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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 안긴 마사코 |
1963년 12월 9일, 오와다 히사시와 오와다 유미코의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恆)는 도쿄대학 출신의 국제법 학자이자 전직 외교관이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주 유엔일본대사를 지내고 공직을 마무리했고, 이후 와세다대학, 하버드 대학교 등 유수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하다 2003년 국제사법재판소 판사가 되어 2018년까지 재임했고,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국제사법재판소장을 지냈다.
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후 에어 프랑스 사무직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오와다 가문은 도쿄에 위치한 일본 유명 부촌 중 하나인 메구로구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을 정도로, 엄연한 상류층이었다.
히사시와 유미코의 결혼사진 |
다만 이는 외가인 에가시라 가문이 명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의 부모는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는 직업인 교사였다. 할아버지 오와다 다케오(小和田毅夫)는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할머니 역시 교사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는 해군 중장 에가시라 야스타로(江頭安太郞)의 아들로, 미나마타병으로 물의를 일으킨 칫소 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유타카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부임하여 본인의 책임은 없었지만, "서민 주제에 뭘 말하냐?"라거나 "가난한 자가 썩은 생선을 먹고 병든 것"이라며 미나마타병의 피해자들을 모독했다.
2살 무렵의 마사코. |
마사코가 2살 때 아버지가 주 소련일본대사관으로 발령이 나서, 마사코는 현지에서 유치원을 다니며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아버지가 유엔대표부로 발령나 스위스 제네바에 살던 1966년 7월에는, 쌍둥이 여동생들이 태어났다. 아직 어린 아기였던 마사코에게 한꺼번에 동생이 2명이나 생긴 것. 마사코는 맏 언니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일찌감치 강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고민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5살 때부터는 뉴욕에서 살면서 영어를 배웠다. 히사시와 유미코는 외국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딸들이 일본을 잊지 않게 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고, 집에서는 일본어로 대화했으며, 일본 요리를 먹이고,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의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등등. 그럼에도 마사코는 귀국한 후 문화충격으로 다소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1]
8살 때 귀국한 마사코는 공립 초등학교 2곳을 거쳐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은 생 모르 수녀회(아기 예수의 애덕 교육 수녀회)[2]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미션스쿨로, 마사코의 친정어머니 유미코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유치원, 초등학교)도 이 학교를 다녔다.
마사코는 우수한 성적에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수예부ㆍ생물부ㆍ 소프트볼 팀 등에서 활약했다. 중3 때는 소프트볼 팀을 조직하여 열심히 연습, 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하는 등 뛰어난 체육 실력과 리더십을 보였다. 또한 이과 과목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둬서, 고1 때 담임교사는 마사코에게 의대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1976년 4월, 덴엔조후 후타바 여학원 중학교에 입학한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 같은 학원의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쌍둥이 여동생 레이코(礼子), 세츠코(節子)와 함께. |
레이코는 UN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세츠코는 번역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이다. 레이코는 2000년에 도쿄대학 법학부와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출신 변호사 이케다 마사히사(池田祐久)와 결혼했고, 세츠코는 1999년에 도쿄대학 출신의 의사 시부야 켄지(渋谷健司)와 결혼했다가 2017년 이혼했다.
1986년 이후로 추정되는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이 마사코. |
2. 하버드 대학교 졸업 및 외교관 시험 합격
여고생 시절의 사진. |
마사코가 고1이던 1979년, 아버지는 다시 주미일본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아, 오와다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사코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시립 벨몬트(Belmont) 고등학교 1학년[3]으로 편입학했다. 고등학교에서도 합창ㆍ 수학ㆍ 소프트볼 등 여러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며, 미국인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명문 대학에 합격했으며, 마사코는 그중에서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마사코는 대학 기숙사에 살며 학업과 여러 활동들을 열심히 하였으며, 국제 무대에서 일할 꿈을 가지고자 그녀는 중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983년 프랑스 그르노블 알프 대학교로 건너가 그곳에서 프랑스학을 공부했고, 이후 독일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외국어도 공부했다. 그리고 1985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사코의 졸업논문의 제목은 <수입 가격 쇼크에 대비한 국제 간 조정>[4]이었는데, 이 논문은 나중에 외무성의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어린 시절의 많은 기간을 외국에서 자라난 마사코는 그 기회를 뒤로 한 채, 일본을 더 잘 알아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귀국했다.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서.[5] |
마사코는 하버드대학 시절 만난 외국 대학 출신 여성으로서 최초로 외교관이 된 무라즈미 미에[6]의 이야기에 자극을 받아, '일본 내에서 국제적인 일을 하면서 여성차별이 없는 영역에서 일하기 위해 외무성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1986년 4월 도쿄대학 법학부 학사편입 후 외무공무원 상급채용 1종시험을 준비, 1986년 10월 단번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무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당시 3명뿐이던 여성 합격자 중 1명이자 부녀(父女) 외교관의 탄생으로 일본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사코는 "외교관을 지망한 이유"에 대해 딱 부러지게 대답하였다.
또한 해당 인터뷰에서 마사코는 "결혼 후에도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싶다", "가정과 일을 양립하고 싶지만, 그게 어렵다면 일을 택하고 싶다"고 밝혔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당시. |
보수적인 황실 입성 이후의 촌스러운 패션과 달리, 이때 마사코의 패션은 잡지 사진이 일대 붐을 일으킬 정도로 세련되었다.
1987년 도쿄대학을 중퇴하고 외무성에 입성한 마사코는 경제국 국제기관2과에 배속되어 근무한다. 1988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올 칼리지로 연수를 떠나 국제관계학을 1년간 공부[8]했다. 동년의 제16차 G7 서밋에 반도체 시장 관련 통역으로 참여하였다.
1990년 6월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는 북미국 북미2과에 배속되어 OECD 담당[9]으로 1년 4개월간 근무하였다. 1991년에는 미일무역회의[10]에 통역으로 참여했다.[11] 동년 1991년 3월 스웨덴 총리 국빈방문 당시 만찬회 통역 담당, 같은달 11일 일본에서 열린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도 통역으로 참여하는 등, 마사코는 외무성에서 촉망받는 외교관이었고 능력도 높이 평가받았다.
마사코는 영어를 비롯하여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7개국어를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외교관 아버지를 둔 덕에 일천한 경력에도 외교관으로서의 행동양식에도 능숙했다. 마사코에 대해 '아버지의 후광을 힘입은 무능한 사람'이라는 악평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고 한다. 즉 만약 아버지가 외교관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마사코는 충분히 훌륭한 외교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다른 외교관 선배들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마사코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3. 나루히토 친왕과의 만남과 결혼
1986년 10월 스페인 엘레나 공주[12]의 영접식에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 오와다 히사시의 영애로서 참석한 마사코는 그 자리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는 쇼와 덴노의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이었다.[13] 나루히토 친왕은 그 자리에서 마사코를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이때부터 나루히토 친왕과의 인연이 여러 번 겹치며 비 후보에 들게 된다.
당시 나루히토의 신붓감을 찾기 위한 루트는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아버지 아키히토의 혼인 당시 비 후보에 오른 이들의 자녀를 추적한다. 둘째는 아키히토의 가쿠슈인 초등과 동창 모임인 욱옥회(郁沃会) 회원의 자녀를 추적한다. 셋째, 나루히토 개인의 교우 관계 내에서, 혹은 친구, 지인 및 친척들의 아는 사람으로부터 바람직한 여성을 찾는 것. 마사코는 이 중 3번째 루트로 후보에 들어가게 되었다.[14] 같은 해 11월에는 토모히토 친왕이 명예총재를 맡고 있던 일영협회(日英協会) 주최 파티에서 나루히토를 대면했고, 12월에는 아카사카 동궁어소에서 주최된 내륜의 다과회(송년모임)에 오와다 일가족이 초대받아 환담을 나눈다.
1987년 4월 상순에는 일영협회 파티에서 나루히토 친왕과 재회하고, 4월 하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궁무관에 의해 여러 명의 비 후보들과 함께 다카마도노미야 저택에 초대받아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와 나루히토 친왕 등과 함께 식사를 함께한다. 동년 10월 24일, 아카사카 동궁어소에서 열린 저녁 다과회에 초대받아 나루히토 친왕과 그의 동창이자 구황족 가문의 아들인 카야 마사노리와 함께 3시간 동안 환담을 나눈다. 그리고 그 해 12월 3일, 마사코의 24번째 생일에 아카사카 동궁어소 사무관을 통하여, 오와다 가에 나루히토 친왕이 보낸 꽃이 전달된다.
나루히토 친왕은 마사코에게 연락을 지속하였고, 그녀에게 여러 번 청혼하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외교관으로서 커리어우먼의 인생을 살고 싶었기에 청혼을 계속해서 거절한다. 게다가 마사코의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가 미나마타병 추문을 일으킨 칫소 사(社)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마사코는 신붓감 후보 목록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에가시라 유타카는 미나마타병 사태가 터진 이후에 칫소 사의 회장이 되었기 때문에 사태 자체와는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 자체가 나빠진 건 사실이다. 그 외에 나루히토 친왕보다 키가 크다는 점, 그녀의 집안이 딸만, 그것도 쌍둥이를 낳은 가정 출신이라는 점도 흠이 되었다.
마사코의 아버지인 오와다 히사시는 나루히토의 청혼을 영광으로 알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마사코를 여러 번 설득하기까지 했다고. 사실 나루히토의 구애가 벌어지던 당시 20세기 후반은 메이지유신 이후 신의 일족으로 군림하던 일본 황실이 패전의 여파로 인해 상징으로 전락한 지 50여년이 채 지나지 않았었고, 현재까지 일본 중장년-노년층들은 극심한 왕당파를 비롯해 황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세대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단념하고 새로운 신붓감을 물색하였으나 결국 마사코를 잊지 못했고, "오와다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일본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결국 나루히토 황태자의 고집에 항복하고, 마사코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15]
1991년 9월 도쿄예술극장에서 열린 나카무라 히로코의 자선 공연에 다카마도노미야 친왕가로부터 어머니 유미코와 마사코가 함께 초대를 받고, 이듬해 1992년 8월에는 황태자가 되어 있던 나루히토와 야나기야 켄스케[16]의 집에서 약 5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야나기야와 황태자의 설득이 이어지고, 마사코는 11월에는 고민의 와중 컨디션 불량으로 외무성에 10일간 휴직계를 내는 등 고민이 이어진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몇 번이나 더 청혼하였고, 1992년 12월 12일 결국 마사코는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약 7년간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청혼하고를 끈질기게 반복하고, 주변의 압력까지 이용하여 결국 마사코의 의지를 꺾어누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프로포즈할 때 했던 말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였다고. 이 말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유행을 불러왔고, 1990년대 일본 남자들이 프로포즈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되었고, 심지어 요즘도 쓰는 사람이 있다!![17]
1993년 1월 19일 황실회의의 끝에 일본 황실이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고, 동년 4월 12일 약혼식인 노사이(納采) 의식을 거쳐 6월 9일 황태자 나루히토와 오와다 마사코의 결혼식이 거행된다.
결혼식 기자회견 당시 모습. |
결혼을 앞두고 있을 무렵,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를 입은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와 함께. |
결혼식 날 아침, 정든 친정을 떠나는 마사코. 친정에서 기르던 애견 쇼콜라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 |
결혼식에서. 보시다시피 마사코 황태자비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더 크다.[19]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의 웨딩드레스는 목 부분이 장미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신부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게 하려는 디자인이라고 한다. 도쿄여자대학 출신의 디자이너 모리 하나에(森英恵)가 디자인했다. |
결혼식 날의 마사코 황태자비. |
[1]
부모의 노력이 있었지만 사실상 교포 내지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2]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
[3]
미국 학제의 10학년
[4]
<External Adjustment to Import Price Shocks : Oil in Japanese Trade>. 당시 졸업논문 지도교수가
제프리 삭스였다.
[5]
이때는 살을 빼기 전으로,
외무고시를 합격한 뒤 살을 빼면서 본격적으로 미모가 드러났다.
[6]
외교관 무라즈미 야스시의 딸이다.
[7]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러한 일본 내에서의 남녀차별에 따른 피해를 제일 심하게 받았다.
[8]
이때는 이미 "오와다 마사코가
나루히토 친왕의 유력한 신붓감 후보라더라"라는 소문이 퍼져 있던 상태라, 일본 기자들이 취재하러
옥스퍼드 대학교로 쳐들어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 마사코는 정중하게 "나루히토 친왕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히며 기자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9]
이때 아버지 히사시는 주
OECD 대사였다.
[10]
당시 반도체를 두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그 결과가
미일 반도체 협정.
[11]
이때 마사코가 상당히 활약하여서, 당시 일본측 고위 담당자가 마사코에 대해 여러가지로 물어보는 장면이 방송되기까지 했다.
[12]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장녀,
펠리페 6세의 큰누나.
[13]
만 31세가 되던 1991년
2월 2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4]
참고로 자유민주당
호리우치 노리코 의원이 아버지가
아키히토의 동기생이라 2번째 루트로 신붓감 후보에 들어있었다.
[15]
황실의 끈질긴 청혼에 못 이겨 시집와서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점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비슷하다. 반대로 아랫동서
키코 비는 스스로 원해서 황실로 시집왔다고 하나, 그녀 역시 시집살이를 피할 수 없었다.
[16]
전 외무성 사무차관
[17]
언뜻 듣기엔 로맨틱한 말로 보이지만, 실제론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궁내청을 향한 나루히토 황태자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18]
이 부분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19]
실제로 現
일본 황실에서는
후미히토 친왕 다음으로 키가 크다.