLORC를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로 개편했고, 1999년 수 치 여사가 남편 마이클 아리스와 사별하자 영국으로 가야 했음에도 군사정부 측의 귀국 거절을 우려해 미얀마를 떠나지 않았고, 2000년 8월 말에는 양곤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려다 2차 연금을 당했다.

2003년 킨늉 총리는 '민주화 7단계 로드맵'을 만들어 2007년 새 헌법을 만드는 데 밑바탕이 되었으나, 그는 2004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2006년에는 점성술에 따라 수도를 양곤에서 내륙 네피도(당시 핀마나)로 천도하고 화폐단위를 괴상하게 만드는 등의 별의별 뻘짓을 저질렀다. 이에 미국과 EU 등은 미얀마에 대해 경제 제재, 외교관 미얀마 방문 금지, 기업 철수 등으로 강력히 대응했고, 1998년에는 사실상 원조마저 중단됐다. 반면 ASEAN 국가들은 1997년 미얀마 군사정권을 인정하고 신규 가입시켰다. 아세안은 원래 회원국 간 불개입주의를 천명하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아웅 산 수 치가 일시적으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서방국가의 대 미얀마관계 단절, 원조 및 관광중단 등을 촉구하며 또다시 반군부 투쟁을 진행했으나, 이듬해에 또 연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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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민주화 운동 당시 승려들의 행진.

그러나 이런 탄 슈웨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군부 독재 정치가 계속되면서 수많은 미얀마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고 2007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집권 군부 세력들은 총기 발포까지 가하는 등 무차별적으로 시위를 진압해버렸고, 결국 반정부 시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잔인무도한 유혈 진압에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격분했고 결국 이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기존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한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했다.[26] 일본 정부 또한 분노 크리. 이를 계기로 미얀마에 대한 국제적 비난 강도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정작 국경을 접한 이웃인 중국은 미얀마를 두둔했다.[27] 군부도 중국에게 굽신거리면서 막대한 자원을 수출하면서 군부 지배층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국경을 맞댄 또다른 이웃나라 인도도 중국을 견제하고자 미얀마 군부에 접촉하자 군부는 인도에게도 굽신거려 여러 자원개발권을 인도 업체에게 넘기기도 했다. 결국 이 막대한 두 핵 강국들의 옹호와 무역교류로 서구권이 벌이던 금수조치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2007년 10월 14일자 <KBS 스페셜>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하지만 시위 진압 이후에도 저항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왔고 미국과 서구권이 중국과 인도 두 나라에도 이 일을 빌미로 항의하기 시작했으며, 2008년에는 사이클론 '나르기스'까지 터지면서 이에 미얀마 군부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2008년까지 형성된 미얀마 군부 내 권력 역학관계에 대해서는 양길현 제주대학교 교수의 논문 <미얀마 군사정부의 장기집권 토대와 책략: 1988~2008년(2009)>에서 찾을 수 있다.

7.4. 미얀마 연방 공화국 (2010~)

결국 집권 군부 주도로 2010년 11월 7일 민주정으로 이양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고 국호도 미얀마 연방에서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개정되었다. 총선 종료 직후인 2010년 11월 13일 미얀마 군사정권은 아웅 산 수 치 여사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군사정부를 이끌던 탄 슈웨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테인 세인 총리가 새 민주 정부의 4년 임기의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여 개혁과 개방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총선 과정에서 국민민주연합 등 야당 세력들이 배제되었고 총선 직후 탄 슈웨의 뒤를 이어 새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한 테인 세인조차도 과거 탄 슈웨 정부 아래에서 총리직을 역임했던 사람이었고 기타 새 민주 정부 각료들조차 과거 탄 슈웨 군사정권 출신들이어서 사실상 허울뿐인 민정이양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오랜 군부 독재정권 아래서 체득한 순종적 마인드 때문에 해당 정권이 좋니 나쁘니에 대해 거론하는 걸 꺼렸으며, 오히려 개혁정책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부에선 수하르토 실각후 군부 주도로 정치 개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처럼 미얀마도 집권 군부세력 주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주장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보궐 선거 집회를 불허하면서 선거를 방해했지만,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아웅 산 수치 여사는 보궐 선거에서 기어코 압승을 거뒀다. 이때도 군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암중 흑막을 차지하고 있었다.

7.4.1. 민주화 (2015~2021)

2015년 11월 8일 25년만에 자유 총선을 치렀다. 이 선거는 하원의원 330명과 상원의원 168명 등 상하원 의원 498명, 주 및 지역 의회 의원 644명, 민족대표 29명 등 1천171명을 뽑는 선거였다. 그러나 분쟁 등으로 일부 선거구에서 선거가 취소됨에 따라 상·하원의원은 491명을 선출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25년만에 펼쳐지는 자유총선인데다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던 선거여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헌법에 의해 전체 의석수의 25%를 보장받게 되는 군부의 세력에 대응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의석수를 NLD측이 차지할 수 있을련지, 아니면 NLD의 단독과반을 집권여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방지할 수 있을지 또한 NLD가 단독과반이 된다면 개헌선인 2/3 이상의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느냐도 역시 관심사가 되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80%가 넘어가는 투표율에 NLD측의 거의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다만 이번 승리에 대해 군부가 그대로 인정해줄 것이냐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번 총선은 1990년 때와 달리 집권여당이 처음부터 패배선언을 했으며, 테인 세인 대통령이 평화적 정권이양을 약속했고, 군부의 최고통수권자도 NLD의 다수 의석 확보를 축하한다고 밝혔다. 결국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했으며, 이로서 NLD가 승리하면서 53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2016년 3월 10일, NLD가 대통령 후보로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대학 동문인 최측근 틴 쩌를 지명했으며, 이후 틴 쩌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군부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청산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군부정권이 민주화 운동가 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던 '방문객 신고' 제도가 사라지게 됐다. # 미국에서도 경제제재를 해체하기로 했다. (단, 군부와 관련된 기업은 유지) # 1948년 이래 70년 동안 소수민족 반군과 치열한 내전을 치러온 미얀마군이 이례적으로 2018년 12월 휴전을 선포했다. #

2020년 7월 2일에 미얀마 북부의 옥광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광부 170명이 사망했다. #

2020년 11월에 민주화 이후 첫 총선을 여는데, # 코로나19 재확산 와중에 그대로 총선을 치른다. # 그리고 13곳 지역에서 취소된다. #

미얀마 정부가 라카인 주 등 8개 지역 및 친 주 1곳 등 9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접속 차단 조치를 1년여 만에 해제했다. #

사전투표 도중에 쥐들이 투표함을 갉아 먹은(...) 바람에 투표용지가 들어있던 봉투 일부가 훼손되는 등 관리부실이 나오고 있다. #

11월 8일에 국회의원 투표가 시작됐다. #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했다. #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했지만, 아라칸 반군 장악 지역에서 추가 선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

7.4.2. 군부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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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일, 아웅 산 수 치 총리와 윈 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이 구금되고 국영방송이 중단된 일이 발생했다. #1 #2

이후 미얀마 전역에서 내전이 발생하고 있다.

8. 출처

  •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시아, 동방의 천년 문명이 열린다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6. p36~49.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저자/출판사 동일. 2018. p38~52.


[1] 현재는 라카인족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지만, 라카인이란 말 자체가 버마족이 쓰는 표현이고 아라칸 현지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다. [2] 냐웅간(Nyaung-gan)에서 청동기 부장품을 출토했는데, 매장시기에 대한 정설은 없다. [3] 버마족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4] 아라칸족의 창세 신화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선교를 위해 500명의 비구니와 함께 왕국으로 가서 단야와디의 왕과 왕비를 감동시켜 개종시켰다고 전해지며 붓다의 이미지를 본 뜬 불상을 만들기를 청한 후 허락받은 뒤 만든 불상이 바로 마하무니 불상이라고 한다. [5] 단, 이원복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에선 '바간 제국'이라 한다. [6] 이후 역사를 보면 버마족이 공격해서 합병하고, 몬족이 독립하고, 버마족이 진압하고, 몬족이 태국으로 탈출하고, 또다시 버마족이 합병하는, 역사가 계속 반복된다. [7] 깐수 4세(Cansu VI)라고도 한다. [8] 대화 내용은 이렇다.
나라띠하파티: 파고다(불탑)를 세우려면 뭐가 필요하지?
야자틴잔: 파고다를 세우려면 사다리가 필요하죠.
나라띠하파티: 네가 그 사다리다. 파고다를 다 세웠으니 너는 더 이상 필요없다!
[9] 띠하뚜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나라띠하파티에게는 여러명의 배다른 왕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첫째는 우즈나, 둘째는 초스와, 셋째가 바로 반란을 일으킨 띠하뚜였다. 띠하뚜는 행동거지가 난폭하고 총명하지 못하여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했고 나라띠하파티는 그를 총애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자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첫째와 둘째에게만 맛 좋은 족발을 주고 셋째인 띠하뚜에겐 퍽퍽한 고기를 주었는데 티하투의 모친이자 나라티파하티의 첩인 신 마욱은 둘째에게 갈 맛좋은 족발을 빼돌려 셋째에게 주었다. 이 일은 곧 나라띠파하티에게 들통 나게 되어 신 마욱을 족발 도둑, 띠하뚜를 족발 도둑의 아들이라고 비방했는데, 띠하뚜 입장에선 부친이 저런 소리를 해대니 화가 안날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띠하뚜에 대한 홀대는 계속 되어 몽골이 쳐들어 오자 띠하뚜는 자기를 증오하는 부친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친이 남부지방으로 피난을 갔다가 샨족의 반란과 버간 왕조의 강화요청으로 몽골군이 퇴각할 때 나라띠하파티는 환도했는데 환도하는 길에 삐에 머물던 차에 띠하뚜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소규모의 친위대만 있는 부친의 행렬을 추격하여 막아섰고 부친에게 독을 먹고 죽기를 강요했다. 결국 나라띠하파티는 셋째 아들 띠하뚜에 의해 독을 먹고 살해당한다. 죽기 직전 나라띠하파티는 "아아, 내가 수많은 길을 지나 열반에 이를때까지 내게 다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슨 그깟 족발 가지고 존속살해씩이나 일어나나 싶겠지만, 미얀마에는 나눠지는 음식의 부위가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낸다는 관념이 있어서 신 마욱이 저렇게 행동한 것이다. [10] 코에이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에서 자주 보이는 아바(Ava)가 이 도시이다. [11] 이는 고려의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항복하고 고려가 몽골에게 적대적인 국가에서 부마국 지위를 얻으면서 급속도로 친원적인 방향으로 노선이 바뀐 것과 동일하다. [12] 버간 왕조 멸망 이후 삼형제들의 내란으로 18년밖에 못간 단명왕국이다. [13] 중부 지역의 왕국들이 고작 50여년 밖에 못갔기 때문에 사실상 없는 취급하고 13세기~14세기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실 삔야나 사가잉 왕국은 미얀마 역사에서도 듣보잡(...) 취급을 당하는 소왕국들이다. [14] 대표적으로 왕의 칭호 뒤에 칭호를 붙였는데 예를 들어 민 사우 몬왕의 칭호는 '슐레이만 샤'이다. [15] 그리고 하렘(...) 제도 역시 받아들여 벵골인은 물론이거니와 왕국 내 소수민족인 차크마족, 카미족, 쿠키족, 친족으로부터 여자를 바치게 하여 왕을 위한 하렘을 만들기도 했다(...). [16] 이때 아유타의 왕인 마하 짜끄라팟과 관료 등 3천여 명이 버고로 끌려갔으며 마하 짜끄라팟은 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버인나웅은 또한 마하 짜끄라팟의 아들인 마힌트라티랏을 영주로 봉하여 아유타야를 통치하게 했다. [17] 필리페 드 브리투는 아라칸 왕국의 사령관으로 나레수안을 물리치기 위해 남부 버마로 왔다가 독립하고 몬족을 통합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미얀마에서는 파불자 응아 진까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인도 고왕의 포르투갈 부왕에게 사절을 보내 복속한 후 부왕의 딸와 결혼했던 인물이다. [18] 남명의 잔당문제는 그냥 적당히 합의를 보고 넘긴 것이니 충돌이라 보기도 뭐하다. [19] 부흥 한타와디 왕국이 10년만에 멸망한 이유중의 하나로 바로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이 외국의 용병들에 의존 했었고 독립세력들 사이에서도 그들을 하나로 이끌만한 리더들의 존재가 부재했다. 즉 일시적인 독립엔 성공했지만 이를 오래 지속할 구심점이나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20]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 가로세로 세계사>에 따르면, 이 전쟁 과정에서 아유타야 유물들을 버마군이 강탈하면서 현재 미얀마 국립 박물관에 보관 중이라 하나 사실여부가 불투명하다. [21] 17세기 말 상술한 전성기가 끝나고 치타공 역시 상술한 필리페 데 브리투에게 뺏긴 뒤 다시 벵갈인의 영토가 되었고 기득권층의 권력다툼과 더불어 지진 등 천재지변까지 잇따라 발생해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22] 이 당시 수도가 점령되고 난 후의 일은 참혹 그 자체였는데 주민들 대다수가 학살 능욕당했고 왕족과 귀족들은 짐승처럼 당시 꼰바웅 왕조의 수도인 아마라푸라로 끌려갔으며 재화를 약탈당하고 약탈이 불가능한 사원이나 탑, 궁전은 파괴한 다음 전소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므락우 유적을 가보면 불타거나 못으로 그은 흔적이 있는데 이때의 영향이다.[28] [23] 이때 마하무니 불상도 전리품으로 같이 옮겨졌다. [24] 이때 영국인들은 아라칸족들이 마약에 절여져 게으르다고 디스(...) 했고 인도계 농민들을 이주시켜 농토를 개간시키는데 이들이 바로 로힝야이다. [25] 아이러니하게도, 인도 무굴 왕조 최후의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미얀마의 수도 랑군으로 끌려가서 유폐되고, 역시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26] 이 과정에서 취재하던 일본인 기자 나가이 겐지가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는 AFP 계약기자로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도중 총에 맞은 것 같은데 죽는 순간까지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16년 만에 유족에게 카메라를 전달받았다. # [27]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 확보 문제도 있고, 여기서 중국이 미얀마의 상황을 비판하고 민주화 시위를 옹호했다가는 반정부시위가 자국 내로 퍼질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한을 두둔하는 이유와 비슷한 이유.


[28] 물론 이쪽으로 침략하고 전쟁을 치른 영국군이나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