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26:46

마사코 황후

마사코 황태자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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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후
마사코
雅子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1c57a1ce.jpg
<colcolor=#dca600> 출생 <colbgcolor=#fff,#1f2023> 1963년 12월 9일 ([age(1963-12-09)]세)
도쿄도 미나토구
국가공무원공제조합연합회 도라노몬병원
즉위 2019년 10월 22일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
재위기간 일본 황후
2019년 5월 1일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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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dca600> 이름 <colbgcolor=#fff,#1f2023>[ruby(雅, ruby=まさ)][ruby(子, ruby=こ)](마사코)[1]
부모 부친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2]
1932년 9월 18일 ~ ([age(1932-09-18)]세)
모친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
형제 3녀 중 장녀
이케다 레이코(池田 礼子) 쌍둥이1[3]
1966년 7월 ~ (57세)
오와다 세쓰코(小和田 節子) 쌍둥이2[4]
1966년 7월 ~ (57세)
배우자 나루히토 천황
1960년 2월 23일 ~ ([age(1960-02-23)]세)
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
2001년 12월 1일 ~ ([age(2001-12-01)]세)
학력 덴엔초후 후타바 초등학교 (졸업)[5]
덴엔초후 후타바 중학교 (졸업)
덴엔초후 후타바 고등학교 (전학)
벨몬트 고등학교 (졸업)[6]
하버드 대학교 ( 경제학 / 학사)
도쿄대학 ( 법학 / 학사과정 수료)[7]
종교 신토
이력 외무성 외교관
신체 167cm[8]
십이지 토끼띠 (계묘년)
오시루시[9] 해당화 }}}}}}}}}
파일:마사코 황후 쥬니히토에.jpg
쥬니히토에(十二単)를 입은 마사코 황후
1. 개요2. 생애3. 세간의 평가
3.1. 동정3.2. 비난
3.2.1. 반전
4.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일본의 126대 천황 나루히토 황후, 전직 외교관.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이자, 아키히토 상황 미치코 상황후의 첫째 며느리.

2. 생애

2.1. 결혼 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사코 황후/결혼 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부친 오와다 히사시[10] 도쿄대학 출신의 법학자이자 외교관, 모친은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의 에어 프랑스 승무원, 그리고 쌍둥이 여동생들도 도쿄대와 게이오대 출신인, 이른바 "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인도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11]한 후 도쿄대학 법학부[12]를 거쳐 외무공무원채용상급시험을 통해 외교관이 되었다. 미국, 일본의 최고 명문대학을 섭렵한 외교관이라는 화려한 이력으로 비(妃) 후보로 꼽힐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다.

마사코 황후는 외교관 시절 일본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총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으로도 상당히 유명했었다.[13] 물론 황후가 된 지금도 이러한 언어 능력은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등극 이후 공무 등을 통해서 보여준 걸 감안하면, 그간 외국어 능력을 유지하려 한 부단한 노력이 엿보인다.[14]

2.2. 결혼 이후

2.2.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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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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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
고노에 다다테루
 ╟─
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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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2.2.2. 황태자비로서의 삶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사코 황후/황태자비 시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결혼 후에는 모든 경력을 단절당하고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서 황실의 안팎에서 모함, 비난에 시달렸던 비운의 황태자비로 살아야 했다. 특히 그녀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아들 출산'이었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겨우 아이코 공주 하나만을 낳아 눈칫밥을 먹었다.

2.2.3. 황후로서의 삶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사코 황후/황후 시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오랜 인내의 시간을 견딘 끝에, 드디어 황실에 시집온 지 26년 만에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황태자비 시절보다 오히려 황후 시절이 마음고생이 훨씬 덜한 듯한 것이, 사진만 봐도 이전보다 표정이 확 풀리고 살만해진(...)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2.2.4. 자녀

자녀 이름 출생
1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
(敬宮愛子内親王)
2001년 12월 1일 ([age(2001-12-01)]세)

3. 세간의 평가

3.1. 동정

일본 사회에서도 마사코 황태자비를 안타깝게 여기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보수성이 강하다 보니,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동정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측은 외국 언론들이다. 독일과 일본의 언론인이 집필한 <일본 황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 출판되어, 일본 황실을 비판하고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동정 여론을 펴기도 하였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전후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 전통과 변화의 양면이 충돌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위협에 휩싸여왔고, 지금도 폐지론에 시달리며 여러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 유럽의 왕실들도 여전히 보수적인데, 일본의 황실은 그보다도 더 보수적이다.[15] 일본은 에도 막부가 몰락한 이후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천황이 국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자리매김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며 다시 상징적 존재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일본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치며 급격한 변화를 겪었지만 황실은 '살아 있는 일본 전통의 상징'과 다름없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현대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이었고, 애초에 일본 황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국내와 서구권에서는 "황태자와의 결혼이, 한 촉망받는 외교관의 일생을 망쳐버렸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2020년대 일본에서도 국민들의 여론은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황태자와 결혼하며 인생이 단단히 잘못 돌아갔으나 이를 인내와 끈기 그리고 올곧은 소신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풀어나간 여걸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받기까지 마사코 황후는 황태자비 시절이던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일본 사회의 황실에 대한 보수적 혹은 방임적 시각과 황실의 괴롭힘을 견뎌내야 했다.[16]

3.2. 비난

특히 우익 세력들이 마사코 황태자비를 싫어한다.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일본 황실 궁내청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 주제에 후계자(아들)도 낳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며, 실제로 궁내청부터가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해 상당한 차별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서 더 나아가, 마사코 황태자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일관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는 일본 극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호리 구니오(小堀邦夫) 전 야스쿠니 신사 신관의 발언이 있다.

또한 한국의 엄마부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중년(즉 마사코 황태자비와 비슷한 연령대) 극우 아줌마들이 이 경향이 엄청나게 강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①자신과 다를 것도 없는 '평민 출신'[17] 주제에 무려 황태자에게 구혼받아 황태자비가 되어 ②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금실은 좋아서 이혼당하거나 소박 맞지도 않고 ③오랫동안 건강이 나빠 공무에 제대로 임하지 못해 자신의 세금을 '날로 먹으며' ④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껌뻑 죽는 ' 백인들'에겐 동정적으로 평가받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눈엣가시를 넘어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웹에서 '커트시(curtsy, カーテシー)'[18]로 검색해보면 가관이다. 커트시에 대한 정보를 다룬 사이트보다 먼저 뜨는 게 마사코 황태자비의 커트시가 ' 키코 님, 마코 님, 카코 님' 등의 아키시노노미야 모녀들보다 못하다며 구구절절이 까대는 극우줌마들의 블로그다. 읽어 보면 내용은 완전히 며느리에게 생트집 잡는 시어머니이며, 마치 복붙한 것처럼 하는 말도 다 똑같다.

심지어 학벌에도 트집을 잡아, 하버드 대학교, 도쿄대학,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학력에 대해 "외교관이던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의 빽으로 입학해서 졸업했다"며 학력과 능력을 부정한다. 당연히 US 대학평가에서 탑티어인 하버드대, 옥스퍼드대와 20위권인 도쿄대를, 고작 외교관 빽으로 합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도쿄대학은 일본의 모든 대학의 정점일 뿐더러 일본의 국공립대학 입학은 오로지 입학시험 성적만 보기 때문에, 그런 곳을 부정이나 빽으로 입학하면 일본이 뒤집어진다. 한국에서 서울대를 빽과 부정입시로 입학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래드클리프 여대에 다니다가 하버드 대학에 편입학했다"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는데, 물론 거짓 소문이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미국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다. 래드클리프 여대가 하버드 대학과 합쳐진 것은 오와다 일가가 미국으로 이사한 1979년보다 전인 1977년이고, 그 이전에도 애초에 래드클리프 여대는 ' 여자대학의 하버드'급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전에 여학생을 안 받는 대신 여학생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게 래드클리프 여대라, 재단만 같은 게 아니라 하버드생들과 래드클리프 여대생들 간 교류도 매우 많이 이루어졌고 사실상 ‘하버드 대학교 여자 단과대’처럼 운영되었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배출한 졸업생들의 면면만 보아도 위인전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헬렌 켈러, 작가이자 현대 미술의 판도를 뒤흔든 미술상으로 꼽히는 거트루드 스타인, 파키스탄 최초 여자 총리 베나지르 부토 같은 걸출한 여성들이 바로 래드클리프 여대 출신이다. 이런 사실들을 모두 싸그리 무시하고 '래드클리프'란 이름만 어디 주워 들어서 내뱉는, 전형적인 무식한 소리인 것이다.[19]

자신들이 싫어하는 좌익과 황위 계승 문제를 엮어,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아버지 히사시가 좌익이며, 일본 좌익들의 숙원들 중 하나인 황실을 없애기 위해 외손녀 아이코 공주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 한다"고 음모론까지 펼친다.[20] 딸인 아이코 공주가 자폐설이 있다는 루머에서 발전한, "아이코 공주가 장애가 있고 대역( 가게무샤)을 쓰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것은 덤.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긴 요양 문제와 아들이 없는 문제가 겹쳐졌으니, 황실을 숭배하고 만세일계[21]에 집착하는 넷 우익에게는 황실의 골칫덩이로 찍힌 셈이다.

3.2.1. 반전

그러나 아키히토 당시 천황이 황위계승권판을 뒤집으려는 후미히토의 경거망동한 행동과 이를 위해 우익들과 손을 잡은것도 모자라 궁내청도 후미히토를 밀어주며 황실에 개입하려는 것에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생전 퇴위를 결정하고 공식적으로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의 차기 천황 즉위가 선언되며 상황이 반전된다. 득남하지 못 했다고 마사코 황후를 갈구던 미치코 당시 황후 역시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작은며느리 키코 비와는 공식적으로도 상당히 거리를 두었다. 게다가 아이코 공주 가쿠슈인에서의 우수한 성적과[22] 거식증 논란, 후미히토와 키코 비의 문제점이 마코 공주의 결혼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진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태자인 나루히토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해 나쁜 소리를 늘어놓고 있던 우익들은 전부 천황 내외의 결정에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아키히토 상황 부부는 건강도 이전보다 좋아져서 공무는 물론 연구까지 활발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모두들 데꿀멍. 꼴 좋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올라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일본인들의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입장이 하나로 모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몸에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해 달라.'고 말한다.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점화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기만 하던 사람들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치부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2019년 천황 즉위가 다가오자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본인들은 지금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를 보면서 자신들이 지난 10년 넘게 언론 등에 의한 거짓말에 아주 철저하게 속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궁내청&우익&주간지는 나루히토에게서 황위를 빼앗기 위해 여론 공작을 벌이며 국민 여론을 조작해왔다. 나중에 후미히토의 자녀 3남매의 부정입학 문제가 떠오르면서 차츰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기는 했지만, 후미히토에게는 수 십년 후 황실을 짊어질 유일한 존재인 '아들' 히사히토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애써서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치부를 무시해왔다.[23] 게다가 이 당시에는 황태자 일가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공무에 열심이고 미인인 두 공주만으로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세금 문제[24]가 걸린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터지고, 이에 대해 궁내청 후미히토 일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고 사건을 계속해서 질질 끌기만 하자, 그제야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속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세금으로 먹고 살면서도 자신들의(국민) 여론은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황족으로서의 자각없이 오로지 황족의 특권에 목매여 살아가는 후미히토 일가의 태도에 일본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아키히토 덴노와 나루히토 황태자로 대대로 이어진 '국민과 함께 나아가는 황족관'[25]에 전혀 맞지 않았다. 덴노를 영혼의 일부이자 일본의 상징으로 여겨오고 자랑스러워하던 일본인들에게, 후미히토 일가의 '국민 무시'와 '온갖 특혜에 대한 뻔뻔한 태도'는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아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일본인이라면, 이 일련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이유만으로 언론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야 했던 나루히토 황태자 일가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히사히토 탄생 후 10년 간 말도 안 되는 음해와 괴롭힘을 당해왔음에도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면서 시련을 견뎌내고 때가 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여러가지 준비를 해두었던 나루히토 일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6][27]

특히나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 발표와 더불어 나루히토 일가의 반격에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아이코 공주의 훌륭한 성장이었기에, 득남하지 못 했다는 스트레스와 와병 중에도 그 교육을 전담했을 마사코 황태자비의 역량은 누가봐도 놀라웠으리라.[28] 그리고 종내에는 아이코 공주의 덴노 즉위를 대놓고 거론하기에 이르고, 그 후사에 대해서도 우익과 궁내청에서조차 구황족과의 결혼을 통해 해결[29]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다.

황태자 일가에 대한 여론을 호평으로 반전시킨 양대 요소가 양위 발표와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장[30]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사코 황태자비가 그간 얼마나 현명함과 인내심을 발휘해 왔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여기에 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훌륭한 책임감과 적극적인 지지, 상당한 수준의 교육 참여[31]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코 공주의 황족다운 모습[32]과 자력으로 도쿄대학 합격도 가능하다는 두뇌명석함은 일본 국민이 그동안 황실에 원하던 그렇지만 후미히토 일가는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황족의 기본 모습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환호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인식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하면서 마사코 황후의 황태자비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생겨났다. "궁내청이 늦었지만 황후가 그동안 바라오던 본인의 해외 친선 공무에 신경을 써주게 해서 아직까지 불안정한 건강 상태를 안정케해주었으면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제법 나오고 있다.

최근엔 남편의 천황 즉위 이후 한국 매체에도 그녀의 기구한 삶을 다룬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 황실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고, 일제시대에 대한 역사적 악연 탓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반성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아키히토 상황이나 다카히토 친왕 같은 현대의 인사들을 제외하곤 부정적 감정이 크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가와 마사코 황후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게 보고, 마사코 황후가 황실에서 겪은 왕따와 구박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보는 시각도 있다.

마사코 황후의 성격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늘 배려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공무 중에는 동선에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거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과거 극우세력들이 황태자비에 대한 흠집을 찾으려고 안달이 났을 당시에도 당시 황태자비의 인성 논란은 일절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단숨에 반박당할 정도로 부실한 주간지 기사에 실린 추측성 찌라시뿐이었다.

2019년 황후에 책봉되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빈방문에 참석하면서 일본 국내외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남편과 함께 통역없이 트럼프 전 대통령 내외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편안한 분위기를 주도한 것. 남다른 외국어 실력과 외교관 출신의 매너[33]가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일본 국민들인 황후의 생기넘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반기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적응장애다 우울증이다 하면서 두문불출하고 요양만 하던 사람이, 황후가 돼서 본인이 활약할 무대가 생기자마자 결혼 전 및 신혼 초기의 밝은 모습으로 부활했으니… 기사 댓글도 황후의 밝은 모습을 기뻐하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하고싶었던 외교에 힘써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재능 넘치는 황후를 그동안 억누르기 위한 온갖 비방중상의 허위소문을 언론들에 흘려서 황후를 꾀병쟁이로 몰고가는 데 크게 기여한 궁내청 등의 잘못이 크다'는 내용도 상당히 많다.

그리고 키코 비와는 다르게 친정에 대한 논란이 거의 없다. 키코 비의 친정 식구들은 그동안 숨겨왔던 여러가지 논란들이 하나 둘씩 생기고 있다. 반면 마사코 황후의 친정식구들은 논란이 거의 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편. 과거 고위 외교관으로 불과 최근까지 국제기관에서 활동했었던 친정아버지 히사시는 상당한 공격을 받았으나 그 공격 내용들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대놓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해당 기사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정도라서 금방 비난을 접어야만 했다.

4. 창작물

  • 김진명 작가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 : 이 소설의 메인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과거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비밀을 폭로하는 일환으로 마사코 황태자비를 납치하여 일본의 산중에 구금한다.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인 목사 하야시[스포일러]와, 을미사변 당시의 시위대 병사의 후손이 합작해서 일으킨 것.
    마사코 황태자비를 인질로 일본 외무성 보관고의 어떤 서류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일본 정부에게 하는데, 일본 정부는 당황하며 거부.[35] 마사코 황태자비의 고교시절 선배[36]인 다나카 형사가 낌새를 알아채고 을미사변 당시의 관계자들의 호적을 조사해서 범인을 특정하고 두 사람을 체포. 체포가 임박하자 대학생인 청년은 마사코 황태자비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야시는 만류한다. "그녀는 선량한 일본인들의 대표야!"
    결국, 돌입한 일본 경찰의 집중사격에 의해 그 청년은 죽고, 하야시는 체포된다. 구출된 황태자비는 도리어 그 청년을 죽인 경찰간부의 뺨을 때렸다. 나중에 나루히토 황태자가 개인적인 연줄로 이 문서를 조사해서 황태자비에게 가르쳐 준다. 한편 다나카 형사는 외무성에 압수수색의 영장을 들고 찾아가나, 이 문서는 이미 문부과학성 대신에게 옮겨지려고 한 상태. 결국 이 문서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되고, 원래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지만, 이 하야시를 처벌할 경우 뒷감당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하야시를 한국으로 추방하는 선에서 끝낸다. 하야시는 도중에 마사코 황태자비가 작별선물로 준 도시락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으로 끝.

[1] 일본은 부부동성제이며, 대개 남편의 성을 따른다.(다만 데릴사위 등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르는 경우도 있다.) 황족은 성씨가 없으므로 황후도 황적에 입적하면서 성씨가 없어진다. 성처럼 쓰이는 미야케(宮家)를 설립하거나 황적이탈을 하지 않는 이상 성을 갖지 아니한다. [2]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소장을 역임한 명성 있는 법조인이자, 외무성 사무차관직을 역임한 외교관이었다. 2018년 사위 나루히토 천황 즉위를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다. 2019년 5월 현재 도쿄에서 아내 유미코, 이혼한 막내딸 세츠코와 함께 거주중. [3] 결혼 전 성명은 오와다 레이코. 여러 국제기구에서 근무했던/하는 이력으로 '국제공무원'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2019년 현재 번역 작가로서 활동이 잦다. 동갑인 미국 변호사 2000년 결혼하여 슬하 2003년생 장남([age(2003-01-01)]세)과 2005년생 차남([age(2005-01-01)]세)을 두고 있다고 한다. [4] 현 대학교수 겸 작가. 1999년 6월 1살 연상의 하버드 대학교 출신 의사인 시부야 겐지와 결혼했으나 2017년 가을 무렵 전격 이혼. 슬하 자녀는 없다고 한다. 여담으로 세쓰코의 전남편은 이혼하고 몇 달 만에 곧바로 모 아나운서와 재혼했는데, 그래서 전남편의 불륜 의혹설이 일본 주간지의 핫이슈가 되기도 했다. [5] 유치원 소련 미국에서 다녔다. 귀국 후 다른 초등학교에 잠깐 다니다가 3학년 때 편입학했다. 가톨릭 미션스쿨인 덴엔초후 후타바학원에서 운영하는 일관제 여학교로, 일본 명문 여학교 고산케로 꼽히는 곳이며 개중에서도 오죠사마 학교로 유명하다. 재벌가 영애인 시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와 역시 명가의 딸인 친정어머니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6] 1979년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에 아버지의 주미일본대사관 공사 부임에 따라 일가족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으로 이사를 가며, 보스턴 시립 벨몬트고등학교 10학년에 전입했다. 1981년 졸업. [7] 1986년 4월에 학사편입, 동년 10월 외무공무원 상급채용 1종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 중퇴하고 외무성에 입성하여 졸업이 아닌 수료로 남은 듯하다. [8] 일본 여성 평균을 생각하면 상당히 큰 키이며, 배우자 나루히토 천황보다도 크다. [9]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10]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주 유엔 일본대사를 역임했으며, 퇴임 후 와세다대학,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하다 국제사법재판소장을 역임했다. [11] 숨마쿰라우데(summa cum laude, 상위 약 5% 이내)의 바로 아래 등급인 마그나쿰라우데(magna cum laude, 상위 5~10% 이내 성적). 한국식으로는 상우등 졸업이다. [12] 3학년에 학사편입학 후 외무고시 합격 후 중퇴 [13]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제외하고는 외교관이 되기 이전, 아버지의 근무지 이동을 따라 현지에 거주하면서 습득한 외국어라고 한다. 1991년 미일 통상회담의 미국대표 전담통역 및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 주최 각국 대사 초청 오찬회의 총리 전담통역을 했을 정도이므로 영어 실력은 사실상 통역사 수준이다. 웹에 돌아다니는 마사코가 영어를 하는 영상은 스피치 영상의 5초 가량뿐인데, 당연하게도 재플리시가 없는 훌륭한 발음을 보여준다. [14] 사실 나루히토 천황이나 장녀 아이코 공주가 평상시에도 외국어 교육을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마사코 황후 본인도 나름대로 계속 다양한 외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15] 대표적으로 스페인,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등등. 다만 실제로는 이 나라들도 비교적 최근인 1980~90년대까지는 가급적 왕족 아니면 귀족과의 결혼을 선호하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 평민 집안과의 결혼에는 그 집안이 아무리 상류층 집안이더라도 부정적이었다. 이 나라들은 2000년대부터 직계 왕족이 자국 평민은 물론 문제 많은 인간이나 외국인과의 결혼도 허용하는 추세이다. 물론 이 '문제 많은' 것도 어느 정도의 암묵적인 선은 있다. 또한 통치 가문에 자식을 시집/장가보낸 평민 집안이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은근히 무시 받으며 따돌림 당하고, 혼인을 한 본인도 출신을 가지고 왕실과 귀족 사회는 물론 언론에 의해서도 무차별적으로 물어뜯기는 건 영국 캐서린 미들턴 스웨덴 다니엘 베스틀링의 사례에서도 나타난, 해당 국가 사회들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외국 출신 배우자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린 왕실 구성원과 결혼하는 것이 아닌 한, 철저히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교육시켜 자국민 수준으로 자국의 언어를 구사하고 문화에 맞춰 행동하도록 하고 있으나, 여전히 작은 실수에도 왕실과 귀족 사회 그리고 언론들이 나서서 물어뜯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2020년대에도 여전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실상 마사코 황후와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버티며 자신을 증명하거나 혹은 이혼하여 이들의 공격 타겟에서 벗어나는 것밖에 없다. 실제로 캐서린 미들턴 다니엘 베스틀링도 "이러다 누구 하나 자살하는 게 아니냐"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자국 상류 사회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당하였으나, 결국 수 년에 걸친 자기 증명으로 이런 공격들을 돌파하고 안정적 지위를 구축했다. 때문에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러한 압박감 때문에 왕실과의 혼인을 기피하는 집안들이 평민들 사이에서 많다. [16] 다만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왕실과 관련한 국민들의 시각 혹은 왕실의 보수적 성격은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의 군주국들도 비슷했었다. 1997년 당시 영국 국왕과 국서였던 엘리자베스 2세 필립 마운트배튼 공도 동년 교통사고로 사고사한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다 이를 비판하는 국민 여론과 당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여왕에게 '왕실에 대한 민심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는 여왕폐하께서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합니다.'라고 설득한 끝에 장례식에 참석했고, 스웨덴 왕실은 국왕이자 아버지인 칼 16세 구스타프가 자신의 큰딸인 빅토리아 잉그리드 알리스 데시리에 공주에게 왕위가 계승되는 것을 반대하며 왕위 계승 규칙을 개정하려는 의회와 대치한 전적이 있다. 그리고 칼 16세 구스타프가 큰딸의 왕위 승계를 반대하고 각종 성추문을 불러일으켰음에도, 스웨덴 국민들은 "국왕의 의견과 사생활에 대해 언론과 국민이 가타부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여론을 보인 바 있다. [17]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이 평민이지, 마사코 황태자비의 배경은 하버드 유학생 출신+손꼽히던 유망주 외교관이었고, 아버지는 외교관 겸 국제 판사에 할아버지는 교장, 외할아버지는 일본 해군 중장을 역임하는 등, 친척들이 거의 다 고소득 전문직이거나 공무원이며, 그 땅값 비싼 도쿄의 부촌인 메구로구의 저택에서 살았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일반적인 관용어구 표현으로 충분히 '귀족'이라 할 만한 상류층 집안이다. 물론 황족에 비하면 평민은 맞다 [18] 여성이 긴 치마 양 끝을 잡고 살짝 들어올린 다음 오른쪽 다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며 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여성의 인사법이다. 유럽 왕실에서는 아직도 널리 사용되는 인사법이다. [19] 사실 이런 설명도 불필요한 게, 별거 아닌 신분이라 욕하면서 "빽"을 사용해 들어갔다고 얘기하는 점에서 이들이 하는 주장은 대놓고 모순된다. [20] 유엔여성차별위원회가 일본 여성차별 보고서에 "여성도 왕위를 잇게 하라"는 내용을 포함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 2018년 기준으로 국제사법재판관인 친정아버지 히사시가 자신의 국제적 영향력을 이용해서 외손녀의 덴노 승계를 위한 뒷공작을 벌였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정도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2019년 생전 퇴위라는 초유의 사태가 성립된 이후에는 대폭적으로 줄어들었고 오히려 많은 일본 국민들이 대놓고 "아이코 공주를 차기 덴노로 올려서,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문제가 많은 후미히토 일가에게 덴노직을 넘기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21] 일본의 역대 덴노들이 대대로 부계 핏줄로 계속 이어져 왔다는 주장. 정작 학술적으로는 그거 헛소리라고 판명난 지 오래다. [22] 마사코 황태자비가 건강문제로 공무를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황실의 훌륭한 재원으로 키워낸 것이, 세간의 평가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이코 공주보다 5살 어린 히사히토 친왕과는 다르게, 아이코 공주는 학창시절 이런 저런 논란이 있었어도 우수한 성적과 부모를 쏙 빼닮은 방정한 행동과 차분한 성품 등이 그대로 보도되면서 아키히토 천황의 양위 발표 이후로는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23] 실제로 아키시노 일가에 대해 일본인들이 깊은 의심을 하게 된 때는, 마코 공주 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할 때부터였다. 입학 과정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에, 황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뿐만 아니라 마코 공주의 재종고모(7촌)이자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인 아키코 공주조차도 이러한 걸 두고 대놓고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사실 아키코 공주는 과거 '황실의 망나니'라고 불리던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으로부터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공부할 거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서 누구에게도 '특권으로 학위를 땄다'는 등의 딴지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가르침에 따라 아키코 공주는 본인의 노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토모히토 친왕도 상당히 기뻐했고, 아키코 공주 본인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24] 공주가 황실을 떠나 시집갈 때면 품위 유지비 등을 이유로 1억엔 가량이 지출되며, 그 이후에도 하가한 다음의 거처 경비 등에 상당한 돈이 지속적으로 지출된다. 그러나 왕실 자체적으로 내는 수익이 어마어마하여 굳이 국민들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고 국왕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영국 왕실과는 달리, 일본 왕실은 공식적으로 지출하는 모든 금액을 궁내청 감시를 받아 국회 의결을 받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 드는 모든 비용들은 전액 일본 국민들의 세금. 따라서 일본인들은 이러한 것에 상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하가한 전 여성 황족의 거처에 경비가 깔린 이유는, 과거 쇼와 덴노의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당한 강도 사건과 5녀 시마즈 타카코 유괴당할 뻔했던 사건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시집가서 평민이 된 공주에게도 경호를 해주는 것이다. [25] 이는 일본 헌법에 근거한 상징 덴노제에 가장 걸맞은 황족관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 [26]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의 기준으로 꼽는 특징 중 하나가 '인내심'이며 일본 역사에서도 이미 '인내심' 끝에 일본 천하를 얻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표적이다. 나루히토 일가의 인내심에 비하면, 생각 없이 '덴노와 황후가 되겠다'고 날뛰며 경솔하게 행동했던 후미히토 키코 비에게는, 인내심은 고사하고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머리도 없었다. [27] 궁내청, 주간지, 극우 세력, 후미히토 일가 등등 사방팔방에서 20여년 동안 황태자 일가를 아주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돌려까고 괴롭혀 왔는데도 황태자 부부의 금실이 아직도 각별하고 가족 간의 애착이 강한 것, 궁내청과는 적대시해도 궁내청 내부 직원들과 황태자 일가의 시종들을 잘 대우해 주며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편을 만들어놓았던 것, 마사코 황태자비의 우울증과 아이코 공주의 이지메, 생명의 위기까지 지적받을 정도로 심각한 거식증에도 불구하고 아이코 공주를 일본 내에서도 탑클래스 우등생으로 키워낸 것 등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하고 있었다. [28] 실제로 마사코 황태자비는 우울증과 적응장애로 외부 노출을 피하고 칩거하던 시기에도 아이코 공주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자 등하교를 함께하거나 수업에 참관하는 등 아이코 공주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으며 아이코 공주와 주기적으로 영어로만 말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는 등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왔다. [29] 아이코 공주의 후사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렇다. 현 황실전범에 의하여 여성 황족의 자녀는 황족이 아니기에 덴노 승계 대상이 아닌데, 만일 구황족과 결혼할 경우 구황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거니 아이코 공주의 자녀라도 구황족 남성의 자녀이기도 하므로 덴노 승계권이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조치는 현 황실전범을 대대적으로 개정할 필요없이 아이코 공주와 그 자손들을 무사히 덴노 자리에 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치인 것이다. [30] 성적뿐만 아니라 성격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성장을 의미한다. [31]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아이코 공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때때로는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코 공주를 잘 타일러서, 아이코 공주가 제대로 자라게 하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 반면 후미히토는 히사히토 득남 이후 의기양양해진 것과 히사히토 친왕만 소중히 하고 장녀, 차녀의 대우차별, 무관심으로 인해 친딸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으며 마코가 결혼소동을 벌였을때 후미히토가 가만히 있던 이유도 마코가 입을 열어 자신을 포장했던 신화가 깨질까봐 두려워 했다는 의혹도 있는편이다. [32] 이지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다가가는 등,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몸에 철저하게 밴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등이 많았다. 참고로 황태자 일가에 대한 패싱이 심해서 조그만 흠집도 크게 부각되어 공격받던 시절, 황태자 부부와 아이코 공주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 궁내청조차도 칭찬할 정도였다. [33] 트럼프 대통령은 형을 알코올 의존증으로 잃은 탓에 을 마시지 않기에 만찬회 등에서는 보통 주스 등으로 대체하는데, 저녁 만찬에서 그에게 돌아온 건 진짜 술이었다. 그래서 트럼프가 당황해하자 옆에 있던 마사코 황후가 트럼프에게 몇 마디 했고, 그제서야 트럼프는 잔을 입에 가까이 하되 마시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은 마사코 황후의 조언이 아니었는가'라는 평가를 하였다. [스포일러] 친일파의 후손이 참회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기획 [35] 제2차 세계 대전 전범들의 후손이 다수를 차지함. [36] 픽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