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3 13:27:50

조로아스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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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로아스터교불의신전.jpg
<colbgcolor=#293f6e><colcolor=#f8e6c0>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 자라수슈트라)
시작 기원전 1800년경 ~ 기원전 640년경
페르시아
신의 관한 사상 단일신교Henotheism
규모 약 12만 명[2]
파일:파라바하르.svg
조로아스터교의 대표 상징 파라바하르(Faravahar)[3]


1. 개요2. 신화3. 역사
3.1. 창시와 전파3.2. 사산 왕조 시대3.3. 이슬람 시대
4. 현대5. 교리
5.1. 단일신교5.2. 프라쇼케레티
6. 파생 종파7. 다른 종교와의 관계
7.1.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7.2. 브라만교, 힌두교
8. 유명 신자9. 대중문화에서

[clearfix]

1. 개요

파일:3049-1.jpg
페르세폴리스 유적의 파라바하르 부조
[ruby(𐬵𐬏𐬬𐬀𐬭𐬱𐬙𐬀, ruby=huvarshta)] [ruby(𐬵𐬏𐬑𐬙𐬀, ruby=hūkhta)] [ruby(𐬵𐬎𐬨𐬀𐬙𐬀, ruby=humata)][4]

[ruby(کردار نیک, ruby=kerdaar-e nik)] ،[ruby(گفتار نیک, ruby=goftaar-e nik)] ،[ruby(پندار نیک, ruby=pendaar-e nik)][5]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또는 배화교()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로,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일신교Henotheism이다.[6]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

'배화교'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묘사한 이들의 모습이 주로 을 숭상한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실제로는 조로아스터교도가 하루에 5번 진행되는 의식을 신성히 여기기 때문에 의식에 쓰이는 성화를 보존하려고 한 것이지, 토속 신앙에서처럼 불을 숭배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이란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란 국민들에게는 전통적인 페르시아를 상징하던 유서 깊은 종교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현재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묻히게 되어 조로아스터교를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오히려 본고장인 이란보다 저 멀리 유럽에서 더 인기가 많을 정도.[7]

경전은 아베스타이다.

2. 신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란 신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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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역사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Zaraϑuštra, 조로아스터)가 세운 종교라고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본래 이름은 아베스타어로 '자라수슈트라(𐬰𐬀𐬭𐬀𐬚𐬎𐬱𐬙𐬭𐬀Zaraϑuštra)'인데, 이게 그리스에서 전사라는 뜻의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 Zōroastrēs)'가 되었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창시 시기와 자라투스트라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550년경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다.[8]

고로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연구는 창시자로 알려진 자라투스트라의 생년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자라투스트라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9세기 말까지는 소위 '전통적인 연대'라고 하는 기원전 6세기의 주장이 지배적이었으나 19세기 말 이후부터 바르톨로메아(Bartholomea)와 크리스텐센(Christensen)과 같은 학자들이 '전통적인 연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자라투스트라의 글로 알려진 가타스의 고대 아베스타 언어와[9] 리그베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가타스와[10] 리그베다의 언어가 비슷한 시기의 언어임을 밝혀냈다.[11] 즉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중 가장 오래된 언어로 쓰여진 가타스부분은 인도 브라만교 리그베다[12]보다 기원이 오래되었다.[13]

다만 이런 언어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기도하다.

1. 아베스탄어에 대한 자료가 조로아스터교 자료 외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아베스탄 문자 자체가 4세기 사산제국 당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조로아스터 경전과 노래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다. 아베스탄 언어는 그 이전에도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로아스터교 자료 외에는 이에 대해 현존하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 또한 살아남은 아베스탄 문자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88년경 자료이다. # 물론 이 부분은 이 주장의 타당성 문제라기 보다는 고고학적 연구의 한계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봐야 한다.

2. 구 아베스탄어의 기원 시점을 확실하게 입증할 증거가 없다
1번 문제와 함께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남아있는 구 아베스탄어(Old Avestan) 자료는 위에서 언급한 가타스 뿐이다.

그러나 위의 개인적인 반론과는 달리 학자들은 리그베다와 고대 아베스탄어의 언어학적인 근거 이외에도 리그베다와 가타스(고대 아베스탄어)의 내용에서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강력한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고있다. 이는 두 집단이 인도-이란(Proto-Indo-Iranian) 공통조상으로부터 분리된지 얼마지나지않았음을 시사한다.[14]

결론적으로 기원전 7세기 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없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로아스터의 활동시기에 대한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기원전 제2천년기 말에서 제1천년기 초 사이이다.[15]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1. 창시와 전파

파일:external/colleenday.files.wordpress.com/tumblr_lsu0mddvqu1qlziglo1_400.jpg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기원전 2000년에서 600년으로 다양하다. 이란 동부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하며, 박트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안정적 통치를 위해 토착종교와 관습을 용인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이란계 종족들의 범위 이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일부 소수민족들은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 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3.2. 사산 왕조 시대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때 파르티아 동부에서 번영했던 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중동에서 몰락했다.[16]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17]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으로 몰려 탄압당했다.

사산 왕조 시대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제국 영내에서 국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로아스터교 교리가 폐쇄적으로 배타적으로 변하면서 사산 제국 영토 바깥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를 무너트리는 시점에 등장한, 기독교와 유대교,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자이나교를 혼합한 마니교가 기존 조로아스터교 대신에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3.3. 이슬람 시대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사이의 악연은 예언자 무함마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니샤푸르에서 의학을 배워와서 메카에 병원을 차린 안 나디르 빈 알 하리스(An Nadhir Ibn Al Harith)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할 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함마드의 설교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있던 아랍인 청중들에게 카야니아 왕조[18] 연대기에 나오는 에스판디야르 왕이나 로스탐 신화를 들려준 후
“여러분, 무함마드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재밌는 우화를 말했다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나디르는 바드르 전투 때 패배하며 포로로 잡혔는데, 다른 쿠라이쉬 포로들의 경우는 관대한 처우[19]가 내려졌던 것과 반대로 나디르는 무함마드 앞에서 바로 참수당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동로마 군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 왕조를 격퇴하자 이를 매우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통 칼리파 시대의 아랍 정복자들도 페르시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속신앙과 달리 조로아스터교도 단일신교에 해당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나 유대교와 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근친혼 풍습까지 허용해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 취급 받던 마즈다크교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20]

4. 현대


파일:중국 진중 2.jpg

중국 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晋中市) 관할 제슈시(介休市 개휴시)에 남아있는 옛 조로아스터교 사원 건물.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밴드 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으로 유명하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질린 쿠르드족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4.1. 이란

파일:Wiki_Loves_Monuments_2018_Iran_-_Yazd_-_Atash_Behram-3.jpg
파일:Zoroastrian_Fire_Temple,_Yazd_(2).jpg
야즈드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아타쉬 베람(آتش بهرام): 우측의 불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이던 470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한다.[21]

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성전 아베스타는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은 분량만 해도 꽤 많고, 조로아스터교는 아베스타 이외에도 중세 시기에 작성된 여러 문서도 함께 사용한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겨우 1석을 반드시 조로아스터교도에게 할당하도록[22] 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란 혁명 이후인 지금도 유효하다. 팔레비 왕조의 국가인 < 황례포>의 3절에도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들어가 있다.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2500년 제전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는데 수구 이슬람주의자답게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서야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한때 부활 운동이 펼쳐졌었다. 워낙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종교이기도 해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조로아스터교 부활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현 이란인들이 과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때는 엄청난 기세를 보였지만, 이란 지도부에서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그냥 별 성과 없이 끝났고,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2. 인도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민족 집단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힌두교 신자들은 이들을 카스트 제2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 파르시 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개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생활방식이 서구화되고 뭄바이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 파르시들은 출생률도 낮아 인구가 감소중이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인도의 여러 민족 중에서 파르시들이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고 익힌 덕분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친 근현대에 와서 이들의 상권이 더 강화되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 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 가문이 파르시이다.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 모터스 소유이다. 타타 모터스뿐만 아니라 타타 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우주 산업까지 안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영국의 전설적 록그룹 프레디 머큐리 역시 파르시 혈통이었다.[23]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였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는 이란에서 영국령 인도로 떠나는 추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이라니"라고 불리고 있다. 통계상으로도 다르게 집계되고, 파르시와 이질감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기 때문에 통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5. 교리

파일:external/fabweb.org/1-zoroastrianism-prayers.jpg
조로아스터교는 흔히 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불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도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하루 5번의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창조자의 피조물인 공기, 땅, 불, 물,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런고로 당시 유행하던 짐승을 죽여 피로 땅을 더럽히는 제사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는 것, 식물성 마약에 취해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 모두 금기시한 것이다. 불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이유로는 사산 왕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식의 '성상 파괴'가 일어나서 예술로 쓰이는 것 외에 종교 의식에서 성상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불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4]

시체로 불이나 땅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화장을 기피하고,[25] 조장(鳥葬)을 선호하고 있다. 언덕에 벽돌이나 돌로 쌓고 시체를 안치할 받침대를 설치한 '다크마(dakhma)'라는 8m 정도 높이의 장례용 탑을 만들고, 대머리수리들이 시체를 뜯어먹게 하면 깨끗한 뼈만 땅으로 떨어진다나. 문제는 환경오염으로 조장에 쓰이는 대머리수리의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본고장인 이란에서는 이슬람 정권 수립 이후 금지된 장례법이어서 이 풍습도 위협받는 중.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단일신교 종교"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 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마즈다/오르마즈드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존재가부정되진 않으나, 신들의 성격은 아후라마즈다 단일신에 집중되어 숭배된다.

현재 남아있는 아베스타를 보면 평화와 화합, 도덕적 생활을 통한 번영을 중시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자라투스트라의 방문을 받은 마을이  거지처럼 못살다가 자라투스트라의 지도를 받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내용이다. 목축민과 유목민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유대교와는 달리, 농민과 도시민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점은 베다 종교( 브라만교, 힌두교)와 대비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하는 신심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세가지의 좋은 행동,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즉 아후라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말을 낳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본다.

5.1. 단일신교

조로아스터교는 단일신교Henotheism이다. 단일신교는 비슷한 말인 일신 숭배Monolatry나 유일신교Monotheism와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다른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부정하진 않으나 신들의 모든 속성을 한 신에게 집중시킨 한-신-숭배를 말한다. 고대 이집트 종교,[26]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서 주장된 우주발생적 원리[27], 그리고 조로아스터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신 숭배Monolatry는 여기서 더 나아간 개념으로, 다른 신의 존재/비존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단일신교Henotheism와 같으나, 다른 신 숭배의 '무효성' 곧 '헛됨'을 주장하며, 한 특정 집단(씨족, 종족)과 강력하게 결부되어 이 집단과 관련하여 독점성이 요구된다. 왕정 시대 유다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일신교Monotheism는 여기서 더더욱 나아간 개념으로, 다른 신의 존재가 이론적으로도 부정된다. 유다교에선 왕정 시대 말기 예언자들에게서 조금씩 나타나다가, 바빌론 유배를 기점으로 급격히 확산된다.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혼란을 겪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종교를 다신교/유일신교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다보니 일리아스의 제우스 같은 단순 주신 개념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배 후 유다교의 신론과도 너무나 다른  아후라 마즈다의 성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대중적인 오해 수준을 넘어서, 비교종교학과의 학술 교류가 적은 많은 학자들과 번역가들도 실수하는 대목이다.[28]

일단 아후라 마즈다의 위치는 일반적인 다신교의 주신 개념, 곧 일리아스의 제우스와는 다르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존재가 아니긴 하지만, 창조주이자 선의 힘인 아후라 마즈다가 나중에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빛의 힘에 패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숭배한 대상은 오로지 아후라 마즈다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일신을 넘어 유일신 개념으론 볼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애초에 숭배의 단일성은 19왕조 이후의 이집트 전통 종교도 공유하는 개념이며, 모든 신이 아문-레-프타 삼위일체의 피조물에 불과하단 관념이 이집트 전통 종교를 '유일신교'로 만드는 건 아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타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나온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타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타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만든 것이 주르반이라고 말한다.

5.2. 프라쇼케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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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쇼케레티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종말론이다. 현재 알려진 종말론 중에 가장 오래된 종말론으로 기원전 500년 이전에 성립되었으며, 아브라함계열의 종말론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거대한 운석이 추락하고 그 열로 모든 산에 묻혀있던 금속들이 녹아 강을 이루어 흐르고 이로써 세계가 멸망한 후 다시 세상이 시작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6. 파생 종파

대충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상에 있고, 향후 수백 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 주르반교: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 참조.
  • 미트라교: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 마니교: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불교, 기독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주류로부터 탄압받으며 키운 맷집 덕분인지 이슬람 칼리프조 시대에도 주류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은 압바스 칼리프조 시절에도 이슬람에 맞서 마니교를 대놓고 전교하고 다녔으며, 마니교 선교사들과 이슬람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중세 무타질라 학파[29]의 시발점이 되었다.
  • 마즈다크교: 5~6세기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재산의 공동 소유 교리에는 배우자를 공유해야 하는 사항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 귀족들의 하렘을 습격해서 여자들을 납치해서 마즈다크 교단에 편입시킨 사건 이후 결국 호스로 1세 치세에 이단으로 몰려 거의 절멸당했다.

7. 다른 종교와의 관계

해외 사이트에서 참고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britannica
  •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신교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일신론적 요소와 이원론적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 기독교 및 이슬람의 신념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다.
  •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설립되었으며, 유대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 보다 앞서있다.

history
  •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고대종교로 4000년 전에 기원되었을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 최초의 유일신 신앙,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이다.
  • 일부학자들은 조로아스터가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었던 키루스 대왕과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믿지만, 대부분의 언어학적,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원전 15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
  • 1990년대 청동기 시대 유적지인 고누르 테페에서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초기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을 발견했다. 이 사원은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로아스터교와 관련된 최초의 장소이다.
  •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 교리가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을 통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포함한 주요 아브라함 종교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 단 하나의 신, 천국과 지옥, 심판의 날을 포함한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은 유대 왕국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감금되어 살아온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공동체에 처음 도입되었을 수 있다.
  •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했을때, 그는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그들의 후손들이 히브리 성경을 만드는 것을 도았다.

bbc
  • 기독교는 미국과 유럽의 정체성과 가치를 정의하고 이러한 가치를 중동 '타자'의 가치와 대조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고대 종교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건전한 서구의 이상, 신념 및 문화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실제로 이란으로부터 그 뿌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대이란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살았다고 믿는다. 자라 투 스트라 이전에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힌두교로 알려지게 될 인도-아리안 종교에 상응하는 옛이란 아리아 종교의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관행을 비난하고 지혜의 주님 아후라 마즈다에게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도 아리아인과 이란 사이의 큰 분열을 기여했을 뿐만아니라 인류에게 최초의 일신교 신앙을 소개했을 것이다.
  • 천국과 지옥, 심판의 날과 세계의 마지막 계시, 천사와 악마의 개념은 모두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과 조로아스터교 문학에서 유래했다. 사탄의 개념조차 근본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이다.
  • 조로아스터교 사상은 어떻게 아브라함 신앙과 다른 곳으로 들어갔을까? 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개념들 중 많은 것들이 페르시아 황제 키루스 대왕에 의해 해방된 바빌론의 유대인들에게 소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유대인 사상의 주류로 흘러들어갔고, 베엘제붑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 그리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성기에 페르시아가 그리스 땅을 정복한 후, 그리스 철학은 다른 방향을 택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전에 인간에게는 선택의지가 거의 없으며, 인간의 운명은 변덕과 공상에 따라 행동하는 많은 신들의 자비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란 종교와 철학을 알게 된후 그들은 마치 자신이 운명의 주인인것처럼 느끼기 시작했고, 그들의 결정은 그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조로아스터교는 서구의 사상, 종교, 문화에 대한 모든 기여에도 불구하고, 세계최초의 유일신 신앙과 이란의 창시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거의 잊혀진 종교 조로아스터교는 '우리(서구)'가 '그들'과 얼마나 비슷한 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지도 모른다.

worldhistory
  •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세운 유일신교 신앙이다.
  • 초기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조로아스터교를 박해했지만 조로아스터의 근본 개념은 유대교뿐만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실 구원에 대한 개인의 책임, 사후심판, 메시아, 종말,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발전시킨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며, 후대 종교의 선구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비전들은 실제로 몇세기전에 조로아스터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이외의 이견들을 묵살시킬 시도가 필요없을 정도로 확신한다.

wikipedia
  •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이다.
  •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론, 메시아, 사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자유의지와 같은 독특한 역사적 특징들이 제2신전 유대교, 그리스 철학,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 다른 종교 및 철학 체계에 영향을 미쳤을수있다.
  • 조로아스터교의 뿌리는 기원전 2천년 초의 공통된 선사시대 인도-이란 종교 종교 체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 예언자 조로아스터는 많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10세기에 살았던 다신론적인 이란 종교의 개혁자라고 생각한다.(단 역사적인 기록은 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soas
  • 고대 페르시아 종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신앙 중 하나이며 이란이 종교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중 하나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선사시대 인도-이란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베다 종교 및 힌두교와 공통된 유산을 공유한다. 오랜 역사에서 조로아스터교는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7.1.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문화·군사·체제 정비 등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 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토라(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전시기에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로 편집되고 수정된것이 바빌론 유배 이후이고 이 시기에 쓰여진 새로운 역사와 연대기는 유다 성전이 독점적으로 있었던 예후드(페르시아의 유다이아 속주)의 영향이 반영되어있다.[30] 또한 바빌론 유배기 동안 유대인은 고난과 고통으로 민족일치를 강화했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교를 정립하였고, 이 기간 동안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실 유다교 유일신론은 조로아스터교 표절이다" 같은 자극적인 글도 쉽게 돌아다닌다.

그러나 이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만' 유일신교와 단일신교를 혼합하고 유다교에 대해서'만' 유일신교와 단일신교를 구분하는 모순과, 가장 엄격한 유일신교 구약 텍스트가 나타나는 시점마저도 페르시아 시대 전이라는 모순을 둘 다 무시해야 성립하는 주장이다.

일단 구약에서 연대기적으로 가장 이른 유일신교 텍스트는 제2이사야서(이사 44,6-8; 45,6.18)[31]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런데 비평적으로 제2이사야서는 페르시아 정복 전에 저술되었다. 제2이사야 "메시지의 연대는, 이 이사야서 제2부가 페르시아의 승리, 바빌론인들의 쇠퇴,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인들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제2이사야서는 기원전 550년과 539년 사이,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 대왕이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즈와(기원전 550년) 리디아 왕국의 크레수스를(기원전 546년) 제압한 다음(41,2-3 참조), 바빌론을 침공하기 전에(45─48장) 선포되었다."[32] 즉 단일신교Henotheism나 일신 숭배Monolatry와 구분되는 가장 좁은 의미의 유일신교Monotheism는 비평적으로 페르시아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기 전에 나타난다. 물론 오경과 예언서 묶음의 최종합성은 페르시아의 정복 후에 나타나지만, 유일신론 텍스트 자체의 연대 추정은 페르시아의 정복 전이다.
야훼 일신 숭배Monolatrie의 다신교Polytheismus적 테두리의 와해는 제2이사야서에서 명확히 읽어 낼 수 있다(이사 40-45장 참조). 온 세상에 대한 재판이라는 문학 양식을 통해, 이방 신들에게는 역사에 대한 어떠한 통찰이나 개입의 권한도 없다고 선고한다(이사 41,21-29 참조). 유일신교Monotheismus로의 결정적 한 걸음은, 야훼 이외 다른 신들의 비-유효성으로부터 그것들의 비-존재를 추론해내는 일에서 내디뎌졌다: "야훼 이스라엘의 임금님,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 나와 같은 자 누구냐? 누구든 말해 보아라. 그것을 알리고 내 앞에 펼쳐 보아라. 다가올 일들을 누가 예전에 들려주었느냐? ... 너희는 무서워하지 마라. 겁내지 마라. 내가 예전부터 너희에게 들려주고 알려 주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이 또 있느냐? 다른 반석은 없다. 나는 그런 것을 모른다"(이사 44,6-8).
제2이사야서에 직접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 (역시 바빌론 유배 시기를 가리키는) 신명기 최종 편집에서도 분명한 유일신 신앙의 증거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핵심 텍스트인 신명기 4장[33]이 더 오래된 1-3장과 5-6장 사이에 끼워 넣어졌고, 그래서 이 앞뒷장들도 단호한 유일신 신앙의 의미에서 읽힌다. (중략) 이스라엘이 하필이면 바빌론 유배 시기에 유일신 신앙고백을 정식적으로 표현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그리스(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와 페르시아(차라투스트라)에서도 한-신-신앙이 입증되는 시기에, 유일신 신앙에 이르렀다. (중략) 이스라엘이 이미 다신교 환경 안에서 일신 숭배 형태로 야훼-계시의 본원적 내용을 고백하고 살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신 숭배와 유일신 신앙에서 관철된 근본 모티브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인격적-독점적 관계였다. "야훼께서는 유일하시다!"라는 단호한 외침은 결국은 논증적 논리의 문장이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언어에서 유래한다(아가 6,8-9 참조). 야훼의 '질투'에 관한 신명기의 언설 역시 이 독점성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질투는 - 여전히 다신교적인 환경에서의 말장난이거니와 -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준비했고 또 그것을 항구적이고 실존적으로 확립했다(신명 5,9; 6,15 참조).
위르겐 베르비크Jürgen Werbick, 도로테아 자틀러Dorothea Sattler, 테오도어 슈나이더Theodor Schneider, 『교의학 I/1: 서론, 신론』Handbbuch der Dogmatik BD. 1: Prologomena / Gotteslehre (22000),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24, pp.130ff

또한 바빌론 유배 및 귀환이 유다교의 신학에 극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건 널리 인정받지만,[34] 조로아스터교부터가 유일신교가 아니라 단일신교였기에, 유배 후 유다교의 이론적 유일신교가 단일신교의 표절이 되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유다교는 기원전 9세기경 이미 단일신 신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35]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다인들 절대다수에게서 다신교가 퇴출되는 건 헬레니즘 시대에나 일어나는 일이지만[36] 늦게 잡아도 기원전 7세기 남왕국(유다) 임금 요시야의 종교개혁 시기엔 최소한 예루살렘 엘리트들에게선 단일신교 개념이 나타나고[37] 구약학에서 신명기계 Deuteronomistisch(약어: Dtr)라 불리는 이 예루살렘 엘리트들의 신학은 유배후 모세오경 편집의 주요 축을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유다인'이 언제부터 다신교를 벗어났냐고 물으면 관점에 따라선 헬레니즘 시대까지 밀리지만, '구약성경' 유배 전 텍스트층에선 아무리 회의적으로 잡아도 '단일신교'가, 그리고 페르시아의 정치적 지배 전부터 '유일신교'가 나타난다.

또한 구약의 중추인  모세오경의 성립시기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지금 형태의 모세오경로 편집된 것은 페르시아 시대(어쩌면 헬레니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승이 유배 전으로 올라가고, 아예 텍스트 차원에서도 오래된 부분들이 병존한다는 데는 구약학의 제학설들이 거의 일치한다. 

반면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 경전은 그 정립시기가 BC도 아닌 AD 4~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 가장 오래된 사본마저 14세기에 작성된것이다. # 경전의 정립시기로만 따지면 유대교가 최소 10세기를 앞서고, 현존하는 사본은 거의 20세기가 넘는 차이가 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유일신교로서의 유다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라는 가정은, '유일신교'의 기준을 유다교에 대해서만 협의로,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만 광의로 적용해야만 성립한다.

7.2. 브라만교, 힌두교

사실 조로아스터교와 더 연관성이 깊으면서도 대립성이 강한 종교는 인도 브라만교 힌두교이다.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에서는 서로의 신과 악마가 뒤바뀌어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Ahura)는 인도 신화 아수라(Asura)로, 조로아스터교에서 저급한 악마로 보는 다에바(Daeva)는 곧 인도 신화의 데바(Deva) 신족과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옛 인도-이란인 의 원시적인 종교에서 이미 이 같은 신족의 분화가 존재했고, 이란에서는 아후라-아수라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었으나 인도에서는 데바-다에바 계통의 신앙이 강화되면서 이런 대비가 나타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38]

8. 유명 신자

9. 대중문화에서

조로아스터교는 현실에서 교세가 이슬람교에 비해서 매우 약하고, 신자 수도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는 이슬람교와 함께 중동/ 중양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대중매체에서도 테러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이슬람에 비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이다.

  •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소설)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여 극의 핵심을 관통하는 요소로 쓰인다.
  •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보트에 탑승한 작살잡이 중에서 필리핀 출신인 페댈라가 조로아스터교 신자다. 모비 딕을 발견한 지 이틀째 날에 모비 딕이 에이헤브 선장의 보트에 격돌하고 그 과정에서 실종되는데, 사흘째 날에 모비 딕의 몸체에 그물과 작살과 함께 묶인 페댈라의 시신이 발견된다. 페댈라는 에이헤브에게 밧줄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죽은 뒤 에이허브 선장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바로 그 사흘째 날에 그의 경고와 예언이 실현된다.
  • 페르시아의 왕자 2: 그림자와 불꽃의 후반부에서 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왕자가 자파를 무찌르기 위해 조로아스터의 불을 훔치러 가는 것. 맨 위의 상징처럼 독수리 모자와 옷을 입고 등장한다. 불을 얻기 전에는 병사와 똑같이 움직이지만 불을 얻으면 칼을 버리고 굽신거린다.
  • 악튜러스에 조로아스터교 관련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앙그라 마이뉴 등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된 소재가 많이 나온다.
  • 신좌만상 시리즈 흑백의 아베스타는 세계관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온 판타지 소설이다. 주인공 파티의 일원의 절반과 적 세력인 칠대마왕, 주신이 이름이 모두 조로아스터교에서 따왔다.
  • 중국에서는 배화교나 현교(祆敎), 화천교(火祆敎)라고도 불렸다. 김용의 작품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명교는 현교와 명교(明敎)라 불린 마니교, 그런 마니교와 불교, 도교, 토착 신앙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의 특성들을 혼합한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다. 작가 김용은 명 태조 주원장이 백련교의 영향을 받던 홍건적의 일원이었다는 점과 중국을 통일하고 난 뒤에 백련교를 금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소설의 배경을 만들었다. 소설 속 명교는 원래 주원장이 소속되어 있는 종교로 원 왕조를 몰아내는데에 앞장섰지만,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주원장에게 토사구팽당한다는 결말을 맞이했다. 문제는 소설을 읽은 이들이 소설 속 명교와 현실 세계의 조로아스터교를 혼동하여 명백히 현교라 불린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에서 명교라 불렸다고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이뤄지던 일인데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관심도 적고 종교 자체의 영향력도 낮아서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기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이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확장팩 올드 갓(Old God)에서부터 플레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일 경우 근친혼(신성혼)을 하면 봉신들과의 관계가 올라가고 신앙심을 얻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붙은 별명이 현관교. 단, AI가 너무 근친혼을 선호해서 자손이 늘지 않는다.[41]
  • 위와 같은 패러독스 게임인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단 1개 프로빈스가 조로아스터교로 등장하며, 시작 시점에서 국교로 삼은 나라는 없다. 조로아스터교 커스텀 국가를 만들어 특정 프로빈스들을 정복하라는 업적이 있는데, 게임 내 모든 종교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초반 운신이 힘들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867년 시나리오 플레이시 이란 북부에 위치한 마잔다란과 타바리스탄 지역의 영주들만이 믿던 소수 종교였고 1066 시나리오에서는 아예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독립 영주는 사라진 상태다. 이후 페르시아의 유산 dlc로 마잔다란 영주들의 비밀 종교로 바뀌게 되어 시작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독립 영주는 없어졌다. 물론 비밀종교인 만큼 신앙력 250을 지불하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비밀종교 폭로 이벤트에서 조로아스터교 선택시 다시 공식 종교로 돌아오긴 한다. 특히 3에 들어와서 조로아스터교가 세부종파별로 나뉘게 되는 등 좀 더 신경 쓴 느낌이 난다. 특히 조로아스터교 신앙을믿는 상태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통제하고 있을 경우 사오샨트(= 구세주) 결단을 수행할 수 있는데 이슬람교의 사이드와 같이 동일 신앙에게 +5 의견을 주나 추가로 학습력 +1이 붙어 있어 유니크 특성 수집을 할 생각이라면 나쁘지 않다. 따라서 숙련된 플레이어라면 한번 조로아스터교 부흥을 목표로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컨셉 플레이다. 참고로 조로아스터교의 대성전 이름은 대정화라 불린다.
  • 종말의 크로니클의 9th-G
  • 삼류무사에서는 마교로 몰려 오래 전에 멸문했다. 지상 최강의 단일문파로, 그들의 수장이자 당대 명교주였던 서문탁의 [대정일검보]와 그를 곁에서 수행했던 좌우쌍사의 [일천마라형], [철화정련]은 삼류무사 세계관에서도 불패삼공으로 통한다. 명교는 교리(대표적으로 금식과 금욕, 특히 성욕의 자제를 통해 초인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는 점)와 막강한 무공(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비무를 청해 서로 겨뤘지만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 나갔고, 이는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구파일방을 자극했다. 결국 구파일방이 당문의 독[42]을 써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하나하나를 철저히 뒤쫓아 살해함으로써 명교의 세력을 뿌리 뽑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율법자들을 만들어 명교의 불패삼공을 뒤쫓았다.
  • 얼음과 불의 노래 를로르교가 조로아스터교를 모델로 하였다. 마찬가지로 불을 신성시하며 빛과 불의 신 를로르와 어둠과 추위의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다른 신"이 대립하는 이신론적인 교리를 보인다. 그리고 근친상간 대신 근친살해를 부추겨 막장을 실현하고 있다.
  • 영웅전설 4 발두스 오크툼 역시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한 측면을 보여준다.
  • 웹소설 나노 마신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웹툰 나노마신에 등장하는 가상의 종교인 천마신교의 전신이 배화교라고 나온다.
  • 만화 쟈히 님은 기죽지 않아!의 등장인물 쟈히 드루지, 사르와는 조로아스터교의 악마 이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 원신 수메르는 조로아스터교에서 명칭을 따온게 많다.[43] 이외에도 리월 야타용왕의 영어 이름은 아지다하카에서 따왔다.
  • 토탈 워: 아틸라: 종교 중 하나로 나오며 사산 왕조와 그 속국들이 믿고 있다.[44] 고유 특성으로 모든 속주의 성장률을 증가시켜주며 관련 칙령으로 부패 감소 칙령과 성장률 증가 및 타종교 공질 페널티 감소 칙령이 존재해 내정 특화 종교다. 건물은 납골당 테크와 신전 테크로 나뉘는데 신전 테크는 종교 영향력과 공질 보너스에 특화되어 있으며 납골당은 다량의 위생 보너스를 제공한다.

[1] 페르시아어마즈다야스너라고 읽으며 그 뜻은 ' 마즈다를 믿는 종교', 즉 마즈다교. 현재 이란 현지에서 해당 종교를 부르는 명칭이다. 영어권에서도 이를 차용해 Mazdayasna, 혹은 Mazdaism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2] 신자의 대부분은 인도· 이란 지역에 거주 중이다. 다만 이란의 경우 이슬람 근본주의로 인해 신자 수가 적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3] 절대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자주 쓰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상징으로도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타 종교의 상징이 금지되는 현재의 이란에서도 국가적 상징으로 허용되고 있다. [4] 아베스타어.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읽는다. [5] 페르시아어.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읽는다. [6] 유일신교Monotheism 혹은 일신 숭배Monolatry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세한 건 후술 [7] 서양은 현대에 들어 오리엔탈 판타지 바람이 불며 동양 철학, 동양 종교 붐이 주기적으로 돌고 있다. 히틀러가 인도 사상에 심취했다는 말도 있듯 이런 현상은 그리 최근만의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구시대적 기독교적 가치나 물질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모양. 오컬트적 요소에 대한 관심도 있다. 이건 불교 도교 등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 정작 본토에선 힌두교, 이슬람교, 공산주의 등에 밀려 사장되었으나 서양에선 뜨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 [8] 고고학적 한계도 있지만 원래 존재하던 이란계 민족의 토속 신앙에 기반해서 성립된 종교라 기존의 토속 신앙과 신화의 많은 부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느 시기부터 단일신 종교로 변화했는지 알기 어렵다. 창시자에 대한 명확한 기록의 부재와 더불어 조로아스터교의 정확한 성립시기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 [9] 아베스탄어는 고대와 신대 아베스탄어로 나뉘는데, 고대 아베스탄어는 베다 경전이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와 동일한 어족인 동시에 같은 시대에 자매어로써 존재하였다. [10] 조로아스터교 경전 중 하나인 가타스는 전통적으로 자라투스트라가 직접 작곡한 17곡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다. [11] 신양섭. (2009). 페르시아 문화의 동진과 조로아스터교. 한국중동학회논총, 30(1), p44. [12]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베다경전 [13] 신규섭. (2018). 전이과정에서 본 고대 문학의 원형 연구. 세계문학비교연구, 62, p178-179. [14] Bryant 2001:130–131 The oldest part of the Avesta... is linguistically and culturally very close to the material preserved in the Rigveda... There seems to be economic and religious interaction and perhaps rivalry operating here, which justifies scholars in placing the Vedic and Avestan worlds in close chronological, geographical and cultural proximity to each other not far removed from a joint Indo-Iranian period. [15] Bruce Lincoln. Death, War, and Sacrifice, 1991, pg 150 [16] 혜초 왕오천축국전 같은 사료를 보면 페르시아 일대에도 불교 사찰이 있으나 몇 안 되는 사찰들마저 승려 한두 명이 초라하게 지낸다는 서술이 나온다. [17] 탄압 받고 몰락한 페르시아의 불교 세력을 흡수했다. [18]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왕조 [19] 글을 모르는 무슬림 10명에게 글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해방한다든지. [20] 중국으로 피난간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인도의 파르시처럼 부유한 무역 상인으로 유명했었다. 당나라 때 속담으로 “의사가 앓고 페르시아 사람이 궁한 상황”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 중국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인도에서와 다르게 전부 현지인과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21] 본래 페르시아의 고장인 파르스 지방에 있었는데 15세기경 이곳으로 옮겨졌다. [22]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유대인도 마찬가지 적용을 받음. [23] 허나 프레디는 본인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를 부끄러워하고 항상 숨기려고 했으며, 부모와 달리 조로아스터신도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1991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프레디의 유가족들은 그를 조로아스터 전통 풍습인 조장으로 장례지내려 했으나 그의 평소 행실을 알던 퀸 멤버 등 주변인들의 반대로 화장되었다. [24] 출처 - 페르시아: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25] 같은 이유에서 흡연을 절대 금기시한다. [26] 신들은 제18왕조부터 아문의 피조물로, 제19왕조부터는 아문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몇 번이고, 이집트 원천들은 신의 일성/하나임/유니크함을 가리킨다."Time and again, the Egyptian sources predicate the oneness/singleness/uniqueness of a god. (Jan Assmann, Moses the Egyptian: The Memory of Egypt in Western Monotheism, Havard University Press, 1998, p.193) [27] "그리스 철학은 시인들에 의해 촉진되고 그리스 민중들이 공유하게 된 믿음의 자극 하에 그 경력을 시작했다. 이 믿음은 우주만물에서 드러나는 모든 힘이 신이거나 신적이며, 모든 신이 힘이고, 모든 신이나 신적인 힘들이 서로 관계되어 있으며, 하나의 신이나 신적인 힘이 다른 모든 신이나 힘들에 대해 최고의 주권을 지니고, 그로부터 현실의 신적인 우주와 다른 신들을 포함하여그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된 우주발생론적인 신이나 신적인 힘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철학적 사유의 본질적인 새로움과 예를 들어 탈레스와 피타고라스를 초기 그리스인들과 구별시키는 특징은 탈레스와 피타고라스가 이러한 믿음 가운데 마지막 두 항목을 명시적으로 융합하여 우주발생론적인 신적인 힘을 최고의 신적인 힘과동일시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번역, 도서출판 b, 2011, pp.211f [28]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단일신론Henotheism은 이스라엘과 페르시아뿐 아니라 이집트, 희랍에서도 낯설지 않았다. 다신교가 주신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다신교로 나아가고,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신을 단일신의 단면이나 피조물로 보는 보는 건 지중해 세계에서 거의 전형적이라고 해야 할 현상이었다. 물론 동시대 동지역에서도 다양한 신론이 병존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되지만(유배 후에도 이스라엘엔 다신론자가 있었고, 희랍의 형이상학적 단일신론은 명백하게 전통 다신교와 공존했다), 아무리 그 비중을 낮게 잡더라도 이집트, 팔레스티나, 이란, 희랍에서 단일신론의 개념 자체가 낯설다고 볼 순 없다. [29] 이슬람 사변철학 [30] Coogan, Michael David; Brettler, Marc Zvi; Newsom, Carol Ann (2007). "Editors' Introduction". In Coogan, Michael David; Brettler, Marc Zvi; Newsom, Carol Ann (eds.).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with the Apocryphal/Deuterocanonical Books.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288803. [31]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3개의 거대한 편집층(지엽적으로는 더 많다) 중 두 번째 시기의 편집층을 현대 구약학에서 지칭하는 통칭. 이사야서 40-55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32] 『주석성경』La Traduction œcuménique de la Bible,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역, 2010 [33] (발췌자 주석) 좁은 의미의 유일신 신앙으로 구약학에서 간주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ruby(주님, ruby=YHWH)]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최근 편집층인 4장의 유일신 신앙 고백을 통해, 더 오래된 (그러나 협의의 유일신 신앙에서 저술되진 않은) 1-3장과 5-6장이 4장의 문맥에서 읽히게 된다는 것이다. [34] 조로아스터교 문서에서 오경의 연구사를 길게 쓸 수는 없지만, 유배 및 귀환이 유다교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연구자들의 넓은 동의를 받는다. 의견이 분분한 것 중 하나는 페르시아의 영향인데, 1990년대까지는 페르시아의 정치적 지지와 인가가 모세오경의 합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널리 유행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모세오경의 합성을 다시 유다교의 내부 동기로 설명하며, 페르시아 인가 가설은 다수설의 위치를 상실하였다.[참고: Erich Zenger 등,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2008), 분도출판사, 2012, pp.221ff] [35] Eakin, Frank E., Jr. (1971). The Religion and Culture of Israel. Boston: Allyn and Bacon. pp 70. [36] BBC 다큐멘터리에서 허버트 니어(Herbert Niehr) 교수는 기원전 10세기와 586년 바빌론 유수 사이에 다신교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보편적인 종교로 존재했고, "유대인들은 일신교도였다"라는 말은 마카베오 시대, 즉 기원전 2세기 이후로만 옳다고 밝혔다.(Between the 10th century and the beginning of their exile in 586 there was polytheism as normal religion all throughout Israel; only afterwards things begin to change and very slowly they begin to change. I would say it the sentence "Jews were monotheists" is only correct for the last centuries, maybe only from the period of the Maccabees, that means the second century BC, so in the time of Jesus of Nazareth it is true, but for the time before it, it is not true.) 출처) [37] Anderson, James S. (2015). Monotheism and Yahweh's Appropriation of Baal. Bloomsbury. pp 3. [38] 사실 데바를 우위에 놓는 인도 신화에서도 아수라는 여전히 대단히 강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때도 많이 있고, 데바 신들도 비열하고 악랄한 면이 있어 거의 악당에 가까운 행동을 할 때가 많다. [39] 단, 초대 황제인 키루스 2세의 경우, 현재까지 발견된 당대 기록물들 중에서 벨-마르두크와 나부 등 바빌론의 신들을 공경하고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확인되는 반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선 후대의 위조가 확실시되는 비문을 제외하고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신앙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40] 프레디 머큐리의 부모님은 상당히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로, 그들은 아들 프레디가 죽은 뒤 조로아스터 교리대로 조장을 하려 했다. 하지만, 프레디는 신자이긴 해도 세속적 성향이 강한 명목상 신자였던 데다, 의 다른 멤버들의 반발과 사람들의 거부감이 우려되어 매장을 하였다. [41] 실제로 조로아스터 귀족과 사제들은 Xwedodah라 불리는 근친혼을 하곤 했다. 모자결혼이 가장 경건한 행위이고 그 다음이 부녀결혼, 남매결혼이었다고(...). 그리스인, 로마인, 무슬림, 혜초같은 불교 순례자들은 하나같이 혐오감을 표했으며 이러한 풍습은 중세 시대에 스리슬쩍 사라졌다. 요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그런 짓 안하니 오해말자. [42] 마치 생물처럼 닿은 것을 모조리 강한 산성으로 변화 시키는 산(酸)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걸 써서 명교 총단의 근방의 우물물들을 모조리 오염시켜 총단을 지키던 명교도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 [43] 아나히타에서 따온 나히다, 파리둔을 도운 대장장이 카베에서 따온 카베, 아메샤 스펜타에서 따온 수메르 아카데미아의 각 학부 등 [44] 단 라흠과 아르메니아는 원역사를 고증해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래도 종교 개종은 가능해 이들이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